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50
제 3 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소림사의 속가제자 하분동이 이촌에 거주할 집을 얻었다.
그 말인즉슨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소림의 제자들은 경내에서 하분동을 볼 일이 없을 테고, 따라서 당분간 괴이한 배분으로 인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장 원호는 장건을 비롯해서 소왕무와 대팔까지 보내 집 청소를 돕게 시켰다. 그나마 사람을 더 보낸다는데도 하분동이 한사코 거절했다.
전의 법명 굉목, 속명 하분동.
그 스스로는 이제 와 환속해서 ‘살림을 차린다.’는 것이 남우세스러웠던 모양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 ☆ ☆
아담한 집.
수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 손볼 데가 많았지만, 마을과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한적한데, 또 인근 민가와 아주 멀지는 않아서 외롭지도 않은 곳이었다.
다만 좀 오래되어 거미줄이며 부서진 벽이며 먼지들이 잔뜩이었다.
사사삭!
심지어는 쥐까지.
“그쪽으로 간다!”
“거기 잡앗!”
헛간에서는 쥐를 잡느라 작은 소동이 났다. 백리연이 양소은에게 소리쳤다.
“죽이면 안 돼요!”
“걱정 말아. 타구봉법에 버금가는 타서봉법(打鼠棒法)을 보여주지!”
제갈영도 한 몫을 더했다.
“내가 질 줄 알아? 천리삼수!”
제갈영의 손이 여러 갈래로 늘어나는가 싶더니 재빠르게 달아나던 쥐의 꼬리를 낚아챘다.
찍찍!
“으아으어으어엉!”
제갈영은 소름이 쪽 돋아 울상을 지으면서도 잡은 쥐를 짚 끈으로 휙 하니 묶어 빈 자루에 넣었다.
끈에 묶인 쥐들이 찍찍거리면서 난리를 피웠다.
제갈영은 백리연과 양소은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백리연은 나뭇가지를 들었고 양소은은 긴 장대를 들었다. 백리연은 나뭇가지로 쥐를 때려 기절시켜서 잡아내고 양소은은 장대를 휘저어서 쥐를 마치 솎아내듯 잡고 있었다.
툭 칠 때부터 이미 기절한 쥐는 장대 끝에 걸려서 자루 속으로 날려지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잡아야 하는 제갈영의 입장에서는 손을 대지 않는 둘이 부러울 수밖에.
“나도 검법이든 봉술이든 배우든가 해야지. 우어으어우엉!”
팔다리는 물론이고 목까지 소름이 올라왔는데도 제갈영은 쥐잡기를 계속했다. 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쥐잡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들을 지켜보던 운려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워낙에 무공을 익힌 처자들이라 쥐를 잡는 것도 빠르구나.”
그 많던 쥐들이 세 소녀들에 의해 쾌속하게 소탕되고 있었다.
하연홍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기본적인 무술은 익히고 있어도 세 소녀들만큼 무공을 할 정도는 아니어서 아예 쥐잡기에서 빠져 있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젊은 친구들이 나서주니까 너무 고맙네요. 그냥 저는 쥐가 너무 싫어서 어쩔 수가 없는 거라구요.”
하연홍은 쀼루퉁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하분동도 청소에 나서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는 겨울을 보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끈질긴 잡초들이 무성하다. 하분동은 팔을 걷어붙이고 수북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겨울 잡초는 생기가 적어서 풀만 잡고 뜯으면 중간에 툭툭 끊겨 뿌리까지 뽑기가 어렵다. 하지만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봄여름에 순식간에 자라나기 때문에 꼭 호미로 뿌리까지 캐놔야 한다.
그런데 하분동은 맨손으로도 쑥쑥 잡초를 뿌리까지 잘 뽑아내고 있었다. 손으로 줄기 안쪽까지 깊게 잡고 낚아채는 것은 여느 사람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단단하게 틀어쥔 손가락과 팔의 움직임은 굉장히 안정되어 있었다. 틀어쥐고 당기는 순간 언 땅이 덩어리진 흙을 왕창 토해내면서 잡초 뿌리가 송두리째 들려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내공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저리 언 땅의 잡초를 잘 뽑을까 싶지만, 사실 풀 뽑기야말로 하분동이 수십 년간 해온 일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니까 별 어려울 일이 없었다.
하분동의 입장에서는 운려나 하연홍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이렇게 몸을 쓰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게 훨씬 편했다.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아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뭐든 하는 게 나았다.
운려와 하연홍에게 어떻게든 잘 해줘서 해묵은 갈등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고지식한 성격에 그게 잘 안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분동이 잡초 제거에만 몰두하여 마당을 돌고 있는데, 한 아름쯤 뽑고 잠시 허리를 펴니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함이 들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손 놀리기를 멈추는 순간부터 너무나 조용해서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분동은 그런 느낌을 무시하려고 했으나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장건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으으으!”
장건은 말 대신 신음과 행동으로 대답했다.
파파팍!
장건이 번개처럼 땅을 밟는데, 그냥 맨땅을 밟는 것이 아니라 하분동이 잡초를 뽑아서 패인 구멍을 쭉 따라오면서 종종 밟는 것이었다!
파파파팍!
잠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파헤쳐진 땅이 멀끔하게 다져져 있었다. 발로 밟은 흔적도 없다. 마치 빙판처럼 매끈한 것이 하분동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내공을 써서 땅을 다지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저렇듯 세심하게 흔적도 없이 다지는 건 과연 장건답다고 할 수밖에.
장건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더니 하분동을 보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실 거면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뭣이?”
하분동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는 얼굴로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건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해만 돼요, 방해만.”
하분동은 장건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방해가 된다는 게냐?”
“풀을 뽑는 게 아니라 흙을 다 파헤쳐서 마당을 어지럽히시잖아요.”
불현듯.
하분동은 불안해져서 단칼에 장건의 말을 잘랐다.
“네 일이 아니니 상관하지 마라.”
“왜요? 제가 사형인데 왜 관계가 없어요?”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터였으나, 이번에도 하분동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이, 이……?”
겨우 화를 가라앉히며 하분동이 말했다.
“내가 내 일을 하는 것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일을 안 하면, 그럼 구경만 하란 말이냐?”
말투와 표정만 보면 장건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았다.
장건은 살짝 찔렸으나 어차피 하분동이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는 듯이 금세 편한 얼굴이 되었다.
“일을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아라, 라는 거랑 같은 말씀이시죠? 그런데 제 생각은요, 아픈 사람은 아플 때 쉬어야 해요. 그게 사형으로서의 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사제님은 저쪽으로 가 주시면 좋겠어요.”
부들부들.
운려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현명하신 사형의 말씀이시네요. 힘을 쓰는 건 우리 같은 노인네가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끄응…….”
하분동은 마지못해서라는 듯 장건을 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한편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소왕무와 대팔을 발견했다. 둘은 아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중이었으니, 은근히 하분동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정작 밥을 먹지 말아야 할 녀석들은 여기 있구나?”
하분동의 말에 소왕무와 대팔은 조금 찔끔했다. 하지만 대팔은 눈치도 없이 나섰다.
“그건 노사제(老師弟)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장건에 이어서 또 어린 녀석이 노사제 운운하니 하분동은 기가 막혀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하분동이 은근히 비꼬는 투로 되물었다.
“그래, 소사형(小師兄)에겐 어떤 고견이 있으시오?”
“처음부터 치우느라 고생하느니 차라리 다 끝나고 조금 어지럽히는 게 더 쉽다는 것이 이 사형의 고견입니다.”
“……?”
하분동이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찡그리고 대팔을 쳐다보자, 소왕무가 대팔을 뒤로 잡아끌며 구박했다.
“넌 가끔 보면 대가리가 아예 없는 놈 같아. 생각은 좀 하고 사냐?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아오…….”
“내가 왜, 임마? 넌 임마, 사제가 무섭다고 사제가 아니냐? 사형 같지 않다고 사형이 아닌 건 아닌 건 아니라 사형이 아니라서 사형이…… 어, 내가 무슨 말을 할라 그랬지?”
소왕무는 대팔의 입을 막고 대신 하분동에게 얘기했다.
“노사님, 그게 아니고요. 이놈 얘기는 저기 건이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소왕무는 하분동이 옥에 들어가 있느라 몰랐던 그때의 일을 하분동과 하연홍, 운려에게 말해주었다.
진산식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숙소를 나온 순간 모두를 멈칫하게 만들었던 그때.
소림의 제자들은 경이로운 광경을 목도하였다.
모든 건물과 석상, 조경, 풍물은 어제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실제 경내의 풍경은 어제와 전혀 달랐다.
햇살이 부딪치며 찬란하게 번들거리는 기와지붕은 잔잔한 호수의 표면 같았고, 흙바닥 위에 놓인 디딤돌들은 청동 거울보다도 반짝거렸다.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을 누군가가 소림으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아직도 대팔의 기억에 생생하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진법이다! 진법이야! 진법에 갇힌 거야!’
모두가 공력을 끌어 올리고 난리가 났다. 잠이 확 달아나고 소름이 끼쳤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죄다 비현실적이니 차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진이 아니라는 걸 겨우 알았다. 비현실적인 공간은 물론 장건이 한 일이었다. 일주문 앞부터 진산식을 치를 대웅전까지가 죄다 그러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매우 공포스러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질서정연함과 티 없이 깔끔한 풍광이 주는 미지에의 공포.
깨끗한 것도 공포가 되나 싶지만, 평소에 그런 점을 전혀 의식한 적이 없어서 더욱 괴기했다.
오죽하면 윗선에서부터 ‘차라리 더럽혀라…….’라고 명이 내려왔을까.
제자들은 깨끗하게 치우라는 말이 아니라 더럽게 만들라는 명을 처음 들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지금의 광경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하긴 오황은 장건이 닦은(?) 동상들을 보고 참지 못해 때려 부쉈다고도 하지 않았는가!
대팔도 평소 좀 더러운 성격이어서 사람은 누구나 깨끗한 것을 보면 더럽히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고 떠들었는데, 장건이 청소한 것을 보면 그런 마음도 들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그 질서정연하고 순결한 공간에 발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죄악으로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소왕무의 말을 들은 하분동은 그때 들었던 기묘한 얘기의 진상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진산식 날, 치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자꾸만 더 더럽게 하라는 둥, 좀 자연스럽게 어지럽히라는 둥…… 밖에서 외치는 이상한 소리를 그도 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예전의 장건이 청소를 하면 왠지 좀 거북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하면…….
소왕무가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이러고 있는 겁니다. 일단 건이에게 맡겨두고 기다렸다가 나중에 어지럽히는 편이 훨씬 빠르고 좋다는 게 저희 판단입니다. 장건, 하면 역시 일당백 아니겠습니까. 우리 같은 건 괜히 도와준답시고 설쳐 봐야 방해만 될 걸요.”
대팔이 끼어들었다.
“이 사형의 얘기가 바로 그 얘기라고요.”
하지만 연홍은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청소를 돕는 게 아니라 청소를 하고 난 다음에 어지럽히기 위해 대기하는 중이라니.
소왕무와 대팔은 연홍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장건의 눈으로 이 집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손을 봐야 할 것들이었다. 담벼락부터 해서 대들보나 기둥, 녹슨 쇠 문양까지,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을 곳이 없을 터였다.
그 사이 장건은 마음의 준비를 모두 끝냈다.
“후웁, 후우웁!”
장건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쭉 폈다. 소왕무와 대팔은 뒤로 물러났다.
“왜들 그래요?”
“보면 압니다.”
“……?”
장건은 오래된 집을 손보기 위해 청소 도구와 자재 등을 싣고 온 손수레로 향했다.
먼저 먼지를 떨기 위한 불진(拂塵)을 양손에 들었다.
그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장건의 등 뒤로 빗자루 두 개가 둥실하고 떠올랐다.
“세상에……!”
하연홍은 깜짝 놀랐다.
“허공섭물? 능공섭물? 이기어검술? 도대체 저게 뭐야?”
이기어검이든 뭐든 하연홍이 생전 처음 보는 수법임에는 확실했다. 전면에서 손을 뻗어 당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등 뒤로 빗자루 두 개가 떠오른 것이다.
엄청난 고수가 공력을 그러모으면 가공할 흡인력 때문에 땅에서부터 하늘로, 거꾸로 물체들이 솟아오르곤 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전부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딱 빗자루 두 개만 장건의 등 뒤에 솟아올라 있다.
운려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하분동도 뭔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흠칫했다.
처음 본 사람만 놀라는 게 아니라 몇 번을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번 익숙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곧 장건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작업을 시작했다.
사사사삭.
투다닥!
담벼락을 쭉 돌면서 빗자루론 쓸고 불진으론 먼지를 턴다. 그리고 잡초를 뽑는 건 보……이지 않지만, 어쨌거나 능공섭물이든 보이지 않는 손이든 뭐에 의해서든 잡초는 뽑혀서 뒤로 날려진다. 잡초를 뽑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뒤로 날려진 잡초는 빗자루로 쓸려 한데 모아지는데, 쓸린 낙엽이나 먼지, 잡초 등은 빗자루 끄트머리에 매달려 마치 둥그런 공처럼 모아져 있다. 데구르르 구르면서 흩어지지 않고 장건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온다. 청소가 진행될수록 그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이 황당하게까지 보인다.
장건은 지나가면서 땅을 꾹 밟아 원래대로 평평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확실히 이 정도면 왜 하분동에게 방해라고 했는지 알 만하다. 장건은 거의 잰걸음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이 상태면 순식간에 마당 청소는 끝날 것, 이라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로 마당 청소가 끝났다.
모두가 멍하니 장건을 바라보았다. 효율로 따지자면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이 동시에 일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정말로 청소하고 난 자리가 너무 멀끔하다. 뭔가로 껍질을 벗겨 낸 듯 바닥이 윤기가 나려 한다. 박석이 깔린 마당도 아니고 그냥 보통의 흙바닥인데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 풀을 뽑았는지, 뽑은 흔적 같은 건 찾아보기도 어렵다.
“…….”
연홍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소왕무나 대팔이 어지럽혀야 한다고 했는지.
이것은 마치 새하얗게 첫눈이 온 어느 날의 아침과 같아서, 도저히 밟고 지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깨끗한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지려 한다.
이래서야 불편해서 어디 마당을 걷겠는가!
아니, 그 전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하연홍이 당황스러워하는 동안 순식간에 마당 쓸기와 잡초 정리까지 끝내버린 장건이었다. 장건은 큰 덩어리가 되어 있는 풀과 흙, 돌멩이의 덩어리를 어디에 버려야 하나, 버릴 데를 찾고 있었다.
“포대에 담아서 치울까?”
소왕무가 외쳤다.
“그건 놔둬. 우리가 치울게! 우리도 뭔가 일은 해야지.”
“그래 줄래, 그럼?”
뭔가를 버린다는 자체가 꺼림칙했던 장건은 잘됐다 싶어 덩어리를 한쪽에 밀어 두고는 손수레로 걸어갔다.
손수레에 도구를 넣어 두고, 고개를 돌려 지붕을 쳐다보았다. 장건의 지긋한 눈길이 풍파(風波)에 깨지고 흐트러진 지붕의 기와에 가 닿았다.
지난번 소림에서 대청소를 할 당시 기와를 닦을 수는 있어도 깨진 기와를 보수하는 법은 몰라 속으로 적잖이 분한 마음이 있었다. 하여 그때 일꾼들에게 물어 방법을 배워두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재료까지 준비해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소왕무는 장건이 여러 종류의 흙이 담긴 포대를 열어 반죽할 준비를 하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집안이 망하더라도 어딜 가서 뭘 하든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건이 녀석…….”
기와를 처음부터 쌓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일부분을 보수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붕에 올라 미끄러운 기와 위에서 작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나 무인에게는 별다른 일이 아니다.
장건은 훌쩍 지붕 위로 올라 깨진 기와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와가 빠진 자리를 깨끗이 털어낸 후 진흙을 이겨 깔았다.
“밑에 보토(補土)를 깔고, 위에는…….”
진흙을 깐 위에는 빗물이 새지 않도록 다시 진흙, 강회, 백토 등을 섞어 얹는다.
“대팔아, 거기 기와 좀 던져 줘. 아니다, 그냥 내가 할게. 거기까진 닿겠다.”
“응?”
밑에서 대팔이 기와를 던져 주려다가 멈칫했다. 지붕 밑 대들보 앞에 쌓아 둔 기와가 둥실 떠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와는 귀신이 날아다 준 것처럼 장건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졌다.
장건은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의 여와(女瓦)를 받아서 밑면에 고운 진흙을 발라 전체 기와의 골과 줄 모양이 일치하도록 겹쳐 이었다. 위로 불룩한 남와(男瓦)는 사이사이에 회백토반죽을 꾹꾹 채워 넣어 가지런하게 여와와 얽었다.
복잡한 일은 아니지만 진흙을 이겨 채우는 건 기의 가닥으로 할 수 없는 일이고, 여러 번 손이 가기 때문에 아무리 손이 빠른 장건이라 하더라도 깨진 기왓장을 모두 새 기와로 채워 넣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것도 숙련된 일꾼이 반나절은 족히 해야 할 일을 이 각여 만에 해낸 셈이었다.
장건은 깨진 기와를 모두 교체하고 허리를 폈다.
밑에서 지켜보던 하연홍이 의아해했다. 깨진 기와를 새것으로 교체하긴 했지만 옆의 오래된 기와들과는 색이 다르다. 멀리서 보면 이빨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색이 달라서 오히려 이상하다.
‘새로 칠하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하지만 장건은 새로 도색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개의 솔을 들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에는 두 개의 솔을 들었고 등 뒤에는 세 개의 솔이 둥둥 떠 있는…….
아무튼 대단한 솔은 아니다. 그냥 뻣뻣한 짐승의 털을 가지런히 박아 먼지를 털거나 들러붙은 찌꺼기를 떨어내는 솔이다.
그런 솔을 들고 장건은 비스듬히 경사가 진 지붕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샤샤샥. 샤샤샤샥.
줄이 비뚤어진 기와를 맞추면서 계속해서 솔질을 한다. 어떻게 보면 비질을 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 ☆ ☆
청소가 끝났다.
소왕무가 한숨 돌리는 장건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건아.”
“수고는 뭐.”
“나머진 우리에게 맡기고 먼저 올라가.”
“나만 먼저?”
“응. 가서 보고는 해야 할 거 아냐. 방장 대사님께서 어떤 집을 구했는지, 위치는 괜찮은지 어떤지 많이 걱정하고 계시더라구. 네가 발이 빠르니까 먼저 올라가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그래?”
“그렇다니까. 너무 걱정되어서 다른 일이 손에 잘 안 잡힌다고까지 하셨어. 뒷정리는 내버려두고 먼저 가 봐.”
“알았어. 그럼 저 먼저 올라갈게요. 죄송해요. 끝까지 있지 못해서요.”
장건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소왕무의 등쌀에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소림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장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답답한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심장이 오그라들어서 죽을 뻔했네.”
“그렇다고 열심히 하는 애 앞에서 인상 쓸 수도 없고.”
다들 불평을 토해내는데 제갈영만 좋은 말을 했다.
“그, 그래도 멋있어. 우리 오라버니는 못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제갈영도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입술을 꾹 다물어서 뭔가를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당은 바위를 일도양단한 단면처럼 번들거리고, 돌을 쌓아 만든 담벼락은 분명히 울퉁불퉁한데 어쩐지 다 일정하게 울퉁불퉁한 듯 느껴졌으며, 나무 기둥은 오래된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매끈했다.
지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다 새것처럼 번쩍거려서 지나가던 새가 날아와 앉다가 미끄러질 지경인데, 기와 일부를 교체했는지 안 했는지 티가 나지 않았다. 분명 기와를 교체하는 걸 눈으로 봤는데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한두 군데만 그렇게 깔끔해도 이상할 텐데, 집 전체가 반질거리니 그 기묘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며 팔다리가 오그라들고 위축된다. 청소한 곳의 어딜 만진다거나 건드리면 더러워질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양소은은 진저리를 쳤다.
“그렇잖아도 진산식을 할 때 소림사에 들어가는데 뭐가 되게 답답하고 소름 끼치고 그러더니……. 아, 진짜 저 버릇 어떻게 못 고치나?”
하연홍이 백리연에게 물었다.
“이, 이거 지금 다 내공으로 한 거 맞죠? 쓸고 닦은 게 아니라 거의 깎아낸 거 같은데…….”
“그럴 걸요.”
“말도 안 돼…….”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럽히고 싶은데 쉽게 더럽힐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 이대론 참을 수가 없다.
‘더럽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더럽혀야 내가 산다!’
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때 때마침 소왕무와 대팔이, 장건이 낙엽과 흙먼지 등을 쓸어서 모아 놓은 쓰레기 더미로 가서 쓰레기 한 아름을 들고 왔다.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아시겠죠?”
이것이 장건에게 뒷일은 맡기라고, 내버려두고 가라고 한 이유다.
더 설명도 없었건만 모두가 알아서 쓰레기를 한 움큼씩 쥐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뿌리기 시작했다.
“후아.”
그제야 좀 살 것 같다.
더럽히는 것에 대한 쾌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계속 뒷간을 못 가다가 삼 일 만에 용변을 본 것 같은!
낙엽을 되는 대로 흩뿌리다가 하연홍은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하분동에게 물었다.
“건이…… 원래 이랬어요?”
하분동이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췄다. 그건 원래 저렇지 않다고 대답하려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멈췄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일이 있긴 했구나.”
하연홍은 자기가 하분동에게 친한 척 말을 걸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뭐였는데요?”
“그게…….”
하분동의 입가가 씰룩였다.
“허허허.”
하분동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만 웃는 거지 표정은 웃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분동이 웃었다는 사실 자체에 모두가 놀랐다.
사실 하분동도 자신이 오랫동안 웃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개운하게 웃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바로 사부인 홍오가 장건 때문에 낭패를 겪었던 일이었다.
하분동은 모두의 눈길이 자신을 향해 다소 민망했지만 얘기를 꺼냈다.
장건이 자신과 함께 암자에 있을 때 모종의 장소에 이상한 짓을 해 놓아서 다들 그게 진법인 줄 알았다는 얘기였다.
제갈영이 ‘아!’ 하고 손뼉을 쳤다.
“맞다! 그때 오라버니랑 처음 만났을 때다. 할아버지께서 진법은 아닌 게 확실한 거 같은데 보기만 해도 진법만큼의 위압감이 느껴져서 희한하다고 하셨어요. 지금이랑 딱 똑같았겠네요.”
제갈영이 갑자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 우리 오라버니가 그때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영이의 몸을 더듬…… 영이의 부끄러운 곳을…… 아이, 몰라.”
“……!”
별안간 침묵이 흘렀다.
소왕무와 대팔을 비롯한 몇몇은 입을 떡 벌렸다.
뜬금없어!
난데없이 저런 얘기가 왜 나와!
하지만 백리연과 양소은은 순간 긴장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경쟁 관계이니 뭐에든 예민할 수밖에.
설마하니 이미 예전에 심각한 관계라도 되었던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백리연이 웃었다.
“푸훗.”
단순한 폭소가 아니라 미묘하게 가소롭다는 투가 확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제갈영은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 웃음, 뭐예요?”
백리연이 고혹적인 몸짓으로 짐짓 몸을 기울이며 입술에 검지를 살짝 가져다 댔다. 제갈영의 시선이 백리연의 입술에 꽂혔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를 비스듬히 한 상태라 유독 가슴이 도드라졌다. 백리연이 슬쩍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어깨를 움직이자 차고 넘칠 듯한 가슴이 탄력 있게 흔들렸다.
제갈영이 흠칫했다.
“뭐, 뭐냐구요!”
백리연은 여유만만하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보조개를 피웠다.
“글쎄…… 뭘까? 동생이 보기엔 뭐일 것 같아?”
“내, 내, 내가 부족하다는 거?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된다는 거?”
“음…… 그것뿐일까요? 우린 벌써…… 아아, 나도 얘기할 수 없어요. 그때의 그 짜릿함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온갖 추측이 난무할 법한 말이었다.
“이이이…….”
제갈영이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백리연에게 소리를 질렀다.
“두들겨 맞고서도 좋다고 쫓아다니는 피학성애녀(被虐性愛女) 주제에!”
“뭐라고요?”
백리연은 어이가 없어 외쳤다.
“지금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동생? 어떻게 그,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듣기만 해도 꺼림칙한 요상한 말을 배워온 거야?”
“흐응? 왜? 내 말이 틀렸어?”
그때 양소은이 제갈영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딱!
“아얏!”
“그만 해. 어디서 못된 말만 배워 가지고…….”
“이씨! 무식하게 힘만 센 가학성애자! 근육 덩어리! 우리 오라버니랑은 하나도 안 어울려!”
“저게? 너 이리 안 와?”
제갈영은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우아아앙!’ 하고 울면서 낙엽과 흙먼지를 마구 뿌리며 달아났다.
“어휴, 저게 진짜…….”
그러나 양소은도 제갈영의 말을 가볍게 넘기기에는 마음이 불안했다. 분위기를 보니 아마도 둘은 과거에 장건과 감정의 교류를 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큰일이네.”
양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평소엔 소심한 듯 보이지만 소신을 위해서는 검성에게도 대들 수 있는 장건이 멋져 보인 것도 사실이고, 장건 정도는 되어야 부친인 양지득의 괴롭힘(?)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건만 한 신랑감은 없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리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갈영의 말대로 양소은은 건장하고 탄탄한데 장건은 왜소해서, 둘을 세워놓으면 장건이 학대당하는 아이처럼 보일 터였다.
“억지로라도 잘 먹여야 하나……. 키 잘 크는 보약도 좀 먹이고…….”
양소은의 중얼거림에 백리연이 대꾸했다.
“그래 봐야 산도적 같은 언니가 어디 가겠어요?”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왜 시비지?”
“그냥요?”
“웃기고 있네.”
제갈영에겐 선머슴 같은 양소은보다 더 여성스러운 백리연이 견제 대상이고, 백리연에겐 아이 같은 제갈영보다 무공이 강해 듬직한 양소은이 견제 대상이다. 양소은에게는 둘 다이고.
터질 듯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덕분에 입장이 이상해진 건 하분동의 가족들이다.
“험험.”
하분동이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자 운려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좋은 때지요?”
하분동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알겠소.”
내내 산에서 산 하분동에게야 당연한 얘긴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운려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연홍이도 이제 나이가 되었으니 좋은 짝을 만나야 할 텐데.”
뜬금없는 거론에 하연홍이 눈을 흘겼다.
“아이 참, 할머니는? 난 혼인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할머니랑 살 거라니까!”
“혹시 마음에 둔 사람도 없고?”
“없다니까욧!”
하연홍이 빽 소리를 지르자 백리연과 양소은이 은근히 부담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혹시?
설마 경쟁자가 한 명 더?
하는 눈빛이었다.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니에요!”
거기에 하분동이 아닌 척하면서 말을 더했다.
“건이는 안 된다.”
“네에? 할아버지잇!”
하연홍은 당황해서 할아버지라고까지 하분동을 부르고 말았다.
하연홍이 심하게 항변하니 백리연과 양소은은 더욱 수상쩍다는 눈빛이 되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혈기왕성한 소년들은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좋겠다.”
“건이는.”
소왕무와 대팔은 투덜거리면서 여기저기 흙을 뿌리기 시작했다.
우내십존하고도 친구 먹는 괴물 장건이 아니면 그래도 지금 기수의 속가제자들 중에서는 일, 이 위를 다투는 기대주인 둘이었다.
이번 기수가 아니라 다른 기수 때라면 이미 강호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몇 번 오갔을 터다. 소림을 찾는 후기지수들과 손을 겨루면서 위상을 드높이는 일도 있었을 테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순 괴수들만 우글우글해서 거의 기도 못 펴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위기상으로 둘이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자리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야말로 언감생심 넘보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여 소왕무와 대팔은 장건을 미워한다거나 하는 마음 따윈 조금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장건 같은 괴수가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다만 뭔진 모르겠는데 어딘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장건은 소림으로 돌아와 원호에게 보고했다.
원호가 생각만큼 조급하게 보고를 기다린 것 같지 않아 의아했지만, 관심을 안 보인 것은 아니었다.
“청소를 했다고?”
“네! 깨끗하게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했어요.”
“그렇구나…….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노사님 일인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그래. 네 말이 맞다……. 열심히 해야지…….”
말끝을 약간 흐리는 원호였다. 남아 있는 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장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서 원호는 빙긋 웃었다.
“녀석.”
“방장 사백님, 왜요?”
“장해서 그런다, 장해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장했다.
사고 안 치고 온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것만으로도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매번 사고를 쳐서 장건을 어디다 내놓기만 하면 불안해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문득.
―앞으로의 일 년은 아이의 십 년 운세 중 가장 험난한 시기가 될 것이외다.
라고 천룡사의 금오가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불길하게 왜 지금 그런 얘기가 생각난단 말인가. 이번에는 사고도 안 치고 조용히 잘 돌아왔거늘.’
이미 소림사가 봉문에 가까운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혹 금오의 말이 맞다 해도 이것으로 충분해지지 않았을까?
원호는 염주를 굴려 가볍게 불호를 왼 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건이 녀석이야 올해 내내 소림에 잡혀 있을 것이니 딱히 큰일을 저지르긴 어려울 테고…… 가장 큰 문제였던 굉목 사숙의 일도 마무리되었고…… 또 무엇이 남았지?’
대외적으로 소림이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난 셈이다. 강호가 혼란스럽다고는 하나 대외활동을 포기한 소림이 딱히 나설 일은 없다.
‘그러고 보니 아직 북해빙궁의 사절단을 찾지 못했군.’
조사단을 파견했는데 아직 성과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만 좀 더 찬찬히 알아봐야 할 일이다. 급하다고 당장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다. 어쩌면 조만간에 북해빙궁에 사람을 보내야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또…… 사숙조의 일이 남았는가.’
굉목만큼이나 골치 아픈 홍오의 문제 정도가 남았다.
원호는 굉운에게 들은 말을 되새겼다.
―홍오 사숙조의 문제는 잠시 접어 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사의 유명을 거스른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대죄입니다.
―사숙은 내게 무대를 만드시겠다 했네.
―……무대요?
―그렇다네.
―허! 천하 영웅들이 격돌하는 장(場)이라도 열고 싶으시단 겁니까?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더 큰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본사의 책임으로 밝혀지면 뒷감당은 어찌하시렵니까.
―무대를 만드는 사람은 그저 무대 뒤에 있을 뿐이네. 무대 위에 서는 건 다른 이들의 몫이지. 사숙은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일세.
―저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겠습니다. 소림이 위험해질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는 위험한 도박을 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겠네.
―사백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선택이셨네. 이미 사숙께선 소림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셨네. 그 그림에서 홍오라는 이름은 방해만 될 뿐이란 걸 스스로도 알고 계시다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가? 한평생 무의 끝을 좇은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 어떻게 나타날지. 비록 사숙이 만드실 새로운 무대가 우리 소림의 자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난 사숙의 뜻을 존중하네. 그리고 사실 나 역시 궁금하네. 그래서 사숙을 그대로 놓아드렸다네.
굉운은 원호를 그렇게 설득하려 했다. 하나 굉운과 달리 원호는 홍오를 믿지 않는다. 게다가 괜한 불씨를 남겨두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그때 다시금 금오의 말이 원호의 귓가를 맴돌았다.
―앞으로의 일 년……. 그것은 그 아이의 팔자가, 몸담은 곳을 곤궁하게 만드는 형국이라는 걸 포함하는 것이오.
원호는 깜짝 놀랐다.
‘……왜 자꾸만 금오 대사의 말씀이 떠오르지?’
설마 그것이 무슨 일인가의 징조란 말인가?
원호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찜찜하다.
당분간은 내실을 다지는 데 온 힘을 다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장건이 아니더라도 소림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법.
‘아무래도 그 두 가지의 일까지는 매듭을 지어야 하겠구나!’
원호는 지부와 속가제자들의 남는 여력을 모두 동원하여 우선적으로 북해빙궁 사절단과 홍오의 소재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뒤.
불안의 전조(前兆)는 원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관리 한 명이 소림을 찾아온 것이다.
소림사가 위치한 등봉의 현령이었다.
☆ ☆ ☆
십여 명의 관병과 함께 소림에 도착한 현령 누보가 방장 원호를 만났다.
“나무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늦었지만 취임 축하드리오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누보는 정말로 축하한다기보다는 마지못한 얼굴이었다.
“감사할 게 뭐 있겠소. 나라고 여기 오고 싶어 왔겠소?”
“예?”
원호가 살짝 의문을 가졌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현령께서 직접 오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진작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저희가 최근에 큰일을 겪었지 않습니까. 현령께서 이해를 좀 해주십시오.”
“뭐, 됐소이다. 현령이래 봐야 어차피 칠품지마관(七品芝麻官)일 뿐인데 누구를 오라 가라 하겠소.”
현령의 공식 직함은 지현(知縣)으로 칠품의 관직이다. 칠품지마관은 깨알같이 낮은 벼슬이란 뜻으로 조롱이나 해학의 의미에 쓰이는 말이다.
“허허,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방장 대사의 눈에는 내가 겸양이나 떠는 것으로 보이오?”
누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주변에 시립해 있던 승려들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그동안 어떤 현령도 소림의 방장에게 이 정도의 무례한 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겠소이다. 전의 현령도 도독부 자제의 사건 때문에 변경으로 쫓겨났소. 그런데 내가 뭐 좋은 일이 있다고 소림사를 찾아오겠소. 나야 그저 높은 분들께서 시키는 일이나 따르고 안 그러면 귀양이나 가야 하는 그런 하찮은 사람이올시다. 칠품지마관이 겸양이 아니란 뜻이오.”
“이거 참…….”
원호는 직설적인 누보의 말에 화를 내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수긍을 하기에도 애매해졌다. 새로 온 현령이 소림에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원호가 사과했으나 누보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안다면 얘기가 한결 쉬워지겠소이다.”
원호는 긴장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왜 전에 소림사에서 약속한 거 있지 않소. 도독부 문제를 눈감아주는 대신 소림사에서 해주기로 한 거.”
거기까지 들었을 때, 원호는 솔직히 안심했다.
긴장이 풀어져서 저도 모르게 한숨마저 흘러나왔다.
“아, 그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가 무공 교두를 파견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기억하고 계시니 잘되었구려. 도독부에서 무공 교두를 보내 달라 요청하였소.”
“그 일로 오셨군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원하신다면 오늘이라도 제자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이다. 도독부에서도 가능한 빨리 보내주길 원하니, 그럼 길게 끌 것 없이 내일 장건이란 아이를 보내도록 하시오.”
“예…… 예?”
원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왜 또 장건이란 이름이 나오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건이라니요?”
원호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누보가 되물었다.
“장건 모르시오? 장건. 도독부 사건을 일으킨 그 아이 말이오. 여기 없소? 속가제자라면서.”
“있긴 있습니다만.”
계인이 도드라진 원호의 민머리에 송글거리고 땀이 맺혔다.
“뛰어난 교두라면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굳이 건이가 아니더라도…….”
“뭔 소리요? 도독부의 최고참 무공 교두를 쓰러뜨린 사람이 뛰어나지 않으면 누가 뛰어나다는 거요?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도독부에서 원한 일이요.”
“……도독부에서?”
“그렇소. 중군도독부. 그러니 긴말하지 말고 내일 본인을 현청으로 보내시오. 소림사에서 스스로 약조한 것이니 지키지 않을 시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쪽이 더 잘 알 것이오.”
원호는 경악했다.
일이 흘러가도 어떻게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앞으로의 일 년은 아이의 십 년 운세 중 가장 험난한 시기가 될 것이외다.
금오가 한 말이 새삼 떠오른다.
소름이 다 끼쳤다.
이렇게 일이 다시 시작되는가?
도대체 이제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판단을 해야 옳을지도 원호는 자신이 없어졌다…….
☆ ☆ ☆
저 멀리 소림사의 전각 지붕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산 아래 작은 다관(茶館).
차가운 표정으로 감흥 없이 차를 마시던 냉고사가 물었다.
“소림사가 약속을 지킬 거라 보십니까?”
야용비는 챙이 넓은 큰 모자에 면사를 내려 완전히 얼굴을 가린 채 대답했다.
“자신들이 한 약속이니까요.”
“하나, 거기에 반드시 전승자여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습니다. 새 방장인 원호 대사의 억지가 보통이 아니라 합니다.”
“보내게 될 거예요. 소림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야용비는 멀리 소림사를 힐끗 쳐다보더니 조그만 웃음소리를 냈다.
“굉운 대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단순히 전승자를 보내라고 소림사를 을러보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았다. 야용비는 거기에 몇 개의 조건을 더 걸어서 소림사가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들었다.
그 조건들을 소림사가 도외시하기엔 어렵다. 분명히 야용비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냉고사는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오히려 반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원의 명문 정파라는 작자들은 입으로야 대의를 내세우지만 정작 자기 자존심을 더 소중히 하는 자들입니다. 너무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야용비는 깔깔 웃었다.
“명문 정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존심을 내세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조차 납득할 수 없는 핑계를 잔뜩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일도 복잡하게 꼬이고 꼬인 상황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죠!”
야용비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아, 난 벌써 눈에 훤하네요. ‘그것’을 본 소림사의 스님들께서 머리를 싸맨 채 끙끙대면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을지요!”
냉고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야용비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야용비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