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43
제 4 장 이조암
우적우적.
와작와작.
장건은 부목까지 떼어 놓고 맛있게도 씹는다.
풀을.
생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날풀을 그냥 씹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고역일 것 같은데, 고역은커녕 행복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다. 만족한 표정으로 앞에 잔뜩 놓인 풀을 와작와작 정성껏 씹어 먹는다.
“…….”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건 장건을 보는 세 소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장건이 처음으로 부탁을 했다.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말이 좀 황당무계했다.
―삼지구엽초라는 귀한 풀이 있는데 그게 ‘정력’에 좋대요. 예전에도 그걸 먹고 나은 적이 있어요. 조금만 구해다 주실 수 있어요?
무술을 잘한다고 해서 모든 약초의 이름을 외고 있는 건 아니다. 먹고 나았다니 좋은 약초인가 보다 했고, 게다가 정력이란 말이 본래 이상한 말도 아니다.
세 소녀는 처음엔 자기들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가, 장건이 한 ‘정력’이란 말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생각하고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는걸.’
‘누구보다 순진한 장 소협인데…….’
‘상식적으로 아픈 와중에 정…… 력…… 을 찾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삼지구엽초란 약초가 그냥 왕성한 기운을 내는 데 좋은가 보다 했다.
상달에게 시켰더니 그의 안색이 일그러지더니 그딴 일은 안 하겠다고 도망가 버렸다. 하여 세 소녀가 직접 마을의 약재상을 갔다.
그랬더니만 약재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약초를 사러 온 사람들까지 모두 세 소녀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죄다 미모가 뛰어난 소녀들이라 사람들이 더욱 요상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 소녀들은 확실하게 삼지구엽초에 대해 알았다.
장건이 말한 정력이 순수한 의도의 정력이었는지는 몰라도, 삼지구엽초가 자양강장에 좋은 효능이 있긴 하더라도, 대부분은 밤일을 위해 삼지구엽초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 소녀들은 그때 당한 수치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
사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여도 세 소녀들은 좋은 가문, 좋은 환경에서 자란 양갓집 규수였다. 알건 다 안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냥 어디서 대충 주워들은 풍문이 전부일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소녀들은 ‘정력’에 좋다는 풀을 마구 뜯어 먹고 있는 장건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뺨이 후끈거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흐뭇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이, 참.”
“부끄럽게.”
물론 곁에 있는 경쟁자들이 마음에 걸리긴 할지라도 말이다.
빠직.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서로를 마주 보는 세 소녀들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여하튼 장건은 그로부터 하루 만에 완전히 멀쩡해져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원이 말한 것보다 이틀이나 더 빨랐다.
그것도 무려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한 얼굴로.
장건의 표현을 빌자면, 매우 ‘정력’이 충만해진 상태였다.
☆ ☆ ☆
장건은 아침 일찍 이조암에 올랐다.
이조암은 소림사에서도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작은 불당이다.
장건은 이조암의 본당에서 가사를 두르고 있는 황금 불상에 참배를 하고 고즈넉한 안뜰을 지나 뒤쪽으로 향했다. 작은 소로(小路)를 거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끄트머리에 올랐다.
절벽의 끝에 서니 숭산의 전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산과 작은 봉우리들이 수묵화의 그것처럼 진하고 흐린 형태로 연무에 휩싸여 있다.
“휴우.”
경공술로 뛰었는데도 한참을 올랐는지라 장건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여긴가? 불목하니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데가.”
장건은 앞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았다. 작은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바위는 본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옮겨다 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원의 말처럼 돌은 매우 특이했다.
전체적으로 매우 시커먼 묵색인데 군데군데 시뻘건 면이나 선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노을에 비치면 피처럼 붉게 보인다는 게 그런 희한한 색을 띄고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보통의 바위라면 회색빛이고, 갈라진 틈에 잡초가 피어나 있어야 정상인데 이 바위는 그렇지 않았다. 갈라진 틈 하나 보이지 않아서 잡초는커녕 이끼도 끼어 있지 않다. 딴딴히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였다.
들은 말대로 엄청 단단해 보여서 칼로 베어도 흔적 하나 남을 것 같지 않았다.
“답답하고 고민스러우면 여기에 꼭 와 보라고 하셨지.”
장건이 기이하게 매끄럽고 단단해 보이는 바위를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그랬다. 장건은 문원이 한 말을 기억하고 이조암에 오른 것이다.
“거기에 가 보면 알 거야. 버리면 얻는다는 걸. 그리고 네가 거기에서 무얼 버리고 뭘 얻게 될지 몰라도, 적어도 그 바위에 조금의 흔적이라도 낼 수 있으면…… 그땐 더 이상 지금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봐.”
“흔적…….”
장건은 어제의 일로 깨달은 무언가의 실마리를 아직 완벽하게 깨닫고 있지 못했다. 비은과 관계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조화와 균형에 관한 원호의 조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막연하게 올라온 참이었다. 하다못해 화풀이를 하는 데에도 쓴다니까 혹시나 해서 궁금하기도 했다.
“여기다가 손자국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자세히 바위를 살펴보니 정말 문원의 말대로 약간의 흔적들이 있었다. 그건 부서졌다거나 깨진 자국이 아니라 눌린 듯한 흔적들이었다.
“희한하네? 이렇게 많이 때렸는데 금간 흔적도 없어.”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손바닥 자국 몇 개도 찍혀 있었다. 손가락 마디와 손바닥의 손금까지 보일 정도로 푹 파인 뚜렷한 손바닥 자국도 있고, 손바닥의 형태만 겨우 찍힌 자국도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도 많지 않았다. 일단 전면에 보이는 것만 예닐곱 개 정도였다. 수십 수백 개의 타격 흔적이 있지만 손바닥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였다.
게다가 크기가 모두 다른 것으로 보아 죄 다른 사람인 듯했다.
“와…….”
장건은 새삼 손바닥 자국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며 감탄했다. 가장 깊은 것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패인 자국이었다. 장건의 손이 쏙 들어갔다.
“되게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 텐데, 그래도 부서진 자국 하나 없는 걸 보면 깨져서 떨어질 염려는 없는 거겠지?”
화가 나서 무언가를 때리고 두들겨서 화를 푼다는 건 장건에게 딱히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멀쩡한 걸 때려서 망가트린다는 건 장건에게 지독한 사치였다. 아무리 쓸모없는 돌덩어리라 하더라도.
“정말 안 부서지겠지?”
장건은 기우(杞憂)라도 하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바위를 만졌다.
꽤 단단해 보이는 바위였지만, 절벽의 끝에 세워져 있어서 만약 부서지면 밑으로 돌들이 낙하해 위험할 것 같았다.
지금껏 몇 번이나 담이나 벽을 의도치 않게 부순 경험이 있는 장건이었다. 보통의 바위처럼 보이진 않지만, 바위에 손자국을 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염려가 된다. 하다못해 부서지진 않더라도 밀려서 굴러떨어질까 봐 걱정스럽다.
하지만 사실 장건이 모르는 게 있었는데, 이 바위는 보통의 바위가 아니었다. 돌이 아니라 거의 통짜로 철(鐵)이나 다름없었다. 온갖 종류가 뒤섞이긴 했으나 바위라고 부르긴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칼로 치고 곡괭이로 찍어도 부서지질 않았다.
“괜찮을까?”
장건은 손바닥으로 어느 정도 힘을 주고 바위를 쳐 보았다.
착.
당연하게도 바위는 미동도 없다. 내공도 없이 그냥 쳐 본 셈이라 손바닥만 아프다.
“아야야.”
아무도 없는데 괜한 엄살을 부리면서 장건이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후읍!”
호흡을 가다듬고 기의 가닥을 뽑아내었다.
기의 가닥으로 오성의 힘을 주고 바위를 쳐 본다. 오성의 힘이면 어지간한 무인들의 위기를 깰 수 있는 정도의 힘이다. 사람 한 명을 거꾸러트릴 정도의 위력이 있다.
툭.
기의 가닥은 답답하게 막힌 소리를 내며 허무할 정도로 바위에서 튕겨져 나왔다. 역시나 바위는 멀쩡하다.
“정말 단단하네?”
장건은 기의 가닥 두 개를 뽑아내어서 둘을 꼬았다. 탄력이 있는 기의 가닥은 꼬면 꼴수록 튀어 나가는 힘이 강해진다.
한 호흡을 당겼다가 힘껏 기의 가닥을 쏘아 냈다. 이번엔 꽤 많은 힘이 실려 있었다. 사람 한 명을 공중에 날릴 수 있는 정도의 힘이다.
탁!
힘차게 뻗어 나간 기의 가닥이 바위에 부딪치며 장건의 몸에도 충격이 온다. 바위가 아니라 기의 가닥이 허공으로 산산조각 나서 부서져 나갔다. 아니, 부서졌다기보다는 그냥 응집력이 사라져 흩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이번에도 바위는 꿈쩍 않았고,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냥 사위가 조용한 아침의 풍경 그대로다. 하다못해 이 정도의 힘으로 벽을 치면 요란한 굉음이 나면서 벽이 무너졌을 텐데 말이다.
“어라?”
아까까진 부서질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아서 자존심이 좀 상한다. 누구한테 딱히 자랑하거나 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장건도 자신의 깜냥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방장을 구하려고 급한 마음이었다 해도 관부의 병사들 수백 명을 쓰러트리는 데에 그렇게 큰 힘이 들지도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일반 무인들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임에 분명했다.
무공을 처음 시작할 땐 홍오가 손가락으로 돌을 부수는 것만 봐도 놀랐는데, 지금은 자기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는가?
굳이 하려 들지 않아서 그렇지.
한데 하려고 했더니 안 되는 이 기분 상하는 상황이라니…….
장건은 오기가 생겼다. 눈썹에 힘을 주고 입술은 꾹 다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 바위에 흔적을 새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바위에 남겨진 수많은 흔적들.
물론 그것은 소림의 역사……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졌을지 모르는 이 바위에 그만큼 많은 사람이 거쳐 갔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장건보다도 훨씬 더 고강한 무공 실력을 가진 사람이 그 흔적만큼이나 많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장건은 흔적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무공에서 밀린다고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닌 거 같아.”
장건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내가 넘지 못한 고민을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예전에 넘었다는 걸 알고 나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한 거야.”
검성 윤언강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다.
윤언강이라면 분명히 이 바위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장건은 그럴 주제도 되지 못하면서 공명검이 무섭다고 두려워했고, 그걸 이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걷고 있으면서 날고 있는 상대와 견준 셈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심마 같은 것에 들 수밖에.
장건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한 가지의 꼬인 타래가 풀려서 기분이 개운하다.
장건은 한 걸음을 더 물러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기의 가닥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걸 이미 원호와의 비무로 깨달았다. 일정 수준까지는 훨씬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안 된다.
마치 지금의 이 바위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바위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고민이 풀릴 거라는 문원의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비은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때에야 바위에 흔적을 남기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장건은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면 내가 최대한으로 얼마나 힘을 내는지도 알아야 하잖아?”
장건은 땅에서 작은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호흡을 머금고 내공을 몸 안에서 일주시켰다가 손을 뻗었다. 당가의 섬절을 이용한 수법이다. 내공을 밖으로 뿜어내는 걸 좋아하지 않고, 위력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사람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는 수법이었다. 일전에는 쌀알 같은 조그만 것으로 벽을 부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딱!
상당한 공력이 깃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멩이가 부서지면서 몇 개의 조각이 되어 튕겨 나갔다.
바위에는 여전히 긁힌 흔적도 없다.
장건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이미 예상은 했다.
“역시 이 정도로도 안 돼.”
알고 있는 기초가 부족하다 보니 장건이 해 볼 수 있는 수법도 한계가 있었다. 하다못해 바위는 사람처럼 위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위기?”
장건은 위기란 말에 생각이 미치자, 며칠 전 진산식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위에서 뛰어 내려와 장건을 공격했던 그 무인의 위기를 깨트렸을 때.
그때 장건은 기의 가닥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무인의 위기를 깨트리는 데에는 기의 가닥으로도 충분했고, 그게 더 빠를 수도 있었다. 무인의 위기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한데 저도 모르게 직접 주먹을 내질렀다.
본능적이었다. 기의 가닥으로 부술 순 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에 절로 반응했었다. 어딘가 모르게 위기의 형태가 특이했던 것도 본능적으로 움직인 데에 한몫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본능에 의한 판단은 맞았다.
만약 장건이 기의 가닥으로 대충 위기를 깨려 했다면 뒤에 숨겨져 있던 엄청난 공력에 의외로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가벼운 기의 가닥으로 쳤다면 위기가 깨지려는 순간 뒤따른 공력에 기의 가닥이 반탄력으로 튕겨지거나 으깨져서 흩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랬다면 장건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장건은 오싹함을 감추며 천천히 당시의 상황을 복기했다.
뒤따라온 공력에 결국 당하긴 했지만 직접 주먹으로 가격하여 일거에 위기를 없앰으로써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게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면, 기의 가닥보다 직접 주먹질을 하는 게 훨씬 강한 위력을 갖고 있다는 걸 장건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본래 기의 가닥은 여러모로 안정적이지 못한 수법이다. 장건이나 되니까 자유롭게 기를 허공에 내보내어 다루는 것이지, 보통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몸 밖으로 벗어난 기는 대기 중에 퍼져서 흩어지려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작은 충격에도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기라는 게 실체가 아닌 의념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하거나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면 또 분산되고 만다.
심지어 마해 곽모수는 주변 기의 흐름을 일그러트림으로써 장건이 기의 가닥을 조종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결국은 직접 몸을 움직여야…….”
장건은 표정을 찡그렸다.
기의 가닥이 좋은 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점을 포기해야 하다니!
장건은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위했다.
“매번 이렇게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작은 힘을 발휘할 땐 얼마든지 기의 가닥을 이용할 수 있어. 큰 힘을 써야 할 때만…….”
살짝 한숨을 내쉰 장건은 이제 진짜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공을 배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몸을 쓰지 않으면서 생활한 게 수십 년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몸을 써야 할지 생각을 해 봐야 했다.
직접 몸을 쓰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 혹은 위기감이 들었을 때 정도다. 평소에도 몸을 쓰려면 걷는 것조차 평범하게 못 하는 지경이 아닌가!
“하아.”
생각만으로 모든 게 다 되지는 않는 법.
장건은 크게 결심을 하고 자세를 잡았다.
바로 건신동공이었다.
건신동공도 안 한 지 좀 된 터라, 자세가 여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첫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그러나 몸에 익을 대로 익었던 동작이었다. 몇 번 자세를 교정하고 나니 그럭저럭 자세가 나왔다.
그러나 자세를 취하는 것과 움직이는 건 별개였다.
“으으으……!”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야 하는 그 동작이 장건에게는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동작이라 생각되는지! 장건은 단 한 발짝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이 동작을 따라 하면서 몸 안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고 내공도 자연스럽게 혈도에 흘릴 수 있게 되었다. 수년간을 했던 동작이었다.
한데 요즘 안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동작을 흉내조차 내기도 힘들게 되었는가 말이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장건도 스스로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정작 걷는 건 평생(?)을 해 왔지만 이제는 못 하고 있으니, 건신동공을 못 한다는 게 또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후욱.”
가쁜 숨을 내쉬는 장건의 이마에 순식간에 땀방울이 맺혔다. 팔과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몸의 기운을 최대한 아끼며 움직이는 장건이 열(熱)로 인해 땀을 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만큼 몸을 움직이는 게 고역이고 괴로운 일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자, 장건은 눈을 감았다.
“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고 있지 않다아…….”
세뇌하듯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느려서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손 한 번 뻗는 데 일각이 넘게 걸렸다. 뗀 발을 다시 내딛는 데 이각이 넘게 걸렸다.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걸 느끼기 어렵듯이 그렇게 느릿느릿 장건은 건신동공을 행했다.
조금씩 불편했던 동작과 마음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해진다.
아주 오래된 고향을 찾은 것처럼.
마구 떼를 부리다가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드는 것처럼.
장건은 느린 동작만큼이나 서서히 깊은 심상에 빠져들었다.
예전 기억을 되찾으면서 관조하는 법을 새삼 되새긴다.
장건은 기억 속 어딘가에서,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음에도 폐기해 버렸던…… 혹은 자의로 지워 버렸던 몸의 기억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뜨고, 그것이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장건은 배고픔도 잊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었다.
반나절이 넘도록 장건은 고작 두어 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몸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장건의 심안(心眼)이 몸 안 구석까지 샅샅이 뒤져 정보를 캐내어 온다. 무조건적인 검소함을 추구하는 역근경의 역능(力能)이 장건의 의식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감각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장건은 거의 세 시진 만에 눈을 떴다.
“휴우, 휴우.”
전신이 흠뻑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게 하려는 역근경의 내공과 힘겨루기를 하느라 많이 지쳤다.
그래도 마음은 개운하다.
“역시…… 몸을 움직이는 게 상쾌하긴 해.”
장건은 자못 신기한 듯 손바닥을 폈다가 쥐었다가 해 본다.
역근경의 내공은 계속해서 불만스러워했다. 한데 건신동공이 일정 궤도에 오르자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경팔맥을 따라 흘렀다.
평범하게 걸으려 할 때 반항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걷는 데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빨리 걷는 법, 힘을 덜 들이고 걷는 법 등의 여러 보법과 신법이 널려 있어서 그중 어떤 것도 평범하게 걷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니 평범하게 걷는다는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장건에게 매우 불필요한 동작이다. 당연히 기맥이 막힌 것처럼 내공이 흐르지 않고, 내공을 이용하지 않고 걸으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건신동공을 할 땐, 마지못해서든 어쨌든 내공이 움직이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말로 건신동공의 동작들이 결코 부질없거나 불필요한 동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가 흐르기 가장 좋은 자세이기 때문에 기가 따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러니까 수련의 동작으로 쓰이는 것일 테고 말이다.
“늘 무공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건신동공은 치유의 무공이다. 오래 하면 심신이 건강해지고 병치레가 없어진다. 단전호흡과 운기법을 몰라도 동작이 기를 인도하고 이끌어 스스로 주천을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장건은 건신동공의 동작, 자세를 꼼꼼하게 떠올려 보았다. 동작과 내공이 관계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도 이 정도로 현묘한 뜻이 동작에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무림의 역사와 역사의 무게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수천 년, 수백 년을 이어 오며 수많은 선인들에 의해서 가장 최적화된 동작으로 태어난 것이 건신동공이라는 걸 이해하게 된 탓이다.
장건은 부끄러웠다.
어쩌면 장건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마구 줄이고 압축시켰던 무공들. 그 무공들의 동작 중에도 무공이 본래 가지고 있던 현묘한 뜻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들을 훼손시켰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역사가 검증했던 이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후우우우.”
장건은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 무공은 쉽지 않다.
동작 하나하나에 강호 무림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이 한없이 조그맣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더 배울 것이 있고 연구할 것이 있다는 게 기쁘다. 무공은 알아 가는 재미가 있다. 깊게 파고 또 팔수록 자꾸만 새롭고 멋진 것들이 나온다.
어깨는 늘어트렸지만 장건의 입술에는 금세 작은 미소가 맺힌다.
“헤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가 동작을 따르기도 하지만, 동작에 기가 따를 수도 있다는 걸 건신동공을 통해서 재차 확인했다. 몰랐던 건 아니다. 알고는 있었다. 하나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이것으로 또 하나의 연관된 깨달음을 얻었다.
원호가 말했다.
“무공의 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러워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게 무공에서의 도다.”
기가 동작을 따르는 것, 동작에 기가 따르는 것. 그중 어느 것도 먼저라고 할 수 없다. 또,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해서도 안 되었다.
몸의 움직임과 기의 움직임이 일체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호가 말하는 정종 무공이 추구하는 조화로움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답인가?
정답인가?
아니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것조차 치우침이다.
“도(道)는 변화무쌍하다. 어느 것이 도의 형체인가 물으면, 도는 물과 같아서 천변만변(千變萬變)하는 것이라 답한다. 이것이 도이고, 도의 근본을 추구하는 것이 정도라 할 수 있다.”
장건은 그것조차 이해하게 되었다.
기와 동작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 정도라면, 때에 따라 기가 동작을, 동작이 기를 따를 수도 있는 것 또한 정도이다.
그것이 바로 권도(權道)다.
“아아……!”
모든 것이 밝아진다.
장건은 머릿속에서 환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의 조각들을 잡아냈다.
머릿속의 상념들과 의문들이 정확하게 해답을 찾아가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힘을 절약하고 간결하게 하는 것은 장건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기준이며 절대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준은 절약에 두더라도 절대의 목표는 오롯이 조화.
심신의 조화.
천지만물과의 조화.
반쯤 홀린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반걸음을 내디뎌 마보의 자세를 취했다.
일정 경지에 오른 후로는 거의 취해 본 적이 드문 마보였다.
단전에서부터 풀려 나온 내공이 실타래처럼 몸을 타고 흐른다.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고 단단히 여며 있던 기경팔맥의 혈도가 열리며, 마음이 가라앉고 전신으로 내공이 퍼져 간다.
홍오가 보여 주었던 금강권의 준비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천천히 펼쳐 본다.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게 된 탓에 내공의 반발이 거의 없다. 손을 들고 마보에서 약간 엉거주춤하니 무릎을 굽히는 궁전보(弓箭步)로 옮기면서 양손을 비대칭으로 들어 앞을 겨누는 중정식(中定式)을 취했다.
예전의 장건이라면 기준을 힘의 절감에 두고 자세를 견주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발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굽히는 이상의 기운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장건에게는 궁전보의 자세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화로움에 기준을 두고 있다. 동작에 기가 따르도록 하여 본다.
장건은 자세에 기가 얼마나 잘 따르는가도 천천히 느껴 본다.
아주 미세하게 불편하여 기가 따르지 않는 느낌이다.
‘이게 아닌가……?’
임맥을 흐르는 기가 목과 얼굴을 오를 때 살짝 걸리는 느낌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장건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아주 작은 거리낌이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저절로 빠져서 떨어지고 있어도 느끼기 어렵듯, 그러한 작은 감각이었다.
움직이면 기가 알아서 움직이니까, 라고 생각했을 땐 느낄 수 없던 내공의 불만 어린 작은 외침이다.
이제는 안다. 이것은 조화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번 배운 말로는 비은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뜻도 된다. 조화로워야 한다는 마음에 몸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장건은 똑바로 세우고 있던 고개를 살짝 숙여 본다. 턱을 당기되 코는 들고 눈은 정면으로 향한다.
동작을 아주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내공이 순식간에 원활하게 흐르며 불편한 느낌이 사라진다.
희한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장건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몸과 팔, 발끝을 틀어 위치를 맞추어 본다. 불편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모두 이리저리 고쳐 보고 다듬어 본다.
이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왜 이러한 동작이 필요한지 펼치면서 알게 된다.
절약을 내세울 땐 필요 없던 자세였는데, 원활히 기가 흐르는 데 중점을 두니 가장 적절한 자세가 된다.
장건은 무려 한 시진이나 걸려서 자세를 교정했다.
마지막으로 발끝을 손톱 두께만큼 움직여서 작은 거리낌조차 모두 없애 버렸을 때.
번쩍!
장건은 전신에 벼락이 통과한 듯 짜릿함을 느꼈다.
수첨(手尖)·비첨(鼻尖)·족첨(足尖)!
이른바 무학에서 이르는 삼첨상조(三尖相照)가 그 순간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장건은 찌릿찌릿해진 감각에 전율했다.
“하아아!”
김 어린 탄성이 절로 나왔다.
몸 안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끓고 있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내공은 물론이고 새로 먹은 내공들까지 합해져서, 장건의 내공은 한결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자세에서 오는 기운의 증가였다.
그에 더해져서 굉장한 안정감이 들었다. 임맥을 따라 놓여 있는 약점이 되는 요혈들이 절로 보호되었다.
혈도를 흐르는 내공은 언제 무슨 자세를 취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는 형태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장건은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무시하고 배제해 온 이 동작이 놀라우리만큼 큰 희열과 기운을 더해 주었다. 똑같이 주먹질을 하더라도 이 자세에서라면 훨씬 더 강하게 내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떠오른다.
“무량세…….”
홍오가 보여 주었던 희한한 자세였다. 그것은 당시에 매우 꺼려지는 기이한 자세로만 생각되었다.
하나 이제 와 다시 곱씹어 보니, 그 자세 하나에 얼마나 깊은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와아…….”
희열이 피어올랐다. 벅찬 감동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무학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과정은 길고 어렵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참을 감탄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사방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아쉽다. 밥도 못 먹었다.
그러나 장건은 아쉬웠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장건은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빠져들었다.
준비식을 취했으니, 다음 할 일은 금강권을 펼쳐 보는 것이다.
장건은 준비식에서 몸을 뒤로 슬쩍 빼면서 앞발을 살짝 든다. 뒷발에 중심을 두고 활을 당기는 듯한 모습으로 선다.
내공이 몸을 일주하다가 잔뜩 뒤로 말려서 기다린다.
“얏!”
장건은 좀처럼 내지 않던 기합까지 일기가성으로 지르면서 부드럽게, 하지만 아주 힘껏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허리의 대맥에서 흐르던 내공이 쏜살같이 앞 발바닥으로 향한다.
쿠웅!
바닥이 울릴 정도의 강렬한 진각과 함께 내공이 땅에 부딪쳤다. 그 반발력으로 내려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내공이 다리를 휘감고 올라선다. 다시 허리의 대맥을 돌아서 뒤에서 앞으로 쏠리는 어깨를 타고 흐른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를 거쳐 주먹까지 기운이 흐른다. 자연스럽다. 장건의 몸이 이끄는 것인지, 내공이 이끄는 것인지 선후가 없다. 마음이 기와 몸을 인도한다.
완전히 일권을 내질렀을 때, 주먹 끝에서 거친 폭발음이 일어난다.
푸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면서 장건의 머리카락과 옷깃을 세차게 날린다.
장건은 앞발을 딛고 주먹을 내민 채로 깨어났다.
지금 펼친 건 금강권의 첫 초식이다. 투로를 잇다 말고 딱 잘라서 첫 식만 펼쳤다. 순수하게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해 보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동작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크게 놀랐을 터였다.
완벽하게 힘이 실린 제대로 된 금강권이기 때문이다. 원 자 배에서도 이만큼이나 완전하게 펼치는 이는 거의 없다.
게다가 움직임이 거의 없는 장건이 이렇게 멀쩡히 움직여서 권법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당장에 장건도 이런 평범한 움직임을 하지 못해서 꽤 고생하고 있었던 터니까.
장건 스스로도 놀랐다.
가만히 서 있는 자세에서 갑자기 금강권을 펼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준비식에서 펼쳐지는 금강권은 힘이 넘실거린다. 주먹을 뻗고도 뒤에 남은 힘이 더 뻗어 나갈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장건은 약간 불만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준비식을 완벽하게 해냈을 때처럼 만족감이 들지 않았다. 동작이 어딘가 조화롭지 못했다, 혹은 완전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이것은 변화도 진보도 아니다. 그냥 정석적인 권초였을 뿐. 예전에도 충분히 했던 동작이다. 이게 정답이었다면 굳이 지금처럼 변화를 거듭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힘이 넘실거린다고 느낀 것은 준비식의 힘을 이어받은 탓이지, 금강권 자체가 잘되어서가 아니다.
장건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준비식을 취하고 매우 신중하고 느릿하게 금강권을 펼쳐 본다.
한데 방금 전의 자연스럽던 동작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살짝 딱딱해졌다.
내딛는 발걸음도, 보폭도, 몸을 뒤에서 앞으로 흔드는 움직임도 모두가 방금보다 뻣뻣하다.
그리고 허리춤에서부터 어깨, 팔꿈치, 주먹으로 이르는 지르기의 끝에 푸아아앙!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움직임은 꽤 뻣뻣했는데 소리의 크기는 방금과 같다. 비슷한 힘이 실렸다는 뜻이다.
장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마땅찮다.
또다시 준비식을 취했다.
그러곤 똑같은 금강권의 초식을 펼치는데 움직임은 더 뻣뻣해졌다.
방금과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느냐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머리칼이며 옷깃이 한쪽 방향으로 쏠리면서 뒤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발밑에서도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경(勁)이 실린 것이다.
파우우웅―!
움직임은 더 간략해졌는데 소리는 한층 세찼다.
장건에게 사실 과장된 동작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장건은 다른 사람과 달리 세밀한 근육마저 모두 조절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 남들처럼 크게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같은 힘을 낼 수 있었고, 또 남들처럼 한다고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그것이 통상적인 비은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장건이 가야 할 조화로움은 장건 자신의 조화로움이지, 남이 볼 때의 조화로움은 결코 아니었다.
장건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은 상태에서 오로지 관조와 느낌에 의해서만 동작을 고쳐 가고 있었다.
“후욱…….”
주먹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겨우 세 번 주먹질을 했을 뿐인데도 힘이 들었다. 단순히 초식을 펼치는 게 아니라, 모든 동작에서 관조를 행하고 있는 탓이었다. 힘줄 하나하나, 내공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장건은 잠깐 쉬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금강권을 펼치고 또 펼쳤다.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장건의 움직임은 줄어들었고, 진각의 소리도 작아져 갔다. 몇 번 초식을 펼친 후에는 거의 주먹만 내미는 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붉은 석양빛을 소림사의 누구보다 가장 먼저 받으면서 장건은 수도 없이 금강권을 반복하고 있었다.
☆ ☆ ☆
오황과 곽모수가 장건을 보러 왔다가 침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얘 어디 갔냐?”
오황의 물음에 방을 청소하던 동자승이 멀뚱하게 대답했다.
“의원님이 다 나았다고 해서 어제 나갔는데요?”
“어디로?”
“모르겠어요. 저녁 공양이 끝났으니 속가제자들의 숙소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불러 드릴까요?”
“흐음. 아니, 됐다”
곽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떠나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너도 관심을 두고 있을 줄 알았다. 이상하게 끌리는 놈이라니까, 그놈.”
“아쉽지만 인연도 여기까지겠지. 가세.”
방을 나와서 외원을 걸어 나가며 오황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 가라니까. 어차피 가 봐야 할 일도 없잖아. 마을에 내려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지, 뭐 그리 급해?”
“선약이 잡혀 있어서.”
곽모수가 짧게 대답하더니 오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작별 인사를 하려 했네만.”
“넌 무슨 징그럽게 인사를 눈으로 하냐?”
오황이 찡그린 얼굴로 혀를 차자 곽모수가 웃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벌써 상수가 다 되었는데,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날이 있겠는가.”
“다시 안 봐도 되니까 그만 보자. 너 아직도 내 무공을 잡종이라 써 놓은 거 안 고친 거 다 안다.”
“하하하!”
곽모수가 웃으면서 어깨에 건 서궤를 다시 끌어 올렸다.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
“천만에! 네놈 따위가 내 무공을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는데, 평가했다는 자체가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거야. 내가 너보다 하수도 아니고 말야.”
“그렇군.”
“그냥 보내려니 아쉬운데…….”
오황이 웃으면서 슬쩍 투기를 흘려 보지만, 곽모수는 고개를 저었다. 오황의 투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가야 하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
“아, 맘대로 해. 누가 뭐래? 내가 이 나이 먹고 시비나 거는 사람인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쉬운 티가 역력한 오황이었다.
어느새 소림의 일주문이다.
일주문 위쪽으로 멀리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보인다.
곽모수가 해를 한 번, 그리고 오황을 한 번 보았다.
“잘 있게나.”
두우웅―
갑자기 멀리에서부터 웅장한 소리가 들려온다.
타종(打鐘) 소리와 비슷한데 종소리보다 깊은 울림이 있고 산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떨림마저 담긴 오묘한 소리다.
소실산의 봉우리 전체가 우는 듯하다.
우우우웅…….
단 한 번의 울림이 가슴에 한참이나 남아서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두우우우우웅―
또 한 번의 울림이 일었다.
일주문을 지키고 있던 소림의 승려들과 오가던 승려들도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희한한데?”
오황과 곽모수마저 그 희한한 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소리가 들려온 어딘가를 바라보며 곽모수가 중얼거렸다.
“이별을 고하는 멋진 소리로고.”
“음?”
오황의 의문의 표정을 지었지만 곽모수는 가벼운 미소만을 남긴 채 일주문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럼 또 볼 날이 있겠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곽모수의 뒷모습을 보며 오황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잘 가라, 망할 놈아.”
☆ ☆ ☆
장건은 뒤로 벌러덩 자빠져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푸하아! 하하하…… 하하하하!”
장건은 기침까지 콜록거리면서 웃어 댔다.
“해냈다! 해냈어!”
정말로 해냈다.
석양을 받아 피를 흘리는 듯 붉어진 바위의 한가운데에 주먹 자국이 여실했다. 깊게 흔적을 내지는 못하였으나 누가 봐도 주먹의 자국인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손바닥이 아니라 정권의 흔적이다!
“아이고, 주먹 다 부서지겠네.”
장건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오른 주먹을 어루만졌다. 뼈가 상한 것 같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바위에 흔적을 낼 수 있게 되다니!
완벽한 자세에서 뿜어낸 금강권이 준 쾌락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고 만다.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바위가 몸을 떨었다.
그리고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
큰 종을 치는 것처럼 깊고 웅장한 소리가 났다.
“하아!”
장건은 잠시 동안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냈어…….”
같은 말을 되뇌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타격의 순간, 온몸이 전율했던 느낌이 생생하다.
“되는구나…….”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되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장건의 눈에 또 눈물이 가득해졌다.
이번엔 아파서가 아니라 행복해서였다. 즐거워서였다. 기뻐서였다.
비은.
마치 오랜 숙원을 해결한 듯.
그렇게 장건은 한참이나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꼬르륵…….
“…….”
꼬르르륵!
장건은 배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으려 했다.
갑자기 비은이고 나발이고 뭐가 중요한가, 하는 굉장한 생각이 들었다.
“배, 배고파아아아!”
장건은 대충 옷차림을 수습하고 법당에 들러 황금불상에 인사를 한 후 쏜살같이 이조암을 내려갔다.
☆ ☆ ☆
종소리보다 웅장하고 강한 떨림의 소리.
그 소리를 들은 문원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찔끔 흘렸다.
“고 녀석이 결국 해냈네. 아이, 참. 나이 먹고 왜 눈에서 물이 나지.”
문원은 훌쩍거리다가 먼 산을 내다보며 회상에 젖었다.
“사형이 있었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을까. 사형…… 사형이 애 키우는 재미가 있다고 한 게 이런 거였수?”
누구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문원은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하염없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