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ic Heavenly Demon 3077 RAW novel - Chapter (340)
우주천마 3077 우주천마-341화(341/349)
49. 격멸예고 Death Match Count (12)
49. 격멸예고 Death Match Count (12) – 광기의 포효
“······배리어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목표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래······그런가.”
오퍼레이터의 보고에 아놀드 원수는 지친 얼굴로 읊조렸다. 군에서 보급하는 최신형의 각성제와 영양제를 맞아가며 버티고는 있지만, 나흘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바이데급 전함에 대한 공세를 지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조금은 버틸 만 하군.’
혈교에 오염되었음이 분명한 바이데급 섬멸전함은 처음 이틀 동안은 중앙군의 집속포 순차사격을 피해 이리저리 회피기동을 펼쳤었다.
하지만 어중간한 기동력의 기술실증기 전함이 극한의 훈련으로 다져진 중앙군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중앙군의 집요한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놈은 어느 순간부터는 움직임을 멈춘 채 다만 배리어의 출력을 강화하기만 하며 중앙군의 끝없는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버티기만 할 수는 없다.
머잖아 배리어의 내구도 바닥을 보일 터.
그리고 그때가 바로 자신들의 승리였다.
아놀드 원수는 마구 으깨진 시가의 끝을 다시 한번 잘근 깨물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이데급 전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이 대적하고 있는 것은 감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
그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텅 빈 우주 공간에 울려 퍼지는 무언가.
그것은 포효였다.
현실 우주를 살아가는 지성체의 의식 따위로는 감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아득히 높은 차원의 존재가 내지르는 포효.
거대한 파동을 타고 퍼져나가는 포효가 중앙군을, 그리고 사람들의 정신을 두드렸다. 마치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폭풍우와 같이.
“끄-?!”
영혼을 헤집는 것 같은 강렬한 정신파를 한낱 인간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생츄어리 주변의 우주 공간을 뒤흔드는 파동에 닿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건······!”
아놀드 원수는 아찔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에 대한 답을 도출해냈다.
지성체에 대한 정신침식. 바이데급 섬멸전함이 가진 유일한 전략병기.
회피기동을 멈춘 놈은 포기한 게 아니었다.
놈은, 죄마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며칠 밤낯을 지샌 인간들의 정신력이 가장 약해졌을 때를.
물론 배리어를 유지한 채 비축한 에너지만으로 펼치는 정신침식의 위력은 원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력으로 펼치는 정신침식은 모든 지성체의 정신을 지배하거나 완전히 파괴해 버릴 정도인데 반해, 방금 전의 정신침식은 일반인조차 현기증을 느끼거나 잠시 혼절하는 정도의 수준.
그러나 지금은 그 미약한 위력이면 충분했다.
그 한 번의 정신공격 덕분에 초 단위로 치밀하게 퍼부어지던 중앙군 함대의 연계공격에 작은 균열이 생겼으니까.
“으윽······아······?!”
지독한 현기증에 고개를 흔들며 패널을 확인한 관측반 오퍼레이터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목표 웜홀 워프 시도! 워프합니다!”
“무슨······이렇게 빨리?!”
오퍼레이터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놀드 원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웜홀 워프를 위해 축퇴로라는 동력원이 필요한 건 워프 거리에 비례해서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짧은 시간동안 모은 에너지로 장거리 워프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것이 장거리 워프라면 말이다.
‘잠깐, 그렇다면······!’
아놀드 원수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함장을 통해 명령하는 것도 잊은 채 통신반 오퍼레이터에게 소리쳤다.
“전체 지휘채널로 송신! 함대 내 워프 반응에 주의하라고 전해!”
“예, 예?!”
“어서!”
“아, 알겠습니다······!”
아놀드 원수의 재촉에 통신반 오퍼레이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아······64함대 후방에 웜홀 반응 감지······! 목표 출현했습니다!”
“······!”
관측반의 보고를 들은 그는 깨달았다.
놈의 목표는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64함대에게 긴급명령 송신해! 목표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리라고!”
“네, 송신합니다! ······아?!”
아놀드 원수의 명령을 따라 명령을 보내려던 통신반 오퍼레이터가 당혹스런 소리를 질렀다.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눈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요동쳤다.
“뭐해! 당장 보고하게!”
아놀드 원수가 오퍼레이터를 다그쳤다. 함대의 지휘체계를 무시하는 행위였지만 그에겐 그런 사소한 일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의 노호성에 오퍼레이터가 입을 열었다.
“64함대 사령관으로부터 긴급 보고······함대 내 혈교 오염과 A형 침식현상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미······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주변 전함들을 무차별적으로 침식하고 있다는 소리에 아놀드 원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면 작전 회의 중에 아테나로부터 죄마라고 불리는 혈교의 근원이 근접한 대상에 대해 무척 강력한 침식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그 존재만으로 주변의 함대를 집어삼키는 끔찍한 괴물이라니.
“64함대 사령관으로부터 추가 전문입니다! ‘전함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코드 블러드를 요청한다.’라고 전해왔습니다······!”
코드 블러드. 전함의 오염을 통제할 수 없으니 자신들을 오염체로 간주하고 파괴하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광기에 가까운 요청.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것 외의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련한 원수 아놀드의 판단은 신속했다.
“······64함대에 코드 블러드 발령. 전 함대는 64함대를 신속히 격멸하라고 전하게.”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 수백의 함대를 지휘하는 늙고 경험 많은 원수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 함대 사령관들에게 명령한다. 64함대로부터 5유닛 내에 있는 함대는 전 화력을 개방하여 64함대를 격멸하고 목표인 바이데급 섬멸전함의 워프를 저지하도록. 그 외의 함대는 작계14를 기반으로 재편성을 실시한다.”
인류정부의 정예답게 중앙군은 신속하게 생츄어리 사령관 아놀드 원수의 지휘를 따라 대응을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포화가 64함대를 향해 쏟아지고, 배리어를 전개하며 버티던 64함대의 오염체 전함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격추된다.
이대로라면 고작 몇 분 지나지 않아 오염된 함대들을 모두 구축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몇 분의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죄마에게는 말이다.
“목표의 위치로부터 고에너지 응축 현상 감지!”
“장거리 워프 시도인가?!”
“패턴이 다릅니다! 이건······정신파 계통입니다!”
빌어먹을. 관측반 오퍼레이터의 말을 들은 아놀드 원수는 직감했다.
이건 막을 수 없었다.
-!
이면차원으로부터의 포효가 재차 우주공간을 휘흔들었다.
지배하고 침식하는 파동이 아닌, 정신 그 자체를 파괴하는 파동.
아무런 정신적 방호조치 없이 그 파동에 휩쓸린 이들은 그저 본능을 따라 찢어지는 절규를 내질렀다.
– 아아악-!
“끄아아악-!”
통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비명, 그리고 함교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비명.
그러나 그 비명들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대는 정신파에 영혼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으······으······끄으······!”
아놀드 원수는 고통에 물든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너덜너덜해진 정신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지만, 휘하의 함대와 인류를 짊어진 늙은 군인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바닥에서 일어섰다.
“······.”
그는 흔들리는 초점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함교의 오퍼레이터들은 모조리 혼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다른 전함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작전 실패.
끔찍한 죄책감과 허무함이 그의 온몸을 잠식했다.
그런데 그때, 함교 중앙의 패널로 한 줄기의 통신이 날아들었다.
‘이건······.’
후방으로 빼놓은 지원함대의 식별코드. 그중에서도 익숙한 코드다. 아놀드 원수는 힘없는 움직임으로 통신을 수신했다.
중앙의 패널 위에 아테나 일등집행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아놀드 원수?! 무사합니까?
“······아테나 일등집행관.”
아놀드 원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목표는, 죄마는 어떻게 되었소······?”
– ······.
그의 물음에 아테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놀드 원수는 그녀의 대답이 무엇일지 이미 들은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테나가 말했다.
– 죄마는······64함대 소속 전함 열여섯 척과 함께 워프로 사라졌습니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역시. 아놀드 원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면목이 없구려.”
– ······.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도 죄마가 저런 방식으로 수천의 중앙군 함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테나는 굳이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처참한 실패.
그러나 그 실패를 곱씹을 시간 따위는 없다.
아테나는 고개를 숙인 아놀드 원수를 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책임소재는 나중에 판가름하겠습니다.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행동. 그 말을 들은 아놀드 원수가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소.”
– 사령관께서는 일단 당장 전투가 가능한 잔존 함대를 모아주세요. 저는 중추원에 사태를 보고하고 주변에서 징발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해보겠습니다.
“시간제한은?”
– 한 시간 내로 준비해 주세요.
짧다. 그러나 죄마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그것이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아놀드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시오?”
– 네. 방금 막 죄마의 워프를 분석해서 놈의 목적지를 특정했어요.
아테나가 말했다.
“섬서성계의 제갈세가.”
바이데급 전함에 강림한 죄마는 이면차원과 맞닿은 웜홀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초조함. 그리고 두려움.
스스로를 자각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그는 생각했다.
없애야 한다.
그에게 죽음을 내릴 수 있는 중생 따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했다.
답은 간단했다.
제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가진 인간이라도, 그 무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행성과 함께 불태워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여, 그는 그를 막으려 드는 하찮은 중생의 군세 중 열여섯 척의 전함을 취했다.
그에게 죽음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는 분명 두려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존재는 감히 자신에게 미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찮은 중생이라는 껍데기 안에 갖혀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죄마는 확신했다.
이것이라면, 중생들이 만들어낸 강대한 무기라면 분명 그것을 없애버릴 수 있으리라고.
죄마가 의지를 품었다.
기다릴지어다.
네가 내게 죽음을 전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 죽음을 전하리라.
이면차원의 바다에 광기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우주천마 3077 340화
50. 최종무곡 Final Dance (1) – 마지막 가르침
세 번째의 복수행, 벽검성 남궁수련과의 생사결이 끝나고 사흘이 지났다.
“몸 상태는 어떠하냐.”
남궁세가의 의료시설에서 집중치료를 받은 세령은 우주선 조종석에 눕다시피 앉은 채 상처를 입었던 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배에 구멍난 것치고는 뭐, 제법 멀쩡하네요.”
“괜히 건들지 마요. 그러다가 상처가 다시 터지기라도 하면 대책 없으니까.”
세령이 치료받는 동안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많았던 순자가 세령의 손을 찰싹 쳐내며 말했다.
“흐음······.”
목진은 지그시 치뜬 눈으로 상처가 있었던 세령의 복부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자 다소 노골적인 세령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뭐야, 남의 배를 왜 그렇게 봐요. 사람 민망하게.”
평소 탱크톱에 재킷 차림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그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진은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마는, 일단 추궁과혈(推宮過穴)을 받아보는 게 좋겠구나.”
“추궁······과혈?”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뒤적이던 세령이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줘패서 치료한다’라는 이상한 기술이요?”
“······.”
무척 쌈박하기 그지없는 설명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목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마는, 도대체 어디서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영화나 만화에 많이 나오던데요. 깝죽대던 동료를 합법적으로 때리는 명목으로 많이 써먹던데.”
“쯧쯧. 추궁과혈을 누가 그런 장난 같은 이유로 쓸까.”
하여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치들 때문에 강호의 상식이 땅에 떨어졌구나. 목진은 작게 탄식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추궁과혈은 막힌 기혈을 뚫고, 쇠약해진 근골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꼬인 내장을 제자리로 돌리는 활법(活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추궁과혈을 하며 사람을 쓸고 때리는 것은 내공을 상대의 몸 깊숙이 집어넣기 위해서이지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날 때리겠다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좀. 세령이 영 께름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목진이 고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간신히 구멍을 메꾼 뱃가죽을 얻어맞는 데에는 심리적 저항감이 있었다.
하지만 목진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추궁과혈을 위해 상대를 치는 것은 내공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내게 해당이 되는 이야기일 성싶더냐? 무공이 경지에 이르면 구태여 때릴 필요 없이 가볍게 손을 대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럼 좋죠.”
세령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철군자랑 싸우기 전에 해 줬던 진기도인이랑 비슷한 효과라고 보면 되겠죠?”
“더 좋을 게다. 진기도인은 내상을 중점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만, 추궁과혈은 상처의 치료에도 어느 정도 효험이 있으니.”
그렇게 말한 목진이 옆에 서 있는 순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순자야, 상처는 확실히 다 치료된 게 확실하더냐?”
“네. 남궁세가 의료반 말로는 근육과 장기조직들은 다 재생됐대요. 하지만 조직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니까 가능하면 보름 정도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보름이라고?”
목진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 꽤나 곤란하게 되었구나. 당장 사흘 뒤면 제갈세가 태상가주와의 일전이 예정되어 있거늘.”
“후우.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남궁세가에서의 일정을 좀 더 일찍 잡을 걸 그랬네요. 순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세령의 분투로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벽검성 남궁수련과의 생사결이 복수행 중 최고의 난관이라는 데에는 여전히 이견이 없다. 때문에 순자는 승룡제와의 생사결은 일부러 염두에 두지 않고 이번 대결의 일증을 최대한 뒤로 늦췄다.
어차피 벽검성과의 대결에서 패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테니 승룡제와 싸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터.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여력을 남겨두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난관에 전력을 다하자는 순자의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었다.
다만 막상 벽검성과의 생사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승룡제와의 생사결을 앞두고 있으니 아쉽게 되었을 뿐.
세령은 자책할 것 없다는 듯 그런 순자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됐어. 벽검성을 이긴 게 진짜 한 끗 차이였던 걸 생각하면 그때 순자 네가 한 판단이 맞았어. 그리고 여기에서 며칠 정도 더 늘어난다고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을 거고.”
“······그래도요.”
“그리고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혈교 놈들 때문이잖아? 나쁜 건 걔들이니까 걔들을 탓하면 돼.”
하필 움직여도 이럴 때 움직일 게 뭐람. 세령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세령의 복수행에서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시간제한이 걸리게 된 건 혈교의 준동으로 계엄령이 발동될 예정이기 때문이었으니까.
혈교를 열심히 씹어대던 세령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목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그래도 아저씨가 그 죄마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한 방 먹여줬다는 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요.”
“그래. 비록 내 깨달음이 부족해 단번에 그 숨통을 끊지는 못했다마는, 놈이 입은 상처가 제법 깊을 터이니 당분간은 그 악신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니라.”
목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마음의 검으로 죄마를 베었을 때, 광대한 우주 전역에 드리운 그것의 일부를 완전히 멸하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만치 깊은 상처라면 제아무리 사악한 악신이라 한들 어느 정도는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 죄마를 직접 조졌단 말이지. 세령은 무영탑에서 보았던 재수없는 면상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헤. 그쯤 되면 인류정부 쪽에서 아저씨한테 뭐라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듣고 보니 제법 설득력이 있는 소리다. 목진이 그녀의 말에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흠? ······가만 보자, 네 말에도 제법 일리가 있구나.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역도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니 이는 조정이 내게 빚을 진 셈이 아니냐. 나중에 아테나 일등집행관을 만나면 그 얘기나 좀 꺼내 보아야겠다.”
“돈으로 달라고 해요, 돈. 혈교 놈들이 설치는 걸 잠깐이나마 막아주는 셈인데 제법 두둑하게 받아내야지.”
“쯧쯔. 너는 아직도 그놈의 돈 타령이냐?”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돈 타령이다. 목진이 슬쩍 인상을 쓰며 세령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제 곧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할 몸이거늘, 어찌 아직도 옛날처럼 채신머리없이 군다는 말이냐.”
“에이, 뭘 모르네. 그건 아저씨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거죠. 요즘 문파는 문주들한테 무공만큼 중요한 게 사업 감각이에요. 안 그러면 문파 몇 년 굴리다가 쫄딱 망한다니까?”
“네게는 순자가 있잖느냐. 순자가 굴리는 돈이 적지 않거늘 언제까지 한낱 재물에 그리 목을 매려는 게야?”
“순자 얘가 나한테 그 돈 주는 거 봤어요? 맨날 쥐꼬리만한 용돈이나 타서 쓰는 신세인데.”
“그거야 세령이 네 씀씀이가 미덥지 못하니 그런 게 아니냐.”
“아니 내가 뭘요?”
“······둘 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요. 당장 부상 단 채로 승룡제랑 싸워야 하는 판에 뭐가 그렇게 태평해요?”
대화 도중 삼천포로 빠져 티격태격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우주선의 네트워크에 연결해 뭔가를 분석하던 순자가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과 승룡제와의 대결에 대해서 논하던 양반들이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우주선에 돌아오니 왜 이렇게 태평하게 군다는 말인가.
하지만 목진은 순자의 말에도 차분한 미소를 지은 채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거라. 다음 생사결이 머지않았는데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긴장을 풀고 쉴 수 있겠느냐? 몸을 만전의 상태로 준비할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편히 다스려 두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풀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목진이 세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무공이 요 근래 겪은 일들로 인해 일취월장하였음은 이번에 벽검성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온 강호무림이 알게 되었느니라. 그러니 지금쯤 제갈의 태상가주도 만전의 준비를 한 채 각오를 다지고 있을 터. 그러니 결코 네 무공이 높다 하여 상대를 얕잡아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세간에서 평가하는 승룡제 제갈현의 무력은 S랭크 중상위권 정도로, 복모유호 팽상원과 철군자 황보륭의 중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세령은 이번에 절대고수인 벽검성 남궁수련조차 패퇴시키면서 자신이 S랭크 최상위의 고수임을 증명한 상태. 객관적인 수치로 보면 세령이 확실히 우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당장 세령 그 자신부터가 무공의 성취가 반드시 승리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산 증인이 아니던가.
세령이 지금까지 꺾었던 고수들은 모두 당시의 그녀보다 강한 이들이었고, 심지어 철군자나 벽검성은 방심조차 하지 않고 전력으로 대결에 임했다. 그런데도 무공의 성취가 부족한 세령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무공의 고하로 섣불리 승패를 단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세령은 목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몸 상대가 이 모양인데 방심 같은 걸 할 여유가 있을 거 같아요?”
세령이 상처를 입었던 자리를 가리키며 툴툴거렸다.
“그래. 그 마음가짐을 잊지 말거라.”
목진은 그런 세령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령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이번 벽검성을 상대로 참으로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쇠약해져 있었다고는 하나, 한때는 그 서천검후마저 한 수 아래로 두던 고수가 아니더냐.”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지. 목진은 세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 한 걸음이 남았을 때야말로 가장 위태롭고,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임을 깨닫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니 네 복수행의 끝맺음을 맺는 마지막 순간까지 각오를 다잡으며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겠느냐.
목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을 요구했다.
“······.”
세령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목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깊고 우묵한 눈동자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불가능했을, 그저 은원만이 남은 한낱 이류(二流)의 무림인이 품었던 복수행.
그 철없는 무림인의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곳까지 인도해준 은인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긴 복수행에서 그가 그녀에게 내리는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 마지막 순간까지 각오를 다잡으며 흔들리지 말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 뻔한 가르침이야말로 지금의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목진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가슴 깊이 새긴 그녀가 마침내 답을 입에 담았다.
“반드시, 명심할게요.”
그러자 그녀의 스승이 웃음을 지었다.
우주천마 3077 341화
50. 최종무곡 Final Dance (2) – 똑똑히 봐둬라, 그리고 가슴에 새겨라
특이한 도시로고.
목진은 우주선의 콕핏 너머로 보이는 제갈세가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너른 벌판 한가운데에 세워진 도시에 듬성듬성 세워진 초고층빌딩과 사이사이에 저층의 건물과 식생들이 조화롭게 꾸며진 도시미관 자체는 그리 생소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층빌딩들의 외견이 옛 시대 전각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러한 빌딩들이 각각 길다란 스카이브릿지로 연결된 모습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한층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옛것의 겉모습을 뒤집어쓴 현대적인 도시라고 해야 할까. 가만히 그 풍경을 둘러보고 있자면 썩 멋스럽다고 평할 법도 한 풍취였다.
가만히 도시의 풍경과 우주선이 착륙할 활주로를 둘러보던 목진이 활주로 저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꽤 열렬히 환영을 해 주는구나.”
그들을 기다리듯 도열해 있는 일련의 무리들. 얼핏 보니 기천은 될 법한 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복색을 한 채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이 제갈세가의 무인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만 단위의 고수들을 일거에 대동한 하북팽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수의 호위만 대동했던 황보세가나 남궁세가에 비해서는 썩 화려한 환영. 목진의 말에 우주선의 망원센서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자가 대답했다.
“······천성단(天星團)이네요.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세 개의 무력집단인 삼천하(三天下)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체에요. 사이사이에 있는 녹색 무늬의 옷을 입은 건 무후각(武侯閣)의 무인들이고요.”
“삼천하? 그러고보니 백룡대도 그중 하나라 하지 않았더냐?”
목진이 물었다. 그에게 참룡검제라는 거창한 별호가 따라붙게 된 계기가 바로 그들이 아니었던가.
비록 그 대원 하나하나가 대단한 고수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진법의 힘을 통해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다루었던 그들은 아직도 다른 절대고수들 못지않게 목진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백룡대가 특정한 임무에 투입되는 일종의 전천후 특수부대라고 한다면, 천성단은 여러 거점으로 퍼져서 광범위한 제갈세가의 세력권 전체를 지탱하는 거점부대에 가깝죠. 다른 삼천하인 무후각은 제갈세가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 모인 소수정예부대고요.”
“문파의 대들보와 같은 전력이라는 게로군. ······헌데 그런 치들을 저리 내세웠다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목진의 목소리는 살짝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개 저런 식으로 보란 듯이 전력을 내보이는 경우는 하북팽가 때의 사례와 같이 문파의 세를 과시하여 상대를 압박하기 위함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홀로그램을 통해 본 제갈의 태상가주는 그리 단순하게 움직일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거늘.’
제갈현의 마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가 개입한 것일까.
답은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목진은 천천히 정박하는 우주선의 함교 안에서 무심한 눈으로 제갈세가의 풍경을 응시했다.
“인사드리오. 현 제갈세가의 가주 직을 맡고 있는 제갈지원이오.”
가지런히 도열한 일련의 무인들을 뒤로하고 일행을 맞이한, 냉막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일행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지원.
뛰어난 무인보다는 유능한 경영자에 가까우며, 부친인 승룡제 제갈현이 이끈 제갈세가의 성세를 이어받아 제갈세가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자다.
서로의 입장상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길 수는 없는 관계. 건조하기 그지없는 그의 인사에 일행 또한 사무적인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이목진이다.”
“알다시피, 당세령.”
“오퍼레이터 겸 매니저인 순자에요.”
일행의 인사에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인 제갈지원이 세령을 바라보며 먼저 운을 떼었다.
“우리 제갈과 귀하의 사이의 은원이 결코 가볍지 않음은 알고 있소. 부디 오늘의 비무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그간 쌓인 원한의 연쇄에 종지부를 찍길 바라오.”
“글쎄, ‘어떤 식으로든’이라······꽤 뼈가 있는 말이네.”
세령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려 올라갔다. 당연하면 당연한 말이겠으나, 그가 원하는 결착이라는 것은 결국 제갈현이 아닌 세령의 죽음으로 은원이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실례했소. 개인적인 감정이 조금 새어나왔군.”
제갈지원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표정은 여전히 냉막했다.
자식으로서든 가주로서든 더없이 존경하는 부친인 승룡제 제갈현의 목을 원하고, 여식인 제갈희에게 지울 수 없는 패배와 굴욕을 안겨준 상대다. 세가를 대표하는 가주로서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어휘의 선택이 다소 날카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딱히 상관없어. 이쪽은 이쪽대로 딱히 개인적인 감정을 감출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세령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아예 숨길 생각조차 없는 진한 적의가 배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령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제갈지원은 그 이상으로 흔들리지 않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본인에겐 세가의 체면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지라.”
뭐, 그러시다면야. 더 이상의 도발이 쓸데없는 짓임을 깨달은 세령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갈지원은 그런 세령에게 더 대꾸하는 대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미리 조율했던 대로, 생사결을 치르기에 앞서 접견을 위해 태상가주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소.”
그의 말이 끝나자 그가 몸을 돌린 방향에 있던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목진은 그 길을 보며 제갈지원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오.”
“이들을 불러모은 것은 승룡제의 뜻이더냐?”
앞으로 나아가던 제갈지원의 발걸음이 덜컥 멎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려 목진을 바라보았다.
“천성단과 무후각의 무인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모인 것은 태상가주님의 뜻이 아닌 내 의지를 따른 것이오.”
호오. 목진이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가능한 한 절제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뚜렷한 적의(敵意).
그 적의는 세령이 아닌 목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세령이가 아닌 나를 보러 온 듯 싶다만.”
“사천당가의 전인과는 관계없소.”
귀하가 참룡검제이기 때문이지.
제갈지원은 목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령과 대화를 나눌 때와는 달리, 목진을 향한 그의 눈은 다른 이들과 같은 은은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들은 당신을 보고자 이 자리에 모인 것이오. 오늘이 아니면 같은 삼천하의 일좌였던 백룡대를 무너트린 이의 얼굴을 직접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목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복수를 원하느냐?”
아니. 제갈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예 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백룡대주 제갈무준은 사사로이는 내 동생이고, 다른 대원들 또한 저들의 가족과 같은 이들이니 말이오.”
허나 존경하는 태상가주께서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바쳐 그 은원을 끊고자 하는데 그를 욕보일 수 있겠소?
그가 말했다. 목진을 향한 말인지, 자신을 향한 다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상가주의 뜻대로 그대와 제갈의 은원은 오늘로 끝을 맺게 되 것이오. 다만 우리는 그대를 직접 보고 각자의 가슴에 새김으로서 이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할 뿐.”
은원을 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삼천하의 일원 백룡대를, 그리고 그들의 명을 거둔 한 사내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이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료들에 대한 의리이자 추모였다.
그의 말에 목진이 물었다.
“만일 내가 승룡제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제갈지원이 고저 없는, 그러나 기이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면 우리는 기쁘게 은원을 이어가고자 하오.”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따지지 않소. 그저 행하는 것이지.”
“그런가.”
좋은 대답이구나. 목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 직후.
한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오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폭한 살기가 그들을 덮쳤다.
“뭣-?!”
피부로 느껴지다 못해 손톱으로 살갖을 긁어대는 것 같은 지독한 살기. 짐작조차 하지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와 반경 수백 미터를 뒤덮어버린 어마어마한 살기에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본능을 따라 검을 빼 들었다.
채채챙!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이 뽑히는 소리.
무기를 패용하지 않은 가주 제갈지원을 제외한 무인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목진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휩쓸던 살기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제갈지원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떨리고 있었다.
한 순간. 단 한 순간이었다.
숱한 전장을 경험한 그들조차 여지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끔찍한 살기가 그들을 덮친 것은.
“······.”
무인들의 등이 뒤늦게 배어 나온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본능을 따라 검을 뽑기까지 찰나와도 같은 간격에 아주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살기임에도 그러했다.
목진은 여전히 사납고 짙은 미소를 지은 채 그를,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쉬워하거라. 제갈과 나의 은원은 이 이상 이어지지 않을 터이니. 나 이목진은 승룡제 제갈현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보거라. 그리고 너희의 가슴에 깊이 새기거라.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제갈세가 무인들의 귓가에 울렸다.
“이것이 너희의 벗이 마주했던 자의 모습이다.”
목진은 백룡대를, 그리고 천선군주 제갈무준을 기억했다. 서로를 대적하게 된 사사로운 원인을 떠나 무인으로서의 그들은 분명 존중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그들에 대한 목진 나름의 예우이자 추모였다.
“······.”
그것을 깨달은 누군가는 적의를 잠시 거두며 그와 그를 대적했던 이들 모두를 향해 경의를 담아 검을 치켜들었다.
“······.”
또한 그것을 깨닫지 못한 누군가는 노골적인 적의를 흩뿌리며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목진은 그들이 그의 의지를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검으로 이루어진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보란 듯이 앞으로 나아갈 뿐.
그의 발걸음을 따라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의 끝이 무수히 그의 옷깃을 스쳤으나,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에게 그와 같은 도산검림(刀山劍林) 사이를 거니는 일은 숨을 쉬듯 익숙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