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ckoo living in early spring RAW novel - Chapter 5
05. 봄이 싫어진 이유
“언니. 얼굴이 왜 그래?”
“라면 먹고 잤더니 이래 됐다.”
“언니. 나 돈가스 사줘.”
“돈가스?”
일주일 뒤가 개업 날짜라서 주말임에도 윤정이와 시간을 맞추어 학원으로 나왔다. 사 둔 문제집을 책꽂이에 넣는 작업을 하는데 혼자 있을 우영이가 걱정돼서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명윤이도 와서 도와준다고 하니 한결 부담이 덜했지만 이제 실제로 아이들을 받고 등록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림아. 이거 좀 아래로 옮겨야겠는데?”
“아, 그래. 내가 할게.”
책 포장지나 박스 같은 재활용 쓰레기를 끙끙거리며 안고 온 윤졍이와 나누어서 들었다. 책장 옆을 지나가는데 팔뚝 쪽이 베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
“어, 뭐야. 저거 못인가?”
하필 작업한다고 편하게 소매를 접어 올려서 입고 있었다. 못질이 잘못된 못 하나가 팔뚝을 쓱 긁고 갔다.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음에도 부실 공사를 얻은 셈이니 짜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 진짜.”
“그 새끼 아직도 연락 안 받지?”
“말도 마라. 번호도 바꿨다.”
고소니 뭐니 해도 시간과 돈이 드는 것에 비해 결말은 시원치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테리어 사기가 워낙 많아서인지 변호사도 시큰둥한 눈치였기에 안 그래도 돈 없는 나나 윤정이나 그냥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게 빠르겠다고 판단을 내렸었다.
“하여간 악질이다.”
“누굴 원망하겠어. 지인 소개면 잘할 줄 알았더니.”
며칠 동안 모은 재활용 쓰레기의 무게가 상당해서 잠시 책상에 올려둔 차였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명윤이의 손에 떡볶이 냄새 나는 봉지가 들려 있었다.
“먹고 하자!”
“아, 네가 구원자다. 우리 명윤이.”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긴 했다. 아까 우영이에겐 간단히 간식을 먹였지만 나나 윤정이나 배송 온 소품을 정리하느라 산 입에 거미줄만 치고 있었다. 윤정이가 괜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떡볶이를 반기는 게 아니었다. 나도 매콤한 떡볶이 냄새에 이끌려 재활용은 내팽개치고 주저앉았다.
“우영이도 먹어.”
“네에.”
떡볶이를 호호 불어먹는 우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락 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장희태의 집을 나오고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다. 혹시 엄마나 아빠나 새로 바뀐 건물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나나 갈비집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역시 심심풀이였구나 싶다.
“저기, 우림아.”
떡볶이를 사 온 장본인임에도 잘 먹지 않던 명윤이가 운을 뗐다. 모두 떡볶이를 먹다가 말고 그늘진 안색의 명윤이에게 집중했다.
“어.”
“너 소개 안 받을래?”
“야아, 나는.”
요즘 남자가 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던 윤정이가 섭섭한 티를 내자 명윤이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아니, 우리 학교 이사장 아는 사람이 어쩌다가 너를 봤나 봐. 우림이를 콕 집어서 소개해달라고…….”
“나를?”
명윤이가 기간제 교사를 하는 학교 이사장의 아는 사람이라. 전혀 접점이 없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같은 학교 다녔나.”
“아, 어, 오다가다가 봤나 봐.”
유난히 부자연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명윤이가 나를 속여서 이득 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소개받는다는 말에 장희태의 얼굴이 떠오를 건 뭐람. 톡 쏘는 콜라로 입 안을 헹구고 일회용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걔가 대체 뭔데. 걔는 나한테 간장 종지보다 못했다.
“아, 우림아. 너 소개 같은 거 안 받는 거 아는데. 이건 진짜 일이 좀 심각하거든? 기간제인 내 입장에선 교장도 아니고 이사장이…….”
“뭐 하는 사람인데.”
“들어보니까. 화연건설 다닌대.”
직장도 좋고. 어쩌다 나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나쁠 건 없었다.
“할게.”
“뭐?”
“진짜?”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태연한 건 떡볶이에 빠진 우영이뿐이었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게 귀여워 오물오물 먹는 우영이의 뺨을 꼬집어 늘렸다.
“우림아. 너 근데 소개받는 거 싫어하잖아.”
대학 동기인 윤정이나 명윤이는 인위적인 만남이 싫다는 나의 철학을 알고 있었다.
“연애 한 번 제대로 안 해봐서 날파리가 꼬이나 싶드라.”
상대가 의미 없이 보내는 실바람에도 우왕좌왕하며 날아다니니 말이다. 결국 한바탕 소란을 겪고 마음을 추스르는 일은 내 몫이었다. 부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라도 벽을 세워야겠다. 남자친구라는 단단한 벽을 말이다.
“나, 나 그럼 연락한다? 너 번호 준다?”
“그래라.”
“웬일이야. 진짜 고마워요, 우림 씨이.”
장난스레 뽀뽀하는 시늉하는 명윤이를 보니 잘한 일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윤정이는 국자로 어묵 국물을 컵에 따라주면서 참견했다.
“그런데 우리 다음 주부터 더 바쁜데. 이제 진짜 애들 받을 날 얼마 안 남아서.”
“그러긴 그러네.”
생각을 해 보니 지금 내가 연애 같은 걸 할 여유가 있나 싶었다.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거절할 낌새를 보이자 명윤이가 나서서 엎드렸다.
“어우, 야. 초 치지 마.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게 뭐 어렵다고. 어? 당장 오늘이라도 만나면 되지.”
“김명윤. 너 살아남겠다고 우림이를 싸서 바쳐라 아주.”
“한 번 만나서 거절만 그럼 제대로 해 주라. 내가 오죽하면 이렇겠냐, 오죽하면.”
기간제 교사로서 아무 힘도 없는 명윤이가 시달렸다고 하니 도대체 학교 다닐 때 나를 얼마나 좋게 봤으면 저럴까 싶었다.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콕 찍은 차에 핸드폰이 울렸다.
“왔네.”
떡볶이 세 개를 한입에 욱여넣은 명윤이가 턱짓으로 내 핸드폰이 든 주머니를 가리켰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핸드폰을 꺼내어 열었다.
– 안녕하세요.
말씨가 단정하니 괜찮았다. 여자의 감이긴 하지만 이상한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번호를 저장하고 톡으로 들어가 프로필 사진을 보는데 아무 사진도 올려놓지 않은 게 보였다. 얼굴을 밝히는 건 아니다만 제 사진을 안 올려놓는 건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명윤이는 긴장한 얼굴로 답장하라며 재촉했다.
“알았다, 알았다.”
나는 고민 끝에 똑같이 안녕하세요, 라고 보내보았다. 답장은 30초도 안 돼서 도착했다.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를 물을 줄 알았더니 상대방은 꽤나 급한 것처럼 물어왔다.
– 오늘 만날래요?
“이 사람 오늘 만나자는데?”
“워, 벌써?”
“진짜 네가 좋은갑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일부터는 평일이라서 얼마 안 가 연락도 귀찮아질 거다. 차라리 주말에 마음 편히 보고 계속 만날지 만나지 않을지 결정을 내리는 게 나을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장을 쳤다.
– 만나요.
남자는 미리 정해 둔 것처럼 장소와 시간을 보냈다. 일이 술술 잘 풀려도 걱정이 되는 법이었다. 잘 되면 술을 사라고 하는 명윤이의 말에 웃을 뿐이었다. 나도 봄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 남들처럼 봄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대신 뒷정리를 해 주겠다는 명윤이에게 일을 맡긴 뒤 우영이는 퇴근 시간이 임박한 엄마 가게로 데려다주었다. 저녁에는 아르바이트생을 쓰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의 삶에 그나마 숨구멍이 트였다.
소개 자리에 무엇을 입어야 좋을지 몰라 깔끔한 셔츠에 치마를 입고 나왔다. 명윤이가 직장인 차림 같다고 놀렸으나 이 밤에 옷을 사서 입고 가기도 조금 그런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진지하게 만나다가 보면 내가 패션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될 터였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물만 홀짝였다.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라 이 남자가 왜 이리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치 있는 서울 야경이 나를 낚기 위한 미끼처럼 보였다. 이 남자 설마 나이가 사십 줄인 건 아니겠지. 명윤이네 학교 이사장이 적극 밀었다는 얘기도 그렇고, 중매를 맡은 명윤이도 어쩐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봄날은커녕 시궁창에 빠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다이닝룸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앉아서 맞이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엉거주춤 일어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숙이느라 상대의 실루엣만 봤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스타일이었다. 아무래도 작은 것보단 낫지 싶었다. 까만 슬랙스에 하얀 셔츠가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나이도 많아야 서른 줄이었다.
“이 방입니다.”
그런데 남자의 손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내가 저 은색 시계를 어디서 봤더라.
“어.”
눈에 마가 꼈나. 소개받은 남자 얼굴이 장희태로 보였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사람이 둘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장희태 특유의 재수 옴 붙는 표정까지 똑같이 재현해낼 사람은 없었다. 머리 벗겨진 사십 줄의 남자가 나오는 게 덜 놀랍겠다. 옷걸이에 재킷을 걸고 온 장희태는 앉자마자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마셨다.
“너, 뭐야?”
“장희태.”
“내가 니 이름을 몰라서 묻는 줄 아나.”
다 비운 물잔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이 입꼬리를 올린 그가 들어오는 서버에게 주문을 했다. 코스 이름이 어려워 재료가 무언지 감도 안 왔다. 간신히 이리 굴을 빠져나와 호랑이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민 꼴이었다. 장희태는 초침이 짤깍거리는 시계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미리 시켰어도 됐는데. 배 안 고팠어?”
“배가 고파? 지금 이 와중에 내 배를 걱정해?”
“차가 막혀서.”
“네가 늦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소개받았잖아. 기억 안 나?”
“미친 새끼.”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려는 순간 장희태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을 뿌리치려는 타이밍에 룸의 문이 열렸다. 자그마한 애피타이저용 접시를 들고 들어오던 서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저 애피타이저입니다.”
“두고 가요.”
“네.”
접시를 놓은 서버가 룸을 나가자마자 장희태가 내 몸을 반대로 돌렸다. 거절의 뜻을 보였음에도 장희태는 꼴같잖게 웃었다.
“왜 웃는데.”
“귀여워서.”
“진짜 돌았나.”
“앉아. 먹고 얘기하게.”
“싫어. 안 먹는다. 너나 많이 처먹어라.”
힘은 장사여서 내 어깨를 잡아 의자에 앉혔다. 빠져나가려고 하자 장희태가 고개를 숙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음번엔 누구를 통해서 소개받을까.”
“뭐?”
“이렇게 가면 네 친구가 곤란할 것 같은데.”
“야비한 새끼.”
“저녁 한 끼야. 일부러 맛있는 데로 데려왔는데 맛도 안 보고 가면 아깝잖아.”
저녁 한 끼. 말은 잘 한다. 나는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치우고 포크를 쥐었다. 접시에 올려진 작은 빵 같은 것은 한입에 끝이 났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그제야 장희태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 대단한 입에 곱창은 안 맞았을 텐데. 미안하게 됐네.”
괜한 마음에 툴툴거리는데 내 빈 잔에 와인을 따라 준 장희태가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던데.”
“뻥치지 마라.”
따라 준 와인을 마셨는데 맛이 쿰쿰하고 별로였다. 소주에 포도 주스를 섞은 맛이 났다. 이럴 거면 깔끔한 소주가 나았다. 내가 몇 모금 마시지 않고 버려두자 유심히 지켜보던 장희태가 와인을 한쪽으로 치웠다.
“다른 데 갈래?”
“아니. 필요 없다.”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지?”
때마침 서버가 생선튀김이 올라간 조금 더 넓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여전히 냉랭한 우리의 분위기를 보고 어물거리며 생선의 이름을 말했다. 손깍지 낀 장희태는 애피타이저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서버가 룸을 나가자마자 재촉하는 양 눈썹을 찡긋거렸다.
“말하기 싫다.”
“김종선이 준 보온병을 내가 버려서?”
나는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까 싶어 포크 든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나 그때는 종선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보온병 버린 건 그래, 네가 조금 성격이 원래도 이상하다 싶었으니 놀라긴 했지만 그런 걸로 너한테 정나미 떨어질 거였으면 옛날에 떨어졌지.”
“그 말에 신빙성이 없는데.”
“그래. 전에도 말했듯이 그냥 네가 싫어서. 그리고 너도…….”
생선이 잘게 부서지도록 나이프로 썰어대던 나는 흥분이 가라앉은 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랫입술을 송곳니로 물면서 참으려고 했으나 감정의 물길은 위에서 아래로, 입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잊었다거나. 내가 언제 그랬냐고 말하거나. 아니면 장난이었다고 말하면 나는 이 무심한 남자를 평생 미워하리라. 아니, 그 시절 멍청하게 그의 옆에서 설레하던 나를 죽이고 싶을 터였다.
“너도 나 싫어하잖아.”
물로 입 안을 적신 장희태는 긴 숨을 내쉬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장희태가 손으로 제 눈가를 주물렀다. 감정을 손안에 가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이해심과 인내가 깊어졌다.
“싫어하는 사람한테 시간 들일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아, 나.”
“그럼 왜 그랬는데.”
“내가 뭘.”
“왜.”
기어코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구나. 용기를 집어넣어 목에 턱 걸린 말을 겨우겨우 토해냈다.
“종선이한테. 내가 멍청하게 웃고, 목소리도 크고, 공부 잘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너 그랬잖아.”
장희태의 눈에 자리한 평정심이 휘청거렸고 입술은 살며시 벌어졌다가 닫혔다.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장희태의 표정은 금방 수습됐지만 허점을 두고 갔다. 자기가 엎지른 물을 옴팡 뒤집어써서 감기에 걸렸었다. 이제 와 몸을 살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만두자.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이 나이 먹고 하는 것도 우습고.”
이번에야말로 붙잡지 않을 것 같아서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예상대로 나가는 데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하지만 제 재킷을 챙겨서 따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계산대에 선 나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얼마예요.”
“네, 손님…….”
그때 옆으로 온 장희태가 카드를 내밀었다. 잠깐 내 눈치를 본 직원이 장희태의 까만 카드를 받아들었다. 계산대 앞에서 옥신각신 다툴 줄 알았다면 크나큰 착각이었다. 오히려 돈이 굳으니 나야 좋았다.
식당 문을 열고 나와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계산을 마치고 따라 나온 그가 옆에 섰다. 저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다는 놈치고 정상은 없었다. 나는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마땅할 변명 쪼가리를 주섬주섬 줍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을 눌렀다. 그런데 후발 주자인 장희태의 손가락이 1층을 취소하고 지하 2층을 눌렀다. 그를 노려보며 1층을 누르려는 차였다. 그가 멋대로 나의 손을 잡아서 제 주머니에 데려갔다. 휙, 손을 빼내며 그와 거리를 두었다.
“마음대로 만지지 마.”
“미안해.”
그는 억지로 손을 잡는 대신 주먹을 그러쥔 채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만이 낮게 깔렸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네게 상처를 준 건 내 잘못이야. 부정 안 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지하 2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장희태는 차가 주차된 쪽으로 걸어 나갔다. 담판 짓자는 마음으로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장희태 답지 않았다. 장희태라면 제 변호 하나는 기막힌 말솜씨로 입을 털었을 터였다. 의도는 중요치 않았다. 의도가 어떻든 상처받은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었다.
제 주인의 속내처럼 새까만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그의 앞에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얌전히 따라온 건 사람들 눈이 없는 곳을 찾고 싶어서였다. 열받은 나는 그가 연 조수석 문을 세게 닫았다.
“무슨 의도였는데, 그럼.”
“말해 줄 테니까 타.”
“무슨, 뭔 대단한 해명을 듣자고 내가 따라가야 되는데. 그냥 여기서 해라.”
“30분도 못 잤어.”
“무……. 뭐?”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됐거든, 너 때문에. 알다시피 저녁도 못 먹었고.”
“그게 나 때문이라고? 그게 왜 나 때문인데.”
인내심이 바닥난 얼굴의 장희태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좋아해서. 내가 너 좋아하니까.”
얼굴이 일그러진 장희태가 마른 손으로 마구 얼굴을 쓸었다. 제정신 아닌 그는 벌게진 눈으로 나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다. 거친 손길로 조수석 문을 다시 한번 열었다.
“이제 들을 마음이 생겨?”
그의 몸에서 나는 꽃향기를 맡자마자 정신이 확 들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악랄해졌다. 나를 가지고 노는 수법이 바뀌었나 보다. 비싼 밥 몇 끼 사 주고, 호텔 구경시켜 주면 칠렐레팔렐레할 줄 알았나.
“아니? 네가 나 좋아한다고 하면 아고, 황송합니다, 하면서 들어줄 줄 알았나. 착각하지 마라. 그때도 말했지만 너랑 이미 끝난, 윽!”
등이 차로 밀려나자마자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삼켰다. 나의 뺨을 고정한 두 손이 괘씸했다. 당황한 틈을 타서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문지른 뒤 지나갔다.
“으…….”
그새 키스 실력이 더 늘었다. 아닌 척하면서 내 혀를 얽고 쭉 빨아당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숨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그의 혀를 앙 물었다. 그런데도 이 독한 놈은 보란 듯이 안은 허리를 제 품으로 데려갔다. 주먹 쥔 손으로 그의 뺨과 어깨를 세차게 후려쳤다.
“놔, 으, 나…….”
쪽, 쪽, 혀를 얽고 빼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성 잃은 그의 뺨을 착 때렸다. 떨어지지 않는 그의 입술은 잇몸이든 혀든 남김없이 싹싹 훑었다. 복수인 양 혀를 넣은 다음 희롱하는 중이었다. 숨도 못 쉴 지경이 돼서야 힘이 빠졌다. 그가 홀쭉해진 나의 뺨을 놓아주었다.
“흐, 아!”
허리를 펴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있는 힘껏 뺨을 올려붙이려는데 맞아도 싸다는 양 가만히 있었다. 이미 그의 뺨에 손톱으로 낸 상처가 있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장희태는 손등으로 제 뺨에 흐르는 피를 슬쩍 찍어냈다.
“옛날보다 과격해졌네. 배우림.”
“놔. 집에 가게.”
숨이 딸리고 체력에 밀리는 게 한스러웠다. 그러나 장희태는 고집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상처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그가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한 번 더 해도 좋아, 난.”
본색이 나온 장희태의 눈은 휙 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어디 누가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메자마자 운전석 문이 닫혔다. 빠르게 시동을 걸어 출발을 한 그가 조수석 의자를 젖혀주는 느낌이 났다.
“어디로 가는데.”
“밥 먹으러.”
“입맛 없어.”
“그럼 술 마실래?”
“술도 못 마시는 게…….”
지하 주차장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장면까지만 보고 눈이 감겼다. 그와 육탄전을 벌여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이 이길 장사 없다더니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 눈을 뜨면 신호등. 또 깜빡 잠이 들었다가, 벌떡 일어나 보면 처음 보는 동네에 가 있었다. 될 대로 되라 싶어서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차가 어딘가에 도착한 후였다.
한숨 푹 잔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하품을 했다.
“여기가 어딘데…….”
“내 집.”
안전벨트를 풀어 주기 위해 장희태의 어깨가 조수석으로 넘어왔다. 딸깍, 벨트가 풀리고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의 입술이 뺨에 다가와 묻었다.
“하지 말라고 했다.”
“내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신사인 척하는 데에 재미 들린 장희태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지하 주차장에 뿌려진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고집불통은 제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장희태 말이 맞았다. 이번에 바람맞히면 다음은 누구를 괴롭혀서 나를 식사 자리로 부를지 모른다. 어디 한번 원하는 대로 실컷 굴리고 짖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꿈쩍하나.
장희태는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도망갈까 싶은지 손을 잡고서 말이다. 번거로워 겨울에 장갑도 안 끼고 다니는 나로선 갑갑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엘리베이터로 번갈아 옮겨 다니는 기분이었다. 17층으로 질주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으로 싸우고 있었다. 얘는 손에 로션도 안 바르는지 윤기가 없었다. 장희태는 솔솔 부는 솔바람처럼 손톱이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뼈를 가는 심정으로 그의 도발을 꿋꿋이 참았다.
“새우 좋아해?”
“그럭저럭.”
없어서 못 먹는다. 장희태가 바람을 빼듯이 웃는 게 엘리베이터 거울로 보였다. 우습게 보였나 싶어 짜증이 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때와 똑같이 핸드폰으로 문을 연 장희태가 이번에는 실내화를 내 앞에 내주었다.
마음에 차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며 실내화를 신었다. 장희태는 제 방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서서 기다리기 뭣한 나는 푹신해 보이는 하얀 소파에 앉았다.
나 같은 것 없어도 떵떵거리고 잘 살 놈이 좋아한다며 붙잡는 이유가 뭘까. 장희태의 성격상 입에 발린 말을 하느니 혀를 깨물 테지만, 만약 진심이 아니라면, 그냥 추억 삼아 데리고 노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도 의심 좀 안 하고 싶다. 의심과 미움은 마음 편히 담아둘 데가 없었다. 과거에 두기도, 현재에 두기도 그렇다. 담아두는 사람까지 골병들게 만드는 감정이니 말이다.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대고 누워있을 때 딸까닥 방문이 열렸다. 편한 슬랙스 바지에 하얀 티로 갈아입은 장희태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틀어 손을 씻고선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가스레인지 밑 오븐을 여는 폼이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싶었다. 장희태는 숟가락과 포크, 크리스털 술잔으로 식탁을 꾸민 뒤 나를 불렀다.
“배 안 고프면 조금 잘래.”
“아니.”
겉옷을 소파에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븐에서 정체불명의 음식을 꺼내 온 장희태가 식탁 가운데에 접시를 두었다. 보다 보니 손바닥만 한 새우였다. 새우 위에 뿌려진 노란 치즈 가루가 식욕을 당겼다. 그 옆에는 안주로 쓸만한 마른 과일과 치즈가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와인 냉장고에서 술을 가져온 장희태가 자리에 앉았다.
“먹어.”
소주도 못 먹는 놈이 양주를 가져왔다. 술 좀 먹어봤다는 나도 양주는 비싸고 독해서 내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멀뚱멀뚱 새우만 바라보고 있자 장희태가 새우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정성스레 머리와 껍질을 벗긴 그가 새우 살을 발라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정작 본인은 입이 짧은지 마른 과일이나 채소만 먹는다. 나는 조심조심 새우를 반으로 잘라서 한입에 넣었다.
“맛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사에 장희태가 슬쩍 웃는 게 보였다. 새우가 꼭 랍스터 같았다. 오븐에 구워진 채소를 곁들여 먹으니 맛이 그만이었다. 셰프 역할을 톡톡히 한 장희태가 내 잔에 양주를 따라줬다. 불평불만 하던 것도 잊고서 그가 내어 준 음식들을 하나씩 해치워갔다.
“배우림.”
“왜.”
“내일 바빠?”
새우 한 마리를 더 까준 장희태가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물었다. 학원 일로 바쁘다고 하면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일 무진장 많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점심은.”
“친구랑.”
“나한테 써.”
“내가 왜.”
“네 남자친구니까.”
새우가 살아서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줄 알았다. 실수로 그가 따라놓은 양주를 원샷하고 말았다. 목부터 위장까지 화르르 타들어 가는 이 느낌은 대학교 다닐 때 고량주를 마셔본다고 까불다가 당했을 때의 그 느낌보다 더했다. 술이 아까워 뿜지는 못하고 꿀꺽 삼켰다.
“네가 왜 내 남자친구인데?”
“말했잖아. 좋아한다고.”
“네가 좋다고 하면, 내가, 으흠.”
장희태는 일어나 정수기에서 찬물을 따라 왔다. 얼른 물을 받아서 마신 나는 한숨을 돌린 후에 멍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난 너랑 사귄다고 안 했다.”
“내일 점심에 데리러 갈게. 한 시 반까지 점심시간이니까 열두 시에는 나와.”
은색의 포크로 주욱 늘어나는 치즈를 돌돌 말았다. 부드러운 치즈를 떠서 먹으니 뜨거운 속이 달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 건 뭔데. 아까 그랬잖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거침이 없던 장희태가 아픈 곳을 찌르자 한 발 물러섰다. 취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올린 다음 팔짱을 꼈다. 해명이 빈약하면 다음이고 뭐고 없었다. 장희태가 제 잔에도 호박색의 술을 따랐다. 얼음이 와자작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박색의 술잔을 든 장희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재밌다기보단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경쟁자 제거.”
“경쟁자 제거?”
“김종선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서. 배우림 별로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눈 벌게져라 외쳤지. 다른 새끼는 몰라도 김종선은 확실히 위협적이었거든.”
장희태의 눈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들을 때는 가는 비처럼 잔잔하던 마음이 그의 말이 끝나갈수록 감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분노, 슬픔, 설렘, 그 모든 것이 제 주장을 하느라 어느 것 하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나는 반 정도 남은 술잔을 들었다.
“그거였어? 하, 그래도 늦었거든?”
얼음이 녹도록 잔을 한 바퀴 돌린 뒤 입술을 축였다. 조금씩 얼음이 녹으니 아까보다는 마실 만해졌다. 장희태는 늦었다는 내 말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억울한 건 나뿐인 것 같은 느낌에 목소리를 높였다. 술 때문에 감정 제어가 안 되고 있었다.
“그럼, 왜 지금인데?”
“이제 한국에서 사니까. 장거리 연애 싫잖아.”
“장거리 연애 때문에 안 나타나셨다.”
“해야 할 일이 있었어. 나는…….”
“해야 할 일, 뭐. 우리가, 뭐, 한두 해 헤어져 있었어?”
“한두 해도 아닌데 넌 나 안 잊었네. 어려울 거 있어? 수십 년 만에 만난 첫사랑하고도 결혼하는 사람들 쌔고 쌘 세상이야.”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거듭 말이 꼬였다. 말이 안 나올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어느새 손목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술주정뱅이처럼 식탁에 엎드린 나는 할 말이 생각날 때마다 발딱 상반신을 들었다.
“난 너 싫어.”
“알아.”
“알아?”
“너만 한 여자 없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놈을 떼어낼 방법을 생각하다가, 학창 시절 장희태가 싫어하던 것을 나열했다.
“그러면, 너. 앞으로 나 막 다닐 거야.”
“어디를.”
“떡볶이집도 가고. 길거리에서 호떡도 사 먹는다? 너 그거 할 수 있어?”
“할게.”
“그래도 싫어.”
고작 이걸로? 고작 이 정도로? 엎드려서 어림없다고 웅얼웅얼 꼬장 부릴 때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흔들자 금세 떨어져 나갔지만 말이다. 장희태는 저 잘난 줄 아는 놈이니 자존심을 부수면 어떨까 싶었다.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다.”
“나?”
“아니, 너 말고!”
“누군데.”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해?”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만에 하나 있다고 하더라도…….”
마른 망고를 집어 든 그가 건조한 표정으로 잇자국을 냈다.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장희태는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거실 창을 바라봤다. 술잔을 든 손을 무심히 기울인 장희태는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주 두 병에 맛이 갔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너 취한 척했어? 거봐. 거짓말 많이 해서 싫어. 말하는 것도 너무 싸가지 없어.”
“너한텐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거, 이제는 알아. 고칠게.”
“시, 싫어. 고치지 마.”
“왜?”
“그런다고, 내가 사귈 줄 알아?”
주량을 넘은 지 오래인데 이 약삭빠른 놈이 술잔이 빌 때마다 알맞게 채워놓았다. 보이는 사물마다 흔들거릴 즈음 식탁에 머리를 댄다는 게 쿵 찧었다. 여기에 더 있다간 사고를 치지 싶었다.
“가방, 어디 있어?”
“물 줄까.”
“내 가방.”
장희태가 식탁을 짚고 일어나다가 휘청거리는 허리를 안았다. 그의 품에 훅 끌려가는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니라 허공에 떠 있음을 알았다. 그가 허벅지 밑에 손을 받쳐서 안아 들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고약한 봄 냄새가 났다. 입 속으로, 코 속으로, 귓속으로, 마음속으로 계절의 향수가 스며들었다. 야비한 장희태는 아랫입술로 귓불을 스치며 말을 걸었다.
“자고 가.”
“안 돼. 나 갈래…….”
“나도 술 마셔서 못 데려다줘.”
“안 데려다줘도 된다고.”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발버둥을 치자 그가 내려 주었다. 그런데 내려 준 곳이 하필 그의 침대 위였다. 푹신한 침대에 둔부가 닿자마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치마를 입고 왔다느니 하는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침대를 짚고서 일어나니 장희태가 휘청거리는 내 몸을 붙들었다.
“어디 가게.”
“집에.”
술 취한 척까지 하는 나쁜 놈. 나는 얼굴이 빨개져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러나 내가 봐도 아무런 위력이 없었다. 장희태는 몇 번 받아주다가 말고 내 손목을 잡았다. 진지해진 장희태는 잡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봄 내음 나는 숨으로 나의 정신을 조종하려 했다. 손등에서 시작한 입맞춤이 손목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고개를 위로 들어 그와 제대로 눈길을 나누어 가졌다. 할 말 많은 입술을 달싹인 순간 장희태가 달려들었다.
“음.”
“하아…….”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자마자 그의 목에 손을 둘러 감았다. 나의 학창 시절을 망친 장본인이 마음 한 조각 얻겠다고 비위 맞추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의 혀가 아까 맛본 곳을 또 맛보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가 힘으로 뜯어냈는지 우두두 단추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벗기 쉬운 그의 흰 티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장희태의 맨살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뒤에 있던 침대로 몸이 떨어졌다. 남색 벽지의 방에 덩그러니 침대 하나만이 있었다. 장희태의 방을 눈에 다 담기도 전에 브래지어 끈이 풀리는 느낌이 났다. 등에서 돌아다니는 손이 범인이었다. 팔을 위로 든 순간 가슴을 죄던 속옷이 그의 손에 의해 끌려 나갔다.
“보지 마.”
장난기 심한 장희태는 가슴을 가린 손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말없이, 웃음기도 없이 가슴만 훑어보는 시선은 나를 수치심으로 물들였다. 장희태의 입술보다 붉은 혀가 물 흐르듯이 나의 가슴 쪽으로 다가올 즈음이었다. 술이 덜 깬 나는 상체를 일으켜 그를 막았다.
“씻을래.”
턱에 힘이 들어가 있던 장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가누고 일어서서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려고 할 차였다. 균형 잡도록 허리를 잡아 주는 손이 있었다. 뒤돌아보니 장희태가 넘어지지 않게 붙어서 왔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장희태가 욕실의 문을 열었다.
“나가.”
그러나 그 말에 되려 장희태의 발이 욕실 안으로 들인 셈이었다. 대꾸 없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장희태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서 뒤로, 더 뒤로, 그렇게 뒤로만 가다가 욕실의 벽밖에 남지 않았을 때까지 몰렸다. 욕실 타일에 등이 닿자마자 장희태의 손이 왼쪽으로 갔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소낙비 같은 물줄기에 머리가 젖었다. 상체로 떨어져 흐르는 물이 치마까지 적셨다. 그 물줄기 속으로 들어온 장희태가 나의 입술을 가졌다.
키스하기 위해 입을 벌릴 때마다 그에게 묻은 달콤한 물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입술은 설탕물에 버무린 것만 같았다. 그가 손을 내려 젖은 내 치마의 버클을 풀었다. 잡아 주는 게 없자 치마가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곧바로 제 허리로 손을 옮겨 젖어버린 바지를 벗었다. 벽에 기대게 하고 천천히 한 손으로 나의 몸을 훑었다. 봉긋한 가슴을 안달 난 듯이 손바닥으로 쓸어 만지며 느끼는 중이었다. 물기 어린 그의 손이 가슴 위를 지나갈 때마다 기분 좋은 신음이 목에서 끓었다.
물과 입술이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숨이 모자란다 싶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린 장희태가 입술을 놓았다. 하강한 그의 손이 홀딱 젖은 속옷 안으로 들어갔다. 밀려 내려가 허벅지에 걸쳐진 속옷을 끌어 올리기도 전이었다. 물기를 끌고 온 손가락이 음부 위를 덮었다. 그의 어깨를 미는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에 힘을 받은 장희태의 손가락이 들썩이듯 안으로 들어왔다.
“음…….”
내벽에 안착한 손가락이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장희태는 한 손으로 벽을 짚어 제 몸을 내 쪽으로 완전히 기울였다. 나는 그에게 가려져 어둠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 와중에도 물은 콸콸 쏟아졌다.
장희태의 몸에 흐르는 물들이 나의 입으로, 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을 머금어 촉촉해진 손가락이 내벽을 살포시 건드렸다. 좁아서 신경질이 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장희태가 한 팔로 허리를 조였다. 벽은 나의 베개가 됐다. 다리를 오므리려고 한 순간 장희태가 제 허벅지로 막아섰다. 두꺼운 그의 허벅지가 내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는 순간 손가락은 두 개가 되었다.
“아, 응…….”
술에 취해서 이런 것인지. 아니면 장희태의 기술이 좋은 것인지. 낯선 애무에 거부감 들던 기분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민감한 내벽을 긁고 있는 손가락 두 개가 대범해질 때마다 그의 허벅지에 눌린 다리를 떨었다. 내 다리가 오므라지지 않게 고정하고 있는 그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밀쳤다.
그는 급기야 아래로 내려가 가슴을 노렸다. 물기가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젖꼭지에 혀를 댔다.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던 그가 밀고 들어간 혀로 가슴을 물었다. 잘근잘근 씹히는 것 같은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관이었다.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는 손의 주인을 똑바로 보고 만 것이었다.
“아, 흣.”
손가락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둔부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깊은 곳으로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는 기분이었다. 되려 피하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파고드는 리듬과 같아졌다. 기분이 좋아 몸을 흔드는 것처럼 비칠까 봐 걱정이었다.
“아, 으.”
“왜.”
“빼, 봐.”
“깊어?”
말로는 깊냐고 물어보면서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어쩌자는 말인가. 물이라도 끄기 위해서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거의 닿았는데, 잠그기 직전이었는데, 그가 내 허리를 덥썩 안아 들었다. 가슴을 빨면서 음부에 푹 찔러 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 싫, 야, 아, 아으…….”
약점 같았다. 찌르면 찌를수록 코드가 뽑힌 것처럼 체력이 닳았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엄지로 음부 위쪽을 파헤치는 게 느껴졌다. 그쪽을 자꾸 자극하면서 내벽으로 집어넣은 물을 바깥으로 빼려 했다. 그의 손바닥에 고이는 게 수돗물인지 아래서 빼낸 것인지 모르겠다. 위를 올려다보니 전등 아래서 웃고 있는 장희태가 보였다.
“응, 잠깐…….”
그 순간 장희태가 손가락을 빼었다. 빠져나가면서도 휘휘 저으며 나가는 바람에 자극이 심했다. 낯선 느낌이 빠지기도 전에 그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 틈에 손을 뻗어 물을 잠그려고 했으나 두 손이 허벅지를 옆으로 벌렸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빨간 살덩이가 음부를 날름날름 핥는 것이 보였다.
“아!”
욕실 벽이 못 미더워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물보다도 독하고 매끈매끈한 물건이 속살을 쭈욱 빨아들였다. 다리를 모으려고 할 때마다 장희태의 머리는 방해가 됐다. 배가 아리는 느낌에 울고 싶을 때 장희태의 입술이 음부 위에서 노닐었다.
속살을 길게 가른 혀를 위로 데려갔다. 아까 엄지로 굴린 음핵을 얄밉게 괴롭혔다. 혀로 쓸고, 맛보고, 흘러나오는 물이 보이면 입술을 움직여 빨아 마셨다. 그의 혀가 뾰족하게 세워져 음부에 꽂혔을 차였다. 나는 아찔한 쾌감에 떨며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아, 하으!”
그는 그런 반응에 놀리듯이 손으로 속살을 활짝 열었다. 콧날로 건드리는 곳이 툭 불거진 음핵인 건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웠다. 고고한 장희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격정적인 혀가 나를 수치에 빠트리기 위해 한 방울, 한 방울 쭉쭉 빨아냈다. 붉은 혀가 한 번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둔부를 욕실 타일에 대고 흔들었다.
“아, 읏, 응!”
쭈읍, 소리와 함께 입술이 음부에 딱 달라붙었다. 그의 혀에 샤워기가 뱉는 물과 아래서 나오는 물이 섞였다. 더 달라는 듯이 혀를 쑤시는 그의 행동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가 잠시 입술을 뗀 사이 다리 힘이 풀려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머리가 다치지 않게 손으로 받친 그는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나, 가라.”
알았다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제 손에 묻은 물을 핥고 있는 장희태가 보였다. 내 말은 때려죽여도 안 들을 눈빛이었다. 근처에 있는 샤워볼에 시선을 주자 장희태의 시선도 그쪽으로 이동했다. 장희태의 손이 민첩했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로 보이는 용기를 눌러 젤을 묻혔다. 샤워볼을 주려는 줄 알았으나 그는 한쪽 다리를 굽혀 앉았다. 샤워볼을 문질러 거품을 내는 게, 마치 나를 씻겨 주려는 것만 같아 걱정이었는데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하얀 거품이 난 볼을 내 팔에 스윽 문질렀다.
“내가 한다고.”
“서 있지도 못하면서, 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부들부들한 거품이 몸에 닿을 때마다 경련하듯 떨었다. 장희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잡아 거품을 군데군데 묻혔다. 볼은 구름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부드러워 자극이 없었다. 팔을 다 씻길 때까지는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담백한 손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볼이 가슴골에 닿을 때부터였다.
소란 없이 가슴 사이를 지나가던 손이 우연을 가장하여 둥그런 가슴을 모으듯 만지고 떠나갔다. 가슴 밑을 꼼꼼히 닦는 척을 하다가, 제 욕심을 못 이겨 그 밑만 하염없이 닦는 중이었다. 손톱으로는 젖꼭지를 건드려 나를 움찔 놀라게 만들었다. 싫다는 뜻으로 손을 밀어내자 배꼽 아래로 볼이 내려갔다. 양심이 바닥 난 놈이었다.
“하지 말라 했다.”
“술 취해서 발음 꼬이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무슨, 으!”
그가 물고 빤 대가로 예민해진 아래를 부드러운 볼이 방문했다. 짜릿한 감각이 하반신으로 번졌다. 온몸에 쥐가 난 것만 같았다. 장희태는 뭔가 눈치챈 것처럼 나의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로 데려갔다. 끌려가는 동안에 허둥거렸으나 금방 제압되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자마자 씻겨 주겠다는 목적을 잃은 볼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아, 응!”
“신음 소리, 좋다.”
거품이 허벅지 아래로 뭉쳐서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종아리를 쓸어 만지는 손길이 보통 흑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허벅지를 마사지하듯 주무르거나 귓불을 물고 목덜미를 빠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볼로 음부를 만지다가, 은근슬쩍 손가락 두 개로 안을 휘젓고 가는 게 문제였다. 불시에 습격당한 음부가 놀라서 닫히듯 조였다. 좁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귀를 통해 넘어왔다. 좁은 안을 늘리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로 가위질을 할 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울어?”
“이거 순 변태 새끼…….”
“하하.”
장희태가 소리 내어서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는 게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였다. 아래에 요의가 느껴질 즈음 장희태는 천천히 손가락을 빼었다. 위에서 쏴아아 물줄기가 쏟아졌다. 거품이 물에 씻겨나가는 걸 멍하니 보던 나는 허벅지 아래로 쑤욱 들어오는 손에 의해 들려졌다. 욕실 타일이 등에 비벼졌다. 그가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릴 차에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속옷을 내려 꺼내는 성기의 크기를 보고 잠이 달아나 버렸다. 다 나오는 게 아니라 머리만 내밀고 있음에도 탄성이 아닌 두려움이 들었다. 남자 손치고 장희태의 손이 큰 편임에도 그의 성기는 작아 보이기는커녕 적당하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이건 아닌 듯싶어 고개를 저을 때 그의 혀가 구애하듯 입술을 물고 빨았다. 키스가 주는 부드러움에 취해 있는 사이 아래에선 그 무지막지한 성기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곧게 선 물건이 음부에 난 잔털 위에서 질척거린다고 느꼈을 때였다. 그의 손이 턱을 쥠과 동시에 머리가 음부로 들어왔다.
“으, 음!”
“빡빡한데…….”
입술을 핥아 올린 그가 다리 사이로 파고든 성기를 천천히 움직였다. 젖은 음부가 쓸리는 느낌이 났다. 힘이 들어서 숨을 길게 내쉴 때 장희태가 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내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나아질 리 없었다. 반 정도 남기고 들어오던 장희태가 갑자기 멈추었다. 내려가는 나의 턱을 잡아 위로 들었다.
“하아……. 뭐지?”
“뭐, 가.”
“처음이야?”
아니라고 말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장난치듯 허리를 흔들자마자 나는 울상이 됐다. 서서히 속살을 밀며 들어오는 그것이 다 들어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정신을 쏙 빼놓고 야금야금 들어오는 중이었나 보다. 두 다리를 드는 장희태 때문에 나는 등에 댄 벽만을 의지하기엔 불안해졌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꽉 안은 순간 그가 크게 허리를 튕겼다.
“아!”
“남자친구니 뭐니 그건 다 개소리고……. 지고지순하게 나만 기다렸나 보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목에 두른 손을 풀자 장희태는 위험하게도 나를 벽에서 완전히 떼어놓았다. 매달린 것처럼 그에게 안겨 있는 게 억울해서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제 성기를 품느라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가여워라. 처음인 줄 알았으면 손가락 두 개로 장난질하지 않았을 텐데.”
“쓰다듬지, 마.”
“하지 말란 건 왜 이리 많은지.”
머리를 눌러 나를 제 가슴에 기대게 만든 장희태가 느긋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사이에 계속 안을 치대고 있는 그의 성기가 말썽이었다. 잊으려고 해 봐도 그가 걸을 때마다 불특정한 곳을 쿡 찔러대는 통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초반에 느낀 쓰라림은 그의 것을 품고 있자 많이 호전됐다는 거다.
“아흐.”
침대에 눕혀짐과 동시에 그의 전부가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혀가 채 마르지 않은 나의 몸을 닦았다. 장희태는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였다.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그의 허리는 내벽을 차지하고 있는 성기가 조심스레 안을 탐색하게 해 주었다. 속살이 성기에 쓸리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고 있었다. 쓰라린 게 아니라 야릇한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고 뜨거운 숨을 흘렸다.
가슴에 고인 물기를 혀로 훔치던 장희태가 제 아래에 있는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두 팔로 상체를 버티고 서 있던 그의 고개가 내려와 내 입술을 머금다가 놓아 주었다.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진 장희태의 입술이 밉살맞았다.
“너, 넌 제멋대로라 싫다고.”
“또.”
“공감 능력도, 흐, 없다. 내가 보기엔.”
“또.”
“나를, 좋아하는 게, 아, 맞나.”
“난 비위가 약해서, 다른 여자하고는 혀도 못 섞어. 그런데 자진해서 네 밑에도 빨잖아. 안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정신이 없어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마에 입을 맞춘 장희태가 다정하게 아래를 치댔다.
“또. 고칠 거.”
“몰라, 하으…….”
푹, 들어왔다가 나가는 성기의 생김새가 아래로 그려질 만큼 느려 터진 섹스였다. 머리카락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게 수시로 정리해 주는 손길에 나는 약간 방심을 했다.
“응, 으, 읏.”
어느 순간부터는 내 뺨에 제 입술을 묻어 두고 허리만을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손에 가슴을 쥐고서 조몰락대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손 사이로 삐져나가는 가슴이 안타까운지 탄식이 있었다.
욕심을 아래로 채우려 하니 허리의 움직임이 이전과 다르게 강해졌다. 덩달아 안에 죽은 듯이 박혀 있던 성기가 번들거리는 물을 묻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시 쿵, 박으며 들어왔을 때 내벽을 짓눌러 나의 신음을 자아냈다. 제 흥에 취해 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뒤틀며 들어와 안을 훑어 나갔다.
물이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라일락 향이 났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음미하는 찰나였다. 아래를 무난한 느낌으로 헤집던 성기가 빠져나오면서 주륵 물이 흘렀다. 들어오고 나오는 성기가 부풀어 난폭해졌다. 음부에 꾸겨 넣고 비비적거리는 성기가 찌르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아, 으으, 응!”
목에 쪽, 뺨에 쪽, 코에 쪽. 순회공연 다니듯 돌아다니는 입술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안아 들어 눅진한 느낌으로 들어온 성기가 나가지도 않는다. 여러 번 안에서 뒤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을 찌르고 문댔다가, 머리로 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찔러 보기도 한다.
그 장난 같은 놀림에 혼이 나갈 즈음 아래서부터 번진 쾌감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쭈욱 밀었다. 그러자 웃음을 담은 장희태의 입술이 내 목에 얹어졌다. 그의 상체가 거의 나를 덮어왔다. 딱 붙은 그의 젖은 성기가 아래로 처박혔다. 간간이 새던 신음이 방 안을 채움에 따라 추삽이 거세지고 있었다. 무른 곳이 없는 그의 성기가 질퍽거리는 내벽을 채우고 또 채웠다.
“아, 으, 읏.”
“하, 아…….”
장희태는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을 턱에 매달고 위아래로 물어뜯느라 바빴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대신 꽉 껴안으며 아래서 흐르는 물을 잊을 즈음이었다. 기어코 눈앞에 뵈는 게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 허벅지를 두 팔에 끼고 있었던 장희태의 마른 숨이 잇새로 새었다.
“아으!”
“아, 윽…….”
힘이 빡 들어간 등 근육이 손으로 만져졌다. 둥글게 말 듯이 상체를 만 장희태가 침대 시트에 이마를 처박고 허리를 흔들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뜬 눈으로 그가 허리를 두어 번 쳐올리며 터는 것을 보았다. 안으로 핏핏 쏘아지는 게 느껴졌다. 하얀 정액이 빠져나오는 그의 성기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
만족스러운 장희태의 얼굴을 보고 나는 지쳤음에도 주먹을 쥐었다. 조금만, 조금만 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외박한다는 말 없이 들어오지 않으면 두 분 다 잠을 못 주무시니까 말이다.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찾았다.
“조금만 잘 테니까…….”
장희태는 손가락으로 벌린 음부에서 정액을 빼내는 중이었다. 저 나사 빠진 정신머리로는 도움이 안 될 게 뻔했다. 그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내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의사를 모두 밝히고 잠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
잠에서 깨면서 본 것은 환한 거실의 창, 그리고 오색의 불빛, 하얗게 뜬 보름달, 그리고 발가벗은 상반신, 까만 바지를 꿰입은 남자였다. 통화 중인 남자의 목소리는 장희태와 닮아 있었다.
“걱정 마세요, 큰아버지. 할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저한테도 종종 카드나 통장 거두어 가신다고 역정 내시는데 진심은 아니시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넘기세요.”
장희태를 닮은 게 아니라 장희태였다. 상대방도 모르고, 등을 돌린지라 장희태의 표정도 볼 수 없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나 다급하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장희태는 웃으며 상대방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었다.
“제가 아는 변호사 하나가 세금 쪽으론 이골이 난 사람인데……. 이미 준비하셨으면 따로 연락 안 넣어도 되겠네요.”
그즈음에는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가 아니라 소파 위였다. 낯선 거실이 차차 눈에 익었다. 장희태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찾다가 따라 나온 장희태와 소파 위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까지 기억나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몸부림치던 나와 가랑이 사이에서 입술을 옴짝거리던 장희태의 모습을 말이다. 거실에 달린 시계를 확인해 봤다. 시곗바늘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 큰아버지. 언제든 연락 주세요.”
부들거리는 팔로 일어나 겨우 상반신만 들고 있을 즈음 장희태가 통화를 끝냈다.
“멍청한 새끼.”
그때 일어나려고 애쓰는 나의 기척을 느낀 장희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눈 부셔서 눈을 찡그리자 장희태가 암막 커튼을 쳤다. 그러나 나는 달빛보단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연기와 매캐한 냄새, 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하얀 담배에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아, 뭐지.”
눈을 휘며 웃은 장희태는 담배를 재빠르게 테이블 위에 있는 검은 재떨이에 비볐다.
“담배 피우는 것도 싫어?”
내가 고개를 저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쓰러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를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탄 장희태는 기억이 났다. 뼈마디가 쑤시는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환한 아침이었다. 방금 기억난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 나는 침대 위에, 그것도 아주 늦은 아침에 눈을 뜬 것만은 확실했다.
“장희…….”
목소리가 쩍 갈라졌다. 그런 일을 예견한 것처럼 물 한 잔이 침대 옆 협탁에 있었다. 말 안 듣는 몸을 어르고 달래 협탁 앞까지 기어간 나는 그 물 한 잔의 힘으로 수십 분 뒤에 몸을 일으켜 볼 수 있었다.
“지금이 대체 몇 시고.”
몽둥이에 구타당한 양 허리에서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듯이 걸어가 방문을 여니 거실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불이 꺼진 거실과 조용한 집 안을 둘러보던 나는 오늘이 월요일임을 깨달았다.
“핸드폰.”
거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핸드폰이 든 가방을 찾아다녔으나 어제 식탁에 두었던 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소파도 뒤져 보고 그의 침실로 돌아가 이불까지 들춰 보았지만 가방은커녕 입고 온 옷도 없었다. 그나마 지금 입고 있는 헐렁한 잠옷도 바지가 끌리는 게 장희태의 것인 듯싶었다.
소매도 길어서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많았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드레스룸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고 나서야 겨우 내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넥타이가 진열된 곳 바로 옆에 장희태가 놓아둔 모양이었다. 대충 가방만 찾고 돌아가려던 나는 색깔 별로 정리된 니트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바지 각 잡힌 거 봐라. 다림질이 뭐 취미가.”
걱정이 돼서 그런다. 드레스룸이면 보통 한두 달 안에 망가지는 게 정석이었다.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는 나도 장롱 안은 남한테 보여 주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셔츠도 브랜드별로, 바지도 남색부터 검은색까지 진해지게 걸어둔 것이 물감 팔레트를 보는 줄 알았다.
하여간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하며 드레스룸 밖으로 나갔다. 다급히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가 핸드폰을 찾았는데 전원이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부족한 것인가 싶어 전원을 켜는 도중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두 시 반인데…….”
출근 복장의 장희태가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정장까진 아니지만 까만 셔츠에 다림질한 바지까지 입고 있었다. 장희태는 깨어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일어나 있었네.”
“저기, 그…….”
어쩜 저렇게 태연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태연할 수 없었다. 잠옷 차림인 것도 까먹고 소파에 앉아 크로스백을 멨다. 내 앞까지 걸어온 장희태가 웃으며 내 가방을 가져갔다.
“아끼는 거니까 내 잠옷은 반납하고 가.”
장희태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어제처럼 내 허벅지 밑에 손을 받쳤다. 공주님 안는 자세로 식탁까지 걸어간 장희태가 나를 천천히 의자에 앉혔다. 융숭한 대접은 고맙지만 나는 술에 취한 후부터 일어난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꿈처럼 황홀한 게 아니라 현실성이 조금도 없었다.
“맞다. 내 전화기 꺼졌다.”
“충전해 줄게.”
“네 것 좀 빌려줘.”
장희태는 제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내가 다급하게 엄마의 전화번호를 누를 때 장희태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두르르르, 신호가 가고 얼마 안 가 목이 잠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엄마.”
– 이놈의 기지배! 미쳤어!
옆에서 아빠가 드디어 전화가 됐냐며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엄마 손에 죽을 일만 남았다.
– 안 들어오면 안 들어온다고 말을 하지! 윤정이한테 전화하니까 뭐 소개팅했다며? 아니, 그런 애가 밤새 안 들어오고 엄마가 경찰서 앞까지 갔다가…….
면목이 없어서 듣고만 있는데 듣다 못한 아빠가 전화를 뺏은 모양이었다.
– 우림아. 오늘 들어올 거지?
“예. 술을 많이 마셔 가지고…….”
– 일은 없고?
“예.”
– 그럼 됐다. 얘가 뭐 아도 아니고.
다행히 아빠의 개입으로 일은 일단락 된 듯싶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윤정이랑 오늘 자습실을 정리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나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머리는 복잡한데 식탁 위에 반숙을 올린 샌드위치가 올라왔다.
“저기. 장희태.”
“왜.”
“나 이거 먹고 데려다줘라.”
“세탁해 둔 옷 마르면.”
“잠깐, 너 회사는 어쩌고 왔는데.”
“점심시간이 두 시까지라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서 먹어.”
비싼 양주라 그런지 숙취가 심하지 않았다. 레몬 맛이 나는 물을 마신 뒤 그가 해 준 토스트를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장희태는 토스트를 먹으면서 태블릿 PC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장희태의 입술에 시선이 가는 걸 억누르며 물었다.
“화연건설 다닌다며.”
“어.”
“무슨 팀인데.”
“디자인.”
테블릿PC 커버를 닫은 장희태가 먹다가 남은 토스트를 접시에 두었다. 곧바로 일어나 물을 틀고 손을 씻은 그가 접시를 개수대에 넣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턴 장희태가 다가와 나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먹일 것이 있나 싶었다. 장희태의 분홍빛 입술이 뺨에 도장을 찍고 떠났다. 솔직히 그와 사귀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말이 되고 있었다. 장희태는 헐렁거리는 잠옷 속에서 나의 팔을 찾아내 꺼내 주었다.
“나, 나도 할 수 있거든.”
“시간 아까워.”
“무슨 시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장희태의 입술이 나의 입을 먹어 치웠다. 소파로 가서 제 허벅지 위에 앉힌 장희태가 내 잠옷을 훌렁 벗겨버렸다. 속옷도 입지 않은 맨가슴이 드러나 부끄러워졌다. 벌건 대낮이라는 것을 상기하곤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징그럽게도 입 안을 훑는 혀에게서 어렵사리 벗어났다. 그의 눈빛이 낮에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은근히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웃는 눈으로 부드럽게 내 허리부터 둔부까지 쓸어 만지는 중이었다. 그의 손을 빼내기 위해 입술을 살짝 물었다. 장희태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 귓가에 흩뿌렸다.
“출근하기 전에 봤을 때는 심하게 붓진 않았는데. 걱정 돼서.”
“어디를 봤는데?.”
“주말에 뭐 해.”
“주, 말은 왜.”
그의 손을 막는 힘이 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난치듯 나를 봐주던 그의 손이 내려가 속옷 속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너 점심시간 끝나겠다! 얼른 가야지.”
그러자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해 본 장희태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데.”
“나 궁금한 것도 있고…….”
“그럼 퇴근하고 네 학원 앞으로 데리러 갈까. 같이 저녁 먹게.”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장희태의 손이 천천히 속옷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가 세탁을 했다는 내 옷을 찾기 위해 급히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알고 보니까 제 서랍 속에 내 옷을 꼭꼭 숨겨 둔 모양이었다. 다려놓은 듯 빳빳한 셔츠를 보니 기가 막히긴 하다만 따질 시간이 없어 얼른 세수와 이빨만 닦고 그의 집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많이 초췌했다. 나를 데려다주기 위해 나선 장희태의 시선이 끈적끈적해 부담스러웠다.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니 그가 당연한 듯이 손을 잡아 왔다.
내가 어제 술을 먹은지라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다만 연인이 된 게 맞기는 한 것 같다. 문제는 이 연애가 나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는 거였다. 장희태는 내가 싫다고 한 부분을 깡그리 고치겠다는 순정파가 되어서 돌아왔다. 미국에서 뭘 먹고 살았길래 마음을 바꿔 먹고 돌아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등학교 때보다는 기분을 살피려고 노력하는 듯싶었다.
운전하는 중에도 빨간 불만 만나면 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떡볶이까지 먹겠다고 한 것을 보니 엔간한 각오는 아닌 듯싶었다.
“이따 봐.”
“얼른 들어가라. 지각하겠다.”
학원 앞에 내려 주고 돌아가는 자동차 뒤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연애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 내가 이제껏 봐 온 사람 중에 이성으로 느껴지는 건 장희태가 유일했다. 사귀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같이 있으면 긴장되는 것도 장희태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달라지겠다고 선언을 하자마자 상처받은 적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마음이 안 갈 수가 없겠지. 장희태는 내 첫사랑이었다.
우선은 개업일이 코앞으로 닥친 학원 일부터 처리해야 한다. 저녁에 만나 아직 풀지 못한 감정에 대해 얘기해 보리라. 벚꽃이 핀 가로수 길을 보고 혀를 찬 나는 학원 건물로 들어가다가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쟤 어떻게 내가 여기에 학원을 차린 걸 알았지.
나는 이미 차가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