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ic Heavenly Demon 3077 RAW novel - Chapter (214)
우주천마 3077-215화(215/349)
33. 대적준동 Omen of Blood Cult (3)
33. 대적준동 Omen of Blood Cult (3) – 결자해지
수십 세기도 전부터 오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황보세가는 그 역사와 성세에 비해 비교적 그 존재감이 덜한 편이다.
남쪽 우주에서 다섯 개 성계들을 거느리며 별다른 대항마도 없이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는 그들이 다른 세가들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 황보세가? 대단한 무림세가지. 어떤 점에서 대단하냐고? 어······음······어······아무튼 대단하다니까?
그들만의 확고한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독과 암기라는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던 사천당가.
뛰어난 진법과 전략으로 집단전에 한해 무림 최고를 다투는 제갈세가.
가장 많은 무인들을 보유한데다 개방적이고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 하북팽가.
거기에 정파 진영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검수들을 꾸준히 배출해내며 제갈세가와 함께 오대세가를 이끄는 쌍두마차로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남궁세가까지.
각자만의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세가들과 달리 황보세가는 이렇다 할만한 주목을 끌어올릴 요소가 부족했다.
권각술의 명가라는 타이틀을 달고는 있으나 그것 하나만 우려먹은 지도 벌써 이천여 년. 사골을 끓이다 못해 뼈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끓여댔으니 무림인들은 물론 휘하의 무인들도 자조적으로 권각술의 명가라는 소리를 하고 다닐 정도였다.
물론, 황보세가의 무공이 여전히 강하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오대세가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보수적인 성향 탓에 십수년이나 늦게 내공 드라이브를 도입했는데도 여전히 오대세가의 일좌로서 당당히 군림하고 있지 않겠는가.
황보세가는 다섯 개 세가들 중 가장 무가(武家)의 기본에 충실한 곳이었다.
세월을 거듭할수록 남궁세가는 소수의 뛰어난 고수를 육성하는 데 특화되어 갔고, 하북팽가는 반대로 세가의 문을 개방하며 일반 무인들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노선을 취했다.
하지만 황보세가는 달랐다.
그들은 세월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며 기존의 방식대로 정직하게 무인들을 육성했다.
그런 우직한 방향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 어떤 세가보다도 두터운 중견고수 층.
비록 이름난 고수를 많이 배출하지는 못할지언정, 우주무림 어디서도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법한 무인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게 된 것이다.
지극히 담백하고 정직하기에 자신들만의 색은 부족하지만, 그 실속만큼은 어느 세가보다도 확실한 무림세가.
혹은 소리 없이 강한 무림세가.
황보세가를 표현하기에 그보다 적절한 평은 없으리라.
‘허나 머잖아 그 이름에 더러움이 묻겠구나.’
황보세가의 태상가주, 철군자(鐵君子) 황보륭이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속으로 탄식했다.
분명,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하긴 했었다. 살기 위한 일이었다곤 하나 형제나 다름없는 맹우를 저버린 죄업이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 대에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인가.’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죄에 대한 대가는 마땅히 그 죄를 저지른 이가 짊어져야 하는 법이다.
황보륭은 사천당가의 생존자가 복수행의 대상으로 황보세가 전체가 아닌 자신 하나를 지목한 것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들로 시선을 돌렸다.
– 하북팽가는 여전히 침묵 중입니까?
– 그렇소. 이쪽에서 연락을 넣어봐도 아무런 답이 없구려.
한쪽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중년의 미부(美婦), 벽검성(璧劍聖) 남궁수련.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형형한 눈빛을 내비치는 노인, 승룡제(乘龍帝) 제갈현.
자신을 포함해 각 세가를 이끌었던, 혹은 이끌고 있는 세 사람. 사천당문의 생존자인 당세령에게 복수행의 대상으로 지목받은 이들이었다.
본래 이 자리에는 복모유호 팽상원도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당세령과의 생사결로 고혼이 된 그가 자리할 수는 없는 법. 급한 대로 현 하북팽가의 가주 대리를 맡고 있는 수석장로 루이 팽의 참석을 요구했건만, 루이는 ‘하북팽가는 십 년 동안 봉문을 할 것입니다.’라는 짤막한 전언 한마디만 보낸 채 이쪽의 모든 통신에 답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 그 루이가 저리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지. 무언가 팽가 내부에서 작지 않은 사달이 난 것이 분명하오.
제갈현이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수석장로 루이 팽이라면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서 그 교류가 짧지 않은 사내다. 그런 그가 모든 대화의 창구를 닫은 채 팽가의 봉문을 선언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 작지 않은 사달이라는 것이 무언을 가리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 과연 강호넷에 떠도는 대로 팽가의 중추에 혈교의 끄나풀들이 있었을까요?
남궁수련이 황보륭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하북팽가에 대한 정보가 가장 정확한 것은 황보륭이었다. 그의 아들 중 하나가 하북팽가의 장로들 중 하나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보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혈교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팽가 내부에 외부로부터 기원한 분란이 일어났음은 확실해 보이는 듯 하더이다.”
이제 완전히 팽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팽가 내부의 기밀들을 발설하는 일 따위는 없지만, 두루뭉술한 뉘앙스로 경고 정도는 보낼 수 있는 상황. 그의 아들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는 대신 황보륭에게 세가 내부인원들을 확실히 검사 하라는 경고를 보내왔었다.
“우리 황보세가도 혹시 몰라 내부 단속을 지시했다오. 그대들도 이 늙은이의 말을 귀담아들어 내부 단속을 하는 것이 좋으실 것이외다.”
우리들의 세가 내부에도 정체불명의 세력이 뿌리를 뻗었을지 모른다.
언뜻 지나가는 듯이 권유하는 것 같은 말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그 안에 담긴 속뜻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이들은 아니다.
제갈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고견을 경청하지. 허나 우리 제갈세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군.
– 마찬가지에요. 남궁세가의 일은 모두 통제 하에 있으니까요.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 하면 팽가의 봉문에 대한 대책은 벽검성께서 이후 일선의 가주들과 논하시는 것으로 하고, 이제 본제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하오이까?”
– 그리하지요.
황보륭의 말에 남궁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현역으로 가주 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녀가 자신과는 달리 은퇴하여 일선에서 물러난 황보륭과 제갈현과 회동한 이유는 당세령의 등장 때문이었으니까.
이 모임은 당세령의 복수행에 대해 각 세가의 입장을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연계를 꾀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 본래는 팽가의 어린 호랑이 또한 이 자리에 함께하여 의견을 조율할 예정이었으나, 그들이 먼저 공식 성명을 내어 복수행을 긍정한 덕에 우리의 선택지가 줄어들었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필 악재가 연달아 터져 그 외엔 수습할 방법이 없지 아니하였소이까.”
비공식 습격에 오호대의 손실까지 더해진데다 강호넷의 여론도 좋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보륭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궁수련이 그런 황보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 우리의 선택지가 사라진 것은 아쉽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이해의 여지는 남겨주어야겠지요.
오대세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뭉친 지 벌써 수십여 세기. 서로간의 사소한 실수나 흠결 따위를 담아두어 봐야 분열의 씨앗이 될 뿐이다.
이번의 실수는 훗날 벌충하게 한다면 상관없을 터. 지금은 하북팽가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당장의 대책을 생각하는 쪽이 유익했다.
– 하면 그녀의 복수행 지목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합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소.
“동의하외다.”
– 동의해요.
제갈현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은 정해졌으니 이제 세부적인 방법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 잠시 말을 고르던 남궁수련이 먼저 운을 떼었다.
– 그런데 팽가 소가주와의 대결을 보니 사천당가의 후예의 무공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습니다만. 제갈의 태상가주께서는 그녀의 무공이 A급 정도일 거라고 예상하지 않으셨던가요?
– ······그렇지.
남궁수련의 말에 제갈현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본노의 예측이 틀렸었소. 아무리 참룡검제의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하나, 설마 채 이 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그 정도까지 일취월장할 줄이야.
“그녀가 사용하는 무공 또한 비슷한 데이터가 전혀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무공이었소이다. 분석을 맡은 아이들 말로는 알려지지 않은 유물급 무공이거나, 혹은 아예 새로 창안된 무공일 가능성이 높다 하였지.”
황보륭의 말을 들은 남궁수련이 가볍게 아미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 ······참룡검제로군요.
“아마 그럴 것이오.”
– 그가 관여할 가능성도 있을까요?
남궁수련은 세령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결국 그녀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테니까.
하지만 참룡검제는 달랐다.
병으로 약화된 지금이 아니라 만전의 상태였어도 승산이 없을 압도적인 격차의 절대고수. 혹여나 그가 참전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제갈현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목진의 전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 그럴 만한 인물은 아니오. 참룡검제의 출신 자체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의 개인적인 성향 자체는 구파일방의 늙은이들처럼 강호의 법도를 중요시하는 편이지.
– 하지만 팽가의 가주는 물론 오호대조차 그의 손에 죽어나가지 않았습니까? 실질적으로 팽가에 타격을 준 것은 당가의 후예가 아니라 참룡검제였습니다.
– 그것은 그들이 먼저 선을 넘었기 때문이지 않소. 우리가 생사결을 받아들인 이상 그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테지.
– 음······.
제갈현의 말에 남궁수련이 작게 침음을 삼켰다. 제갈현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본 황보륭이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남궁가주가 병에 걸리고 나서 유독 제 목숨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대부분의 질병을 극복한 현대 사회에서 남궁세가의 가주씩이나 되는 그녀가 병을 달고 산다는 것은, 그 병이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나 난치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나이에 검성의 칭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무재를 가지고 태어난 데 대한 하늘의 질투일까. 치료법을 찾을 수 없는 병은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서서히 그녀를 좀먹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그녀의 얼굴 한쪽을 가리고 있는 가면만 해도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물건. 병마로 인해 외모마저 흉측하게 변이했다고 하더니 그것을 가리기 위한 것인 듯 보였다.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나, 마음의 공부 또한 얕지 않은 무인이 어찌 저런 꼴로 전락하였는지······.’
수십여 년 전만 해도 여신과 같이 고결한 언행으로 벽검성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모습을 보였던 남궁수련이건만, 지금의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불길한 마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벽검성의 명성이 남아있긴 하나, 그녀가 계속 가주로 남아있는 한 남궁세가의 미래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 황보륭은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궁수련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보았음인가. 괜히 그의 동정하는 듯한 태도가 남궁수련의 심기를 건들기 전에 제갈현이 먼저 황보륭을 향해 말을 걸었다.
– 실례일지도 모르는 질문이나, 황보륭 태상가주께선 괜찮으시겠소? 이 늙은이야 나름의 수가 남아있어 당가의 후예를 상대로도 어찌어찌 승부를 걸어볼 만은 하오만.
그의 말대로 적잖이 실례인 질문이기는 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황보륭의 무공이 가장 약한 축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황보륭은 딱히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제갈현이 조롱의 의도에서 그리 말한 것도 아닐뿐더러,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마당에 그런 것에 자존심을 세울 생각도 없기 때문이었다.
황보륭은 그와 같은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선에서 물러난 이 늙은이가 더이상 짊어진 것도 없는데, 두려울 것이 무에 있겠소. 다만 주어진 역할에 맞게 최선을 다해 생사결에 임할 뿐이지.”
– 허어.
스스로의 죽음마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듯 담담한 황보륭의 말에 제갈현이 나직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의 말 한 마디로 짐작했기 때문이리라.
각자 세가를 이끌며 때로는 협력하기도, 때로는 경쟁하기도 한 상대.
친구라고 부르기엔 다소 먼 사이였지만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손발을 맞춰온 파트너였다.
– ······.
잠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제갈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 대신, 그는 오랜 파트너를 향해 조용히 행운을 빌어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