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12
제 7 장 무섭다!
오두막의 밤.
달이 어스름히 산중을 비추고 산새들도 잠이 들어 고요하다.
호롱불을 켜놓은 방 안도 묵묵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장건은 살짝 눈치를 보았다.
“왜들 그래요?”
“흥.”
“흥!”
“흥?”
연속으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난다.
장건의 앞에 앉은 제갈영과 백리연, 양소은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멀뚱히 서 있던 양소은의 호위무사 상달은 장건을 보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이러더라고요. 저녁 할까요, 라고 물어도 대답도 없고……. 나만 괜히 같이 굶었다니까요?”
예전의 장건이었다면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건은 조금 이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장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나는 건 좀 괜찮아요?”
“흥흥!”
대답은 없고, 들려오는 건 코웃음뿐이다.
장건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삼화열양장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만 내 말을 들어줄래요?”
세 여인의 눈이 장건을 향했다.
가능한 한 침착하려 했지만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눈에는 불신이 조금 더 엿보였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상달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럼 전 나가 있을게요.”
상달이 나가거나 말거나, 세 여인의 눈은 여전히 장건에게 고정되어 있다.
아직 채 뿔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백리연이 물었다.
“반야원앙일체공을 다 익혔다는 뜻이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일단은 상태를 확인해보려고 해요.”
흥흥거리고 쳐다도 보지 않던 세 여인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장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까닭이다.
제갈영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
“그럼 내가 먼저 할 거야! 오라버니가 뭘 할지 몰라도, 영이는 오라버니를 믿으니까.”
백리연과 양소은의 눈에 ‘아차’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나 백리연은 장건에게 믿지 못해서 맡길 수 없다는 둥의 얘기를 한 탓에 후회가 더했다.
“제갈 동생, 그러면 안 되지. 순서를 함부로 정하지 말아줄래요?”
“본처니까 본처가 먼저지!”
양소은이 생글생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까도 위험해서 내가 먼저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먼저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이곳은 사방이 뚫린 폭포도 아니고 좁은 방 안이었다. 둘만 내버려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제갈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험하긴 개뿔이.”
“제갈 동생!”
제갈영은 급히 입을 막았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는 법이었다.
백리연이 제안했다.
“뽑기라도 할까요?”
“공정하게 그렇게 해.”
“그딴 거, 본처에게는 하나도 공정하지 않잖앗!”
양소은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이도 저도 싫으면 장 소협에게 결정해달라고 하자.”
세 여인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은 장건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셋 다 그냥 같이 있어도 돼요.”
세 여인이 붉어진 얼굴로 동시에 외쳤다.
“난 저 언니들하고 오라버니를 나누기 싫어어!”
“실망했어요. 한 방에서 셋이라니…….”
“장 소협! 보자 보자 하니까 욕심이 너무 지나치잖아!”
장건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하하하…….”
갑작스레 치솟은 경쟁심 때문인지 너무 앞서 나가 있는 그녀들이었다.
☆ ☆ ☆
셋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왜 별안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정작 장건은 그냥 그런 그녀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갈영과 백리연이 양소은을 노려보았다.
최대한 간편한 복장으로 있어달라는 말에 양소은은 아예 웃통을 훌렁 벗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 벗은 건 아니다. 가슴과 배만 살짝 가리고 뒷목과 등 두 군데로 이은 끈에 매듭을 지은 내의를 입었다. 어깨와 등허리, 옆구리가 훤히 드러난 두두(?兜)라는 속옷이다.
단단한 근육과 자잘한 흉터에 비해 속옷에는 꽃 자수가 놓여 있어서 여자는 여자라고 새삼 느끼게 한다.
평소라면 워낙 소탈한 양소은이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경쟁이 시작된 마당이다.
백리연도 벗고 제갈영도 벗으려 했다. 장건이 말리지 않았으면 이상한 광경이 될 뻔했다.
어쨌든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서 겨우 잠잠해진 지금이다.
장건이 말했다.
“가능한 한 말을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세삼하게 봐야 하거든요.”
뭘?
세 여인의 눈에 의아함이 스쳐갔다.
장건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설명했다.
“어디를 다쳤는지 눈으로 볼 거거든요.”
눈으로?
어딜?
어떻게?
“단전을 열어주세요. 그러면 더 잘 보여서요.”
뭐가?
설명을 안 하는 건 아닌데 별로 의미가 없는 설명이었다.
일단 시키는 대로 세 여인은 모두 단전을 열었다. 단전에서부터 내공이 흘러나와 혈도를 타고 천천히 돈다.
양소은을 제외하고는 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명문가의 여식들이다 보니 일반 무인에 비해서도 내공은 적지 않다.
점혈된 혈도 때문에 제대로 운기가 되지 않아도, 단전은 열려 있어서 기를 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기가 순환한다.
장건은 심호흡을 하고 안법을 썼다.
장건이 보려는 것은 바로 위기(衛氣)였다.
위기는 여러 의미에서 몸을 보호하는 기운이다. 몸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도는 위기는 몸이 상하고 기가 허해지면 제대로 돌지 않는다. 몸이 차가워지면 따뜻한 기운을 공급하고 더워지면 서늘한 기운을 공급하는데, 열이 푹푹 나고 있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 점에 착안했다.
그동안은 위기의 크기만 보았지만, 위기가 흐르는 경로를 보면 다친 부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안법을 쓴 장건의 눈에 잿빛 덩어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공을 끌어올리면 위기는 더욱 색이 짙어지고 커진다.
위기의 덩어리들은 내공을 끌어올린 세 여인의 몸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제갈영이 가장 작아서 애기 주먹만 하고, 양소은은 색도 짙고 모양도 뚜렷하며 크기도 어른 남자의 주먹만 하다. 백리연은 그 중간쯤이다. 백리연의 위기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조금 더 색이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그동안 무공이 발전한 모양이다.
장건은 위기가 움직이는 경로를 찬찬히 눈으로 좇았다.
‘내공을 특정 부위에 집중하지 않는 한, 위기는 이십팔맥과 상응하여 이십팔숙(二十八宿)을 돈다.’
무인이 내공을 자의적으로 유통시킬 경우 위기의 흐름이 달라지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흐른다.
이십팔맥의 길이는 16장 2척으로, 그것을 하루 열두 시진에 50번 도니 약 이 다경에 16장을 움직이는 셈이다. 상당한 속도다.
장건은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장건이 보아야 할 것은 변화다. 그것이 작을지 클지는 아직 모른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일다경의 시간이 지났다.
‘음?’
장건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는 낮에 양의 기운이 강한 양분(陽分)의 맥을 돌고, 밤에 음분(陰分)을 돌잖아.’
지금은 밤중이다. 위기가 음맥을 돌아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세 여인의 몸을 돌고 있는 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양분의 맥에서 활발하게 돌다가 음맥 쪽으로 가려 한다. 그러다가 멈칫거리며 다시 양맥으로 돌아간다.
‘이상한데? 지금은 밤인데 왜 음맥을 돌지 않지?’
양맥에서 음맥으로 위기가 넘어가는 방향이 있다. 족소양과 족양명을 통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발로 내려가 발가락을 타고 발바닥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복사뼈 밑으로 나와 비로소 음맥을 흘러 최종적으로 눈을 통해 양맥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음맥으로 향하는 길을 가다 말고 멈추어버린다. 길이 막혔으니 자연히 다른 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음맥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가다 말고 갑자기 다시 양맥의 혈도를 타고 가버린다.
오황의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스럽지 않았다.
‘삼화열양장이라는 게 사람을 태워 죽일 수 있다니까 열양(熱陽)의 기운이 강한 거겠지. 그럼 음의 기운을 보충해야 증세가 완화될 텐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몸에서 열이 나는 거고.’
장건은 감탄했다.
무학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주먹질 발길질하는 데 무슨 상관이냐는 건 하수나 하는 얘기다. 무학은 권각법을 넘어서서 만물의 이치에까지 깨달음이 도달해 있다. 사람도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그 이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장건에게 무학은 그저 생활의 편의에 관계된 일일 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의술에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가 양맥에서 음맥으로 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부분을 우선적으로 뚫어야 한다. 그래야 열양의 기운이 안정될 것이다.
‘어떤 혈일까?’
장건은 예전에 홍오가 준 경락입문서의 내용을 몇 번이나 되새겨보았다.
열심히 외워두긴 했지만 사실 이제까지는 그 내용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면 점혈을 당해도 그냥 뚫어 버릴 수 있었고, 적을 만나도 눈에 보이는 위기를 때려 제압하면 되는지라 점혈을 할 일도 없었다.
이제야 묵혀둔 지식을 써먹을 때가 되었다. 기본을 한참 뛰어넘고 있다가 다시 기본부터 시작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장건에게 꼭 필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장건은 자신의 지식이 부족한 것을 탓하면서도 하나하나 알아가고 깨쳐가는 게 즐거웠다.
‘양맥에서 음맥으로 가는 길은 수 갈래잖아. 혈도도 수백 개고. 그걸 다 짚을 순 없어. 내공을 흘려 넣는 방법도 모르니까. 휴.’
장건은 포기하지 않고 범위를 좁혀갔다.
‘경맥은 세로 방향의 큰 줄기고 낙맥은 가로 방향의 잔가지라고 했으니까 아마 낙맥은 아닐 거야.’
세로 방향으로 관통하는 맥 중에 삼화열양장 때문에 다치거나 막힌 혈이 있을 거라는 데까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맥은 다름 아닌 임맥과 독맥이다. 임독양맥은 사람의 몸을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다. 다른 경맥들이 다치고 상하더라도 그 근원인 임독맥이 멀쩡하다면 부속된 경맥들은 혼자서도 회복할 수 있다.
뿌리가 멀쩡하면 부러진 가지에도 싹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열기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으니 뿌리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열이 날 정도라면 임독맥이 상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데…….’
음맥에 속하는 임맥은 현재 세 여인의 위기가 돌지 않는다. 임맥 부근의 혈을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이 안 된다.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생각이 떠오른 장건이 말했다.
“독맥으로 운기를 해볼래요?”
장건이 한참이나 말이 없어 심심하던 차라 세 여인은 바로 그 말에 따랐다. 장건은 가부좌를 튼 세 여인의 뒤로 돌아갔다. 독맥은 등 쪽으로 혈도가 이어져 있다.
독맥을 따라 내공을 주천시키자 위기의 덩어리가 독맥에 연관된 경맥을 흐를 때 한층 색이 강해지며 커진다.
탁.
어느 순간 위기의 덩어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 여인은 인상을 썼다. 주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장건에게 말하고 싶어도 운기 중이라 말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장건은 위기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위기가 독맥 위를 흐르지 않고 다른 경락을 타고 흐르다가 잠깐 동안 멈칫거리더니 독맥의 한 부분으로 급히 이동한다. 그리고 한 부분에서 연신 흔들린다.
타탁.
실제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장건은 어딘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장건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대로였어!”
위기는 기본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기운이라 몸이 약해지면 위기도 약해진다. 하지만 반대로 몸이 약해졌을 때 몸을 지키는 작용도 한다.
혈이 막혀 있거나 상해 있으니 그 혈 부근에는 기운이 약하다. 내공의 기운을 받은 위기가 상한 혈 부위에 기운을 공급하기 위해 잠시 동안 본래 경로를 이탈하여 이동하는 것이다.
셋 모두가 같은 현상을 보였다. 같은 무공에 당했으니 같은 혈을 다친 게 분명했다.
“여기다!”
목 뒤쪽에서 반 뼘 정도 아래, 날갯죽지의 사이쯤인 혈도.
장건은 곧 그 혈의 명칭을 떠올려냈다.
도도혈이다.
장건은 호흡을 고르고 손을 내밀었다.
몸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내공을 밀어 넣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어느 혈도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다면 그 혈도에 바로 내공을 넣는 것은 가능하다.
‘혈도가 상해 있다면 혈도에 약한 자극을 주어 생기를 찾게 하고, 막혀 있다면 뚫으면 돼. 아마 지금 상태로 보면 막혀 있는 게 맞을 거야.’
혈도가 어떤 상태이든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상했다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장건은 기 세 가닥을 손바닥으로 끌어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기의 가닥을 움직여 양소은과 제갈영, 백리연의 등 뒤 도도혈을 건드렸다.
‘흐음?’
생각보다 해혈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도도혈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커다란 돌로 단단히 틀어막은 듯하다.
‘이러면 좀 곤란한데.’
장건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알 수 없었으나 점혈을 한 이가 오황이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무인이 작정하고 점혈을 하면 해혈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적은 내공으로 점혈을 했대도 내공의 순수함과 밀도차가 커서 훨씬 단단하다.
‘이거…… 어떻게 깨뜨리기도 어렵겠는걸?’
장건은 금강권의 나선형 경력으로 막힌 혈을 뚫어볼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직 몸 밖으로 뽑아낸 기의 가닥을 섬세하게 조종하는 것은 어려웠다. 가볍게 점혈을 하는 정도는 가능해도 그 기의 가닥에 금강권의 경력을 싣는 건 아직이다.
직접 손을 대고 장심이나 손가락으로 발출하는 것이 안전하다.
장건은 그래도 내공이 깊은 양소은에게 먼저 하려다가 손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등이 훤히 드러난 내의를 걸치고 있어서 맨살에 손을 대려니 민망했다.
어쩔 수 없이 백리연의 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잠깐 손을 댈게요. 이제 해혈할 거예요.”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말이다. 해혈을 하려면 손을 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방금까지는 손을 안 댄 거였어? 분명히 감촉이 있었는데?’
등 뒤에 와 닿은 느낌은 그럼 손이 아니고 뭐였을까?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어서 백리연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장건이 신중하게 기를 끌어올렸다.
금강권의 경력을 최소로 이끌어 손바닥으로 보냈다. 근육이 뒤틀리며 경력이 손바닥을 통해 검지 끝으로 이동한다.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라 극소 부위인 혈도의 한 점에 쏘아내야 하니 신중에 또 신중을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최소로 힘을 모았다 해도 금강권의 나선형 경력은 파괴력이 작지 않다.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처음 시전할 때만 해도 온몸의 근육이 다 뒤틀어졌었다.
손가락 끝에 금강권의 경력이 도달하기가 무섭게 일이 벌어졌다.
투툭.
백리연의 하늘거리는 반 도포형의 상의가 장건의 손가락 끝에 감겨 말려들기 시작했다.
쫘아악-!
아차 하고 장건이 힘을 거두기도 전에 백리연의 옷이 갈가리 찢어졌다.
“꺄악!”
백리연이 앞을 감싸며 가부좌를 풀고 몸을 틀었다. 뒤쪽 등판의 옷이 완전히 찢겨나가 너덜거렸다.
“안 다쳤어요?”
백리연도 장건만큼이나 당황한 얼굴로 장건을 보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아…….”
장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남의 몸이지, 자신의 몸이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누군가의 몸에 시험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대팔이도 화를 냈었다.
‘이 멍청이, 바보. 난 정말 바보였어.’
지금도 자칫 백리연이 상처를 입을 뻔했다.
장건은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백리연은 장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백리연은 다시 등을 돌리고 의연하게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자, 다시 해봐요.”
“예?”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요. 괜찮으니까 다시 해보라구요.”
장건의 두 눈에 투명하고 하얀 백리연의 등이 보였다.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고 매끈한 등이다. 하지만 그 하얀 등 가운데에는 벌겋게 긁힌 흔적이 소용돌이의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방금 장건이 낸 상처였다.
상처를 보니 장건은 더 할 자신이 없어졌다. 한숨을 내쉰 장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안 되겠어요.”
“남자가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뭘 그래요?”
양소은과 제갈영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걱정 없어.”
“두 번째는 잘할 거야.”
장건이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해혈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무작정 시도한 내 잘못이에요. 확실한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는 안 되겠어요.”
확고한 장건의 말에 제갈영과 양소은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백리연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날 때린 적도 있잖아요. 전 그때 죽고 싶을 정도였어요. 지금 하려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때만큼 힘들거나 아프진 않을 거예요.”
뜻밖에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버린 백리연의 말에 장건은 물론이고 제갈영과 양소은도 깜짝 놀랐다.
장건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백리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심하게 점혈된 경우에는 해혈할 때 몸이 튕길 정도의 충격을 받는 법이에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계속해도 된다구요, 내 말은.”
그 말은 오황이 ‘점혈’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기도 했으나 장건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자, 어서요.”
백리연의 성화에 장건은 어쩔 수 없이 백리연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다시 금강권의 경력을 끌어낼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맨살도 정말 부드럽구나.’
백리연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을 불로 지지는 듯하다. 이런 고통을 생각하면 빨리 막힌 도도혈을 뚫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삼화열양장이 완전히 해소가 될까?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장건은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혈도를 막고 있는 오황 할아버지의 내공을 처리할 수 있으면…….’
꼬르륵.
눈치 없이 배에서 소리가 났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그러고 보니까 저녁도 걸렀구나.’
밥을 굶는 건 장건에게 생사가 달린 대사건이다. 처음 굉목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도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서였다.
‘밥…….’
윤기가 잘잘 흐르는 하얀 쌀밥이 떠오른 그때였다.
장심을 통해 신선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신선한 기운은 장건의 몸속으로 쭉 빨려오더니 물에 물을 탄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신을 팔고 있었으면 몰랐을 만큼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미약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끝났다.
‘어? 뭐지?’
변화를 알아챈 건 장건뿐만이 아니었다.
백리연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건을 돌아보았다.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네?”
“뭐가 빨려드는 듯하더니만 막힌 혈도가 갑자기 풀렸어요. 이제 독맥으로 주천이 돼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백리연의 위기가 음맥으로 돌고 있었다!
백리연이 뜨거운 입김을 한 번 크게 불어냈다.
“열기가 한결 가셨어요. 확실하게 느껴져요.”
장건이 기의 가닥을 뻗어 확인해보니 분명히 백리연의 도도혈이 뚫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장건도 자신이 뭘 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 가능한 건 한 가지뿐이었다.
배고프다고 생각한 순간이었으니까……
“……먹었나?”
☆ ☆ ☆
신명성통을 이루면서 장건의 기를 다루는 경지는 한층 높아졌다.
취기(取氣), 혹은 흡기(吸氣)에도 능해진 것이다. 전 같으면 백리연의 기까지 한꺼번에 딸려왔을 텐데, 이제는 필요한 기만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양이 적기도 했지만 대자연의 기와 상통하는 오황의 내공은 무척이나 순수했다. 다소 이질적인 백리연의 내공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만 흡수해버린 것이다.
곧 제갈영에 이어 양소은의 도도혈을 가로막고 있던 오황의 기를 훌쩍 흡수해버린 장건이었다. 수많은 못 중에서 박힌 못만 딱 골라 뽑아내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세 여인은 기가 막혀서 한참이나 장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건이 기를 흡수해서 ‘먹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별다른 통증이나 충격도 없이 오황의 점혈을 풀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거 봐요. 할 수 있잖아요.”
“역시 우리 서방님이 해낼 줄 알았어.”
엉겁결에 한 행동이라 장건은 칭찬받기조차 부끄러웠다.
“좀 나아졌어요?”
“훨씬요.”
위기가 음맥을 돌고 있으니 음의 기운이 보충된다. 당연히 양기가 주춤해졌다.
일단 하나를 해결했지만 세 여인의 상태가 완연히 좋아진 건 아니었다.
오황이 명문혈과 요양관혈을 자극시켜서 양기가 활발하게 생성되고 있었다. 그 부분의 혈도를 임의로 막아서 효과를 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몸에 무리를 주는 방법이다.
“그동안 독맥이 막혀 있어서 임맥이 약해진 것 같아요. 차라리 음맥에 해당하는 임맥의 혈도를 자극하면 열기가 더 가라앉을 거예요. 어떻게 생각해요?”
혈도를 곧게 누르면 혈도가 막히지만, 살짝 자극을 주면 주는 만큼 더 활발해진다.
“그러면 되겠…….”
말을 하다 말고 백리연이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임맥이면…….”
제갈영도 양소은도 곧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갈영이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내 서방님인걸.”
양소은은 조금 더듬거렸다.
“나, 나는 그만한 준비는 안 되었지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렇긴 하지만…… 자꾸 땀이 나서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하겠어…….”
장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들 그래요?”
백리연이 빨갛게 홍조가 물든 얼굴로 대답 대신 장건에게 되물었다.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다짐을 받아야겠어요.”
“무슨 다짐요?”
백리연이 먼저 제갈영과 양소은을 보고 물었다.
“다들 각오는 했죠?”
제갈영과 양소은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백리연이 장건을 보고 말했다.
“두 가지 다짐요. 일단, 책임은 확실하게 질 거죠?”
“그야 당연하죠.”
장건은 ‘당연히’ 상세를 좋아지게 할 수 있다는 책임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세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백리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가 하나씩 접었다.
“하나 더. 이게 가장 중요해요.”
장건이 알았다는 듯 먼저 대답했다.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침을 놓거나 추궁과혈을 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삼화열양장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혈도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건 기본이지만, 그게 아니라 장기가 상한 거라면…….”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백리연이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누가 가장 먼저죠?”
제갈영과 양소은도 귀를 쫑긋 세웠다. 가까이 다가와 장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셋의 간절함이 장건을 긴장시켰다.
그깟 순서가 뭐 그리 대단한지 모르고 있는 장건이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장건의 말을 제갈영이 끊었다.
“중요해! 영이가 당연히 본처니까 제일 먼저가 되어야 하잖아!”
양소은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할 수 없지. 나이순으로 하자.”
백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난 장 소협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 첫 사람이 본처가 될 거고요.”
장건이 왜들 또 이럴까 생각하며 물었다.
“임맥을 자극해서 열기를 누그러뜨린다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석이 돼요?”
세 여인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어, 음…… 그러니까.”
“거, 거기가 말로 하기는 좀…….”
양소은이 답답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임맥의 혈도를 잘 생각해봐, 이 바보야!”
“그게 왜요?”
“나한테 존댓말 쓰지 말라니까!”
양소은이 쾅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벽을 쳤다.
엉성하게 만든 집이라 대들보가 흔들렸다.
장건이 찔끔하며 임맥의 혈도를 되뇌어 보았다. 임맥은 사람의 정면 한가운데를 흐르는 중요 혈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 쪽부터 아래턱의 승장, 목의 염천, 목 아래 천돌…….”
줄줄이 임맥의 혈도를 읊조리던 장건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배꼽 아래로 이어지는 관원, 중극, 곡골……
모두가 음부 쪽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음혈(會陰穴)이 있었다.
회음혈은 성기와 항문의 사이에 위치한 혈도였다. 제아무리 장건이라도 그것만큼은 부끄럽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때가 떠올라 눈앞에 나신이 어른거리기까지 했다.
“임맥을 자극…….”
그게 이제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장건은 자기의 얼굴이 빨개진 것도 모르고 후다닥 일어섰다.
“으아앗! 미안해요!”
그 순간!
덥석.
양소은이 장건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붙들리지 않는 장건이 양소은에게 잡혔다!
양소은은 거의 협박조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어딜 가? 각오했다니까. 그게 빈말인 줄 알았어?”
“아하하하…… 제 말은 그게 아니구……요.”
금나수법인 용조수까지 사용해 양소은의 손을 뿌리친 장건은 급하게 고개까지 돌려야 했다.
오싹하게 예리한 것이 장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썩!
바로 코앞으로 시퍼런 날을 번뜩이는 장검이 길게 가로질러 벽에 박혀 있었다.
등허리에 소름이 쭉 돋았다.
양소은이 팔을 잡을 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면 날카로운 검날이 왼쪽 뺨으로 들어가 오른쪽 뺨으로 나올 뻔했다.
“아하하하…….”
장난이 아니다.
백리연이 벽에 장검을 꽂아 넣은 채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책임진다면서요?”
“그 책임이라는 게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이런 것쯤 가볍게 피할 수 있잖아요? 그냥 장난이에요, 장난.”
백리연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장건이 보기엔 절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장난도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장건이 다리를 움직여 달아나려 하는데 이미 제갈영이 바지를 붙들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야? 왜 피하지 못하는 거지?’
기가 제대로 움직여 보법이나 신법을 받쳐줘야 하는데 기마저 장건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이 따르지 않고 있으니 당연하다. 어쩌면 장건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목욕을 훔쳐볼 때처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몰랐다.
제갈영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장건을 보고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 이러기야? 그럴 거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줘. 내가 본처가 아니라고. 훌쩍. 그럼 내가 포기할게. 하자고 해서 하겠다는데 왜 또 싫다는 거야?”
장건은 정말 무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내십존이 칼질하는 상황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공명검을 맞는 게 덜 무섭겠다!’
예전의 장건이라면 상상도 못할 생각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나던 부친 장도윤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 아들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냐?
– 황제!
– 아니다.
– 그럼 산적!
– 아니다.
– 뭐야아. 황제도 아니고 산적도 아니면 누가 무서워?
– 바로 니 엄마다.
그때 장도윤은 시퍼런 눈두덩을 계란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장건은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안 돼!’
장건은 온 힘을 다해 기합을 내질렀다.
“우랴아아압!”
평소 하지 않던 일기가성으로 잡념을 떨쳐낸 장건은 거의 문을 부수듯 박차고는 달아나버렸다.
쿠당탕!
예의 귀신같은 신법으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장건이었다.
휑하니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휘이잉.
세 여인은 멍하니 열린 문을 보았다.
양소은이 쳇, 하고 웃옷을 걸쳤다. 몸의 열기 때문에 별로 춥진 않았지만 곧 상달이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소은이 투덜거렸다.
“뭐야, 기껏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제갈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 소리쳤다.
“언니가 왜 기대해!”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득 백리연이 아리송한 눈으로 문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왠지…… 장 소협,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어라? 그러고 보니…….”
양소은도 아무도 없는 문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맞아. 이렇게 도망가거나 할 애는 아니었는데?”
제갈영이 코웃음을 쳤다.
“흥! 나는 오라버니에게 완전 실망이야. 딴 남자들이랑 똑같이 무책임하잖아. 영이는 첫날밤은 꽃잎을 잔뜩 뿌려놓은 예쁜 방에서 맞이하고 싶지만 오라버니랑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단 말야.”
그렇게 말을 해놓고 제갈영도 물음표를 떠올렸다.
“어? 딴 남자들이랑 똑같이?”
세 여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건이 딴 사람과 똑같다는 말을 들을 부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다!
양소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조금은 평범해진 것 같네.”
제갈영은 아직도 기분이 안 풀려서 툴툴거렸다.
“눈치 없는 건 여전한데, 뭘.”
셋이 모두 동의했다.
“그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