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ic Heavenly Demon 3077 RAW novel - Chapter (316)
우주천마 3077 우주천마-317화(317/349)
47. 자문의심 Self Questioning (3)
47. 자문의심 Self Questioning (3) – 보내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
제갈현의 얼굴에는 조금의 사감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의 죽음을 논하는 것치고는 소름끼치게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런 미친 늙은이가······.”
한 박자 늦게 제갈현의 말뜻을 이해한 세령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자기 자신을 버림패로 내놓아버릴 줄이야.
그러나 목진은 질린 표정을 짓는 그녀와는 달리 차분한 눈으로 제갈현의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그에겐 이미 무던히도 익숙한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교를 이끌고 무림에 마도(魔道)의 천하를 열 때, 그의 앞을 막아서던 무수한 문파의 주인들 중 저와 같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무림에 마도천하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앞을 막아서는 무림의 문파들을 모조리 멸문시키고 피비린내나는 길을 걷는다는 뜻이 아니다.
멸(滅)이 아닌 복(伏).
설령 천마신교에 반기를 든 무리라 해도 압도적인 힘으로 굴복시키면 굴복시켰지, 어지간해선 사문을 송두리째 불사르진 않는다. 마도의 길을 걸을 뿐 그들 또한 무인. 무공에 일가를 이룬 문파의 명맥을 끊는 것에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릇 마도의 천하란 불타버린 폐허가 아니라 그들에게 무릎 꿇은 무림 위에 세우는 것이지 않은가.
물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들에게 칼을 겨눈 이들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다.
멸문을 피하기 위해 내놓는 최소한의 대가.
그것이 바로 우두머리의 핏값이었다.
문파의 주인이나 이름 높은 고수가 순순히 제 목숨을 내놓는 대가로 사문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널리 알려진 무림의 불문율 중 하나이다. 온 무림과 함께 사문의 운명을 걸고 싸워 패했으니, 목숨 하나를 내놓는 대가로 그 명맥을 보전할 수 있다면 썩 싸게 먹히는 장사이지 않은가.
물론,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이보다는 행하지 못하는 이가 더 많은 게 현실이었지만 말이다.
‘······과연 명문(名門)의 주인답구나. 천하를 다투는 명문세가의 주인 자리에 오래 머물다 보면 필경 쓸데없는 아집이 생기기 마련이거늘.’
냉정히 따져본다면 아무리 일신의 무력이 생사지경에 이른 목진을 적대한다 한들 제갈세가의 미래가 경각에 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무리 고강한 절대고수라 한들, 우주 전역에 발을 뻗고 있으며 그 구성원만 백만에 달하는 오대세가의 일좌를 단신으로 멸문에 이르게 만든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제갈현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철저히 손해득실을 따져 제 목숨을 패로 내밀었다.
무림의 법도를 따라 은원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 양패구상(兩敗俱傷)의 형국이 되는 만큼 얻을 게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검마를 제물로 삼아 은원의 연쇄를 끊어내려는 제갈현의 판단은 분명 제갈세가에 있어 최선의 수였다.
– 앞서 말했듯, 그대라면 본인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겠지. 본인의 뜻을 함께하지 않고 은원의 연쇄를 이어가는 것은 온전히 그대의 뜻에 달린 것이나, 본인은 그저 더 많은 피가 흐르기를 두려워하는 마음뿐이오.
단지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이 제갈세가의 피이기에 두려워하는 걸까. 세령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물론 그 답이 무엇인지는 굳이 더 생각해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제갈현은 마지막까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목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지금 답을 주실 필요는 없소. 훗날 검으로 들을 터이니.
현명한 답을 기대하겠소. 그렇게 덧붙인 제갈현의 홀로그램이 서서히 사라졌다.
잠시의 정적. 사라진 제갈현의 홀로그램이 있던 자리를 노려보던 세령의 눈동자가 이내 목진을 향해 돌아갔다.
“······아저씨, 설마 저 인간 말대로 할 건 아니죠?”
현실적으로는 제갈현의 말이 합리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목진이 저 늙은 여우의 말에 놀아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룡제 제갈현의 목숨은 제 손으로 끝장을 내야만 했다.
아무리 목진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세령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목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글쎄. 저 정도로 이야기를 한다면야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강호의 도리이긴 하지.”
목진이 살던 옛 무림의 법도를 따라 계산하자면, 검마 정도 되는 고수와 태상가주인 제갈현의 목숨이라면 지금까지의 은원을 충분히 갈음하고도 남는다. 사실상 백룡대의 습격도 목진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이라 보기에는 모자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네······?! 아저씨, 그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요!”
예상과는 다른 목진의 말에 세령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직 목진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목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씩씩대는 세령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헌데 말이다, 나와 저자의 은원보다 먼저 셈해야 할 것이 있지 않느냐?”
“예?”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두 눈을 깜박이는 세령을 향해 목진이 가볍게 턱짓했다.
“그자에게 맺힌 은원은 나보다 네가 먼저가 아니더냐.”
“아.”
세령은 그제야 목진의 말뜻을 이해했다. 제갈현이 제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자 한다면, 애초에 그 판돈을 걸 수 없도록 빼앗아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제갈현이 제 목숨을 내어놓기 전에, 복수행을 완수해 그의 목숨을 취하라. 목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자신 없다는 건 아니겠지?”
목진이 약간의 도발을 담아 물었다. 이미 세령에게 나올 답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세령의 입에서 직접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지난날 황보륭과의 생사결을 마친 이후 며칠간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친구인 백사희와의 대화 이후로 흔들리던 의지를 제법 다잡긴 했으나, 그렇다고 염려를 완전히 거둘 수는 없다. 목진은 세령의 입으로 재차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령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결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 늙은이의 숨통을 끊어버릴게요.”
역시. 언제 마음이 흔들렸냐는 듯 단단하게 다져진 세령의 의지를 본 목진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기세는 마음에 드는구나.”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나마 조금 마음을 놓게 된 목진이 세령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코코를 돌아봤다.
아무리 당사자인 검마가 원했던 일이라고는 하나,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판돈으로 걸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작동을 멈춘 단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은 말이 더 있느냐?”
아뇨. 코코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녀의 입에서 미련을 덜어내듯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나눌 대화는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세상은 무림이 아니니까. 코코는 목진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목진은 코코와 검마의 시신을 실은 운반용 드론이 저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와는 달리 묘한 감상이 어린 얼굴. 그 얼굴을 흘긋흘긋 바라보던 세령은 그들의 시야에서 드론이 사라지자 목진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바라봐요?”
“······내 표정이 어떻길래?”
“뭔가 부러워하는 거 같은데요.”
부러워한다. 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듯 목진이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비무에서 이긴 사람이 왜 진 사람을 부러워해요? 무인으로서 폼나는 최후를 맞이한게 부럽다거나 뭐 그런 건가.”
세령으로서는 딱히 공감하기 힘든 감성이긴 했지만, 평소 목진이 묘하게 마초적이거나 무협지스러운 감성에 반응하곤 하는 목진이라면 충분히 그런 감상을 품을 만도 했다.
그러나 목진은 세령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목진이 말을 이었다.
“자기가 가는 길의 끝을 보았다는 것이 조금은 부러울 따름이다.”
“길의······끝이요?”
“그래. 본디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스승과 사조들이 오랜 세월 동안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허나 그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남이 닦아준 길이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지.”
하면 그 다음은 어찌해야겠느냐? 불쑥 튀어나온 목진의 물음에 세령이 두 눈을 깜박였다.
“어······보통은 거기까지만 하고 끝내겠지만······. 뭔가 자기가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던가 뭐 그런 대답을 하는 게 맞겠······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별안간 대화의 주제에서 벗어나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하거나 돌발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일종의 가르침을 주려는 신호다. 목진과 함께 붙어 지낸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나름의 요령을 터득한 세령은 그것을 캐치하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다행히 그녀의 대답은 제법 정답에 가까웠는지, 목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없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하면 그때부터는 나 자신이 내가 갈 길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고독하고 힘든 일이지. 목진이 덧붙였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기에 그 말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달리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도 없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기약 없는 발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벽을 만나고, 언제 무너지리라 장담하지 못하는 벽을 무너질 때까지 끊임없이 두드리지. 그리고 그걸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기연을 얻어 벽을 넘어서긴 하나, 대개 벽을 만날 때까지 억겁과 같은 시간이 걸리며 그 벽을 뚫는 데에도 억겁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괜히 용적산이나 존 로갈 같은 절대고수조차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하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겠는가.
하나의 벽을 찾아 넘는 것조차도 그리 어려운 일일진대, 그 벽을 몇 번이고 넘어도 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아득하여 닿을 수 없는,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을 찾아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 모든 무인(武人)의 숙명이리라.
“······나는 아직 내 길의 끝을 보지 못하였다.”
무(武).
무언가 하나에 일생을 바쳐도 그 끝을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거늘, 오만하게도 모든 무의 끝을 보겠노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를 자질과 무수한 업(業), 그리고 커다란 행운이 함께하여 생사경이라는 전대미문의 경지에 닿았음에도 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 길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그 끝을 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을 뿐.
“하지만 저자는 제가 가는 길의 끝을 보았구나.”
검마는 비록 명을 다했으나, 그가 걸어온 길은 분명 그 어떤 길보다도 찬란히 빛나고 있을 터.
하여 목진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검마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검(劍)의 길. 그리고 제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끝에 도달한 검수(劍手).
그 마지막이 머물던 곳을 바라보며, 목진은 처음으로 스스로의 소망을 직접 입으로 내뱉었다.
“나 또한 보고 싶구나.”
무의 끝이.
그리고 그 너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