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2
제 1 장 무량세
다음날.
장건은 어김없이 산을 올랐다.
‘무공을 배운다고 해서 뭐 어렵고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물지게 드는 것은 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뭔가를 배웠다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젠 전병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
장건은 무공을 배운다는 생각보다는 먹을 것에 더 마음이 갔다. 당분간은 계속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지어졌다.
‘뭐, 3년만 버티면 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7년을 배고픔과 싸우며 버텼는데 3년을 못 버틸 이유가 없었다.
늘 그랬듯 장건은 딱딱한 발걸음으로 홍오의 암자를 향해 걸어 올랐다.
☆ ☆ ☆
홍오는 장건을 앞에 두고 천천히 살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
보면 볼수록 예쁘다.
부처님이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할 만큼 장건은 홍오가 요구하는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심생종기라……. 그렇다면 굳이 무량무해의 이론을 전수할 필요도 없겠군.’
장건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홍오를 보고 있었다.
“무공 안 배우나요?”
무공을 빨리 배우고 또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홍오는 장건이 무공을 빨리 배우고 싶어 하는 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배워야지.”
홍오는 ‘엇험’ 하고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그전에 먼저 내 몇 가지를 보여줄 터이니, 보고나서 어땠는지 얘기해 보자꾸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장건에게 무공을 가르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홍오다. 일일이 무학의 기초부터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궁리 끝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용조수와 불영신보를 보고 따라했다면 이 방법도 분명 통할 것이다.
장건은 조금 떨어진 곳에 가 섰다.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라는 것이니 별로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만약 소림의 다른 제자들이었다면 결코 가벼이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강호에 나간 지 오래되어 우내십존의 명성에는 못 미친다 하나, 여전히 소림의 최고 고수인 홍오의 무술 시범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있다.
하지만 장건은 단순히 시킨 대로 편안히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시작하마. 지금 보여주는 것은 네가 당장은 할 수 없는 것이니, 잘 보기만 하거라.”
“예.”
그리고 홍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것이 앞으로 네가 내게 배울 무공의 처음이자 끝이니라. 지금은 기수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
홍오가 반걸음을 천천히 내딛고 섰다.
슥.
‘어?’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장건은 ‘기수식이 뭔가요?’ 하고 물으려다가 숨이 탁 막히는 듯해 입을 다물었다.
홍오가 뭔가 이상하거나 특이한 동작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양팔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한 발을 반보 내밀었을 따름인데 느낌이 방금과는 사뭇 달랐다.
장건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잘 봐줘도 그냥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기분이 찜찜하다.
‘뭐지?’
장건은 어깨를 움츠리며 좀 더 자세히 홍오를 보았다.
홍오는 장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자 적잖이 감탄했다.
‘대단한 녀석이로고.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녀석이 무량세(無量勢)를 단번에 알아보다니.’
무량세는 홍오의 심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무량무해의 진수다. 일견 평범해 보이나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무학의 정수가 그 안에 담겨 있다.
‘흘흘. 언강이 이 녀석아. 아무래도 내기는 내가 이길 것 같구나.’
홍오는 장건을 가르치는 일에 새삼 흥미를 느꼈다. 굉목을 가르칠 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소소한 삶의 보람이다.
홍오가 다시 반보를 내딛었다.
장건은 더 심한 압박을 느꼈다. 어떤 종류의 압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가슴이 답답해 오고 절로 인상이 써졌다.
‘왜 이러지?’
괜히 머리를 박박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홍오가 말했다.
“이것은 기수식에서 이어지는 기본자세이니라.”
홍오가 뒤로 살짝 몸을 밀며 양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뒤로 뺀 다리에 중심을 주고 오른발의 뒤꿈치를 들어 앞꿈치로만 딛고 있는 자세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태극권의 기본자세 중 하나인 허보(虛步)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허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엉거주춤하다.
힐끗 보면 한쪽 다리를 든 독립보(獨立步)와도 같아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아예 몸을 뒤로 젖혀 앉은 부보(付步)를 하려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허보나 독립보나 한 번 보면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 무인들이라도 대충은 따라할 수 있을 터다. 그런데 홍오는 그보다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장건의 얼굴은 찌푸려지다 못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그런 모습이 오히려 홍오에게는 기쁨을 준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내가 평생을 바쳐 찾아온 길을 넌 한 번에 보고 있구나!’
홍오가 몸의 중심을 앞쪽으로 옮기며 몸을 비스듬히 틀고 오른발을 내렸다.
“이것이 그 다음 동작이다.”
기분이 들떠서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는 홍오였다.
하나 장건은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잔뜩 썼다.
어제 가르쳐 준 마보와 흡사한데 몸이 틀어져 있으니 마보가 아니다. 허리를 똑바로 펴야 하는데 앞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마보와 궁보(弓步)를 더한 어정쩡한 자세다.
장건은 참지 못하고 머리를 박박 긁었다.
홍오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는지 수염이 움직였다.
‘네 녀석은 무량무해를 배울 자격이 있다. 이것을 모두 배우면 강호는 네 것이다.’
60년 전, 그가 하지 못했던 것을 장건이 해줄 것이다.
홍오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시연을 해보였다.
파리는커녕 굼벵이나 겨우 잡을 만큼 느릿하게 손을 뻗는다.
마치 허공을 움켜쥐려는 듯 손가락 모양이 갈고리처럼 굽었다. 그런데 잘 보면 이건 주먹을 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편 것도 아닌 형태다.
그나마도 홍오는 끝까지 팔을 뻗지 않았다. 허공에 뭐가 있든 간에 그것을 잡던가 밀던가 해야 하는데 도중에 멈추었다.
홍오가 딱 동작을 멈추는 순간 장건은 호흡이 가빠졌다.
‘제, 제발!’
홍오는 장건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중에 손을 거두다가 다른 손을 휘젓는데, 그나마도 완전히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을 그리다가 만다.
‘흐읍!’
장건의 안색이 심하게 변했다. 숨이 너무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등줄기는 벌써 축축해져 있었다.
홍오는 ‘어떠냐?’ 하고 장건을 보다가 깜짝 놀라 동작을 완전히 거두었다.
“괜찮으냐?”
그제야 장건이 ‘칵!’ 하고 숨을 내뱉었다.
“허억, 허억.”
아무리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높은 산을 올라도 단전호흡을 할 수 있던 장건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거라.”
장건은 홍오가 시키는 대로 몇 번을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겨우 진정이 되었다.
“후우우우.”
홍오가 시연을 하는 그 잠깐 동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검성을 만났던 때와 비슷한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장건이 정신을 차리자 홍오는 걱정스러운 얼굴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이 원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장건이 봤다는 걸 알았다.
“괜찮다. 괜찮아.”
“머리가 어지러워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게다. 저기 그늘로 가자꾸나.”
“예.”
장건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몸이 완전히 쪼그라들어 팔다리가 몸뚱이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다리를 억지로 떼어 나무 그늘로 갔다.
홍오가 장건의 옆에 앉아 말했다. 어찌나 장건이 귀여운지 절로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크게 신경 쓸 것 없단다. 아직은 네가 보는 것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그런 거니까 말이다.”
“그런가요?”
홍오의 말을 확실히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굉목을 다 따라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불을 접는 손동작도 몇 년을 따라해서야 겨우 몸에 익힐 수 있었고, 최소한의 힘으로 걷는 방법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한 번 되기 시작하면서 다른 것들도 갑자기 연속적으로 되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장건은 무공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윤 어르신을 봤을 때도 그렇고…….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조금은 침울해진다.
반대로 홍오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간 해온 자신의 노력이 장건을 통해 결실을 맺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량세는 결코 쉬운 자세가 아니다.
홍오는 무량세가 만들어지기까지 겪은 수많은 고생을 떠올렸다.
홍오는 분명 천재였다. 한 번 본 무공은 잊지 않았고 심지어 그 무공을 자신의 손으로 펼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타 문파의 비급을 훔친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림에 갇히게 된 후 홍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 있는 모든 무공을 원하는 대로 펼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누가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구파일방의 무공 대부분은 물론이고 남들이 천시하는 삼류 무공과 무림 세가의 가전무공까지 대다수 섭렵한 홍오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연속으로 각기 다른 문파의 무공을 펼칠 순 없었다.
각 문파마다 기본이 되는 심법이 다르고, 내공의 성질이 다르며, 무공마다 기의 운용이 다른 탓이다. 또한, 초식의 끝 동작이 매 무공마다 다르므로, 서로 다른 무공 초식의 끝과 처음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억지로 그것을 연결하려다가 기가 역류해 주화입마에 들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0년이 더 걸렸다.
각 무공의 내공 운용을 연구하고, 초식의 연결을 연구하고, 그것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에.
그렇게 고민하며 연구한 끝에 모든 무공을 취합하여 만들어낸 궁극의 자세.
모든 무공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무공을 받아낼 수 있는 절대무적의 자세.
그것이 바로 무량세였던 것이다.
그가 천재였다 하더라도, 무량세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은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데, 장건은 보자마자 한눈에 무량세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홍오의 그간 노력을 알아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홍오로서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인 게 당연했다.
장건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홍오는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장건은 생각이 끝났는지 곧 고개를 돌리고 홍오를 쳐다보았다.
홍오가 물었다.
“그래. 무량세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장건은 몸이 가려운지 팔다리를 긁으며 물었다.
“네, 그 무량세요.”
“그래. 어서 말해 보거라.”
벅벅.
장건은 자꾸만 팔을 긁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하는 거예요?”
“…….”
홍오는 가만히 방심하고 있다가 정권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하냐니?
무공을 배우다 말고 왜 하냐니!
홍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해가 잘 안 가는구나.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느냐?”
장건이 계속 몸을 긁으며 말했다.
“뭔가 하려다 말고 또 하려다 말고 그러셨잖아요. 그것도 무공인가요?”
소림사의 천재 무인 홍오가 말년에 심득을 얻어 만들어낸 무공을 ‘그것도 무공이냐’고 묻는다.
“그럼 무공이지 무공이 아니냐? 분명히 네게 무공을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도 홍오는 황당해 죽을 지경인데 장건은 한술 더 떴다.
“그걸 하면 정말 몸이 건강해져요?”
“허!”
왠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까지 든다.
“도대체 네가 뭘 묻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대사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무공은 심신을 단련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보여주신 무량세는 그런 것 같지 않았어요.”
홍오는 돌연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장건의 말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무량세를 수련하면 심신이 단련되나?’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사실 무량세는 위험하고도 어려운 동작이다. 몸이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기혈이 뒤틀릴 수도 있다. 장건의 경우야 심생종기를 따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홍오의 경우에도 몇 번이나 위험을 겪었던 적이 있었잖은가.
무량무해 자체가 무의 극을 추구하는 상승의 오의(奧義)인만큼 몸을 단련하는 기본 무공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 무공이 생겨난 것은 심신단련을 위해서였지만, 그것은 원론적인 얘기다. 수많은 무인들이 등장하고 문파가 생겨나면서 현재 강호에서는 무(武)가 문파의 세력 척도가 되어 버렸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홍오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더 고민스러웠다.
“심신을 단련하는 것 같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장건은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무공이라는 게 사람을 때리는 방법을 배우는 건가요?”
“뭐라?”
“제가 보기에는 대사님께서 꼭 누군가를 앞에 두고 때리려는 것 같았어요. 잡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하고.”
홍오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장건이 무엇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는지 알았다. 그것은 마치 농사일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아이가, 왜 쇠고랑으로 땅을 파는지 궁금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공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했으니,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포함된다. 산에서 산적들을 만나거나 호랑이를 만나도 나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장건이 몸을 긁으며 반문했다.
“산적이나 호랑이가 나오는 산으로 안 가면 되잖아요.”
“물론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지. 하지만 무공을 배우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
장건이 몸을 뒤틀면서도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저희 집에서는 위험한 산을 지나가야 하면 무사를 고용하는데요.”
“무사를 고용할 필요도 없다. 왜 쓸데없이 무사를 고용하느냐. 여러 사람 귀찮고, 비용도 들지 않느냐. 경공으로 달리면 무사들보다 몇 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산적이나 호랑이가 나와도 쫓아내면 그만인데.”
“우와아!”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어느 정도는 성취를 얻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쭙잖은 실력으로는 그럴 수 없지.”
“정말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나요?”
“네가 어디에서 배우는지 잘 생각해 보거라. 바로 천하제일 소림사가 아니냐.”
장건은 본래 큰 욕심이 없었다. 아마 무공을 배우더라도 산적이 나타나면 그냥 도망갈 것이다.
그러나 홍오의 말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은 장건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무사를 고용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때리는 무공은 배우지만, 꼭 때릴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위해 배우는 것이다.”
물론 약간은 홍오의 사심도 섞여 있다.
홍오가 짐짓 물었다.
“무공이 배우기 싫으냐?”
“아뇨! 제가 언제 배우기 싫다고 했나요? 전 그냥 그게 궁금했을 뿐인걸요.”
장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그 무량세는……, 어쩐지 어려워 보여요.”
“당연하지. 네가 당장 무량세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홍오도 무량무해를 완성하는 데에 수십 년이 걸렸는데 말이다.
“무량세는 말이다. 최소한 십이정경 중에서 6개의 정경과 기경팔맥에서 2개의 맥을 동시에 운기할 수 있어야 가능한 자세다. 네가 하기엔 아주아주 먼 훗날의 일이지.”
물론 심생종기를 할 줄 아니, 홍오는 그것에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
아직 경락을 모르는 장건은 눈만 꿈벅거렸지만, 보통의 무인들이 들었다면 입을 떡 벌리고 놀랐을 터였다.
기를 몸 안에 돌리는 주천은 여러 경락을 동시에 돌리는 것이 쉽지 않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 찰나 간에 승부가 오가는 비무나 대결시에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경락을 동시에 주천하는 무당의 양의심결(兩意心訣)이 신공절학으로까지 여겨지겠는가.
하나 무당파의 양의는 음양(陰陽), 즉 태극(太極)을 말하는 것으로 홍오가 생각하는 동시주천과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하다.
“네가 건신동공을 하면서 기가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승무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의 핵심은 그 초식보다는 초식 속에서 발현되는 운기법에 있다. 무량세는 여러 경락을 동시에 주천함으로써 천하의 모든 무공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장건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 같아요.”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나도 아직은 8개의 경락을 움직일 수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무량세가 세 동작인 것이다. 소주천하여 준비하는 첫 단계, 그리고 각각 8개의 다른 경락을 움직이는 전후반의 단계니라.”
홍오가 장건을 힐끗 보았다.
장건은 무슨 얘기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곤란한 얼굴이다.
“껄껄. 내가 너무 내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했나 보구나.”
“헤헤.”
“우선은 운기하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우거라.”
홍오는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 장건에게 주었다.
경락입문(經絡入門).
시중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는 기초 운기행공의 내용이 담긴 책이다. 그러나 장건에게는 지금 이것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터다.
“이걸 보고 기를 움직이는 법을 배우거라. 용어가 어려워서 그렇지, 배우긴 금방 배울 게다.”
장건은 홍오에게 받은 경락입문서를 살짝 펼쳐 보았다.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몸에 이런 저런 선들이 그어져 있다.
“앞으로 네가 배울 무량세는 내공을 세심하게 운용하여야 한다. 그래서 운기행공법을 반드시 익혀야 하지.”
장건은 내공을 운용할 줄 모른다. 홍오가 억지로 움직이려 했을 때에도 되지 않았다.
“내공을 어떻게 움직이나요?”
홍오는 다시 부연을 해야 했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지만 내일부터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는 안 된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해본 적이 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했으니 이제는 의식적으로 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게지.”
홍오는 남은 시간 동안 장건에게 경락에 대한 사소하고 기초적인 부분을 설명했다.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굉목에게 물어보거라. 안 가르쳐 주면 떼라도 쓰고. 무공을 배워서 무병장수(無病長壽) 좀 해보겠다는데 안 도와주면 정말 나쁜 놈이지.”
장건이 서책을 가슴에 품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별로 말수가 없으셔서 그렇지, 물어보는 건 잘 대답해 주셨어요.”
“그리 믿기진 않는다만……,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예. 그럼 저 내려갈게요. 내일 뵈어요.”
장건은 합장을 하며 ‘아미타불’ 하고 마무리 인사까지 했다.
장건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홍오는 입맛을 쩝 다셨다.
무뚝뚝한 굉목이 정말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홍오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랬다.
처음 봤을 때의 굉목은 누구보다도 밝고 순수한 제자였다. 마음가짐이 올곧고 사람을 잘 따르며, 언제 어디서도 승려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입가에는 늘 미소를 짓고 불경을 읊었다.
굉운이 ‘소림에서 가장 큰 불덕을 쌓을 이’로 꼽은 이도 젊었을 적의 굉목이었다.
그랬던 굉목이 지금은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지 않는 고지식한 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때 그 일 때문인가…….”
홍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는 꼴이 너무 고지식하고 답답해서 남들이 보기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홍오의 노안에 잠시 회한이 머물었다가 사라졌다.
“에잉, 그래도 그렇지. 다 늙은 사부를 나 몰라라 내치는 놈이 어디 있어! 그런 놈은 제자도 아니다. 킁!”
홍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콧방귀를 뀌며 암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아, 대사님께서 주신 간식을 먹었는데도 왜 계속 배가 고프지? 기를 먹으면서 좀 괜찮아졌었는데.”
장건은 홍오의 암자를 내려오면서 배를 문질렀다.
죽도록 배가 고픈 것은 아닌데 매일 배가 고프니 지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것이 정말 육체의 허기가 아니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뭐든 최소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장건의 신체를 그에 걸맞게 바꾸어 갔고, 그 때문에 계속해서 정(精)이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소모되는 정을 보완하기 위해 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과 기가 일체화되는 지점에 와 있어서 더욱 기가 부족했다.
사람이 기를 취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배가 고픈 것이지, 정말로 허기가 진 것은 아니었다.
“배고파서 못 참겠다. 기라도 먹으면서 가야지.”
평소 이 시간에 먹는 기의 양은 아주 적었다. 그럼에도 배가 고프다 보니 그나마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건은 걸음을 천천히 하며 호흡을 했다.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특이한 맛의 기가 느껴졌다.
“어?”
그리고 호흡을 통해 흡입되는 기의 양도 많아졌다. 그 양은 아주 적었지만 장건의 미세한 감각을 분명히 일깨웠다.
평소에도 늘 기를 먹으며 다녔기에 이런 일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는 마치 바다와 같아서 갑자기 농밀해지거나 하지 않고 서서히 양이 변한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툭 튀어나온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기의 맛도 이상하고 갑자기 양이 늘은 것도 이상하다.
“이상하네?”
아무래도 무언가 있는 듯싶다.
가만히 느껴보니 어딘가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듯하다.
장건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와 수풀이 사방에 울창하다. 눈으로 봐서는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흐응.”
장건은 냄새를 맡는 것처럼 킁킁거렸다.
“이쪽인가?”
흘러나오는 기의 근원은 길이 없는 숲속이었다.
나뭇가지가 옷을 건드릴까봐 잠시 망설여진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왜 이런 맛의 기가 느껴지는지도 궁금하다.
“이런 맛 예전에 먹어본 것 같은데…….”
장건은 소로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서로 얽혀 있는 나뭇가지를 조심스레 치워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느껴지는 기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거의 이른 새벽에 기를 먹는 것처럼 진한 맛이 났다. 입안에서 톡톡 튀는 듯한 맛도 느껴진다.
사박사박.
얼마나 걸었을까?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한 그루의 웅장한 느릅나무가 서 있었다.
“우와아.”
아이들 사이에 어른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느릅나무의 풍성하게 퍼진 나뭇가지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래에는 뭔지 모를 작은 풀 같은 것들이 잔뜩 자라 있었다. 색색이 예쁜 모양이었다. 버섯도 있고 그물이 얽힌 모양의 꽃도 있었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장건은 색색의 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장건은 느릅나무로 다가갔다.
어른 서넛이 서로 팔을 잡아야 겨우 빙 둘러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느릅나무다.
“엄청나다.”
나무 자체도 커다랗지만 그것보다도 장건의 눈길을 끈 것은 기였다.
사사삭.
바람이 불어 수천이 넘는 나뭇잎들이 몸을 떨 때마다 기가 요동을 쳤다.
느릅나무는 새벽에 먹는 것보다 몇 배 이상의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몇 배라고는 해도 공기 중의 기란 워낙에 미약하기 때문에 사실 거기서 거기였지만 말이다.
“와아아아.”
장건은 느릅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을 대고 나무의 기를 느꼈다.
느릅나무의 덕인지 이 주변의 기는 다른 곳보다 더 진했다. 그리고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쌀한 맛도 느껴졌다.
“후우우우.”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상쾌한 기가 몸 안을 돌고, 기가 몸 안을 돌아다니자 허기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장건이 무심코 하고 있는 행동들은 바로 선도(仙道)의 취기법(取氣法)이었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데 본능적으로 기를 먹는 효율적인 방법 중의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맛있다!”
온종일 기를 먹지 않아도 이 나무 앞에서 한 시진만 기를 먹으면 하루 종일 먹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매일 하는 건 그냥 하는 거고 여기서 먹는 건 또 다른 거지.’
장건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복감은 들지 않았지만 허기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홍오 대사님에게 오가면서 여기 들러서 먹고 가면 되겠다.’
마음 같아서야 하루 종일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을 기다리는 굉목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헤헤’ 하고 웃었다.
“아! 기분 좋다.”
독특한 느낌의 기를 먹을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졌다.
장건은 평소보다도 크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랫배의 실타래가 늘어난 느낌이 든다.
홍오의 무량세를 보면서 불편했던 마음도 어느샌가 가라앉았다.
왜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 그렇게 마음이 불편했었는지 장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냥 어딘가 모르게 홍오가 과도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었는데도 그런 게 느껴진 건 좀 이상한데…….’
과도한 움직임이라는 건 말 그대로 움직여야 말이 되는 것이지 가만히 있는데 과도하다 느껴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장건은 한참 동안 홍오의 무량세를 떠올리며 몸으로 이리저리 흉내를 내보다가 포기했다.
“에이, 모르겠다. 기나 먹자.”
장건은 느릅나무의 짙고도 넓은 그늘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형형색색의 꽃들 사이에 앉아 기를 먹고 또 먹었다.
☆ ☆ ☆
장건이 담백암으로 돌아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굉목은 마당에서 오랜만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두 시진이 한참 전에 지났는데도 굉목은 고개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왜 늦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탁탁.
그저 빨래를 털어 널고 있을 따름이다.
장건이 굉목의 앞으로 갔다. 대나무 살로 얽어 만든 바구니에 방금 한 빨래가 담겨 있다. 별로 많지는 않다.
“제가 할까요?”
굉목의 대답은 늘 그렇듯 간소하다.
“됐다.”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굉목이다.
탁탁.
굉목은 커다란 승복을 한 손으로 잡고 허공에 털었다. 다른 손으로는 승복을 탁탁 때린다.
한 번 때릴 때마다 물기가 쭉 빠지고 옷이 점점 빳빳해진다. 풀이라도 먹인 것 같다. 장건은 굉목이 빨래를 털어 너는 걸 볼 때마다 늘 신기했다.
용조수의 응용수법으로 손에서 기를 배출해 빨래의 물기를 말리는 수법이다.
장건이 물었다.
“빨래에 물기도 없는데 왜 널어요? 노사님처럼 빨래를 털면 굳이 말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물기가 말랐다고 빨래가 다 된 게 아니다. 햇볕을 쬐지 않으면 곰팡이도 생기고 옷이 금세 헤진다.”
그래서 당장 급한 게 아니면 굉목은 늘 빨래를 널었다. 대신 다듬이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문득 굉목은 장건이 이 동작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빨래는 장건이 해왔지만 널기는 자신이 널었다. 그동안 장건이 빨래를 터는 건 본 적이 없다.
굉목이 말없이 장건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네?”
“해봐라.”
“네.”
장건은 갑자기 굉목이 빨래를 내미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조용히 받아 들었다.
보기는 많이 보고 연습도 해봤지만 직접 빨래를 넌 적이 없어 잠시 고민이 되었다.
굉목을 따라하려고 굉목의 모습을 생각하려는 찰나, 장건의 머릿속에 불현듯 홍오의 말이 떠올랐다.
“무량세는 천하의 모든 무공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천은 할 줄 모르지만 홍오의 말대로라면 무량세의 자세에서 굉목처럼 빨래도 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님께서 이렇게…… 서셨던가?’
하지만 무량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아서 따라하는 것도 겁이 난다. 팔다리가 오그라들어서 그걸 보고난 후 온몸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기도 움직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장건은 홍오의 무량세에서 불편하게 보였던 부분을 빼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자세를 잡아 보았다. 불편한 부분들을 고치려 하니 실타래가 움직여 전신을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홍오에게서 본 무량세의 그 느낌은 아니다. 불편해 보이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고칠 수가 없다.
‘에이, 역시 무공은 어렵다니까.’
장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용조수의 수법으로 빨래를 털려 했다.
‘으! 배우지도 않은 걸 괜히 따라했다가 몸만 간지러워졌네.’
그런데 그런 장건을 보던 굉목의 표정이 이상하다.
“왜 그러느냐?”
“네?”
굉목이 인상을 썼다.
‘대체 사부님에게 뭘 배웠길래 이런 느낌이……. 내 착각인가?’
평소 보던 장건의 모습이 아니었다. 장건은 워낙 움직임이 적어서 가만히 서 있어도 이상해 보였다. 어딘가 딱딱한 것이 죽은 시체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무공의 측면에서 보자면 몸에 딱히 허점이 없어 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빈틈이 없는 것, 그것이 장건의 일상 자세였다.
한데 지금, 순간적이었지만 가만히 서 있던 장건의 몸에서 무수한 허점이 보였다.
이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보통 사람처럼 서 있는 게 아니라 허점을 잔뜩 드러내고 있었다.
“노사님, 왜 그러세요?”
굉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홍오가 뭘 가르쳤든 그것은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장건의 움직임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런 몸으로 무공을 배운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지금 이것이 보통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과정이라면 굉목의 간섭이 외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굉목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이틀 만에? 7년 동안 해온 것이 이틀 만에 변한다고?’
굉목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건은 이내 평소처럼 딱딱한 손놀림으로 빨래를 털어 널었다.
탁탁.
굉목처럼 능숙하진 않지만 흉내치고는 제법 쓸 만하다. 여전히 어딘가 녹이라도 슨 듯 딱딱하긴 하지만.
‘정말 모를 녀석이야.’
굉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암자로 들어갔다.
그 뒤로 장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노사님, 건신동공하실 시간이에요!”
☆ ☆ ☆
소림사에는 여타 사찰들처럼 수많은 불전(佛殿)이 있다.
각각의 보살을 모시는 전(殿)과 부처에 귀의한 신들을 모시는 각(閣), 그리고 승려들이 사용하는 당(堂)과 청(廳), 원(院) 등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하나 무림문파라는 특성상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권위를 가진 몇몇 조직이 존재한다.
소림의 승려로서 지켜야 할 율법들을 판단하고 적용하는 계율원(戒律院)과 집행 기관인 백의전(白衣殿)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그 두 조직의 수장, 계율원주 원호와 백의전주 굉충이 백의전 정방(正房)에서 만났다.
“그래, 계율원주께서 이곳까지 어인 일이신가.”
“아미타불, 긴히 논의할 문제가 있어 왔습니다.”
“사질께서는 차라도 들면서 편히 말씀하시게.”
같은 원주(院主)라 하더라도 계율원의 권위가 가장 크나, 원호의 배분이 굉충보다 한 단계 낮으니 대화는 절로 하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래 계율원을 맡고 있던 굉갑이 두 해 전에 입적하여 원호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원호는 차를 마시고 난 후 이야기를 꺼냈다.
“근간에 홍오 사백조께서 아이를 하나 들이셨는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곧 원자배에 백의전을 물려주어야 하네만 그렇다고 한물 간 취급을 하면 섭섭하지.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원호는 날카롭고 빈틈없는 눈빛을 가졌는데 비해 굉충은 넉넉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말투도 포근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소림의 모든 정보와, 업무 집행을 다루고 있는 백의전주는 후덕함이 덕목이 아니다. 유사시에는 소림의 그 누구보다도 차갑고 냉철해질 수 있는 이가 굉충이다.
“그 일 때문에 온 거라면 헛걸음 한 것일세. 굉정 사제를 만났더니 방장 사형께서 무언가 생각하시는 게 있다고 하더군.”
굉충이 원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림의 온갖 정보가 내 손을 거쳐 가네. 그러나 나는 정보를 볼 뿐, 판단은 하지 않네. 판단은 원호 사질과 방장 사형의 몫이지. 사질의 우려는 알겠네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방장 사형의 뜻이었으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정말 그럴까요?”
원호는 날카로운 눈매를 감추지 않았다.
“지난 몇십 년간 소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 문파의 견제를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탓이었다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네. 그것이 설사 홍오 사백의 탓이라 하더라도 이제와 그분을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홍오 사백조야 스스로 깨쳤으니 어쩔 수 없다 하나, 타 문파의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규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호가 말을 이었다.
“또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공을 전부 익힌 사백조께서 아이를 들여 무공을 전수하고 계십니다. 타 문파들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자신들의 무공이 소림에서 전승되고 있는데도요?”
“흠.”
굉충이 짧은 수염을 매만졌다.
“하긴, 그간 그들이 딱히 대놓고 소림을 핍박하지 않은 것도 홍오 사백의 진전을 잇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장 사형께서 직접 허가한 일을 내가 다시 나서서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일세.”
“할 수 있다면 해야지요. 그것이 소림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굉충은 생각을 정리한 듯 편히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홍오 사백은 천재이니 모든 문파의 무공을 보고 익히실 수 있었지만, 장건이란 아이가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그러니 방장 사형도 두 시진이란 조건을 붙여 허락하신 거겠지.”
“불가능하란 법도 없지요. 만약 장건이란 아이가 타 문파의 무공을 잔뜩 익히게 된다면…….”
“혹여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내 그땐 사질의 손을 들어줌세. 하나 그 전까지 나는 방장 사형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네. 이 문제는 사질이 직접 방장 사형을 만나 해결해야 하지.”
굉충은 대답 없는 원호를 보며 인상을 썼다. 원호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안 것이다.
“사질은 억지로라도 방장 사형의 뜻을 꺾을 셈이군. 그래서 날 찾아온 게야.”
“소림을 위해서입니다.”
“자자,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좀 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지켜보세.”
원호는 날카로운 표정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굉충이 원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사질은 혹시 진법에 관심이 있나? 요즘 나를 아주 골치 아프게 만드는 진법이 하나 있는데…….”
굉충은 진법을 좋아하는 진법광이었다. 제갈세가의 지인과 주기적으로 만나 진법문제를 교환할 정도다.
그러나 원호에게는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백의전주가 진법문제나 풀고 있겠는가.
‘다들 너무 무르다. 이번 일은 결코 홍오 사백조 때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야.’
홍오가 욕을 먹으면서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던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원호가 본 소림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아니, 그저 최악의 경우만 겨우 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림의 최고 고수이자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문각이 입적한 이후, 소림은 급격히 쇠락해 왔다. 현 강호의 최고수 열 명을 일컫는 우내십존에 소림의 제자가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원호는 굳은 얼굴로 백의전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