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ckoo living in early spring RAW novel - Chapter 1
01. 하얗고 말랑말랑
목련의 꽃말은 이루지 못할 사랑입니다, 라는 애창곡을 틀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학우님들. 야밤에 인사드리겄습니다.”
목소리를 촥 깔고 연설하듯 말하자마자 앞자리 여자애 두 명이 배를 잡고 웃는 게 보였다. 하수라면 여기서 그들의 웃음에 말려들 것이고 고수라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더 큰 웃음을 주어야 한다.
나는 장장 오 년간 집에서 특별 공연을 해 온 몸이었기에 어떤 무대에 올라도 입꼬리 한 번 미동 안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엉덩이를 왼쪽으로 튕기자마자 음악이 틀어졌다. 구수한 뽕짝 가락에 몸을 맡겼더니만 앞자리가 숨넘어가게 웃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평생을 존경해 온 가수 김수명 님이 빙의했다고 생각하며 마이크를 위로 쳐든 순간이었다.
“배우림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뽕짝 가락이 가위로 싹둑 잘리듯이 잘렸다. 황소처럼 콧김을 뿜는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로등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모여 있던 아이들은 파리채를 들고 나타난 선생님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선생님은 타깃을 바꿔 덩그러니 마이크를 들고 선 내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
“나오라. 나오라. 니들 이거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기고? 잉?”
사실 우리는 꿀릴 것이 없었으나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윤중구의 호통에 맞설 여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호랑이가 내 귀를 뜯을 것처럼 흔들자 반장이 손을 들고 나왔다.
“저희 장기자랑 1등 해서 밤새워 놀아도 된다고 들었는데요.”
“정도가 있지, 임마. 정도가. 밤 11시가 다 돼가는데 트로트 틀고 반짝이 입고 지랄을 해야겠간?”
침 튀기며 말하는 호랑이를 보다 못한 반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낭패감을 느낀 나는 속으로 허허 웃었다. 호랑이 선생이 왜 자기 반도 아닌 남의 반이 머무는 방에 올라와 내 귀를 잡아당기는지 짐작이 갔다. 체육대회든 반 장기자랑이든 1등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호랑이는 자기 반을 제치고 1등한 반을 가만히 내버려 둘 인사가 아니었다.
치사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나는 호랑이 눈을 피해 입술을 과장되게 쭉 내밀어 그의 말을 입 모양으로 따라 했다. 힐끔힐끔 눈짓으로 괜찮냐고 묻던 친구들이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호랑이는 기어코 한 사람을 제물로 데려가야 했는지 내 귀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너는 대표로 오늘 나랑 가자. 밤새도록 트로트 함 불러 바라.”
“예?”
잠옷 위에 걸친 무대용 의상을 벗을 새도 없이 호랑이의 손에 이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밤 10시에 소등을 마쳐 깜깜해진 복도를 호랑이와 단둘이 걷느니 차라리 야밤 산행을 한 번 더 갔다 오겠다. 소문을 듣자 하니 7반 아이들은 수학여행 오기 전부터 자기들끼리 호랑이 감시하에 밤새워 연습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뜨내기로 생각한 애가 나타나 인기상을 휩쓸어 버렸으니 그에 느꼈을 호랑이의 분노가 이해 갔다.
“배우림.”
“아, 아이고, 예?”
“전학 오자마자 이런 식으로 눈에 띄면 좋을 거 없는 거 알제? 응? 니 두고 볼 기다.”
바깥에 세워두고 밤새워 트로트를 부르게 시키겠다는 호랑이 때문에 무대용 의상이나마 단단히 여민 차였다. 여학생 숙소가 있는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간 호랑이는 코를 훌쩍거리더니 불을 켜 깜깜한 3층을 밝혔다.
말세다, 말세. 나는 놀라서 눈을 멀뚱멀뚱 떴다. 거기에는 남자애 열 명이 엎드려뻗쳐 자세로 있었다. 호랑이의 감시가 없을 때도 열심히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의 개수를 보니 끌려 온 지 꽤 된 모양이었다.
수학여행에서 트로트 좀 불렀다고 밤새 엎드려 있어야 할 내 처지가 실감이 됐다. 호랑이 선생은 자세가 흐트러진 남자애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내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기가 팍 죽어 호랑이에게 걸어가니 그래도 여자랍시고 엎드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저기 거울 앞에 서 있어라.”
이제 보니 3층은 남학생 숙소가 있는 층이었다. 말썽을 부린 애들이 끌려 나와 커다란 자판기가 있는 복도에서 기합받고 있던 모양이었다. 애당초 밤새워 놀아도 된다는 숙소 관장의 말을 믿은 우리가 바보였다. 호랑이 선생님이 개입하면 숙소에선 아무 힘도 써 줄 수가 없었다. 코를 긁으며 거울 앞에 서자 선생이 내 팔을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바꾸었다.
“니 쟤들 보이지.”
“예에.”
“점마들 술 먹다가 걸려서 너보다 더 죄질이 나쁘다. 만약 쟤네 중에 한 놈이라도 자세 흐트러지는 놈이 있으면 너는 가도 된다.”
“예? 아, 예.”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배신하겠다는 낌새를 보이자 호랑이가 허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우림이 이거 난 놈이네. 응? 잘 지켜봐라.”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호랑이 선생은 밤새 지켜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품을 쩍쩍 하며 엎드려뻗친 남학생들에게 괜히 시비를 걸고 다니던 호랑이가 20분도 안 돼서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잘 감시하레이, 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는 바람에 건장한 열 명의 남학생에게 둘러싸인 나는 식은땀이 났다. 앞으로 나란히 자세도 만만치 않게 힘든 것이라서 나는 호랑이 선생이 사라지자마자 슬쩍 팔을 내렸다.
“야. 갔냐?”
“저 씨발 새끼.”
호랑이와 나를 한 패로 볼까 봐 침을 삼킨 나는 뒤 돌아서 거울에 등을 딱 붙였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온 수학여행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애들을 태반 모른다고 봐도 좋았다. 딱 보아도 노는 물이 달라 보이는 남학생들인데 혹여나 잘못 찍혔을까 걱정이 됐다.
음료 자판기 위에 달린 뻐꾸기시계를 보니 호랑이 선생이 떠난 지 5분도 안 됐다. 마음껏 화풀이한 터라 아마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거였다. 무대용 의상이 더워서 재킷 아랫단을 잡고 펄럭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노려보던 남학생 하나가 엎드린 자세를 풀고 똑바로 앉았다. 눈썹에 난 흉터 때문에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남자애가 나를 째리듯 보았다. 군기가 바짝 든 나는 설렁설렁 들던 팔을 앞으로 쭉 폈다.
“야.”
흉터 난 남학생의 말을 기점으로 하나둘씩 엎드려뻗쳐 자세를 풀고서 편히 앉기 시작했다. 나 혼자 뻘쭘하게 팔을 뻗고 서 있으려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바엔 호랑이 선생이 머리꼭지가 돌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었으면 했지만 자판기에 수면제가 들었는지 달달한 밀크 커피를 들고 나간 호랑이 선생은 돌아올 길이 없어 보였다.
“야. 말 씹냐?”
“쟤 이름 뭐랬더라. 배유림?”
“배우림.”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귀에 못 박히듯 박히기 시작했다. 천방지축 남학생들 사이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지고 있었다.
“우리 꼰지르지 말고 너도 팔 내려.”
“서로 돕고 살자. 어?”
“그러고 보니 쟤 옷이 왜 저래.”
나는 헛기침하며 팔을 아래로 내렸다. 고거 몇 분 그러고 있었다고 뻐끈한 팔뚝을 주무르는 와중에 아직 뚝심 있게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는 두 명을 발견했다. 나도 안심하기엔 이른 때가 아닌가 싶어서 팔을 들려고 하는 찰나 한 남자애가 이를 드러냈다.
“야. 장희태, 김종선. 너네 뭐 해?”
그때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던 남자애가 고개를 스윽 들어 좌중을 훑어봤다. 힘이 좋은지 그 애는 남들보다 땀을 덜 흘리는 중이었다.
“새끼들. 아직도 삐쳤냐? 그 새끼 자러 간 지가 언젠데.”
아무리 눈썹(이후로는 눈썹이라고 칭하겠다.)이 도발을 해도 절대 자세를 바꾸지 않는 남자애 둘이 존경스러웠다.
대략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세를 풀지 않는 걔들을 바라보며 나도 팔뚝을 주무르는 걸 멈추었다. 쟤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건 이유가 있다는 판단이 들어 슬그머니 팔을 올린 순간이었다. 계단에 전조등이 켜지더니 호랑이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내려오는 게 보였다.
앉아서 쉬고 있던 남자애들은 급하게 엎드려뻗쳐를 시도했지만 호랑이 눈에 그게 안 보일 리가 없었다. 흠이 잡힐까 싶어 허리를 똑바로 세운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뭐꼬. 어? 지금 니들 다 기합 빠졌네.”
그러던 호랑이는 나한테 와서 손을 휙휙 저었다. 절간처럼 조용한 덕분에 손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내려, 내려.”
나는 팔을 휙 내리고 턱에 고인 땀을 닦아내었다. 호랑이는 내가 자기가 올라갔다가 온 동안 한눈 판 것을 모르는지 땀에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었다.
“그래도 니가 의리는 있네. 애들 쉬게도 해 주고. 근데 내가 저것들 쉬고 있음 이르라고 했지?”
“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을 때 호랑이가 그만 내려가라는 듯이 내 등을 떠밀었다.
“여자애니까 여까지만 봐준다이. 얼른 들가서 자고. 한 번만 더 그 뽕짝 소리 들리면 가만 안 둔다.”
“예에.”
반짝이 재킷을 벗어 팔에 올려두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엄한 호랑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인나. 장희태, 김종선이.”
끝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 느릿느릿하게 내려갔다. 이르지 말라고 협박 질이나 하던 눈썹이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게 여기까지 보였다.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호랑이가 잠들 기미가 없으니 쟤들의 앞날도 딱했다.
호랑이의 말에 한 놈은 기운도 좋게 벌떡 일어나고 한 놈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호랑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땀을 얼마 안 흘린 애가 장희태인가 보다. 몰래 계단을 내려가는 척하며 뒤돌아본 순간이었다. 성장기 고등학생치고 뽀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축구 경기 한 번 안 뛰어 본 듯이 피부색이 맑고 예뻤다. 진한 눈썹을 가린 앞머리는 관리받은 티가 났다. 키도 크니 앞날이 창창할 거다.
여차여차 구경 중에 눈길이 마주쳤다. 제 손목으로 무심하게 땀을 닦은 장희태는 고개를 들다가 나를 발견한 셈이었다. 머스마 멀끔하게 생겼네. 눈을 내리깔고 계단을 두어 개 더 내려가는데 호탕하게 웃는 호랑이 목소리가 들렸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눈길 한 번 섞은 게 무슨 대수라고 아직껏 쳐다보고 있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고 같은 반도 아니라서 얼굴을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눈빛에 가시를 바른 양 장희태의 시선이 어딘가 모르게 껄끄러웠다. 보다 보니 잘생기기는 했는데 풍기는 인상이 꼭 독사 같았다.
입맛을 다시며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손에 땀이 많이 나서 그런지 재킷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반짝이가 많이 묻어나는 게 역시 싼 맛에 산 재킷이라 그런가 보다. 손바닥에 묻은 반짝이 가루를 털면서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독사 옆에 말캉한 마시멜로를 닮은 남자애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어. 니는 반장이 되가꼬 애들 통솔도 하나 못하나? 니 믿고 같은 방 줬는데 술이 웬말이고. 어? 고2가.”
호랑이 선생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엄지만 한 작은 천사가 머리 위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날아다녔다. 제 기능을 못 하는 심장이 짝사랑의 늪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아무리 깜빡거려도 천사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첫눈처럼 순하게 생긴 남자애가 흐느껴 울었다. 목까지 빨개져 우는 남자애를 보고 안달이 난 것은 처음이었다.
“너그 둘은 먼저 들가서 자라.”
“예.”
“네.”
무심하게 끄덕거린 독사 같은 남자애가 나의 엔젤의 등을 밀며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파리가 드나들게 입을 벌린 나를 보지도 않고 지나쳐 갔다. 대신 힐끔 내려다보는 독사 같은 남자애와 벌써 세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고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있으니 호랑이 선생이 나를 다그쳤다.
“야. 배우림이. 거기서 뭐 해.”
“예? 예에.”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고 계단을 통통 뛰어 내려갔다. 실없는 녀석이라고 호랑이 선생이 한 소리 하는 게 들렸다. 그래봤자 내 귀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남자애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녹음된 양 반복 재생됐다. 와 이러지. 심장이 와 이러는 거지.
방으로 돌아왔을 땐 애들이 벌써 잠든 후였지만 나는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이불 위에 앉아서 명상했다. 한입 깨물어 먹고 싶은 마시멜로 같은 남자애를 떠올리느라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렇다. 열여덟 청춘의 인생에 드디어 꽃이 핀 게다.
***
우리 집은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졌다. 물론 공연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집에선 두 달에 한 번 열리는, 없으면 서운한 행사가 되었다. 거기서 얻은 짬빠로 트로트를 부르며 춤을 맛나게 추었더니 덜컥 1등이 돼 버린 거다. 전학 온 지 꼴랑 일주일 지난 내가 수학여행에서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된 것도 갈고 닦은 뽕끼 덕분이었다.
“김종선?”
수학여행 마지막 날 식당에 내려갔더니 멸치볶음에 황탯국을 주어서 여자애들끼리 단합해 치킨을 시켜 먹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거나 무시하는 기조로 나가던 애들이 치킨 한 마리를 나누어 먹으며 쫀쫀해지고 있었다. 분위기를 봐서 어제 본 엔젤 이야기를 하자 여자애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림이 걔한테 관심 있어?”
“와, 와. 전학 온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사실 말하기 전부터 긴장을 한 채였다. 여기는 서울에 있는 학교이고 전학 첫날부터 느낀 거지만 여기 애들은 내 사투리가 신기한 듯 불편한 듯 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평범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사투리가 심하다고 해서 놀란 적도 있었다.
여하튼 이미지가 그렇게 대단히 좋지도 않은 내가 얼결에 장기자랑 1등을 도맡고 어찌저찌 섞여 지내고는 있으나 초장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내 마음을 드러낸 게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혹여나 종선이, 마이 엔젤을 좋아하는 애가 있으면 미운털이 박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어제 기합받다가 봤거등? 애가 쫌 설탕 같고 그러대.”
“설탕?”
“하얘서 좋아해?”
내가 좀 까무잡잡한 편이라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이 있기는 했다. 다행히 종선이를 노리는 애는 많이 없는지 침을 발랐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해도 시비를 거는 무리가 없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코를 긁적거리고 있을 즈음 허무맹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근데 왜 종선이야? 걔는 좀 애가 맹하던데.”
“맞아. 딱히 잘생긴 것도 아닌데.”
“뭐가.”
화를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먹던 치킨 다리도 내려놓을 만큼 언짢아졌다. 입에 묻은 기름을 손등으로 벅벅 닦자 눈치를 보던 여자애들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삐쳤어?”
“아니, 걔가 솔직히 인기가 많은 애는 아니니까. 신기해서 그러지, 신기해서.”
“잘생기기만 했든데.”
“에 그건 아니다.”
나는 치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사이드로 밀려난 하얀 무만 계속 집어서 먹었다. 입에 시큼한 게 들어가니 마음도 시큼해지는 것이, 내 엔젤의 진가를 몰라보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겨우 피운 청춘의 꽃을 모욕하는 게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어제 김종선 방 애들 전부 기합받았으면 장희태도 봤겠네.”
손가락에 묻은 무절임 국물을 쪽 빨아 먹던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봤지. 종선이 옆에 딱 붙었드라.”
“둘이 친구거든.”
“친구?”
하얀 백설기 같은 종선이와 독사 같은 인상을 가진 장 뭐시기의 조합이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종선이도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그 친구를 사귀었겠지 싶었다. 별 관심은 없는 이야기라 콜라를 따라 먹는데 여자애들 눈이 아까와 달리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서민지는 이번 수학여행에서 고백한다더니?”
“야, 야. 되겠냐?”
“차여놓고 또 고백 안 했겠다 하겠지.”
종선이 친구라니 나도 귀를 귀울였지만 딱히 유용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장 뭐시기의 얘기가 주를 이루는 터라 지루해질 무렵 내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 기말 보면 1등 하겠네.”
“서민지도 장미반 들어간다고 그러더니. 이번 기말도 말아먹을 예정이라고 벌써 밑밥 깔더라?”
“1등?”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교에서 1등 하는 놈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고 독사같이 생긴 놈이라니. 장 뭐시기에 대한 호감이 한 단계 더 낮아져 비둘기와 동급이 됐다. 이번 시험은 무조건 1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교내 상장을 몰아준다는 장미반으로 들어가려면 전학 오자마자 유의미한 성적을 내야 했다. 지난 학교에서는 쭉 1등만 했으니 이번에도 그래야 할 텐데 갈 길이 구만리였다.
“저기.”
“응?”
“종선이는 몇 등 하냐.”
반장이라는 말을 어제 호랑이 선생한테 들었으니 못해도 전교 10등 안에서는 놀지 않을까 싶었다.
“글쎄. 나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딱히?”
“그러니까 장희태랑 둘이 붙어 다니는 게 이해가 안 된다니까.”
“왜 집안들끼리 친해서 초등학교부터 동창이라나 뭐라나.”
겨우 종선이 얘기로 돌려놓았더니 손쓸 새도 없이 장 뭐시기의 얘기로 돌아갔다. 아무리 내가 발광을 해도 종선이에 대한 관심이 눈곱만한지라 좋아하는 색깔이나 음식 같은 것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딱한 짝사랑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우리 방에서 유일하게 반항적인 박영미가 진동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놨다.
“아니 안 냈어?”
“이걸 왜 내. 얼마 주고 산 건데.”
터치하는 핸드폰을 가지고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박영미와 대화 몇 번 나누어 보지 않은 나도 알고 있었다. 터치 핸드폰을 들고 있는 애들은 그래도 집이 잘사는 축에 속하는지라 나는 부러워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박영미는 마른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핸드폰 화면을 꾹 눌렀다.
“여보세여.”
간드러지는 박영미의 목소리에 여자애들이 꺅꺅거리고 난리가 났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입술에 댄 박영미가 통화음을 최대로 키웠다.
– 왜 전화했는데.
목소리가 익숙하지는 않은데 어딘지 모르게 아는 놈 같단 말인지. 그리고 비상한 나의 촉이 맞았다. 옆자리에 앉은 애가 내 귀에 속닥거렸다.
“희태다. 장희태.”
아 그러냐며 코를 후비는 심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구경에 나섰다. 홍조를 띤 여자애들이 핸드폰을 둘러싸고 앉아서 옆구리를 찌르고 난리가 났다. 핸드폰 스피커가 신이 난 박영미의 앞니에 닿았다.
“있다가 수학여행 끝나고 나랑 피자집 갈래? 내가 쏠게.”
샐러드를 무한정으로 담아서 먹을 수 있다는 피자집에 데려가 준다는 얘기였다.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아서 장 뭐시기가 부러워지는데 놈은 배가 불렀는지 차갑게 대답했다.
– 내가 왜.
“응?”
– 겨우 이딴 걸로…….
“어? 저기? 야.”
박영미는 창피했는지 핸드폰을 던질 기세였으나 이미 상대편에서 전화를 먼저 끊은 참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천장을 응시하는 데 이어서 앙칼지게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야. 걔가 피자집 아쉬워할 애야?”
“뭐 둘이 번호를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니 뭐니 해서 기대했는데 별거 없네. 너나 서민지나 똑같이 차였다, 야.”
핑크빛 기류를 기대했던 여자애들이 실망한 얼굴로 툴툴거리자 박영미가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얘 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거든?”
“그래, 잘도 관심 있다.”
박영미가 만회하고 싶었는지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저쪽은 핸드폰을 꺼두었다는 안내음으로 답해 주었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눈치 싸움에 들어가자 박영미가 핸드폰을 들고 뛰쳐나갔다.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애들이 비웃음 띠는 것을 시작으로 입에 모터를 달았다.
“지가 장미반에 들어가면 들어간 거지 뭐 관심이 있느니 마느니 그런 소리를 해서.”
“저거 서민지랑 머리채 잡고 싸울 때부터 알아봤다.”
“반 애들한테도 번호도 안 가르쳐 주던 애가 잘도 알려 줬겠다.”
“아우 꼬셔. 지한테 뭐 지우개를 일부러 빌려줬다느니 그런 개소리 하드만.”
흥분에 찬 목소리로 박영미를 비웃는 애들 사이에서 나는 한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아, 가까스로 장미반에 들어가더라도 장 뭐시기하고 연결이 되면 나는 역적 죄인이 되겠구나. 수학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오기를 잘한 듯싶었다. 쓸만한 정보를 귀에 담아두었다가 고3까지 무사히 보내는 게 내 목표니까 말이다.
운 듯 눈두덩이 빨개진 박영미가 방으로 돌아왔다. 왜 마음도 추스르지 못한 얼굴로 돌아왔나 했더니 20분 뒤면 우리 학교가 대절한 버스에 탈 차례라는 안내음이 방송됐다. 수학여행이라고 해서 특별히 기념할 기억이 없는 터라 혼자 일어나서 치킨과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했다.
다만 이번 수학여행에서 아주 큰 것을 수확했다. 청춘의 꽃을 피워준 나의 엔젤이 있으니까 말이다.
콧노래를 흘리며 짐 가방을 드는데 구석에 서서 어울리지 못하는 박영미가 신경 쓰였다. 일부러 반 아이들과 떨어져 핸드폰만 보는 박영미의 곁으로 가려는 찰나 여자애 하나가 나타나 나에게 팔짱을 꼈다.
“이리 와 봐. 우림아.”
“어?”
따돌리려는 것이 눈에 보여 기분이 상했다. 전에 학교는 시골이라서 반 아이들이 몇 명이 되질 않았다. 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게 익숙해져서 한 명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두드려졌다. 박영미는 눈치가 빠른 모양인지 다른 방에서 나오는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을 했다. 말 몇 마디를 나누어 보지 않은 내가 다가가는 것보단 저게 나을 듯싶어서 신경을 그만 쓰기로 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멋을 내려고 얇은 카디건만 걸친 여자애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대절한 버스가 달구지처럼 느릿느릿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담배 태우다가 이제 왔느냐고 성질을 내는 여자애들에게 담임이 다가왔다.
“얘들아. 우리 사진 함 찍자.”
“추워요, 선생님.”
“나중에 찍음 안 돼요?”
볼멘소리를 냈지만 이미 버스에 오른 남자애들까지 다 끌어내려 버스 앞에 일렬로 세웠다. 키순으로 서라는 담임의 고함이 무색하게 입이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아이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여기 아이들 비위 맞추는 것도 쉽지 않겠다 싶은 차에 시큰둥하던 여자애 하나가 손가락으로 버스 뒤편을 가리켰다.
“야, 야. 1반도 사진 찍나 봐.”
우리 반은 5반이라서 1반과 옆에 나란히 서는 일이 별로 없었다. 1반이라는 얘기에 귀가 쫑긋해진 건 그 반에 김종선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장이라 불리는 김종선이 아이들을 줄 세우고 구도를 잡기 위해 앞으로 나서 있었다. 그런데 1반 애들도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지 다들 제 할 말만을 하기 바쁜 눈치였다.
“잘생기긴 했다.”
“동의.”
“뭐야. 관심 없다더니, 배우림.”
“어?”
그제야 옆으로 쪼르르 서 있는 여자애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걔 말고.”
“너 일부러 김종선 좋아하는 척하는 건 아니지?”
“무슨. 너 말이 좀 글타.”
“아, 우림이 화났다. 화난 거 처음 보네.”
종선이 얘기만 나와도 발끈하는 나를 놀리는 게 재밌어 보였다. 이제 보니 멀지 않은 거리에서 멀대같이 큰 장 뭐시기가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연락할 사람이 많은지 핸드폰을 받자마자 붙잡고 사는 게 딱 봐도 바람둥이 관상이었다.
자세히 쳐다보고 있다가 오해를 받을까 싶어 눈을 돌리는데 장 뭐시기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가까이 선 탓에 힘들이지 않고 눈길이 마주쳤다. 버스가 시동 거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얼핏 비웃는 입꼬리를 보았다.
잘못 보았나 싶어서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역시나 재수 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핸드폰 보는 놈이 보였다. 여자애들이 저를 보고 좋아하는 게 비웃을 일인가 싶다. 지나가는 결에 봐도 관상이 좋지 않은 놈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자, 다들 이쪽 봐라.”
카메라를 들고 선 담임이 손짓을 하자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찍기 싫다고 툴툴거리더니만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머리빗으로 앞머리를 빗고 난리가 났다. 나도 코끝을 쓰윽 닦고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었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자 이윽고 담임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서 눈을 뗀 담임이 잇몸 미소를 지었다. 한 방에 잘 찍혔는지 더 찍자는 말도 없이 얼른 버스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추워서 우그르르 붙어 있던 아이들이 환호하며 짐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로 몰려갔다. 나도 짐가방을 챙겨 안고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종선이인가 싶었지만 장희태였다. 버스에 기대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들켰음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언제 물었는지 모를 막대 사탕을 혀로 굴리면서 쳐다보는 게 마치 시비를 거는 것만 같아서 시선을 아래로 보냈다.
“쪽 다 팔았네.”
쟤보다 먼저 눈길을 피한 게 분한 나머지 버스에 올라타며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멀미가 심해 버스 앞자리에 후다닥 앉고서 가방에 넣어 둔 과자를 꺼냈다.
“우림아, 뭐 먹어.”
“아, 과자.”
장희태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나한테 유감이 많은 놈인지 시종일관 뚫어져라 보는 통에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만 괜한 오해를 했다.
“쟤 나 좋아하나?”
“그래서 저리 쳐다보는 거면 인성에 문제 있어 보이는데.”
“우림이 말하는 거 진짜 웃겨.”
이제야 단체 사진을 다 찍었는지 이동하기 시작하는 장희태의 옆모습을 복수하듯 노려봐 주었다. 어쨌든 쟤가 쳐들어올 일이 없는 상황에서야 이런 눈빛을 쏘아 보내는 건 비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담임이 인원을 세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편히 안전벨트를 맸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수학여행은 재미있다기보다 피곤한 일투성이였다. 단돈 천 원도 아까운 식당에, 팥빵과 열쇠고리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까지 들르면 수학여행비라고 낸 돈의 액수가 생각 안 날 수 없었다. 학교에 남아 기말고사 대비를 하는 게 나았을 뻔했지만 이런 말을 했다간 돌을 맞고 죽을 것이 분명하기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척해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
기말고사 날짜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쪽 학교가 전에 학교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서 내게 불리한 면이 있었다. 샤워만 대충 끝내고 문제집을 펼치자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가 5시가 넘었으니 공부를 얼마 하지도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게 분명했다.
급한 대로 가장 진도가 밀린 언어부터 끝을 내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오렌지 주스를 마실 때였다.
바깥서 접시끼리 부딪는 소리가 들려 의자를 빙 돌렸다. 일어나 방의 문고리를 돌리자 부엌 쪽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우림이.”
“예에.”
“니 아직도 안 잤나.”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면 혼이 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계를 확인했다. 마지노선인 11시를 넘기지는 않아서 안심하며 방문 밖으로 나왔다.
“뭐 드시려고요?”
“그냥. 목이 좀 칼칼해가.”
아까 저녁 자리에서도 감기 기운이 있다고 목을 큼큼거리긴 했었다. 걱정이 드는 마음에 찬장에 두었던 유자차를 꺼내 들자 엄마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그거 찾아다녔는데.”
“원래 이런 건 제 담당이니까. 뭐 필요하면 재깍재깍 불러요, 엄마.”
“여행 다녀와서 피곤할까 봐 그랬지.”
“하나도 안 피곤하지. 공부까지 하고 있는데.”
“그래, 우리 공주가 튼튼하니 최고다.”
소파에 앉아 따끈한 유자차를 기다리는 엄마를 위해 손이 빨라졌다. 약을 못 먹는 상태가 오니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알약 한두 개면 달아날 감기를 유자차로 살살 달래어 보내야 하니까 말이다.
다 탄 유자차를 쟁반에 받쳐 엄마 앞으로 가져가는 도중에 불룩해진 배가 눈에 들어왔다. 고맙다고 하면서 유자차를 받아 든 엄마가 내 눈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렸는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배를 쓰다듬었다.
“너 여행 간 사이에 꿀떡이가 발을 얼마나 차고 다니는지 모른다.”
“아, 그랬구나.”
“말도 마라. 회사 사람들이랑 밥을 먹는데 식탁이 쭉쭉 밀리지 않나. 나 깜짝 놀라서 배를 봤는데 꿀떡이가 차고 있대. 그래서 우리 사장이 나한테 애 축구 선수 시키라고.”
“꿀떡이가 축구 선수 되면 좋긴 좋겠네요.”
“그라지? 나도 벌써 기대가 음층 된다.”
“예에.”
“나 이제 잠 온다. 너도 얼른 들어가 자라. 또 밤새면 나한테 혼나요.”
“예. 주무세요.”
고개를 꾸벅 수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쟁반까지 들고 들어온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었다. 나가서 당당히 부엌에 두고 돌아오면 되는 것을, 엄마가 안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문 앞에서 보초를 섰다.
부모님이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꿀떡이가 태어나면 나는 찬밥도 아닌 쉰밥이 될 예정이었다. 집안에 제대로 된 핏줄이 태어났다고 좋아할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축구 선수까지 되면 집안은 경사겠으나 안 그래도 보릿자루보다 못한 내 처지는 어디까지 떨어지려나 싶다.
그런 고로 이번 시험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똑똑한 사람이 1등을 하는 게 아니라 절박한 사람이 1등을 하는 거라는 학원 선생의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지금 그 학교에 나보다 절박한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방의 불을 끄고 책상머리의 스탠드를 켰다. 방 불이 켜져 있으면 엄마가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연필이 종이 위에 그어지는 소리가 나의 새벽을 밝혔다. 슬픈데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나도 어른의 반열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
기말고사가 있는 주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 혼자 아침을 차려 먹었다. 간단히 계란말이에 김칫국을 끓여서 엄마와 아빠 것까지 차려 두고 떠났다. 그래야 아침 인사도 없이 떠나는 나의 마음이 편했지만 부모님은 공부하기도 바쁜 애가 무얼 그런 것까지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떡하니 내가 먹는 것만 설거짓거리로 남겨 두고 떠나면 부모님이 염치없는 애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밥 한 공기 더 푸고 국물 한 그릇 더 뜨는 게 나은 것이었다.
[ 학교 가는 길? ]학교 정문을 통과할 즈음 엄마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아침 자습을 하기 위해서는 교실에 들어가는 것보다 학생들을 위해 개방해 놓은 독서실에서 하는 것이 집중력에 좋았다. 위층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학교에 왔다고 대답하자마자 엄마가 오타 섞인 답장을 보냈다.
[ 밥 차리지 말니깐 ] [ 아침 거르지 말고 드시라고요. ] [ 고맙다~ 우리 딸 ]핸드폰을 닫고 계단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독서실 신발장에는 브랜드 운동화 한 켤레가 있었다. 나 말고도 먼저 온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전 학교에서는 이 시간이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방심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독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자 새까만 뒤통수가 보였다. 앉은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애였다. 서울 애들은 공부량이 남다르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잠에서 깨기 위해 사 온 탄산음료를 책상에 올려두고 가방을 풀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자애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서로 마주치자마자 목덜미가 움츠러든 건 내 쪽이었다.
하필 장희태였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그는 나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히 내 얼굴을 보려고 고개까지 높이 들었다. 허리를 편 그의 앞에는 어마무시한 수의 문제집이 젠가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비싸서 두 개 이상은 못 사는 것을 같은 걸로 여러 개 두고 푸는 모양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자리에 앉아 가방의 지퍼를 지지직 소리를 내면서 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따끔따끔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어폰을 빼서 책상에 던진 장희태가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았다.
부담을 느끼며 책부터 펼쳤다. 가방 안에서 필통을 꺼내는데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는 꼭두새벽에 장 뭐시기와 단둘이 있으려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라도 떠 먹으려는 건가 싶었다. 비누에 설탕을 섞은 향이 내 코를 찔렀다. 하얗고 커다란 손이 내 책상을 짚을 즈음에 말이다.
“어!”
그의 가슴팍에 달린 노란 명찰이 코앞에 있었다. 장희태는 내 책상에 올려진 문제집 한 권을 집어가 촤르륵 펼쳐 보았다. 필통을 끌어안은 나는 입만 쫘악 벌리고 있었다.
“다 풀었네.”
“아, 어.”
“하나도 안 틀렸고.”
“아니, 그, 틀리면 다시 풀었거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장희태가 내 문제집을 다시 돌려주었다. 천천히 받아 든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희태를 보며 침을 삼켰다. 서울 애들은 이런 식으로 제 경쟁자를 신경 쓰는 티를 내는구나. 나는 소심하게 쳐다보는 것밖에 못 하는데 쟤는 휘적휘적 걸어와서 남의 책도 들추는구나 싶다.
나도 장희태의 것을 보고 싶어서 그 애가 앉은 자리를 힐끔거렸다. 이어폰을 꽂으려던 장희태는 등받이에 팔을 올려 둔 자세로 돌아보았다. 얼굴이 멀끔하게 생기기는 했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참 불순한 시선만 보내던 장희태가 피식 웃으면서 의자를 뒤로 뺐다.
“억울해?”
“어?”
“나만 보니까 억울한지를 묻는 거야.”
그런 사람이 있다. 같은 말을 해도 밥맛 떨어지게 하는 사람 말이다.
“와서 보든가.”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는 기세를 보이기에 냉큼 달려가 그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엎어진 책을 한 권 집었다. 한 장 한 장 신중히 보던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이게, 이게 네가 필기한 거라고오?”
“그런데?”
“무슨 기계도 아니고…….”
자를 재고 그은 것처럼 글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붙어 있었다. 프린트 했다고도 믿을 만큼 가지런한 필기를 보고 새삼 장희태가 다르게 보였다. 내용도 알기 쉽게 쏙쏙 정리된 것도 모자라 수준도 상당하니 불안감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더욱이 장희태의 책상 위에 색색의 펜들이 일렬로 정리된 것이 보였다. 응당 학생이라면 있을 법한 지우개 가루조차 증발한 양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연필 자국도 없는 문제집을 보고 나는 얘가 보통 깔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겨질까 무서워 슬그머니 돌려주자 장희태는 각을 맞추어 제 책상에 올려뒀다.
“잘 봤다.”
“그런데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 들어왔어.”
“어? 허락?”
“여기 성적 상위인 애들 전용 독서실이라.”
“아, 아, 그랬나. 전에 학교에서는 다 같이 써서 몰랐다.”
“몰랐다고 하는 게 변명이 될 순 없다고 보는데.”
남의 사정 따윈 관심 없어 보이는 목소리가 나를 할퀴었다.
“오늘은 새벽에 여기까지 온 성의를 봐서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에도 오늘 같은 행운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마.”
말을 마친 장희태의 귀로 이어폰이 들어갔다. 그는 눈으로 저리 가라는 뜻을 내비친 다음 펜을 집었다. 학교의 차별적인 행동에 다 같이 들고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저토록 유용하게 쓰는 놈이 있으니 상당수의 혁명은 실패하는 거다. 하기야 교내 상을 장미반에 몰아준다는 얘기를 들을 때부터 내심 꽁해지긴 했었다.
집중력이 반 이하로 떨어졌다. 지우개를 꺼내 박박 연필 자국을 지우다가, 문득 전학 온 날 담임이 거들먹거리며 한 말이 생각났다.
“위층에 독서실 있는데. 거기 써도 된다.”
“아, 예에.”
“너는 성적이 될 것 같으니까 내가 거기 담당 선생님한테 말해 둘게. 쓰고 싶음 써.”
전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를 본 담임이 독서실을 이용해도 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나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장희태는 보통 예민한 게 아닌지 내가 오기도 전에 벌써 고개를 돌려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기. 장, 그러니까, 장희태였나?”
“그런데.”
“나 여기 선생님 허락받고 온 거거든?”
“허락?”
“내가 전에 학교에서 1등만 했으니 여기 써도 된다고. 그러니까 너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부터 하고 그러면 사람이 못 쓴다. 어?”
“하.”
내 말에 어디가 웃겼는지 모르겠으나 이어폰을 뺀 장희태가 하얀 줄을 제 손에 둘둘 둘렀다.
“전에 학교에서 1등만 했다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양 장희태의 말끝이 뾰족해졌다. 그의 기세에 찔린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그래.”
“어딘데 거기가.”
“내가 왜 알려 줘야 하는데.”
“원칙상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말했을 텐데. 담임이 그것도 말 안 해 줬나? 아, 내가 묻는 건 특혜로 들어와 놓고 이렇게 당당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야.”
“특혜든 뭐든. 어쨌든 못 올 데 온 건 아니란 말이…….”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우기 직전, 실내화로 갈아신은 누군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장희태의 고개도 돌아가고 내 고개도 돌아갔다. 나는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옆구리에 올린 손을 당장 휙 내렸다. 하얗게 빛나는 햇살을 몰고 김종선이 들어오고 있었다.
“희태, 하이.”
목소리가 꿀을 탄 우유처럼 곱다. 남몰래 음흉한 생각하는 차에 장희태가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나를 불렀다. 왜 말하다 말고 시선이 거기로 가냐는 뜻 같았다. 나는 삐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튼 그렇게 알아라.”
“무슨 얘기 해?”
장희태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 김종선이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모른 척하며 자리로 돌아가려는 내게 김종선의 관심이 쏠렸다.
“아, 걔다. 그 반짝이 입고 트로트 부른 애.”
다짜고짜 던진 말에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김종선이 장희태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너도 재밌다고 했잖아.”
입술이 삐쭉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살면서 불만이 많은지 제 친구가 말을 거는데도 이어폰을 꽂는 인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김종선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처음이 나쁘면 끝도 나쁘다더니 장희태와는 악연인 듯싶었다.
반드시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자리에 앉아 장희태의 문제집에서 봤던 부분을 되짚었다.
씨이, 나보다 정리를 깔끔하게 잘했네. 장희태의 필기를 몰래 따라 적으며 내용을 추가하니 훨씬 머리에 잘 들어왔다. 성격만 나쁘지 않으면 종종 문제집을 훔쳐보고 싶을 정도였다. 부탁의 말을 꺼내느니 개한테 수학을 가르치는 게 나을 성싶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장미반에 들어가면 김종선이도 같이 볼 수 있는 건가. 장미반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장희태와 아니, 김종선 마이 엔젤과 농담 따먹기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로 발전했다. 매일 아침에 독서실까지 올라와 공부하는 게 우리 셋밖에 없기도 했고 만나면 시비 아닌 시비를 거는 장희태와 달리 김종선은 함께 먹자며 젤리 같은 것을 나누어주니 말이다.
기말고사가 있는 당일에도 독서실에 올라온 나는 우연히 가방을 챙겨서 내려가는 장희태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웬일로 아침 공부를 하지 않고 내려가는 장희태가 신기하긴 했지만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지라 무시하고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어어.”
장희태의 손이 내 가방끈을 붙잡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문 닫혔어.”
따져 묻기도 전에 장희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래?”
“담당 선생이 잊었나 본데.”
“음.”
종선이도 같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마당이니 교실에 돌아가서 오답 노트라도 봐야겠다. 내가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자 장희태도 나를 따라서 내려왔다. 앞서가고 싶은 마음에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억.”
다행히 몸이 앞으로 쏠리기 전에 장희태가 가방끈을 잡아 당겨주었다. 팔이 길쭉해서 그런지 한 방에 나를 잡은 셈이었다.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창피해 몸을 일으키자 장희태가 가방끈을 놓아주며 내 옆을 지나쳐 갔다.
“시험 보기도 전에 머리 깨져 죽으면 아깝지 않겠어?”
“고마, 워.”
까딱하다간 처녀 귀신으로 남을 뻔했는데 이 정도 비꼼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같이 공부한 사이라 그런지 애가 의리가 있었다. 장희태는 내 고맙다는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반이 있는 복도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서 쿨한 척은 다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고맙다는 인사에 대답 좀 해 주면 혓바닥에 뭐가 돋는가 보다. 저리 무심한 녀석을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애들도 본 성격을 알고 나면 학을 떼고 도망갈 터였다.
그때 교복이 아닌 체육복을 입고 뛰어 올라오는 김종선이 보였다. 서둘러 앞머리를 정리한 나는 뛰느냐고 정신없는 김종선을 불렀다.
“저기.”
내가 들어도 낯간지러운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김종선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응? 나 불렀어?”
“오늘 독서실 문을 안 열었다네.”
“아, 그래? 그럼 희태도 반에 갔겠네.”
“응.”
내 목소리에 내가 적응이 안 돼서 닭살이 와다다 돋았다. 하지만 나의 엔젤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시험 잘 봐, 우림아.”
“어, 어.”
우림아, 라니. 성 떼고 부르면 사귀자는 소리 아닌가 싶다.
종선이는 청춘의 망치로 내 심장을 후려 패고 떠나갔다. 시험을 못 봐도 잘 봤다고 해야 할 정도로 다정한 인사말이었다.
“독서실 문 안 열렸니?”
교무실로 가던 길에 나를 발견한 선생님 한 분이 계단 쪽으로 걸어왔다.
“예.”
“아유, 참 이 선생님이 또 지각했나 보네. 교무실에서 열쇠 갖고 올라갈 테니까 기다려.”
“아, 그, 오늘은 교실에서 하는 게 어떨까 해서.”
“그럴래?”
“예.”
나는 마지막까지 사라지는 종선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음미했다.
“안 들어가고 뭐 하니?”
짝사랑이 집중력을 해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말인가 보다. 자칫하면 1등을 놓친다는 생각에 계단을 뛰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성실도나 공부 센스를 따졌을 때 이 학교에서 제일 위협적인 것은 장희태였다. 그 콧대 높은 녀석한테 고이 1등을 내주고 질 수 없었다.
예상대로 나밖에 없는 교실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을 차였다. 핸드폰으로 띠링띠링 문자가 연달아 왔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걸고 핸드폰 뚜껑을 열자마자 아빠에게 온 문자가 보였다.
[ 꿀떡이 건강하단다. ] [ 건강한 여동생 생기겠네. 우리 공주. ]아빠는 항상 문자에 마침표를 넣는다. 기대된다고 답장을 보내야 하지만 나는 멍하니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반에 히터를 틀지 않으니 손이 떨렸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핸드폰을 덮었다.
“참, 못났다. 배우림.”
하필 여동생이다. 공주님처럼 어여쁘고 귀여운 애가 태어나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찔끔 나온 콧물을 소매로 닦고 있을 때 반의 앞문이 열렸다.
“뭐야. 내가 제일 일찍 왔을 줄 알았는데.”
분홍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른 유선영이 교과서를 가지고 내 자리로 왔다.
“우림아. 나 이것 좀 알려 줘.”
오답 노트를 봐야 할 시간임에도 남이 제 것을 봐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하지를 못하겠다. 나는 기초 문제를 알려달라는 선영이를 붙잡고 개념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선영이만 가르치면 끝날 줄 알았던 과외는 우리 반 애들이 전부 몰려들기 시작해 어느덧 속성 족집게 과외로 변하고 있었다.
시험에 나올 내용만 집어달라는 애들에게 그럴 거면 내가 교사를 했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수시에 반영되는 시험을 앞두고 절박한 심정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기에 1교시 시작 전까지 복습 겸 과외를 계속했다.
“자, 필통이랑 책 다 집어넣고. 책상 안 싹 훑어봐라. 뭐 걸리는 거 없는지.”
교과서를 전부 빼서 사물함에 넣어두었으니 아마 걸리는 게 없을 거다. 성의 없이 책상 안을 훑은 나는 샤프 한 자루와 펜 한 자루를 꺼내 놓았다. 앞자리라서 맨 먼저 시험지를 받아 뒤로 넘기었다. 몇 분 뒤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펜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풀기 시작했다.
서울이라서 엄청 쫄았드만 별거 아니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첫 장을 누구보다 빠르게 넘겼다.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 첫 문제를 푸는데 장희태의 문제집에서 보고 두세 번 체크해 둔 게 문제로 나왔다. 걔도 이거는 껌으로 풀었겠지 싶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어 펜의 끝을 질겅질겅 물면서 문제를 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걱정한 것에 비해 문제가 잘 나온 편이었다. 일부러 전학생을 배려해 쉽게 내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험지 받는 것도 첫 번째로, 문제를 다 푸는 것도 첫 번째로 끝냈다. 시간이 남아돌아 두세 번 더 확인하는 호사까지 누렸다.
시험 난이도에 대해선 모두가 쉬웠다고 할 줄 알았으나 쉬는 시간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졌다. 나 혼자 잘 본 것 같아 말을 아끼고 있을 때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내 등을 펜 끝으로 찍었다.
“저기 우리 3번에 몇 번이었어?”
올 것이 왔다. 이제 답이 맞니 아니니 싸울 것을 생각하고 나는 어깨에 힘을 줬다. 앞으로 장장 사흘간 이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일 터다.
“자, 함 맞춰보자.”
***
이번 기말이 화형대가 될 줄 알고 철저히 대비해서 그러한가 나에게는 가스레인지 불 정도 되는 시험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속으로만 말이다. 죽상인 애들이 한가득인데 여기서 잘난 체를 했다간 밉보이기 십상이었다. 예상 점수를 적어놓은 쪽지를 접어서 필통에 넣어놨더니 옆자리에 유선영이 관심을 가지며 칭얼거렸다.
“너 이번 시험 잘 본 것 같드라. 저번 학교에서도 공부 잘했다더니. 부럽다.”
“아이, 무슨. 아이다, 아이다.”
칭찬을 듣는 게 쑥스러운 와중 담임이 함박웃음을 하고 교실로 들어왔다.
“아, 우리 반 평균 좀 올랐드라.”
벌써 선생들끼리는 채점이 끝난 건지 일주일 뒤에 성적표가 나온다는 말만 흘릴 뿐이었다. 오늘 조회는 여기서 마칠 테니 일찍 들어가 보라 얘기했다. 코로 나팔을 부는 담임이 나를 보며 눈을 찡긋거리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나는 높은 성적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자신하며 가방을 꺼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 부모님과 운삼동에 삼겹살을 먹으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날만을 기다린 터라 짐을 챙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우림아.”
“어?”
“우리 노래방 갈 건데. 같이 갈래?”
여자애 셋이 옹기종기 모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을 다 외워서 알긴 하지만 아직 얼굴이랑 이름이 다 매치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억지로 굳은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타. 나 오늘 일찍 가 봐야 해서.”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응? 노래방 가서 스트레스도 풀고. 어? 어?”
특히 유선영은 보통 끈질긴 게 아니었다. 노래방에 가도 하교 시간이 늦지 않을 듯싶지만 집에 가서 한 번 더 문제를 풀며 복기하고 싶기에 갈등 됐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여자애들을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흔쾌한 척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무리에 합류했다.
정문을 나서서 하교하는 길까지는 좋았다. 내가 수학여행 때 부른 트로트를 다시 한번 불러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아이들과 얼마쯤 생각 없이 웃었던 것도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는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것도 공감 가는 얘기였다. 다만 우리의 문제는 사춘기를 지나고 성에 눈을 뜬 청소년이라는 점에 있었다.
“저거 장희태 아니야?”
바로 요 앞에서 골목만 꺾어 들어가면 노래방이 나왔다. 때아닌 불청객을 찾아낸 여자애들의 발이 땅에 들러 붙어버렸다. 빙수 가게로 사라지는 장희태의 뒷모습을 누가 오래오래 보는지 내기라도 하나 싶었다. 나는 이 근방 학생이면 서비스 팍팍 준다는 노래방을 엄지로 가리켰다.
“우리 빙수 먹고 안 갈래.”
“그래, 가서 우리도 빙수 먹자.”
“빙수? 날도 추운데 뭔 빙수?”
우리도, 라니. 쟤네하고 우리는 마치 물고기와 닭처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빙수고 뭐고 그런 데에 용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 빠지려는 찰나 여자애 한 명이 내 가방끈을 붙들고 빙수 가게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아이, 저기.”
“노래방도 가고 빙수 가게도 가고 그러는 거지.”
“맞아, 맞아.”
쓸데없이 해맑은 애들에게 끌려 계단을 올라갈 때야말로 이가 갈린다는 느낌이 뭔지 정확히 알게 됐다. 장희태, 장희태. 사사건건 나의 일에 나타나 시비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부디 3학년이 됐을 때는 쟤랑 같은 반이 아니기를 빌 뿐이었다.
빙수 가게로 들어가는 여자애들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가게 안을 훑었다. 아닌 척하면서 어떤 화상을 찾는지 뻔히 보이는 눈이었다. 아까 장희태의 옆에 종선이가 없던 것을 확인한 나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희망을 품은 여자애들에게 찬물을 끼얹어주고 싶었지만 쪽수에서 밀린 나는 패잔병처럼 여자애들 뒤를 따라갔다.
창가 쪽에 장희태가 있는 것을 발견한 여자애들이 재빨리 몸을 숨길 수 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출출하다.”
“아예 여기서 밥도 먹을까?”
“돈까스, 돈까스. 그리고 눈꽃 빙수 먹자.”
입으로는 메뉴를 읊으면서도 눈은 소파 너머 남자 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배라도 채워야겠다 싶은 나는 손을 들어 사장님을 불렀다. 생크림과 구운 식빵을 가져다준 사장님이 웃으며 물었다.
“아는 애들이니?”
“아, 아니요.”
“자주 와요? 쟤네?”
남학생의 스케줄을 일일이 알 리 없는 사장님은 그저 우리가 짝사랑에 빠진 여자애들인 줄 알고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하나로 묶이고 싶지 않아 나는 빵을 생크림에 푹 찍어 먹으면서 웅얼거렸다.
“돈까스 네 개랑 눈꽃 빙수 하나요.”
“돈까스 먼저 줄까?”
“네!”
용돈도 차비를 빼면 그렇게 여유롭지 않은데 이나 시리게 하는 빙수 같은 것에 돈을 쓰는 게 짜증이 났다.
돈까스를 기다리며 시답잖은 수다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열띤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서로서로 입을 단속하는 여자애들 뒤로 장희태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지나가던 장희태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잘만 가던 걸음이 멈추었다. 얼른 눈길을 돌렸으나 분위기를 보건대 가지 않고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쟤 왜 저래.”
가만히 속삭이는 말에 고개를 드니 청소년의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장희태가 보였다. 설마 아는 척을 안 해서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서 손을 흔들려는 찰나였다. 검은 책가방에서 지갑을 꺼낸 장희태는 제게 모여든 관심을 칼같이 자르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삼만 오천 원.”
“여기요.”
현금을 건넨 장희태는 잔돈을 거슬러 받자마자 무심하게 가방을 여닫고 빙수 가게를 나갔다. 제 친구들은 떠난 것도 모르는 눈치인데 혼자서 가 버린다. 저 당당한 태도는 아마 억만금을 주고도 못 배울 터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 속이 다 시원한데 빙수 가게에 온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 여자애들은 기운이 빠져버렸다.
“아, 뭐야. 음식도 안 나왔는데 가 버리네.”
“우리도 그만 갈까?”
나는 기가 차서 소파에 누워있던 등을 바로 세웠다.
“아니, 시킨 건 다 먹어야지. 안 그럼 못 나간다, 오늘.”
장희태를 따라 나가고 싶어 하는 애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포크를 쥔 주먹으로 식탁을 쳤다. 억지로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있는 애들의 얼굴이 한편으로는 고소했다. 그러니까 노래방에 갔으면 이런 사달도 안 일어날 텐데 말이다.
영양가 없는 일로 기운을 뺀 우리에게 돈까스가 내려왔다. 바삭한 돈까스를 흥얼거리면서 썰고 있는 나와 달리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애들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가 있었다.
“뭐야. 진짜 갔냐?”
“하여간 그 새끼 그거 병이야.”
“어쩌겠냐. 할아버지가 몸에 좋은 것만 먹으라고 했다는데.”
“아니라니까, 씨발. 병이라고, 병. 내가 길거리에서 어묵 국물 먹는 거 보고 나를 무슨 벌레 보듯 했다니까.”
“아, 몰라. 계산은 했대?”
“몰라, 씨발, 했겠지.”
말끝마다 쌍스러운 욕을 붙이는 게 다른 의미론 대단하다 싶었다. 건너편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던 여자애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쟤네 우리 학교 애들 아니지.”
“중학교 동창인가 봐.”
“같이 놀자고 할까?”
돈까스의 반을 혼자서 해치우고 있던 나는 사레가 걸릴 것 같아 다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뭐?”
“아니, 가서 놀다 보면 장희태가 올 수도 있고.”
“맞아, 맞아.”
“헐 진짜 그래볼까.”
보면 모르나. 장희태의 몸값이 금값이었다. 실소가 나오려는데 내 앞에 있는 돈까스 세 개가 식어서 눅눅해진 게 보였다. 일부러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을 꺼내서 본 나는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이걸 어쩌나. 나 가 봐야겠다.”
“왜? 우리 노래방 안 가?”
“아, 나 학원에서 뭐 시험 난이도 확인한다고 오라 하네. 미안타. 내가 여기 계산하고 갈게.”
“아, 진짜? 어쩔 수 없지.”
내가 은근히 거슬렸을 거다. 같이 어울려 놀기에는 우리는 감성이 맞지 않았다. 아까운 용돈을 쓰게 됐지만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까짓 돈 열 번도 더 내겠다. 어쩐지 아까 장희태와 똑같이 계산을 떠맡은 꼴이지만 말이다.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서 사장님께 건네고 빙수 가게를 나왔다. 돈까스만 먹은 것치고 비쌌지만 지나간 일에 오래 미련을 두면 좋지 않았다.
주섬주섬 가방 지퍼를 채우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바람이 들 차서 마이 하나로 견디기엔 추운 계절이 왔다.
부직포처럼 얇은 마이로 바람을 막으며 버스 정류장 앞까지 왔다. 왔다 갔다 발을 움직이면서 몸의 체온을 높이려 애썼다. 마침 집 앞까지 가는 버스가 신호에 걸렸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교통 카드를 꺼내 드는데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딸기 사탕 냄새를 풍기며 내 앞을 지나갔다.
향기를 따라서 시선을 들다가 나는 우뚝 굳어버리고 말았다. 김종선이다. 그것도 혼자였다. 초록 신호를 받고 달려온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만날 돈을 아끼기 위해서 걸어 다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버스를 탔으면 종선이하고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땀이 나는 손으로 얼은 코하고 입술을 매만지며 버스에 올라탔다. 눈으로 종선이가 탄 자리를 스캔한 뒤에 그 뒷자리를 노렸다. 다행히 종점에서부터 학교 앞까지 몇 정거장 없는 터라 손님이 많아야 한둘이었다. 나는 종선이의 뒷좌석 창가 자리를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채점한 시험지를 들고 있는 종선이가 가위표 쳐진 문제를 들고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점수를 보니 이번 시험을 잘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도 한두 문제 틀리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점수가 낮지만 저 정도로 반토막이 난 것으로 보아 이번 시험 난이도가 종선이에게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풀 죽은 종선이가 안타까운 나머지 내가 내릴 곳도 놓치고 말았다. 어차피 걸어서 얼마 안 되는 거리니까 다음 정류장에 내려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종선이가 시험지를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맹세하건대 스토커처럼 따라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나도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니까 내리는 것뿐이었다.
속마음을 숨기고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종선이는 내가 있는 것도 모르는지 무념무상인 얼굴로 버스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괜한 기우였는지 종선이는 무사히 버스의 계단을 내려갔다.
종선이의 동네는 이 동네서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삼십 분째 올라갔다. 2층, 3층으로 언덕에 건조된 주택들이 눈 돌아가게 화려한 지붕을 달고 있었다. 종선이는 회색 담벼락이 산처럼 솟은 대문으로 들어갔다. 초인종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힌 건 덤이었다.
택시를 탈 형편이 아니라 언덕을 내려가 도로로 나가는 데까지만 한 시간을 썼다. 말도 못 걸면서 집부터 알아내는 무모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좌우지간 종선이랑 같이 하교하는 기분을 냈으니 이 정도 고생은 껌값이라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
버스비도 간당간당해서 종선이네 동네부터 집까지 걸어왔다. 오늘은 외식이 있는 날이니 들어가자마자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는 계획을 짜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아파트 복도에 울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말고 심호흡했다. 평소 일이 바쁜 부모님 때문에 이 시간에 집이 시끄러울 일은 없었다. 즉 손님이 왔다는 뜻이었다. 명찰이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재차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웃고 떠들던 입술들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들이 못마땅함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이 내 가족이었다. 나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 우림이 왔나.”
“어서 와라. 여기 밥도 있다.”
그나마 엄마랑 친한 고모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해 주었다. 친할머니는 무뚝뚝한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아주는 척하다가 곧바로 엄마의 배로 손이 갔다.
“아고, 우리 꿀떡이. 이거, 이거 복덩이 아이가.”
“엄마. 왜 우림이한테 아는 척 안 하나.”
시어머니와 퍽 사이가 좋았던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시댁과 인연을 끊은 지가 오래되었다. 최근 들어서야 꿀떡이가 생긴 것을 안 할머니의 극진한 사과로 마음을 풀었다지만 아직껏 앙금이 남은 모양이었다. 친할머니는 온 지도 몰랐다는 것처럼 놀란 표정을 하며 내게 손짓했다.
“아, 까묵었다. 어서 와라, 우림이.”
혹여나 겨우겨우 붙은 사이가 다시 멀어질까 봐 애써 노력하는 친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이게 다 내 잘못인 듯싶었다.
“예, 안녕하세요.”
“네 시험 봤다매. 잘 봤나.”
“예, 잘 봤습니다.”
“우림아 할머니랑 고모가 갑자기 오셔 가지고 밥을 미리 차렸다. 삼겹살은 다음에 묵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엄마. 다음에 묵지, 뭐.”
교복부터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한 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는 고모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이 엄마와 연을 끊게 된 그 날을 떠올렸다.
열 살을 먹고 맞이한 설날인가 추석이었다. 가족끼리 모여 전을 부쳐서 먹는데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돼서 할머니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놓지 않던 할머니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틀고 볼륨을 높였다.
-뻐꾸기는 알을 낳을 시기가 다가오면 미리 봐 두었던 다른 새의 둥지에 있는 알과 바꿔치기합니다. 아니면 다른 새의 알에 숨겨 두어…….
엄마가 부쳐 준 호박전이 뜨거워 호호 불어 가며 먹고 있을 때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발가락으로 내 등을 찍었다.
“야.”
“네?”
호랑이같이 무서운 표정을 한 할머니가 티브이 좀 보라면서 리모컨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니 안 보이나. 니도 뻐꾸기 아이가, 뻐꾸기.”
고모와 전을 부치던 엄마가 티브이 쪽을 주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티브이 볼륨이 하도 커 듣기 싫어도 들렸으니 말이다. 상황 파악이 끝난 엄마와 아빠가 전을 부치던 뒤집개를 버리고 달려와 목에 핏대를 세웠을 때는 이미 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진 후였다. 질겁한 아빠가 내 귀를 막았다.
“어데 데려올 게 없어서 남의 핏줄을 데려와 키우노. 어? 것도 파양을 두 번씩이나 당한 물건이다, 저거.”
“물건이라 하지 마이소, 예? 얘는 이제 내 새끼예요, 내 새끼.”
다시는 우리 얼굴 볼 생각 말라고 뛰쳐나온 엄마와 아빠는 그날 이후로 설이든 추석이든 집에서 밥을 해결했다. 외가 식구가 없는 엄마는 친가 식구를 제 가족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외로움 많이 타는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그만큼 싸워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했다. 한 대 맞은 것처럼 코가 시큰거려 가만있을 수 없었다. 셔츠를 벗다가 말고 메리야스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엄마가 아무래도 입양을 잘못한 게 맞았다. 할머니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나이가 있고, 그간 임신이 힘들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심을 하고 있었다. 꿀떡이를 가진 게 기적이라는 의사의 말이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동생이 기대된다고 말했지만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다. 대학을 입학하면, 아니, 대학을 졸업하면 의젓하게 버림받을 수 있을까. 나이가 어려 마음이 잠기는 우울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는 걸까. 알 수 없다. 나는 단지 꿀떡이를 만나게 된 이 겨울이 너무도 추워서 심술 난 뻐꾸기일 뿐이었다.
***
할머니는 꿀떡이의 옷부터 양말까지 수십 벌은 사 오고 엄마 눈치를 봐서인지 내 잠바도 하나 사 주셨다. 그 잠바를 입고 등교하게 된 나는 백 퍼센트 오리털이라는 상표가 붙었음에도 추위를 느꼈다. 등교할 때만 입고 학교에서는 대체로 교복 마이나 담요를 덮고 있었다. 히터가 고장이 났다는 말에도 겉옷을 입지 않고 있자 애들이 춥지도 않냐고 물었다.
“추위를 안 탄다.”
손이 떨리는 걸 숨기기 위해 핫팩을 매점에서 한 움큼 사 왔다. 따끈한 핫팩을 쥐고 필기를 정리하는데 반장이 호들갑을 떨면서 종이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야. 밖에 내년 장미반 애들 이름 떴더라. 그런데 미쳤어.”
들어올 때부터 열성에 차 있던 반장이 내 쪽을 보면서 소리쳤다. 아닌 척 장미반이라는 이름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애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전교 1등했더라, 우림이.”
“뭐?”
“와아, 진짜?”
오늘이 성적표 나오는 날이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로 1등일 줄은 몰랐다. 애들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놀라기는 내가 더 놀랐다. 나는 고맙다는 표시로 웃어 보이곤 얼른 일어나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종례 후 반마다 한 장씩 돌리긴 할 것이지만 학교 알림 게시판이라는 곳에 미리 학년별로 들어가게 될 장미반의 이름을 공개한다고 들었다. 그게 오늘인 줄 몰랐기에 한발 늦은 감이 있었다. 로비 게시판 앞에 3학년이 될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배우림이 누구야?”
“5반에 전학 온 애.”
“전학 오자마자 1등이라고?”
“전에 학교에서도 공부 잘했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한 무리 속으로 끼어드는 게 어쩐지 쑥스러웠지만 정말 1등인지 아닌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전에 학교에서는 설령 1등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성적표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경쟁을 부추기듯 게시판에 붙여 놓는 건 처음이었다.
글씨의 크기는 작았지만 장미반이라는 제목과 가장 상단에 올라와 있는 내 이름이 보였다. 1등이라고 아이들이 확신하는 건 가장 상단에 내 이름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려나. 여하튼 3학년 1학기는 무사히 독서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장희태. 네가 웬일로 2등으로 밀려났냐.”
게시판에 머물던 시선이 뒤로 잡혀갔다. 무표정한 얼굴의 장희태가 게시판에 붙은 종이를 닳을세라 보고 있었다. 지루해 보이는 얼굴을 돌리는 순간에 서로의 시선이 만났다. 짧은 찰나였지만 느낄 수 있었다. 오만과 경멸에 찌든 눈으로 나를 훑고서 지나쳤다. 옆에서 뭐라고 하건 신경 안 쓰던 놈이 계단으로 올라가기 직전까지 냉기를 풍겼다.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이 저놈 때문에 더 추워지는 기분이라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설마 1등은 뭐 자기만 해야 한다는 그런 게 있는 건가. 나를 업신여기듯 보던 눈이 적의로 차 있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번에는 잘하지 않으면 1등을 도로 돌려줄 수도 있겠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싸하게 만들었다. 3학년이고 하니까 성적 높은 애들끼리 붙여두면 공부 환경이 좋아진다고 반 하나에 몰아넣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할 새가 없었다. 오자마자 수학여행과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다 같이 영화나 보거나 아니면 3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한 예비 수업을 치르거나였다. 그마저도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이 태반이라 학업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2학년 2학기가 끝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년 초여름 즈음이면 나올 꿀떡이 때문에 심란한 와중 겨울 보충 수업을 들을 거냐고 물어보는 설문지가 나왔다. 평소라면 학교에서 들었을 테지만 반 아이들이 워낙 공부는 어떻게 하냐 문제집은 뭐 푸냐 물어대는 통에 학원이나 집에서 혼자 예습을 할 생각이었다.
“안 돼.”
“네?”
“우리 학교 장미반 애들은 방학 때 다 나와야 하거든?”
“아, 저, 선생님. 의무인가요?”
“필수야, 필수. 다른 애들 다 나오는데 너만 안 오면 손해다. 장미반은 학교 끝나고 따로 보충 수업도 받는다고. 겨울 방학 때부터 다 같이 진도 나가는데 너만 안 들어올 거야?”
일부러 학습 계획표를 내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이 방학 시작인데 주말을 제외하곤 꼼짝없이 학교에 나오게 생겼다. 그렇다고 싫다며 난리를 치자니 장미반에 들어갔다고 부모님이 거하게 한턱 쏜 것이 생각났다. 콧대 높은 고모랑 할머니한테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그 호랑이 같은 할머니마저 너 공부 좀 하니까 꿀떡이 태어나면 언니로서 잘 가르치라는 말을 했다. 엄마는 그 말조차 언짢아했지만 어쨌든 꿀떡이 언니로 인정을 해 주는 것만 같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늘 학교 끝나고 3학년 1반에 들러서 미리 문제집 뭐 사야 하는지 체크하고 가. 남은 1년 잘하고.”
“예에.”
방학 때는 좀 대충 살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버려 곤란한 상황이 돼버렸다. 툭 하면 나와서 문제를 풀어 보라고 시키는 수학 선생님을 겨우 안 봐도 된다고 생각했더니 방학 특강에 버젓이 그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일이 다 있나.”
오후까지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한다는 내 방학 계획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담임이 말해준 대로 3학년 1반 교실로 들어가는데 이미 들어와 있던 애들끼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친목으로 다져진 애들이라 웬만해선 끼기 어려울 텐데 앞으로 학교 끝날 때마다 봐야 한다는 게 난감할 따름이었다.
“요 맨 앞줄에 앉아라.”
하얀 종이를 배부해 주고 있던 선생님은 긴 자로 첫째 줄 첫 번째 자리를 가리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선생님이 가리킨 자리로 걸어가고 있던 나는 바로 옆줄에 앉아 있는 장희태를 보자마자 스트레스로 목이 결렸다.
아니, 하고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 장희태 옆자리인가. 이미 예정된 것처럼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니 성적순인가 싶기도 했다. 조용히 앉아 준비물 적힌 종이를 받은 나는 쫘르르 적혀 있는 문제집 목록을 보고 속으로 기함했다.
한두 푼짜리도 아닌 것을 두 권 이상씩 과목별로 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필기용과 숙제용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언뜻 독서실에서 문제집을 머리끝까지 쌓아두고 있었던 장희태가 생각났다. 할머니한테 이걸 보이면 돈 먹는 하마라고 욕먹을 게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게다가 장미반 담당이란 선생님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특별 보강비는 다음 주까지 입금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거 꼭 부모님한테 보내드리고.”
“네.”
늘 있는 일인 것처럼 넙죽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소외감이 들었다. 특별 보강비라고 적힌 금액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었다. 특별 수업이다 뭐다 했지만 웬만한 학원비 맞먹는 금액이었다.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선생님은 준비물을 잘 챙겨서 오라고 말한 뒤 떠나가 버렸다. 나는 아이들이 가방을 챙겨서 떠나가든 말든 멘탈 회복에 집중했다.
기왕 부모님 돈이 들어가게 된 것, 기똥차게 잘해야 할 텐데. 부담감을 한 사발 삼키는 때에 옆자리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새로 산 문제집을 오타 검수하듯 손으로 넘기고 있는 장희태가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가고 없는 교실에 남아 나와 단둘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전교 1등을 한 뒤로 묘하게 나와 장희태의 성적을 두고 비교하는 아이들이 많아져 얘와 단둘이 있는 건 리스크가 있었다. 3학년이 돼서 같은 반이 되는 것만 아니기를 빌고 있는데 방학 내내 옆자리라니 쫄딱 망한 기분이었다.
받은 종이를 가방에 넣고 없는 사람처럼 자리를 뜨려 하는데 제 문제집 검수를 끝낸 장희태가 입을 열었다.
“배우림이랬지.”
심상치 않게 낮은 목소리에 매던 가방을 보물단지처럼 끌어안았다.
“어……. 맞는데.”
“어디 학원 다녀.”
누구나 다 자기처럼 학원을 다니는 줄 아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나는 최대한 장희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곤조곤 말했다.
“나 학원 안 다니는데.”
“안 다녀?”
“안 다닌다꼬.”
붙임성 없는 녀석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분위기도 풀 겸 손가락으로 장희태의 입술을 가리켰다.
“니 반창고 떨어질락 말락 한다. 제대로 좀 붙여 봐라.”
내 말에 성의 없이 제 입술 위쪽에 붙은 반창고를 쓰윽쓰윽 문지른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저러니까 접착력이 떨어지지 싶었다. 칠칠찮게 걸어가다가 전봇대 같은 데라도 부딪힌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볼 일이 남은 장희태의 입술보다 빨리 움직였다.
“나 간다.”
떠돌아다니던 묘한 시선이 내게 그쳤다. 저게 적대하느라 경계하는 눈빛일까. 아니면 학원 안 다닌다는 게 구라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눈빛일까. 인정이라곤 엿 바꿔먹게 생긴 애가 표정까지 없으니 무서워 죽겠다. 어설피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떠나는 내 뒤로 따라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필 방학식이라서 일찍이 하교하는 바람에 학교에는 나와 쟤밖에 없었다. 왜, 괴담 중에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1등을 질투한 2등이 계단에서 밀어버리는 괴담 같은 거 말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인 것 같아 복도를 뛰어가는데 뒤에서도 최선을 다해 쫓아오는 듯 발소리가 멀어지지 않고 점점 가까워졌다. 나를 따라잡은 손에 가방끈이 휙 들려서 가던 걸음이 멈추어졌다.
“오, 왜.”
위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팠다. 무게 잡고 쳐다보면 누가 쫄 줄 아나. 한 대 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장희태가 제 가방을 앞으로 메더니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까만 가죽 지갑이었다. 동네 문구점에서 산 지갑으로 고등학교 2년을 버틴 나는 성인만 가죽 지갑을 가지는 줄 알았다. 장희태의 손에 들린 새파란 지폐 여러 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나?”
“이거 받고 모자라면 말해.”
“나를 준다고?”
“학원 이름. 맨입으론 싫으시다며.”
나는 내 앞에서 얼른 가져가라는 듯이 팔랑거리는 지폐 열 장 때문에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갔다. 됐다는 듯이 손을 젓자 장희태는 한숨을 내쉬며 제 지갑을 열었다. 보다 못한 내가 장희태의 지갑을 휙 뺏었다.
“이거 뭔 뜻이고. 지금 나 걸뱅이 취급하나.”
“걸뱅이?”
걸뱅이가 뭔 뜻인지 모르는지 장희태가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돈 안 받고 알려 줄 거면 진작 그러지.”
“나 안 다닌다고 한 백번 말해야 고 귓구멍 좀 팔래. 전에 학교에선 다녔는데 여서는 안 다닌다꼬.”
지갑을 제 주머니에 넣은 장희태가 가방을 뒤로 메면서 나를 가만 쳐다보았다.
“아, 그러셔.”
남을 마음대로 의심하고 재단하는 놈이 돈 무서운 줄 모르는 게 화가 났다. 지금까지 돈 몇 장 주면 경쟁자들이 술술 불었나 보지.
“뭐 저런 싹퉁바가지가 다 있나.”
결심했다. 저딴 싸가지를 씨리얼에 말아먹은 새끼한테는 절대 지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
“필기는 설명 다 듣고 해라.”
“예.”
선생들마다 스타일이 또 다 달라서 이 선생님은 설명을 다 듣고 필기를 해야 하고 저 선생님은 설명을 들으면서 필기를 하라고 한다. 이래서 인터넷 강의나 나하고 잘 맞는 학원 선생님 한두 명을 만나는 게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선별하여 모아놓은 애들을 위한 선생님이라 그런지 학교 시험에 나올 내용 같은 것을 미리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게 좋은 점이었다. 대놓고 알려 주진 않지만 미리미리 체크해 둘 수 있도록 은근히 힌트도 주고 말이다. 이래서 다들 장미반에 들어오려고 용을 쓰나 보다.
“선생님. 잠깐 지우지 말아 주세요.”
성질대로 필기 내용을 지우지 못한 선생님이 질문을 한 학생을 째려보았다. 뒤돌아서 어떤 불쌍한 중생인지 확인을 하는데, 세상에, 마이 엔젤이 거기에 앉아 있는 거다. 장미반에 들어올 성적이 아닐뿐더러 명단에서도 김종선이라는 이름을 보지 못해서 반가운 차였다. 수업을 듣는 애들의 표정이 말도 아니게 안 좋은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고개를 돌렸다.
장미반 애들은 쉬는 시간에도 어디 가지 않고 복습하는 시간을 자체적으로 갖는 분위기였다. 나 또한 반 분위기를 본받아 엉덩이도 못 떼고 있었다.
더욱이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하나 어쨌든 장희태의 열정만큼은 높이 사고 싶었다. 자습이라는 명목으로 학교는 오후 10시까지 개방을 해 두었는데 나하고 장희태만이 그 10시를 매일같이 꼬박 채우는 중이었다. 학교가 4시에 끝이 나면 다른 애들은 학원이다 뭐다 하면서 떠나는데 오로지 장희태만이 끝까지 남아서 하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마지막에 반의 문을 잠그고 나오는 건 나나 장희태였다.
“엄마야.”
창밖에서 자습 시간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는 빗방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임신한 엄마한테 번거롭게 학교 앞까지 데리러 와 달라는 것도 그렇고 아빠는 직장이 멀었다. 더군다나 엄마한테 차를 내어주고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아빠인데 이 늦은 시간에 학교까지 우산을 갖다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한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 예보라도 보고 나올 걸 그랬다.
하는 수 없이 가방이라도 뒤집어쓰고 가야겠다. 종소리가 울리기 십 분 전에 가방을 챙긴 장희태가 오늘도 인사 없이 교실을 나섰다. 종선이는 보충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사라지는 바람에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적이 안 되는 종선이가 장미반 수업을 듣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엔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벌써 이 주가 넘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종선이와 대화는커녕 인사도 못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하늘이 주신 기회인데.”
아쉬운 뉘앙스로 말한 뒤 문제를 푸려는 순간이었다. 우릉릉, 쾅쾅, 하늘을 반으로 쪼갤 듯이 내려치는 천둥소리에 놀라 펜을 떨어트렸다. 상황을 생각해 보니 천둥 치는 날에 나 혼자 야자까지 하는 것이었다. 복도 전등이 정전을 알리듯 깜빡거렸다.
공부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필기구를 필통에 집어넣는데 눈가가 젖었다. 오래된 전등은 연신 켜졌다 꺼졌다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가방 지퍼를 잠그던 나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정체불명의 발소리가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직 선생님은 이 시간대면 퇴근하고 없을 시간이었다. 방학에도 늦게까지 남을 자신이 없다며 열쇠를 교무실에 걸어두고 가란 사람이 태반이었다. 남아 봐야 나하고 장희태기 때문에 선생들은 8시까지 봐주다가 퇴근하기 일쑤였다. 경비 아저씨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기엔 열쇠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반마다 들러서 확인하지 않고 오로지 이 반만을 노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공포 영화에서 도망치지 않고 귀신을 맞닥뜨리는 주인공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도망치지 못하는 거였다.
“아아아악!”
그림자가 반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천둥이 쳤다. 시야가 하얗게 변해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
왜 간 떨어지게 비명을 지르냐고 물어볼 법도 했다. 하지만 천둥을 몰고 온 그림자는 입이 무거웠다. 뜸을 들이는 그림자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문턱을 넘어오다가 말고 멈춘 장희태의 얼굴이 보였다. 매일같이 하나의 표정만을 고수하던 장희태가 놀고 있다는 얼굴을 했다. 한숨을 내쉬고 반으로 들어온 그는 자기 자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가방에 챙겨 넣었다.
한숨을 쉬든 말든 그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격할 따름이었다. 챙길 것을 챙긴 장희태는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방을 메고 장희태의 등에 붙다시피 해서 걸어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장희태는 가만 멈추어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내리깐 눈이 말하는 바는 하나였지만 나는 버림받을까 무서워 그의 가방끈을 잡아챘다.
“와. 얼렁 가라.”
“먼저 가 봐.”
“오, 왜.”
배려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장희태에게 같이 내려가자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 걸음도 가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쟤가 진짜 장희태가 맞기는 한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 거리를 둔 장희태는 어서 가라는 듯이 한숨으로 독촉했다.
“으…….”
안 그러려고 했는데 장희태도 이젠 무서웠다. 사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것이다.
“야, 장희태.”
불러도 입을 벙긋하는 대신 눈썹만 구겼다. 귀신이면 저럴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의 코트 끝자락을 만지작댔다.
“너 사람 맞지.”
“…….”
“같이, 같이 가자.”
“귀찮게 굴지 말고 가든지 말든지 하나만 해. 그리고 놔.”
“아, 쫌! 무섭다꼬!”
“네가 무서운 거랑 나랑…….”
“아, 진짜로, 진짜로 무섭단 말이야.”
울면서 그의 코트를 놓지 않자 장희태가 곤란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장희태는 이내 포기한 사람처럼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그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걱정이 되지만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해코지만 안 하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왜, 왜 돌아왔는데?”
뒤늦게 그가 사람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이 들었지만 한 번도 반을 나갔다가 나갔다가 돌아온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의심이 갔다. 장희태는 픽 실소를 터뜨렸다.
“책 가지러.”
“무신 책.”
“일일이 보고하게 하지 마. 네가 내 선생이야?”
“아, 무신 책.”
“하……. 수학.”
“맞나.”
긴장하니까 안 쓰던 사투리까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인정머리가 영 없지는 않은지 1층까지 무사히 제 코트를 잡고 내려오게 해 준 장희태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었다. 나는 무사히 밖으로 나와 빗줄기를 맞음에 감사했다. 잠시 구겨진 제 코트 자락을 바라본 장희태는 사과를 받고 싶은 양 나를 기다렸다.
“가라, 이제. 미안하고…….”
“우산은.”
“아, 나, 저 엄마가 데리러 오기로 했거든? 걱정 마라.”
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까만 우산을 편 장희태가 운동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삼 분 뒤에 가방을 쓰고 뛸 준비를 하던 나는 돌아오는 장희태를 보고 당황했다. 가다가 발이라도 빠졌나 싶었지만 장희태는 다름 아닌 내 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뭐 또 두고 갔나.”
“하나만 묻자.”
“어?”
“오는 길에 차 한 대 없었는데. 정말 부른 거 맞긴 해?”
그의 의심에 틀린 것이 없는 터라 나는 딴청 피우듯 빗물 괸 계단을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장희태의 입술 근처에서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태어났다. 인내심이 짧은 장희태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우산을 접었다.
“써.”
“어?”
“쓰라고, 이거.”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그가 내민 우산을 받았다. 어안이 벙벙한 게 가시지 않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희태는 내게 우산을 건네자마자 학교 안으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거는 폼이 누군가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그냥 가는 건 양심에 찔려 그가 부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네, 아저씨.”
아저씨? 장희태는 코트를 여미며 간결한 투로 말했다.
“우산을 놓고 왔어요.”
몇 마디 나누지 않고 통화를 끝낸 그는 피곤한 눈으로 빈 운동장을 응시했다. 우산까지 빌려준 마당에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나는 아침에 싸 온 편의점 샌드위치를 가방에서 꺼냈다.
인기 많은 달걀 샌드위치라서 편의점에 백날 들러도 구하기 어려운 거였다. 집에 가면 간식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아까 학교에 오기 전 편의점에 들러 사 온 것인데 그래도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싶었다. 앞만 바라보고 있는 장희태의 어깨를 툭 쳤다. 턱을 비스듬히 기울인 장희태에게 웃는 얼굴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우산 고맙다. 이거 묵어.”
장희태는 눈을 내리깔아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훑었다. 손 위를 스쳐 지나간 시선은 냉혹했다.
“그런 거 입에 안 맞아.”
“먹어 본 적은 있고?”
왕자님 나셨다, 왕자님 나셨어. 신경질이 난 나는 가방에 샌드위치를 던지듯 넣고서 빗속으로 걸어갔다. 발을 팍팍 구르며 시멘트 계단을 밟는 중에 파란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우산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잘 봐 줘도 사십 줄에 든 아저씨가 장희태를 보자마자 제자리서 껑충 뛰었다.
무뚝뚝한 장희태는 아저씨가 제 앞에 오기까지 기다렸다. 다가가 우산을 씌워줘도 고마운 기색이 없는 장희태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휙 돌려서 질퍽질퍽한 운동장으로 내려간 나는 콧김을 뿜으며 걸어갔다.
편의점 로고를 보자마자 속이 울렁거린다는 표정을 지을 건 또 뭐람. 오늘은 우산을 빌려줬으니 욕은 여기까지 하겠다. 저도 나를 위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빌려줬으니 말이다.
점프하듯 운동장을 빠져나가자마자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었다. 늘 타던 시간대의 버스는 놓쳤다. 한 대를 보내면 20분은 기다려야 하는 버스라서 속이 쓰렸다. 그때 까만 세단 한 대가 교문을 빠져나가는 내 옆에 미끄러지듯이 섰다. 아까 본 파란 점퍼의 아저씨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학생.”
“저요?”
“그래, 학생.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때?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데.”
“아니, 괜찮슴다.”
난감한 표정으로 뒷좌석 쪽을 바라본 아저씨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반질반질한 아저씨의 이마에 구슬땀이 흘렀다.
“비도 오고 벌써 10시도 넘었는데 여학생 혼자 위험하게.”
나보다는 아저씨가 곤란한 상황인 것 같았다. 장희태 네 집이 뭐 하는 집인지 모르겠으나 운전기사 겸 장희태를 돌봐 주시는 분 같았다. 상사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부모님 덕분에 월급쟁이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우산을 접고 차에 탈 준비를 하자 아저씨의 얼굴이 폈다.
“거기 가만히 있으렴.”
차 문을 열고 나온 아저씨가 우산을 펴서 내 머리 위에 대주었다. 태워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인데 뒷좌석 문까지 열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보이는 것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장희태였다. 장희태는 내가 타든 자빠지든 관심 없어 보였다. 불쌍하니 가는 김에 태우자는 아저씨의 의견이 강했나 보다.
“어디서 내려 줄까?”
우산에 묻은 빗방울을 털고 차에 탄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
“봉해동에 금영아파트요.”
“아 여기서 좀 거리가 되는구나.”
나도 하고많은 학교 중에 먼데다가 학비는 비싼 사립 학교로 배정받았는지 모르겠다. 장희태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손수건으로 제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었다. 어깨가 시원히 젖은 나도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손수건 이리 줘. 희태야.”
백미러로 지켜본 아저씨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장희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저씨에게 다 쓴 손수건을 건넸다. 할 일을 마치고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괜히 아저씨 욕심에 나까지 태우겠다고 한 건 아닌지 눈치가 보였다. 차까지 막히는 터라 더더욱 말이다.
눈감은 장희태에게 물 묻은 비누 향기가 났다. 머리를 비누로 감느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아저씨가 포장마차가 늘어선 길가에 차를 세웠다. 설마 차가 막히니 여기서 내리라는 것인가 싶었다.
“미안한데. 한 명 더 태울 사람이 있어서.”
“아, 예.”
장희태 담당 운전기사가 아니라 뺑뺑이 도는 학원 애들을 태우는 기사인가 보다. 하긴 고작 고등학생인데 개인 기사가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차를 세우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조수석 문이 열렸다. 조수석에 앉은 이는 장희태에게 인사를 하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뜨렸다.
“희, 태.”
종선이. 마이 엔젤이었다. 야간 자습 대신 학원가에서 저녁 공부까지 하고 오는 듯싶었다. 나는 비를 맞고 푸석해진 머리칼을 귀 뒤로 숨겼다.
“아, 안녕.”
“어, 안녕.”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마친 종선이는 바른 자세로 앉았다. 간간이 대화의 주제를 던져줘 활력을 불어넣던 아저씨는 돌연 침묵 교단에 가입했다. 장희태는 옆에 앉아 시선으로 나를 긁어댔다. 한번 발을 들이면 푹 빠질 것같이 깊은 눈동자로 말이다. 종선이를 보자마자 달라진 내 태도가 이상했는지 그는 제 허벅지 위에 얹어둔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지만 갈수록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음에도 달라지지 않는 그의 시선이 기억 마디마디에 남았다. 장희태의 입술이 열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무자비한 장대비와 어우러졌다.
“종선아.”
“어.”
“물 좀.”
“어, 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물을 종선이가 뚜껑까지 따서 그에게 내밀었다. 물병을 받자마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장희태는 몇 모금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제 입술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닦아낸 그가 다시 종선이에게 물병을 건넸다.
저 투정을 받아 주는 종선이가 대인배였다. 나는 적절한 틈을 타서 창밖 구경 중인 종선이에게 말을 걸었다.
“종선아.”
“어?”
“혹시 딸기 사탕 뭐 먹는지 물어도 되나?”
“나?”
종선이에게는 인위적이지 않은 딸기 사탕 냄새가 났다. 편의점을 세 곳이나 들렀지만 향만 가지고 사탕을 찾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 아니면 섬유유연제?”
“잘 모르겠는데…….”
종선이가 자기 목을 감싸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대화하기 싫다는 뜻은 아니었는지 종선이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나저나 너 공부 잘하더라. 그렇게 잘할 줄 몰랐는데.”
“아, 내가 쫌 하지.”
운전에 집중하던 아저씨가 담담하게 물었다.
“뭐, 우리 학생 몇 등 하는데.”
“1등이요.”
“1등?”
백미러로 힐긋 장희태를 본 아저씨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종선아. 저 학생한테 많이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네.”
그때 익숙한 아파트의 전경이 보였다. 조급해진 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저씨. 여기서 내려 주세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뛰어가면 바로 엘리베이터라서 괜찮거든요. 여까지 와 주신 것도 감사한데요.”
아저씨는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차를 세웠다. 나는 차에서 내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비록 장희태에게 신세를 졌지만 젖어서 쿰쿰한 운동화로 버스에 오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까맣게 선팅된 차량은 유유히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혀를 내두르게 퍼붓던 빗줄기는 단지 내로 들어서자마자 약해졌다. 도깨비장난같이 짓궂은 소나기였나 보다. 나는 까만 우산을 들고 내린 것을 보고 기함했다.
“아, 이거 두고 내릴걸.”
사사건건 싹수없는 놈일지라도 덕분에 비 한 방울 안 맞았으니 보답은 해야겠다. 싼 것은 입에 안 맞으신다고 하니 내일 점심때 비싼 주스라도 한 캔 사서 주는 게 나으려나 싶다.
집까지 힘들이지 않고 와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갔다.
***
우산 사건 이후로도 나와 장희태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방학 내내 우리는 성실하게 공부하는 모범생 역할을 도맡았고 어쩌다가 말을 섞는 기회가 생겨도 서로 골이 난 채로 다투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나의 경우에는 지난주부터 그에게 백화점에서 파는 비싼 주스를 사 주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해 심술이 뻥튀기처럼 부푼 상태였다. 장희태와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가 된 대신 청춘사업에는 진척이 있었다.
얼굴이 눈에 익었는지 종종 종선이가 내 자리로 와서 모르는 문제를 질문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말이 종선이는 정식 장미반은 아닌데 선생님 빽을 써서 들어왔단다. 입 가벼운 몇몇이 동네방네 소문내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백 프로 믿기지는 않았다. 종선이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종선이는 보면 볼수록 동갑이 아니라 동생 같았다. 물어보다가 막히면 다시 물어보면 되는 것을, 어떻게든 풀어 보겠다며 혼자 낑낑거리는 것이 귀여웠다. 하지만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해충이 꼬이듯이, 청춘사업의 물을 흐리는 존재는 꼭 한두 명씩 있는 법이었다. 종선이와 화기애애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나타난 불타는 시선이 나를 찔렀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펜 끝을 씹고 있는, 간혹 콧살을 찡그리기까지 하는 장희태가 범인이었다.
심지어 종선이에게 말을 걸어 분위기에 재를 뿌리거나 할 이야기가 있다며 종선이를 데리고 나가기까지 했다. 그의 방해가 너 따위는 종선이 짝으로 인정 못 한다는 뜻인 것 같아 열이 받았다. 그런 식으로 장희태와 눈싸움을 한 지 꽤 됐다. 어차피 오늘부로 끝이지만 말이다.
“김종선.”
“배탈 나서 조퇴했다는데요.”
오늘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종선이가 돌연 중간에 조퇴를 해 버린 것이었다. 걱정이 돼서 집중도가 평상시의 반도 안 되었다. 연락처도 따로 없는지라 문자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다. 어련히 집에서 약도 주고 밥도 주고 했겠지만 하필 연락처를 얻으려고 계획을 짜둔 방학 마지막 날에 배탈이 날 게 뭐람.
“오늘은 일찍 가자.”
야간 자습도 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는 선생의 말에 내심 기뻤다. 종선이네 집도 알고 있으니 과일하고 배탈에 좋은 약을 사서 전해 주면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찬스라는 생각에 들뜬 나는 빠르게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종선이네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까지 계산하는 차였다. 책상에 베이지색 라벨로 감싸진 유리병이 올려졌다. 무심히 올려놓은 손의 주인을 따라서 고개를 드니 장희태가 있었다.
“그딴 싸구려 먹지 마.”
우산을 빌려줘서 고맙다고 한 이틀을 그의 책상에 음료수를 올려 둔 적이 있었다. 전혀 손도 대지 않길래 얼마나 입맛이 고급이냐고 작게 툴툴거린 것을 들었나 보다.
나는 그가 두고 간 음료를 들어 상표를 확인해 봤다. 영어도 아닌 꼬부랑거리는 글씨로 적힌 상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야. 뭐 국산은 싸구려고 외국 건 다 좋은 거가? 겉멋도 저런 겉멋이 없다.”
듣는 귀가 없으니 할 말이건 못 할 말이건 다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버리는 건 아니지 싶어서 조심조심 뚜껑을 까고 마셔 보았다. 혀끝에 닿는 딸기의 향이 인공적으로 낸 게 아니라 직접 짜서 넣은 듯이 적당히 달고 맛있었다.
“엄마한테도 이거 하나 사 줄까.”
골반이 당겨 집에서 누워만 있는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꿀떡이 만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자 별거 아니라며 손수 내 손을 당신의 배에 올려주셨다. 따스한 기억은 나의 언 몸을 녹여 주지만 그건 잠시 잠깐일 뿐이었다. 나도 손발이 생기기 전부터 누군가에게 소중한 취급을 받았을까. 나의 친부모란 사람들 말이다.
“아, 고만 고만. 고만 생각하자.”
나한테 또 다른 부모는 없었다. 오늘따라 쇳덩이가 든 양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멨다. 엄마가 임신을 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엄마든 아빠든 외출이 줄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셋이서 종일 놀고먹는 것도 가능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종선이 얼굴이라도 보고 가면 마음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는 작업도 한결 가뿐해질 터다.
하굣길에 용돈을 탈탈 털어서 배탈에 좋다는 약과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버스를 탔다. 놀라서 빨개질 종선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종선이와 버스를 탄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덕에 내릴 곳에 실수 없이 내렸다.
걸어가야 하는 길이 조금 멀다는 게 흠이지만 쉬엄쉬엄 걸으니 언덕길을 오르는데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핸드폰 시계로 55분이 지나자 푸른색 기와가 인상적인 종선이네 집이 보였다.
혹시 걔네 부모님이 나오시면 뭐라고 해야 하나. 초인종을 코앞에 둔 지금에서야 든 생각이었다. 뒷짐 진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파란 불이 들어온 초인종 위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 누구세요?
교복 입은 애가 왔다 갔다 하니까 신경이 쓰여서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혹시 종선이 어머니일지도 몰라 나는 과일 바구니부터 들이밀었다.
“아프다고 해 가지고. 그, 그 병문안 왔거든요.”
– 병문안이요?
난감해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대문 안쪽에서 저택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종선이로 추정되는 인물이 넓은 보폭으로 정원을 걷고 있었다. 대문에 창살이 워낙 촘촘해서 보이지는 않으나 사복을 입은 종선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직 멘트를 준비하지 못한 나는 허둥거렸다. 차라리 대면하지 않는 상태인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 과일 바구니를 대문 앞에 두었다.
“잠깐!”
대문을 열기 위해 뻗어진 손이 멈칫했다. 파란 니트를 입은 종선이가 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참아내었다. 흉측할 게 분명한 얼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 딴 흑심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그, 친구 차원에서…….”
잠잠히 듣고만 있는 종선이가 불안해진 나는 아무 말이나 해대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천천히 다가가서 친구부터 시작하는 것이지만 내 흑심이 워낙 노골적인지라 모르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변명처럼 말이 길어졌다.
“그 사실 아무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쪼끔 있다. 아니, 쪼끔 많이. 3학년 때 내가 많이 도와줄게. 이건, 그러니까 과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눈길이 가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좋다…….”
고백을 채 마치기도 전에 대문이 열렸다. 까만 대문에 몸이 밀려나 뒷걸음질을 쳤다. 엉망인 얼굴부터 수습하고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간신히 눈만 가리지 않은 자세로 서 있던 나는 생각보다 큰 키에 당황한 나머지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아니.”
충격의 여파가 눈까지 침침하게 만든 것인지 내 눈에 종선이가 아닌 다른 남자애가 보였다. 그것도 여기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싸가지 왕자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온 장희태는 과일 바구니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종선이!”
종선이, 종선이, 종선이. 나의 메아리가 언덕을 떠돌아다니자 무표정하던 장희태의 얼굴에 금이 갔다. 한쪽 입꼬리를 비튼 장희태가 나에게 몸을 낮추며 다가왔다. 충격에 약한 나는 그의 기세에 한참 밀렸다.
“말도 안 된다. 네가 왜 거기서…….”
“김종선을 좋아해?”
“거기, 거기 종선이 집인데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꼬!”
“여긴. 내 집이거든.”
그럼 내가 그날 뭐에 홀려서 종선이가 아닌 이놈의 집을 따라다녔단 말인가. 장희태는 놀리듯 내 귀에 속삭거렸다.
“김종선은 우리 집 운전기사 아들이야. 전해 줄까?”
“아니, 내가, 그, 실례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 허겁지겁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가는 길에 몇 번 넘어질 위기가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지만 한 시간 거리를 삼십 분만에 주파할 만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거 아이가. 미친 거 아니야. 앞으로도 이 일을 생각하면 이불 옆구리를 차도 한참을 찰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오는 버스를 아무거나 타고서 자리에 앉았다. 장희태의 비열한 웃음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걔가 너 좋아한단다.’
‘누구?’
‘있잖아. 내가 말한 그 이상한 애.’
‘아, 너무 싫다.’
종선이에게 내 얘기를 나쁘게 하는 장희태를 상상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창문에 머리를 콱콱 박고 있자 버스 기사님이 혀를 찼다. 안 된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하필 종선이하고 장희태 하고 한집에서 사니까 내 말보단 장희태의 말을 더 믿을 게 분명했다.
약점 제대로 잡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스에서 한 시간을 내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