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24
제 9 장 원시천조―온!
우르르르!
사내 다섯이 장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인 특유의 가볍고 날랜 걸음이 아니라 위압적이고 단단한 직선적인 보행이다. 어지간한 중소 문파의 무인들은 그들의 기세에서부터 질려 버릴 듯했다.
사십만의 중군도독부 휘하 병졸들 중에서도 특히나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었다. 도독의 자녀를 호위하는 임무는 아무나 맡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몸놀림이 민첩했다. 평소 전장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뛰어다니던 이들인데 경장을 입어 가벼우니 그 속도가 한층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사내가 장건을 포위했다. 장건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렇다고 장건이 무서워할 리는 당연히 없었다.
“딸꾹, 내 곡차를 뺏으려고!”
다섯 사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놈.”
“취해 있잖아.”
“뭐야, 이 아저씨들. 뭐가 취했다는 거야?”
“너 인마! 너!”
“헹.”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장건은 습관적으로 사내들의 전신을 훑었다. 시야를 원형으로 만들어 주변의 풍경을 한눈에 담는 안법은 일단 몸에 익혀지면 내공을 쓰지 않아도 가능한 수법이다.
그러나 위기를 보는 장건만의 수법은 내공을 끌어 올려야만 가능하다. 지금은 내공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어 안력을 돋울 수가 없으니 사내들의 위기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 씨!’
싸울 태세를 하니 내공은 벌써 자연스럽게 돌고 있다. 역시나 내공이 순환하는 경로가 일반적이지 않다. 장건은 내공이 원하는 데로 돌도록 내버려 두었다.
부글부글.
순식간에 장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어서 빨개진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빨갰다.
내공이 쌩쌩 돌기 시작하면서 취기가 확 올랐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이 운공법에 무언가 이상한 효용이 있는 듯했지만, 장건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예전에 오황이 보여 줬던 보법에서 기인한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허술할 정도로 군더더기가 많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법이었다.
어쨌든 그거야 그거고, 지금 당장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내들을 상대하는 게 우선이었다.
‘딸꾹.’
기의 가닥을 움직이는 법을 익혔는데 못 쓴다는 게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 때.
“무릎을 꿇어라!”
사내 하나가 아예 장건의 다리를 분지르겠다는 듯 무릎을 차 왔다. 평소 같으면 아주 살쩍 피하거나, 피하는 것보다 빨리 상대의 위기를 파괴해 날려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한 움직임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위기도 안 보이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 진짜 이러기 싫은데 아저씨들이 먼저 나 때린 거다?”
장건이 혀 꼬인 투로 말하며 발차기를 피하려 몸을 틀었다.
휘청!
장건의 다리가 힘이 풀린 것처럼 꺾여서 넘어지다시피 했다. 사내의 발차기가 빗나갔다.
다른 사내가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서 독수리의 부리처럼 장건의 목덜미를 죄어 왔다. 장건은 넘어지다시피 한 자세에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파팍.
강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장건의 머리카락을 사내의 손이 스쳐 간다.
또 다른 사내가 달려오며 크게 걷어찼다. 장건은 오히려 그의 정강이를 밟고 뛰어올랐다. 훌쩍 뛰어올라 사내의 뒤로 공중제비를 넘어 돌아갔다.
“이, 이런!”
마치 솜을 찬 것 같은 느낌에 사내가 당황했다.
네 번째 사내가 주먹으로 장건의 등을 쳤다. 장건이 엉덩이와 상체를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사내의 주먹이 여지없이 허공을 쳤다.
흔들흔들.
장건이 피하는 몸짓이 괴상하리만치 흐느적거렸다. 딱딱하던 몸놀림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면서도 모든 공격을 다 피해 내고 있었다.
“아유, 어지러워. 힘들긴 또 왜 이렇게 힘들어. 역시 많이 움직이는 건 힘들어.”
장건이 가볍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 틈에 한 사내가 와락 장건을 껴안았다. 아니, 껴안으려 했다.
장건은 움직여 피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사내의 오른손 손목을 가볍게 틀어 챘다. 이미 태극경이 경지에 올랐는데 거기에 취팔선보의 부드러운 경력이 더해졌다.
장건이 팔을 뒤로 쭉 빼면서 손을 놓은 순간, 사내는 장건에게 딸려 오다가 미끄러진 것처럼 두 다리를 하늘로 솟구치며 한 바퀴를 돌았다.
꽝.
거꾸로 머리를 박은 사내는 큭 하고 짧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혼절했다.
“쩝, 아프겠다. 그르게 왜 그래써요.”
쉬익.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팔꿈치가 장건의 머리통으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오른 사내가 장건의 머리를 공격한 것이다.
장건은 손을 위로 뻗어서 팔꿈치를 받았다.
투―웅.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이 눌리듯 장건이 찌그러진다 싶더니, 오히려 사내가 폭발적으로 튕겨졌다. 공중에서 옆으로 뱅그르르 돌다가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이번엔 뺨으로 묵직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귀차느!”
손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목이 꺾일 정도로 강렬한 발차기의 위력이 장건을 압박했지만, 장건은 그냥 뺨으로 받아 냈다.
뺨에 발이 닿은 채로 장건의 몸이 휘청하며 버드나무처럼 휘어졌다.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허리는 작은 원을, 상체는 커다란 원을 그렸다.
발차기를 날린 사내는 누군가 그의 발을 잡아서 던져 버린 것처럼 한 바퀴를 돌아서 날아갔다.
“크악!”
순식간에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후아암, 아저씨들 미안.”
장건은 하품까지 했다.
“근데 나는 인제 가야게따. 그니까 괜히 사람 괴롭히지 마요.”
장건이야 순수하게 가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누군가에겐 도발일 수도 있었다.
천호장은 순순히 장건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천호장이 소리쳤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를 해치다니! 이 역적 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챙!
천호장이 칼을 뽑아 들었다.
채채챙!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 모두가 칼을 뽑아 들었다.
“역적!”
지켜보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에는 상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역적이란 누명을 쓰게 되면 삼족, 아니, 구족이 참수형감이다.
‘더러운 놈들! 지들이 시비를 걸어 놓고 무슨 역적 운운이냐!’
병사들을 관리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어쨌든 말단이래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는 관리인 것이다. 관리를 건드렸으니 역적으로 몰아도 일단은 할 말이 없었다.
우찬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호오, 이제야 재밌어지겠어.”
번쩍거리는 칼날을 보는 장건의 표정이 점점 찡그려졌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화를 내는 표정이었다.
장건의 눈에는 칼을 든 사내들이 소림사에서 난동을 부리던 무인들과 겹쳐 보였다.
고생해서 해 달라는 것도 해 줬더니만 오히려 성을 내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 사건으로 홍오도 크게 다치고 방장 굉운도 사경을 헤맬 부상을 입었다.
그때의 상황과 겹쳐져서 감정이 치밀었다.
“진짜! 내가 뭘 잘못했다구!”
피해 의식이 잠재되어 있던 장건의 내면에서 울컥하고 숨겨진 폭력성이 튀어나왔다.
장건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사내들에게로 다가갔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의 걸음이었지만 속도는 엄청났다. 순식간에 서너 장을 격하고 사내들의 앞에 다가온 장건이었다.
“헛!”
설마하니 장건이 먼저 달려올 줄 몰랐던 사내들이 대경실색해 전열을 갖추었다.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이런 경우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가마를 보호하라!”
칼을 든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겹겹으로 장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건은 딱히 달려가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화가 나서 따지려고 한 정도였지만 이미 그 전에 위협을 느낀 사내들이 먼저 공격을 하고 말았다.
쉭!
예리하게 벼린 칼날이 장건에게 떨어졌다. 물러서라는 위협용이었으나 그 안에는 충분한 살기도 담겨 있었다.
이미 전장에서 날고 긴 병사들이었다. 사람을 몇이나 베어 본 경험도 있어서 칼을 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장건이 손을 뻗어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날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칼날은 일부러 장건을 피해 친 것처럼 장건을 스쳐 가서 바닥을 찍었다.
쨍!
헛손질을 한 사내는 칼이 부르르 떨려서 칼을 놓칠 뻔했다.
“큭!”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사내가 찢어진 손아귀를 붙들고 뒤로 물러섰다.
“보통 놈이 아니다!”
“전열을 갖춰라!”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이 장건을 겹겹으로 둘러싸서 공격을 해 왔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정예병들답게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세 명이 앞에서 칼질을 하고 두 명이 옆에서 보조한다. 그리고 뒤쪽에서는 장건이 물러나지 못하게 칼을 세워서 길을 방해한다.
앞에서 오는 칼을 막으면 옆에서 옆구리를 후리고, 뒤로 물러나면 등을 찍히게 된다.
장건은 앞으로 나아갔다.
세 개의 칼날이 장건의 양 어깨와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장건은 양손으로 한 개씩의 칼날을 받았다. 칼을 휘두른 사내들이 깜짝 놀랐다.
힘주어 내리친 칼이 중간에 힘이 빠져서 멈춰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손바닥에 칼이 딱 붙어 있었다. 장건은 합장하듯 손을 모아 미간으로 떨어지는 가운데의 칼을 사이에 끼웠다. 세 개의 칼을 모두 잡아 냈다. 그러한 일련의 동작들이 부드럽고 매끈하게 이어졌다.
“얍.”
기합 같지도 않은 중얼거림의 기합을 낸 장건이 대각선으로 사선을 그으며 왼쪽 허벅지 아래로 팔을 당겼다.
칼을 내려친 세 명의 사내들은 소용돌이에라도 휩쓸린 것처럼 장건의 왼쪽으로 쏠려 갔다.
“어어어?”
와당탕.
쿠당.
세 명의 사내들이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전열이 조금 무너졌다. 오른쪽에서 한 명의 사내가 장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뒤쪽에서 장건의 다리와 등짝을 베어 왔다.
“에이, 이것도 귀찬!”
장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까지 장건은 남의 힘을 이용하는 방어형의 공격 수법만을 써 왔다. 남을 먼저 때리는 것도 싫었고 자기 힘을 쓰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남이 공격하는 것만 받아쳤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다. 남이 공격해 오는 것만 마냥 받아치기엔 너무 답답했다. 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야 시원해질 것 같았다.
뒤와 옆에서 공격해 오는 건 무시했다. 그냥 앞으로만 나아가며 양손을 마구 뻗었다.
오른손에 누군가가 내민 칼날이 와 닿았다. 장건은 엄지와 검지, 중지로 칼날을 쥐었다. 왼쪽으로 칼날을 당기자 상대가 오른쪽으로 힘을 주어 버틴다. 그 힘을 이용해 갑자기 오른쪽으로 중심을 돌려 버린다. 팽팽 돌아가는 내공이 장건의 몸 안에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두었다. 그 소용돌이를 타고 흐트러트린 방향으로 팔을 한 바퀴 힘껏 돌린다.
부웅!
상대가 순식간에 공중에 떠서 팽글팽글 돌며 날아가 버렸다.
“으아아!”
장건이 팔을 한 번 뿌릴 때마다 한 명씩이 잡혀 날아갔다.
“으헉!”
왼손 오른손, 잡히면 잡히는 대로 날아가고 그 속도를 뒤에서 쫓아갈 수가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뒹굴었다. 장건은 앞으로도 왔다가 뒤로도 돌아가며 포위망을 헤집고 다녔다. 점점 더해질수록 신이 나기까지 했다.
“아하하하! 이히히!”
미친놈도 아니고 웃으면서 사람을 깃털처럼 집어던지는 데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옷이든 무기든 잡히면 힘이 쑥 빠지면서 갑자기 휘꺼덕 몸이 뒤집히는 것이다.
무당의 환야와도 거의 대등하게 태극경으로 대결을 한 장건이었다. 장건의 수법에 사내들은 속수무책으로 날려지고 있었다.
“으……!”
사내들은 장건에게 질려 버렸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이 소년은 무지막지하다. 어지간한 무림인들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력이었다.
단칼에 두터운 나무를 동강 낼 수도 있는 실력자들도 이미 장건의 손에 붙들려 자빠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장건은 강호제일의 쾌검이라 불리는 청성일검의 검도 받아 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들이 칼질을 잘해도 청성일검의 쾌검을 따를 수는 없을 터.
장건에게는 수십 명이 동시에 칼질을 해도 청성일검의 칼질 한 번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셈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사내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재밌어 하던 우찬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가고만 있었다.
“으아아.”
가마에 달린 손잡이를 붙든 손이 덜덜 떨린다. 만약 사내들이 모두 쓰러지고 나면 아무래도 자신이 해코지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천호장! 이, 이게 무슨 정예병이오? 어, 어떻게 이, 이런 놈들로 감히 내 호위를 세웠지? 도,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큰 경을 치를 것이오!”
천호장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누가 저 소년을 보고 이 정도의 실력일거라 생각했겠는가?
천호장이 무공 교두에게 말했다.
“교두! 놈은 무림인이오. 교두가 나서 주어야겠소.”
혹시나 하여 무공 교두와 같이 온 게 다행이었다. 이 무공 교두는 도독부에서도 상당한 고수 축에 속했다. 혼자서 스무 명의 병사들과 대련을 하며 가르칠 정도니 소년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교두를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무공 교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병사들을 물리시오.”
“물러나라! 저 역적 놈은 심 교두가 맡을 것이다!”
천호장이 고함을 질러 사내들을 물러서라 명했다.
삽시간에 사내들이 기절한 자들을 부축하며 좌우로 물러났다. 원형의 포위망은 유지한 채 장건을 가운데에 둔 형국이다.
“딸꾹.”
장건은 입맛을 다시며 가마 쪽을 보았다. 한바탕 힘을 썼더니 더 취기가 올랐다. 이제는 사방이 막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시야는 또 멀쩡하니 그게 참 희한한 기분이었다.
펄럭.
중군도독부의 무공 교두인 심적은 뒷짐을 진 채, 훌쩍 뛰어올랐다. 가마꾼의 어깨와 머리를 밟으며 제비처럼 서너 장을 날아 장건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심적은 운남성 사람으로 본래 이름 없는 중소문파의 제자로 있다가 명성을 얻고 싶어 문파를 뛰쳐나왔다. 실력이 좋아 정사대전에서도 나름의 활약으로 이름도 알렸다.
그러나 정사대전이 끝나고 나자 평화로운 강호에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결국 그는 중군도독인 우이첨의 식객으로 있다가 군부에 투신하여 무공 교두 중의 한 자리를 맡게 되었다.
현직에 몸담은 지 십 년도 더 되어 현재는 강호의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쌍봉우사(雙棒雨士)라고 하면 강호에서는 알아주는 무인이었다.
별호처럼 허리에 달랑거리는 단봉(短棒) 두 개가 그의 독문병기였다.
심적은 허리에 찬 단봉을 달그락거리며 장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뭐 하는 놈이기에 죽음을 자초하는 거냐?”
“딸꾹. 나요?”
심적은 장건의 얼굴이 붉고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젊은 혈기에 잔재주를 믿고 술기운으로 난동을 피워서 인생을 망치는구나. 그만한 실력이면 아직 꽃도 피우지 않았을 것을.”
장건은 눈을 깜박거렸다. 뒤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술이요? 저는 곡차 마셨는데요.”
“그게 술이다.”
“……에에? 거짓말!”
“쯧쯧, 거짓말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겠느냐. 하필이면 도둑부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철그럭.
심적은 쇠테가 둘러진 단봉을 빼 양손에 쥐었다.
“여하간 덕분에 간만에 쌍봉우사로 돌아가는구나. 내 지금은 군부에 적을 두고 있으나 그래도 한때는 강호에서 칼밥을 먹고 살았던 몸. 옛정을 생각해 네 문파에는 해가 없도록 힘써 주마. 대신 너는 여기서 네 목숨을 두고 가야 할 것이다.”
“내 목숨을 아저씨가 왜요?”
“쯧쯧, 네가 내 손에 죽지 않으면 네가 속한 문파에 해가 갈 게 아니냐. 그리고 너는 도독부에 끌려가 끔찍한 형벌에 처해질 게다.”
장건이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도독부의 병사들에게 행패를 부렸으니 역모 죄가 아니겠느냐. 너는 물론이고 네 문파도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에엑!”
장건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멍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소림사가 해코지를 당한다는 얘기에 그냥 왠지 마음이 아팠다.
“나 뭐 했는지 모르겠는데 소림사에 해를 끼치게 되어써요. 어뜩하지?”
취해서 감정의 변화가 너무 심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고통 없게 보내 주마.”
심적은 귀찮은 일을 하나 덜었다는 개운한 표정으로 단봉을 들어 올렸다. 잔재주를 부린다고 장건을 평가절하하긴 했으나, 조금은 찝찝한 데가 있었다.
‘이놈이 취해서 그런지…… 무슨 무공을 쓰는지,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지.’
심적이 단봉에 공력을 담아 장건의 왼쪽 머리통을 내려쳤다.
“잘 가거라. 명복은 빌어 주마.”
부―웅.
바위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위력이 담겨 있는 단봉이었다.
물론 장건은 죽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냥 힘이 빠져 주저앉았을 따름이었다.
장건은 머리로 떨어지는 단봉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단봉의 끝은 쇠테를 둘렀고, 쇠테에는 둥근 쇠 징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너무 더러웠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봉대는 손때를 타 거무죽죽하고, 피딱지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틈마다 끼어 있었다.
정사대전 때부터 수십 년을 써 온 그의 독문병기이니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건에게는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죽더라도 저런 더러운 무기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으악!”
장건은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왼손을 뻗어서 손바닥으로 심적이 휘두른 단봉을 그대로 받으려 했다.
심적은 눈살을 찌푸렸다.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것도 보긴 했으나 병사들과 자신은 다르다. 무모한 짓이었다. 공력 때문에 손이 그대로 뭉개지고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쯧.’
심적은 멈추지 않고 더 힘주어 단봉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그도 한때 이름을 날렸던 만큼 실력은 있는 무인이었다.
그런데 아주 찰나, 장건이 손을 뻗을 때 어쩐지 눈에 익은 듯한 수법의 느낌을 받았다.
장건은 왼손을 올릴 때 손부터 먼저 올린 것이 아니었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어 놓고 있다가 왼발로 땅을 차면서 왼쪽으로 허리를 틀었다. 비스듬히 허리를 돌린 순간 허리의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그러면서 왼손이 튀어나왔다. 거기까지 일련의 동작들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그리고 공력이 실린 단봉과 장건의 손바닥이 닿았을 때 확실히 느꼈다.
힘이 쭉 빨려나가는 듯하면서 더 이상 단봉에 힘이 실리지 않는 놀라운 현상. 물 먹은 솜을 친 것처럼 심적의 단봉은 멈춰 있었다.
‘탈력(脫力)!’
강호에서 이러한 수법이 몇 개나 있겠는가. 아니, 있다 한들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의 삼성 공력이 담긴 단봉을 막아 낼 수 있는 수법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장에 몇 가지를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터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유력하긴 하나 단정할 수는 없었다.
‘설마…….’
푸앙!
엉거주춤하니 마보를 선 상태로 장건의 왼쪽 발밑에서 뿌연 먼지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어 오른쪽 발밑에서도 먼지가 피어오른다.
심적은 장건이 힘을 흘려서 전이시키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놈이?’
장건이 어떤 식으로 힘을 흘렸는지 심적은 단박에 알아챘다. 그는 수많은 실전을 거친 백전노장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건은 원의 흐름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흘리고 있다. 왼손으로 받아 왼발, 오른발 순으로 힘이 돌고 있었다. 왼쪽 방향으로 장건의 체내에서 힘의 흐름이 돌고 있는 것이다.
‘건방지게 내 힘을 흘리려 들어!’
심적은 짧게 호흡을 한 후 왼손에 들고 있던 단봉도 내려쳤다. 그러면서 오른쪽으로 회전을 걸었다.
팽그르르!
단봉 자체가 심적의 손아귀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장건의 머리에 내려 꽂혔다.
‘끝났다!’
상대의 힘을 흘리는 수법은 적은 힘으로 큰 힘을 살짝 궤도만 틀어 이끄는 수법이다. 따라서 회전의 방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장건의 몸에는 현재 왼쪽으로 힘의 회전이 걸린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오른손을 내밀어 막으려 한다 해도 오른손 역시 왼쪽으로 힘의 회전이 걸린 상태인 것이다.
거기에 반대쪽으로 회전이 걸린 막대한 공력의 단봉이 떨어지게 된다면?
마주 보며 뛰어가는 아이와 어른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다. 두 말 할 여지없이 장건의 손부터 머리까지 박살이 날 터였다.
하지만 장건의 상황상 막지 않을 수 없다. 몸 안을 돌고 있는 심적의 엄청난 공력이 채 해소가 되기 전이라 함부로 피하려 했다가는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장건은 곧 심적의 예상 그대로 오른손을 뻗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수법이 실로 신묘했다.
처음 단봉을 받았을 때는 왼쪽으로 몸을 틀다가 멈추고는 그 정지력으로 왼손을 사출하듯 뻗어서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허리를 트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왼쪽으로 허리를 더 비틀면서 오른손을 뻗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이번에야말로 장건의 수법을 똑똑히 본 심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했는데! 정지법(停止法)이었구나!’
특정 방향으로 몸을 틀어서 주먹이나 장에 속도와 힘을 붙이는 방법을 합경력법(合勁力法)이라 한다.
거기에 기합을 지르며 호흡을 멈추면 힘이 더해지듯, 일부러 동작을 정지하여 반발력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그 같은 방법은 정지법이라 부른다.
장건이 처음 손을 뻗을 때 쓴 수법은 바로 합경력법 중에서도 순정지법(順停止法)이었고, 두 번째 쓴 수법이 바로 역정지법(逆停止法)이었다.
이 정지법은 기본적인 합경력법과 달리 회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합경력법에서는 오른손의 주먹을 뻗기 위해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게 되면 오른쪽으로의 회전 방향이 생긴다. 이 회전력이 권법의 파괴력을 더욱 증강시켜준다.
그러나 정지법은 그러한 회전 도중에 허리의 움직임을 강제로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회전을 하다가 정지되어 회전력은 사라지고 반발력만 남게 되는 것이다.
딱히 구분하거나 말거나 크게 상관이 없을 만한 이 방법들은 힘을 흘리는 수법 중에서도 최상승의 무공에서 매우 요긴하게 사용된다.
특히 순정지법과 역정지법의 수법들을 공격이 아니라 수비에서 자유로이 사용하는 무공이 있다.
바로 태극경이다.
심적은 이 순회전과 역회전, 그리고 무회전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몸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 태극경을 시전한 이는 무당의 엄청난 고수였었다.
그런데 지금 장건이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장건은 역정지법으로 한순간 몸의 회전을 멈추고 심적의 두 번째 공격을 회전 없이 받아 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역회전이 걸려 있던 심적의 곤봉을 회전 방향에 상관없이 받은 셈이 되었다.
평소의 장건이었다면 세세한 근육만을 움직여서 이것을 해냈을 테고, 그랬다면 심적이 알아보기도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나 어쨌든 동작이 커진 덕에 심적은 명확히 장건의 수법을 볼 수 있었다.
‘순정지법과 역정지법을 이리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니! 그렇다면 이놈은……!’
심적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지금 역시 방금 전과 똑같이 물먹은 솜을 친 기분이었고, 그의 공력은 남김없이 장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아아앗!
발밑에서 더욱 거센 먼지의 소용돌이가 일더니 장건의 몸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꽈꽝!
장건의 발밑이 확 꺼졌다.
동시에 장건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심적을 툭 밀었다.
“큭!”
심적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엄청난 회전력에 의해 그의 몸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우아아아악!”
한 모금의 피를 토하며 심적이 허공을 날았다. 몸이 뱅그르르 돌고 있어서 핏물이 회오리의 궤적을 그렸다.
쿠당탕탕.
심적은 일장도 넘게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하도 돌아서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심적은 장건의 동작을 머리에 새겨 두고 있었다.
장건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그랬는데, 조금 미안하네. 에이, 그래도 내가 먼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사방으로 도망갔던 상인들과 구경꾼들은 그저 눈만 크게 뜨고 볼 뿐이었으나, 이를 지켜본 도독부의 인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적이라면 도둑부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다. 그의 실력을 본 사람들은 그가 뭘 해 보지도 못하고 제풀에 나가떨어진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심적이 왜 나가떨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냥 단봉을 두드리다가 자기 혼자 갑자기 핑그르르 날아가 버렸으니까.
천하를 삼분하는 군부의 세력가 중 한 사람, 중군도독의 두 아들딸은 이 같은 광경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우찬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고, 우희는 입을 벌리고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누구나 다 약간은 멍해 있는 상황이었다.
천호장조차 그 노련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털고 있었다.
상달은 생각했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그래서 상달은 달려 나가 장건을 데리고 가…… 려다가 그냥 서서 전음을 날렸다.
[튀엇!]존대니 반말이니 따질 틈이 없었다.
[튀어! 튀라고! 튀어!]장건은 시끄럽다는 듯이 귀를 긁었다.
“딸꾹.”
이미 그사이에 상달이 생각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는 사라진 후였다.
장건이 힘을 대부분 땅에 흘려 버린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던 심적이 몸을 일으켰다. 심적은 쿨럭거리며 장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놈!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놈이 달아난다 해도 내가 네 정체를 알고 있으니 숨을 수 없을 게다!”
후아암.
장건은 하품을 했다.
“빨리 가서 자고 싶다.”
졸려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달은 조마조마해 죽을 지경이었다.
상달이 두려운 눈으로 심적을 쳐다보았다.
심적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무공…… 네놈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큭큭.”
상달은 올 것이 왔다 생각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소림이 자신과는 별 상관 없다고 해도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천호장이 물었다.
“교두! 저놈이 어디의 소속이오. 지금 말하시오! 당장 일만 병사들을 출동시킬 것이오!”
심적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겉으로 허름한 무복을 입고 변장을 했으나 놈이 사용하는 무공은 무당의 무공이오! 저놈은 무당의 제자가 틀림없소!”
“응? 딸꾹.”
장건은 딸꾹질을 하며 심적을 쳐다보았다.
“무당? 무당? 무당은 왜요?”
“허튼 소리 하지 마라! 너는 무당의 제자가 아니냐!”
긁적긁적.
술에 취한 장건은 아까부터 이상하게 시비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사람 잘못 보셨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장건은 대범하게 용서해 주기로 했다.
“이그, 진짜 다짜고짜 칼질부터 하는 거도 나쁘지만 괜히 화부터 낸 나도 반성해야 된다니까. 아녜…… 딸꾹. 아니…… 딸꾹. 아그, 말을 못 하겠네.”
“뭣이? 네가 무당의 제자가 아니라고?”
심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장건을 쳐다보았고, 장건은 반쯤 풀어진 눈으로 또다시 하품을 했다.
‘무당?’
왠지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무당 하면 또 따라오는 말이 생각난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외웠다.
“원신천존?”
심적과 도독부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동시에 소리쳤다.
“원시천존!”
똑같은 단어라도 전혀 다른 어감이었다.
한쪽은 ‘이 단어가 무당의 도호가 맞나?’ 하는 어감이었고, 다른 한쪽은 ‘습관적으로 도호를 외는 걸 보니 네놈은 역시 무당의 제자였어!’ 하는 상반된 어감이었다.
“거봐! 저놈은 역시 무당에서…….”
그 순간 상달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
상달은 양손을 번쩍 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원시천조―온!”
상달은 모든 사람들이 멍한 사이, 장건을 번개같이 옆구리에 끼고 쌩하니 달아나 버렸다.
딸그락.
달아나다가 떨어뜨린 표주박이 바닥을 굴렀다.
장내에는 썰렁한 긴장감과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술 항아리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불신의 빛을 잔뜩 띠우게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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