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ic Heavenly Demon 3077 RAW novel - Chapter (37)
우주천마 3077-36화(37/349)
7. 백만강시 Legion of Steel (2)
7. 백만강시 Legion of Steel (2) – 뱀의 유혹
“참담한 일이구려.”
장로 한 명이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산의 앞마당에서 화산의 제자가 납치당했다. 그것도 근본조차 없는 흑도방파 하나에게. 망신도 이만한 망신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상식 선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그 누가 화산파의 영역에서 화산의 제자를 건드릴거라고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제 아무리 미친놈이라 해도 그런 짓을 벌이려 한다면 주변에서 기겁하며 뜯어말리리라.
화린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에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화산파의 끓어오르는 분노는 섬서성계 전역에 퍼져나갔고, 화산파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음지를 살아가던 성계의 흑도무림이 모조리 뒤집어졌다. 나름대로 적당한 선을 지켜가며 화산파에 기생해 살아가던 섬서 흑도무림으로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흑도무림은 진노한 화산파의 발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모아다 화산파에 바쳤다. 백도와 흑도, 정파와 사파라는 진영논리는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 휴지조각과 같은 헛소리였으니까.
고작 반나절만에 일을 저지른 흑도방파 수뇌부가 휴대용 전뇌에 업로드 된 채 화산파로 배달되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는 강제 전뇌화는 커다란 중죄지만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이 돌아간 흑도무림에서 그런 것을 신경쓸 리가 만무했다.
전뇌를 읽고 알게 된 일의 전말은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한 사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섬서성계의 비수파는 문주를 포함해 겨우 열 명 남짓한 규모에 불과한 작은 조직으로 그동안 빈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팔아치우는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삼는 악질 흑도방파였다. 몇 년 전부터 비싼 값에 닥치는대로 어린아이들을 구매해가던 큰손 덕분에 쏠쏠한 재미를 보던 그들은 그간 든든한 물주가 되어주던 큰손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당연하게도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하자!”
명문 문파 출신의 아이를 구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지나가듯이 흘린 바이어의 말.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던 그들이 대담하게도 화산파의 속가제자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뭐? 미쳤어? 너넨 화산파가 병신으로 보이냐? 그 놈들 건드리면 우주 끝까지 도망가도 곱게 못 죽어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나마 유일하게 제정신이 박힌 문주는 그런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지만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할 생각에 눈이 돌아간 그들이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문주와 그를 따르던 심복은 그날 밤 쓰레기장에서 토막이 난 채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화산파에 도착해 먹잇감을 물색하던 비수파 문도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화린이었다.
다른 속가제자들과 달리 흔한 외장형 내공 드라이브조차 소지하지 않은 채로 겁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어린 명문정파의 소녀. 제대로 된 상급무공조차 가지지 못한 비수파 문도들에게는 굳이 높은 리스크를 감수하며 다른 속가제자들을 습격할 이유가 없었다.
“저거 하나만 잘 포장해서 팔아먹으면 최소 십 년은 돈 걱정 없을 거야.”
그녀가 나름 유명한 예비 아이돌이라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이어가 철수하기 전에 일초라도 빨리 물건을 확보해야 했고, 당장 눈앞에 먹잇감이 태평하게 군것질이나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애초부터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도 없었다.
이후, 화린을 팔아치운 돈을 차지하기 위해 저들끼리 죽여대는 통에 마지막엔 겨우 다섯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단순히 흑도방파가 흑도방파 했을 뿐인, 그 정도의 사건. 하지만 그 작은 사건이 불러온 파장은 결코 작다고 부를 수 없는 규모의 것이었다.
제 앞마당에서 제자 하나조차 간수하지 못해 땅바닥에 떨어진 화산파의 위상. 화산파의 수뇌부는 너나할 것 없이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다못해 그 화린이라는 아이에게 다른 속가제자들처럼 외장형 내공 드라이브라도 있었다면 이번 일과 같은 참람한 사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외다.”
장로 중 하나가 용적산을 흘겨보며 말했다.
애초에 작정하고 화산의 제자를 노린 비수파를 생각하면 외장형 내공 드라이브가 있었다 한들 이번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장로들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화린의 내가기공 수련 안건을 밀어붙인 용적산이 져야만 했다.
갈 곳 없는 그들의 분노를 마주한 용적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라고 어찌 그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다. 용적산은 애써 장로의 말을 흘려넘기며 말했다.
“그 책임은 화산의 제자를 무사히 구출한 뒤에 지겠소. 하지만 당장은 그 아이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의 말에 장로들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가 바로 화린을 눈앞에 두고도 구출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화린을 구매한 브로커의 행방이 이어진 곳은 외딴 무인성계에 있는 군용 드로이드 폐기장. 화린이 있을 것이 분명한 폐기장이 인류정부의 관리 하에 있는 행성인 이상 무림문파인 그들이 공식적인 허가 없이 수색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곳의 관리자로 있는 퇴역장군 출신의 버나르도 사나다 전 소장이 지병을 핑계로 화산파의 수색 요구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화산파도 정파의 대문파인 이상 인류정부와 커넥션이 있기 때문에 따로 수색 허가를 요청한 상태이긴 했다. 다만 군용 드로이드를 폐기하는 군사시설이 있는 행성이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눈앞에 그들의 제자가 잡혀있는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구해낼 방법이 없다. 화산파로서는 행성 주변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버나르도 소장의 응답을 기다리거나, 인류정부로부터의 수색 허가를 얻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브로커도 평생 그곳에 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철시귀옹이 죽은 지금 그 아이의 존재는 브로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계륵일 터. 이대로 포위망을 유지한 채 브로커를 회유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한 장로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나르도 소장이 침묵하는 이상 그것이 최선이다. 어차피 이번 실종사건의 가장 큰 용의자인 철시귀옹이 죽은 이상 화산의 제자인 그녀의 신변에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크나큰 착각에 불과했다.
– 삑.
“통신? ······폐기장 행성에서?”
용적산의 말에 장로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혹시나 버나르도 소장이 침묵을 깨고 답을 한 것인가. 일말의 희망이 그들의 얼굴에 깃들었다.
그러나 용적산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어째선지 그는 이 통신이 버나르도 소장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잠시 패널을 노려보던 그가 통신을 연결했다.
– 반갑소이다. 화산파의 동도 여러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거늘, 아직 낯이 익은 얼굴들도 몇 보이는구려.
화상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른 즈음 되어보이는, 백금발의 곱슬머리를 지닌 청년. 청년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늙수그레한 말투로 그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저 자는 누구인가. 장로들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청년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었다.
모두의 궁금증을 대변해, 용적산이 청년을 향해 물었다.
“나는 화산의 장문인인 용적산이오. 소협께서는 누구시오이까?”
용적산의 말에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청년은 이내 흘흘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네나 할 법한 웃음이었다.
웃음을 그친 청년이 입을 열었다.
– 이런이런, 그러고 보니 이런 외모를 하고 있으니 알아볼 턱이 있나. 미안하구려, 내 실수했소이다.
“실수?”
청년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가볍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장난이라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나요 나. 리첼 아카몬드. 세인들은 노부를 철시귀옹이라 부르지.
“······뭐?”
청년의 말에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철시귀옹은 죽었다. 장로들 모두가 그의 시체를 보고 그가 정사대전의 대마두 리첼 아카몬드임을 확인했다.
용적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죽었소. 죽은 자의 이름을 대는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요?”
– ······호오. 노부의 죽음을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그 정체모를 고수를 보낸 것이 바로 그대들이었군 그래.
리첼의 반응에 용적산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철시귀옹을 참살한 것이 목진임은 물론, 아직 그의 죽음조차도 발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그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 청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설마, 정말로 반로환동한 리첼 아카몬드 당사자이기라도 한 걸까? 그의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 리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하긴,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테지. 노부의 시체는 그대들이 회수했을 테니. 증거라고 하긴 뭐하다만, 노부의 말을 좀더 잘 믿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좋겠군.
리첼이 살짝 고개를 까딱이자, 그의 옆에 세 구의 드로이드 강시가 나타났다. 평범한 강시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 장로 중 하나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묵혈강시······!”
철시귀옹 리첼 아카몬드의 상징과도 같은 검붉은 강시. 용적산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저 묵혈강시들을 알고 있었다.
정사대전 당시 강시주제에 정파의 고수들을 학살하고 다니던 요물들. 삼십 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묵혈강시들은 그 존재만으로 그가 철시귀옹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대의 시체를 보았소만.”
– 험난한 강호를 헤쳐나가려면 언제나 숨겨진 한 수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지. 아니 그런가, 만화검존.
“도대체 어떻게?”
– 밑천을 다 까발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한 가지만 말해두자면, 이 늙은이는 분명 그 이목진이라는 고수의 손에 한 번 죽었었네. 과연 대단한 고수더군.
죽음을 당했다. 그 말은 즉, 자신의 죽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용적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패널 저편을 노려봤다. 리첼은 그의 반응을 즐기는 듯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연락을 넣은 것은 단지 그들의 반응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리첼이 손을 한 차례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 나누고 싶은 이야기야 많다만, 오늘 연통을 넣은 것은 그저 친목을 다지기 위함은 아닐세. 내 직접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쓸데없이 힘을 빼기에 앞서 문명인답게 대화로 서로간의 오해를 풀기 위함이지.
자잘한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게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래. 리첼이 뒤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
화면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 성인보다 약간 작은 체구를 가진 생강시의 얼굴을 본 용적산이 노호성을 내뱉었다.
“노오오옴!”
마치 용의 분노를 보이듯, 장로들마저 기겁할 만한 폭발적인 살기. 미처 제어하지 못한 기파가 회의실의 천장과 벽을 난도질했다.
이지를 잃은 듯 흐리멍텅한 눈을 한 소녀를 본 장로들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분명, 그들이 그리도 찾아다니던 화산의 제자 곽화린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용적산의 머리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의 제자가 생강시가 되었는데 어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네놈이 감히 화산의 제자를 능멸해? 내 네놈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주마!”
화산의 도인으로서 보일 수 없는, 용족 특유의 광폭한 살기. 용적산은 그런 살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며 세로로 찢어진 금안에 귀화를 피어올렸다.
하지만 화상이라는 벽을 사이에 두었기 때문일까, 철시귀옹은 그 정도의 살기쯤은 익숙하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그대의 반응은 이해하나,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시게. 이쪽으로서도 딱히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으니 말이네.”
“정녕 네놈의 그 간교한 혓바닥을 잘라야 입을 다물겠느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음에도 그간 쌓아올린 공부로 간신히 용족의 본성을 억누른 용적산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미처 억누르지 못한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 노부도 처음엔 이 아이가 화산의 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네. 멍청한 브로커가 설마 화산파를 건드렸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야. 노부는 생강시 개조작업을 하면서 척수에서 신경접속망을분리해낼 때에야 알았단 말일세. 이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야. 적당히 고만고만한 문파의 아이를 데려온 줄 알고 좋아했는데 설마 화산파의 제자였을 줄 내 어찌 알았겠는가. 으응?”
달리 말하면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생강시로 만들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의 말에 장로들의 혐오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 중간에 화산의 아이인 것을 알고 부랴부랴 작업을 멈추고 팔다리를 다시 붙여놓았지. 보게나.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하네.
웃는 낯으로 말하는 소름끼치는 이야기에 용적산은 물론이고 장로들의 표정까지 딱딱하게 굳었다. 사파의 마두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미쳐있을 줄이야.
– 각설하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유감이네만 노부는 적어도 아직은 그대들과 적대하고픈 마음이 없네. 정말일세. 그래서 이리 먼저 연통을 넣은 것이 아니겠는가.
“······화산의 제자를 능멸하고도 멀쩡할 성 싶더냐.”
– 어허.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이 아이는 완전히 생강시가 된 것이 아니라니까? 내가 섭혼대법만 거두고 적절한 재활치료만 한다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일세.
리첼의 말에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것이 간교한 마두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 일단 이야기를 들어나 보시게. 분명 마음에 들 터이니. 그냥 이 아이를 얌전히 돌려보내 줄 테니 서로 화해하고 이번 일은 덮자는 것. 어떤가? 몇개 이식해둔 생강시 파츠야 그냥 떼어내면 되고, 섭혼대법은 노부가 풀어주면 그만이니 평범한 삶을 사는 데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걸세. 신경접속망을 한 번 떼어냈으니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는 없겠다만, 꼭 무인으로 살 필요는 없지 않는가? 내 들어보니 아이돌 데뷔를 앞두고 있다 하던데, 그대로 아이돌의 삶을 살아가도 잘 살 것 같으이.
냉정하게 보면, 미친 마두의 제안치고는 굉장히 온건하고 평화로운 편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화산을 자극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제안. 리스크를 질 필요 없이 안전하게 그녀를 돌려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다.
“거절하지. 사악한 마두와 거래를 할 성 싶으냐.”
하지만 용적산은 도저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땅바닥까지 떨어진 화산의 위신도 위신이지만, 진정으로 매화검에 매료되어 있던 화린의 의지를 생각하면 그녀의 미래를 앗아간 철시귀옹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실리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제자를 위해서라 한들, 사파의 마두가 두려워 굴욕적인 협상을 한다면 안그래도 떨어진 화산의 위신에 똥칠까지 하는 격이었다. 대승적으로 보아도 철시귀옹과 협상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인 셈이다.
용적산의 대답에 리첼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멍하니 서있는 화린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 쯧, 그깟 자존심 때문에 이 어린 것의 창창한 앞날을 포기해야겠소? 백도라는 이들이 이리도 무정해서야.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그가 버나르도 소장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한 화산으로서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리첼은 여유로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 아무래도 그대들에게는 냉정함을 찾을 시간이 필요한 듯 싶군. 좋네, 사흘의 시간을 주지. 그 때 다시 연통을 넣겠네.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버나르도 소장에겐 내 따로 수를 써 두었으니 그쪽의 협조를 얻을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걸세. 아시겠는가?
“군부에 손을 뻗었다고? 이런 어리석은······! 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지 모르는가!”
– 그거야 내 알아서 할 일이니 그대들과는 관련이 없네.
버나르도 소장 뿐이면 모를까, 인류정부의 높으신 분들이그를 비호하는 이상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긴 해도 용인 가능한 선이다. 그렇기에 리첼은 당당하게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다.
용적산과 장로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버나르도 소장이 그를 보호하고 있을 줄이야. 회유인지 협박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건 당장 그의 협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허가 없이 화산파가 폐기장 행성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리첼은 웃으며 말했다.
– 흘흘. 내겐 시간이 많네. 하지만 그대들에게도 그럴까? 사흘 후에 보세.
리첼의 옆에 선 화린이 그들을 놀리듯 손을 흔들었다. 도저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담한 광경에 용적산은 거친 태도로 통신을 껐다.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외통수였다. 철시귀옹의 말대로,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 문파의 굴욕도 제자의 복수도 되갚지 못한 채 저 마두의 세치 혀에 굴복해야 하는가. 장로들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때,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용적산이 입을 열었다.
“······이목진 대협을 부르시오. 내 한 가지 방도가 있으니.”
(2020.07.30 수정완료)
정보)
화산파의 분노에 흑도무림들은 기겁하며 불똥을 맞지 않기 위해 자진해서 범인을 찾아냈다.
본인의 의지 없이 강제로 전뇌화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다. 하지만 살인과 마찬가지로 음지에서는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다.
전뇌화 당한 뇌는 설정에 따라 불특정 다수에게 기억을 열람당할 수 있다. 물론, 전뇌 열람은 특별한 전문기술이 필요하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수파는 정말로 평범한 흑도방파다. 다만 그들의 날갯짓이 폭풍을 불렀다.
만약 화린에게 외장형 내공 드라이브가 있었다 해도 비수파도 완전히 일반인은 아닌 이상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철시귀옹은 버나르도 사나다 소장의 비호 아래 군용 드로이드 폐기장 행성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무림문파가 허가 없이 인류정부군의 영역을 침범하면 최대 멸문까지 당할 수 있다. 무림의 군용무기 보유는 인류정부에서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사안이다.
철시귀옹 리첼 아카몬드는 젊었을 적에 여자 여럿 울린 대단히 잘생긴 미남이었다. 현재의 육체는 당시의 육체다.
리첼은 나중에 사혈곡주에게 그녀의 정체를 듣고 대계를 그르칠까봐 기겁했다. 브로커가 죽은 것도 그의 화풀이 때문이다.
곽화린은 생강시 시술 도중 중단된 상태다. 리첼이 섭혼대법을 거두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 단, 신경접속망은 한번 떼어내면 위험성 때문에 다시 시술할 수 없기 때문에 화린은 앞으로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용족은 본성이 매우 광포한 종족이다. 다만 평소에 상당한 이성의 벽으로 그 본성을 누르고 있을 뿐이다.
리첼은 정말로 이번 일을 덮고싶어 한다. 앞으로 펼쳐야 할 대계가 어그러지는 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파, 특히 구파일방은 기본적으로 마두와 협상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인류정부는 민간인이 대규모로 말려들지 않는 한 무림인 사이의 일에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