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45
제 6 장 굉목의 판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산식 사건이 있은 지 겨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동네북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는 자조 어린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대놓고 얘기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주 회의가 열렸지만 원주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관부의 판결을 받아들인 건 미래를 위해 잠시 웅크리자는 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데 기껏 제자들을 달래 놨더니만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군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원…….”
“다른 데도 아니고 바로 지척에서 본사의 손님이 암살당하다니요. 게다가 그걸 막지 못했지요. 본사의 명운이 다했다고 다들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십 년 후를 기약한다 하더라도 이미 본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다시 일어설 기운이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원주들이 저마다 불평을 내뱉었다.
“여기서 얕보이고, 저기서 얕보이고. 우리 소림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오게 된 건지…….”
굉 자 배의 자리를 물려받아 인수인계를 제대로 끝내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인수인계를 하면 뭐하겠는가. 앞날이 어두컴컴한 것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회의를 주재한 원호까지도 별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건이 그 아이 하나만은 건졌군요.”
원주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장건은 당시 상황의 유일무이한 목격자였다. 장건이 오황이나 곽모수를 돕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나마 소림에서 가장 빨리 달려간 이었다. 심지어 장건은 기파의 주인이 검성이라는 것도 정확히 읽어 냈다 했다.
물론 거리가 가까웠기에 기파를 좀 더 빠르고 명확하게 읽어 낸 이유도 있을지 모른다. 하나 어쨌든 간에 아이보다도 못했다는 사실이 원주들에게는 자못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그 아이가 강호에서 주목받는 천재든, 타 문파의 절기를 이어받아서 소림의 제자인지 의심스러운 아이든 간에.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방장 사형의 말씀대로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작금의 사태가 본사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군요.”
여기저기서 낮은 한숨과 불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히 소림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쇠약해질 터였다. 아니, 이미 내부로는 쇠약해질 만큼 쇠약해졌다. 그래서 소림으로서는, 원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승자박(自繩自縛)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무언가를 하자고 외쳐도 공허해질 뿐이다. 의욕이 없다. 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당하면 의기소침해지는 게 당연하다. 당장 십 년이라는 세월을 어찌 보내야 할지 멀기만 하다.
마치 쇠망해 가는 문파의 제자들처럼 절망적이었다. 이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아무도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원림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원호를 보고 말했다.
“일단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일을 강호에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말입니다.”
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게.”
“가장 좋지 않은 건 이번 검성의 행동이 매우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일주문의 나한들에 따르면 마해 선생이 본사를 떠난 직후, 급하게 오황 선배가 달려 나갔다고 합니다. 기를 공명시켜 차례로 불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미 퇴로를 확보해 둔 상태에서 저희들이 현장을 목격하게 만들었지요.”
원주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하였다.
윤언강은 영악하다. 그런 그가 소림의 모든 이들이 알아챌 정도로 기파를 뿌렸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보여 주기 위해 불렀다는 뜻이다.
“검성은…… 아마도 본사가 강호에 자신의 행동을 알리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호가 짤막히 물었다.
“이유는?”
“검성이 남겼던 마지막 말에 따르면, 그는 업적을 남기고 싶다 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만구전파(萬口傳播)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만구전파란 여러 사람이 떠들어서 세상에 알리게 한다는 뜻이다.
“강호의 혼란. 검성은 관부의 행동과 그 의도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은퇴해야 할 고수들을 직접 제거함으로써 삼일천하였던 천하제일의 명예를 여전히 화산에 두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만구전파를 통해 여전히 화산이 강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겠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했으니, 검성은 계속해서 살행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강호가 대혼란 속에서 수없이 많은 비무행이 벌어진다고 해도 벌써 최고수들은 검성의 손에 사라지게 되는 터. 결국 아무리 다른 이들이 날고 기어도 부처님 손바닥이 되어 버리는 거지요. 이미 최고의 자리는 화산이 선수를 쳐서 차지해 버린 후일 테니까요. 그리고 검성이 은퇴를 하면 화산은 영원히 한 시대의 패자(覇者)라는 영예를 얻을 것입니다.”
다른 원주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그의 뜻대로 강호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굳이 본사가 검성의 뜻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몇몇 원주들이 그에 동의했다.
잠시 생각하던 원호가 말했다.
“본사에서 이 일을 알리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알려질 거고, 그럴 거라면 지금 알리는 것이 낫겠네.”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사의 무력함을 세상에 알리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호가 염주를 굴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좀 이기적이 되어야겠네. 이기적이 되고 싶네.”
“네? 그게 무슨 말씀…….”
원주들이 원호를 쳐다보았다.
“소림은 늘 강호의 환난 때마다 앞장서서 맞서 왔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끌어내리려 한다거나 흠집을 못 내 안달했지. 이제 그들도 알 때가 되었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소림이 없는 강호의 혼란이란 게 어떠한지를.”
“예엣?”
“방장 사형?”
원주들은 다소 황망해했다. 원호의 지금 발언은 조금도 승려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맞았으니 너도 맞아 봐라! 하는 아이의 행동과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원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강호는 소림이 화산의 독주를 막아 주기를 바라겠지. 고삐 풀린 것처럼 날뛰는 강호를 진정시킬 사람을 원하겠지. 하지만 이제 그들이 생각하는 소림은 없네.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원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진산식에서의 일로 본사의 입지는 크게 줄었네. 그러나 그들은 위기가 다가오면 습관처럼 여전히 본사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네. 나는 그러한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네. 본사의 제자들이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꼴은 못 보겠네. 이번 일을 강호에 알리면서 본사는 공개적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완전히 중단토록 할 것일세.”
기실 관부에 의해 손발이 묶인 셈이긴 하지만, 그것이 강호에서의 발언권을 크게 축소시키고 실질적인 봉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소림사가 강호의 일에서 아주 벗어나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원호는 이참에 아예 대외 행사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스스로 몸을 움츠리고 나아갈 때를 기다리듯이.
원주들이 저마다 고민하며 원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결국엔 원호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원 자 배는 강호행에서 고난과 역경을 가장 심하게 겪었던 세대다.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끼어 봐야 좋을 것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자기를 지킬 힘이 없으면 원호가 말한 것처럼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져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원호의 말은 다소 감정적이긴 했으나 조금도 틀린 데가 없었다.
원주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검성이 일으킨 사건을 강호에 공표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동시에 대외적 활동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세부적인 안도 나왔다.
이후로도 몇 가지의 안건에 대해 논의가 끝난 후.
“자…….”
원호가 마무리 발언을 했다.
“경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건 나도 잘 알고 있네. 이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원주들이 귀를 기울이자, 원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굉목 사숙의 판결을 진행할 때가 되었네.”
☆ ☆ ☆
장건은 외원의 실내 수련장에서 서 있었다.
약간 얼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다. 평소 등에 메고만 다녔지 풀어 내지 않았던 검까지 손에 들었다.
소요매화검의 하얗고 매끄러운 검신이 번뜩였다.
장건은 소요매화검을 들어 올리고 가만히 선 채로 굳은 듯 멈춰 있었다.
“실체가 없는 것과 실체가 있는 것.”
윤언강이 펼쳤던 공명검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떠올리며 자세도 고쳐 보고 검도 휘둘러 본다. 물론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끔찍해져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지만, 도망가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후웅?”
장건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장건을 부른다.
“얘야.”
장건은 상념에서 깨어나 수련장으로 들어오는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원이 문 옆 의자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장건이 검을 내리고 반색했다.
“할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나야, 뭐…….”
“그때…… 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에이, 뭐 그런 걸로.”
문원이 쭈글쭈글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곤 말을 돌렸다.
“뭐…… 잘되어 가니? 지난번처럼 너무 심취할까 봐 일부러 말 걸었어. 그런 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심마에 들었을 때처럼 장건이 잘못될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장건이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소요매화검을 검집에 넣고 천으로 둘둘 감으며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되어서 감탄하고 있었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때 느낀 걸 더 확실히 알게 됐어요.”
“응?”
그러고 보니 장건은 그때 얼이 나간 듯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름대로 깨달음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호오, 그래?”
궁금한데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문원이었다. 남의 깨달음을 묻는 게 예의는 아니다.
하지만 장건은 오히려 자기가 먼저 털어놓았다.
“검성 할아버지가 말한 실체가 없는 것과 있는 것, 그게 바로 비은이라는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원호 사백님, 아니, 방장 사백님께 그걸 배웠거든요.”
물론 처음은 마해 곽모수에게서였다.
“으, 응?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구나.”
비은에 대하여 잘 아는 척할까, 조금만 아는 척할까 고민하면서 말을 흐린 문원이었다.
하나 말을 하다가 곽모수를 떠올린 장건의 표정이 약간 시무룩해지자 문원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근데 넌 왜 그게 비은을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했니?”
검성의 공명검에 비은을 대비한 것은, 움직임이 거의 없는 데 비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것이 자신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문원이 말을 덧붙였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공명검은 공간과 거리를 무시하는 초월의 검식이니까 비실체지. 그걸 네가 보법이나 호신기라는 실체로 막으려 해 봐야 소용없단 뜻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아니니?”
장건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전 좀 다르게 생각했어요. 의지는 실체가 없는 은(隱)이고 의지의 발현이 실체가 있는 비(費)라고요.”
무학에서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느끼는 바가 다르다. 말한 사람이 어떤 의도로 하든 듣는 사람과 살아온 삶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보면 그렇기도 하다만.”
“그런데 전 정말 놀란 게요, 공명검에는 그 과정에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은에서 비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간결한 거예요.”
“응?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게 아니고?”
장건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문원을 보았다.
“의지와 발현이 바로 이루어지는 데에 과정이 없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뭐, 그렇긴 하구나?”
일단 수긍했던 문원이 다시 반문했다.
“아니, 아니, 그렇지만 그리되면 조화가 깨어지지 않겠니? 움직임도 없이 기운이 발현된다면 말야.”
“조화롭기 위하여 움직임이 필요한 건가요?”
문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도의 근본을 추구하면 수단은 늘 권도에 의해 정해지는 법이라죠. 의지의 발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그것이 이미 조화롭다면 움직임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는 걸지도요. 저는 그게 바로 권도라고 생각해요.”
문원이 특이한 불목하니라고만 생각하는 장건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냥 얘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듣는 문원으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허허.”
말투로 보아서는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얻은 것이 있어서, 깨달은 것이 있어서 알고 하는 말이다.
문원은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크게 배웠구나.”
비은과 정도, 권도의 의미는 그리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소림에서도 가장 처음에 가르치지만, 사십 대가 되어야 대충 감을 잡고 육십 대가 되어야 알게 된다는 게 비은이다. 거기에 정도와 권도까지 더해지고 그것을 무학에 접목시키려면 더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쨌거나 장건은 자기 식으로 무학을 깨치고 있다. 깊이의 여하보다도 노력하고 생각하고 궁구한다는 게 눈에 보인다.
문원은 품에 손을 넣고 있다가 잠시 망설였다. 장건에게 주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서책이 있었다. 하지만 꺼내지 않기로 했다. 다시 품에 손을 넣어 오히려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곽모수의 천문비록.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몰래 챙겨 두었다.
장건에게 주고 싶었다. 수많은 무인들의 무공과 특징이 적힌 이 책을 보면서 장건이 훨씬 더 많은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길 원했다. 어쩌면 그것이 소림이 장건을 지금의 요상한 처지로 몰아넣은 데 대한 사죄의 길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은노로서 이렇게까지 개입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 약간의 고민이었을 뿐이다. 그것도 결국은 한참의 자문 끝에 ‘뭐, 어때서?’라는 결론에 이르러 버렸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건네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장건은 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때엔 괜한 참견이 독이 될 뿐이다. 아마 천문비록에서 분석된 무인들 중 구 할은 지금 장건이 깨달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터였다.
그것은 장건이 당장에 상위 일 할에 꼽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호에 나가면 당장에 피바람을 불고 올 비급이지만, 장건에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헷갈리게만 만들 뿐인 것이다.
“에이, 쓸데없는 짓을 했네.”
문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장경각에나 갖다 놔야겠다. 찾으러 올 때까지.”
수만, 아니, 경전과 온갖 잡서들까지 합하면 십수만이 넘는다는 장경각의 서가 한편에 꽂힌 천문비록은 그야말로 자체가 위장이고, 안전한 장소이다.
문원의 혼잣말에 장건이 되물었다.
“네?”
“아냐. 그냥 뭐, 생각난 게 있어서 한 말이야. 나이가 들으면 원래 이렇게 주절주절하고 그러는 거야. 신경 쓰지 마렴.”
장건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휴.”
“왜 그러니?”
장건은 약간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마해 할아버지와 오황 할아버지, 두 분은…… 돌아가셨겠죠?”
“뭐…… 아마도?”
“오황 할아버지, 이상해서 그렇지 나쁜 분은 아니었는데…….”
아이의 눈으로 보면 그 정도가 오황에 대한 평가인지도 모른다. 문원은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몰라서 뺨을 긁적였다.
“무인이야 늘 칼끝에 목숨을 두고 산다고들 하니까, 언제 흙으로 돌아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니? 너도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잖니.”
장건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근데 그거보다 이상한 건요…… 제가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구요. 전 그때 오히려 공명검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거든요. 이상해요. 지금의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된 걸까요?”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말이야.”
“네.”
문원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그 사람들하고 별로 안 친해서 그럴 거야.”
“……네에?”
장건이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를 얼굴로 문원을 쳐다보았다. 문원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은 같다고 하셨지만 말이다, 사람이 어디 그러냐? 귀찮은 모기랑 친한 사람이 죽는 거랑. 그게 어디가 똑같겠어? 그게 똑같으면 이미 사람이 아니라 부처지.”
“그, 그건 그러네요?”
장건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되물었다.
“그래도 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뭐, 내가 먹여 주고 재워 주니까 여기서 일하는 거지. 부처님 되겠다고 있는 거니?”
한결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 장건의 표정을 보고 문원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노인네들은 살 만큼 살았고, 무인답게 정정당당히 강한 사람과 싸우다 죽은 거야. 그건 무인에게는 최고의 죽음이지. 오히려 검성은 자기가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불쌍하게도 저렇게 헤매는 거란다.”
“자기가 죽을 자리를…….”
장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뭐, 위로가 아니라 그냥 있는 말을 한 것뿐이니까 자꾸 고맙다고 하지 마. 너무 오래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좀 이상해지는구나.”
“그래도 고마운걸요.”
“에이.”
문원은 손을 휘휘 내젓더니 곧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가시게요?”
“응. 너무 오래 놀았어. 네 친구들도 온 거 같고…… 슬슬 가야지, 뭐.”
장건도 기감으로 수련장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의 기를 느꼈다.
“어라? 그러네요?”
“아마 좋은 소식일 거니까 들어 보렴. 그럼 나 간다?”
문원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기척이 흩어진다.
바로 얘기를 하던 그대로 눈앞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있다고 느낄 수가 없다.
“건아!”
소왕무와 대팔,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수련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문원은 그들의 곁을 유유히 지나가면서 장건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하지만 소왕무와 대팔이나 아이들은 그런 문원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찾아다녔어!”
장건이 소요매화검을 등에 짊어지기 위해 천으로 잘 묶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지금 빨리 가 봐야 해.”
“응? 왜 그래?”
“대사님의…… 굉목 대사님의 판결을 지금 시작한대! 지난번에 하지 못했던 거 오늘 하려는 모양이야.”
장건은 하마터면 손에 든 소요매화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어디서?”
“계율원! 빨리 가 보자!”
장건은 소왕무와 대팔을 따라서 수련장을 나갔다.
이미 경내에 소식이 전해졌는지 밖에는 계율원으로 향하는 승려들이 곳곳에 보이고 있었다.
☆ ☆ ☆
계율원은 안팎으로 북적거렸다.
계율원 소속 나한들이 통제를 하고는 있었으나 지켜보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승려들이 결과를 보기 위해 계율원을 찾았다.
진산식에서 벌어진 일의 빌미였을 만큼 큰 사건이었던 터라 모두의 관심은 극대로 쏠려 있었다. 이미 현장에서는 물러난 굉 자 배의 원로들까지도 찾아와 있었다.
굉목은 그 자체로 이미 소림에서는 괴짜로 유명했다. 천하오절로 불리며 소림의 최고수였던 문각의 사손임에도 무공의 전수를 거부했다. 스승인 홍오와도 거의 의절하고 살아왔다.
도대체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데 그 이유가…….
홍오가 강제로 춘약을 먹여 비구니와 동침시킨 때문이었다니…….
굉목은 현재 세 가지의 혐의로 계율원에 끌려와 있다.
첫째는 겁간에 대한 혐의.
둘째는 의도적으로 죄를 숨겨 왔던 혐의.
셋째는 사문을 멀리하고 스승을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사멸조(欺師滅祖)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혐의.
진산식에서의 사태로 비로소 알려진 굉목의 혐의에 대해 소림의 승려들은 상당수 의견이 갈린 상태였다.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 수십 년 산중에서 홀로 참회하며 살아왔겠느냐, 하면서 굉목을 동정하는 여론이 있었고.
그래도 제자 된 도리로 어찌 스승을 내칠 수 있겠느냐, 사조를 능멸하고 사문의 기강을 훼손한 짓이다, 라는 여론도 있었다.
또 ‘그동안 죄를 숨긴 것이 또 다른 죄에 해당하는 게 아니냐.’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그럼 스승을 고발하는 게 옳은 일이냐.’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만큼 굉목의 문제는 현재 소림의 최고 화젯거리였다.
더구나 굉목의 문제가 더욱 소림 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그에 대한 판결이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장에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본래 파계한 것은 굉목이었으나 꾄 것은 사부인 홍오였다.
사실 그동안 홍오가 저지른 온갖 해괴하고 사이한 행적에 비추어 보면, 굉목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도 사실이다. 굉목을 옹호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굉목은 몰라도 홍오가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홍오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로 평생을 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금제를 받았다. 거기에 굉목을 꾄 잘못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도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홍오가 잘못을 용서받았다면 연루된 굉목도 용서해야 하느냐 하는 것도 새로운 논쟁거리였다.
기실 굉목이 항거하기 어려운 상태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홍오는 면죄 상태이니 굉목이 홍오의 죗값까지 치러 내야 하는지의 문제다.
정리하면, 혐의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이전에 혐의를 따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부터 따져야 하는 복잡한 상황인 것이다.
한데 더 재미난 것은 소림사가 단순한 무림 문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유무와 혐의의 여부를 또 갈라서 따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사찰로서 겁간에 대한 처분은 바라이법(婆羅夷法)을 따른다. 겁간은 사음(邪淫)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파계다.
설사 홀로 참회하였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외려 오랜 시간 거짓말을 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것은 또한 바라이법에서 망어(妄語)를 저지른 것이 된다.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바라이법의 네 가지 율법 중에서 무려 두 가지를 위반한 셈이다.
그러나 무림 문파로서의 처분은 조금 다르다.
사부의 명에 대항하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경지가 부족하여 춘약에 당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친다. 부주의해서, 공력이 모자라 당한 일이라고 친다. 비열한 술책에 당하는 건 강호 무림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따라서 겁간에 대한 혐의는 설사 죄로 인정된다 치더라도 전후 사정을 고려하여 파문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스승에 대한 반목과 무공 전수의 거부 같은 기사멸조의 행위가 더한 중죄로 여겨진다. 파문함과 동시에 소림에서 전수한 무공을 다시 빼앗아 단근절맥의 형벌을 내린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만으로도 복잡한데…….
더욱 복잡한 조건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복면의 괴인, 현재 홍오로 밝혀진 그가 굉목을 공격하여 단전을 망가트려 버린 것이다.
즉, 소림으로부터 받은 것 중 가장 큰 유산인 내공을 없애 버렸다. 가뜩이나 무공을 몇 배우지도 않았는데 내공이 없어서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전수한 무공을 빼앗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결과의 도출이었다.
그렇게 내공을 잃고 몸이 상하다 보니 다른 형벌을 가하기도 어렵다. 지금의 몸 상태로 곤장이나 매질을 했다간 그냥 무던히 사바세계를 떠나 버리게 될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찰에서 죄인이 뻔히 죽을 걸 알면서 형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진산식에서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터진 사건.
봐줄 수도 없고 법대로 집행할 수도 없는 사건.
꼬이고 또 꼬여서 지독히도 복잡해져 버린 사건.
그것이 바로 지금 굉목의 사건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이니 집행부의 고뇌란 참으로 깊고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장건은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수많은 소림의 승려들이 계율원의 안팎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굉목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고, 양옆으로는 곤을 든 나한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있다.
단상에는 새로 계율원주가 된 원읍이 계도를 들고 섰다.
원호가 방장이 되기 전에 끝까지 해결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한 탓에 원읍은 수염이 다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며칠 사이에 수염이 죄다 듬성해져서 보는 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원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죄인은 법명 굉목을 쓰는 본사의 제자로, 계율을 어겨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제일 죄목은 음행(淫行). 이에 대하여 죄인은 스스로 모든 것을 실토하고 인정하였다.”
굉목이 부복하며 진중한 어조로 고하였다.
“본인의 죄를 모두 인정합니다. 계율원주께서는 부디 율법에 따라 가차 없이 이 못난 늙은이를 처벌하여 주시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더라도 이 어찌 쉬운 일일까. 굉목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판결한다.”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드디어 굉목에 대한 처분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원읍이 한 번의 긴 숨을 내쉰 후에, 선고했다.
“불법에 귀의한 자로서 음행을 저지른 자는 어떠한 이유로도 승잔(僧殘)할 수 없다. 바라이법(婆羅夷法)에 의하여, 오늘로써 죄인 굉목의 법명은 회수하고 승적에서 축출한다. 이 결정은 결코 번복되지 않는다.”
바라이법은 승잔법과는 다르다. 승잔법은 죄를 지었어도 참회하여 승적에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바라이법은 완전히 쫓겨나는 것이다. 이제 굉목은 그 어디에서도 다시 승려 생활을 할 수가 없다. 평생 파계승의 낙인을 안고 살아가야 할 터였다.
“아!”
선고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라는 느낌의 탄성들이었다.
결국 계율원은 굉목의 죄를 인정한 것이다. 첫 번째 죄를 인정하여 파계하였으니 다른 죄목에 대하여 더 따질 필요도 없었다.
한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본사의 제자로, 승려 된 자가 파계한 채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두를 뗀 원읍이 한 자 한 자 말을 또박또박 내뱉었다.
“법명을 회수하고 진산 제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여 파문한다. 오늘 이후로 죄인은 속세의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지켜보던 승려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파계하였을 때부터 예상된 일이긴 하였으나 적잖은 충격이 장내를 뒤덮었다.
파계는 종파로서의, 파문은 무림 문파로서의 퇴출이다.
제자로서 파문하되 승려로서는 파계하지 않는 경우는 있었다. 그런 경우 무공을 더 이상 익히지 않고 수행하며 평생 승려로 살아가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림은 파문하되 파계시키지 않은 적은 있었어도, 단 한 번도 파계하며 파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찰인 소림은 될 수 있어도 무림 문파로서의 소림만은 추구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이다.
따라서 파계하여 파문이 뒤따른 경우, 완전히 소림에서 쫓아낼 만한 죄가 있기 때문이라 인정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고된 처벌을 하였다.
아마도 이 같은 결과를 낼 때까지 계율원뿐 아니라 소림의 수뇌부는 굉장한 고심을 하였을 것이고, 한번 내려진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고까지 단언하였으니 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였다.
굉목 역시나 조금의 이의도 없다는 듯 몸을 더욱 수그렸다.
공식적인 처분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형벌뿐이다.
형벌의 수위가 얼마만큼이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처음보다야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나쁜 굉목이 얼마나 처벌을 견딜 수 있는지도 걱정된다.
장건은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악물었다.
“이, 이게 어디가…… 어디가 좋은 일이야…….”
불목하니 문원이 좋은 일이라고 했던 것과 달리 굉목은 원읍의 한마디에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장건은 지켜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굉목은 이제 더 이상 승려도, 소림의 제자도 아니다. 소리 내지 않는 독경을 하던 굉목을 더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굉목이 승려가 아닌 모습을 장건은 차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건아…….”
곁에 있던 소왕무와 대팔이 장건을 위로하려 했으나 딱히 위로할 말이 없었다. 장건이 얼마나 굉목을 따르고 좋아하는지 아는 터라, 그저 굉목에게 심한 처벌이 내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이미 전 중원의 사람들이 이번 일을 주목하고 있다. 파계와 파문만으로도 작은 처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뒤이은 처벌 역시 너무 약한 형벌을 내리거나 한다면 소림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뭇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강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어렵겠어…….”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장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지금 뭐라고 했어?”
속가제자 아이 하나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대사님이 나이도 있으시고 하니까…… 미안해. 나쁜 뜻은 아니었어.”
가뜩이 불편한 장건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한 속가제자 아이가 금세 사과를 했다.
장건뿐 아니라 많은 승려들이 술렁이고 있어서 장내는 매우 시끄러웠다.
딱딱!
원읍이 계도를 부딪치며 외쳤다.
“모두 정숙히! 아직 판결이 끝나지 않았다!”
장건도 고개를 돌렸고 승려들도 입을 다물었다.
“크흠.”
원읍이 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본래 파문 제자는 단전을 폐하고 단근절맥하여 무공을 회수한 후 산문 밖으로 내쳐야 하나, 이미 죄인은 고령이며 또한 단전까지 상하여 그 건강이 심히 쇠약하여져 있다. 아무리 계율이 엄하다 할지라도 목숨이 위독해질 걸 뻔히 알면서 남은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임에 분명하다. 하나 명백히 죄과가 있는데 계율을 무시하고 진행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장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럼?”
원읍의 말에 따르면 그래도 약한 처벌을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장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지자 소왕무와 대팔이 장건을 붙들고 흔들었다.
“잘됐다.”
“잘됐어, 건아.”
원읍이 계도를 다시 쳤다.
따악― 딱!
“정숙!”
그런데 그때, 오히려 침묵하고 있던 굉목이 말을 했다. 그리 크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하필 모두가 입을 다물던 순간이었으므로 모두가 굉목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본 죄인은 자비를 바라지 않소이다. 나 하나로 인하여 소림사의 규율이 가벼이 여겨질까 두렵소이다. 그러니 원주께서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본 죄인에게 절차에 따른 처벌을 내리시고, 바라건대 그간 소림이 베푼 것을 하나 남김없이 거두어 가시오.”
승려들은 잠깐 멍해졌다가 이내 한숨들을 내쉬었다.
정말로 지독한 고집이다.
시쳇말로 봐주겠다는데도 본인이 싫다 거부하는 꼴이다.
더구나 저 말투와 당당한 태도를 보면 누가 죄인이고 누가 부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죄의 여부와 책임 유무를 떠나서 대다수 소림의 승려들은 굉목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죽겠다는 것도 아니고 소림에서 받은 것을 모두 가지고 가라 한다. 그만큼 소림을 못 견뎌 하고 있다.
홍오라는 사부를 만나 완전히 엇나가 버린 굉목의 인생담은 지금의 그 한마디만으로도 뭇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원읍은 잠시 오체투지한 굉목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죄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한 사람을 특별히 예외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전체 규율을 위협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하나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굉목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수많은 소림의 승려들이 원읍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경에 따르면 순임금께 고요라는 판관이 고하되, 죄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죄의유경(罪疑惟輕)을 말하였다.”
죄의유경. 의심스러운 죄를 가벼이 하라는 뜻이다.
승려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
집행부는 굉목의 죄를 인정하긴 하였으나 책임에 관하여서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죄와 형벌에 관하여, 본사의 이백오십 계는 죄를 범하면 교단에서 쫓겨나는 네 가지 바라이법, 스무 명 이상의 대중에게 참회해야만 승려로서 남을 수 있는 십삼 계의 승잔(僧殘), 재물을 대중에게 내놓고 참회할 삼십 가지 사타죄(捨墮罪), 구십 가지 단타죄(單墮罪), 익히고 닦아야 할 일백 가지의 중학계(衆學戒), 서로의 다툼을 없앨 일곱 가지 멸쟁법(滅諍法)이 주어져 있다.”
원읍이 말을 이어 갔다.
“당 죄인은 바라이법을 위반하였으므로 파계함이 마땅하고, 기사멸조의 죄를 행하였으니 파문함이 마땅하다. 전후의 사정에 고의성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처분을 한 것은, 본의는 아니었대도 큰 죄를 저지른 자를 그대로 방면할 수 없는바, 중죄에 대하여 일벌백계함으로써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파계와 파문은 본 계율원주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이었다.”
원읍의 말을 모두가 쥐죽은 듯 경청했다.
“하나 신체 형벌마저 그러한 규율을 따르는 것이 순리에 명확한 일인가에 대하여서는 의문이 있다.”
원읍이 잠시 쉬었다가 계속 말했다.
“본사는 사찰로서 일반적인 무림 문파와는 길이 다르다. 이백오십 가지의 계율은 본사의 제자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지만 추구해야 할 도리는 아니다. 만일 이백오십 가지 계율에 맞지 아니하다면 결국에는 본사가 추구하는 도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일이 옳을 것이다.”
원읍은 짧고 단호하게 외쳤다.
“이에 본 계율원주는 불살갱계(不殺生戒)를 그 첫 번째의 도리로 두고자 한다.”
승려들이 자기도 모르게 저마다 불호를 외었다. 불살생계는 불법에서 가장 큰 도리이다.
“삼계 만법을 깨달은 세존께서 살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살생하지 말라는 불살생계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지키지 못할, 혹은 지키기 어려운 계를 내려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계율 자체를 참된 진리로 볼 것이 아니며, 매 순간 스스로의 행동을 살피고 답을 구하여 가는 과정 속에 참된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원읍이 판결문이라기보다는 설법에 가까운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본사의 계율은 어떠한가. 본사의 계율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계율인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계율인가. 계율이 우선인가, 사람이 우선인가.”
원읍이 잠시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원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다시금 돌렸다.
“새로이 취임하신 방장 사형께서 말씀하셨다. ‘소림은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제자의 잘못은 스승의 잘못이며, 스승의 잘못은 곧 소림 전체의 잘못이다. 소림은 제자의 죄과에 대하여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대의 소림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말씀이 옳다 생각한다. 계율을 사사로이 위반하여서도 안 되지만 대외의 평가에 연연하여 제자를 버리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뇌가 묻어 나왔다. 원호와 원읍은 그 같은 결론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고심하였을까.
승려들은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가가 축축해졌다.
지금 이 순간은 승려이기 전에 소림이라는 문파의 제자였다. 심장이 뜨거워지고 든든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굉목은 포기하지 않았다.
굉목은 승려들과는 또 다른 이유로 소림사를 버려야만 했다. 소림이 아니라 자신이 소림사를 버려야, 이곳을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굉목이 오체투지한 채 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죄인 된 몸으로 소림의 결정에 어찌 감히 반론을 할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소림은 소림의 무공을 지닌 채로 파문제자를 놓아준 적이 없소이다. 본 죄인은 그 첫 예외의 사례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외다!”
원읍이 사찰로서의 기준에 좀 더 부합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면 굉목은 무림 문파로서의 기준을 말하고 있다.
파문한 제자를 대강 놓아준다면 무공의 누출은 물론이고 문파의 위엄과 기강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될 터다. 아무나 제자가 되겠다고 들어왔다가 아무 때나 달아날 것이다.
홍오의 경우에는 진산식과 더불어 세간에 숨기려다 보니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다시 제대로 된 추격대를 꾸려 내보내야 하는 것도 원호가 신경 써야 할 일이다.
거기에 굉목까지 처벌 없이 무사 방면하는 건 분명 당금의 소림에는 적잖은 부담이다.
원읍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켜보던 이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흘렀다. 저렇게까지 하는 굉목을 이해할 수 없어 애가 탔다.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계율원주.”
굉목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노인네는 소림을 떠나고 싶소. 이제 모든 것을 두고 내 삶을 찾으려 하오. 그러니…… 부디 내 삶을 돌려주시오.”
누군가에게 모진 형벌은 죽음을 생각나게 하지만, 누군가에겐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굉목이 그러했다…….
참다못한 장건이 사람들 사이로 뛰쳐나갔다. 나한들이 급히 곤으로 가로막았지만 장건은 벌써 지나간 후였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왜 그렇게 고집만 피우시냐구요! 그냥 그렇게 혼자서만 편하시면 다예요? 노사님을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쩌라구요!”
감정이 격해져 외치는 장건을 계율원의 나한들 수십 명이 난감한 표정으로 둘러쌌다.
“이 녀석이!”
“여기가 어디라고!”
굉목이 수척한 얼굴로 장건을 돌아보았다.
“미안하구나.”
굉목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던 장건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원읍이 힘차게 계도로 바닥을 찍었다.
탕―!
묵직한 진동이 계율원을 울렸다.
“안타깝게도 죄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다. 소림은 죄인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놀란 굉목이 외쳤다.
“계율원주!”
“건강상의 문제로 신체적 형벌을 가할 수 없으니 소림의 무공을 회수하기도 어렵다. 하나 회수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에 본 원주는 당 죄인이 본사의 속가제자가 되어 또 다른 속죄의 기회를 얻기를 바란다. 스스로 정말 죗값을 치르길 원한다면 사는 동안 참회하며 그것으로 대신하기를. 이것이 본 계율원주와 집행부 전체의 대답이다.”
굉목은 뭔가 이상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것이오?”
“방금 말한 바와 같다.”
굉목이 중얼거렸다.
“소, 속가?”
원읍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병장기의 소지 허가는 내줄 수 없지만.”
뒷말은 굉목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앞말만이 머리에 남아 계속해서 빙빙 돌고 있었다.
“속가…….”
멍…….
광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처럼 계율원이 침묵에 잠겼다.
울부짖던 장건도, 귀를 기울이던 승려들도…… 모두가 멍해진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한편 구석에서 판결을 경청하고 있던 원호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법명 굉목.
속명(俗名) 하분동…….
우여곡절 끝에 원 자 배 첫 기수의 속가제자가 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