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ckoo living in early spring RAW novel - Chapter 2
02. 꽃잎 내리는 날
퀭한 눈으로 개학식에 등교한 나는 밤새 한 잠도 못 이뤘다는 걸 온 동네에 소문내고 다녔다. 물론 입이 아닌 얼굴로 말이다. 방학 내내 공부를 해서 몰골이 이렇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다들 내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다들 쉬쉬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같은 반에서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유선영이 내 책상에 엎드리며 말했다.
“너 좋겠다.”
“뭐가…….”
요즘 살맛이 나지 않는다. 턱을 손으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고장 난 고개가 1반을 향해 돌아갔다. 더욱이 볼일이나 보고 가 주었으면 했던 유선영은 내 머리 위에 폭탄을 터뜨렸다.
“너 희태랑 같이 1반 가잖아.”
“이게 뭔, 또.”
말도 똑바로 나오지 않는데 유선영은 정말로 부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S대 반이라고 1반으로 다 몰아넣는대. 선배들도 다 그랬다는데?”
“에이, 구라.”
“진짜. 내기할래?”
담임이 들어와 선영이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개학식도 별것 없이 금방 끝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불안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나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담임에게로 잽싸게 달려갔다.
“저기, 치워. 빗자루 들고.”
“저, 선생님.”
“어, 우림아. 왜?”
교탁에 서서 서류에 사인을 하던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반 평균을 올려 줬다는 이유로 애정이 넘치는 선생님의 시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요. 제가 뭐 1반으로 내정이 되었다. 거기가 뭐 S대 반이다. 이럼서요.”
“응.”
“구라지요.”
“소문 아닌데?”
“예에에?”
장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드린 선생님이 웃으며 서류를 챙겼다.
“너무 좋아하진 마. 거기 가면 또 다른 세상이다. 3학년 때는 긴장을 놓치면 바로 성적 떨어지는 거야.”
유선영이 떨어트린 폭탄에 불을 지피고 떠난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 있는 내 표정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했다.
이건 부담감도 뭣도 아니었다. 유선영이 뭐라고 떠들건 의자에 걸어둔 목도리를 히잡처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청소 당번인 애들이 문은 네가 잠그라며 친절히 열쇠까지 두고 나갔음에도 나는 자리를 지켰다. 주먹을 머리에 쿵쿵 찧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심코 본 창문으로 지나가고 있는 장희태가 보였다. 어쩌다가 늦었는지 모르겠지만 애들도 다 빠져나간 지금이 기회였다. 통화하며 복도를 걷는 장희태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장희태!”
마침 지나가고 있는 앞문을 열고서 장희태를 불렀다.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하고 있던 장희태의 입술이 닫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의 손목을 잡고서 우리 반 안으로 질질 끌었다. 문턱에 걸린 것처럼 꿈쩍 않던 장희태는 나를 노려보곤 다시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휴대폰을 들었다.
“다시 걸게요.”
통화를 끊은 그가 싸움 거는 양 거친 걸음으로 문턱을 넘었다. 나는 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하교 시간이 빠른 개학식이어서 망정이지 평소라면 어림없는 얘기였다. 우리 반엔 스토커처럼 장희태의 일거수일투족을 메모장에 적는 애도 있을 정도였다.
“장…….”
남의 책상을 깔고 앉아 무심히 문자를 치고 있는 왕싸가지를 보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저걸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내 청춘사업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저기.”
핸드폰을 닫고서 고개를 든 그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어제, 내가 한 말은 잊어 주면 안 되겠나.”
“무슨 말.”
“그, 그 알면서 그런다.”
민망한 마음에 괜히 툴툴거렸더니만 장희태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책상을 짚는 그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굵게 도드라졌다.
“아, 김종선 좋아한다고 한 거?”
“야!”
누가 들을세라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리저리 눈치 보는 나를 시선으로 내리찍는 장희태에게 애걸하듯 말하였다.
“말하면 네 진짜 의리 없는 거다.”
‘의리?’ 내 손바닥 아래 있는 장희태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려버리자마자 입막음 역할인 손바닥이 떨어졌다. 제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은 장희태는 퍽 냉정해 보였다.
“장희태. 나하고 너하고, 어? 같이 방학 보내면서 조금 친해지지 않았나.”
“착각하지 마.”
“착각?”
“난 친한 사람 같은 거 없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장희태가 웬일로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내가 말 안 하면?”
“뭐?”
“안 하면. 넌 뭐 해 줄 수 있는데.”
“와.”
뭐 이런 지렁이 옆구리 차는 소리 하는 새끼가 다 있나 싶다. 나는 양쪽 허리에 손을 짚고 섰다.
“아니 말 안 하는데 입에 떡까지 물려줘야 되나.”
“싫으면 말고.”
십 대 남자가 좋아할 만한 컬러링이 장희태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어딘가로 통화를 건 장희태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디야.”
설마 싶어서 전화를 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니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그가 붙잡힌 손을 탈탈 털었다.
“놓고 말해.”
“그, 뭐, 바라는데…….”
설마 뭐 큰 거 바라겠나 싶어서 말한 것인데 처음으로 장희태의 입가에 미소 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매일 썩은 미소만 보여 주던 놈이 웬일인가 싶어서 바라봤더니만 역시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남은 1년 동안 수발 좀 들어.”
“뭐라고? 내 귀가 안 좋아서…….”
“수발.”
“내가 왜?”
“입막음 비용으로 이 정도면 싸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재활용은 가능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처참한 상대의 수준에 내 입은 오늘도 벌어질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쓰레기는 엿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런 악마 같은 놈을 두고 점잖다느니 학교의 귀감이라느니 말하는 선생님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잘 생각해 봐.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수발을 들라는 말은 아니꼬웠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협상의 의사가 없어 보이는 장희태가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1분 간격으로 울리는 전화를 거절한 그가 가방을 고쳐 매며 나갈 준비를 했다.
“진짜 입 무겁나, 니.”
장희태는 어깨를 우쭐대듯 추어올렸다. 맞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말만 수발이랬지 이제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 애가 수발이라고 할 만큼 나한테 시킬 수 있겠나 싶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건 얘 나름의 잘 지내보자는 표시일 수도 있었다. 과일 바구니까지 사고 간 나의 정성에 감동한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유리한 해석을 내놓은 내가 손을 내밀자 장희태는 이게 뭐냐는 듯이 쳐다봤다.
“뭐 물 같은 거 떠다 주면 되나?”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알았으니까. 너 꼬옥 나 도와줘야 된다.”
“악수는 안 해.”
가방을 챙겨 일어난 그가 내 옆을 지나쳐 갔다. 내 손이 더러운가 싶어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앞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신이 계신다면 마지막 자비로써 저놈과 같은 반이 되는 불상사만은 막아주십사 싶었다. 교장이 신의 계시를 받아 S대 반이건 뭐건 그런 거 없이 랜덤으로 돌리기로 했다든가 해서 말이다.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반드시 저놈은 나를 노비로 만든 걸 후회하게 될 거다. 21세기에는 인권과 시위가 있었다. 왕자님이 폭정을 하기엔 좋지 않은 시대였다.
***
사건 사고가 많았던 봄 방학을 지나 3학년에 등교하게 된 첫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게 너무도 평화롭고 조용하게 돌아가게 돼서 장희태 왕자님 수발에 관한 기억마저 잊고 살고 있었다. 나는 유선영이 예언했던 대로 3학년 1반에 배정됐다. 같이 1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게 분명한 왕자님께서는 수발의 수 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허세였던 것이다.
“우림아.”
“예, 엄마.”
“엄마 허리 너무 아파서.”
“제가 뚜껑 따드릴게요.”
봄이 온 후 부쩍 엄마의 골반과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 엄마는 노산임에도 꿋꿋하게 이기려고 했지만 하다 하다 안 되겠는지 요즘은 도와달라는 소리를 많이 했다.
“엄마. 내가 갔다 와서 빨래 갤 테니까 건들지 마세요. 예?”
“아니야. 집에서 놀고먹는 사람이 해야지.”
“에이, 또 그러신다.”
“게다가 넌 고3이고.”
신경 써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아실까 모르겠다. 두 번이나 파양 당해서 울고 있는 나를 거두어 준 날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몸이었다. 마음씨 좋은 부모덕에 딸의 자리를 꿰찼으니 여기서 더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는 짓을 할 리 없었다.
“꿀떡아 언니 다녀오세요, 해 봐라.”
“다녀올게.”
“엄마랑 노래 듣고 쉬자. 어?”
엄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사춘기 소녀처럼 슬픔에 빠져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일 따윈 그만두고 싶었다. 딸이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나는 이 이상 무엇을 바라는 걸까. 내가 두 번째로 밀려나는 건 열 달 만에 아이가 나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였다.
죽을 둥 살 둥 노력해도 첫 번째가 될 수 없으니 두 번째에 익숙해져야 한다. 섣부른 기대가 없으면 상처도 없다. 수년 내로 완벽해질 저 가족에게서부터 마음이 다치지 않을 장소도 만들어두어야 한다. 달에 한두 번씩 만나서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슬픔은 엘리베이터에 버려두고 질투를 비롯한 못난 마음 찌꺼기는 하굣길에 버려두었다. 덜어낼 만큼 덜어낸 마음을 명찰처럼 달고선 3학년 1반의 문을 열었다.
자리가 정해진 양 짐을 풀고 앉아 있는 애들은 장미반에서 본 얼굴이 태반이었다. 책상 두 개를 붙여둔 자리 중에 비어 있는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학을 와서 고작 한 학기를 넘겼을 뿐이라 모르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우리 반에 있던 애들 중에 같이 올라온 애라곤 말 몇 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여자애 하나와 남자애 하나였다.
담임 선생님만 좋은 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온 반이 술렁거렸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희태가 보였다. 종선이랑은 같은 반이 되지 않았나 보다. 서운함을 억누른 나는 자리를 맡아 두듯 가방을 옆자리 의자에 두었다. 선객이 있으니 앉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장희태는 기어코 옆 책상에 가방을 올려뒀다.
턱 끝으로 내 가방을 가리킨 장희태는 치우지 않으면 선생에게 이르기라도 할 기세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맨 끝자리를 제외하곤 자리가 없긴 했다. 나는 슬금슬금 가방을 치웠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나는 장희태 쪽으로 슬며시 어깨를 기울였다.
“여기 말고 딴 데 가라.”
남들은 모를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든 장희태는 한 치 앞을 못 보는 중이었다. 때를 맞추어 담임이 될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나이가 지긋한 남자인데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평균보다 키가 작은 담임은 오자마자 분필로 자기 이름을 적고 적었다. 장희태가 가방을 책상에 걸기 위해 허리를 숙일 즈음이었다.
“끝나고 남아.”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잘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장희태가 눈을 맞춰오는 걸 보니 말이다. 눈길을 피해 봤자 들은 귀가 있고 생각하는 머리가 있었다. 우리 반 청소는 담임이 할 테니 너희들은 공부에만 신경 쓰라는 말에 다시 주의가 쏠렸다. 아이들은 좋아하기보다 부담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담임의 노골적인 기대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맞장구칠 기세로 담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장희태의 말을 듣느니 담임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나았다.
담임은 반 청소를 본인이 하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양 개학식이 끝나자마자 빗자루를 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끝나고 남으라던 장희태는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봐도 따라오라는 뜻이었지만 아직 보는 눈이 많았기에 나는 일부러 손목에 찬 전자시계를 가리켰다.
뜻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장희태의 돌발 행동은 일단락시켰다. 기회를 기다린 나는 청소를 마친 담임이 걸레를 가지러 간 사이 가방을 챙겼다.
“나 집 가 봐야 된다. 할 얘기가 뭔데.”
“가면서 해.”
수발을 든다고 할지라도 학교 밖이 아닌 학교 내에서 부려 먹으란 소리였다. 심통이 난 나는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고 그를 따라갔다. 두세 걸음 뒤에서 걸으며 영어단어책을 꺼내 외웠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고, 따지고 보면 점수 몇 점 차이로 져버린 저놈과 또다시 경쟁이었다.
그때 까만 세단이 장희태의 앞에 멈추어 섰다. 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탄 장희태가 문을 닫지 않았다. 나도 타라는 뜻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를 즐기지 못하고 팔자에도 없는 수발을 들게 생겼다. 나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며 차에 올랐다. 차에 시동을 거는 운전기사, 그러니까 종선이 아버지와는 백미러로 눈길을 주고받은 뒤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안녕.”
물을 마시고 있는 장희태의 팔뚝을 손등으로 툭 쳤다.
“어데 가는데.”
“집.”
“누구 집. 내 집?”
“그럴 리가 있겠어?”
신경질을 낸 장희태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꼼짝없이 장희태의 집으로 끌려가게 생긴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구시렁거렸다. 집으로 돌아가 빨래를 개야 하는데 이놈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게 생겼다.
아니면 혹시 도와준다는 말을 성실히 지키기 위해 나와 종선이가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전혀 그럴 낌새가 없어 보이는지라 불안불안했다. 제 볼일이 아니면 신경도 안 쓰는 놈이 집으로 초대까지 한다는 걸 보니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터였다.
주택 지하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을 즈음 차에서 내린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손은 뒀다 국 끓여 먹을 예정인 장희태를 보고 콧방귀가 나왔지만 아저씨는 내가 내리지 못하게 손으로 막으셨다. 자기 일이라고는 하나 종선이 아버님이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허리 꺾인 소나무나 정원수가 옹긋옹긋 서 있는 정원이 아파트 단지 조경보다 돈 들인 티가 났다. 제집이라서 그렇겠지만 아무 감흥이 없어 보이는 장희태의 표정 때문에 기가 꺾이는 중이었다.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 작은 갤러리 분위기가 나는 복도를 지나가야 겨우 사람 사는 거실이 나왔다. 천장이 성당 버금가게 높은 데다가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은 흡사 풍경화를 걸어 둔 것 같았다.
“간식 올려 줄까요?”
“네.”
집 안에서 실내화를 신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손님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장희태가 저 혼자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와.”
그의 뒤를 따라서 이 층으로 가니 우리 집 거실과 부엌을 합친 듯한 크기의 거실이 나왔다. 소파와 티비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장희태 전용 거실인 듯싶었다. 노는 물이 다르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뭐 해.”
“그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나는 장희태가 문을 열어 둔 방으로 직진했다. 잔뜩 부려 먹을 줄 알았는데 간식 같은 것도 준다고 하니 먹고 가는 게 도리가 아니겠나 싶다.
책장에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방으로 들어와 의자 두 개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부잣집 아들은 어떤 침대를 쓸지 기대했던 나는 팍 식어버리고 말았다.
“침대는 없나. 어디서 자는데.”
“다른 방.”
“아…….”
“앉아.”
식탁으로 써도 좋을 정도로 기다란 책상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잠자코 겉옷을 벗었다. 바람이 드나들게 창문을 연 장희태는 소매를 걷으며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았다.
“이게 뭔데.”
“읽고 감상문 써.”
“뭐? 감상문?”
“숙제인데. 그딴 데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와, 미쳤다, 니는. 숙제를 남한테 주는 미친놈이 어딨나. 어?”
“해. 평생도 아니고 고작 1년이면 자유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장희태는 책상에 놓인 안경을 썼다. 제 문제집을 꺼내서 풀기 시작하는 장희태 때문에 뒷골이 쑤셨다. 완독하는 데에 족히 하루는 걸릴 것 같은 두께의 책을 들춰보았다. 홧김에 이럴 거면 종선이한테 나불나불 말하라 하고 싶지만 앙심을 품고 나와 종선이 사이를 갈라놓을 게 분명했다.
장희태의 습관인지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펜 꼭지를 물었다. 뾰족한 수가 없는 나는 책을 펴들었다. 읽기에 난해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굳이 고등학생이 읽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한 줄 한 줄이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 더 읽다간 몸에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
“재미없다.”
“너한테 재미 주려고 데려온 거 아니니까 끝까지 읽어.”
의욕 없이 시큰둥해진 나의 시선은 이런 책이 수백 권인 책장으로 향했다. 겉 포장지도 뜯지 않은 새 책이 책장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마 학기 내내 감상문을 쓰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막힘 없이 문제를 푸는 중인 장희태의 손목을 살짝 흔들었다. 문제를 훑고 있던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아니, 누가 저거 읽고 쓰라고 하는 건데.”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텐데.”
장희태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바라보고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집에 밤새 있을 생각이야?”
“아니. 어떤 미친 깽깽이가 고3한테 책 읽고 감상문 쓰라는지 궁금해서 그라지.”
장희태의 얼굴에 미친 깽깽이라는 말이 변화를 가져다줬다. 한겨울과 지독히 잘 어울리던 그의 얼굴이 살며시 풀어지는 게 보였다. 언뜻 미소라고 할 수 있는 게 그의 얼굴에 퍼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너 만약 과외 같은 거에서 이런 책 읽으라고 시킨 거면 빨리 그만둬라.”
“할아버지가.”
뜻밖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친 깽깽이라고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지만 장희태는 개의치 않을뿐더러 한결 유해지기까지 했다. 장희태가 단 한 번도 내게 누긋한 분위기를 보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때마침 심심한 분위기에 간을 쳐줄 간식이 도착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과일과 케이크 따위를 책상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갔다. 간식에는 눈길도 안 주는 장희태를 대신해서 내가 쟁반을 끌고 와 배 한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달콤한 과즙이 혀에 번졌다. 케이크 접시는 장희태가 내 앞에 놓아 주었다. 포크에 묻은 생크림까지 샅샅이 핥는데 적정선을 잘 지킨 달콤한 맛이 났다.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포크 질을 쉬지 않던 나는 성질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안 먹나.”
고개를 저은 장희태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잠이 쏟아질락 말락 하는 탓에 책을 덮어두었다. 장희태는 책을 계속 읽으라는 뜻으로 펜 끝으로 책 커버를 두드렸다. 나는 건방져 보이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래서 내가 1등이고 네가 2등이다. 어?”
“뭐?”
“네 할아버지. 어디 대학 교수가?”
웬일로 내 말을 집중해서 듣던 장희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것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베끼면 된다.”
“베낀다고?”
“봐 봐라. 너 이런 거에 시간 뺏기니까 나한테 1등도 뺏기고 그러는 거 그라지. 이건 내 알아서 할게. 이건 솔직히 나를 부려 먹는 게 아니라 내가 니한테 도움을 주는 거다. 어?”
잔머리 굴리는 게 기특해 스스로 내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삭아삭한 배를 혼자 다 먹었다. 펜을 손으로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희태가 빤히 내 쪽을 건너다보았다. 배고픈가 싶어서 케이크를 그의 쪽으로 밀었으나 장희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왜 쳐다보는데.”
장희태가 피곤한 듯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주물렀다. 그러나 입가는 미소를 띤다.
“네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지?”
곁눈으로 장희태가 요약해 놓은 필기 내용을 훔쳐보았다. 장희태가 개인용으로 쓰는 문제집은 학교 보충 수업에서 나누어 준 문제집보다 내용이 풍부해 보였다. 눈으로 그의 필기를 훔쳐보고 있는 찰나 조용히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장희태가 내 쪽으로 문제집을 돌려 주었다.
“와아. 나도 봐도 돼?”
“싫으면 보지 마.”
“아, 아니. 볼래.”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의 펜 끝을 눈으로 따라가면서 문제를 외웠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우리는 문제 푸는 데에 열의를 보였다. 장희태가 표시해 둔 곳까지 풀고 끝이 나자 약간의 아쉬움마저 들었다. 깔끔하게 답이 떨어지는 문제를 만난 지 오래된 터라 집안 사정만 넉넉했더라면 장희태의 문제집을 돈 주고 구했을 거다.
그러나 장희태 개인용으로 만들어진 문제집을 구하려면 나도 그만큼 값을 치러야 했다. 엄마, 아빠에게 대학 간답시고 무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장희태의 문제집을 보니 큰 실수를 하지 않은 이상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문제집을 받은 과목이 하나만은 아닐 테니 장희태의 성적은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 저번 시험에서는 운 좋게 이겼더라도 다음 시험에선 그에게 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 봐.”
“감상문은.”
“베낀다며. 잘 베껴서 내일 나한테 주면 돼.”
시계를 풀고 안경까지 벗은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피곤과 싸우는 그를 보며 나는 가방에 책을 쑤셔 넣었다. 한 시간을 걸어서 내려가 버스를 탈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지만 허탕 친 하루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해졌다. 나는 장희태가 두고 간 문제집을 아쉬운 눈으로 핥으며 일어섰다.
장희태는 둥그런 아치 모양의 창문이 달린 옆방으로 떠나갔다. 옆방에는 까만 킹사이즈 침대 하나만이 들어가 있었다. 단조로운 전경에 시금털털해진 나는 교복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장희태를 발견하고 머리털이 쭈뼛 섰다.
쟤는 뭐 저리 거리낌 없이 옷을 벗는담.
“가게요?”
“예?”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 층 거실로 올라오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까 배와 생크림 케이크를 전해 준 아주머니였다. 웃는 얼굴의 아주머니에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한 차였다.
“차 타고 가요. 불러드릴게요.”
“예? 차요?”
괜히 쉬고 계신 종선이 아버님의 일을 늘리는 모양새라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입니다. 저희 부모님이 데리러 올 거라서여.”
“그래요?”
“예에.”
그때 가벼운 실내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온 장희태가 건조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타고 가게 하세요.”
쉬는 시간인 양 리모컨까지 집은 그가 대답 없는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반항하듯이 앞니를 내어 보였다.
“부모님이 데리러 오실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비 오는 날에도 깜깜무소식인 사람들 아니었나. 고집부리지 말고 타고 가.”
티비를 전원을 켜며 소파에 털썩 앉는다. 나는 아주머니가 당황하든 말든 다가가 그의 리모컨을 확 뺏었다. 생각 없이 저지른 짓이라 뒷일을 생각하진 않았다. 딱 한 번 차를 태워줬다고 해서 부모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지나친 월권이었다. 성의 없는 손길로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장희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데려다주겠다는데도 불만이네. 그럼 걸어가든가.”
“우리 부모님에 대해 아나.”
“알 리가.”
“깜깜무소식이 아니라 내가 연락을 안 했다. 데리러 오실 사정이 안 돼서.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충분히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굳이 너희 집 기사님까지 부려 먹는 게 싫어서 그런거고. 알았나. 모든 걸 네 마음대로만 생각하지 마라. 짜증 난다, 진짜로.”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앉아 있던 장희태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을 이해한 것도, 그렇다고 이해하지 않은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이죽거릴 줄 알았던 장희태가 얌전히 내가 건넨 리모컨을 받아 들었다. 그 뒤로도 티비가 아닌 나를 구경하는 데 열심이었다. 화끈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식자마자 장희태가 어금니에 낀 이물질처럼 불편해졌다.
내일 보자는 인사는 나나 장희태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골이 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녁 시간이 가까워짐에도 집 안에는 일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관문을 열어 주는 분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뛰쳐나왔다.
현관문을 열자 한 폭의 그림같이 푸른 소나무의 향이 풍기었다. 저만한 크기의 소나무는 몇 살이나 먹었을까. 소나무 뒤쪽으로는 별채가 지어져 있는데 외관이 허름할뿐더러 관리를 소홀하게 해서 잡초가 무성했다. 저 별채가 종선이의 집일 확률이 높았다.
장희태가 내 마음을 멋대로 전하는 것은 둘째치고 밝히기 싫은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이 종선이 입장에선 싫을 수도 있었다. 운전기사인 아버지를 옆에 두고도 모르는 척했으니 말이다. 모쪼록 장희태의 입은 갖은 수를 써서라도 막아두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저 자식은 돌잡이일 때 떡을 잘못 먹었는지 매사에 삐뚠 것이 문제였다. 비 오는 날 부모가 데리러 오지 않은 게 무슨 문제라고 자기가 더 나서서 비난하는 조로 말하느냔 말이다.
어쩌면 친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
학교에서 철저히 무시하리란 나의 결심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우선 장희태와의 거리였다. 물리적인 거리 말이다. 심리적인 거리는 천 리 길이 우스울 만큼 멀었지만 공교롭게도 성적이란 놈이 우리 둘을 한 책상에 묶어두었다.
S대 반이라는 이름에 걸맞아지려고 노력을 하는 건지 급식받는 순서부터 앉는 자리까지 성적순이었다. 마지막 기말에서 나란히 1등과 2등을 한 나와 장희태가 같은 자리에 붙어 앉는 건 두말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 밖의 문제는 학생이라면 응당 급식소에 가서 밥을 먹는 게 보통이지만, 교장의 특혜로 우리 반만 급식 차가 반 앞까지 온다는 거였다. 다른 반에서 형평성을 문제로 들었으나 대학 문제에 눈이 먼 교장이 우리 반은 급식소와 멀다는 이유로 반대파를 찍어 눌렀다. 꼬우면 공부 잘하지 그랬냐는 말까지 심심치 않게 나오자 안 그래도 예민한 아이들의 대화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장미반 수업과 야간 자습 시간까지 더해져, 시간표를 보면 나와 장희태는 온종일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종선이 좋아하는 음료 알려 줄까.”
첫 주엔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희태가 번번이 제 말을 무시하는 나를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입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기게 수를 쓰는 거다. 쉬는 시간에 녀석이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반으로 접은 쪽지를 펼쳐 보자 학교에선 구할 수 없는 종류의 간식 목록이 적혀져 있었다. 적어도 백화점에 가야 구경이나 해 봄 직한 간식거리였다.
“독후감에, 이거까지 더 하라고?”
“매점에서 우유 사 와. 목말라.”
“와,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색소 없고, 무향으로.”
갑자기 펜 꼭지로 내 책을 슬쩍슬쩍 건들더니만 저따위 말을 더했다. 내가 미치고 팔짝 뛰는 꼴이 재미있는지 저는 속 편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마음이 태평양인 나는 그를 살살 구슬리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
“아니. 그, 너 매점에서 파는 거 먹으면 안 된다. 거기 위생이, 어우, 말도 마라. 내가 내일 더 맛있는 거 줄게. 야 솔직히 그리고 좋아하는 음료 하나 알려 주는 데 이건 좀 심했다.”
“그러게 왜 말을 씹어.”
지 말을 씹어서 난이도를 올렸다는 뜻이었다. 5분만 이야기를 나눠 보면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재고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또 고놈의 이어폰을 끼고 앉았다. 나는 그의 이어폰 줄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다 귀 상한다.”
장희태의 눈에서 튀어나온 노여움이 볼을 타고 흘렀다. 흰 우유를 사 오느니 마느니 하면서 시작한 기 싸움은 1반 앞문을 넘어오는 종선이 때문에 일단락됐다. 종선이는 내가 아닌 장희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희태야. 잠깐 좀 나와 볼래.”
“왜.”
“아, 그게 할 말이 있어서.”
“여기서 해. 나가기 귀찮아.”
나는 장희태의 발을 지근지근 밟았다. 불쑥 나타난 종선이를 상대하던 장희태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제 운동화를 내려다본 장희태는 피식 웃으며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다리 길이가 따라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악착같이 발을 뻗어서 그의 희고 깨끗한 운동화를 더럽히려고 했으나 장희태의 성질머리가 두 손 놓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은근히 뒤로 고개를 돌려 귀엣말을 했다.
“자꾸 이딴 식으로 굴면 너하고 나하고 사귄다고 하는 수가 있어.”
“뭔…….”
장희태가 조용히 있으란 뜻으로 손가락 하나를 빠르게 제 입술에 붙였다 떼었다. 사람의 약점이 뭔지 알아내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놈이었다. 쉬는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장희태가 종선이를 데리고 앞문으로 나갔다.
종선이의 둥그런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 게 보기 안 좋았다. 걱정이 된 나는 손을 씻는 척을 하면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쉬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고려했는지 두 사람은 구석 계단 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가 다소 심각해 보이는 터라 5분 안에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네가 회장님한테 말 좀 잘해 주면 안 될까.”
“하기 싫어.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안 해. 너도 너한테 이득 되는 것도 없는 일에 신경 끄는 게 어때.”
“어렸을 때부터 식사 챙겨 주고 한 분인데 어떻게 그래.”
종선이가 쩔쩔매는 것을 보니 승진에 영향이 갈까 싶어 찍소리도 못한다는 아빠가 떠올랐다. 평생 갑의 입장에서만 살아왔을 저놈은 부탁하는 사람의 심정 같은 건 헤아리지 못할 거다. 5분이 지나자 칼같이 종이 울렸다. 계단에 발을 올린 장희태는 카디건 단추를 끄르다가 나를 찾아내었다. 하여간 감이 좋은 놈이었다.
전속력을 다해 반으로 돌아왔지만 뒤따라온 장희태와 간발의 차였다. 나는 앉아서 교과서를 펴는 척을 했다. 들어와 자리에 앉은 장희태는 따져 묻는 대신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장희태는 책상 속까지 청결하게 유지했다. 펜은 색깔 별로 가지런히 두고, 지우개 똥이 생기는 것이 싫어서 샤프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남자애가 글씨체는 어찌나 바른지 모른다. 지렁이 기어가는 내 글씨체가 가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옛말에 글씨가 그 사람의 인성을 대변한다는 말이 있다만 나는 장희태를 만난 후로 옛말이 다 맞는 건 아님을 알았다.
까칠하게 마른 종선이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했다. 설마 물어봤다고 죽이겠나 싶어서, 이왕 들킨 마당에 쪽지를 썼다.
– 우유 사 올게. 종선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알려죠.
그러나 꼬장꼬장한 장희태는 제 책 사이에 쪽지를 끼워두고 다음 장으로 넘겨 버렸다.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뜻인 것 같아 수업이 끝나고 부리나케 매점에 다녀왔다. 매점에서 제일 비싼 흰 우유를 사 왔지만 차마 자습 시간 전까지 전달해 주지 못했다. 왜 자처해서 부하 노릇을 하느냐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흰 우유를 주둥이를 트고 보란 듯이 장희태의 앞에서 마셨다. 생각해 보니 이놈은 라이벌이자 내 청춘사업의 방해꾼이었다. 순순히 굽신거리다간 낭패를 볼 게 뻔했다.
그런데 흰 우유의 유통 기한이 정확히 오늘까지인 게 문제가 됐는지 석식 시간이 지나고부터 배가 살살 아팠다. 양호실에 가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야간 자습 시간까지 엎드려 있었다. 단순한 배탈인 줄 알고 내버려 두니 위까지 말썽이었다.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야간 자습 시간이 끝나기 30분 전에 화장실로 뛰어갔다. 왝왝거리며 점심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낸 뒤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빠.”
– 어, 공주.
“나 그, 오늘 데리러 와 주면 안 되나.”
– 어디 아프나.
“아니다, 그건 아닌데. 그냥 좀 오늘 차 타고 가고 싶어서.”
식은땀이 나서 변기를 붙잡고 있었다. 화장실 창문 밖에서 따발총 쏘는 소리가 들렸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였다. 봄이 시작되고부터 하늘이 벼르던 것처럼 비를 자주 내렸다. 날씨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종잡을 수가 없는 터라 잠바를 꺼내야 하는지 넣어두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급식실 앞에는 날씨가 뭣이 중하냐는 듯이 화려한 벚꽃이 만개했다. 봄은 제멋대로라서 사람이 애를 좀 먹는다.
비가 하루 세끼 밥 먹듯 오니 일 년을 기다려 피어난 벚꽃도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빗방울의 굵기를 보니 오늘이 벚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야간 자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핸드폰 진동이 야자 시간 중간에 울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말이다.
화장실에 갔다가, 독서실에 엎드려 있다가, 배가 꾸르륵거리면 다시 화장실로 갔다. 지옥 같은 30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터덜터덜 독서실을 나섰다. 기어코 야간 자습까지 버틴 스스로가 독하다 싶었다.
콜록 기침하며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빗방울을 엎고 낙하하는 벚꽃이 하굣길을 분홍빛으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벚꽃의 생이 봄날보다 짧았다. 겨울에는 눈이, 봄에는 벚꽃이 내린다. 벚꽃이 사시사철 맺혀 있다면 사람들이 열광하지도 않았을 터다. 지나감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들도 있으니 말이다.
사춘기 소녀 같은 감상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때 보더라도 벚꽃은 벚꽃인데 말이다. 야간 자습을 끝낸 아이들이 하나둘 벚꽃처럼 학교를 떠나가고 있었다. 나는 연락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직껏 핸드폰 전원을 켜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이.”
다급하게 전원을 켜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였다. 이미 아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아빠는 문자로 자신이 부재중을 남긴 이유를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나를 데리러 올 수 없다는 거였다. 엄마가 아래가 빠지는 것 같다고 말해서 함께 병원으로 가는 중이란다. 믿음직한 맏딸인 내가 이해해야 한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 아침 뉴스에서 기상 캐스터는 비가 올 확률이 30프로 라고 그랬다. 70프로에 기대를 건 나의 실수였다. 나뭇가지에 걸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람에 휘청이는 나뭇가지가 벚꽃을 떠나보냈다.
하나씩 둘씩 짝지어 떠나가는 우산을 지켜보던 내 옆에 까만 우산이 놓였다. 우산 손잡이만 봐도 누구의 우산인지 알 수 있었다. 장희태의 손이 우산 손잡이를 내 쪽으로 돌렸다.
“필요 없다.”
야간 자습이 끝난 시간에, 처량히 벚꽃 비를 맞으며, 우산을 수시로 깜빡하는 건망증이 있는 데다가 부모는 데리러 오지도 않는 무심한 사람들로 보일 거였다. 오늘만큼은 아빠가 데리러 왔으면 했다. 우리 아빠가 나를 불면 날아갈 듯 쥐면 꺼질 듯 신경 쓴다고, 누구보다 장희태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비도 오는데 깜깜무소식인 사람들 아니냐던 장희태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으나 결과적으론 그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가.”
여태 가지 않고 기다린 장희태는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까만 우산을 펼쳤다. 봄바람을 타고 다니던 꽃잎 하나가 나의 입술에 앉았다. 손목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배탈 나서 우는 사람이 제일 꼴사나운 법이었다. 눈물 바람을 하며 연락 없는 핸드폰만 열고 닫고 했다. 손목 밑으로 보이는 장희태의 하얀 운동화는 어디로 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변명을 했다.
“우리 아빠, 오려고 했는데, 오늘 갑자기 동생이 아파서 못 오는 거다. 병원 들렀다가 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온…….”
내 손목을 붙잡아 내린 하얀 손등이 보였다. 눈을 삼박거리던 장희태는 가방에서 쟈스민 향이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줌의 동정도, 경멸도 없었다. 눈물범벅이 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장희태가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비바람에 시달려 차가워진 손이 이마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장희태는 손을 조금 더 내 이마 아래로 옮겼다. 코를 덮은 그의 손바닥에서 향긋한 비누 향이 났다.
“열 있네.”
“아, 그게.”
“네가 남 걱정할 때야?”
네 동생만 아픈 게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벚꽃이 그의 뒤에서 휘날렸다. 나의 예상대로 비를 이기지 못한 벚꽃이 떨어져 바람의 경로를 따라다녔다. 장희태의 손이 벚꽃처럼 내게서 떨어질 때 심장이 조여왔다. 하다 하다 심장까지 탈이 났나 보다. 장희태는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 집중한 그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쟤도 가는구나. 하긴 쟤 성격에 나를 챙겨 주고 그럴 리 없지.
그때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나의 어깨를 잡았다. 사실 어깨라기보다 가방끈을 잡았다고 보는 게 좋을 거다. 꽃잎이 내리는 하굣길을 장희태와 걸었다. 까만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채로 말이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추위를 몰고 왔는지 장희태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나는 몰래 떨어지는 꽃잎 하나를 받아 주먹 쥔 손에 숨겨 두었다. 꽃잎 한 장으로 무얼 기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장희태는 까만 세단 앞에서 나의 가방끈을 놓았다. 우산에 묻은 빗물을 턴 그가 차 문을 열고 나를 앉혔다. 뒷좌석 의자에 던져진 나는 종선이 아버지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어, 안녕. 저기, 희태야.”
장희태는 차 문을 열어 주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제 옷에 묻은 빗물을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던 장희태가 지나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그의 샴푸 향이 마음에 엉겼다.
“정신 차려. 너희 집까지 아직 가지도 않았어.”
“데려다줄라고?”
“그럼 내가 왜 그 수고를 해서 너를 태웠다고…….”
“고마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곁을 내어 준 것은 사실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동시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그가 다급히 받아냈다. 혀를 차며 나를 뒤로 눕혔다. 딱딱한 시트에 뺨이 눌리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머리가 기우뚱 넘어가 가죽 시트보다 안락한 곳에 닿았다.
꽃밭에 누워서 뒤척이는 기분이었다. 가방 멘 어깨가 내 머리를 편하게 받쳐 주었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창문 밖을 보았다. 날이 개고 더워지면 꿀떡이가 태어나겠구나. 쓸쓸할 필요도 없는 일에 쓸쓸해하는 나의 수준이 슬펐다. 엄마, 아빠한테 배은망덕하다고 버려져도 할 말이 없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뺨에 괸 눈물을 모두 훔쳐 갔다. 내가 흘릴 때마다 훔쳐 가는 통에 얼굴이 금세 보송해졌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위로라도 좋았다. 나는 완전히 꽃밭에 몸을 묻었다. 시끄러운 따발총 소리가 멈추었다. 커다란 손이 내 주머니 쪽을 더듬거렸다. 이윽고 딱딱한 발음이 귓가에 쏙 들어왔다.
네, 집 앞, 귓가에 뭉쳤다가 흩어지는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차 문이 열렸는지 시원한 바람이 치마 밑으로 들어왔다.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등에 업었다. 향긋한 꽃이 따라 나와 내가 등에 업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결에 내 가방을 대신 메고 있는 장희태를 본 것 같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장희태는 입 모양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아마도 꿈이겠지. 손안에서 구겨진 꽃잎 한 장이 침대까지 따라 들어왔다. 아주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상한 우유를 먹고 배탈이 난 데다가 그간 스트레스가 심해 열까지 났단다. 의사는 고등학교 3학년이니 신경 좀 써 달라고 부모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덕분에 학교는 하루를 빼 먹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복력이 빠르다는 것과 일의 모든 원흉인 우유를 장희태에게 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하마터면 배탈이 난 장희태에게 피의 복수를 당할 뻔했다.
“왜 말을 안 해. 어? 엄마가 데리러 간다꼬.”
“아, 무슨요. 그냥 고3이라서 그런 거예요, 걱정 하나아아도 하지 마세요.”
엄마는 조산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직 두고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노산이라서 특히 주의해야 한다는 말에 아빠는 아예 며칠 휴직계를 내신 모양이었다. 아빠는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한다. 엊그제 쓰러진 게 당신의 잘못인 것처럼 풀이 죽어 계셨다.
영어 단어장을 챙겨 든 나는 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배탈 좀 났다고 오냐오냐해주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되었다. 하루를 빠진 만큼 세 배로 정진해야 했다.
“아.”
아침 자습 중인 교실 안에 장희태가 있었다. 배탈 난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던 남학생은 분명 장희태가 맞을 것이었다. 장희태의 차를 얻어 탄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민폐를 끼쳐 미안한 감정이 생겼나 보다. 교실로 들어가는 나의 걸음이 보통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우림아.”
“어.”
“아팠다며? 괜찮아?”
“아, 괜찮다. 싹 나았다.”
반 친구가 작은 알사탕을 주어서 고맙게 받았다. 코를 긁적거리며 옆자리를 훑었다.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 장희태의 모습이 보였다. 탈이 나서 죽다 살아난 사람이 오건 말건 수학 문제를 푸는 자세가 한결같다고 할 수 있었다.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고 아침 겸 챙겨 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수학 문제를 떠난 시선이 내 책상을 살폈다.
“먹지 마.”
“어?”
“그런 거 먹지 말라고.”
말로만 해선 안 되겠는지 책상 위에 놓은 샌드위치를 자기가 가져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그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내 아침인데.”
고개를 저은 장희태가 손에 든 펜을 팽그르르 돌렸다.
“배고프거든? 아님 새 걸로 사다 주게?”
말이 통하지 않는 장희태가 샌드위치를 제 가방 속에 버려 버렸다.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탈이 나는 거라며 은근히 비꼬기까지 했다. 샌드위치를 숨긴 장희태와 육탄전을 벌이기 직전에 앞문이 빠끔 열렸다. 종선이였다.
“이거.”
종선이는 펜 한 자루를 장희태의 책상에 올려두고 돌아갔다. 그런데 가슴에 바쁜 일이 생겼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종선이의 등에서 날개가 파닥거렸을 터다. 뒷문으로 나가는 종선이의 등에서 감쪽같이 날개가 사라졌다.
“이상하다.”
펜을 놓은 장희태가 목을 주무르다가 말고 내 쪽을 응시했다.
“어.”
파업 선언한 가슴께가 장희태를 보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하필 봄 햇살 비추는 창가에 앉을 게 뭐람. 장희태의 날렵한 턱선에서 빛이 났다. 그는 갈색 기가 도는 눈을 샐그러트렸다.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리며 몸을 왼편으로 틀었다. 한 입 깨물어 먹으면 톡 터질 것 같은 입술이 뻐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여 콩깍지 같은 환상을 쫓아내었다.
“병 다시 도졌어?”
“아니, 아니다.”
내 말이 빈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장희태는 가방에서 우유 팩 하나를 꺼내서 책상에 올려뒀다. 딸기 맛 우유 팩에 그려진 앙증맞은 하트 로고가 미소를 불러왔다. 딴청 피우고 있는 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눈길만 틀어 나를 본 그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고맙다.”
웃음기 번진 그의 입가를 모른 척해 주며 우유 팩을 가방에 넣었다. 단숨에 먹어버리기엔 아까운 우유였다. 탈이 난 이후로는 우유 같은 건 꼴 보기도 싫었는데 지금은 우유의 고소한 맛을 눈감고 그릴 수도 있었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선생님마다 내 뺨이 복사꽃처럼 붉다고 했다.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은 마음이 연방 술렁거렸다. 그때 팔이 옆으로 치우쳐지면서 나의 팔꿈치와 그의 팔꿈치가 맞닿았다. 찌르르한 기분이 팔꿈치부터 타고 올라왔다. 장희태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수업 시간 내내 팔꿈치를 떼지 않았다. 고작 그만큼 닿았을 뿐인데도 내 심장은 주책맞게 뛰었다.
교실 형광등 아래서 떨고 있는 나의 마음은 계속 같은 질문을 던져댔다. 내 몸이 왜 이러는가. 내 머리가 왜 이러는가. 왜 옆자리에서 빛이 들어오나.
장희태는 필기하는 척하며 내게 쪽지를 건넸다. 눈을 의심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그가 보내는 쪽지였다.
– 학교 수업 끝나고 잠깐 시간 내.
이 사태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수업에 집중할 때 펜 끝을 살짝 물고 있는 버릇마저 좋았다. 아무래도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
화장실에 들러 손을 닦으며 이빨에 낀 것은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물을 묻혀 앞머리를 정리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계단 쪽 창문에 기대 서 있는 장희태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같은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가만히 서서 창문 밖을 보고 있던 장희태가 실내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창문으로 넘어오는 꽃향기인지 아니면 그의 비누 냄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향기를 맡으면 봄 타는 사람처럼 기운이 빠지고 입맛이 없어졌다.
“와 불렀는데.”
“수업 마음에 들어?”
“어?”
“학교 끝나고 하는 보충 수업.”
보충 수업 얘기였구나. 성실한 모범생인 장희태가 보충 수업에 불만을 가질 줄은 몰랐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는 마음에 안 드나.”
“질 떨어져. 수능에 도움도 안 되는 내용만 가르치고 있고.”
“아…….”
이렇게 보충 수업을 강제할 시간에 스스로 자습하는 게 백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있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나도 사실 자습이 더 맞아서. 쪼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
“그래?”
“그런데 뭐 어째. 이거 강제라매.”
“너만 있으면 강제가 아니지.”
“나?”
“둘이서 스터디 한다고 하면 빼 준다고 했어, 담당 선생님이.”
“아, 진짜?”
원치 않는 보충 수업을 강제로 들어 고통을 받느니 그 길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 둘이 보충 수업을 하는 동안 장미반 전용 독서실을 쓰면 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제안인 것 같아서 설득되는 중이었다. 결론을 내린 장희태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핸드폰 줘 봐.”
“왜.”
손을 내민 그에게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서 주었다. 버튼을 눌러 번호를 입력한 그가 통화음이 들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고 내게 돌려주었다. 이내 제 핸드폰을 꺼내 연락 온 번호를 저장하는 눈치였다.
“아, 네 번호?”
“담당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넌 뭘 물어도 그냥 알겠다고만 해.”
숨 쉴 틈도 없이 제 말만 하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멍하니 눈 뜨고 당한 나는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가며 말했다.
“우리 그럼 문제 서로 주고받고 할래? 어려운 거나 조금 난해한 거 나오면…….”
“난 혼자가 편해.”
말 한 번 싸가지 없게 한다. 저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뱃멀미하듯 울렁이는지 모르겠다. 장희태와 길이 엇갈린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에 교실로 내려갔다.
반에서 가방을 챙기고 독서실로 갔다. 원래라면 보충 수업에 들어가야 했지만 치사하게 내 쪽에서 동맹을 깰 순 없었다. 스터디란 말로 담당 선생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럴 만한 자신이 있으니 먼저 말을 꺼냈겠지 싶었다.
독서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 많은 구석 자리는 항상 만석이었다. 보충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사람이 차기 시작하니 오늘부로 구석 자리는 내 차지가 될 거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하나 둘 꺼낼 즈음이었다. 찰칵, 독서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그리고 장희태였다. 장미반 담당을 맡은 수학 선생님이 30cm 자로 나를 가리켰다.
“그럼 너희 둘이 딱 붙어 앉아야겠네. 저 칸막이 없는 자리가 낫지? 전교 1등하고 2등하고 나란히.”
수학 선생님의 말에 장희태는 칸막이 없는 넓은 책상으로 옮겨갔다. 반에서도 모자라 독서실에서까지 나란히 앉게 됐다. 우리는 서로 가지고 온 짐을 느릿느릿 풀었다. 수학 선생님은 종종 올라와 감시할 거니 둘이 놀거나 따로 앉아 공부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규정상 따로 있으려면 보충 수업이 끝나고 난 후부터 가능했다. 우리 둘이 스터디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니 같이 앉아서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수학 선생님이 독서실의 문을 닫고 나감과 동시에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장희태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저기, 궁금한 게 있다.”
대답 없이 제 가방에서 이어폰을 찾고 있느냐 바빴다. 질문 타이밍을 잡던 나는 장희태의 손이 느려진 틈을 타 덥석 물었다.
“왜 학원을 안 가고.”
“갔으면 좋겠어?”
“너 과외도 안 하는 눈치던데.”
“너도 안 하잖아. 그런데 너한테 졌잖아.”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기가 차서 허허, 웃음소리를 냈다.
“나 때문에? 그럼 나 때문에 굳이 자습하고 과외도 안 받고?”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은 그가 펜을 딸각거리며 말했다.
“이번 시험에서 나한테 지고 싶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독하디독한 놈이었다. 그렇다고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설렁설렁하게 사는 사람보단 깡다구 있는 사람이 좋으니 말이다. 종선이 성격이 말랑말랑해서 좋다는 생각 따윈 양심과 바꾸어 먹었다. 나는 수줍은 미소로 책을 펼쳤다.
장희태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날카로운 펜촉의 소리로 덮었다. 나는 지우개로 틀린 부분을 지우지만 지우개 가루가 싫은 게 분명한 장희태는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펜으로 노트를 채워갔다. 장희태는 몰래 그의 필기를 훔쳐보는 나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어느덧 나와 그의 자세는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그가 파란색 볼펜을 꺼내기 위해 팔을 든 순간이었다. 지우개를 잡으려고 팔을 뻗은 나와 동선이 겹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등을 더듬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어깨 너머로 필기를 훔쳐보느라 그의 등에 겹치다시피 붙은 나는 상황 판단이 느렸다. 반듯하고 빼어난 이목구비가 코앞에 있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향긋한 꽃 내음은 바깥의 봄이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의 몸속에 사는 것이었다. 코끝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숨에 꽃 냄새가 배 있었다.
“흠, 흠.”
숨과 함께 들이마신 꽃향기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배 속을 돌아다녔다. 배가 간지러워 엎드려 있을 때 줄을 긋고 있던 펜촉이 멈추었다. 얼굴이 빨개져 있을 게 분명해서 숨고만 싶었다. 이내 이어폰이 책상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배우림.”
장희태는 나를 배우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내 이름을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부르면 그에게 통째로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독서실에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배우림.”
“좀 자려고.”
“나 두고 자지 마.”
자기를 두고 자지 말라는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꾀부리는 것을 아는지 그가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네가 잠들면 공부가 안 돼.”
“어…….”
“네가 옆에서 필기하고 있으면 집중이 잘 된다고. 승부욕이 생겨서.”
장희태는 아주 잠깐 내 목덜미를 안마하듯 주물주물 만졌다.
“그러니까 자지 마.”
이번에는 내가 자는지 안 자는지 감시하는 것처럼 이어폰을 빼고 있었다. 그는 간간이 멍을 때리고 있는 나를 감시했다. 내가 잠이 들라치면 파란 잉크가 흘러나오는 볼펜으로 내 손등에 동그라미 같은 것을 그렸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잠을 물리치고 연필을 쥐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그에게 1등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는 고요하고 나는 동요한다. 무슨 비누를 쓰는지, 무슨 향수를 뿌리는지, 나의 성적을 떨어트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
장희태와 나는 둘도 없는 경쟁자이자 친구이자 그리고 서로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도구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열심히 하는 그를 보면 덩달아 의욕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하루가 다 간 경우도 있었다. 장희태가 오늘 하루를 기념하듯이 긴 숨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공부를 끝마치면 나는 장희태와 하굣길을 걸었다. 장희태의 기다랗고 예쁜 손이 필통을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그리고 나는 그다음이 좋았다. 내가 가만히 지쳐서 앉아 있으면 장희태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면서 나를 기다렸다.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정리하는 게 늦어지면 성질 급한 사람처럼 나의 가방에 책과 필통을 대신 넣어 주었다. 심지어는 계단에서 나보다 먼저 걸어가 내가 넘어질 것을 대비하는 것처럼 굴 때도 있었다.
누가 보면 망상 환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나는 그것들이 나의 망상에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의 속눈썹, 입술, 목선에 매료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장희태는 걸어서 하교하려는 내 앞에다가 차를 세웠다. 자기가 직접 차 문을 열어 주는 건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의 동행이 익숙해진 종선이 아버지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차를 타면 아는 체를 하느냐. 열에 아홉은 묵언 수행이었다.
결국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나는 눈을 뜨고 집을 나선 순간부터 온종일 장희태의 지배하에 있는 거였다. 장희태의 행동도 미적지근, 애매모호했다. 수발을 들라고 거창하게 요구했지만 그래봤자 이따금 던져주는 독후감이 전부였다.
오답 노트보다 하굣길이 좋아진 나는 발을 들고 신이 난 표를 냈다. 나는 음악 감상 중인 그의 가방을 쭈욱 잡아당겼다.
“무슨 음악 듣는데.”
이어폰 한쪽을 빼낸 장희태가 새치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이어폰을 억지로 빼앗아 귀에 댔다. 지독한 놈. 영어 듣기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와, 독하다, 독해. 지금 영어 듣기를 하고 싶나?”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종선이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저 정도는 해야 공부도 1등하고 그러는 거지.”
“전 1등인데 이렇게 안 하거든요.”
내 장난스러운 말에 껄껄 웃은 아저씨가 아파트 단지 앞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추었다. 보통 단지 앞에서 내려 주지만 여기에 내려 주어도 걸어서 2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아저씨에게 이만 세워 달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앞으로 내민 나의 몸을 장희태가 훅 잡아당겼다.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게 된 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내일 책 받으러 와.”
주말이라서 모처럼 쉬려고 했지만, 뭐, 하루 더 본다고 공부에 지장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홈쇼핑에서 새로 산 후드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저와 있는 게 싫다고 할 줄 알았나 보다. 매사 의기양양하던 놈이 껄끄러운 양 시선을 피했다.
“왜. 내가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나.”
“…….”
“너희 집 가면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난 좋다. 너희 집 냉장고 싸악 다 털어 줄게.”
그의 방에서 독후감 용 책을 읽거나 문제집을 공유하는 것, 가끔 샛길로 빠져 사석에서나 할 법한 유치한 대화를 하는 것도 좋았다. 며칠 뒤가 시험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말이다. 나는 이번 학기 내내 그와 세트로 붙어 다니는 게 싫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별거 아닌 제 말에 웃으면 장희태는 얼을 탔다. 장희태의 뜻대로 굴지 않으면 그에게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나는 신호등에서 그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오늘 하루도 일기장에 적을 만큼 좋은 일이 있었다. 그와 있어서, 그와 함께 공부해서, 그가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줘서.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장희태와 이렇게 엮이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전부 종선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엄마야.”
그런데 나는 지금 완전 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종선이는 안중에도 없고, 그가 며칠 보이지 않아도 나는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장희태가 수수께끼 보듯 나를 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느덧 우리 사이에서 종선이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걸 수상쩍게 여겼을 수도 있었다.
나는 힘차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일은 다르게 굴어야 한다. 이래선 내가 장희태를 마음에 둔 것 같지 않은가.
***
아침부터 어디 가냐는 엄마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있었다. 요즈음은 엄마와 웃고 떠들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나도 내 마음이 망망대해에 던져진 낚싯바늘 같았다. 미끼를 걸고 뭣 하나만 걸려라, 하는 심보였다. 그걸 장희태가 문 것이었다. 망망대해에 던져진 낚싯바늘은 물고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핑계로 시간을 버리는 낚시꾼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외로운 바다에 내 부모가 되어 줄 물고기는 없었다. 그러니 미역 줄기 같은 애정이 낚싯바늘에 걸리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냥 엄마가 나만의 엄마가 아닌 게 적응이 안 되고, 아빠가 다른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게 적응이 안 된다. 나는 가짜 낚시꾼이고 저쪽은 물고기다. 주말 동안 셋이서 보낼 시간을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밝고 좋은 말로 포장하려고 해 봐도 내 그릇이 이 정도인 거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몇 달 뒤 꿀떡이가 태어나면 집에서 내 입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다. 부모님도 나를 성인까지 키워줬으니 할 만큼 하셨다. 눈치 주기 전에 내 발로 집을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착하신 분들이니 대놓고 말을 못 할 터였다. 대학 자취방을 구한다는 핑계가 제일 좋았다. 서로 못 볼 꼴 안 보고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배우림.”
“어. 왜 나왔나.”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굳이 자기가 밖으로 마중 나올 필요는 없었다. 장희태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열었는데 안 들어오고 그러고 있는 건 너였어.”
“내가 그랬나.”
“신발 끈도 풀렸고.”
“아.”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대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실수가 잦았다. 오렌지 주스를 그의 셔츠에 쏟질 않나, 책을 거꾸로 두고 읽질 않나. 그와 책상 앞에 마주 앉았음에도 나는 꺼벙하게 굴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롤러코스터 타듯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아랫배까지 살살 아픈 게 생리할 때가 됐나 싶었다. 혹시 몰라 패드는 붙이고 왔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책장에서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는 제목의 책을 꺼내었다. 저도 풀 문제집을 꺼내 온 장희태가 문제는 풀지 않고 내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장희태의 눈이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뺨은 목욕하고 막 나온 양 발그레했다.
“그만 봐라.”
짜증을 부렸더니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눈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약간 미안해져서, 말할 거리를 찾다가 며칠 만에 종선이를 기억해 냈다.
“종선이는 주말에 뭐 하나.”
“몰라.”
“같이 공부할까.”
“학원 갔을걸.”
“연락도 자주 안 하나.”
갑자기 문제집을 팍 덮은 장희태가 고개를 숙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훈풍이 불던 분위기가 한밤중 고시원보다 못하게 됐다.
“내가 알 바야?”
화를 내는 장희태 때문에 덩달아 기분이 나빠진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내가 뭐 잘못했나. 어? 그리고 애초에 너 나랑 종선이랑 이어 준다고, 아니,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것도 성질을 내면 어쩌라는 건데.”
“김종선이 어디가 좋은데.”
“그게 와 궁금한데.”
“좋아하는 이유도 못 대?”
생각해 보니 이 정도 대화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나는 손톱을 뜯으며 우물쭈물 말을 이어갔다.
“향기도 좋고, 그리고 하얗고 말랑해 보이고…….”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얼굴로 진지하게 들어 주던 장희태의 표정이 갈수록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 내 말이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인지 다시 문제집을 펼쳐 든 장희태는 뾰족한 볼펜으로 밑줄을 좍좍 그었다. 종선이의 장점 늘어놓기는 그로부터 삼 분 가량을 더 소모하고 끝이 났다. 장희태의 눈에 천불이 난 것처럼 실핏줄이 뻘건 색으로 변했다.
장희태는 입술을 앙다물고 침묵 중이었다. 화가 식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장희태가 돌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크게 쓸어내렸다.
“내가 미쳤지…….”
그의 낮은 중얼거림은 내게 의문을 남겼다. 태연히 물어볼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 책의 첫 장만 수십 번 읽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하얀 우유와 딸기를 쟁반에 들고 들어 오셨다. 책상 위에 올려진 새빨간 딸기를 본 나는 문득 장희태가 종선이와 계단에 서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목을 축일 흰 우유 한 모금을 마신 뒤 운을 뗐다.
“그때. 나 몰래 들은 거 알지. 쪽지로도 얘기했고.”
“뭘.”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 보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에게 기운 내라는 의미로 딸기 찍은 포크를 건네주었다.
“무슨 아주머니 어쩌구 하면서.”
“김종선이 너한테 대신 물어봐 달라고 그래?”
“아, 아니다. 그냥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그날 이후로 왠지 종선이도 우리 반에 잘 안 오는 것 같고.”
“일하시던 분이 실수해서 할아버지가 나가라고 했는데 그걸 나더러 막아달라던데.”
“아…….”
그게 그런 맥락의 이야기였구나. 듣다 보면 장희태는 모든 이야기를 덤덤하거나 공격적으로 끝내는 성향이 있었다. 방금도 자기 얘기면서 생판 모르는 남 얘기처럼 끝내버렸다. 안 좋은 버릇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김종선은 좋겠네.”
“왜.”
“열성적으로 내조하는 여자애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이참에 고백하지 그래?”
응원하는 투가 아니라 비꼬는 투였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발가락으로 그의 종아리를 톡 쳤다. 책에서 떨어져 나온 그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별말을 안 했음에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고백은 언제 하게.”
왜 그리 고백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종선이를 좋아하는 여자애로 쟤한테 인식된 후였다. 나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능 끝나고.”
“왜. 김종선이 네 고백 듣고 설레서 수능을 망치기라도 할까 봐?”
안 그래도 우울한 날에 장희태까지 숟가락을 얹겠다고 나섰다. 마음 같아선 집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마음 수양한다는 생각으로 참을 인 자를 머리에 새겼다.
“장희태.”
“왜.”
“너 나 좋아하나.”
유치한 장난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생각이었지만 장희태의 표정이 굳어감에 따라 내 표정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됐다. 그때 장희태의 보들보들한 실내화가 내 발 옆으로 옮겨왔다. 상체를 숙인 장희태의 눈이 코끝 언저리를 배회했다. 그가 내쉬는 숨 내음이 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틀어쥐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개를 뒤로 빼었다.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그의 것도, 나의 것도 말이다. 조심스레 내려다보는 눈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열꽃이 피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니,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애간장 녹이는 눈빛에 나의 입술이 끌려갔다.
“아님, 아니라고 말로 할 것이지. 나 밖에 가서 읽는다. 잠 와.”
책을 챙겨 든 나는 코를 쓱 만지면서 이층 거실로 나갔다. 장희태와 키스할 뻔했다. 떠나온 공부방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로 앉아 있었다. 어느새 책 읽는 일은 후 순위로 밀려났다. 이불 대신 책으로 내 배를 덮었다.
생리통이 심해 몸을 소파 위에서 굼벵이처럼 말았다. 책을 베개 삼아 5분만 누워있으려고 했다. 알람까지 맞추고 잠들었는데 만성 피로로 귀가 어두워진 모양이었다. 알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꿈 한 번 꾸지 않고 깊게 든 잠이었다. 덮고 있는 담요가 팔에 여러 번 엉키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날락 말락 했다. 나를 얄짤없이 깨운 것은 쨍그랑 접시 깨지는 소리였다. 발딱 일어난 나는 덮고 잔 기억이 없는 담요를 벗어 던지며 소파에서 기듯이 내려갔다.
일층 쪽에서 들리는 쩌렁쩌렁한 호통이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첫 번째로 파양 당한 집에서 겪은 일이 아파트 부녀회 귀에 들어가 신문에까지 난 적이 있었다. 남자 어른의 손찌검과 호통은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했다. 서너 살 때의 일이 아직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게 불쾌했지만 이건 뼈에 새겨진 고통이었다.
“임마! 네가 그렇게 잘났어!”
내려다본 일 층 거실에는 장희태가 버젓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장신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연세에 비해 기운이 팔팔한 할아버지는 장희태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일 보시는 분들도 기가 죽어서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장희태는 뒷짐 지고 서서 땅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날아와 장희태의 뺨을 휘갈겼다.
“안 말린다. 너도 네 애비나 숙부들처럼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입술이 터졌는데도 장희태의 표정은 맞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정작 한마디 거들지 못한 내가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장희태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마구 욕을 뱉은 뒤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남의 시선이야 어떻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마친 장희태는 제 터진 입술을 슬쩍 만져보았다.
저분이 그 책을 읽고 쓸데없이 감상문 쓰라던 그분이군. 내가 쓴 감상문이 인터넷에서 베낀 것임을 알고 노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장희태의 눈이 마침 이 층을 향하고 있었다. 동정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눈에 힘을 주었다. 나를 좇아온 시선은 금세 거실 창으로 도망쳤다.
정원 소나무 뒤로 큼직한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게 위로를 건네겠다, 뭐 그런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일 층에 거의 다다랐을 때 장희태는 지갑을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약을 가져오던 아주머니의 손이 민망하게 돼버렸다. 나는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약통을 받아 들었다.
“저 주세요.”
“아, 그럴래요?”
“예.”
장희태의 성격상 나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었다.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장희태가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분주하게 발을 놀려야만 했다.
대문을 밀치고 나가 언덕을 내려가는 그를 거의 따라잡았을 즈음이었다. 그는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서 멈추었다. 굉장히 분해 있거나 굉장히 속상해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장희태는 예상 밖이었다. 터진 입술만 빼면 어제 본 그의 얼굴과 똑같았다.
오히려 약을 들고 쫓아온 내 쪽이 호들갑을 떨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약은 발라야 한다는 생각에 약통을 열어 후시딘을 찾아내었다.
“이거 바르고 가라.”
그가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주 세게 잡은 것도 아닌데 그는 팔이 다 떨릴 정도로 움찔하며 내 손을 견뎌냈다. 그의 팔을 잡아서 슬그머니 담벼락 쪽으로 데려왔다. 벽에 그의 등을 대게 해서 고정시킨 뒤 후시딘을 짜내었다. 그에게 바르라는 뜻으로 손을 내미니 장희태가 고개를 저었다.
“얼른 발라라.”
“미끄덩거리는 거 싫어.”
“얘가?”
나는 발끝을 들어 그의 키에 맞추었다. 손만 조금 더 뻗으면 되겠다 싶어 온 힘을 다하여 그의 입술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내 후시딘을 묻힌 손가락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 활짝 웃고 말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보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꼴 좋다고 웃은 건 아닌데 장희태는 표정이 굳어 내 손목을 잡았다.
“왜…….”
손목, 그리고 다음 차례로 허리가 잡혔다. 몸이 들린다는 느낌을 받은 찰나였다. 나의 입술은 무방비 상태였다. 후시딘이 발라져 미끄덩한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목이 움츠러드는 순간에 나의 위치와 그의 위치가 바뀌었다. 벽에 등이 닿자마자 그의 입술이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아니, 그의 입술이 아니라 혀였다.
독사같이 긴 혀로 나의 입 안을 훑고 들어오는 동시에 내 허리를 꼭 안아 들었다. 쪽, 쪽, 소리를 내면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눈물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의 손이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는 바람에 숨 참기도 곤란해졌다.
그의 입술은 이만하면 떨어지겠지 싶은 순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물 만난 고기처럼 나의 입 안을 탐했다. 그의 혀 움직임을 따라서 내 고개가 움직일 차였다. 선명한 쪽,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으, 하아…….”
“배우림.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가, 뭘 건드려.”
“나 자주 얻어맞아. 할아버지가 화풀이할 상대는 나밖에 없거든. 아버지 죽고, 숙부들은 멍청해서. 집안에 그나마 남은 자식새끼라곤 나밖에 없어서.”
제 식대로 투정을 부리고 입술을 부딪쳐왔다. 장희태의 어두운 가정사에 대해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가정사와 이 키스가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희태의 키스는 제 성격처럼 끈질기고 고집스러웠다. 내 뺨을 잡고서 입술을 가져가는 그의 행태는 보다 노골적이라서, 나도 모르게 그의 혀가 볼 안쪽을 핥을 때마다 발끝이 저릿해졌다.
“그마, 그만해.”
그의 혀에 붙잡히는 바람에 발음이 뭉개졌다. 힘도 얼마나 센지 모르겠다. 아등바등 그의 어깨를 밀어내자 겨우 말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가까스로 입술을 말아 물어 키스를 차단했다.
“배우림은 착하잖아.”
“뭐가 착하다고…….”
“김종선. 좋아하는 거 맞아?”
그의 물음에 명명백백 답할 수 없었다. 장희태가 나와 이마를 맞대고 평정심이 자리한 눈동자를 들이댔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내 속을 꿰뚫듯이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입을 맞추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넌 김종선 안 좋아해.”
“네가 내 마음을 다, 다 아나.”
“모르지. 하지만 안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거든.”
그 이후로 나는 오랜 시간 장희태의 입술을 받아냈다. 아랫입술로 살짝 나의 입술을 열어 혀를 집어넣는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였다. 입술이 아리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는 이 입맞춤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터라 바람도 소식이 없었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할 즈음 그는 나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얼굴도 들지 못한 그날 밤. 나의 첫 키스에는 후시딘 맛이 났다.
***[S.D]
중간고사를 치르는 내내 나는 정신이 약간 빠져 있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장희태의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간 간간이 나를 무시와 방관으로 대하며 자기가 필요할 때만 말을 걸던 그는 수업 시간 중에도 나를 건드리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정도 지나면 가라앉으려나 싶었지만 장희태는 오히려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내 자리로 걸어왔다.
“가자.”
“어, 어데로.”
“독서실.”
말로만 저렇게 하고 어디로 데려갈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으나 장희태의 손이 내 손을 알게 모르게 덮었다. 반 아이들이 눈치를 챌까 싶어 손을 책상 아래로 숨겼다. 장희태는 다시 한번 음산히 속삭였다.
“여기서 해?”
이게 내가 중간고사를 치를 때 정신이 빠진 이유였다. 답을 맞혀 본 아이들이 학교를 속속 빠져나갈 때까지 장희태는 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노래방을 갈까 말까 이야기하던 여학생 셋이서 장희태에게 말을 걸었다.
“희태야.”
잠기운 묻은 눈을 뜬 장희태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반에서 가장 활달한 편인 정선이가 장희태에게 제 무리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험 끝났는데 노래방 가서 같이 놀래? 우리 반 애들도 거의 오기로 했는데.”
그리고 정선이는 인심 쓴다는 듯이 나도 끼워 주었다.
“너도 와. 우림아.”
“아, 나는…….”
“우리 스터디 해.”
내 책상 앞에 엎드려 있는 장희태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본 정선이가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너희 진짜 열심히 공부한다.”
할 말이 없는 나는 속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선이는 더는 설득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정선이네 무리가 떠나자 교실에는 분필 가루, 중간고사 시험지, 그리고 나와 장희태뿐이었다. 고개 든 장희태의 눈은 기대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장희태는 내가 아닌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시험이 끝나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떠난 아이들 덕에 하굣길이 시끌시끌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물걸레질한 복도는 다음 주까지 쓸 일이 없을 거다.
“그……. 저.”
나는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 그것도 시험이 끝나고 답이 아닌 입을 맞춰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심하면 장희태는 나를 계단, 독서실 앞으로 끌고 가 입술을 섞는 것에 푹 빠졌다. 싫다고 할 수 없는 건 나도 나쁘지는 않아서긴 한데 어떻든 간 우리가 이러는 게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소위 말하는 섬싱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장희태는 입술을 들이미는 것에 부담이 없었다.
“음.”
책상을 짚고 상체를 넘겨서 나의 입술로 다가왔다. 입술이 닿자마자 실내화 속에 든 발가락 끝이 움츠러들었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은 이제 더 터지지 않고 나아가는 참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키스를 해대다간 금세 덧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뺨은.”
입술에서 빠져나와 내 뺨으로 옮겨간 그는 짧게 뺨과 귓불 근처에 뽀뽀하고 다시 입 안으로 돌아왔다. 잡을 게 없어 필통을 쥔 나는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헐떡이며 숨을 쉬었다. 장희태의 눈빛이 만족에 차 있을 때마다 나는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그의 말을 실감했다.
“왜, 자꾸 입을 맞추는데.”
그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쌓인 걱정이 풀어지겠지만 나는 그의 입술에서 고백은커녕 비위를 얼러맞춘 말도 들어 본 일이 없다.
“하고 싶으니까.”
그건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날 좋아하느냐고 묻는 건 그에게 자존심을 바치는 일이었다. 소심한 나는 가방을 들어 힘없이 필통을 챙겨 넣었다. 장희태는 가방을 메고서 내 입술을 만지작만지작하였다. 매일 같이 하교를 하다가 보니 얘나 나나 한 사람이 없어지면 하교할 생각을 않는다.
“앞으로 입맞춤은 하루에, 한 번씩만 하자.”
기어코 절충안으로 하루에, 한 번씩이라는 기염 토할 말을 하게 만들었다. 장희태는 어깨를 잡아 칠판 쪽에 내 등을 대도록 했다. 뽀뽀 중독증에 걸린 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런 건.”
“안 되지! 당연히…….”
“그러면 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이게 스트레스 푸는 유일한 방법인데.”
나는 충격 먹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나랑 뽀, 뽀를 안 하면 공부가 안 된다고?”
“그냥 하자.”
그냥 하자는 말의 의미를 몰라 쳐다보고 있을 때 장희태가 젖은 내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하자고.”
장희태의 손이 내 손목을 감쌌다. 이게 사귀는 것인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감은 확신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라면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도 되었다. 마지막 확신을 얻고 싶어서 은근살짝 그의 손을 잡았다.
장희태는 손을 잡는 것을 싫어해 내 손이 닿을라치면 병균이 옮는 양 뿌리치곤 했었다. 그런데 제 손을 잡는 것을 내버려 둔다. 테스트 삼아 손가락까지 단단히 엮었음에도 뿌리치지 않았다.
아, 그럼 이건 사귀는 거구나. 그래서 대중없이 입을 맞추려고 했구나. 과정은 범상치 않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첫 남자친구였다.
기쁘다.
다시 보니 그의 얼굴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잘나고 멋진 얼굴이었다. 큰 키도, 떡 벌어진 어깨도, 곧은 팔과 다리도 그렇다. 하나도 내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없었다. 내키는 대로 입을 맞추자던 장희태의 말이 애정 표현으로 들리면 중증이려나.
“어디 가는 건데.”
“우리 집.”
“가기 전에 뭐 좀 먹을까.”
남자친구라는 생각이 들자 그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히 떡볶이에 어묵이라도 사 주려고 했다. 그 판단이 잘못됐다는 건 분식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매운 것을 즐기지 않는단다. 하는 수 없이 어묵 국물이라도 먹으라며 종이컵에 떠 주자 진정 질색했다.
“안 먹어.”
“왜. 좀 먹어 봐라.”
“더러워. 너도 먹지 마.”
물엿을 꺼내던 사장님은 장희태의 말에 가자미눈을 떴다. 눈치가 보인 나는 시켜 놓은 떡볶이를 거의 남기고 말았다.
“내가 사 주는 건데 그냥 먹으면 안 되나?”
그를 버스 정류장으로 질질 끌어 데려온 뒤 들입다 소리쳤다.
“너는 사회생활도 못 할 거다.”
“알아.”
“자랑이다.”
오늘은 종선이네 아버지를 부르지 않은 모양인지 버스를 타고 가자는 말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 날이 따듯해지는 바람에 손을 잡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사귀는 사이 같은 분위기라고 한다면, 한 가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예전엔 버스가 이렇게 빨리 오는지 몰랐다. 집에 가는 게 아쉬워서 버스를 한 대, 두 대 보내게 된다. 몇 번 버스를 타는지도 모르는 장희태는 내 마수에 휘말린 셈이었다.
“장희태.”
“…….”
“너는 왜 그리 싸가지가 없냐.”
나름 애정을 담아 한 말이었지만 장희태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 보다. 기분이 상한 것처럼 미간을 팍 구겼다. 나는 웃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안 되겠다. 내가 잘 봐 줘야지. 앞으로 나한테 잘해라.”
웃음이 실실. 봄이 실실. 나를 지나치고 나를 떠난다. 내 생각인데, 나와 그는 죽이 잘 맞는 커플이 될 것 같았다.
***
며칠 지켜본 결과 장희태는 대체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2등이라는 성적이 찍혀 있는 성적표는 우울 그 자체였다. 반면 1등을 한 그는 과도하게 기뻐하지도, 과도하게 내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당연히 받아야 할 점수를 받은 듯 그는 성적에 대해 좋다느니 싫다느니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대화로 알아낸 것은 그가 먼젓번 뺨을 맞은 이유가 내게 1등을 빼앗겨서란 것이다. 손자가 늘 1등만 해 왔으니 그의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충격일 것이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이 정당화되진 않지만 말이다.
장희태는 제가 기분이 나빠지면 말이 많지만 평상시엔 말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다. 대화로 남의 공감을 사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엔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성적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히 모든 건 내 추측이기에 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슬프다.”
오늘은 영화관 데이트 흉내를 낸답시고 일 층 거실에서 영화를 틀었다. 물론 그러자고 그런 건 아닌데 장희태는 노래방도, 카페도, 어느 것도 좋아하는 게 없고 오로지 책과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그에게 책 말고 영화를 보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의였다. 영화 채널 하나에서 작년에 개봉한 좀비 영화를 하길래 같이 보는 참이었다. 웃기거나 슬픈 장면이 나와도 감정의 동요가 없던 장희태는 아니나 다를까 이내 딴짓을 했다.
가지고 온 책을 얌전히 보는 장희태 때문에 볼륨을 줄였다. 한창 슬픈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도 책만 보는 그가 신기해서 그랬다.
“야아. 나 슬프다고.”
장희태는 화면을 잠깐 들르듯이 보고 책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있는 일도 아니잖아.”
“아니, 그냥 저 장면이 슬플 수도 있지 않나.”
“나보고 대신 울어라도 달라는 거야?”
같은 말이 반복되자 장희태의 얼굴에는 짜증만 늘었다. 큰 소리는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 다른 포인트로 기분은 잡치고 난 후였다. 장희태와 닿은 팔을 치우고 일어설 준비를 하는 때였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오는 종선이와 눈이 마주쳤다.
비밀을 들킨 기분이 든 나는 당황하여 소파에 주저앉았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 책을 읽던 장희태는 종선이를 보자마자 기행을 벌였다. 몸을 반대로 틀어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그의 뺨에 허벅지 살이 꾸욱 눌렸다. 장희태는 부엌으로 도망가는 종선이를 보고도 계속 책을 읽어나갔다.
“우림아. 시험 잘 봤어?”
하얀 접시를 부엌에서 가지고 나온 종선이가 그냥 가기엔 멋쩍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아예 티비를 꺼버린 나는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아, 2등 했구나.”
“응.”
“나 여기 사는 거, 이미 희태한테 들었지?”
“아, 응.”
이번엔 배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장희태가 책을 거실 테이블에 던져버렸다. 평소보다 심술이 대단한 장희태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그러자 앙심 품은 것처럼 나의 허리를 안는다. 장희태는 내 배에 입술을 누른 채로 종선이에게 웅얼웅얼 물었다.
“접시 가져가?”
“아, 어. 장 여사님이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바쁘겠네.”
“응, 난 가 볼게.”
종선이가 접시를 들고 신발장으로 내려가자마자 장희태는 포옹을 풀었다. 거실 창으로 접시를 들고 달려가는 종선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장희태는 제가 버린 책을 집어 들다 말고 커튼을 쳤다. 제 키보다 높은 커튼을 단단히 둘러 거실 창을 막아 버렸다.
“왜 커튼을 치는데? 날도 좋구먼.”
날이 좋다는 말에 장희태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나운 말씨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볕이 강해서 눈 아파. 안 그래?”
“그른가?”
난 잘 모르겠다. 장희태는 돌아와 아까처럼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얘는 이렇게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을 받을 때마다 나는 거기에 나만의 해석을 덧붙인다. 곤란할 정도로 나에게 입술과 포옹을 요구하는 그와 공감 능력이 없다시피 한 장희태는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가 모두 더해진 장희태를 알고 싶었다.
“너희 부모님은 너 1등 했는데 뭐 외식 같은 거 안 하시나.”
그간 장희태가 부모님은 없는 사람 취급을 한 데다가 집에서조차 부모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사진이라든가 부모님의 드레스룸이나 안방 같은 것 말이다. 뵌 것은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장희태는 스르르 뜬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어제 밥을 먹었어, 책을 샀어, 같이 일정한 톤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그에게서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보였다. 나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간 그는 내 손바닥에 숨을 묻었다.
“혼자가 편하니까.”
파양 당하고 보육원에 돌아왔을 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입양 같은 건 안 가고 싶다고, 나는 혼자서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이 골칫거리를 어떻게 치울지 난감해하던 원장님의 얼굴도 잊히지 않았다.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법은, 인연을 곁에 두지 않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우애든, 인연을 꺼린다는 건 불행이었다. 이 세상에서 혼자가 괜찮은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혼자여야 괜찮은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장희태와 눈빛이 섞이자마자 서로의 입술을 찾는 게 당연해졌다. 악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연이었다. 그의 숨을 받아먹은 가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장희태의 손이 나의 허리를 넘어서 위로 올라올 때 눈이 뜨였다. 얌전히 입술을 내주고 있던 그가 눈으로 웃는 것이 보였다. 어쩌겠나. 나는 내 마음에 봄이 찾아온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마음에도, 눈에도, 입술에도 봄이 왔다. 나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로운 꽃이 수시로 내 입술을 요구했다. 마음은 자연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잉, 문자 울리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엄마 진통 시작했다.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 ]마음은 봄이지만 내게 닥쳐온 계절은 겨울이었다. 빌린 행복을 돌려줘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날 꿀떡이가 태어났다. 배우영이라는 이름을 받은 내 동생은 손가락 다섯 개, 발가락 다섯 개, 뽀얀 피부에 어디 하나 모자란 것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던 부모님도 달라지고 있었다. 일일이 나열해놓으면 사소한 것들, 대단치 않은 것들, 그런 것들이 나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성적이 하락하는 걸 더운 날씨 탓을 했다. 목표하는 S대 국어교육학과에 가려면 열심히만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느꼈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대답은 없었다. 육아에 지쳐 잠이 든 부모님의 목소리 대신 우영이의 울음소리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내가 있을 곳이 마음 편히 눕기엔 좁아졌다. 이렇게 좁아지고 좁아져서 언젠가는 한 평도 남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저께는 엄마와 말을 하는데 서먹서먹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쓰라리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마음이 하루하루 무너지고 있었다.
요즘 내가 두 다리를 죽 벋을 수 있는 세상은 학교에 있었다. 새벽녘 학교는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시원했다. 더위를 먹기 전에 일찍 등교한 나는 우연찮게 복도를 거니는 종선이와 맞닥뜨렸다.
“안녕.”
“아, 안녕.”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종선이는 보온병을 들고 정수기 쪽으로 걸어가다가 되돌아왔다. 나는 갑자기 돌아온 종선이가 건넨 보온병을 떨떠름한 상태로 받아들었다.
“그거 먹어.”
“이거 왜?”
“그냥. 뇌물.”
보온병 뚜껑을 열어 보니 따뜻한 보이차가 들어 있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것인지 목이 칼칼한 차였다. 장희태와도 아침 자습 전에 보이차 한 잔을 나누어 먹으면 좋을 터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장희태가 독서실로 가기 위해서 책을 들고나오는 게 보였다.
“장희태! 일찍 왔네.”
저도 반가운지 밝은 얼굴로 걸어왔다. 장희태는 만나자마자 복도에서 앙큼하게 입을 맞추었다. 뺨에 입술을 부비부비 비비는 미국식 인사란다. 저쪽 나라에서 인사를 겸하는 입맞춤인가 보다.
“나도 같이 올라가자. 여기서 쪼매만 기다려.”
“…….”
“왜.”
내 손에 들린 보온병이 원흉이었다. 남남처럼 입술을 뗀 장희태는 검지로 보온병을 가리키며 훑었다.
“이거 김종선 거지.”
“아, 요 앞에서 만났는데 보이차거든? 이거…….”
갑자기 보온병을 홱 뺏어 든 그가 복도 창문 가로 걸어갔다. 설마설마 싶었던 그는 창문 밖으로 보온병을 야구공 던지듯 던져버렸다. 돌아온 그는 저가 피해 입은 양 욱한 얼굴로 책을 챙겨 들어 떠나갔다.
보이차를 나누어 먹으려던 계획은 시도도 전에 물거품이 됐다. 마음이 꽁해져 독서실이 아닌 교실 책상에 앉아 아침 자습을 시작했다. 보이차가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제 여자친구 물건을 함부로 날리는 놈은 장희태 하나일 것이다.
쓰린 빈속을 손으로 달래며 연필을 꺼냈다. 오늘따라 일찍 등교한 여학생 둘이 앉아서 수다 떠는 게 은근히 거슬렸다. 이어폰을 꺼내려고 하는데 익숙한 이름이 귀에 들렸다.
“장희태. 그럼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야?”
“아쉽다. 유일한 낙이었는데.”
“낙이긴. 걔 없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지, 뭐.”
나는 이어폰을 내려놓고 뒤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신이 나서 얘기하고 있던 두 사람이 내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저기.”
“우리?”
“어.”
“왜?”
“장희태가 어데로 가는데.”
아니겠지. 나한테 한 마디 언질도 없이, 이렇게. 그러나 두 사람은 가뿐한 얼굴로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걔 이번 학기만 하고 미국으로 간대.”
“이거 작년부터 돌던 얘기였는데. 우림이는 전학 와서 몰랐나?”
별반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이 깔깔 웃었다. 독서실에서 아침 자습을 끝낸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장희태도 있었다. 배신당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마음이 미리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픈 장면이 나와도 실제가 아닌데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와의 일도 그 정도 감상일 수 있었다. 굳이 입 아프게 이별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말이다. 봄은 끝났고, 여름 방학은 다가오고, 나의 세상은 한 평씩 좁아지고 있는데 장희태마저도 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혼자가 편해.
그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책을 안고서 자리로 돌아온 장희태는 화해의 표시인 양 딸기 우유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에게로 시선이 돌아오지 않자 나의 뺨을 손톱으로 툭 쳐보기까지 한다.
수업이 시작됨에 따라 장희태의 관심도 내게서 수업으로 옮겨갔다.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시험도 끝났겠다, 방학도 다가왔겠다, 선생님도 진이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교과서 끄트머리에 낙서하며 딴 곳으로 신경을 돌리려고 했다.
지겨운 1교시 수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손등에 포개진 손이 있었다. 장희태의 힘 있는 손이 나의 손을 책상 아래로 끌고 갔다. 마음을 한 번 가져간 사람이 두 번 가져가는 건 단물 빠진 껌을 씹는 일보다 쉬웠다. 모범생인 척 한 손으로 칠판에 적힌 글씨를 받아 적은 그가 내 손바닥에 메시지를 남겼다. 더, 맛, 있, 는, 거, 사, 줄, 게. 저도 보이차 사건이 미안하긴 한가 보다. 약아빠진 장희태는 일부러 내 지우개 하나를 땅에 떨어트렸다. 줍는 척하면서 허리를 숙인 그가 내 손목에 스치듯 입술을 가져다 댔다.
우리는 손 하나를 숨기고 수업을 들었다. 뒷자리에서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없었다. 흔들 다리에 올라선 마음이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는 양 윽박질렀다. 배신에, 불신에, 그런 마음으로 흔들리는 다리에 올라서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다리에서 내려와 땅을 걷고픈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유학 얘기를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입으로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장희태의 마음을 추리하고, 자로 몇 cm짜리 진심인지 재 보는 일은 지쳤다.
공교롭게도 장희태는 담임 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내려갔다. 그사이에 책을 정리한 나는 며칠 있으면 시작될 방학을 대비해서 몇 개는 쓰레기장에, 몇 개는 독서실에 두고 올 생각이었다. 독서실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와 3학년 복도로 내려왔을 차였다. 방학 단축 수업이어서 반마다 많이 남아 봐야 서너 명이었다. 1반은 장미반 보충 수업을 듣거나 학원으로 빠지는 인원이 많아 종례가 끝나면 얼굴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쓰레기장까지 가져가기엔 책의 무게가 상당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내일 이동식 장바구니를 끌고 와 나머지 책을 처리하는 게 현명할 듯싶었다. 1반 앞에 책을 쌓아두고 쉬는 차였다. 복도로 난 창가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정말?”
“목소리 크고, 멍청하게 웃기만 하는데. 공부 잘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음……. 난 네가 또 배우림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지.”
흔들흔들, 바람 따라 마음 따라 흔들리는 다리에서 내려와 땅에 정착하고 싶었다. 멍청하다는 말에, 그나마 공부 잘하는 게 다행이란 말에 속으로 뜨끔하였다. 종선이 목소리, 그리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장희태의 목소리는 나를 복도에 알몸으로 세워두었다.
내 이름까지 거론된 이상 끝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헛꿈을 꾼 게다. 장희태는 성적을 떨어트리기 위해서든,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기 위해서든, 공부만 하기엔 심심해서든, 사귄 게 아니라 가지고 논 거였다.
책 몇 권을 가방에 담고 쓰레기장까지 달려가 책가방째로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목이 메어 교복 넥타이를 푸를 때 글썽 고인 눈물까지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갔다. 주저앉아 우는 주인을 따라 하듯 핸드폰이 울었다.
– 장희태
배신당하는 건, 마음을 줬다는 건, 나를 나로서 있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일부를 믿고 맡긴 타인이 도망가 버려 몸에 숭숭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 구멍을 메우는 건 나만이 할 수 있었다. 몇 년이 걸릴지,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를 세월 동안 구멍은 텅 비어서 봄바람이 지나가도 담지 못하고 보낼 뿐이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가 떠나든 말든 나와는 더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
여름 방학 보충 수업에 불참 신청서를 냈다. 엄마에게 이번 방학은 자습하고 싶으니 담당 선생님께 동의를 받아달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아쉬운 투로 내게 말했다.
“너 성적 떨어진다고 난리부스르다.”
“네.”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엄마. 우영이 울어요.”
“여보!”
공부는 손에 놓았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전화가 오면 방으로 토토토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장희태에게 걸려 오는 모든 전화, 문자를 거절하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학식 때도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담임은 집에서 요양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지만 장희태의 촉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저녁 시간만 되면 두 번씩 전화를 걸었다. 그 외에는 전화하지 않는다. 방학 초엔 전화를 받으라고 문자도 넣더니만 이제는 그것도 귀찮은지 전화 두 통으로 떼우고 있었다.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느새 잠이 든 우영이를 안고 있는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림아.”
“네?”
“잠깐 얘기 좀 할까.”
가장 중요한 일을 빼먹었다. 장희태에게 정신이 팔려 부모님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불량아처럼 학교를 빼먹는 모습이 실망스러우셨을 거다. 아빠를 따라 나가자 표정이 굳은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근래 들어 표정이 좋지 않은 엄마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우림아. 우리 파양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내 손으로 가슴에 소금을 뿌렸다. 더 따끔하고 매운 것이 오더라도 놀라지 않게 말이다.
너는 이제 몇 달 안 있으면 성인이잖니. 우영이 하나 키우는 것도 벅찬데.
엄마의 미안해하는 목소리에 장희태의 목소리가 곱해졌다.
“목소리 크고, 멍청하게 웃기만 하는데. 공부 잘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리 소금을 뿌려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크기라는 게 있는 거다. 그럼에도 볼썽사납게 울고 매달리진 않겠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엄마의 앞에 앉았다. 잠든 우영이를 안은 아빠는 엄마의 눈치를 봤다.
“여보.”
우영이를 낳고 뼈마디가 쑤신다던 엄마는 휴직계를 내고 쉬시는 중이었다. 복직해도 예전 월급은 어려울 거란 말에 퇴직을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다. 아빠와 음식점을 차려 운영하실 생각인 것 같은데 엄마가 워낙 비실거리는지라 두 분 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엄마는 건강을 해할 만큼, 과장이란 직함을 잃어도 상관없을 만큼 우영이를 낳고 싶어 했다. 나와는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나를 들이지 않았으면 여유롭고 풍족하게 살았을 터다. 상황이 힘들어지니 가장 가치 없는 것부터 버리는 건 당연했다.
“너 요즘 학교도 안 가고 그러는 거. 혹시…….”
엄마는 말을 하다가 말고 우영이를 바라봤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파르르 떨었다.
“너희 친엄마가 연락했니?”
“네?”
처음 듣는 소리에 놀라 엄마를 바라봤다. 친엄마. 친엄마라니. 엄마는 내 반응에 더 아연실색하여 말했다.
“그럼 왜 요즘 넋이 나가 있었나? 어?”
“그건, 그냥 친구랑 다퉈가…….”
“됐다. 그럼.”
하지만 한 번 꺼낸 이상 흐리터분하게 끝낼 수 없다는 걸 아는 아빠가 핵심을 전했다.
“너희 엄마가 며칠 전 연락 와서. 너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냐고 그러더라.”
엄마가 나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게 이해가 갔다. 친엄마라는 말에 궁금증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서요?”
“자기가 뭐 미국 사는데. 부모 반대가 심해가지고 애를 보육원에 맡겼다고 카는데. 지금 뭐 미국에서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다네. 염치없지만 너 만나서…….”
“그거 말고 다른 소리는 없답니까.”
나를 키울 수 없는 사정이 무언지에 대해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칭얼거리는 우영이의 등을 쓸어 주며 역정 냈다.
“우리한테 뭐 돈을 준다카대. 아이고, 마. 누군 돈 없어서 굶어 죽은 귀신 붙었나.”
“그런 얘기를 뭐하러.”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영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궁할 땐 버렸다가 사정이 피면 찾아와 무작정 데려가겠다고 난동 피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친엄마가 어떤 사람일지, 어떤 생김새일지 궁금했다. 돈도 준다고 하니까 엄마와 아빠에게도 도움이 될 듯싶었다.
“만나 볼래?”
엄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모님과 우영이. 완벽한 그림 같은 가족이었다. 부모님도 내심 나와 친엄마가 만나 보상을 받고, 그 돈으로 우영이를 편하게 키우고 싶을지도 모른다. 설령 데려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계 살림에 도움이 되고 말이다.
“예. 만나 볼게요.”
“그래?”
“예.”
“그래. 잘됐네. 내가, 연락해둘게.”
엄마는 좋아하던 연속극을 보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뻐꾸기 같은 건 당신의 둥지에서 쫓아 보내버리고 싶으려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일어나 우영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중 가면 우영이를 다시 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공주.”
대쪽 같던 아빠가 우영이 안은 팔을 떨었다.
“예?”
“너 진짜 네 엄마 만날끼가.”
“돈도 준다카는데. 만나서 돈도 얻구 맛난 것도 얻어 먹구.”
“그, 그르치.”
아빠는 좋아하는 것보다 실망하는 기색이 컸다. 아빠도 무언가에게 쫓기듯 우영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서 떠들고 있는 티비만이 거실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티비를 끄고 베란다로 나가 모기약을 찾았다. 삼십 분의 사투 끝에 찾긴 찾았으나 작년에 사 두고 남은 것이 딱 하나뿐이었다. 급한 대로 거실에 모기약을 피운 나는 안방 문을 두드렸다.
“엄마. 모기약이 다 떨어졌는데. 나가서 사 와요?”
어, 그래라. 엄마의 명이 떨어지자 지갑을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나간 김에 모기약, 오렌지 주스, 분유까지 사고 아파트 주위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지만 로비 밖으로 나오자마자 억센 팔에 끌려갔다.
치한인가 싶었지만 잡아서 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나는 단지 내 놀이터가 보일 즈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볼 일 있는 사람이 오라는 양 시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놀이터의 흙모래를 밟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꽤 오래 기다린 듯 안색이 창백한 장희태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집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동수는 모르니 무작정 이 근방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보충 수업을 빼먹긴 했지만 저 자존심 높은 장희태가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릴 줄은 몰랐었다.
나는 시소에 지친 몸을 기대어 앉았다. 삐걱, 소리를 내며 내려앉은 시소처럼 내 마음도 내려앉았다. 찾아와 기다린 시간에 비해 그의 입은 무거웠다. 더욱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는 진절머리나 못 봐 주겠다.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건 끔찍하지만, 애정을 가진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두 배로 더 끔찍했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의 배신을 오롯이 받고 말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아픈 일이었다.
“왜 왔는데.”
수많은 비난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끝난 관계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었다.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는 기대나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전화 고장 났어?”
내가 자의로 제 전화를 피했을 리 없다는 확신이 서린 물음이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그에게 멀쩡히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대가 파사삭 깨진 장희태의 얼굴이 볼 만 했다. 제 전화를 고의로 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과감하게 적의를 드러냈다.
“이유가 뭐야.”
“이유? 사람 싫어지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싫어졌다고?”
“그래. 너 처음 볼 때부터 재수 없었는데. 방학, 학교 내내 붙어 있으려니 진이 다 빠져서 그런다.”
“하.”
싸늘하게 웃은 장희태의 눈이 바쁘게 놀이터를 휘젓고 다녔다. 오늘따라 산책 나오는 사람도 없는 휑한 놀이터에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장희태가 이대로 가 버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무언가를 눌러 참듯이 이를 악물었다.
“김종선이 준 보온병 버려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상상도 못 한 이유였지만 그것도 없지 않았다. 나는 시소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안 하면 주먹이 날아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겨우 잠재운 분노가 다시 살아나 이가 갈리게 만들었다. 장희태의 눈은 고요한 분노에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만 평온한 장희태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너 어차피 외국 간다매?”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들었냐고 하지 않는다. 장희태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이란 소리였다. 하기야. 잠깐 한국에서 가지고 놀 상대가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내가 왜 이 꽃다운 청춘에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첫인상에 느낀 그 불편한 느낌을 쭉 가지고 가야 했었는데. 어쩌자고 한철 아름답고 말 꽃에게 나의 일부를 내주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소에서 일어났다. 끼익,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시소가 기울자마자 나는 그에게 달려들 듯이 말했다.
“잘 가라. 그리고 내가 이건 그간의 정을 봐서 해 주는 말인데. 어디 가서 그따구로 살면 뒤통수 깨진다. 웬만큼 싸가지가 없어야지. 밖에서 뭐 더럽다고 사 먹지도 못하고 뭐 만지면 손수건 꺼내서 박박 닦고. 어? 급식은 어떻게 먹는지 궁금하더라니까. 아, 한 가지만 더. 나도 스, 트, 레, 스 풀려고 너하고 키스한 거지 딴맘은 요만큼도 없었거든? 너 가고 나면 내가 쭉 1등만 할 거고.”
마구 쏟아내고 나니까 머리에 열이 내렸다. 그의 어깨를 밀치고 놀이터를 빠져나가다가, 키스를 할 때의 내 표정이 얼마나 멍청했을까 싶어서 다시 돌아왔다. 놀이터 미끄럼틀에 앉은 그에게 전갈 꼬리처럼 쏘아붙였다.
“그리고 너 키스 진짜 못한다.”
“배우림.”
“조심히 가라. 여기 또 오면 욕밖에 못 들으니까…….”
“다신 안 와.”
일어서서 등을 돌린 그가 고개만 뒤로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굳은 결의가 그의 눈에 드리웠다. 그러든 말든 나는 내 감정, 내 상처가 더 중요했다. 협박하는 뉘앙스는 삐뚠 내 마음을 더 삐뚠 곳으로 쏘아주었다. 지가 뭔데 나한테.
“다신 안 온다고.”
“오지 마!”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묻고 더는 안 물어.”
장희태의 눈빛에 정신이 돌았다. 마음이 무참히 썰리면서도 나는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코웃음 치며 삐딱하게 받아들이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했다.
“내 전화. 계속 피할 생각이야?”
“그래.”
“좋아.”
장희태는 미끄럼틀을 발로 찬 뒤 빠르게 걸어갔다. 그가 주머니에서 희끄무레한 것을 꺼내 던지는 게 보였다. 놀이터 중앙에 있는 그네에 맞고 와자작 깨지는 소리가 났다.
먼발치서 나무 사이로 작아지는 장희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시큰시큰 아려오는 코를 엄지로 눌렀다. 저런 애 때문에 울고 싶지 않았다.
그가 버리고 간 쓰레기 같은 것에 자꾸 마음이 갔다. 저것만 확인하고 떠나자 싶어서 아주 무거운 발을 떼었다. 큰 소리가 나서 핸드폰이려니 싶었는데 의외로 작은 봉투였다. 십자가 문양, 하얀 봉투 안을 확인한 나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구질구질한 눈물이 하얀 봉투를 흥건히 적셨다. 배탈약, 소화약, 감기약, 구급상자로 써도 손색없는 약 봉투였다. 말과 행동이 이중인격인 양 딴판이었다.
“잘한 거다. 잘했어.”
약 봉투를 버리지 못한 채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약 봉투 안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다정한 쪽지 한 장 없는 약 봉투였지만, 주는 사람이 장희태니까 의미가 각별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묻고 더는 안 물어.”
저만 자존심이 있나. 나도 이젠 너 별로였다. 그럼에도 약 봉투는 죄가 없어서 집까지 꾸역꾸역 데리고 들어왔다. 아픈 데가 없음에도 이 약 봉투를 보니 진짜로 아파질 기세였다. 혹시라도 우영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밤 11시가 다 돼가는 시간을 보고 마음을 졸였는데 안방이 조용했다. 약봉지를 침대 밑에 넣어놓으려고 하는 차였다. 안방에서 훌쩍훌쩍 새나가지 않게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심장을 강타했다. 집에 일이 생겼나 싶어서 서둘러 안방으로 가 노크하려던 순간이었다.
“울지 말고.”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나도 모르게 우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아니면 돈이 많이 들어갈 데가 생겼나. 수심에 잠긴 목소리가 거실로 넘어왔다.
“우리 우림이 완전히 데려가 버리면 나 못 산다.”
“그럴 리 있나. 우리 공주도 쟈 낳아준 엄마 궁금하니까 만나볼라카는 거지.”
“미국 데려간다고 하고 우리 딸 데려갈라고 하는 거라고. 이 양반아.”
애간장 타는 엄마의 목소리가 날아와 나의 가슴에 배지처럼 달렸다. 손에 쥔 약봉지를 힘없이 바라본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조용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몸을 새우처럼 동그랗게 말았다. 나는 지금껏 엄마와 아빠에게 어리광 부리고 있던 것이었다. 오래전에 부모가 됐는데 꼭 우영이를 가져야겠냐고, 역시 친딸이 가짜보단 좋은 거 아니냐고, 어디 나 없이 살아 보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우영이가 부러웠다. 할 수 있다면, 다음 생이 있다면 우영이로 태어나고팠다. 나를 거두어 딸로 길러 준 엄마와 아빠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매사에 공과 사가 분명하던 엄마.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말하던 엄마가 딸을 뺏길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못났다.”
그 안절부절못한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나를 받아 준 순간부터 엄마와 아빠는 죽는 날까지 내 부모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켜준다던 분들이 내가 친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배신당할 것만 생각했지 내가 남을 배신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의 굳은 얼굴은 나의 배신 때문이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다. 진짜로 키워준 공을 모르는 뻐꾸기가 될 뻔했다. 자기가 사람 보는 눈 좋다던 할머니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바깥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책상 서랍에 약봉지를 넣어두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서 어제 못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의 등이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나는 다가가 푸근한 엄마의 등을 끌어안았다. 울다 잠든 티가 팍팍 나는 엄마는 물을 잠그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림이?”
“네.”
“일찍 일어났네.”
마음 편히 울지도 못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언제 맡아도 좋은 엄마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두 분은 예전에도, 지금도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엄마.”
“응.”
“나 그 아주머니 안 만날래요.”
나를 두 번이나 좌절하게 만든, 그 파양의 감정을 엄마와 아빠에게도 느끼게 할 순 없었다. 세상에서 내 편 하나 없는 그 끔찍한 기분을 엄마와 아빠가 느껴선 안 된다. 아예 고무장갑을 벗은 엄마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진짜?”
“네. 필요 없어요.”
왜 나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나의 엄마가 아니었다. 내 엄마는 이분이었다. 장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은 엄마는 말이 빨라졌다.
“그럼, 엄마가 잘 말할게.”
“응.”
“저기, 잠시만.”
엄마는 아빠에게 달려가듯이 안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우영이에게 최선을 다해, 아니 내 삶을 전부 써서라도 잘해 줄 것이었다. 그게 엄마와 아빠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었다. 이번 생은 저분들 딸로, 우영이의 언니로 살다가 가련다. 그리고 내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특히 장희태 같은 사람들을 조심해야 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영이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가족이었다. 기껏 약 봉투 같은 걸로 마음을 퉁치려는 놈은 만나선 안 된다.
거실에 볕이 잘 들어오게 커튼을 쳤다. 쨍쨍한 볕이 내 마음에도 비추는 기분이었다. 오늘부로 동굴에서 웅크리는 짓은 끝이었다. 이제는 동굴에서 빠져나와 비상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