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59
제4장 일파만파(一波萬波)
“다녀오겠습니다!”
장건은 기운차게 인사하며 소림을 나섰다.
충무원에서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벌써 이 주일도 더 지났지만 출근 때마다 즐거웠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부담스럽고 떨리지만 그래도 뭔가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동안 소림에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여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라!’라는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사는 장건에게 할 일이 없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참다못해 장건이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다니면, 제발 하지 말라고 쫓아다니면서 말리지……. 기껏 일을 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난리지……. 내색은 못 했지만 얼마나 서러웠는가!
그런데 이제 그렇게 서러워할 필요도 없고 주눅이 들어 살 필요도 없다. 뿌듯하기도 뿌듯하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다.
한시적이나마 당당하게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받으며 자신만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덤으로 굉운에게 은혜도 갚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제 밥 먹는 시간에 남들 눈치 안 봐도 된다!
뱃속에 기가 잔뜩 들어찬 요즘에야 딱히 배가 고플 일은 없지만 먹는다는 건 여전히 장건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장건은 신이 나서 더 빠르게 걸었다.
주변의 풍경들이 휙 하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진산식에서 정체 모를 사람의 공력을 받아 낸 후로 장건의 내공은 훨씬 늘어났다. 기운이 달라 조금 애를 먹었을 뿐이다.
보통 사람이 반 시진은 족히 걸어야 할 산문 밖까지의 거리를 장건은 일다경도 채 되지 않아 내려왔다.
약속 장소에는 벌써 마차가 와 대기하고 있었다.
하분동과 구이남을 비롯해서 네 소녀들까지 모두 있었는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네 소녀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째려보기도 한다. 하분동은 그 사이에서 괜히 머쓱해하는 표정이었다.
“응? 무슨 일이지?”
☆ ☆ ☆
장건이 채 도착하기 전의 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미리 나와 있던 소녀들은 장도윤이 보낸 전갈을 받았다. 단순한 편지는 아니고 일종의 제안이었다.
무례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본가의 전통에 따르면, 남의 식구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몇 가지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오. 원하는 소저에 한해서 조건 없이 시험에 관한 모든 편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부디 본인의 뜻을 이해하고 잘 따라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본래 진상은 상인 집안으로서의 가풍을 지키기 위해 새 식구, 즉 며느리에게 상단의 말단부터 일을 시키곤 하였다. 혼인하기 전부터 상인 집안의 며느릿감으로 충분한지 시험해 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장도윤의 이런 결정이 진상으로서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평범한 여염집 여식들이 아니라 쟁쟁한 가문의 여식들이라는 게 이제까지와 다소 다른 점이었다.
“시험이 뭔데요?”
제갈영이 묻자 장도윤이 보낸 상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장건이 도착하기 전에 얘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말이 빨랐다.
“원래는 상단의 말단 일을 맡기는데 귀한 가문의 여러분들께 그런 사소한 일을 맡길 순 없고 하여, 이번엔 그리하지 말라는 장 방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소녀들이 ‘그럼요?’ 하고 되물었다.
상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시험에 도전하는 소저분들이 직접 장사를 해 보시는 게 어떠한가 제안하셨습니다.”
“장사를요?”
“예. 기한은 일 년. 어떤 종류의 사업이든,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저희가 부담할 것입니다. 다만 투자금과 이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는 분이 이 시험에서 이기시게 되므로, 무작정 많은 자금을 투입한다고 해서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나 많은 자금을 투자해서 많은 이윤을 남기신다면 그 또한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시험에서 이기면…….”
눈치 빠른 상인이 바로 대답했다.
“혼인에 관한 결정권을 도련님이 방주님께 위임한바, 우승한 소저 분께서는 방주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실 겁니다.”
한 마디로 혼인 상대자, 특히 정실을 고르는 시험이란 뜻이었다.
흠칫.
소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무리 자신들끼리 신경전을 펼친다고 해도 결국 정실의 자리는 장도윤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제갈영이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했다.
“흐응,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상인식 ‘비무’로군?”
그 한 마디에 다들 눈빛이 달라졌다.
“비무!”
그렇다. 무인이 무를 겨루듯 상인이 상재를 시험하기 위하여 겨루는 것이다!
특히나 머리가 좋은 데 비해 상대적으로 무공이 뒤처지는 제갈영이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영이는 할래!”
당연히 남은 두 사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백리연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소매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그 승부, 받아들이겠어요.”
이미 ‘일’이 아니라 승부의 영역이 되었다!
양소은이 발을 굴렀다.
쿵!
묵직한 진각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양소은을 쳐다보았다. 특히나 제갈영과 백리연이 긴장된 얼굴로 양소은을 보았다.
하지만 곧 조소를 날렸다.
“흥! 무식하게 몸 쓸 줄만 알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
“이제 와서 무력을 쓰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이것은 장 소협의 춘부장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며, 또한 성스러운 가문의 전통이에요. 위협을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죠.”
피식.
양소은이 웃었다.
“웃겨. 누가 위협을 해? 너희들, 내가 너희들보다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 주지.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완성된 며느릿감이 어떤 사람인지.”
지덕체의 겸비!
무공이 뛰어난 양소은이 지와 덕까지 갖추었다면 정말 가공할 경쟁 상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제갈영과 백리연은 그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덕’까지는 몰라도 ‘지’는 어림없어.”
“맞아요. 과연 장 소협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우리 두 사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면서?”
“이것들이?”
상인이 약간 난감한 얼굴로 셋을 말렸다.
“하하, 그만들 두시지요. 어차피 정당한 승부로 겨루시면 되는 문제입니다. 자, 그럼 세 분 모두 시험에 참가하시겠습니까?”
제갈영과 백리연, 양소은이 모두 대답했다.
“영이가 안 하면 누가 해요? 당연히 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흥. 너희들은 내 상대도 안 될 테니 일찌감치 포기하시지.”
그때 한 명의 목소리가 더 들렸다.
“저, 저도……!”
세 소녀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얼굴이 완전히 빨개진 하연홍이 손을 들고 뻣뻣하게 굳은 채 외쳤다.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도 시험에 참가할 거예요!”
하연홍은 빨개진 얼굴로 하분동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분동은 가만히 하연홍을 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 건이만은 안 된다고 했거늘…….”
구이남은 사정도 모르고 좋아했다.
“이야, 만약에 형님의 손녀분께서 대형과 혼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형이 형님께 장조부(丈祖父)라 불러야겠군요. 그럼 형님께선 대형을 손녀사위라 해야 하구요?”
하분동이 구이남을 째려보자 구이남은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얘깁지요, 말이.”
하분동이나 구이남이야 어쨌든 간에 세 소녀의 얼굴은 떫은 감을 베어 물은 듯 떨떠름해졌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대체 언니는 왜!”
제갈영의 말에 하연홍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냥!”
“뭐?”
“조, 좋아서 하, 하려는 건 아니고…….”
원래 하연홍은 장건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정말 연모의 마음인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하지만 장건에게 호감을 가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자신의 또래인 소년이 소림사에서 굉장한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때부터다. 강호의 무림사를 좋아하는 방년의 소녀에게 장건은 동경에 가까운 존재였다.
동년배 고수와의 교류!
그것은 평범한 소녀에게 꿈만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장건은 착하기까지 하다. 조금 행동이 이상한 게 흠이지만, 행동이 이상하면서 착하지도 않고 무공이 고강하지 않은 남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아니, 굳이 이모저모로 따져보지 않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도 한번 손을 들어 볼까?’ 하고 생각한 순간에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경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세 소녀들은 예상치 못한 경쟁자의 등장이 못내 달갑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진 걸 보니 완전히 진심이네.”
“도대체 장 소협은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 거야?”
한마디씩 하는데 결코 하연홍을 얕잡아 보는 말투가 아니다.
하연홍의 조부가 바로 장건과 십 년을 동고동락한 하분동이 아닌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대결이 될 것이다. 장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분동이 든든한 우군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점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유사시에는 소림과 아미 모두에게서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본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세 소녀들에 비해 유리한 점이 많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으나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으드득, 하고 이를 가는 듯한 환청이 들릴 정도로 네 소녀들은 서로를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하, 알겠습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 시험은 당분간 도련님께 알리지 않고 진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 시각 이후부터 시험이 시작됩니다.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제게 알려 주시길.”
장건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소녀들은 예정에도 없던 사업 구상을 하느라 머리가 다 복잡해진 지경이었다. 서로 간에 갖고 있던 경쟁심이 더욱더 불타오른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 사소하게 시작된 작은 일이 강호 무림 전체에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오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가장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제갈영이었다.
☆ ☆ ☆
촤악촤악!
착착착!
맑은 하늘 아래 충무원의 연무장에서는 경쾌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한동안 같은 연습을 해서인지 수련생들은 제법 이불을 잘 접어 댔다.
제법 손재주가 좋은 수련생들 몇몇은 끄트머리를 일정하게 맞출 줄도 알았고, 일부는 또 무슨 재주인지 소리를 팡팡 내면서 접기도 했다.
애초에 이불 접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데다 요령만 생기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 있어서 야위어 보이는 게 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저녁에 몰래 야식을 먹는다 해도 아침, 점심은 거의 못 먹는 거나 다름없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니 살이 빠지는 게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아주 원활한 건 아니었는데, 이불이 모자라 몇몇이 이불 하나로 돌려쓰고 있는 때문이었다. 이불을 바닥에 놓고 하다 보니 이불이 금세 더럽혀지거나 해지고, 또 찢어져서 쓸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장건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운 이불을 자꾸 낭비하게 되네요. 이불도 모자라고.”
구이남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그 때문에 어제 집사에게 수업에 필요한 비품 관리를 똑바로 해 달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집사 말이 오늘부터 수업에 차질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 말이지요.”
구이남이 문득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기 저거 아닙니까?”
장건과 하분동이 돌아보니 건장한 일꾼 한 명이 작은 손수레를 끌고 제갈영과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한데 일꾼의 얼굴이 익숙했다.
“어? 상달 형?”
양소은의 호위무사인 상달이었다.
“아이고, 교두님. 그리고 교관님들, 안녕하십니까.”
상달은 넉살도 좋게 굽실거렸다.
“상달 형이랑 영이가 같이 무슨 일이에요?”
제갈영이 서류 한 장을 팔랑거리고 흔들어 보였다.
“물건 납품하러 왔지.”
“물건?”
집사가 안쪽에서 허둥지둥 나오며 말했다.
“앞으로 수업에 필요한 교보재 및 기자재를 제갈가에서 납품받기로 했습니다.”
제갈영이 신나서 말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갈가에서 운영하는 상회가 있는데, 내가 서가촌(西家村) 신설 분점의 점주를 하기로 했어.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아, 교두 오라버니!”
옆에서 상달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제갈상회 서가촌 분점에 새로 취직한 상달입니다. 모쪼록 저희 상회를 많이 이용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갈영이 왜 이러는지 전후 사정을 아는 하분동과 구이남은 ‘허허’ 하고 웃었지만 내막을 모르는 장건은 아직 어리둥절했다.
“영이가 계속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온다고? 하지만 매번 수업에 새 이불을 쓰는 건 좀…….”
“어허. 걱정하지 마세요, 교두 오라버니. 제가 누굽니까. 자, 상달 직원?”
“옛!”
제갈영이 뒷짐을 지고 손짓을 하자 상달이 번개처럼 손수레로 달려갔다. 상달은 손수레에 잔뜩 쌓여 있는 이불들을 집어서 들어 보였다. 온갖 천으로 기워서 다소 덕지덕지한 헌 이불들이었다.
“쓸모없어진 헌 옷가지와 버리는 천을 모아서 완벽하게 실습용 기자재로 재탄생시킨 ‘절약형’이올습니다.”
상달은 은근히 절약을 강조해서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건의 눈이 반짝였다.
“버릴 걸 재활용하는 거군요!”
제갈영이 거들었다.
“그러엄, 이불로는 절대 쓸 수 없지만 실습용으로 편하게 쓰기엔 딱 좋아. 쓰다가 해지고 찢어지면 다시 기워 쓸 수도 있구!”
“와, 대단한데? 이러면 부담 없이 쓸 수 있겠어.”
“이게 바로 일석삼조지. 히히.”
제갈영은 으쓱거렸다. 돈도 벌고 장건에게 호감도 얻고 핑계 삼아 같이 일도 하고.
“아무래도 난 딱 상인 집안으로 시집가야 할 체질이라니까.”
장건의 얼굴이 빨개졌다.
☆ ☆ ☆
제갈영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세 소녀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제갈가의 이름까지 빌어서 순식간에 분점까지 개설한 추진력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양소은은 발을 굴렀다.
“분하다, 선수를 치다니. 조그만 것이 행동은 엄청 빠르단 말야.”
백리연도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거금을 융통해서 뭘 하나 했더니, 그게 본가에 전서구를 보내고 사업을 꾸리기 위해서였군요. 조만간 자그마한 점포도 얻을 거라고 알아보는 중이라네요.”
하연홍이 옆에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하게는 듣지 못했지만 제갈영은 은자로 천 냥 정도를 한 번에 융통했다고 한다.
“진짜 통도 크다.”
하연홍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었다.
은 천 냥이면 일 년에 쌀 오륙십 섬을 수확할 수 있는 논 삼십 마지기를 산다. 마을에서 보통 부유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들이 그 정도의 논을 소유하고 있다.
그걸 제갈영은 한 방에 빌려 갔단다.
그만한 돈을 차용증 한 장에 대뜸 빌려 준 쪽도 대단하지만 빌려 간 쪽도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운성방이 얼마나 거대한 상단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갈영 역시 그 정도의 돈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제갈가에서 태어났으니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배포와 재주를 가진 제갈영을 상대로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할지 하연홍은 막막하기까지 했다.
양소은은 열불이 나는지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제길, 사람을 우습게 보고 있어.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건데, 어디 두고 보자고!”
백리연이 물었다.
“뭘 할지 결정했어요?”
“아니. 하지만 이대로 질 순 없지.”
양소은이 가슴을 내밀고 큰소리를 쳤다.
“나는 이천 냥을 달라고 할 거야! 그러면 걔도 긴장할걸? 하하!”
“그 돈을 어디에 쓸 건지는 생각 안 하고요?”
“일단 받아 놓고 나중에 돌려주면 되잖아.”
백리연이 한심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이윤 정산 때에 빌려 간 돈에 대한 이자도 계산하기로 했잖아요. 무작정 많이 빌려 가면 이자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어요.”
“아차차.”
양소은이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얼마 떼기로 했지?”
“일 년간 일괄적으로 일 할요.”
“이천 냥의 일 할이면 얼마야……. 이백 냥? 끄응……. 그깟 이, 이백 냥쯤 그냥 줘 버리면 되지!”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정산 때 이백 냥이 감해질 거라는 게 문제죠. 이백 냥 이상을 뭐해서 벌건데요?”
“맞다, 벌어야 하는 거였지.”
이백 냥을 가문에서 가져와 때우는 것과 스스로 번다는 건 다른 문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백 냥은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니다.
양소은이 끙끙거리고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한 달짜리 호송에 호위로 다녀오면 은전 열 냥을 받으니까…….”
오가는데 두 달이니 일 년 내내 호송행을 다녀 봐야 이자도 안 나온다. 그 정도로 벌기 힘든 돈이다. 게다가 호송행 따위를 해서 일 년 내내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면 장건과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다른 경쟁자들이 몇이나 옆에 붙어 있으니까.
잘 생각해 보면 이번 시험 중에는 ‘가급적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장건과의 관계를 유지해 가며’라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양소은은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으으…… 이럴 때 상달이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텐데……. 이놈이 날 배신하고 제갈영에게 붙어?”
“호위무사잖아요. 왜 그랬대요?”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꼬셨대!”
“영이 동생이 머리를 잘 썼군요. 남의 사람을 뺏어서 본인은 이득을 보고 언니는 불편하게 만들고, 거기다 이젠 관부와의 계약으로 고정 수입도 마련했고요.”
“하아.”
세 소녀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제갈영이 이런 일에 두각을 보일 줄이야.
제갈영이 먼저 한발 크게 치고 나갔으니 이제 그 뒤를 어떻게 쫓아야 할지 걱정이다.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터였다.
운성방의 상인이 제갈영을 제외한 세 소녀들을 앞에 두고 물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 소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백리연이 먼저 말했다.
“저도 천 냥을 융자받도록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상인은 두 말없이 차용증과 함께 전표를 꺼내었다.
양소은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이천 냥!’을 외쳤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남은 것은 하연홍이었다.
하연홍은 엄청난 거금이 눈앞에서 오가고 있어 손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상인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권했다.
“아직 계획이 없으시면 나중에 뵐까요?”
“아, 아뇨.”
하연홍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힘주어 외쳤다.
“만 냥이요!”
백리연과 양소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어?”
상인도 살짝 놀랐는지 되물었다.
“만 냥이면 나중에 계산해야 할 이자만 천 냥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양소은이 하연홍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뭘 하려는데 자본금을 만 냥이나 써?”
“당연히 비밀이죠.”
“와…… 너 미친 거 아냐? 만 냥이면……. 와…….”
상인이 차용증과 전표를 하연홍에게 건네기 전에 잠시 몇 마디를 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진상이 지켜야 할 덕목에는 신의를 위해 가난한 자를 갈취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있습니다. 근래 금리로 보아 인자전(印子錢)으로 오 할의 이잣돈을 벌 수 있습니다만, 이번 시험에서는 규칙상 일 할 이상의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동의하십니까?”
인자전은 월숫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고리대금업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오…… 알겠습니다.”
하연홍이 차용증에 수결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전표를 받자 양소은이 보다가 나섰다.
“나도 삼천 더! 합이 오천 냥!”
상인은 별 기색도 없이 수긍했다.
“그러시지요.”
양소은이 백리연과 하연홍을 돌아보며 큰소리를 쳤다.
“이건 기세 싸움이야!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되는 거라고!”
백리연이 뜬금없다는 얼굴로 양소은을 쳐다보았다.
“그럴 거면 만 냥은 더 빌리셨어야죠.”
“어…… 음……. 그거야, 뭐…….”
오천 냥이면 이자만 오백 냥이라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백리연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네요. 이렇게 경쟁자가 한 명,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군요.”
“뭐? 너 말에 가시가 있다? 저기 연홍이는 만 냥을 가져갔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
“그야 연홍 씨는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겠죠.”
“나는 생각이 없고?”
양소은이 와락 성질을 내려 하는데 상인이 ‘하하’ 하고 사람 좋게 웃으며 말렸다.
“그만들 두시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장가의, 그리고 진상의 규칙에 따른 시험이긴 합니다만 혼인이란 어디까지나 가문과 가문의 행사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방주님의 친서에 방금 수결하신 차용증의 사본을 동봉하여 각 가문으로 보낼 것입니다.”
상인의 말에 세 소녀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알겠어요.”
백리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어, 망할……. 끙…… 에라이,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몰라!”
양소은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했다가 순식간에 털어 버렸으며,
“……네.”
하연홍은 조그만 소리로 한참이나 뒤늦게 대답을 했다.
어쨌거나 이제는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작은 시련!
‘좋은 신랑감을 얻는데 이 정도는 극복해 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각각의 가문에서도 소녀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 ☆ ☆
하분동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제일 먼저 서한을 받게 되었다.
“…….”
하분동은 탁자 위에 놓인 ‘차용증 사본’을 보고 막막한 얼굴로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별로…… 괜찮지 않소. 만 냥을 융자해서…… 이자만 천 냥이라니……. 생전 처음 보는 숫자로구려.”
하분동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그렇게 싫어했던 부처님인데, 오늘은 좀 부처님께라도 빌어야겠소. 내 눈이 잘못된 것 같으니 내일이라도 낫게 해 달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홍이도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일을 저질렀겠지요.”
“허어…….”
하분동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차용증 사본과 서한을 재차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잘 되어도 문제요. 건이 그놈이 얼마나 짠돌이인데…….”
연홍이에게 매일 풀만 먹이면 어쩔 거냐, 하고 싶지만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꾹 삼킨 하분동이었다.
장건을 그렇게 키운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책감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이럴 줄 알았겠는가! 그땐 그저 귀찮은 어린 꼬마였을 뿐이었는데.
☆ ☆ ☆
며칠이 지나 호북 백리가에도 서신이 도착했다.
백리가의 가주이자 백리연의 부친인 추룡검 백리상과 오빠 백리원은 장도윤의 친서와 차용증 사본을 보고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백리원이 한마디 했다.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천박하기 이를 데 없군요. 어디 감히 본가에 이따위 차용증서를 보낸단 말입니까?”
“가뜩이나 거기서 목매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험까지 치르겠다니 집안 체면이 말이 아니로구나. 우리 백리가가 고작 상인의 가문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꼴이 되지 않았느냐.”
“당장 돌아오라고 할까요?”
백리상은 답답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런다고 포기하면 뭐가 나아지겠느냐. 가뜩이나 중군도독부의 신임을 받아 교두로 초청받기까지 한 녀석이다. 우리로서도 놓치긴 아까운 인재야. 연이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이런 허무맹랑한 짓에 동참하기로 한 게지.”
“물론 객관적인 조건으로야 저희가 가장 좋지요. 세상에 연이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재(商材)를 겨루는 일이라면 또 장담할 수 없으니…….”
말끝을 약간 흐리던 백리원이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 제가 사람을 좀 풀어 볼까요?”
“뭐? 뭘 하겠다고?”
“경쟁하는 다른 소저와 가문들에 대한 나쁜 소문을 좀 흘린다든가, 장사를 방해 놓는다든가 말입니다. 그럼 훨씬 유리하게…….”
백리상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백리원을 보았다.
“이런 모자란 놈!”
“예?”
“네놈에겐 자존심도 없느냐?”
백리원이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쟁에서 져서 첩실로 들어가면 그거야말로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습니까. 이겨야 자존심도 살지요.”
백리상이 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리 백리가가 왜 날건달 같은 짓을 하느냐! 그야말로 천박한 짓임을 모르고!”
“아버님…… 소자는 그저 가문을 위해…….”
“어허!”
백리상은 한탄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머리가 있어도 생각을 못 하고 가문을 망칠 놈이로구나. 본가가 팔대 세가에 속해 있긴 하나 아직 명가(名家)가 되기엔 먼 이유를 알겠다.”
“아버님!”
“안 좋은 소문이 돌면 다른 가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느냐? 똑같이 우리 연이나 가문에 대한 악담을 할 텐데, 그럼 대체 서로 간에 무슨 꼴이 되겠느냐! 나중에 연이가 운성방의 며느리가 되어도 그때 퍼진 나쁜 소문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을 테고, 며느리가 못 되면 나쁜 소문이 진짜라서 그랬다고 입방정들을 떨어 댈 것인데!”
“죄…… 죄송합니다…….”
“하다못해 네가 제갈가보다 지모(智謀)가 나아서 일을 제대로 꾸미겠느냐, 아니면 남궁가에도 겁먹지 않고 날뛰는 양가장주만큼 무력이 되느냐?”
백리원이 쩔쩔매며 말했다.
“소자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면 아버님의 생각은…….”
“탐나는 녀석이긴 하나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본가에서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차 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어.”
“소, 소자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래도 마냥 방관할 수만도 없으니 사람을 보내긴 해야겠다. 가서 험담을 하란 소리가 아니라 몰래 도우란 말이다. 알겠느냐?”
“예…….”
백리상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탁자 위 운성방에서 보낸 차용증 사본과 그 옆에 쌓여 있는 서한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미련했다. 딸 하나에 너무 많이 기대왔구나. 연이가 있었다면 저것이 모두 본가에 들어오고 싶다는 서한이었겠지…….”
백리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봉도 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수십 장이나 되는 서한들.
그것은 대부분이 백리가를 향한 비무첩(比武帖)이었다.
☆ ☆ ☆
제남 양가장에도 운성방에서 보낸 서신이 갔다.
양가장도 백리가와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양지득의 앞에는 비단에, 죽간에, 목패에…… 온갖 것들에 적어 넣은 비무첩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나 양지득은 비무첩을 모조리 무시하고 붉은색 비단에 황금실로 화려하게 치장된 서신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중이었다.
“오천 냥? 오처어어언 냥?”
양지득의 험상궂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양지득은 칼로도 베이지 않을 것 같은 질긴 비단 서신을 맨손으로 찢어발겼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장도윤의 친필 서한과 차용증 사본도 함께 찢어졌다.
찌이익! 찌익!
“상인 나부랭이가 내 딸을 꼬셔서 오천 냥을 빌리게 해? 그것도 시험을 본다고?”
곁에 있던 총관이 조심스레 양지득의 눈치를 보았다.
씩씩거리던 양지득이 발을 구르며 일어났다.
“준비해!”
“네?”
“외출 준비 하라고.”
“어디로 가시게요? 설마 운성방으로 가시게요? 거기 요즘 엄청 잘나가는 뎁니다. 고관대작들까지 줄을 쫙 섰어요!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지 아들놈이 처맞아도 나한테 이딴 걸 보낼 수 있나 봐야지! 감히 이 양지득이를 뭘로 보고!”
총관은 양지득이 말하는 ‘놈’이 장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주님이 말씀하신 게 동네 꼬마가 아니라 임시직이래도 중군도독부의 교두입니다? 알고 가시는 거지요?”
“지가 중군도독부의 교두 할아버지라도 나를 건드리고는 가만히 못 넘어가! 내가 패러 가는 게 아니라 비무라고 하면 지들이 어쩔 거야?”
하기야 전가의 보도라는 비무가 있다. 물론 양지득의 말투를 보아하니 통상적인 비무가 아니라 시비에 이은 폭행의 수순이 될 테지만.
총관이 되물었다.
“그동안은 그냥 두셨잖습니까.”
“딸년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거랑 그쪽에서 내 딸년을 시험하겠다고 통보하는 거랑 같어? 와서 따님을 주십시오, 하고 무릎 꿇고 사정해도 모자랄 마당에?”
“에이, 그래도 거기가 그냥 상인 집안도 아니고 운성방인데요.”
“운성방이면 우리 양가를 우습게 봐도 돼?”
양지득은 거칠게 코웃음을 쳤다.
총관은 억지로 웃으면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원래가 양지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더러운 성질머리다. 오죽하면 부인과 사별한 후에 재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인에 대한 일편단심 순정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이 꺼리기 때문이란 말까지 돌았다.
그러니 시험이고 나발이고 장건을 두들겨 패서 억지로 양소은과 엮이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는지도 몰랐다.
양지득이 고함치듯 물었다.
“거기 어디랬지, 충무원? 거기까지 얼마나 걸려?”
“충무원은 모르겠고 근처에 있다는 서가촌까지는 여기서 한 천오백 리 길 정도 될 겁니다.”
“그래? 한 삼사일이면 가겠구만. 그럼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아니! 그럼 저기 산더미처럼 쌓인 비무첩과 약속들은 어쩌…….”
“알아서 해!”
양지득은 총관이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방을 나갔다.
총관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굳이 말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양지득이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간 것이지만, 요즘 강호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양지득의 행동은 제법 괜찮다.
근간에 검성 윤언강이 질풍 같은 행보를 그만두고 허공으로 붕 떠 버린 상황에서 검왕마저 검성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무이포신과 금월사자가 황궁의 인물이고 무당파의 환야는 관부에 억류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강호 무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내십존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그동안은 비교적 하층에 속한 문파와 무인들 간에 비무가 오갔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기존의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는 양상이었다.
최근에 급증하는 비무첩들이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지득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
당장에 거의 최고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장건을 쓰러뜨린다면 그 효과는 어마어마할 터였다. 어쩌면 미래의 예비 사위를 짓밟고 선다는 게 남들 보기엔 좋지 않을 테지만, 양지득이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지금 뛰쳐나갈 위인도 아니었을 것이고.
여하간 실리를 챙기기엔 좋은 기회다.
유일한 불안감이라면―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양지득이 장건에게 패하는 경우인데……. 양지득이 진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비록 패하긴 했어도 연화사태와 수백 초나 동수를 이루었던 양지득이다.
여차 싶으면 간만 보고 튈 수도 있는 게 양지득이다. 그러니까 혼자서 먼저 달려간 거기도 할 테고.
“어쩐지 그동안 너무 오래 몸 사린다 싶었지.”
총관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혼잣말을 하고는 비무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뚝딱뚝딱.
이른 아침부터 서가촌의 마을 한 곳에서 목수들 여럿이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제갈영과 숙부인 제갈동교는 함께 건설 현장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네가 굳이 분점을 이런 곳에다 낸다고 해서 그러마 하긴 했다만 좀 더 큰 마을로 갈 걸 그랬나 싶다.”
“최대한 오라버니와 가깝게 있으려고요. 바로 저 앞이 충무원이니까요.”
“그래.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도 놓치면 안 되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가 와 주신 덕분에 쉽게 공사도 하고 계약도 할 수 있었어요.”
제갈영이 포권을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 마라. 네가 잘 되면 가문도 좋은 거고, 가문이 잘 되면 또 너도 좋은 거고 다 그런 거지. 뭐, 임시 건물을 세우는 거니까 분점은 일주일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있을 거다.”
제갈동교가 말을 하다 문득 생각난 듯 제갈영을 보고 물었다.
“한데 충무원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정도로 이득이 좀 남겠냐?”
“일단 기회를 뺏길까 봐 시작만 먼저 한 거예요. 다음 사업은 다각도로 구상 중이에요.”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네!”
그렇게 제갈영이 제갈동교와 함께 공사를 좀 더 지켜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비단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장정 한 명을 대동한 채 수레를 이끌고 다가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제갈가의 분들이 아니십니까.”
제갈동교가 살짝 놀란 얼굴로 중년의 남자를 맞이했다.
“아니, 송 대인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디 좋은 일이 있나 해서 왔지요. 우리 상인들이야 늘 돈 냄새를 맡고 다니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하하, 돈 냄새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갈동교가 제갈영과 상인을 인사시켰다.
“인사드려라. 휘주상방의 송 대인이시다.”
“안녕하세요.”
“오, 제갈가에 영민한 재녀가 있다더니……. 얘기는 많이 들었소이다.”
송 상인이 제갈영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를 나누고는 장정이 끌고 온 수레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자고로 개업 집에는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지요.”
송 상인이 가져온 수레에는 제갈가를 상징하는 깃발과 ‘제갈상회 서가촌 분점’이라 쓰인 현판이 실려 있었다.
“허, 이제 막 공사 중인데 어떻게 아시고…….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어질 게 아닙니까. 허허.”
송 상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게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제갈동교가 짐짓 모른 척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거이거 왜 이러십니까. 제가 돈 냄새 쫓은 지 이십 년 됐습니다. 대놓고 말해서 별일이 아니면 제갈 상회가 서가촌 같은 산간벽지의 마을에 들어올 일이 뭐 있습니까?”
송 상인이 줄줄 읊어댔다.
“여기 서가촌은 고작 백여 가구에 불과해서 다들 농사나 지어 먹고 살지, 큰 물자가 오갈 만한 곳은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서 대법왕사와 숭양서원이 가깝긴 한데 거기 물자는 다 남쪽의 서십리포촌에서 조달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굳이 이런 불모지에 분점을 내시고…….”
“어험험.”
“저도 다 들은 게 있습니다. 아, 괜히 서가촌 땅값이 두 배로 폭등했겠습니까?”
“예?”
제갈영과 제갈동교가 둘 다 놀랐다.
“땅값이 두 배로 뛰어요? 며칠 전에 임대계약을 할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그야 제갈상회가 움직였다는 소문이 돌아서겠지요. 듣자 하니 운성방이 여기에 투자를 할 거라는 소문도 있고 말입니다.”
“정말요?”
송 상인이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셨습니까? 운성방의 전표가 여기서 잔뜩 쓰였다고 해서 저도 알게 된 겁니다. 오다가도 보니까 무슨 가게를 내는지 몇 군데나 준비 중인…….”
거기까지 들은 제갈영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저 잠깐만 다녀올게요!”
헐레벌떡 인사를 한 제갈영이 휑하니 서가촌을 가로질러 달렸다. 제갈영의 생각이 맞다면 송 상인이 본 가게들은 장건이 출퇴근하는 관도를 따라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달려가다 보니 과연 관도의 길목에 송 상인의 말처럼 새 단장을 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부들을 독려하고 있는 백리연도 보였다.
“앗!”
제갈영이 짧은 비명 같은 외침을 내뱉자 백리연이 돌아보았다.
“어머. 왔어, 동생?”
“어,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어제부터. 조만간 개업할 거니까 개업식엔 꼭 오렴.”
“누가 금방 망할 가게의 개업식 따위에 온대?”
제갈영이 뺨을 부풀리고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한쪽에 붙은 ‘다관(茶館)’이라는 깃발을 보았다.
“풉!”
제갈영은 입을 가리고 웃는 척했다.
“누가 이런 산골에서 차를 마신다고 찻집을 해? 킥킥! 진짜 금방 망하겠네.”
백리연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호호,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다른 사람들도 시작했으니까 동생이야말로 긴장하는 게 좋을걸?”
“풉풉풉! 내가 긴장을 해도 언니한테만은 안 할 거 같은데요오?”
제갈영은 뒷걸음질을 치며 계속 웃다가 달아났다. 백리연의 이마에 작은 핏줄이 솟아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제갈영은 달음박질을 하며 백리연의 다관을 재빨리 떠났다.
별로 크지 않은 마을이라 논밭 사이로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는 가운데, 또다시 관도의 길목을 따라 유난스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장원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정문에는 두 개의 창이 그려져 있었고, 담에는 양가장의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과 ‘창(槍)’이라고 쓰인 깃발들이 보였다.
안에서는 뚝딱거리며 목수들이 일하는 소리와 양소은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아, 아저씨! 거기 아니라니까? 거긴 딴 거 놓을 거니까 그쪽 벽에 두지 말라고요.”
제갈영은 열린 문으로 몰래 살펴보다가 금세 자리를 떠났다. 괜히 양소은에게 잡히면 좋은 꼴 보기 힘들다.
“시골 사람들이 농사짓다가 무슨 무술을 배운다고……. 쯧쯧, 여기도 금방 망하겠네. 하긴 뭐, 배운 게 도둑질이라구, 자기들이 할 줄 아는 게 뭐 있겠어?”
제갈영은 이제 마지막 남은 하연홍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하연홍은 뜻밖에도 벌써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뒤였다. 생각보다 허름하고 작은 반점(飯店)이어서 제갈영이 다 놀랐다. 이 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이 층에서는 숙박도 가능한 듯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한쪽 벽의 차림표가 달랑 ‘탕면(湯麵)’ 하나였다. 뒤에서 육수를 끓이는지 구수한 냄새가 났다.
‘전문 숙수를 데려다가 맛있는 걸 팔아도 모자랄 마당에 싸구려 국수 하나만 팔아?’
은전도 아니고 철전 몇 닢이면 먹을 수 있는 국수를 아무리 팔아 봐야 얼마나 벌겠는가.
아무래도 망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제갈영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소은이나 백리연보다 서민적이어서 그런지 어쩐지 하연홍에게는 정이 갔다.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갈까?’
어차피 하는 꼴들을 보아하니 승부는 거의 결정된 거나 다름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빌렸어도 시골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윤은 고사하고 이자라도 갚을 수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