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19
제 4 장 사과를 깎는 데 삼십 년이 걸린 이유
익숙한 기합 소리와 독경 소리, 땀 냄새와 그 사이로 은은한 향내가 함께 공존하는 곳, 소림사.
겨우 며칠 떠나 있었을 뿐인데도 장건은 왠지 모르게 고향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해졌다.
소림은 여전히 바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진산식의 마무리 준비가 한창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장건은 잠시 그 모습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하아!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나만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네.’
장건은 사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더러 할 필요가 없다고 한 오황의 말과 쉬지 말고 움직이라는 굉목의 말이 자꾸만 걸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노사님 보고 싶다.’
장건은 문득 그동안 굉목을 너무 오래 잊고 있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무서워서 일부러 모른 척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진산식이라는 명목으로 잠시 늦춰져 있지만 굉목에게 내려질 처분을 생각하면 가혹하기만 하다.
“휴우.”
장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되는 일도 없어서 힘들다. 깊은 수렁 속에 양발을 담그고 있는데 발목에는 무거운 추까지 달린 기분이다.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길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늘 굳은 얼굴로 꾸지람만 하던 굉목이지만, 사실 그는 장건에게 최고의 조언자였다. 부모와 다름없이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의지할 수 있는 이였다.
그런 굉목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장건은 낮은 한숨을 토해 내고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 ☆
장건이 마지막으로 본 지 겨우 며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싶었는데 방장 굉운의 안색은 굉장히 파리해져 있었다. 굉운은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힘들어 보였다.
“어서 오너라.”
장건은 합장을 하고 방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아, 여기요.”
장건은 오황이 준 서한을 건넸다.
굉운이 받아서 읽어 보더니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장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괜찮다.”
굉운이 장건에게 웃어 보였다.
‘내 착각인가?’
장건은 의아했다.
좁은 방장실, 향로에서 피워 내는 은은한 향의 냄새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늘 정기가 충만하고 맑던 굉운의 눈도 조금 흐릿해 보였다.
‘착각은 아닌 듯한데…….’
괜찮아 보이던 굉운이 갑자기 아파 보이는 게 이상했다. 상처가 점점 좋아지지 않고 나빠진다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역시 공명검…… 때문이구나.’
이유를 설명하라면 그것밖에는 없을 듯싶었다. 강력한 검성의 내가기공이 굉운의 상처에 남아 회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휴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는 장건을 보며 오히려 굉운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 주었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란다.”
굉운은 곧 반쪽짜리 죽간(竹簡)에 몇 글자를 적어 장건에게 건네주었다.
“자, 네가 할 일은 이걸 공양간의 료 사제에게 가져다주는 거다. 이걸 주면 알아서 챙겨 줄 테니 잘 가져가거라.”
“네? 챙겨 주다니요?”
장건이 물었지만 굉운은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어서 가 보거라.”
☆ ☆ ☆
공양간에서도 장건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굉운이 써 준 죽간을 본 굉료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이런! 이런 일이 다 있나!”
굉료가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장건의 눈치를 힐끔거리고 본다.
“……?”
“엇험!”
괜한 헛기침을 한 굉료가 공양간으로 들어가 뭔가 주섬주섬 한 보따리를 챙겨 들고 나왔다.
장건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보따리를 장건에게 건네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아냐. 이건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져다주는 게 좋겠다. 중요한 거니까.”
그리고는 공양간의 담벼락에 쌓인 자루를 가리켰다.
“너는 저기 있는 감자를 손질해 놓고 천천히 내려 오거라. 다 안 해도 되고 한 신시(申時)쯤 되면 그냥 내려와도 된다. 알겠지?”
“하지만…….”
신시면 저녁 공양 시간 좀 전이다. 아직 그때가 되려면 최소한 한 시진은 더 있어야 한다.
“이거 참, 내가 빠질 수가 없는 일이라…… 그러니까 아무튼 부탁한다, 츄흡! 크흐흐흐.”
“앗!”
장건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굉료는 벌써 경공을 사용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슝 하고 바람 소리까지 나는 듯했다.
종잡을 수 없는 굉료의 행동에 장건은 여전히 궁금증만 증폭될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겉으로는 대단한 일인 척하는데 실제로는 왠지 모르게 웃고 있는 굉료의 표정이라거나…… 뜬금없이 감자를 손질해 놓으라거나…… 자꾸 침을 삼키고 있다거나…….
감자 손질하는 일이 어려울 것도 없고 지금 딱히 해야 할 일도 없지만 하여튼 이상하다.
벌써 굉료는 보이지도 않는다.
“흐응?”
장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감자가 담긴 자루를 집으러 갔다. 어쨌든 간에 시킨 일이니까 해 놓고 오두막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겨울이라 물이 차가웠다.
“아우, 손 시려.”
뼈까지 아려 오는 듯하다.
장건은 흙이 묻은 감자를 앞에 두고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굉목과 살 때 겨울에는 빨래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걸 빨래라고 하고 앉았느냐?
-네게 빨래를 맡겼다간 옷 다 헤지게 생겼구나!
-이리 내놓거라!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라고 타박하며 자신이 직접 빨래를 해 왔다.
장건은 가슴이 아련해졌다.
“노사님…….”
지금 생각해 보면 겉으로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것도 다 굉목이 장건을 생각해서 한 일인 것이다.
지금이야 내공으로 충분히 동상 정도는 막을 수 있지만 예전에야 그렇지 못했으니까.
장건은 굉목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하면 그때가 너무 그립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가슴만 아플 뿐이다.
장건은 곧 내공을 가볍게 전신에 순환시켰다. 소림 내공심법의 기운이 워낙 양의 성질이 강해서 내공을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도 몸에 열이 난다. 그래서 소림의 승려들은 얇은 승복 하나로 충분히 겨울을 나곤 한다.
난로처럼 몸이 데워지자 훅 하고 더운 입김이 나왔다.
장건은 기의 가닥을 뽑아내서 섭물법의 수법으로 감자를 들고 씻어 볼까도 했다.
하지만 감자를 집는 것은 몰라도 그걸 씻는 것까지는 기의 가닥으로 할 수 없었다. 바늘 수백 개를 흩어 놓고 하나를 집으라고 하면 하겠는데 씻는 건 어떻게 하기 애매했다. 젓가락으로 물건을 집는 건 잘 해도 닦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 까지는 안 되는 건가?”
좀 더 연구를 해 보면 어떻게든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장건은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장건은 할 수 없이 직접 감자를 손에 들고 물에 넣었다가…… 뺐다.
퐁-
“으, 차갑다.”
좀 더 내공을 써서 손에 집중시켰다. 장갑을 두른 것처럼 손에 후끈한 열기가 맺혔다.
그리고 흙 묻은 감자를 집어 개울에 넣고 씻으니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십여 개를 씻어 놓았을 때였다.
공양간 안에서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나타난 동자승이 다가왔다.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장건보다 어려 보이는 동자승이었다.
“네?”
“공양주 스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공양주승이면 공양간의 최고 스님이니 굉료다.
장건은 씻던 감자를 물에서 꺼내고 동자승을 보았다. 동자승은 초롱한 눈빛으로 장건을 마주 보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겹쳐둔 대나무 바구니를 떼어 옆에 주섬주섬 놓으면서 공자승이 말했다.
“지난번에 채공 스님이 날이 좀 춥다고 내공을 쓰면서 야채를 씻으시다가 뒈지게 맞…… 아니, 많이 혼나셨어요.”
“예?”
장건은 지난번 공양간에 왔을 때 공양간을 쩌렁거리고 울리던 굉료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느릿느릿하네? 그럴 거면 무공은 뭐 하러 배웠어! 국 끓이고 야채 썰고 채소 다듬는 데 쓰라고 배운 거 아냐!
굉료는 그렇게 고함을 지르며 공양간의 스님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장건이 그때 일을 기억하며 물었다.
“전에는 공양간 안에서 일할 때 무공을 쓰라고 하셨었는데요.”
“네, 공양간 안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특히 칼질할 때는 더 쓰라고 하셔요. 그래야 더 신선하게 오래간대요.”
“그런데 왜 지금은 쓰면 안 돼요?”
“으이이이익, 차가워!”
동자승이 찬 개울에 감자를 넣으며 얼굴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씻을 때 내공을 쓰면 채소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를 해친대요.”
“기를 해치다니요?”
“세상 만물 어디에나 기가 있잖아요. 채소에도 당연히 기가 있는데 그걸 해치지 않으려는 거죠.”
“네?”
알쏭달쏭한 눈으로 장건이 동자승의 뒷말을 기다렸다.
동자승이 감자 한 개를 씻고는 손을 호호 불면서 말을 이었다.
“칼로 썰 때는 칼질을 빨리 할수록 그 시간이 짧아져서 싱싱해지는데 손을 대고 씻을 때는 직접 닿기 때문에 시간이 길어질수록 채소가 영향을 받는대요. 쉽게 말하면 채소의 기가 상하는 거예요. 사람은 단전호흡 말고도 음식물을 먹어서 기를 취하잖아요. 그러니까 먹는 사람은 결국 기가 상한 채소를 먹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장건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내공을 써서 채소를 씻는다고 그렇게 기가 많이 상한다는 건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기가 조금 상한 채소를 먹는다고 몸이 아프다거나 하진 않을 거 같은데요.”
“지난번에 뒈지게 맞…… 아니, 혼나신 채공 스님이 그렇게 똑같이 물으셨어요. 그러니까 공양주 스님께서 똑같은 감자 두 개를 땅에 심으셨어요. 하나는 내공으로 손을 감싸 씻은 감자고, 하나는 내공을 쓰지 않고 씻은 감자였죠.”
동자승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됐을까요?”
“그야…….”
“네, 하나는 싹도 빨리 나고 잎도 풍성하게 잘 자랐는데, 다른 하나는 싹도 잘 못 피우고 잎도 비실비실했죠. 벌레도 많이 먹었어요. 채소가 사람보다 훨씬 기에 민감한 거예요.”
“헤에?”
동자승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채공 스님은 귀찮게 했다고 또 뒈지게 맞…… 혼나셨죠. 봐라, 너는 이런 걸 사람에게 먹일 작정이냐? 라면서요.”
장건과 동자승은 동시에 킥킥 하고 웃었다.
장건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럼 채소를 씻을 땐 아예 내공을 쓰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럼 손이 많이 시릴 텐데…… 하고 걱정스런 어조였다.
동자승은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굉료의 칼칼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채소는 채소니까 채소를 씻는 건 그냥 채소를 씻는 것뿐이다! 라는 걸 알면 내공을 써도 된다고 공양주 스님이 말씀하셨어요.”
동자승은 말하면서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되면 내공을 굳이 쓰겠다는 생각을 안 할 거라고 하셨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다.
‘아아!’
검성 윤언강과의 첫 만남.
검성은 사과를 깎아 보이며 장건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사과는 과일이지 생사대적이 아니니라. 사과를 깎을 때에는 사과를 깎는 칼을 써야 하는 법이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니 자연스럽게 깎으면 그뿐이란다. 그래야 제대로 된 검을 쓰는 것이지.
장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동자승이 검성을 언급해서 장건은 깜짝 놀랐다.
“저는 그때 갓 행자가 되었기 때문에 몰랐는데요. 공양주 스님이 검성이란 분께서 깎은 사과를 공양간에 둔 적이 있었대요. 그 사과가 썩지도 않고 멀쩡하게 반년을 넘게 있었다고 사형들이 그러셨어요. 공양주 스님은 채공 스님에게 그 정도가 되면 니 마음대로 하거라, 라고 하셨죠.”
장건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검성이 사과를 깎을 때 내공을 썼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공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사과를 깎을 순 없을 것이다.
내공을 분명히 썼고 동작도 아주 느렸지만 사과는 전혀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맛있어 보였다. 그게 무려 반년을 썩지도 않고 있었다니…….
‘똑같이 내공을 썼는데 왜 하나는 상했고 하나는 더 좋아진 걸까……?’
장건은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공을 썼지만 쓰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경지가 되면 채소의 기를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사람을 한 번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공명검이라는 무공, 그 무공도 그러했다.
단 일격으로 홍오가 빈사에 이르렀지만 아무도 검성이 그 정도의 공격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장건을 제외하고는 홍오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공명검에 정통으로 당하고 말았다.
내공을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게 무공을 펼쳤다는 건 사과를 깎을 때나 공명검을 펼쳤을 때나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하나는 살리고 하나는 죽이는 수법이었다.
장건은 기의 가닥을 뽑아서 공력을 불어 넣어 허공을 그어 보았다.
싹!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예리한 칼로 긋는 소리가 난다.
동자승이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좌우로 살피고 있었지만 장건은 설명할 틈도 없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왜 다르지? 어떻게 다르지? 똑같이 내공을 써서 기로 날카롭게 베는 건 같은데…… 하나는 살고 하나는 다치고…….’
그 때 장건은 전혀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단편적인 기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무공이 싫다 하면서 사람을 즉사시킬 무공만 연구하는 네놈에게 과제를 내주마.
라고 했던 오황의 말이었다.
지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그 한마디에서 장건이 다음 생각을 연결하는 데까지는 불과 촌각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번쩍!
정수리에 벼락이…… 실제 벼락은 아니었으나 정말로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아!”
정수리에서부터 타고 내린 전율이 장건의 온몸을 잠식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섰다.
‘와아……!’
장건은 몸이 살짝 붕 하고 뜨는 느낌까지 받았다. 단전에서부터 부글거리고 피어난 어떤 진득한 느낌의 것들이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 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그게 그 말이었구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몇 해 전 검성 윤언강이 남겼던 그 한마디.
-나도 그 사과를 깎는 데 삼십 년이 걸렸느니라.
그때는 무공에 대해 무지했던 때라 무슨 말인지 몰랐다. 정말로 순수하게 검성이 사과 깎는 연습을 삼십 년이나 한 줄 알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삼십 년…….
같은 칼이라고 같은 것이 아니다.
칼은 칼이되 사과를 깎는 칼과 적을 대하는 칼은 다른 법이니…….
같은 내공을 같은 심법으로 사용하더라도…….
그 결과는 내가 쥔 칼에 따라 바뀔 것이리라.
내가 쥔 칼, 내가 쥐고자 하는 칼…….
그것이 의지…….
같고 다름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
그러한 의지를 펼쳐 내기 위해서 검성은 무려 삼십 년이나 검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장건 자신은 겨우 며칠 정도를 답답해하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극히 멀리 있는 하얀 점에서 수많은 빛의 동심원이 퍼져 나오며 장건을 감싸 왔다.
“후욱!”
장건은 뜨거운 김을 한 번에 토해 내며 눈을 떴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긴 꿈을 꾼 듯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장건은 공명검의 실마리를 보았다. 의지의 실체와 의미를 이해했다.
덤으로, 삼십 년이란 세월에 비하면 자신은 고작 며칠을 힘들어하고 있을 뿐이라는 위안을 얻었다.
그래서였을까?
답답해져 있던 정신이 맑아지며 가슴마저도 상쾌했다.
공명검 때문에 겪고 있던 심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다. 또한 내공이 늘어나 단전이 또다시 두터워진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으면 내공이 증진한다더니 그게 이런 말이었구나.’
“괘, 괜찮아요?”
동자승이 놀란 눈으로 장건을 보고 있었다.
장건은 동자승을 마주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네.”
무공의 세계는 정말 심오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장건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깨달음을 잡았을 때의 그 엄청난 희열이란!
“이야압!”
장건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몇 번이나 기합을 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문득 장건은 의아한 점을 떠올렸다.
“저기, 근데요.”
“네?”
“제가 내공을 쓰고 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장건은 무공 대결을 할 때가 아니면 내공을 쓸 때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거의 무위가 느껴지지 않는 동자승이 그걸 대번에 알아보니 신기했다.
혹시 장건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수일까?
동자승은 ‘아아, 난 또 뭐라고요.’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눈짓으로 힐끗 장건의 손을 가리킨다.
“멀쩡하시잖아요.”
장건이 자신의 손과 동자승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동자승의 손은 물에 몇 번 담그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빨갛다. 그에 비해 자신의 손은 희고 고운 그대로다.
“아아…….”
머쓱해진 장건이 머리를 긁었다.
긁적.
물론 손은 그대로다.
장건은 끌어 올린 내공을 모두 단전으로 돌려보냈다. 겉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허전하게 느껴지며 살짝 추위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보통 사람들에 비해 정이 충만하니 추위를 덜 느끼는 편이었다.
장건은 내공을 하나도 쓰지 않고 맨손으로 감자를 잡아 개울물에 집어넣었다.
“으으…….”
몸이 오싹한 게 물이 정말 차갑다.
단전에서 내공이 튀어나오려 꿈틀댔지만 장건은 의도적으로 단전을 억눌렀다. 이젠 스스로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다. 검성처럼 내공에 의지를 담는 방법을 깨달을 때까지는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느낀 참이었다.
내공을 쓰지 않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장건은 동자승과 마찬가지로 감자 한 알을 씻을 때마다 한 번씩 손에 입김을 불어야 했다. 흙이 남아 있으면 먹을 때 씹히니 대충 씻을 수도 없었다.
동자승은 익숙한 일인지 힘들어도 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녁 공양에 금방 쓸 거긴 하지만 혹시 얼 수도 있으니까 천으로 닦아서 여기 바구니에 두시면 돼요. 근데 너무 추우니까 안 되겠다. 저는 옆에 불이라도 조그맣게 피울게요.”
동자승은 공양간에 들어가 불씨를 가져오더니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 와서 불까지 피웠다.
평소라면 그것조차 불을 피우는 게 아까웠을 장건이었다. 물론 지금도 조금 아깝긴 했다. 하지만 손이 너무 시려서 가끔씩 불을 쬐지 않으면 얼어 버릴 것 같았다.
‘아깝다고 안 하면 안 되는 일도 있구나.’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여전히 심정은 그대로다.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원래 가진 생각이 확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중요한건 어쨌거나 감자를 씻는 일이니까 장건은 그에 집중하기로 했다.
옆에서 동자승이 조언을 해 주었다.
“혹시 싹이 난 게 있으면 그냥 두면 안 돼요. 칼로 싹이 난 부분을 잘라야 돼요. 겨울이라 거의 없겠지만 간혹 창고 안에서 정신없는 애들이 싹을 피운 경우도 있거든요.”
“싹을 왜요?”
“감자의 싹에는 독이 있어서 그냥 먹으면 큰일 나거든요. 조리를 하면 괜찮아진다고 하는데 우린 일부러 잘라 내요.”
마침 싹이 난 감자를 집어 든 동자승이 칼로 윗부분을 썩둑 잘라 보였다.
“이건 잘라서 옆에 바구니에 두세요. 나중에 약국(藥局)에 가져다 두면 말려서 약으로 써요. 그냥 먹으면 독인데 잘 쓰면 약이라니, 신기하죠?”
무공과 의학은 서로 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소림에서도 금창약부터 시작해서 내외상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약을 제조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를 베풀고자 금나라 때 지륭(志隆) 대사가 소림 내에 약국을 개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삼아 소림은 구휼의 일환으로 중원의 여러 곳에 지부와 함께 빈민들을 위한 소림 약국을 설립했다.
굉운 대에 와서는 그 역할을 더 확대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고 있었다.
장건과 동자승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몇 번이고 손을 호호 불어 가며 감자를 씻었다.
어느덧 바구니에 깨끗한 감자알이 그득하게 쌓여 가고, 시간도 꽤 흘렀다.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아요.”
동자승은 언 손을 모닥불에 녹이며 바구니에 담긴 감자 수를 셌다.
“끄응!”
장건도 신음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내공을 쓰지 않고 움직였더니 개운한 한편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한참 쭈그려 있었더니 몸도 뻣뻣하다.
“전 바구니를 좀 가져다 놓고 올게요.”
“저도 도울게요.”
“아녜요. 잠깐 불 쬐면서 쉬고 있어요.”
동자승은 재주 좋게도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양 옆구리에 또 하나씩을 끼워 공양간으로 들고 갔다.
마지막 바구니까지 다 들고 가자 장건도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그냥 가기는 뭐해서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동자승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쉿. 조용히요.”
그러면서 동자승이 내민 것은 작은 사발이었다. 물보다는 좀 더 탁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자, 받아요.”
“이게 뭐예요?”
“밖에서 추운 일을 하고 나면 몸이 굳잖아요. 그럴 때 한 모금씩 마셔 주는 거예요. 몸이 확 풀릴 거예요. 보약 같은 거예요.”
“보약이요?”
“공양간 아니면 딴 데선 구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귀하다는 말에 장건의 귀가 솔깃했다.
추위 때문에 몸이 굳은 거야 내공을 돌리면 된다고 해도 귀한 거라니까 절로 손이 갔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앞섰다.
“그럼…….”
“쭉 들이켜요.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장건은 얼떨결에 사발을 받아 마셨다.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탁 하고 숨이 막히는 감각과 함께 알싸한 맛이 났다.
“어?”
사발에서 살짝 입을 떼었다.
‘독인가?’
맵고 쌉싸름하고 탁한 느낌은 분명 독초를 먹을 때의 느낌이었다. 뱃속이 뜨끈해지는 느낌까지 같았다.
거칠고 투박한 맛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초의 맛과 더 유사했다.
장건은 가슴과 배를 쓸어내렸다.
“후아아.”
뜨끈뜨끈한 기운이 식도와 위를 타고 내려간다.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액체가 타고 내려가는 경로를 손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후 하고 입김을 내뱉으면 불꽃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동자승의 말처럼 열이 올라서 언 몸이 싹 풀렸다.
사실 독이라면 장건은 별로 두려울 게 없었다.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원기가 충만해지는 좋은 기분 때문에 자꾸만 주워 먹게 되는 게 독초였다. 그때의 익숙한 맛이 지금과 매우 유사해서 편했다.
장건은 남은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또다시 목과 가슴, 배가 뜨끈해졌다.
그런데 독을 먹었을 때하고는 다르게 코가 찡 하고 울리는 게 재밌다.
그것마저도 그리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희한하네?’
쩝쩝.
겨우 두 모금을 마셨더니 냠냠하다. 아쉬워서 더 먹어 보고 싶지만 귀한 거라니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동자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드시네요. 처음이 아닌가 봐요?”
독이라면 처음이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처음이었다.
“독한 차라 저도 잘 못 마시는데. 저는 막 기침하고 그랬어요.”
동자승의 말에 장건이 대답했다.
“첨 마셔 보는 차예요.”
“그럴 거예요. 귀한 곡차거든요.”
곡식으로 만든 차, 술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장건이 알 리 없었다.
장건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동자승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하, 이게 곡차군요.”
몇 번인가 스님들끼리 얘기할 때도 옆에서 들어 본 적이 있어서 장건은 곡차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에 쉽게 마실 수 없는 것이니 당연히 귀하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몸이 따뜻해진 것 같아요.”
“고맙긴요. 제 일을 도와줘서 제가 더 고맙죠.”
“그럼.”
장건과 동자승이 마주 합장을 하고, 동자승이 장건에게 당부했다.
“공양주 스님 몰래 저희끼리 담근 차니까 다른 데 가서 말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어요.”
“꼭요.”
동자승은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장건이라고 술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건은 철이 채 들기도 전에 입산했다. 그러니 술이라는 말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구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것을 먹고 술이라는 걸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리 없는 순수한 동자승의 작은 배려에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만약 오늘 처음 만난 동자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었다면 조금은 의심하고 되물었을 터였다.
이 작은 차이…… 동자승이나 장건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이 작은 차이가 어떤 사건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