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00
제 5 장 장건은 부지런해요
저녁 공양이 끝나고 나서도 소림은 부산하기만 하다.
“그거 이리 가져오고!”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옮겨!”
밤이 늦어도 소림의 곳곳에는 많은 불이 밝혀져 있다. 뛰지 말고 경건히 다니라는 규칙도 잊은 채 모두가 분주히 경내를 오가고 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제자들의 민머리에 불빛이 반사되어 경내는 대낮만큼이나 환하다.
하지만 장건은 그 분주함 속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다.
몸이 다 나았다 좋아하며 일을 시켜달라고 했더니, 돌아온 말은……
– 넌 그냥 쉬어라.
……였다.
이미 장건의 몸이 나았다는 건 소왕무의 보고에 의해 알려져 있었다.
한창 바쁜 때라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하긴 하건만, 원호는 미리 장건에게는 일을 시키지 말라고 명을 내려두었다. 장건이 미워서가 아니라 굉봉의 말처럼 장건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다.
몸이 다 안 나았다면 모르는데, 정상으로 돌아왔다니 그게 더 걱정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와중이라 한 건만 사고가 터져도 수습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고 없이 평범하게 일을 마치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장건은 하는 일도 없이 멀뚱하게 남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왕무와 함께.
“아무도 일을 안 시켜줘…….”
장건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일이다. 식충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뭐든지 했던 터라, 멀뚱히 있으려니 죽을 노릇이었다.
“다들 일하는데 놀 수도 없고, 어쩌지?”
장건의 중얼거림에 소왕무가 입을 쩝쩝거렸다. 소왕무는 임무가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장건을 지켜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장건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말리는 게 임무다.
“그냥 하던 대로 수련이나 하자.”
“당분간은 검 안 쥘 거라니까.”
“그럼 나 하는 거나 좀 봐줘.”
“하지만 남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넌 쉬어야 되니까 사백님들 말씀대로 쉬는 게 돕는 거야.”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도 뭔가 일을 찾아서 해야 할 거 같아.”
장건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사형들이나 사백님들은 너무 바빠서 나한테 일을 시키지도 못할 정도니까, 내가 찾아서 해야겠다.”
“뭐?”
옛날부터 일을 찾아서 하는 데에는 도가 튼 장건이다. 알아서 척척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농땡이는 장건과 거리가 멀다.
“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겠어. 일단 청소는 전각 보수랑 이전이 다 끝나야 할 수 있고, 연등 만드는 건 재료가 부족하다고 하니 당장은 할 수 없고…….”
혼자서 중얼대며 궁리하는 장건을 말리고 싶은 소왕무였다.
“하지 마. 그만둬. 하지 말라는데 왜 하려고 그래?”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될 수는 없으니까.”
“야! 그깟 식충이 좀 되면 어떠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욕이 뭔지 알아? 바로 식충이야, 식충이.”
장건은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노사님이 그 말을 하실 때마다 얼굴이 얼마나 무서웠는데. 진짜 나는 그 소리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요즘도 그때 꿈을 꾸면 놀라서 깬단 말야.”
“굉목 대사님은 원래 무섭게 생겼어!”
“그렇지 않아. 평소엔 얼마나 인자하게 잘해 주시는데.”
소왕무는 ‘네 기억을 스스로 왜곡하지 마!’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다못해 일 년 전만 해도 장건은 굉목이 무섭다고 툴툴대곤 했다.
“야야, 솔직히 말해서…….”
소왕무가 장건의 왜곡된 기억을 바로잡아 주려 했으나 이미 장건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원에는 내가 할 일이 없으니까 외원으로라도 나가봐야겠다.”
라는 말을 남기면서.
“기다려! 같이 가아!”
소왕무는 헐레벌떡 장건을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내원이 분주한 만큼 외원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직접적인 진산식 행사가 외원에서 진행되는 터라 내원보다도 외관적인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곳이다. 대대적인 새 단장을 하는 셈이다.
때문에 외부에서 장인들과 일꾼을 잔뜩 불러 모았다. 그간 무너지고 망가진 탑과 전각, 연무장의 보수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상당한 재화가 소모되었음은 당연한 얘기다. 그나마 남은 돈을 바닥까지 탈탈 털어야 했기에 도감승 굉정이 졸도할 뻔했다는 얘기까지 우스갯소리로 전해지는 마당이다. 진산식을 가장 반대했던 이 중 한 명이 바로 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도 없고, 아무리 외부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캉, 캉.
쩡쩡.
외원 여기저기서 정을 쪼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리고, 온갖 석재를 나르는 인부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원에서 곧장 밖으로 나온 장건은 매의 눈을 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
소왕무는 계속해서 장건을 말려보지만 헛수고였다.
“아휴, 귀 아파. 시끄러워 죽겠네. 그냥 들어가서 자고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 밤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잖아.”
“안 돼. 내일 일은 내일 하는 거고 오늘 일은 오늘 해야지. 일이 없어서 돌아가야 되면 모를까.”
장건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계속 일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먹잇감(?)을 발견했는지 순식간에 바람처럼 소왕무의 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여기저기 횃불을 밝혀 뒀어도 워낙 빨리 사라져 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탓에 그림자까지 마구 어른거린다.
장건을 놓친 것이다.
“아, 나 미치겠네 진짜!”
소왕무는 퉁퉁 부은 얼굴로 장건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장건은 실내 연무청의 앞까지 뛰어왔다.
그곳에는 온갖 연장을 허리에 찬 장인 둘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으음…… 이렇게 해도 아닌 것 같고 저렇게 해도 아닌 것 같으니 큰일이네.”
수염이 난 장인의 말에 머리에 허름한 건을 두른 장인이 말했다.
“정가야, 그냥 대충 붙이면 안 될까?”
“이놈아, 대충 했다가 소림의 명성에 누를 끼치면 어쩔 거냐? 전 강호의 무림인들이 드나드는 곳인데 허술하면 안 되지.”
“누가 이런 걸 신경이나 쓴다더냐? 그냥 대충 보고 말지. 쯧쯧. 정가 네놈은 너무 사소한 데에 집착하는 게 병이야. 보내준다던 스님 기다리다가는 기일 내에 끝내지도 못하네. 이럴 거면 차라리 대충이라도 할 수 있는 건 하는 게 나아.”
수염 난 장인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한두 군데 작업할 게 아닌데 더는 기다릴 수 없겠어.”
“스님들도 바빠서 극락왕생하기 직전이라더라. 다들 기다리느라 똥줄이 빠진다네.”
그때 일어선 장인이 장건을 보았다. 아니, 장건이 장인을 불렀다는 표현이 맞았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어두운 곳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나 말을 거니 장인들은 조금 놀란 듯했다.
“어이, 깜짝이야. 애 떨어지겄네. 한데 뉘신가?”
장건은 천으로 친친 감은 검을 등에 맨 채로 고개를 숙여 합장했다.
“저는 소림의 속가제자입니다.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 해서요.”
“오오! 드디어 우릴 도울 사람이 왔구만.”
수염 난 장인과 건을 두른 장인 둘 다 반색했다.
어려 보인다고, 속가제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 소림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속가제자도 엄연한 무림인이다.
소림의 속가제자들이 수련 기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며 홀로 화적떼를 때려잡는다든가 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다.
어중이떠중이에게 무공 한 이삼 년 배웠다는 삼류 무인들도 동네에서는 거들먹거리며 힘 좀 쓰는 마당에, 일단 천하제일 문파 소림의 제자다 하면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정식 제자나 속가제자나 엄청난 고수라 생각하는 것이다.
“제자 분이 무공을 잘 알 테니 보내셨겠지. 와서 이것 좀 봐주시게.”
‘보내셨겠지’란 말이 약간 걸리긴 했으나 장건은 흘려듣고 넘겼다. 장건에게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장건은 장인이 가리키는 벽면을 보았다.
연무청의 외벽과 낮은 담장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무술을 하는 승려들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여기 이 부분을 보게.”
장인이 춤을 추듯 뛰고 있는 승려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한쪽 다리를 든 독립세로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앞으로 내민 상태인데 팔꿈치 부근에서부터 부서져 있었다.
“우리가 이 부상조(浮上彫)를 보수해야 하는데 팔의 위치가 애매해서 말일세. 팔을 쭉 내민 것인지 아래나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주먹을 쥐었는지 폈는지.”
수염 난 장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뛰어난 명인이라고는 말 못하겠네만 보는 눈은 있다네.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부상조는 결코 범상한 장인이 새긴 것이 아니야. 그러니 임의대로 함부로 보수할 수가 없지.”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석상이나 조각, 벽화들은 모양이 예쁘라고 대충 해 놓은 것이 아니다.
장건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중에는 이름난 장인이 직접 제작한 것도 있고, 유명한 무승이 새긴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동작을 그려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무공이 담긴 조각이나 벽화는 대대적인 증개축 작업을 하며 이미 오래 전에 내원으로 옮긴 상태였지만, 장건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장건은 팔이 부서진 승려의 자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혼자서 독무(獨舞)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함께 동작을 행하는 것 같다.
“전체적인 모습을 더 봐야 알겠는걸요?”
옆에서 건을 두른 장인이 등불을 가져다 댔다.
“어두우면 더 가까이 비춰볼까……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리고 불이 없어도 보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어요.”
장건의 말에 두 장인은 감탄했다.
“역시!”
어두운 데서도 사물을 보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두 장인은 역시나 소림의 제자는 다르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장건은 천천히 그 옆의 부상조들까지 훑어보았다. 십수 명의 승려들이 군무(群舞)를 펼치고 있는데 각각이 다른 무기와 무공들을 펼치는 듯하면서도 조화가 있다.
“으음…….”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수염 난 장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어렵겠는가?”
건을 두른 장인은 장건의 신중한 태도에 조금 위축되어 보였다.
“정가 말대로 범상한 부상조가 아니었구먼. 우리 같은 놈들이 함부로 동작을 만들어 보수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사실상 그렇게 범상하지 않은 부상조였다면 사람을 붙여 보수를 했을 테지만, 장인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적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장건이 ‘아!’ 하고 소리를 낸 후 대답했다.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구요.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뭐가 말인가?”
“우린 아직 손도 안 댔네. 어떻게 할까 고민만 하던 참이었지.”
장건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전체적으로 뭔가 안 맞는다 싶었더니 어색한 부분들이 있네요. 요기, 요기요.”
장건은 대감도를 든 승려의 주먹을 쥔 반대쪽 손, 곤봉을 들어 바닥을 내려치는 승려의 곤봉 끝,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튼 근엄한 표정의 승려를 가리켰다.
장건이 가리킨 부분을 두 장인은 등불을 바싹 대고 면밀히 살폈다.
“어라? 이거 보수한 지 얼마 안 된 흔적인데?”
“그러게. 여기 소협이 가리킨 부분들과 주변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 새로 발수제를 바른 흔적도 있고.”
장건이 물었다.
“발수제요?”
“석조물이 비바람에 변색되거나 침식되지 않도록 보수작업을 하고 바르는 걸세. 색을 보아하니 한 몇 년 되지 않은 듯하구먼.”
수염 난 장인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소림의 전각들과 구조물들이 자꾸만 손상되어 장인들을 부른 적이 있다지. 그때 보수했던 흔적인가 보이.”
건을 두른 장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망할 놈들. 동종업자로서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네. 무슨 보수를 이따위로 해놔?”
수염 난 장인이 건을 두른 장인을 힐난의 눈초리로 흘겨본 후 장건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떻게 어색하다는 건가?”
장건은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여기 손은 손가락을 펴서 엄지를 손바닥에 댄 형태여야 하구요, 방향도 더 아래쪽이어야 해요. 곤봉은 길이가 좀 더 길어야 하는데 끝이 반 치 정도 좌측으로 있어야 하구요. 그리고 여기…….”
장건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것은 모두가 군무를 추는데 유독 가운데에서 좌정한 채 시선을 내린 승려상이었다.
“합장을 하고 있는 손이 어색해요. 한 손은 반장을 한 채 다른 손은 하늘로 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응? 여긴 보수한 흔적이 없는데?”
“저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요, 그래야 처음에 말하신 그 팔이 이렇게 앞으로 내미는 형태가 될 수 있어요.”
장건이 검결지를 쥐어 내보였다.
“저도 예전이라면 잘 몰랐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보이네요.”
두 장인은 잠시 고민했다.
“으흠.”
“지난번 보수했던 데까지 다 뜯어내고 다시 만들어 붙이려면 보통 작업이 아니겠는데?”
“할 수 없지. 소림에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니 소협을 보내신 게 아니겠는가.”
“에그그. 기일 안에 끝낼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장건은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 때문에 작업이 늦어지는 건가요?”
“아닐세. 오히려 소협 덕분에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게지. 심려하지 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울게요.”
“아닐세. 이건 우리 일이니 우리가 해야지. 그리고 이게 우습게 보여도 초심자가 하기엔 제법 까다로운 일이라네.”
수염 난 장인이 껄껄 웃었다.
“아, 소협은 다음에 또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다니요?”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이런 얘기를 하긴 좀 뭐한데…….”
“말씀해 보세요.”
“어려운 건 아니고, 저기 추보당(錘譜堂) 앞에서 벽화를 그리는 놈이 우리 친구인데, 거긴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그놈도 어지간히 속을 썩는 모양이야. 원래는 봐주는 스님이 모레나 되어야 겨우 시간이 난다 하시는데 워낙 시일이 촉박해서 당장이라도 작업을 해야 하거든. 온 김에 거길 먼저 봐주면 안 될까?”
장건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 그림은 잘 모르는데요.”
“그림이나 조각이나 다를 게 뭐 있어. 그림이야 그놈이 그릴 거고, 소협은 어떻게 하라고 지금처럼 조언을 해 주면 된다네.”
“그 정도면 제가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지금 빨리 가볼게요.”
장건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일을 빼앗아 갈까 봐 안달이 나 경공까지 사용해서 달려갔다.
스-윽.
한 줄기 미풍도 없이 장건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왕무도 미처 좇지 못한 장건의 모습을 평범한 일반인들이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완전히 말 그대로 눈앞에서 없어진 것이다.
“허!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조금 전까지 소협이 여기 서 있었던 게 맞지?”
“우리가 일을 똑바로 하라고 부처님께서 소동을 보내신 건 아닌지 모르겠어.”
“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기야 바쁘니까 저렇게 빨리 움직이고 다녀야 하겠지만서도.”
두 장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연장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왠지 모르게 정말로 부처님이 지켜보는 것 같아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런데 말야.”
건을 두른 장인이 잠깐 동안 벽을 보더니 말을 꺼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불경스럽다 혼이 날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아까 그 소협이 말한 대로 이 부상조를 다 고치면 말이지, 왠지 모르게 좀 이상하지 않을까?”
수염 난 장인이 보수 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더니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나도 왠지 모르게 좀 그렇다는 생각은 들었네. 하지만 다 바꾸는 것도 아니고 조금 고치는 거잖아. 그리고 그게 맞는 거라 하고.”
건을 두른 장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누가 뭐랬나?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느낌이.”
“쓰잘머리 없는 얘기는 부정 타니까 꺼내지도 말게. 아까 귀신처럼 딱딱 짚어내는 거 못 봤나? 알아도 소협이 우리보다야 더 잘 알고 하는 얘기겠지.”
“그, 그렇겠지? 안 그랬으면 소림에서 어린 소협을 보낼 리가 없는 거겠지?”
건을 두른 장인은 등불을 옆에 걸고 망치를 집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가 뭔 힘이 있어.”
“아무렴. 작업이나 시일 내에 끝내도록 최선을 다하세나!”
땅!
두 장인의 힘찬 결의처럼 청명한 망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장건은 수염 난 장인이 가르쳐 준 곳으로 가서 벽화를 보수하는 화공을 만났다.
지옥도나 수라도 같은 불교의 그림이 아니라 역시나 무술 하는 승려를 그린 벽화였다.
안타깝게도 이 벽화는 대강의 형체만을 제외하곤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아예 새로 덧그리는 보수 작업이었다. 전각의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벽화가 일부만 남았으니 화공이 애를 태울 만했다.
장건은 흔적들을 단서로 전체적인 윤곽을 추측해 동작과 자세를 알려 주었다. 장건의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인지만 알면 동작을 유추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화공은 그 자리에서 지필묵을 들어 장건의 동작을 담아 두었다. 중간 중간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으나 어쨌든 기본적인 밑그림은 다 그려 두었다.
그렇게 벽화 보수 작업도 장건의 손을 타며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일일이 그들을 돌보기에 소림의 승려들은 너무나 바빴다.
일부는 장경각에 탁본이나 모작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으나, 장경각주 굉봉 역시 바쁜 탓에 그것들을 찾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 몇 년간 소림의 많은 구조물들이 비바람에 파손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진산식 준비만도 벅찬데 그것들을 진산식 전까지 복구하고자 하니 모두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 장건의 등장은 하나의 희소식이었다.
기일은 촉박한데 몇 되지도 않는 담당 승려들을 기다려야 했던 장인들에게는 장건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담당 승려라고 해도 수백이 넘는 작품들의 본래 모습들을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상 장인들이 어렵사리 담당 승려를 만나도 명확한 작업 지시를 받아내기는 어려웠다.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이러저러하게 하세요.’하는 것이 다였다.
그에 비하면 장건은 도착하는 순간 척! 하고 문제점을 알아낸다.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작업의 윤곽을 잡아내는 데에 일각도 채 걸리지 않는다.
장건은 순식간에 인기인이 되어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장인들에게 있어서는 담당 승려나 속가인 장건이나 어차피 둘 다 소림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연히 소림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장건이 혼자서 일을 찾아다니다가 만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장건의 소식은 한참 만에야 원호의 귀에 들어갔다.
“뭐야?”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안에서 작업을 지시하다 소식을 들은 원호는 귀를 의심했다.
“건이가 뭘 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는 승려가 다시 고했다.
“외원에서 벽화와 부조물들의 보수 작업을 한답니다.”
“내가 분명 건이한테는 일 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번엔 대체 누가 그런 거야! 소왕무, 그 녀석은 뭘 했고!”
승려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보고를 했어야지!”
“사백께서 워낙 바쁘시다고 말을 전하는 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끄응!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 녀석일세. 애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부지런한 거야?”
원호는 머리를 짚었다.
승려가 변명하듯 몇 마디를 보탰다.
“덕분에 외원에서의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합니다. 그쪽의 인원이 남아서 오히려 다른 데로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고?”
“별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건이가 직접 보수를 하는 게 아니라 장인들이 건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정도랍니다.”
장건이라면 한 번 본 무공을 바로 소화해낼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 그런 아이라면 벽화 등의 보수에 도움이 되리라는 건 확실했다.
“흐으음, 직접 하는 게 아니라면…….”
원호는 조금 안심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잠깐이라도 짬이 나야 보러 가든가 하지, 원…….”
승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원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버려 둬라. 옆에서 조언만 해 주는 거라면 딱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차라리 그거라도 붙들고 있으면 다른 데 피해를 주지는 않을 테니까. 덕분에 일손이 늘었으면 그것도 다행이고.”
원호는 좋게 좋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우군일 때 가장 든든한 인재가 있는 반면에 장건은 우군일 때 더욱 무서운 인재였다.
“이 녀석, 이번에도 또 사고를 치면 아예 계율원의 옥에 가둬버릴 테다. 아니면 정말로 화산에 보내버리든가 할 거야!”
그렇게 위안 아닌 위안을 삼으며 원호는 애써 장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
☆ ☆ ☆
원호의 불안은 반쯤 들어맞았다.
장건의 일처리 능력은 이미 겪어본 사람들조차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백 점의 벽화와 조각을 모두 돌아보는 데에 겨우 이틀이 걸렸을 뿐이다. 되레 뒤쫓아 다니던 소왕무가 장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하루 종일 외원을 헤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후아, 후아!”
소왕무가 마지막 장인을 만나 지시를 끝낸 장건을 쫓아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장건에게 조언을 들은 장인은 작업을 시작한 후였다.
장건은 소왕무를 보고 허탈하게 말했다.
“일이 다 끝나 버렸어.”
“헉헉, 여기가 마지막이었어?”
“어. 이제 끝났어.”
“헉헉, 나 죽겠다. 저기에 가서 좀 쉬자.”
소왕무는 비라도 맞은 듯 땀에 젖은 채로 나무 그늘 밑에 들어가 벌러덩 누워 버렸다.
장건도 소왕무의 곁에 가 섰다.
소왕무가 장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그 많은 그림들을 언제 다 기억하고 있었어?”
소왕무는 묻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다. 네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아는데 이렇게 묻는 내가 멍청한 거지.”
장건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나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었는데?”
“응?”
“응.”
“…….”
소왕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벌떡 일어났다.
“외우고 있던 게 아니라고오오!”
“당연하지. 내가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겠어? 평소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보지도 않았는걸.”
소왕무는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한 거야!”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흠칫.
소왕무는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다, 당연해?”
장건이 당연하다고 하면 분명 평범하지 않다.
뭔가 대사고의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듯했다.
소왕무는 ‘침착하자, 침착하자.’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장인들에게 지시한 게 원래 그 그림을 기억해서가 아니고, 네가 네 마음대로 한 거라 이거지?”
장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내 마음대로 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모습인 게 당연하니까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린 거야.”
“기억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당연한지 아닌지 알아!”
장건이 귀찮은 투로 대답했다.
“내가 며칠 전에 네가 보여준 검법 어디어디 잘못되었다고 한 적 있지?”
소왕무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거랑 똑같아. 가장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형태의 몸동작이 되어야 내공이 흐르거든.”
그건 너나 그렇지!
넌 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거냐!
라는 말이 목까지 치민 소왕무였다.
소왕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해번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장건이 무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병기에 함부로 손을 대어 큰 파장이 생겼던 사건이다.
물론 그때는 욕심에 눈이 먼 무인들이 자신의 병기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똑같이 해달라고 한 탓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나 돌아가시겠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은 그때와 다르긴 하다.
벽화와 조각상이 조금 이상하다 해도 누가 그것을 눈여겨보겠는가.
장건조차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건 다 내원에 있지, 외원은 크게 중요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일이 빨리 끝나서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장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실수했어?”
소왕무는 귀찮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이렇든 저렇든 결과가 좋으니 꼭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장인들은 모두 무사히 작업에 돌입했고, 다들 좋아하니 그걸로 된 건지도 모른다. 장건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장인들은 작업도 못하고 담당 승려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쩔쩔매야 했을 테니까.
“알았으니까 너 어디 가서 그 말 하지 말고, 당분간은 좀 쉬자.”
“왜 얘기하면 안 돼?”
“그냥 안 돼. 날 믿어. 이건 우리 둘만 알고 끝내야 하는 일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모를 거야.”
“난 잘 모르겠어.”
“몰라도 돼.”
소왕무는 장건을 뒤쫓아 다니느라 다리가 다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왕무와 달리 장건은 또다시 할 일이 없어져 심심한 상태였다. 아니, 심심하다기보다는 일종의 불안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왕무야, 나 저기 좀 가봐야겠어.”
“또 뭘 하게!”
소왕무가 장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여러 명의 장정들이 보수를 위해 해체한 석탑을 다시 원상태로 조립하는 중이다. 두터운 짚을 여러 겹 얹고 끈으로 석판을 들어 올려 탑을 쌓는다.
“탑은 내공이나 검식(劍式)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아!”
소왕무의 말에 장건은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탑들하고 비교해 보면 모서리의 위치랑 각이 좀 안 맞는 것 같아.”
장건이 막 달려가려다가 또다시 멈칫했다.
“저기 연등을 매달려고 묶은 매듭도 좀 이상하네?”
“헉!”
“어어? 저쪽 동상을 놓은 위치도 이상해.”
“좀 내버려둬! 넌 힘도 안 드냐?”
소왕무는 자기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평소에 절약하는 방법을 배우면 별로 힘들지 않아. 괜히 무공을 배웠겠어?”
“…….”
장건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자세히 보면 할 일이 이렇게 많구나. 할 일이 없다고 속상해할 필요가 없었는걸.”
“난 할 일이 많아서 속상하다! 야, 건아. 슬슬 굉목 대사님을 찾아가 뵐 때도 되지 않았냐?”
“아냐. 노사님은 내가 일이 많은데도 찾아가면 화내실 거야. 다 끝내고 찾아가 뵈면 돼.”
소왕무가 말리기도 전에 장건은 벌써 탑을 쌓는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말릴 기운도 없었다.
“으으…… 이 부지런한 놈. 넌 진짜 어디 가서 굶어죽진 않겠다. 나도 몰라!”
소왕무는 벌러덩 누웠다가 그대로 다시 일어났다.
“아이, 썅.”
생각해 보니 한가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건이 녀석 아버지가 진상의 운성방주잖아. 건이도 이제 금방 소림을 나가게 되는데, 그러면 저 녀석도 상단에서 일하게 될 테고…… 같은 상인인데 건이 녀석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난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 상단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 으아아! 나 미쳐!”
소왕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장건을 뒤따랐다.
“야, 임마! 같이 가!”
다리는 천근만근이었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장건처럼 부지런해져야만 했다.
장건을 쫓아가면서 소왕무는 심각하게 갈등했다.
나중에 장건에게 평소에 힘이 들지 않는 그런 무공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장건처럼 이상하게 걸어야 하고, 이상한 동작으로 무공을 펼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남들 보기엔 전혀 멋지지 않고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장건을 보면 아름다운 미녀들 틈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런 미녀 두셋씩 거느리고 살면 겉보기에 좀 이상하다고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