Cosmic Heavenly Demon 3077 RAW novel - Chapter (211)
우주천마 3077-212화(212/349)
32. 창귀타호 Possessed Tiger (8)
32. 창귀타호 Possessed Tiger (8) – 가주의 유훈
팽호혁과 팽상원. 두 부자의 사이는 원래부터 건조한 편이었다.
세가의 일은 대부분 내팽개친 채 무공 수련에만 열심인 팽호혁. 그리고 무공보다는 세가의 경영에 더 큰 관심을 쏟는 팽상원.
부자간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라지만 피차 사교적이지도 않은 성격이기에 사적인 만남이라고 해 봐야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면 많은 수준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팽호혁은 제때 알아채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아들이 변했다는 것을.
굳이 비유하자면, 순수한 물 한 병에 작은 잉크 하나가 떨어진 듯한 느낌일까.
정확히 콕 찝어서 어떤 부분이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팽상원의 언행이 평소와 다르게 변한 것은 아니었고, 갑자기 없던 버릇이 생기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주변인들에게 물어봐도 딱히 아들의 행동이 변하거나 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건 오직 팽호혁 뿐이었다.
그래서 팽호혁은 팽상원을 불러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아무리 무공 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팽호혁이라지만, 자식에게마저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팽상원은 요새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느냐는 팽호혁의 물음에 되려 무슨 말이냐는 듯한 반응을 돌려주었다.
“소자는 세가의 번영을 위해 더욱 힘써야겠다고 다짐한 것 외에는 딱히 마음가짐을 달리한 것이 없습니다만······?”
팽상원이 달리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팽호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팽상원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팽호혁은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거둘 수 없었다. 그는 나름 감이 좋은 편이라 자부하는 편이었고, 어쩐지 아들을 볼 때마다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다.
팽호혁은 더 이상 팽상원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잊을 만하면 예의 불길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그저 자신의 감이 잘못 짚었나보다 하고 흘려넘기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팽호혁은 알지 못했다. 저 깊은 어둠 속으로부터 뻗어 나온 끔찍한 악의가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하북팽가의 중추를 좀먹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팽호혁은 제 자신 또한 어딘가 변해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문득,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물들이고 있는 것 같다.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제 머리를 감싸며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지난달에 정밀검진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더군. 그리고 그때부터 이 기이한 느낌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는지 물어봤던 의사는 작년에 QIOS와 내공 드라이브 업그레이드 수술을 한 후유증으로 돌발적인 착란을 겪고 있는 거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착란 따위가 아니었다.
– ······보름 전 흑호대가 연수를 떠났다. 지난주에는 집의 호위와 고용인들이 예고 없이 교체되었지. 예정되어있던 교체라고는 하지만 이건 무언가 이상해. 이제 내 주변은 모르는 이들뿐이다.
그리 말하는 팽호혁의 홀로그램은 혼란과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제 양 손을 내려다봤다.
– 호위를 물리고 혼자 잠을 청해도 항상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게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치의는 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대하더군.
그의 건강을 관리하는 주치의는 일시적인 편집증이 도졌을 뿐이라며 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팽호혁은 그 안정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 누군가 나를 구속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해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으니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지금까지는 그나마 멀쩡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던 팽호혁의 홀로그램은 어느 순간부터 두서없이 횡설수설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 정밀검진을 받고 온 뒤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이 상황을 자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간혹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예사고, 그의 의지와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될 때도 있었으며, 갑작스레 참을 수 분노가 치솟아오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게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환청이었다.
– ······사흘 전부터 목소리가 들린다. 내 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하게 속삭이는 그것은 내가 살아오며 범한 죄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군.
팽호혁의 홀로그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나는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죄악들을 끝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 나는 이미 늦었어.
– 머잖아 나는 내가 변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이 목소리의 꼭두각시가 되겠지.
그게 내가 이 메시지를 남기는 이유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또렷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말했다.
조금 전 스스로의 변화와 미지의 공포에 대해 두려움을 내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다시금 하북팽가의 가주에 걸맞는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원래 유언장을 준비하지 않았을 때 짧게 유언을 남기기 위한 비상용 기능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 어찌 보면 이것이 나로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유언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말을 고른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입을 열었다.
–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나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유언이 작성된 오늘, 3067년 8월 1일. 이후로 행하는 일들은 나 팽호혁의 의지가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내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 사소한 바램이지만, 내 목숨을 끊어준 것이 부디 하북팽가의 무인이기를 바란다. 하북팽가의 허물을 타인의 손을 빌려 수습한다면 가주로서 부끄럽지 않겠는가.
– 만일 내게 안식을 가져다 준 것이 하북팽가의 무인이라면, 그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한때 가주였던 자에게 칼을 겨누었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고 싶다. 그대의 행동은 옳은 일이며, 나 팽호혁은 그대의 결단에 감사한다. 하북팽가는 그대에게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 만일 외인(外人)이 내 목숨을 거두었다면, 부디 부탁하건대 하북팽가에 이 메시지를 전해주길 바란다. 나 팽호혁의 이름을 걸고 선언하건대, 하북팽가는 그대가 나의 목숨을 거둔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하북팽가는 이 부족한 무부에게 평온한 안식을 가져다 줌은 물론 본인의 염치없는 부탁까지 들어준 은인께 그에 걸맞은 감사와 보상을 약속해 주길 바란다.
– ······부디 안식에 들기 전까지 나 팽호혁의 이름으로 하북팽가의 이름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기를.
앞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되었던 것일까. 잠시 동안 침울한 표정을 지은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이제부터는 하북팽가에 대한 전언을 남기겠다.
–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무언가 끔찍한 이들이 하북팽가를 노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세가······아니, 다른 문파들에도 그 마수를 뻗쳤을지 모르지.
– 나름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이처럼 기괴하고 음습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음모를 꾸미는 이들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어쩌면 혈교의 종자들이 꾸미는 짓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라고 단정 지을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으니 속단은 금물이다.
– 이 메시지를 읽고 있을 하북팽가의 장로들은 즉시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고 대대적인 내부조사에 착수하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중에서도 알 수 없는 적의 음모에 당했을 수도 있다.
– 그대들의 가주인 나조차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 이 일을 결코 작은 일로 치부하지 말고 세가의 전력을 다하여 위기에 대처해나가길 바란다.
– 단순한 직감일 뿐이지만 이제부터는 험난한 위기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대 하북팽가의 영광이 내 대에서 끝나는 일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 그리고 마지막으로······.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차마 제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렵다는 듯, 한참을 우물거리던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내 아들, 팽상원 소가주를 믿지 마라.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이 일은 아마도 그 아이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으니.
간신히 그 말을 내뱉은 팽호혁의 홀로그램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홀로그램이 사라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
지독한 침묵이 홀 안에 내려앉았다.
세가의 가주와 소가주가 복수행에 연루되어 연이어 살해당한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거대한 음모를 암시하는 가주의 유언이 만방에 공개되었다. 팽가의 무인들은 도저히 사건의 전개를 따라갈 수 없었다.
팽호혁이 유언을 작성한 것은 자그마치 십이 년 전. 그렇다면 지금까지 십이 년 동안 그들이 아는 팽호혁은 제 자아를 잃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였다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충격적인 것은,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소리 없는 충격이 팽가의 무인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때, 홀 안을 가득 울리는 노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갈-!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장대한 체구를 지닌 채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한 명이 비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처음 세령 일행이 홀에 들어섰을 때 팽호혁 부자의 뒤에 서 있던, 하북팽가의 수석장로인 루이 팽이었다.
팽호혁의 시신 앞으로 다가간 그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팽가의 수석장로였으며, 동시에 팽호혁의 스승이었다.
“······.”
그는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팽호혁의 눈을 감겼다. 주름진 노인의 눈가가 아주 조금 젖어들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노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루이 팽은 대 하북팽가의 수석장로이자 가주 대리로서, 가주의 유훈을 받들어 지금부터 모든 세가의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모든 팽가의 무인들은 지금 바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대기하라!”
“수석장로, 그게 무슨 말이시오!”
뒤늦게 비무대 위에 올라선 다른 장로가 루이의 말에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도 없는데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작정이시오? 세가의 무인들은 더없이 혼란해하고 있소. 아직 제대로 된 진위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보다 자세히 확인한 뒤에 일을 진행하여야······.”
하지만 장로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루이의 손에 들린 도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로의 목에 도를 겨눈 루이는 호랑이 같은 금안을 형형히 빛내며 그를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가주가 죽었소. 그리고 그의 유훈이 모든 것을 밝혔지. 이 이상의 진위 확인이 필요하시오?”
아니면, 그대 또한 가주를 욕보인 자들과 한패인가? 루이는 은은한 살기를 담은 목소리로 장로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 딴지를 거면 당장에라도 목을 날릴 정도로 살벌한 노장의 눈. 장로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오. 그럴 리 있겠소. 다만······.”
“그 입 다무시오.”
장로의 입이 꾹 닫혔다. 형형한 루이의 눈이 이번에는 목진을 향했다.
“참룡검제 대협. 잠시 동행을 부탁드리오.”
“······너희 가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느냐?”
아니. 그 반대요. 루이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 하북팽가는 대협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입장이오. 덧붙여 생사결의 뒷마무리도 필요하지.”
허어. 목진이 나직이 감탄은 터트렸다.
아무리 팽호혁의 유언이 있다고는 해도, 그를 죽인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언뜻 보아하니 보통의 가신 관계가 아니라 나름의 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저리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노인의 심공(心功)이 깊다는 의미였다.
목진이 물었다.
“그의 말을 믿느냐?”
루이가 씁쓸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가주의 유훈을 믿지 못하면 무슨 말을 믿어야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