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40
제 1 장 질러야 산다
소림사.
진산식이 봉행되던 대웅전의 앞.
이만 명이 넘게 군집해 있는데 누구도 말을 않고 기괴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휘이잉.
성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것이 더욱 분위기를 기묘하게 만든다.
안절부절못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이다.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높이가 수백 길이 넘는 해일이 육지를 덮칠락 말락 기다리고 있다가, 마치 말 한마디라도 실수로 내뱉어 버리면 확 덮쳐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미칠 듯한 불안감이 군중들을 휘감고 또 휘감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위기를 짓누른다.
때문에 아까부터 이만 쌍의 눈은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
제발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
그러니 유장경은 엄청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상황의 진행에 대한 책임은 그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유장경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온갖 수치를 무릅쓰고 물고 늘어졌는데 그것마저 무용지물이 된 마당이었다. 얼굴에 똥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다.
징그럽고 끔찍하다.
저놈의 미친 중놈, 원호.
살다 살다 저런 중은 처음 보았다.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어서 말이 씨도 안 먹히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리원칙에 준하여 그러한 것이 아닌가!
이건 도저히 원칙이고 상식이고 나발이고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박박 우긴다. 그것도 차기 소림사의 방장이 될 중이!
눈앞에서 빤히 보았는데도 아니라고 뻗대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하지만.
유장경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온갖 암계와 귀계, 술수와 모함이 판치는 황궁에서 수십 년을 버텨 왔고 이제껏 살아남았다.
무림 최강자라는 우내십존. 우내십존이 되기 위해서, 우내십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겠는가. 그 수백, 수천 번의 위기를 모두 버티고 이겨 내 지금에 이르렀기에 우내십존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빠드득!
유장경은 이를 갈았다. 그러곤 매우 비뚤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빗나가?”
마치 경극의 제이 막을 시작하는 것처럼 긴 침묵의 처음에 내뱉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침묵이 가져다준 시간을 건너뛰어 원호가 유장경의 감정에 동조했다. 깐깐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괜한 결기 어린 말투로 조소하듯 삐죽댄다.
“안 빗나갔소?”
지켜보던 이들이 낮은 탄식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 봐야 돌고 도는 쳇바퀴가 다시 시작될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필연이었다.
무인이란 족속의 승부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무공에 관하여서만 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가끔은 엉뚱한 쪽으로도 승부욕이 튀어 버리고 만다. 말싸움에서 크게 지고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말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장경이 이 막을 시작한 것도 무리가 아닐 수밖에.
아니, 무리가 아닌 정도가 아니다. 이미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을 친 마당이었다.
삐죽대는 원호의 말투에 유장경이 분노의 목소리로 외친다.
“정말 빗나갔다면 왜 큰 소리가 났지?”
군중들이 적어도 유장경의 그 말에는 수긍했다.
장건이 빗나간 주먹질을 하긴 했는데,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심지어 어마어마한 공명의 파장이 대웅전 앞을 완전히 휩쓸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죄다 넘어지고 멀리에 있던 이들도 고막이 웅웅거려 고통을 느꼈다. 코앞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정황상으로는 장건이 뭔가 하긴 했다는 걸 사람들도 안다. 모르진 않는다. 워낙 상리(常理)를 벗어난 일이라 설명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백 명의 관군이 나자빠지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던 자가 다시 거꾸로 날려지고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정황과 명확한 사실은 다른 것이다. 정황이 그러하다고 사실 확인도 없이 죄를 마구 뒤집어씌우면 인정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이만 쌍의 시선은 이번엔 자연스레 원호에게 향한다.
원호가 뭐라고 대답을 할지 궁금해서다.
이만 쌍의 시선을 받은 원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입을 몇 번 벙긋거리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툭 하고 내뱉는다.
“큰 소리가 왜 났느냐고? 소리가 났으면 난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묻소?”
그 정도의 대답은 예측했다. 유장경이 캐물었다.
“그럼 그걸 지나가던 개한테 물을까? 의문을 제기한 게 대사이니 대사에게 물은 것이지.”
“나 참.”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원호가 말했다.
“사건 심리(審理)는 관리가 하는 것 아니오? 내가 하는 거요? 그럼 나한테 녹봉을 주시든가.”
“심리에는 죄인의 추궁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소승은 죄인도 아닌데 추궁을 하느냐 이 말이외다!”
유장경이 벌게진 얼굴로 외쳤다.
“대사가 지금 죄인을 옹호하고 있잖나! 그러니까 죄인 취급을 받기 싫으면 옹호하는 이유를 대 보란 말이다!”
“내가 언제 옹호했다 그러시오? 그래, 본사의 제자니까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옹호하고 있소이다. 됐소이까?”
옹호하지 않았다면서 옹호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으니 유장경은 어이가 없다. 당장에 앞뒤 말이 하나도 안 맞는다. 유장경은 또다시 말문이 막힌다.
원호가 부르짖었다.
“죄를 지었다고 의심만 하지 말고 증거를 대란 말이오, 증거를! 증거를 못 대면 무죄 아니오? 거증(擧證)의 책임을 왜 본사의 제자에게 뒤집어씌우느냔 말이오!”
거증의 책임이란, 죄의 유무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된다는 원칙에서 나온 것이다.
유장경의 눈빛이 번쩍였다.
“말 잘했군, 대사. 통상적으로 갑이 을을 직접적으로 상해한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 추정을 기본으로 한다. 예를 들어 목격자가 없다든가.”
“그럼 건이도 무죄네! 본 사람이 없으니?”
“아니지.”
유장경이 단호하게 원호의 말을 잘랐다.
“이번 사건의 경우, 통상적인 폭행 사건이 아니라 나라의 관원이 상한 대사건이다. 따라서 그에 대하여 가장 의심되는 행위를 한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여야 한다!”
“그게 무슨 말이오?”
“거증 책임 분배의 원칙에 근거하여! 혐의가 있는 자는 자신이 불이익이 있는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스스로 불이익을 모면하기 위하여 증거를 제출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관리만 거증 책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번 경우엔 혐의가 있는 자 또한 거증 책임을 나누어 가짐을 법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원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 거증 책임의 분배?”
지켜보는 사람들도 긴가민가한 얼굴이다. 법이 어떤지 줄줄 외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그 법이란 놈을 적용시키는 사례도 복잡하다 보니 유장경이 하는 말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다.
원호도 마찬가지다. 유장경이 거짓말을 했다 해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당장 누구에게 자문할 만한 사람도 없다. 이리저리 쳐다봐도 다들 잘 모르는 눈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법치국가니까 법을 지키라고 해 놓고 정작 무슨 법이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으니까 그렇다. 나라에서 서당을 열어 글은 가르치지만 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법을 가르치도록 장려하거나 백성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기관을 따로 만들지도 않는다.
매우 우습지만 이 때문에 백성들은 결국 자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는 일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몰라서 그랬다. 한 번만 봐 달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법대로 하란 말이 아니라 봐 달라고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법이나 가르쳐 주고 그런 말을 하든가! 라고 외치고 싶지만, 워낙 그런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기에 원호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그치듯 유장경이 한 번 더 되묻는다.
“알겠는가? 거증 책임의 분배.”
“크윽…….”
원호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우, 우리 건이가 스스로 무죄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는 거요?”
유장경의 얼굴이 조금, 아주 조금 풀렸다. 이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당장은 유죄라고도 할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무죄임을 스스로가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게 된다.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추궁하고 조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특히나 소림의 승려들은 더욱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봐도 정황상으로는 장건이 한 짓인데 무슨 수로 무죄를 입증한단 말인가?
도대체 왜 원호가 소림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장건을 보호하였는지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애초에 말이 되는 변명을 했어야 어떻게든 대응을 했을 게 아닌가 말이다. 무죄임을 입증하는 것이 유죄의 증거를 찾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이다.
유장경이 독촉한다.
“자아, 대사. 말을 해 보라! 소림사의 제자가 관원을 상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댈 수 있겠는가?”
“큭…….”
원호가 이를 깨물었다.
전혀 문외한은 아니지만, 법적으로 아주 능통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유장경의 말을 당할 수 있을까?
유장경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하다. 원호가 대꾸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유장경은 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실소를 지었다.
“나도 나이를 헛먹었군. 아직 멀었어. 순간의 감정을 못 이기고 쉬운 길을 놓쳐 어려운 길을 택하다니.”
하다못해 거짓말을 섞어 가며 법을 들먹여도 그만이다. 법을 줄줄 외고 살아온 유장경을 원호가 이길 순 없다. 소림의 다른 승려들도 마찬가지다.
“역시 대답하지 못하는 건가?”
유장경이 손을 들어 원호를 가리켰다.
“대사는 분명히 소림사의 이름을 걸었다 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책임은 소림사에서 져야 할 것이다. 여봐라! 당장 저들을 체포…….”
“잠깐!”
원호가 눈을 부릅떴다.
얼마나 고민을 하고 고심을 했는지 민머리에 핏줄이 그대로 도드라져서 시뻘겋다. 소림사 전체의 명운을 걸고 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호가 유장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빗나갔잖아!”
유장경은 잠시 환청을 들은 듯 멍해졌다.
“……뭣이?”
유장경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붙들고 말했다.
“그건 아까 한 얘기…….”
“주먹질이 빗나갔으니까 무죄지! 때리지 않았으니까 무죄지! 안 때렸는데 어떻게 그게 유죄요!”
기껏 가라앉힌 감정이 다시금 치솟으려고 하는 유장경이었다.
“대사는 귀가 먹었는가! 생각할 머리가 없는가! 빗맞았다고 주장한다면, 빗맞았는데 어떻게 벼락 치는 소리가 나고 뛰어내리던 관원이 다시 날아갔는지를 입증하라는 것이다!”
“애초에 빗맞았는데 뭘 또 입증하라는 거요! 유 부장께선 방귀를 뀌었는데 왜 똥을 쌌느냐고 물어보면 그걸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유장경이 눈을 치켜떴다.
비유를 들어도 하필 저런 더러운 비유를 드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또 틀리지 않는 것이다.
원호가 재차 외쳤다.
“방귀를 뀌었는데 왜 똥을 쌌느냐고 물어서 똥을 싸지 않았다고 대답하였소. 그런데 왜 똥 싸는 소리가 났고 똥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방귀 뀐 자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이오!”
유장경은 기가 질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거보시오! 말이 안 되는 걸 본인도 알면서!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 왜 말이 안 되는 일을 요구하는 거요!”
유장경이 이를 갈았다.
“대사가 한 말이 말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웃기지 마시오! 방귀를 뀌었는데 똥을 쌌다고 우기는 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한 말도 아니라고 우기는 거요?”
유장경은 말문이 막혔다. 복장이 터지려 했다.
기껏 돌아갔나 싶었더니 제자리였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개 같은 건 유 부장의 논리요! 당장 돌아가시오. 방귀와 똥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어찌 법을 논한단 말이오!”
유장경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가, 감히 본 위의 행사를 고작 더러운 똥에 비유하다니…….”
“똥이 어때서!”
원호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갖 탐욕과 번뇌로 가득 차 있소! 부처님께서 보시기엔 그야말로 사방에 똥이 가득해서 발 디디기조차 어려운 곳이 바로 사바세계란 말이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이 똥 덩어리 가득한 대지에서 해탈을 하셨소. 더러운 것이 있기에 깨끗함이 있을 수 있고, 번뇌가 있기에 해탈할 수도 있는 것이오!”
원호는 유장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일갈했다.
“그런데 유 부장은 똥통에 파묻혀 스스로 똥처럼 살면서 어찌 똥을 더럽다 하는 것이오!”
마지막의 일갈에 유장경은 완전히 말을 잃었다.
원호가 앞에서 말한 똥의 의미와 뒤에서 말한 똥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사실상 말 자체가 앞뒤 맥락도 없고 그냥 막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논점을 흐려 이상한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도록 만들고 있다. 그것은 정말로 생떼를 부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묘하게 강한 설득력이 있다.
유장경도 차마 반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화가 난다. 미치도록 열이 뻗는다.
“본관에게…… 똥이라고? 감히 본관에게 호통을 쳐?”
유장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가 이런 대접을 어디서 얼마나 받아보았겠는가.
이만 명, 그중에서도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던 금의위의 무사들 앞에서 완전히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우지지직.
유장경의 발밑에서 박석이 갈라지며 금이 갔다. 쩍쩍거리면서 돌이 부서지고 돌가루가 튀었다.
머리카락이 위로 떠오르고 갑주가 철걱철걱 떨어댔다.
감정에 휩싸여서 주체하지 못하던 두 눈은 어느새 착 가라앉았다. 손에 쥔 월도의 끄트머리 날에 뿌연 빛이 어리기 시작한다. 발밑에서 부서진 돌가루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유장경이 대화를 포기하고 공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소림의 승려들이 바짝 긴장하여 만일의 사태에 준비하고, 관병과 금의위도 언제 명령이 떨어질지 몰라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유장경이 지독한 살기를 풀풀 흘리면서 말했다.
“대사…… 대사는 오늘 대사의 행동이 소림을 구할 거다 생각하겠지만…… 대사로 말미암아…… 생각보다 더 많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중생이 오늘 삼도천(三途川)을 건너게 될 것이오.”
듣고 있던 이들이 다 소름 끼칠 정도였다. 삼도천은 죽어야 건널 수 있는 강이다. 그야말로 거리낌 없이 살수를 쓰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소림을 찾은 참배객들은 서슬 퍼런 유장경의 말에 놀라서 주춤거렸다. 아무리 소림의 승려들이 그들을 보호한다 해도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서 원호는 오히려 웃었다. 잠깐은 놀라는 것 같더니만 이내 유장경 만큼이나 차분해진 것이다.
“허허, 졸납 때문에 중생들이 삼도천을 건넌다고?”
원호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러더니 태산처럼 우뚝 서서 정면으로 유장경을 응시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오.”
지켜보던 대부분이 원호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소림의 승려들과 참배객들은 기겁했다.
“으헉!”
지르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건 질러도 너무 질렀다!
“사백님!”
“사형!”
승려들의 외침 속에 오황과 곽모수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참관하기 위하여 소림을 방문했다. 소림이 사건·사고에 휘말리면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말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둘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림의 몇몇 원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승려들과 참배객들이 겁을 먹거나 새하얗게 질린 데 비해 다소 표정이 달랐다. 긴장의 끈은 놓지 않고 있으되 완전히 체념한다거나 너무 놀라서 당황하거나 한 표정은 아니었다.
“크윽……!”
유장경이 신음을 내뱉었다.
유장경의 두 눈동자엔 실핏줄이 터질 듯 차올라 있어서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손이 떨리고 그의 발치에선 흙먼지들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튀어 다닌다.
살의가 잔뜩 어린 눈빛, 표정. 주변에 있던 관병들은 숨이 막혀서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다.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폭발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매우 불안 불안한 느낌.
원호는 거기에 정면으로 돌을 던져 버렸다. 유장경이 무슨 짓을 하든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하다못해 유장경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이었대도 이성을 잃고 말았을 터다.
한데 어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장경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원호가 유장경을 노려보면서 비웃듯 한쪽 입술을 슬쩍 들어 올렸다.
“호오, 과연 그러하군?”
어딘가 모르게 무언가를 확신하기라도 한 듯이.
☆ ☆ ☆
소림을 찾은 명사들은 제각기 생각에 골몰하여 있다.
상황이 엉뚱하게 흘러 버려서 풍랑 속에 조각배를 탄 듯 연신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자기 혼자 다치는 게 아니라 괜히 불똥이 자파에도 튀게 될까 봐 염려스럽다.
호광 삼태종(三太宗)이란 문파에서 온 단옥도(丹玉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단옥도 역시 삼태종의 대표로 소림의 진산식을 찾은 명사로서 이번 진산식의 사건이 자파에 미칠 파장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하나 묘하게도 단옥도는 다른 명사들처럼 조급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크게 당황하지 않은 소림의 몇몇 원주들의 표정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흠.”
단옥도가 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은 신음을 내뱉고는 곁에 서 있던 제갈동교를 바라보았다. 제갈동교가 단옥도의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배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자네도 그러한가?”
“예.”
삼태종은 군소문파에 속하지만 제갈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무문(武門)이지만 문종(文宗)에 가깝다. 하여 제갈가와는 자주 왕래도 하는 편이다.
그렇게 두 책사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니 주변의 명사들이 하나둘 귀를 기울인다. 삼태종의 수석장로인 단옥도와 제갈가의 인물이 얘기를 하는데 한 조각이라도 들어 둬서 나쁠 것이 없다.
한 명사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두 분은 그다지 걱정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만. 저는 심장이 다 쪼그라들어서…….”
단옥도가 인정했다.
“맞소. 일단은 그러하오.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생각되오.”
“고견이 있으시다면 알려 주십시오. 저흰 걱정되어 죽겠습니다.”
“간단히, 관부가 소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오.”
“네? 그야…….”
다른 명사가 대답했다.
“지금 말하지 않았소이까. 다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제갈동교가 되물었다.
“이 자리에 있는 소림의 승려들, 속가제자와 일반인들을 합하면 족히 만 명이 됩니다. 이들을 다 죽인단 말씀이십니까?”
“그러려고 관부에서도 그만한 인원을 끌고 온 것이 아니오?”
“애초에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면, 혹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진산식이란 날짜를 고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왜 그렇소?”
그 물음에는 단옥도가 대신 대답했다.
“소림의 진산식은 소림뿐 아니라 강호 무림 전체의 세대교체를 의미하오. 즉, 소림만의 행사가 아니란 말이외다. 한데 관부가 중간에 끼어들어 끝까지 행패를 부리면 강호 무림 전체의 행사를 훼방 놓은 셈이 되어 버리오. 한마디로 관과 무림의 상호 불가침 협약을 위배한 것이지.”
“아! 그렇군요.”
“따라서 관부로서는 어느 정도의 선에서 물러설 필요가 있소. 강호 무림의 반발을 감수하기엔 나라 안팎의 정세가 그리 좋지 못하오. 하물며 이러한 상황에서 학살극을 벌인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오. 소림의 피해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칫 죄 없는 백성들을 참살한 것을 명분으로 삼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터.”
좋지 않은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못 알아들을 이는 없다. 약간의 섬뜩한 기류가 흘렀다.
한 명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소림의 봉문을 요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이번엔 제갈동교가 대답했다.
“그러기엔 빌미가 너무 빈약합니다. 차라리 도독부의 자제를 습격한 것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면 억지로나마 반역이라는 명분이 섰을 겁니다. 하나 현재 관에서 들고 온 이유가 모두 강호 내부의 일들로 인한 것입니다. 더구나 대부분 해결된 일이 아닙니까. 이 때문에 소림의 봉문을 요구한다면 역시나 관과 무림의 불가침 협약에 위배됩니다.”
“과연…….”
뭇 명사들이 수긍했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데 관부는 왜 그러한 불리함을 알면서도 굳이 오늘 이런 일을 저지른 거요?”
“아마도 관에서 진산식 날을 택한 것은 뭇 일반인들의 눈과 귀가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인 듯합니다. 또한, 만약 소림에서 무력으로 대항하려 한다 치면 본래 전역에 흩어져 있었어야 할 속가제자들마저 한자리에서 모두 잡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방금은 무력행사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잡아들인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소.”
“무력행사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무력행사에 따른 명분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소림이 적법한 관의 집행에 반대하여 끝까지 무력시위를 한다면 관은 충분히 소림을 무력으로 진압할 명분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림이 명분을 따지고 들었을 때, 그에 합당한 이유 없이 관에서 먼저 무력을 쓰게 된다면 관은 명분을 잃게 됩니다.”
명사들이 혼란을 느끼자 단옥도가 정리해서 말했다.
“관부에서 투서의 조사를 이유로 소림의 인물들을 몇몇 소환하여 가는 것은 적법한 일이오.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항 중에도 범죄의 조사에는 충실히 응하여야 한다 명시하고 있소. 소림이 이에 불응한다면 오히려 소림이 협약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관은 소림을 제압할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오.”
단옥도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러나 처벌과 조사는 다른 얘기요. 상호 불가침 협약에 따라 강호 무림은 부당한 관의 요구나 판결에 방어권을 가지고 있소. 관에서 충분한 증거나 마땅한 이유 없이 봉문 요구라든가 무력 제압이라든가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래서 과거에는 관이 무조건적인 동행이나 소명을 요구하면 무력으로 부딪치는 경우도 있었소.”
제갈동교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소림이 방어권을 이용하여 관의 행위가 적법한지를 인증하라 요구하는 절차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적어도 이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절차를 무시하면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 말을 들은 명사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지금 그 부분이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상천권명의 패를 든 관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심각한 반역 행위였다. 그 일에 유장경은 해명을 요구하고 원호는 우리가 왜 해명을 하느냐, 너희가 밝혀내라 하며 우기는 중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 쪽의 말이 다 일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유장경의 말이 맞는데, 논리적으로는 원호의 말이 맞다고나 할까? 물론 실제 사실관계는 그와 다를지라도 말이다.
“거참…….”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으니…….”
명사들도 당황스럽다. 이런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관의 입장에선 장건의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처음부터 죄를 짚기에도 힘들어졌다. 이미 사태가 너무 크게 번져 버렸다.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고는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천지를 뒤흔드는 금의위와 상천권명의 권위가 한순간에 폭락하게 된다.
이에 황제의 진노를 받아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목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궁지에 몰린 것은 관부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장경은 벗어날 길이 없었다. 장건의 수법이라도 밝혀내면 모를까, 그것도 현재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누군가의 혼잣말에 단옥도가 답했다.
“현 상황에서는 관부의 선택지가 매우 좁은 것이 사실이오. 하나…….”
“하나?”
단옥도가 제갈동교를 쳐다보았다. 제갈동교가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괜히 제갈가의 사람이 아니다. 제갈동교 역시 단옥도의 의심 이유를 알고 있었다.
“두 가지……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명사들이 하나같이 제갈동교를 보며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하나는 상천권명의 권위입니다. 상천권명을 내세운 이상 어쨌거나 쉽사리 물러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천권명은 꺼내 든 이상 반드시 행해져야 할 황제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하나는 이 사태의 열쇠를 쥔 핵심 인물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갈동교가 말을 하면서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뭇 명사들이 그의 시선을 좇았다.
유장경…… 아니, 그 뒤에 서 있는 백발의 단단한 체구를 가진 노인.
제갈동교의 시선은 바로 그, 무이포신 종암에게 멈추어 있었다.
“상천권명의 패에 의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이, 순안감찰어사 종 대인이 아직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것일까?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때문일까.
무이포신 종암.
그가 유장경을 제지하며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 ☆ ☆
“귀사의 입장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낮지만 공력을 담아 사방으로 퍼트린 그의 목소리는 이만 명 모두에게 똑똑히 말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이만 명 모두가 종암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유장경이 몸을 흠칫 떨며 종암을 돌아보았다.
종암은 짧게 말했다.
“물러나게.”
유장경은 이를 꽉 깨문 듯 턱에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나고 눈에 시퍼런 빛이 흘러나왔으나, 별다른 대꾸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지금 따지고 들어 봐야 그건 항명이다.
종암의 개입은 매우 시기적절했고 유장경이 군소리 한 톨 없이 물러남으로써 오히려 종암의 위세를 크게 높여 준 효과가 있었다. 누구도 종암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압감과 분위기가 풍겨났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악다구니처럼 들러붙거나, 혹은 그냥 서로 끝장을 보거나.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종암의, 종암의 입에, 종암의 입에서 나올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종암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금의위는 아무 죄도 없는 자를 핍박하는 잡배의 무리가 아니다. 정황상으로 어떠하든 당장 증명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죄과의 추궁은 옳지 않다. 대사의 이의를 받아들이겠다. 이 사건은 충분한 조사가 진행된 후 죄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부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사를 거쳐 추후에 결과를 내겠다지만 수월할 리 없다. 사실상 금의위에서 결국 뜻을 굽힌 것이다.
“또한 일을 밝히기 위한 과정에서 본 부장이 공정한 절차보다 지나치게 감정을 앞세워 관과 무림의 상호 불가침에 대한 협약을 무시한 것 또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원호가 소림을 대표하여 반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대한 말씀이십니다. 쉽지 않은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하나.”
종암이 원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큰 목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억울한 일이라 하여도 상천권명을 내세운 나랏일의 집행이었다! 무릇 나라의 백성으로 상천권명은 곧 황상을 배알하듯 조금도 예의에 벗어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원호와 소림의 승려들의 얼굴에 불안한 느낌이 떠올랐다.
종암이 계속해서 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천권명을 내세운 관리를 대하는 대사의 태도는 심히 불충하였다. 강호의 무뢰배라 하여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법인데 승려 된 자로서 일말의 수치도 없이 언성을 높이기에 급급하였으니, 이 어찌 통책(痛責)할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원호의 안색이 크게 어두워졌다.
소림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초들마저도 종암의 말에 크게 놀랐다. 상천권명은 결코 쉬이 볼 위엄이 아니었다. 유장경이 괜히 역적 운운한 것이 아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하물며 대사는 차기 방장으로 소림을 이끌어 갈 중책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림을 방패 삼아 상천권명의 권위를 능욕하였으니, 만인지상(萬人之上)이신 황제 폐하의 신하 된 도리로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차후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일벌백계(一罰百戒)하여 본보기로 삼음이 옳을 것이다!”
쿵!
모든 이들의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소림은 항변할 수 있겠는가!”
항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천권명에 불충하게 대든 것은 맞는 사실이었다. 그건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장건 때처럼 ‘아닌데?’ 하고 우길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직 상황이 크게 나빠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관부의 선택지는 좁고 소림은 굳건하다. 일벌백계라며 큰소리를 쳐도 소림을 봉문시킨다거나 폐사를 지시한다거나 하는 일은 무리수다.
원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꾹 깨문다.
‘기껏해야 나를 잡아 가두는 것이 다겠지. 모두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내가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
그리 생각한 원호가 반장한 채 앞으로 나왔다.
“제 잘못을 모두 인정하겠소이다. 항변은 없을 것이며 자진 출두하여 어떤 벌이든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백님!”
“사질!”
승려들이 원호를 외쳐 불렀다.
하지만 원호가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괜히 더 나서서 일을 불릴 필요가 없다. 이 정도면 일의 규모에 비해 꽤 괜찮은 결과다. 좋은 교환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원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종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사는 출두할 필요가 없다. 본관은 대사가 아닌 소림사에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
“으음? 그게 무슨 말씀이외까?”
원호가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되지만 봉문이나 폐사를 운운할 경우 끝까지 싸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림의 제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혹은 겁을 먹고 있던 소림의 제자들 분위기가 일순 변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빛낸다. 속가제자들도 주먹을 불끈 쥐고 종암을 노려본다.
해 볼 테면 해 봐. 나는 몰라도 소림은 건들지 못해!
제자들의 결의가 느껴졌다.
관병들과 금의위 무사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철그럭! 철거덕!
저마다 병장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전방을 주시한다.
날카로운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 곳곳에서 비산하고, 어린아이들은 흉흉한 분위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오황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무이포신! 자네가 나라의 관리로 이 자리에 왔으나, 자네의 지금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야! 이것은 명백한 협박일세! 그리고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자네가 재삼재사 고려하여 신중하기를 바라네!”
종암은 오황의 외침을 무시했다.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고 심지어 잠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저놈이?”
오황이 발끈하자 방장 굉운까지 나섰다.
“어사께서는 부디 조금 더 숙고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마찬가지였다. 종암은 굉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외칠 뿐이었다.
“소림사는 벌써 두 가지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관원을 뇌물로 매수한 죄, 상천권명에 불충한 죄! 또한 더 이상 항변도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본관은 그 두 가지에 대해 이 자리에서 바로 즉결 심판할 것이다.”
그 외침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유장경마저 놀라서 나섰다.
“종 어사!”
유장경이 원호를 상대로 성질을 버럭버럭 냈어도 해도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분했다. 최악의 선만은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종암은 그 선을 넘으려 한다!
원호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소승이 항변도 하지 않겠다 하고 죄를 인정하겠다 한 것은……!”
“판―결―한―다!”
내공이 실린 종암의 목소리가 대웅전 앞을 쩌렁거리고 울리며 원호의 목소리를 묻어 버렸다.
웅웅웅웅―
“내 말을…… 들어…….”
원호가 내공을 더 실어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종암의 목소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모든 소리가 묻혔다.
“크윽!”
원호는 내력의 차이를 처절하게 느끼며 종암의 입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종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소림사에 대한 처분을 알렸다.
“관원을 뇌물로 매수한 죄! 남들이 모두 그리한다 하여도 천하제일사찰 소림사라면 능히 모범을 보여 그 같은 나태를 경계하였어야 할 터! 이에 본관은 향후 십 년간 소림사에 도첩(度牒) 발행을 불허한다!”
순간 사람들이 멍해졌다.
“도, 도첩 발행 금지?”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당장 문 닫으라는 소리가 아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다들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아직 종암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무림 문파로서의 오만함을 믿고 상천권명의 권위를 거스른 죄! 이는 관과 무림의 상호 불가침 협약 이전에 스스로가 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근간을 잊은 것이다. 이에 본관은…….”
고의적일까. 종암이 잠시 말을 끊은 사이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바람마저도 잦아들어 종암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종암이 잠시간의 침묵을 즐기는가 싶더니 곧 툭 내던지듯 말을 했다.
“향후 십 년간, 소림사의 병장기 소지 허가증에 대한 발급 권한을 박탈한다!”
“…….”
모든 이가 생각을 한다.
고민을 하고 궁리하여 본다.
종암의 판결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소림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또 강호 문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기껏 결연하게 싸울 의지를 불태웠던 소림의 제자들도 어리둥절해한다.
수뇌부들의 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단독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이의를 제기할 거면 지금 해야 나중에 강호 동도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거면 받아들여서 사태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굉운이 장고에 빠지고, 주변 원주들도 함께 고뇌한다.
지켜보던 일반 민초들의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난다.
“무슨 말이야?”
“글쎄…… 봉문하거나 한단 얘기는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뭐 불이익을 좀 준다 그런 얘기로 보이네만.”
“그래? 그럼 괜찮은 건가?”
“나야 잘 모르지만, 당장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닌 거 같으니까 괜찮지 않겠어? 그냥 서로서로 체면을 봐 가면서 하자…… 그런 뜻 아닌감?”
“어찌 되든 그냥 내 입장에서야 이쯤에서 조용히 끝났으면 좋겠구먼. 무서워 죽겠어.”
그때 원호가 조금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아니, 그 반대인가?”
양도구육이란 겉으론 멀쩡한데 사실은 부실하다는 뜻이다. 그 반대라는 건 오히려 들리는 것보다 파장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원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데 치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서 우울하다. 한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에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슬픔이다. 깊은 슬픔의 골이 파이고 또 파여서 원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원호가 멍하니 굉운을 바라보았다.
굉운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원호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젓는다. 원주들도 굉운이 고개를 젓는 이유를 금세 깨달았다.
언뜻 받아들이기 쉬운 얘기로 들리나,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얘기인 까닭이다.
하지만 원호의 생각은 달랐다.
원호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씁쓸한 표정 속에 오기가, 오기 속에 분노가, 분노 속에 의지가 깃들었다.
굉운이 원호의 뜻을 알아들었다. 굉운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종암에게 말을 건넸다.
“이것으로…….”
종암이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더 이상 오늘 같은 문제로 소림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약속하지.”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소림사는 더 이상 관의 괴롭힘을 받지 않아도 된다.
“방장 사형!”
여기저기서 놀라 굉운을 부른다.
굉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한 번씩 보고는 시선을 종암에게로 돌린다.
종암이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굉운은 깊이 반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종 어사의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종암의 뜻을 받아들였다.
소림이 관의 처분에 승복한 것이다!
원주들이 비통한 표정을 짓고, 명사들 몇은 안타까운 혓소리를 냈다. 영문을 모르는 소림의 제자들이나 참배객들은 아직 어리둥절해할 따름이다.
종암은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묘한 웃음을 내비쳤다.
“좋은 판단이군.”
종암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관병들과 금의위 무사들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절도 있게 무기를 거둔 관병들이 통제에 따라 대열을 맞추어 하산할 준비를 했다.
쓰러진 자들이 수백이나 되니 부축하고 일으키는 데만도 상당한 소란이 있어야 하는데, 조용하다. 신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수백이 널브러진 처참한 현장에도 불구하고 비명 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가끔 코를 고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어찌 보면 그것마저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일들 자체가 이미 다 괴상하고 믿기 힘든 일뿐이어서 그런지 크게 이상하다 여기는 이는 별로 없었다. 아마도 나중에 생각하면 정말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었다.
“어서들 움직여!”
이 와중에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독촉하는 백부장들뿐이다. 소림의 승려들은 소림 정문에서 포박되었던 나한들의 신병을 인계받는 와중에도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참배객들도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하지,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농담을 건네거나 혹은 신변잡기를 이야기하거나 할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정적 속에서 수천 명이 움직이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어느덧 장내의 정리가 거의 끝나고, 대부분의 관병들이 내려간 후에도 유장경은 가장 최후까지 남아 있었다.
유장경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원호를 노려본다. 원호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유장경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뒷모습이 철수하는 관병들의 틈 사이로 사라져 갔다.
관병들이 완전히 철수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뒤에 남은 우울한 여운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고 있었을 뿐.
굉운이 애써 소리를 내어 말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세나.”
옆에 있던 원주가 깊게 한탄하며 되물었다.
“예? 우리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씀입니까?”
굉운이 담담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긴, 진산식을 마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멀리까지 오신 시주 분들에게 약소하지만 점심 공양도 한 끼 대접해야 하고.”
“방장 사형…….”
원주들이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래야지요. 알겠습니다. 곧 장내를 수습하고 진산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젠 할 수 있는 것만을 해야 할 뿐.
한데 장내를 정리하는 도중 원주 중의 한 명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상하네…….”
옆에서 참배객들을 인솔하던 나한이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네.”
“글쎄요. 무슨 물건이라도 잃어버리신 게 아닙니까?”
“아냐. 물건은 아니고 뭐 딴 건데? 흠…….”
원주는 고개를 흔들면서 상념을 털어 버렸다.
“아, 모르겠군. 얼른 대웅전으로 가세. 고민이든 뭐든, 잃어버린 게 있든 없든 일단 지옥 같은 오늘만은 빨리 지났으면 좋겠으니.”
“예. 알겠습니다.”
원주와 나한이 참배객들의 사이로 사라진 자리의 뒤에, 한 명의 노승이 뻘쭘하게 서 있었다. 노승은 쓰러져 있던 장건을 막 부축해서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노승은 동작을 멈추고 매우 인상을 썼다.
“으음…….”
“노사님?”
장건은 굉목의 침음을 듣고는 끙끙대며 고개를 들었다. 굉목이 물었다.
“괜찮으냐?”
“예. 그냥 조금 힘이 없는…….”
문득 장건이 굉목을 보고 물었다.
“근데 노사님은 왜 오신 거예요?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왜 널 보러 와야 하느냐?”
퉁명스러운 굉목의 목소리에 장건은 오히려 안정감이 들었다. 표정이 풀린 장건이 실쭉 웃었다.
“저 부르셨잖아요. 건아! 하고.”
“그렇다고 널 보러 온 건 아니다.”
“그럼 어떻게요? 갇혀 계셨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장건이 궁금한 만큼 굉목도 의아한 눈빛이다. 오면서 얘기는 대충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흐지부지 넘어가 버린 느낌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이 녀석, 장건이 일으킨 사고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엔 원호의 탓도 있었지만.
“으음…… 그러니까 그게 나도 내가 뭐하러 온 것인지 잘…….”
굉목도 조금 난감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처지가 또다시 애매해지지 않겠는가.
굉목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자, 장건이 다시 불렀다.
“노사님?”
“끄응! 나도 모르겠다.”
“……네?”
“귀찮게 왜 자꾸 부르느냐! 혼잣말한 게다.”
“헤헤.”
“사내놈이 실실거리고 다니면 큰 사람이 못 되는 법이다.”
“저는 큰 사람 안 되어도 되는데요.”
굉목은 인상을 썼다.
“시끄러우니 입 다물고 업혀라.”
장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에?”
“걸을 만하면 관두고.”
“아녜요! 못 걷겠어요! 업힐게요!”
장건은 쓰러지듯이 굉목의 등에 넙죽 업혔다. 아니, 업히려고 했다. 그러나 몸에서 수십 번의 뚜두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근육 경련에 뼈까지 다쳐서 업히기는커녕 제대로 서기도 힘든 지경이다.
“으으으윽!”
굉목은 크게 놀랐다.
“멍청한 녀석! 제 몸이 어떤지도 제가 모르면서 업히겠다 했느냐!”
장건이 눈물을 그렁거리면서 헤실거리고 웃었다.
“하지만…… 노사님이 업어 주신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헤헤.”
“닥쳐라! 이 멍청한 놈.”
굉목이 주변에 있던 속가제자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누가 들것이라도 좀 가져오너라!”
굉목은 화내는 목소리였지만 장건을 바라보는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남들이 보기엔 장건이 무시무시한 무공을 지닌 소마귀(小魔鬼)일지 몰라도, 굉목의 눈에는 아직도 장건이 여덟 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 ‘쓸지도 않을 비는 왜 가져다 놓으셨나요?’라고 묻던 그때의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 ☆ ☆
소림사를 찾은 평범한 참배객들의 반은 얼이 빠져 있고 반은 아직도 겁이 나서 덜덜 떨고 있었다.
소림사의 승려들과 속가제자들 중 반은 비통하게 고개를 숙였고 반은 하늘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었다.
진산식은 겨우 재개되었고, 이임사를 위해 굉운이 연단에 올랐으나 누구도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 보였다. 극한의 피로감이 대웅전을 무겁게 짓눌러서 견딜 수가 없어 보였다.
누가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얘기를 해도 귀에 들릴 것 같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워서 앞에 서는 것조차 힘들 터였다.
굉운은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저에게 매우 가벼운 날이었고 슬픈 날이었으며, 그래서 무겁고 또 기쁜 날이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이임사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얘기로 시작한 굉운이었다.
굉운이 내력을 담아 보낸 목소리가 사방에 퍼지면서 사람들의 귓가에 은은한 목소리를 전해 온다. 부담스럽게 고막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도 아니고,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낮고 담담한 소리다.
몇몇 참배객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걸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다.
“어?”
몇몇 승려들도 함께 놀랐다.
“육합전성(六合傳聲)?”
단순히 내공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증폭시키는 홍포현음의 수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기에는 편해서 자주 쓰이지만, 소리가 카랑카랑해서 시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 같아도 오래 들으면 머리가 울려서 어지럽다.
그러나 굉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머리를 울리지도 않는다. 정말로 그냥 말을 하듯이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다만 여러 명이 대웅전의 곳곳에서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약간의 메아리가 있다. 육합전성의 특징이다.
원주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굉운을 쳐다보았다.
“지금 몸 상태로 육합전성을…….”
“너무 무리하시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굉운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다. 홍포현음보다 고급의 수법이라 내공의 소모가 심해서다. 하나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검성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굉운이다. 아직도 아물어지지 않는 공명검의 상처로 출혈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다. 소림의 백년지대계. 그 전승을 어찌 됐든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하고픈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니 성하지 않은 몸이라는 걸 아는데도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형…….”
원주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마음마저 이해한다는 듯 굉운은 파리한 얼굴로 모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제가 방장(方丈)에서 쫓겨나는 날입니다.”
방장은 주지를 의미하기도 하고 주지가 머무는 처소를 말하기도 한다. 주지에서도 쫓겨나고 방에서도 쫓겨난다는 중의적 의미의 가벼운 농담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지 못했다. 대신 사람들의 이목이 조금씩 굉운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굉운이 다시 육합전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가진바 능력이 부족한데 중책을 맡고 있다 보니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참으로 오래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하여 그 자리를 내놓게 되니 제게는 오늘이 매우 가벼운 마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 한편으로 오랫동안 저의 체온을 담았던 익숙한 방을 떠나 새로운 처소로 옮긴다고 생각하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요와 목침, 선대에서부터 물려온 책궤, 족자, 청동화로와 그 안의 불쏘시개까지…… 모든 사물이 제게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낱 사물에 불과하였는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나 정이 들어 섭섭하게 생각된 것이지요.”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굉운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사인 소림사의, 그것도 주지스님이 좋았다 싫었다 하면서 일반인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의아한 게 당연하다.
내내 내공을 한계까지 끌어 올린 굉운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굉운은 결코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물에 든 정을 버리는 것 또한 그리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중히 여겼어야 할 주지의 자리를 벗어난다고 홀가분해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만일 제가 정심(正心)을 가지고 있었다면 둘 다 홀가분해하였거나, 둘 다 섭섭하여야 옳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스스로 한 가지 감정에 집착하여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평정을 잃고 곧은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지 못하여 결국 이날까지 많은 잘못된 결과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오늘은 제게 매우 슬픈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울적한 얼굴로 굉운을 쳐다보았다. 굉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득지망월(得指忘月) 집즉무구(執卽無救)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다가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집착하면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얘기를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힘든 시기에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후대에 고난을 물려주게 되었으니 저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굉운이 뒤쪽에 서 있던 원호를 바라보았다.
“저를 쫓아내고 제 방에 들어오게 될 이는 벌써 알고 있더군요. 스스로 들 줄 알고 얻을 줄 알고, 또 필요할 때 놓고 버릴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보다 훨씬 옳고 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나은 소림을 만들어 나갈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또한 제게 기쁜 날이 되었습니다. 가벼운 날이며 슬픈 날이고, 무겁고도 기쁜 날인 이유입니다.”
원호가 울컥하였는지 굉운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굉운은 다시 시선을 돌려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듯 천천히 시선을 옮기다가 크게 반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사의 불찰로 인하여 찾아 주신 분들을 심각한 곤경에 빠트린 것이 제 마음을 아프고 괴롭게 만듭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굉운은 반장을 거두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서서히 몸을 굽혀 바닥에 엎드렸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소림사의 방장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다니!
명사들과 오황, 마해 곽모수마저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일반 민초들은 충격이 더 컸다. 소림사의 방장이라면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의 왕에 가까운 존경과 권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묵직한 침묵이 폭풍처럼 대웅전을 휩쓸었다. 충격은 거친 파도처럼 머리를 치는데 숨죽인 고요함이 역설적으로 가득했다.
“바, 방장 사형…….”
원주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굉운을 바라보았다.
굉운은 방장으로 있는 동안 가난하고 헐벗은 민초들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 왔다. 오죽하면 활불이란 별호가 생기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글조차 깨치지 못한 대부분의 민초들을 배려하여 알아듣기 쉬운 말만 골라 이임사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거기에 무릎까지 꿇는다는 건 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호 전역으로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갈 게 분명한데도…….
그래서 더더욱 굉운이 내보인 진심의 무게가 느껴졌다.
굉운은 엎드린 채 힘을 다해 육합전성을 펼쳤다.
“다시 한 번 본사의 행사에 찾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과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저는 저의 크나큰 과오를 이 자리에 모두 남기고 물러날까 합니다.”
한 시대를 살아왔던 이가 모든 것을 내려 두고 가며 남기는 마지막 말이었다.
참배객들 중의 많은 이들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참배객들뿐 아니라 승려들도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간 소림이 많이 힘들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온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굉운의 말이 그냥 허술하게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의 일을 겪은 탓에 더욱 굉운의 심정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너무나 멍했던 참배객들이 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참배객들은 한 명 두 명 굉운처럼 똑같이 몸을 숙이고 절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번져 갔다. 수많은 참배객이 무릎을 꿇고 마주 절을 하였다.
단순히 장관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장엄하고 엄숙했다.
결국엔 대다수가 엎드려서 절을 하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훌쩍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가운데, 굉운은 원호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승복은 배어 나온 피로 얼룩져 있었다.
“사백님…….”
“난 괜찮네.”
굉운은 오히려 원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차례일세. 이젠.”
이임사에 이어 취임사를 하라는 뜻인지, 다음 세대의 소림사를 부탁한다는 뜻인지 원호는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취임사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확실했다. 굉운이 그 말을 끝으로 피를 토하고는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굉운의 몸 상태가 매우 위중하여 도저히 식을 이어 진행할 수 없었다.
원호의 지시로 식이 정리되고,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참배객들을 위해 공양을 대접하려고 승려들이 바삐 움직였다.
“곳간이 거덜 나더라도 모든 시주가 한 분도 빠짐없이 배불리 돌아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그것이 오늘 아침, 굉운이 방장으로서 내린 최종 명이었다.
또한 소림의 모든 제자들은 굉운의 최종 명을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원호는 굉운이 잠드는 것을 보고 내원의 의당을 나섰다.
밖에는 원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원우를 비롯한 몇몇 원 자 배의 승려들이 함께 원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우가 다짜고짜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원호는 말없이 원우와 원 자 배 승려들을 보기만 했다. 그들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이 벌게져 있었다.
원우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다시 물었다.
“왜 어사 대인의 처분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왜 수긍하셨습니까? 왜 한 번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원호가 대답했다.
“내가 처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무이포신은 공격을 명했을 것이다.”
“치욕스럽게 관부에 굴복하느니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서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애초에 사형이 건이를 구한 것도 그런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셨습니까?”
“나도 처음엔 너희와 같았다. 소림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럼 차라리 그러셨어야지요! 사형은 우리 모두를 버리셨습니다. 소림을 버리셨습니다!”
원 자 배의 다른 승려가 옆에서 원우를 거들었다.
“사형, 아무리 일반 시주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저흰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사 대인이 건 두 가지의 처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셨습니까? 그건 우리 소림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원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다. 하지만 그때 난 누구도 죽게 만들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소림의 제자이고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림이지만, 소림이란 말 자체는 허명이다. 허명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옳은 것이냐?”
“사형!”
그들의 외침에 원호가 노한 얼굴로 단호히 말을 끊었다.
“어리광 부리지 마라!”
원호의 노기 어린 기세에 항의를 하던 원 자 배 승려들이 흠칫했다.
“잘 들어라. 십 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기간에 우린 선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겠지만, 선대의 허물로 고통 받지도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지금부터의 십 년 후는 오롯이 우리들에게 달려 있단 말이다. 그것이 그렇게도 억울하더냐? 아니면 지킬 힘도 없는 주제에 아직도 천하제일이라는 허울을 버리지 못하겠단 말이냐?”
원호의 말에 원 자 배 승려들은 침묵했다. 원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들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저흰 그저…….”
“안다. 나도 너희처럼 분하고 화가 나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을 털어 버리고 싶으니까.”
왜 모를까. 선대와 달리 목숨을 걸고 험한 강호를 거쳐 온 같은 원 자 배인데. 수없이 죽어 나가는 사형제들의 소식을 듣고 시신을 보면서 분노했던 게 어제 같은데.
원호는 잠시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똑바로 하고 말했다.
“소림이란 허명은 우리를 지켜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십 년 후에, 우리의 후대는 소림이란 이름으로 보호받을 것이고, 가끔은 소림의 이름에 기댈 수도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난 반드시 그런 소림을 만들 거다. 반드시! 그래서 지금의 이 분노를 참을 수 있는 거다. 억울함을 새겨서 그것으로 새로운 소림을 만들 수 있도록!”
원호는 이가 부서져라 꾹 깨물었다.
“나는 너희들도…… 너희도 그러기를 바란다. 이 억울함을 뼈에, 심장에 새기기를.”
원주들은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통한 것은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원호였음을.
원주들의 소리 없는 눈물이 의당 앞을 고요히 뒤덮었다.
☆ ☆ ☆
진산식은 끝났다.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웅장한 타종 소리와 함께.
그리고 강호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우내십존으로 굳건히 대표되던 긴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산도 나무도 호수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일상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느꼈다.
새 시대, 새 흐름의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고 기대감과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하였다.
하나 그 시작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알리는 수백 마리의 전서구들이 석양을 뒤로 한 채 날아오르고 있었다.
강호 전역으로.
문득 힘겹게 노구를 이끌고 걸음을 하던 노승이 걸음을 멈추었다.
“큰스님?”
노승을 보필하던 젊은 승려도 멈춰 섰다.
푸드드득!
석양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듯한 소림사와 수없이 날아오르는 비둘기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심상치 않음이 느껴진다.
그것이 걱정되었음인지, 아니면 그것조차 그저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는지.
노승 금오는 조용히 선 자리에서 소림사를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