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44
제 5 장 살행
소림의 산문을 벗어나 얼마간 길을 내려가던 곽모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흠.”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내려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곳을 바라보는 곽모수다.
노을 져 가는 저녁 하늘에 실처럼 흘러가는 구름이 곽모수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곽모수는 산을 내려가지 않고 기다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가에 아주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곽모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오솔길의 수풀 사이로 걸어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빠르던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
한 식경 남짓. 이제는 아예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걸어가던 곽모수가 이내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하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턱수염은 뻣뻣하게 섰다.
오솔길이 사라진 끄트머리에서 커다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장쯤 되는 공터의 끝은 절벽이다. 그리고 절벽에는 한 사람이 서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등을 보이고 서 있다.
평소보다 훨씬 더 큰 태양.
그보다 큰 등.
그건 아마도 그 등이 천하제일인의 등인 까닭일지도 몰랐다.
“어서 오게나.”
윤언강이 돌아섰다.
품에 허름한 철검을 품고.
곽모수는 처음 윤언강을 발견할 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윤언강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물었다.
“자네가 보낸 서한이었군. 글씨체가 다르던데.”
“마을의 순박한 촌로에게 대신 써서 전해 달라 부탁했지.”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가 왜 나를 이런 장소로 비밀리에 불러내고 그런 살기까지 흘리는 것인가?”
“비밀리에 불러낸 것은 남이 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게 자네인 것은 자네가 이번에 소림을 떠나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네.”
곽모수는 천천히 서궤를 풀어 바닥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네. 솜씨를 보이고 싶었으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스스로 말을 전했더라도 두 팔 벌려 환영했을 터이네. 나야말로 천하제일인의 검이 궁금했으니.”
곽모수가 서궤에서 지필묵을 꺼내려 하자, 윤언강이 팔짱을 사이에 낀 철검을 두어 번 흔들었다.
철그럭, 철그럭.
“그건 필요 없을 것이네.”
곽모수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라는 얼굴로 빤히 윤언강을 바라본다.
윤언강이 말했다.
“아직 살기를 흘리는 이유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았지. 내가 자네에게 살기를 흘린 이유는.”
철그럭.
품에 든 철검을 다시 한 번 더 튕기는 윤언강이다.
“자네를 죽이기 위해서니까.”
곽모수가 희한한 기분으로 윤언강을, 윤언강이 품에 안고 있는 철검을 응시했다.
“최근엔 검을 들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윤언강이 팔짱을 풀고 드디어 오른손에 철검을 들었다. 검집도 없이 날도 서 있지 않은 거친 검이었다. 무라도 제대로 벨 수 있을까 싶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윤언강이 철검으로 발 안쪽을 툭툭 쳤다.
“자네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이 더 있어서 말일세. 아무래도 둘을 상대하려면 검이 필요하다네.”
그 말에 곽모수는 지필묵에서 손을 떼었다.
“아아, 송풍검(松風劍)이었군.”
허름해 보이지만 화산의 삼대 보검 중 하나. 그 어떤 막대한 내공에도 부서지지 않는 천하기물(天下奇物).
지금의 윤언강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검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검을 들고 온 이유가 명백히 들여다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다해 싸우겠다는 의도.
곽모수는 서궤의 뚜껑을 닫고 일어서며 물었다.
“왜?”
“그 전에 내가 먼저 한마디만 묻겠네.”
“말해 보게. 나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
“이대로 천문서원에 돌아가지 않고 떠날 수 있겠는가?”
여러 의미가 깃든 말이었을 텐데도, 곽모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권유인가?”
“권유일세.”
“협박인가?”
“협박일세.”
곽모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 대답은 불가(不可)일세.”
이미 예측했던 바라는 듯 윤언강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네. 자네를 제일 먼저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살기가 짙어졌다.
절벽가에 기이하게 자란 키 작은 고목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간다…….
차라락.
이어 곽모수가 품이 넓은 소매를 흔들었다. 소매 안에서 묵색의 철필이 튀어나와 손에 쥐어졌다.
철필을 손에 쥔 채 곽모수가 윤언강을 보고 물었다.
“자네가 소림을 위협한 무리들의 배후인가?”
“배후?”
윤언강이 씁쓸하게 웃었다.
“배후라는 말은 나 윤언강의 이름에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군. 제자를 위해서, 라고 해 두지.”
곽모수가 흠칫했다.
윤언강의 제자 문사명이 북해빙궁에서 온 사절단과 함께 사라진 사건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흐음?”
감을 잡은 듯 곽모수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천문서원은 이번 일을 반대하지 않는 입장일세.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강호의 일에 개입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
“미안하네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네.”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빤히 윤언강을 응시하던 곽모수가 툭 하고 말을 내뱉듯 수긍했다.
“그렇군.”
곽모수는 슬쩍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윤언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소림사의 일주문을 나설 때부터 감상적인 기분이 들더니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줄 몰랐네.”
더 길게 물어보지 않고 곽모수는 상념을 털어 버린다.
자신을 죽이러 온 눈앞의 살수는 천하제일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조금의 방심이 한순간에 패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하늘에 잠시 두었던 시선을 내리는 순간부터, 곽모수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서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무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이런 때 참으로 편한 일인 것 같네. 그 어떤 대의보다…… 그 어떤 호기심이나 사정보다 앞서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
윤언강도 땅에 내리고 있던 시선을 서서히 들어 올려 곽모수를 마주 보았다.
“반겨 주어 고마우이. 자네의 호승심에 응당 대답을 하겠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천하제일인과 검을 맞대는 일을 기꺼워할 것이네.”
“다른 한 친구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군.”
“분명 그 친구도 그러할 것일세.”
곽모수가 시선을 가볍게 윤언강에게 두었다.
“촉박할 텐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네. 자, 시작하지.”
끄덕.
윤언강은 고개만 끄덕이곤 군말 없이 송풍검을 들었다.
순식간에 십여 장 떨어져 있던 거리가 다섯 장으로 줄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곽모수도 몸을 낮추고 마주 걸음을 내디뎌 거리를 좁혔다.
팟.
눈 깜짝할 사이에 간격이 가까워졌다.
대여섯 걸음 정도의 거리가 되자 윤언강이 송풍검을 가볍게 들어서 원을 그렸다.
천하제일고수가 사용하는 검이라기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한 수였다.
그러나 단순한 몸짓에 검이 울어 댔다.
우르릉!
검명(劍鳴).
검명과 함께 투박한 잿빛 송풍검의 끝에서 뿌연 백광이 피어나왔다. 응축된 백광이 더욱 불투명하고 진한 빛을 뿌리며 곽모수를 덮쳐 갔다.
곽모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팔뚝 길이의 묵직한 철필을 들어 힘껏 허공을 휘저었다.
“구구팔십일격(九九八十一擊). 앙세(仰勢).”
좌에서 우상으로 힘껏 철필을 휘둘러 찍는다.
“중궁(中宮). 평세(平勢).”
앙세의 밑으로 더 힘차게 철필을 긋는다.
곽모수를 향해 날아들던 백광이 철필에 닿지도 않았는데 이리저리 휘어져 빗나간다.
파파팍!
빗나간 백광이 곽모수의 몸을 스쳐 가 창처럼 바닥을 꿰뚫는다. 생겨난 구멍은 손가락 두 개 정도가 들어갈 크기인데 비산하는 흙더미는 삽으로 수십 번을 퍼낼 양이다.
“그때도 그랬었지. 흐름을 관장하는 자.”
공격이 실패했지만 윤언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여유롭게 말을 건넨다.
윤언강은 검의 놀림을 멈추었는데 여전히 검광의 폭격이 곽모수를 향해 쏟아진다. 곽모수도 철필의 움직임을 그만두었는데 빛은 그의 앞에서 굴절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퍼퍽, 퍼퍼퍽!
흙이 뒤집히고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곽모수는 가만히 서서 태연히 대답한다.
“자네의 공명검은 공간을 초월하였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결코 나를 해할 수 없네.”
“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종하여 공간을 장악하는 신묘한 천문서원의 비전. 그것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자신할 만하겠지. 하나…….”
윤언강이 되뇌듯 말하며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곽모수와 윤언강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이제 검을 들면 닿을까 말까 한 거리다.
윤언강은 곽모수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며 검무를 추듯 걸음을 놀렸다. 검이 수십 개의 검영을 뿌리며 곽모수를 에워싼다.
피핏.
검의 궤적이 만들어 내는 파공(破空)만으로 곽모수의 얼굴에 두 줄기의 검흔이 생겼다. 곽모수는 눈을 찌푸리며 철필을 왁 쥐었다. 붓끝을 아래로 하여 중간을 쥐는 악필법이다.
곽모수도 물 흐르듯 보법을 밟았다. 윤언강과 똑같은 걸음으로 똑같이 마주 보면서 철필을 휘두른다.
송풍검과 철필이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허공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튀었다.
백광이 현란하게 뿌려지고, 검광과 새빨간 석양빛과 철필이 그려 내는 묵광(墨光)이 기이하게 섞여 돌아간다. 빛이 일그러져서 휘어지고 물결치듯 이어지며 튕겨진다.
상대를 공격하고 베고 쓰러트리는 싸움이 아니다.
흐름의 싸움이다.
공간을 장악하려는 싸움이다.
둘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온통 일그러져 있다. 꼬이고 비틀렸다. 선 하나도 제대로 일직선인 것이 없다.
핏.
하나의 선에 곽모수의 앞섶이 베어져 나갔다.
흐름을 관장하는 자가 흐름의 싸움에서 밀리는 것인가?
표정이 굳어 가는 곽모수에 비해 윤언강은 여전히 여유롭게 검무를 추는 듯하다. 처음엔 무엇인지도 모를 검무였는데, 서서히 매화검법의 형상을 갖추어 가기 시작한다.
칵!
어느 순간 검고 굵은 선이 나뭇가지가 자라듯 공간을 비집고 사선으로 돋아났다.
매화의 나뭇가지가 곽모수의 공간을 비집고 자라난 것이다.
곽모수가 침착하게 철필을 크게 격자 모양으로 쳐 냈다.
“간선(間線). 각체(各體)의 전형(典型)!”
타타탁.
먹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그려 낸 듯한 수지(樹枝) 형상의 굵은 선이 가닥가닥 끊어져 나갔다.
모처럼 윤언강의 한 수가 펼쳐졌는데 제대로 대응하여 순식간에 차단한 모습이다.
한데 하나가 아니다.
공간 이곳저곳에서 수지가 돋아난다.
드드득.
단단한 벽이 억지로 파열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무뿌리가 암석을 꿰뚫고 부수면서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 듯한 소리다.
곽모수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약간 급해져서 동작이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에 반해 윤언강의 검초는 더욱 유려해졌다. 혼자서 검무를 추고 있을 뿐이지, 상대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드득!
잘려 나간 수지에서마저 또 다른 수지가 돋아난다.
곽모수가 한 발 밀려났다.
공간을 빼앗겼다!
자신이 점하고 있던 공간에서 물러서 버린 것이다!
그 순간 곽모수가 원래 있던 자리를 파고든 검은 수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수지에서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 피어난 꽃이 만개(滿開)하여 다섯 개의 꽃잎을 만든다.
꽃잎이 자라나 흩어진다.
일그러진 선들과 흔들리는 공간 중에 무수한 꽃잎들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하나둘 떨어지는 꽃잎에 곽모수의 소매와 옷깃이 날카롭게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잘리고 베인 틈으로 피까지 비친다.
싸악! 싹!
수십, 수백 개의 꽃잎이…… 혹은 검기라 말할 수 있는 그것이 스러지고 피어나며 곽모수의 전면을 뒤덮었다.
작고 가는 핏물들이 수천 갈래가 되어 곽모수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곽모수가 이를 악물고 철필을 뻗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단숨에 철필을 그었다.
“불(?)!”
단호한 기합과 함께 수많은 꽃잎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반대의 충격이 해일처럼 곽모수를 덮쳤다. 곽모수는 필사적으로 철필을 휘두르며 검기의 해일과 맞섰다.
한번 터진 둑이 봇물을 막기 어렵듯.
곽모수는 삽시간에 열 획을 그어 공간을 점했는데도 충격을 모두 막아 낼 수 없었다.
항거하기 어려운 힘에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린 곽모수가 겨우 검기의 해일을 모두 해소하였을 때.
자신이 밀려난 만큼의 거리에서 윤언강이 송풍검을 든 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곽모수가 온통 피에 젖은 채 망연히 윤언강을 보고 있다가 철필을 떨어트렸다.
콱 소리를 내며 철필이 묵직하게 땅에 박혔다.
곽모수가 도관을 매만지고 찢기고 잘려 나간 의관을 정제하였다. 그리고 윤언강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남겼다.
“천문비록을…….”
윤언강이 말을 끊었다.
“나중에 찾아가게.”
곽모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윽고.
송풍검이 노을빛에 흔들렸다.
☆ ☆ ☆
흠칫.
오황이 살짝 몸을 떨었다.
곽모수가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오황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소림에서 불러 줄 일도 없으니 내일은 나도 돌아갈까나.’라고 중얼거리면서 이제 막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갑작스레 찻잔을 들고 있던 손등을 따라 팔등에 쭉 소름이 돋았다.
쾅!
오황은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 번 발을 굴러 이 층 전각의 지붕 위로 뛰어올라 소림사의 산문 쪽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황은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양팔을 크게 휘둘러 가슴 앞에 모았다가 한 손을 위로 뻗고 다른 한 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밑으로 뻗어 천지합일(天地合一)의 형(形)을 이루었다.
땅의 기운이 양손을 통해 오황에게 유입되고, 오황의 감각은 그와 반대로 하늘을 통해 뻗어 나간다.
놀라서 지붕으로 뛰어 올라간 것과 달리 고요한 평정을 유지하며 기감을 확장시킨다.
불현듯.
오황이 눈을 떴다.
소림의 산문 밖 산허리에서, 한 줄기의 기파(氣波)가 지상에서부터 층층이 가로놓인 벽을 뚫고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황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것도 잠시.
오황은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공양간에서 막 찬밥을 얻어먹고 나온 장건이 외원으로 돌아오다가 그런 오황을 보았다.
쉬익!
오황은 장건을 보지 못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쏜살같이 장건을 지나쳐 외원을 뛰쳐나갔다.
“오황 할아버…….”
장건은 오황을 부르려다가 말았다. 오황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휘이잉.
오황이 지나간 후 한참인데 그제야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옷깃이 휘날린다. 장건은 옷깃을 붙들고 오황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상하네. 무슨 일이지?”
오황이 상체를 앞으로 급격히 기울여 최대한 중심을 앞쪽에 실었다는 걸 포착한 장건이었다. 오황 정도의 고수라면 가만히 서서도 중심을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충분한 속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몸을 기울이면 중심이 더 크게 이동하여 한층 움직임에 힘이 붙게 된다.
이제 장건은 그것이 비은의 결과라는 걸 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그러한 몸의 자세를 만들어 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고.
장건은 오황이 맨날 자연스러움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을 되새겼다. 그냥 흔히 쓰는 평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얘기를 하나 보다.”
장건은 뿌듯했다. 하나씩 깨달아 갈 때마다,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마다 기쁘기 그지없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하나를 알면 또 다른 하나를 알게 된다.
물론 그다음에 다시 나타나는 수수께끼는 참으로 골치 아픈 것이지만.
“그건 그렇고…….”
장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황 할아버지가 왜 저렇게 급하신지 모르겠네.”
그 순간.
장건 역시 섬뜩한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
“어? 뭐지?”
불길한 감각에 장건은 바짝 긴장을 하고 기다렸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세 호흡을 길게 내뱉은 후.
장건은 그것을 맞이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하고도 익숙한 느낌이 몸을 죄어 왔다.
장건은 신음을 내뱉으며 가슴을 쥐었다.
“으윽!”
어디에선가부터 물결치는 동심원처럼 서서히 기파가 번져 오고 있었다.
장건은 기파가 자신의 몸을 통과해서 계속해서 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실로 어마어마한 공력이었다. 한순간 기파가 지나갈 때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그것은 또 굉장히 익숙한 기파였다.
“헉헉!”
장건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이 느낀 이 감각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감각은 정확하다. 그러나 그걸 어째서 지금 느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 할아버지가 왜…….”
오황은 그것을 이미 느끼고 움직인 모양이다.
장건은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이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폭발을 억누르기 위해서, 감정의 불길을 따라서 마구 뛰어다니는 내공을 단속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 ☆ ☆
기파를 느낀 것은 오황이나 장건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걸렸지만 소림의 모두가 기파를 느꼈다.
무던한 이들이야 그냥 ‘왜 괜히 소름이 끼치지?’ 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무승들은 달랐다.
가공할 공력의 분출이 와 닿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림 전체가 술렁였다.
법당에서 저녁 예불을 드리던 승려들도 깜짝 놀랐다.
“방장 사형!”
“소란 떨지 마라.”
다른 이들의 놀란 외침에도 불구하고 독경을 하던 원호는 조용히 독경을 멈추고 일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란스럽지 않은 움직임으로 법당을 나온 원호는 문간을 나서자마자 표정을 달리했다.
으드득.
마치 다른 사람처럼 삽시간에 분노의 표정이 떠올랐다.
“감히 본사를 어찌 보고……!”
뒤따라 나온 승려들도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누군가 공력을 폭발시켜 본사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본사의 인근에서요!”
“우리가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이건 참을 수 없습니다. 이것마저 모른 척 넘어간다면 본사는 강호에서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겁니다.”
원호가 말을 잘랐다.
“나도 안다. 하지만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예? 그럼…….”
“검성이다.”
“예엣?”
승려들이 당황했다.
“아니, 왜…….”
“왜 검성이 화산에 있지 않고 본사에 와 있는 겁니까?”
원호의 눈가에 불안함이 스쳐 갔다.
“마해 곽모수 선생!”
곽모수가 소림을 떠나며 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생각할 게 없다.
게다가 검성 윤언강은 이득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언제나 뚜렷한 목표와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그런 그가 곽모수와?
‘위험하다!’
원호의 전신에 끔찍한 경고가 울렸다.
원호가 급히 명했다.
“당장 나한들을 준비시켜라! 동원할 수 있는 나한들은 모두!”
뎅― 뎅― 뎅―!
석양이 저물어 가는 초저녁.
한가로이 향 냄새와 독경 소리가 울려야 할 소림사에 긴박한 타종 소리가 울렸다.
☆ ☆ ☆
오황은 그야말로 나는 듯이 산길을 뛰어 내려갔다.
지독한 살기의 여운이 감도는 까닭에 딱히 이정표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한 걸음에 이삼 장씩을 뛰어 단숨에 마해 곽모수가 지나간 소로를 지나 절벽 위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펼쳐진 광경만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파인 흔적.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사람인지 뭔지 모를 너저분한 무엇…… 곽모수.
서산으로 거의 다 넘어간 태양빛을 잡아먹으며 거뭇거뭇해져 가는 사위.
돌아보는 윤언강의 얼굴에 어딘가 공허함이 엿보이는 것은 오황의 착각이었을까?
“지난번 꽃 필 적엔 혹한의 찬 겨울이었지(向來開處當嚴冬). 흰 꽃은 희지 않고 붉은 꽃도 붉지 못했네(白者未白紅未紅).”
사람을 피에 절여 놓은 장본인치고는 어조가 무서우리만치 담담했다.
오황은 말문이 막혔다.
“너,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윤언강이 복잡한 눈으로 오황을 보며 단 한 마디를 되물었다.
“싫은가?”
피비린내를 실은 바람 한 줄기가 도도히 불어왔다.
윤언강의 행동에 대해 수십 가지의 추측을 하고, 수백 가지의 추궁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 한 마디에 오황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오황은 입에 긴 미소를 걸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냐는 듯.
이런 천채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두고서는 다른 어떤 이유도 필요 없는 것 아니냐는 듯.
기꺼워 죽겠다는 얼굴로 오황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
☆ ☆ ☆
번쩍.
빛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산중의 이른 저녁에 마른번개가 작열했다.
헐레벌떡 일주문의 계단을 내려가 산문 밖으로 나간 장건은 몸서리를 쳤다.
두 번째였다.
지독하고 끔찍한 기운이.
장건은 잠깐 멈추었다가 더욱 속도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건도 절벽의 공터에 도착했다.
무수하게 파괴되고 구멍 난 공터의 땅거죽은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큰 격전이 벌어졌었는지, 온통 사방이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장건을 소름 끼치게 만든 것은 서로 공간을 두고 서 있는 두 사람이었다.
검성, 윤언강이 검을 천천히 내린다.
그를 상대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평범한 체구의 노인이 몸을 한차례 떤다.
노인의 몸이 점차 거세게 떨기 시작한다.
“어이…….”
노인이 윤언강에게 말을 걸었다.
윤언강은 가만히 검을 갈무리하고 노인의 뒷말을 기다린다.
노인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천하제일인의 검이란 이런 것이었군…… 강하구나, 네놈…….”
피잇!
노인의 몸에서 가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말을 내뱉은 노인이 허무하게 쓰러져 버렸다.
장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장건에게 등을 보인 것은 분명 오황이었다.
오황이, 그리고 저기 쓰러져 있는 곽모수가…… 모두 검성 윤언강의 손에 당했다!
눈앞에서 홍오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먹을 것도 챙겨 주고 무공도 가르쳐 준 친할아버지와도 같던 홍오가 쓰러지던 모습이 겹쳐진다. 그때의 충격이 벼락처럼 장건의 전신을 훑고 스쳐 갔다.
그리고 딱히 사이가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새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어 버린 오황마저 검성의 손에 무너졌다.
덜덜덜.
무릎이 떨리고 이가 다닥다닥 부딪쳤다.
공포인가.
아니면 분노인가.
어느 것인지 장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장건의 시야가 온통 시커메지면서 윤언강에게 초점이 집중되었다. 장건의 눈에 윤언강만이 들어온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장건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있는 힘껏.
장건이 소리쳤다.
“검서―어―엉!”
윤언강이 장건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또 너로구나.”
사람을 둘이나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고 ‘너로구나’라고 묻는데 감정도 없는 듯 담담하다.
그것이 장건을 더욱 서늘하게,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익!”
장건이 공력을 끌어 올리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대라도 때리지 않으면 미쳐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스스로의 폭력성을 자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윤언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가 송풍검을 들어 장건을 가리킨다.
갑자기 가느다란 선이 생겨나 장건의 가슴에 와 닿았다. 사위가 어둑한데도 반짝거리며 빛나는 선이 뚜렷하다.
“윽…….”
심장이 죄여 온다.
장건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윤언강의 ‘의지’가 장건에게 이어져 닿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공명검의 칼날이 자비 없이 몸을 난도질할 것이다.
윤언강의 ‘의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고 섰다.
장건을 가로막은 동시에 보호하려는 듯이 윤언강을 바라보며 선 것이다.
“그만두어. 아직 애잖아.”
불목하니 노인 문원이었다.
윤언강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연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아직 정정하시군요.”
“예의 차리는 척하지 마. 설마 시주는 나를 몰랐다 그러시게?”
윤언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문원은 장건을 등 뒤에 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애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거 아냐. 빨리 가서 발 닦고 자라.”
장건은 가만히 자신의 가슴에 이어진 가는 은선(銀線)을 바라보았다.
“소용없어요. 할아버지.”
윤언강의 의지는 문원의 존재를 무시했다. 공간을 뛰어넘어 장건에게 닿았다. 그것은 일직선이되 일직선이라고 할 수 없는 선이었다.
윤언강이 있는 공간과 장건이 있는 공간을 뚝 떼어서 붙여 놓은 듯했다. 공간은 부정형의 구와 같은 모습인데 공간 안에서 이어지는 선은 직선이다. 그러나 문원이 있는 공간을 뚝 떼어 버리고 부정형의 공간과 공간을 이은 그 사이는 은하수의 미려한 선처럼 휘어져서 통과하고 있었다.
장건은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윤언강의 의지는, 혹은 의지가 이어져 있는 한은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소용없다는 걸.
문원은 장건의 말뜻을 잘못 알아들었다.
“너 하나 살릴 재주는 된다. 천하제일인이 되더니 갑자기 미친 시주가 된 나쁜 사람한테서.”
“아뇨. 안 될 거예요.”
장건은 가슴에 이어진 의지의 선을 손가락으로 만지려 해 보았다. 손가락이 은선에 닿자 은선의 중간이 뚝 끊어진다. 하지만 은선 자체는 가로막은 손가락을 피해 다른 공간에서 이어져 여전히 가슴에 닿아 있다.
내공을 끌어 올려서 집으려 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허상이나 신기루를 만지려 해 봐야 소용없는 것처럼 허공에 작은 파문이 일며 다른 곳에서부터 의지의 선이 이어진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문원이 장건의 어조에 의아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장건은 계속 가슴팍을 이리저리 손으로 휘저어 보면서 대답했다.
“공명검은…… 막을 방법이 없어요.”
“뭐? 이렇게 내가 바짝 붙어 있는데?”
“네. 이미 닿아 있어요.”
문원이 ‘끙!’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곤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장건의 말에 이상하게 신뢰가 간다.
한데 그 순간에도 장건이 자꾸만 자신의 가슴팍을 쓰다듬거나 하는 것을 본 윤언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역시 넌…….”
윤언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르륵.
살기가 돋는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문원이 일갈하며 윤언강에게 달려들었다.
“그만두라고―!”
그 순간 공간의 흐름이 단절되었다.
장건은 이를 악물었다.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장건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나한보를 밟고 동시에 금강부동신법으로 몸을 연속으로 회전시켜 주요 혈도를 가렸다. 기의 가닥으로 전면을 가로막아 그물처럼 엉키게 만들었다. 용조수로 가슴을 보호하며 허공에 수많은 수영(手影)을 뿌렸고, 공력을 맞더라도 흘릴 수 있도록 전신 근육과 뼈를 태극경의 묘리에 따라 움직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을 총망라한 이번 장건의 한 수는 그야말로 절대의 방어라고 할 수 있었다.
설사 태산을 무너트릴 수 있는 공력으로 장건을 쳤더라도 장건에게 큰 해를 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팽그르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장건이 회전하면서 허공을 유영했다.
그사이 문원의 장풍이 윤언강에게 날아들었다.
“이노오옴!”
윤언강은 피하지도 않았다.
퍼퍽!
윤언강의 어깨와 명치 부근이 푹푹 파이면서 뿌연 황색의 기운이 터졌다. 옷자락이 요동을 쳤다.
달마장(達磨掌)!
아름드리 고목을 일장으로 부러트릴 수 있는 위력이며 탕마(蕩魔)의 기운이 담긴 소림의 상승 무공!
그러나 윤언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한 와중에도 문원은 크게 놀랐다. 단순한 호신기로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탕마멸사의 현묘한 이치를 담은 무공들은 호신기를 무시하고 내부를 진탕시키는 위력이 있었다. 그런 장력을 대놓고 맞는다는 건 제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 할지라도 만용에 가까운 일이다.
“그만두라니까!”
쉬어 버리다 못해서 거칠어진 목소리로 문원이 호조(虎爪)로 윤언강의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윤언강의 허벅지를 밟고 뒤로 돌아 등 뒤에 매달린 자세로 목을 움켜쥐고 소리를 지른다.
“그만둬!”
윤언강은 아까부터 송풍검을 내민 그 자세로 서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여지없이 문원의 호조에 목을 내준 상태였다.
“그만두지 않으면 목을 부러트릴 테다!”
하지만 윤언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웃는 것이 어깨 위에 올라탄 문원에게도 느껴진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실체가 있는 것으로 실체이며 실체가 아닌 것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윤언강의 그 말이 문원에게 하는 말이 아님은 명확하다.
문원은 깨달았다.
윤언강은 문원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윤언강의 시선은 오로지 장건에게 향해 있을 따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건과 한 수를 겨루는 데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건은?
문원은 윤언강의 목줄기를 틀어쥔 채 앞을 보았다.
장건은 한참이나 허공을 뛰고 돌고 하다가 이제 땅에 내려선 참이었다.
팔랑.
장건의 옷 앞섶이 손가락 두어 마디 길이로 잘려서 떨어지고 있었다.
장건은 알고 있었다.
죽일 수 있는데도 참았다.
누가 보면 마치 자신이 검성의 공명검을 막아 낸 듯하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에 옷깃만 잘라 냈다. 장건의 온 힘을 다한 방어를 뚫고 새로이 의지가 바뀌었다. 장건은 무력했다. 자신의 전신 요혈을 더듬는 윤언강의 ‘의지’를 마냥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수로도 윤언강의 의지를 막거나…… 아니, 막기는커녕 방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목표를 옮겨서 마지막엔 옷깃을 절삭해 버린 것이다.
아연한 장견의 안색에 문원은 식겁했다.
“이놈아! 괜찮아? 괜찮으냐고!”
공명검은 공간을 뛰어넘는다. 겉으로 보기 멀쩡해도 속이 온통 난자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원의 걱정은 더 컸다.
그에 대한 대답은 장건이 아니라 윤언강이 했다.
“이제 놓아주시지요. 아이는 괜찮을 겁니다.”
윤언강의 담담한 말에 문원은 자기도 모르게 윤언강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너, 너 이놈 미, 미쳤…….”
문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윤언강이 핼쑥해진 얼굴로 송품검을 내리는데 어깨와 명치에서 피가 터져 흘러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비록 우내십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각의 사제로 전대의 고수인 문원이었다. 그의 달마장을 몸으로 받아 냈으니 윤언강이 멀쩡할 리가 없는 게 사실 정상인 것이다.
하나 문원이 놀란 건 속으로 들어가야 할 장력이 그저 외부에서 터져 버렸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문원의 고강한 장력이 윤언강의 호신기는 통과했으나 정작 몸 안에까지는 파고들지 못했다.
그것은 윤언강의 내공과 문원의 내공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원이 쌓아 온 내공이 적지 않은데 그 두 배가 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원의 장력이 윤언강의 내공에 밀려 외부에서 터져 버린 것은…….
“진원진기를…….”
생명의 근원.
소모하는 것이 곧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은 힘.
윤언강이 그러한 진원진기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원은 윤언강을 노려보다가 장건에게로 뛰어갔다.
“얘야, 얘야. 괜찮으니?”
윤언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문원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천 년을 산들 이룬 것이 없으면 일 년을 산 자와 무엇이 다를 것이며, 천하의 명검이라 할지라도 광에서 먼지를 쓰고 있으면 그 어찌 어장검(魚腸劍)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던 윤언강이 무언가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이제야 오는군.”
윤언강이 문원을 향해 크지 않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르신도 자리를 뜨셔야겠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문원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문원은 윤언강을 매우 마뜩찮은 얼굴로 째려보았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나쁜 시주 놈…….”
은노의 존재 자체를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해 왔던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괜찮냐? 난 먼저 갈 테니까 나중에 다시 보자. 알았지?”
문원의 말에도 장건은 혼이 나간 것처럼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문원이 바람처럼 흔적을 감추며 사라졌다.
윤언강은 급하지 않게 움직였다. 핏물에 절어 버린 곽모수와 오황을 들어 양쪽 어깨에 걸쳤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을 헤치고 수많은 무승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는 이만 수백 명이 넘었다. 뒤쪽 절벽을 제외하고는 사람으로 포위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가장 앞장서서 원호가 걸어 나왔다.
원호의 눈에 상황이 보였다.
부서지고 파헤쳐진 공터.
피투성이가 되어 윤언강의 양 어깨에 걸쳐진 두 사람.
그리고 얼이 빠진 듯 서 있는 장건.
원호가 손짓을 했다.
나한 둘이 앞으로 나가서 장건을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수풀을 벗어나서 공터로 발을 내딛는 순간, 피를 토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쫘악!
수풀에서부터 공터로 나오는 공간에 긴 선이 그어졌다. 양 어깨에 사람을 걸머진 윤언강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소림의 무승들은 섣불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공명검!
절벽 위 전체에 싸늘하고 위험한 바람이 감돌았다.
원호가 바로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무승들이 순간 긴장했다. 이미 원호는 윤언강이 그어 놓은 선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윤언강의 손끝이 움직이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원호의 배포에 윤언강도 살짝 질린 듯했다.
“검성 선배.”
원호의 호칭에 윤언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선배라…….”
원호가 핏발 선 눈으로 윤언강을 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내 말을 먼저 듣게.”
윤언강이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했다.
“삼일천하(三日天下)를 지낸 후에 많은 고민을 했네.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여…….”
원호도 윤언강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게 고민의 결과입니까?”
“그렇다네.”
원호가 사나운 표정으로 웃었다.
“치워 주겠다? 후배들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될 것들을? 화산의 힘으로? 그럼 남는 것은 화산뿐입니까?”
윤언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호가 불처럼 분노하며 소리쳤다.
“진심으로 후대를 위할 생각이라면,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받고 자란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윤언강은 원호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말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내가 그리 안달복달하는 부모였다면 지금쯤은 사명이를 찾아다니고 있는 게 옳겠지.”
갑자기 튀어나온 윤언강의 제자, 행방불명된 문사명의 이야기에 원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식은 아비를 넘어설 때에 비로소 성장한다고 한다네. 그래서 난 자식이 쉽게 아비를 넘어서지 못할 과업을 쌓을 작정일세. 그것으로 더 큰 성장을 경험할 거라 믿네.”
원호는 물론이고 소림의 모든 무승들이 경악해 마지 않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란……!”
“당연히 아닐세. 겨우 이 정도로?”
윤언강이 허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멍청해져 버린 장건과 눈이 마주쳤다. 윤언강의 시선이 천으로 둘둘 감아 등에 멘 화산의 검에 가 닿았다.
“아 참.”
윤언강이 가볍게 소매를 떨쳤다.
무언가가 아무 살의 없이 허공을 날아 장건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장건은 생각 없이 주워 들었다.
봉투에 든 것.
화산의 소요매화검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소지 허가증…….
“그 검. 잘 가지고 있거라. 금세 찾으러 올 테니.”
윤언강이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을 짊어진 채 움직이려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원호가 외쳤다.
“멈추시오! 제아무리 검성 선배라도 무사히 소림을 빠져나갈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라 경고하겠소!”
소림의 무승들이 분연히 움직여서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진법으로 윤언강을 상대할 생각이다.
윤언강이 살짝 고개를 떨구더니 픽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마치 공터를 삼면에서 포위하고 있는 수백 소림의 무승들을 농락하기라도 하듯 훌쩍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천 길 낭떠러지와 기암괴석이 돋아난 절벽 아래로.
“아앗!”
놀란 원호가 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윤언강은 두 사람과 함께 구름 사이로 사라진 후였다.
황혼(黃昏)의 마지막 빛이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새빨갛게 천지를 물들였다가…….
이내 완연한 어둠으로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