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67
제4장 이름을 갖는다는 것
장건의 일로 수뇌부가 몇 번을 모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이려나, 좀 조용해지려나, 싶으면 또 모이게 되니 원주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호가 들고 온 얘기를 듣고는 다시 황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말씀하신 게 사실입니까?”
“분파를 허용하겠다고요?”
원주들의 질문에 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방금 원호가 한 얘기를 되물은 것뿐이다.
원주들이 애매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의 실력이 높은 건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리잖습니까.”
“아니, 무공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분파를 하려면 그에 걸맞은 학식이나 교양도 갖추어야지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무위가 높고 유별나다고 해서 분파를 인정한다면 소림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고 말 겁니다.”
“그런 식이면 이전에도 수많은 문파에서 분파를 허용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이 분파를 꺼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일가를 이루어서 계파를 잇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런 어린아이가 사조라니요.”
의견이 분분했다.
오랫동안 원주들의 뜻을 듣고 난 뒤 원호가 말했다.
“당장에 그리하자는 게 아닐세. 방장으로서 못 할 말이라는 건 알지만, 건이를 우리가 감당하기 버거운 데가 있어서 준비해 두자는 의도로 제안하였네.”
원상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요. 방장 사형의 말씀은 아이에게 장문의 소양을 키워서 내보내자는 건데, 그러면 기껏 죽 쒀서 남 주는 행동밖에 더 됩니까? 말이 계파이지 실질적으로는 아주 먼 친척뻘이니 몇 대 지나지 않아 독립 문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대다수의 원주들이 원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호도 수긍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그럼 이 안건은 없던 것으로…….”
“……?”
원호가 워낙 순순하게 수긍해 버리니 원주들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원호가 원주들을 둘러보며 살짝 말을 흐렸다.
“그럼 이 중에 한 명이 장건의 사부가 되어 주면 좋겠는데…….”
원주들이 흠칫 놀랐다.
“예?”
“아니, 그럼 쟤를 그냥 내보낼까? 올해가 지나면 속세로 나가야 하는데. 우리 제자인지 화산의 제자인지 어디 문파의 무공을 쓰는지, 여기 있는 우리조차 모르는데 나가면 오죽할까. 분란을 일으킬 게 뻔하니까 누군가가 책임지고 정리를 해 줘야지.”
“무슨 정리 말씀이십니까?”
“소림사의 제자답게 무공을 쓰게 만들든지, 무학의 이론을 가르치든지 아니면 강호에서 행동하는 법이든 뭐든 가르쳐서 내보내야지.”
원주들은 자연스레 무공 교두인 원우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속가 제자는 교두나 교관을 사부로 삼기 때문이었다.
원우는 정색을 하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이미 방장 사형께 절대로 그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원우가 여러 원주들의 아쉬워하는 눈빛에 단호하게 답했다.
“전 분파에 찬성입니다. 여러 사형과 사제들도 보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의 무공이 어디가 소림사의 것으로 보이더랍니까? 그 정도면 독립적인 영역을 개척했음을 인정해 줘도 됩니다. 계속 분란거리를 안고 가느니 분파로 내보내면, 어쨌거나 그 아이가 한 식구는 되지 못할지언정 남보다는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원우의 말도 그럴 듯했다.
“중요한 건 방장 사형의 말씀대로 우리가 그 아이를 끌어안고 있어 봐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당장에 보더라도 그 아이를 가르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쩝니까.”
“음…….”
“하기야 그 아이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서 내보낸다면 그거도 나쁘진 않겠군요.”
원주들이 침음성을 내며 생각에 잠겼다.
원호가 한마디를 더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 소림이 건이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네. 건이를 지원하는 것은 내가 빚을 지우는 게 아니라 나의 빚을 갚아 가는 일인 것 같네.”
원주들 몇몇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아무리 소림사를 위해서였다지만 어떻게든 장건을 내보내려고 적지 않은 고생을 시킨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원호 역시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새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자 원주들이 하나둘씩 원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방장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무림 문파이면서 동시에 사찰이라는 걸 잊은 모양입니다.”
“내가 과거에 한 짓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의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었으니 승려로서 창피할 따름입니다.”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방장 사형의 제안이 낫겠습니다.”
원호가 감격의 마음을 애써 감추며 회의를 종결했다.
“모두 고맙네. 강호에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번 일은 건이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소림을 자랑스러워할 일이 될 걸세.”
소림사 수뇌부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강호 무림의 역사에 커다란 획이 그어지려는 순간이었다.
☆ ☆ ☆
이튿날 늦은 저녁에 원호가 장건을 불러 논의된 일을 얘기해 주었다.
“……네에?”
장건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어서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문파를 세우도록 허락한 셈이라 보면 된다.”
“제가요?”
“그래. 네가 소림사의 계파 중 하나가 되어 장문인이 되는 게다.”
장건이 당황한 어조로 되물었다.
“제가 왜요?”
“네 무공을 인정했으니까 그렇지. 네 무공의 근원은 소림의 것이 맞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너의 무공이 소림의 것이라 말하지 못할 만큼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거다. 어때. 기분이 좋지 않으냐?”
장건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갸웃거리면서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투였다.
“인정해 주신다니 고맙고 감사하긴 한데요…….”
장건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탓에 말까지 흐렸다.
“근데 제가 문파를 세워서 뭐 하나요?”
장건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물을 줄 알았기에 원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문파를 세우지 않아도, 제자를 거두어 장문인이 되지 않아도 계파를 인정받았다는 건 똑같다. 후계를 만들어서 잇지 않으면 네 계파는 일 대에서 끝날 수도 있겠지.”
멍…….
장건은 얼빠진 표정으로 원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게다. 일파의 조사로 인정한다는 건 어떤 문파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이 많으니,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백들도 큰마음을 먹고 허락한 거란다.”
“네…….”
원호는 장건이 어린 나이에 너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듬는 말투로 첨언했다.
“걱정 마라. 어차피 당장에 그리하라는 건 아니다. 네가 충분히 성장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너는 소림의 제자일 거고, 여전히 나의 사질로 남아 있을 게다. 그저 미리 미래를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알려 준 거란다. 대외적인 발표는 아주 나중이 될 테니 말이다.”
약간 오글거리긴 했지만 충분히 장건의 부담감을 덜어 주는 말이 되었으리라, 원호는 생각했다.
하지만 장건은 계속해서 멍하니 원호를 보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저기요…….”
“그래,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 홀로 서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라니. 뭐가 말이냐.”
“저는 비무할 때 어떻게 소개할지 그냥 그게 궁금했을 뿐이었는데요.”
“그래. 비무할 때 소개를 하…… 응?”
“그냥 인사할 때 스승님과 배운 무공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그게 궁금해서 여쭤 본 건데요. 근데 왜 갑자기 저한테 문파를 세우고 장문인이 되라고 하시는 거예요?”
장건은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원호를 쳐다보았다.
하기야 장건으로서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가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과수원을 세우라고 하니!
“…….”
잠시 동안 원호는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원호가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사승에 대한 고민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 단순히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는 거지?”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진 않고?”
장건이 히 웃었다.
“거부하고 계시긴 하지만 제게는 노사님이 영원한 스승님이시죠. 근데 관계가 좀 이상하니까 남들에겐 어떻게 말해야 하나 여쭌 거예요.”
“…….”
어차피 했어야 할 일을 한 것임에도 이상하게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언젠가는 치러야 할 일을 해결할 것인데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장건이 자랑스러워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결정에 얼마나 큰 희생이 담긴 것인데…….
정작 장건은 별 생각도 없이 물어본 거였다니…….
“방장 사백님?”
“……왜?”
장건은 원호의 표정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물어보긴 해야 했다. 장건도 어쩔 수 없이 물어볼 사람이 원호뿐인 것이다.
“저기…… 아까 여쭤 본 건 어떻게 해요?”
“네가 알아서 해라.”
“진짜요?”
“그래.”
장건은 더 물어보려다가 원호가 갑자기 기운이 없어 보여서 더 묻기가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건은 넙죽 합장을 하고는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은 원호는 하늘을 보면서 ‘후―!’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홀로 번뇌에 빠진 내가 참으로 부질없이 느껴지는구나. 내가 전생에 업을 많이도 쌓았는가 보다.”
원호는 주먹을 내리고 들리지 않게 조용히 진언을 읊조렸다.
“길상존(吉祥尊)이시여, 길상존이시여. 대길상존이시여. 부디 원하옵건대 길상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소서.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그것은 업을 정화하는 진언 중 하나인 천수경(千手經)의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었다…….
☆ ☆ ☆
언제나처럼 퇴근 후에 장건이 원호에게 들은 얘기를 소녀들에게 해 주었다.
소녀들은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부, 부, 부, 분파!”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찻잔의 차가 다 식을 때까지도 소녀들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장건이 무덤덤하게 얘기하자 그때서야 소녀들이 정신을 차렸다.
“대단하고말고요! 천하의 소림사에서 새로운 계파를 인정한 건데요.”
“이야, 정말 축하해! 소림사의 고지식한 스님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지?”
“방장 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걸 보면, 전격 지원해 주려고 마음을 먹었나 보다!”
다들 기뻐하는데 하연홍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러자 세 소녀들이 일제히 하연홍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것 보라는 듯 다시 장건에게 시선을 돌린다.
장건은 손도 대지 않고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르고 있었다. 찻주전자 혼자서 움직이며 쪼르륵 맑은 찻물을 흘려 내고 있다. 세 소녀의 시선이 그 광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하연홍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건이 소림사에서 새로운 계파로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장건이 하는 짓에 비하면 믿을 수 없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가끔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능공섭물을 수족처럼 이용하는 이런 인물이야말로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었다.
“그러네요. 내가 말을 실수했어요.”
장건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소녀들을 둘러보는데, 제갈영이 눈을 반짝거리고 빛냈다.
“그럼 언제 개파대전을 열어?”
“응?”
“개파해서 강호에 이런 문파가 생겼다고 알려야지. 엄청난 사람들이 축하해 주러 몰려올 거야!”
“하지만 당장 분파하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모르는 말씀.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 장원을 지을 부지도 알아봐야 하구, 전각들도 특색 있게 지어야 하구. 그러고 나면 문도(門徒)도 정식으로 받아야 하구 숙수며 허드렛일할 일꾼도…….”
흠칫!
장건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되게 복잡한 거 같은데?”
제갈영이 ‘에헤헤’하고 웃었다.
“걱정 마. 영이가 도와줄게. 안살림은 원래 사모(師母)가 다 하는 거야. 대신 문파 이름은 멋지게 짓자!”
사모라는 말에 세 소녀의 눈빛이 변했다.
사모!
강호에 사는 여인으로서 그 얼마나 동경 어린 말이던가!
가문이나 상인의 아내가 아니라 문파의 대모(大母), 개파조사의 사모로서 수백, 수천 명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허리를 숙이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백리연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안살림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니 제갈 동생에게 맡기고, 저는 부끄럽지만 사소하고 별 도움이 안 되는 일을 맡겠어요. 제가 외부 손님들을 응대하죠.”
“어?”
제갈영이 아차 싶어서 말을 돌리려 했으나 늦었다.
“아냐아냐! 영이는……!”
“호호. 스스로 힘든 일을 자처하다니, 동생은 참 마음씨가 고와요.”
“어어, 그게 아니거든? 아니거드은?”
양소은이 혀를 찼다.
“쯧쯧. 개파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냐.”
“이왕 하는 것, 즐겁게 하면 좋지 않은가요?”
“어? 뭐, 그렇긴 한데…….”
“그럼 우리 괜히 꼬투리 잡지 않기로 해요. 좋은 일은 서로 축하하기에도 모자라잖아요.”
백리연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데 보통 때와는 다른 투지가 느껴졌다!
제갈영과 양소은은 긴장했다.
‘알고 보니 저 여우가 감투욕이 엄청나구나!’
사실 십수 년 동안 뭇 남자들이 떠받들고 살아온 백리연으로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외로 태연한 이도 있었다. 하연홍이었다.
“사모가 되든 안살림을 하든 올해가 지나 봐야 알죠.”
장건의 부친이 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백리연과 제갈영, 양소은이 하연홍을 돌아보았다.
‘쟨 뭘 믿고 그러지?’
사실 최근에 가장 잘 나가는 건 백리연의 다관이었다. 바로 옆에 확장까지 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최근에 우후죽순으로 다관이 들어서서 약간 주춤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양소은의 무관도 제법 제자가 많아져 벌이가 괜찮았지만, 무관이란 한계로 말미암아 일정 매출에서 멈추어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 독보적으로 튀어나갔던 제갈영은 서가촌의 상권이 커지고 여러 상단에서 지점을 내기 시작하면서 경쟁자가 늘어나 가장 고비를 맞고 있었다.
하연홍만 그중에서 가장 별 볼 일이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줄서서 먹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탕면이나 몇 그릇 팔면서 가장 태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자나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저렇듯 태연하니, 수상쩍기까지 했다.
양소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요즘 장사가 잘되나 봐?”
“그냥 그래요.”
하연홍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세 소녀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딱히 추궁할 근거도 없는지라 그저 심증만 가질 뿐이었다.
슬슬 한기가 도는 분위기가 되자 장건이 재빨리 말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전 문파 만들고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가업을 이을 거예요.”
소녀들이 일시에 장건을 향해 외쳤다.
“안 돼!”
소녀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장건도 깜짝 놀랐다.
“아하하하…….”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문파랑 가업을 같이 이으면 되지.”
“정 안 되면 상단 운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잖아.”
“빨리 애를 낳아서 가업을 잇게 하고 장 소협은 문파를 세우면 되는 거 아냐?”
“맞아맞아.”
소녀들은 갑자기 한목소리가 되었다.
“하하하…….”
장건은 뒷머리를 긁고 있다가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피력했다.
“미안해요. 난 그런 거 할 자신이 없어요. 이것도 그냥 비무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궁금해서 묻다가 생긴 일이에요. 스승님이 누구고 무공은 무엇인지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그걸 물으러 갔었거든요.”
제갈영이 물었다.
“원호 대사님이 거기에 대해서 다른 말은 안 하셨어?”
“그냥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
백리연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하! 장 소협은 대외적으로 발표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분파를 인정받았잖아요. 그건 장 소협이 일파의 조사로서 독자적인 무공을 창안한 것과 다름없으니까 원호 대사님께서 말씀해 주실 수가 없던 거예요.”
양소은이 ‘호오’하고 휘파람을 불듯이 입술을 모으고 감탄했다.
“그렇구나! 장 소협은 무공을 창안한 거야. 와…… 내가 지금 대종사(大宗師)를 눈앞에 두고 있는 거네?”
제갈영이 장건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는 무공명을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아니. 난 무공명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도 몰라.”
제갈영의 목소리가 한층 들떴다.
“우와! 그러면 오라버니가 창안한 무공에 ‘우리’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되는 거야?”
“우리……?”
듣고 있던 하연홍이 약간 멍하게 말을 되뇌었다. 강호를 동경하며 선대의 고수들에 대해 외고 있던 하연홍이다. 강호사에 영원히 남을 무공의 명명식(命名式)에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하연홍이 두 손을 맞잡고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명명한 무공명을 수천, 수만 명이 시대를 뛰어 넘어서 말하게 되는 걸까……?”
백리연도 비슷한 표정과 동작으로 혼잣말을 한다.
“아……! 그래요. 문하 제자들이 모두 우리가 명명한 무공명을 외며 수련하게 될 거예요.”
장건이 ‘아니, 저기요. 그건 뭔가 이상한데요?’라고 말했지만 소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건은 분명히 자기 입장을 말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소녀들에게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뭐지? 어쩐지 무서워.’
장건이 섬뜩한 생각이 들어 그러고 있는데 양소은이 벌떡 일어섰다.
“나가자!”
“네?”
“봐야 이름을 짓지.”
“네에?”
전혀 장건이 생각하던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가서 뭘 해야 할지 알려 줄게!”
소녀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함께 일어섰다.
“나가요!”
장건은 태극경으로 흘리거나 맞서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이끌려 다관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무공명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도움 받는 건 좋은데 아무래도 약간 생각과는 다른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심하게 기분 나쁘다거나 부담스럽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장건에겐 신기하달까?
소녀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니 문득 장건은 장문인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건과 소녀들은 다관의 뒷마당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져서 어둑했지만 다관에서 비쳐오는 불빛에 아주 캄캄하진 않았다.
소녀들은 장건의 무공 명명식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소녀적인 호기심이 작용한 탓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 양소은이 창을 들고 섰다. 장건이 이론에 있어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까우니 아예 처음부터 설명했다.
“무공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공심법, 무기술, 신법, 보법 정도로 나눌 수 있어. 내공이야 소림사에서 배운 것일 테고 그게 아니래도 나한테 보여 줄 수 없는 거니까, 우선은 간단하게 무기 권각술부터 시작해 보자고.”
양소은이 가지런히 다리를 모으고 창을 옆구리에 붙였다.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창을 쭉 치켜들었다가 중단으로 놓는다.
“이건 본가의 창법으로 양가수련창법 육십사식의 첫 기수식이야. 육십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양소은이 ‘일초!’을 외치며 발을 엇갈리게 해 몸을 기울이더니 다시 발을 내디뎌 창으로 하단을 쿡쿡 찌르는 동작을 했다. 연이어 기마보의 자세에서 옆으로 허리를 틀어 궁보를 만들면서 창을 쭉 밀었다. 그러곤 창끝을 빙글 돌려 자그마한 원을 그리면서 옆으로 튼 기마보의 자세로 되돌아와, 창을 배꼽 아래에서부터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 두었다.
“여기까지가 한 초식이야. 삽보중평란나찰창이라고 불러. 기초 수련창법이라 명칭이 좀 듣기에 그렇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수련식 명칭은 그래.”
장건이 알아듣겠다는 투로 말했다.
“초식 하나에 여러 동작이 있네요.”
“응. 그래서 여러 초식이 모이면 법식이 되고.”
장건도 보아 온 게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하게 구분하진 못했다.
“초와 법을 다 이름을 만들어야 해요?”
“그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양소은이 왼발을 엇갈리게 앞으로 당겼다가 뒤로 교차하여 빼면서 자세를 고정시켰다.
“이 동작은 삽보(揷步).”
이번엔 창을 거꾸로 세워서 창으로 지면을 찍으면서 원을 그렸다.
“이 동작은 난(攔).”
기마 자세에서 오른손을 뒤로 빼 창을 짧게 잡고는 왼손을 흔들어 창끝을 돌렸다.
“이건 나(拿).”
양소은은 창을 다시 회수하고는 말을 계속했다.
“이런 하나하나의 동작을 절(節)이라 하고 이 절들이 모여 삽보중평란나찰이란 초식(招式)이 돼. 그래서 이건 삽보중평란나찰창 일식인 거지. 그리고 이런 초식이 육십네 개가 모여 양가수련창법이란 하나의 창법이 되는 거야.”
양소은은 최근에 서생들을 대상으로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준비한 것처럼 쉽게 설명을 했다.
“사실 절 이전에는 촌(寸)이 있어. 삽보에서 왼발을 앞으로 당기는 것이 하나의 촌, 다시 뒤로 미는 것이 이 촌, 몸을 틀어 삼 촌, 기마보에서 멈추는 것이 사 촌이야. 삽보는 네 개의 촌으로 구성된 동작이지만 뭐, 촌은 대체로 수련 때 정확한 동작을 잡기 위해 연습할 때 빼고는 거의 구분하지 않아.”
“그럼 촌, 절, 초, 법이라고 구분하면 되네요.”
“일반적으로 촌과 절은 빼고 초식부터 명칭을 정하면 돼. 근데 초식이라고 굳이 아까처럼 촌절명을 붙여 만들 필요는 없고.”
양소은이 다시 창술을 펼쳤다.
창을 좌우로 빙글빙글 회전시키기도 하고 창을 휘두르다가 끝에서 가볍게 털 듯 돌리면서 여섯 절 이상의 초식을 해 보였다. 창날이 일으킨 바람이 휙휙 파공음을 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미려함을 넘어서서 현란하기까지 한 동작이었는데 후기지수 중에서 손꼽는 실력답게 짧은 초식을 펼쳤지만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건 양가수련창법 열두 번째 초식 무화창(舞花槍)이야. 내공을 실어 운용하면 파공의 기세에 꽃잎이 날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어. 굳이 덧붙이자면 초식은 하나의 완전한 의미를 가진 동작으로 구분되니까, 그에 어울리는 초식명을 붙이면 되겠지.”
“음…….”
장건은 양소은의 말에 비추어 자신의 동작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껏 초식에서의 구분을 굳이 고려해 본 적이 없어서 애매했다.
장건이 고심하는 듯하자 하연홍이 슬쩍 끼어들어서 말했다.
“전에 어디서 봤는데, 천문서원의 개파조사께서 필법(筆法)을 통해 무학을 깨달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대.”
무술의 기초가 되는 촌(寸)은 필법에서 올바른 자세의 획(劃)이 되고, 최소의 의미를 담은 부수(部首)와 독립된 뜻을 품은 자(字)는 절(節)이 된다. 글자들이 모여 일정한 형식을 갖추면 구(句)가 되고 무학에서는 초(招)가 된다.
하여…… 결국은 이 하나하나가 모여 온전한 작(作)이 되고 법(法)이 되느니라.
장건이 딱히 서예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해하기는 더 편했다.
“그러니까 촌은 최소한의 동작이구나.”
“그렇게 보면 되겠지. 찌르기의 절식(節式)을 행하기 위해서 손을 뻗고 손목을 틀고 어깨를 움직이고 하는 게 각각의 촌식(寸式)이 돼.”
하연홍이 격려했다.
“그러니까 너무 구별하는 데에 연연하지 말고 보여 주면 우리가 알아서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볼게요.”
양소은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기분 탓인지 네 소녀들은 장건이 가볍게 심호흡을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소녀들의 기대를 안고, 장건이 기수식의 자세를 갖춰갔다.
“그럼 평상시에 하는 금강권부터 시작할게요.”
장건은 심호흡을 했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금강권이 아니라 자기가 오롯이 편하게 할 수 있는 금강권을 하면 되었다. 말 그대로 평소에 하는 금강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기수식은 온갖 무학의 정점이 담긴 정수였다. 장건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서 기수식을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방식으로 하자면 이미 그 기수식의 묘리마저도 거의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었다. 굳이 기수식을 다 펼칠 필요도 없었다. 반은 잘라먹어도 충분했다.
최근엔 그나마 반쯤 잘라먹은 기수식의 동작에서 다시 구 할을 없앴다. 장건이 기수식을 하면서 금강권의 경력을 일으키면, 남이 보기엔 몸을 한차례 떨면서 ‘움찔’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만의 금강권.’
장건은 최선을 다했다.
스윽.
장건이 주먹을 살짝 내밀고 엉거주춤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푸학!
정면도 아니고 비스듬한 옆쪽으로 거의 이 장이나 떨어져 있던 네 소녀들의 머리칼이 휙 하니 날렸다.
그리고 장건은 어느샌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선 원래의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장건이 소녀들을 보며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끝났어요.”
☆ ☆ ☆
같은 밤, 굉운은 바람을 쐬러 조사전 앞을 나왔다가 문원을 보았다.
문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비를 들고 있다가 굉운에게 물었다.
“거동할 만한가 보아?”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래.”
굉운이 지그시 문원을 바라보았다.
“건이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냐아냐, 꼭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장건 때문에 왔다는 건 뻔히 알고 있었다.
“걱정되시면 직접 건이에게 가 보시지요.”
“아직 애가 안 돌아왔걸랑.”
문원은 딴청을 피우다가 스스로도 답답했는지 ‘에이’하고 그냥 용건을 꺼냈다.
“분파시키기로 한 거, 원주회의를 통과했다며.”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거 정말 잘하는 걸까?”
굉운이 조용히 답했다.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짧은 생각에는 지금 그 방법이 가장 최선인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건이와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
“아이를 그냥 물가에 내놓지는 않을 겝니다. 충분히 물질을 가르친 후에 내놓아야겠지요.”
“그 얘기가 아냐.”
굉운이 살짝 의문을 가졌다.
“달리 우려되시는 점이 있으십니까?”
“응.”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뭐, 경청이랄 것까지는 없고…….”
문원이 험험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분파하는 것 자체는 나도 나쁘다고 보질 않아. 그놈은 어따 데려다 놔도 소림사의 제자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근데 분파를 한 뒤가 문제야.”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건이와 비슷한 이들이 늘어날까 염려되시는 겁니까?”
“그건 그냥 그런 꼴이 보기 싫은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될 때까지의 과정이 문제라 말하고 싶달까? 계파를 일궈서 건이가 누군가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 말야.”
“예.”
“누군가에게 독문 무공을 가르치려면 스스로를 알아야 해. 하물며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시작하는 경우잖아. 저어기 쓸데없이 관부에 가서 무공 몇 가지 가르치는 거하고는 다르다구. 건이는 이제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되돌아보게 될 거야.”
굉운이 정중히 의견을 말했다.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일이지. 근데 생각해 봐. 건이가 새롭게 창안했다고 생각하는 무공, 소림사의 무공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대성한 그 무공이 뭐야?”
“그야…….”
굉운도 잠시 고민했다. 처음엔 분명히 문각의 백보신권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조차 아닌 것 같다 들은 탓이었다. 확실히 뭐라고 부를 명칭이 없었다.
“글쎄요. 그건 이제부터 건이가 만들어 가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응, 나는 그게 문제라는 거야. 하다못해 이름을 붙이는 작은 일조차 아이에게는 해가 될 거야.”
굉운은 그제야 문원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스스로 무학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면 그것이 오히려 건이의 발전을 저해하게 될 거란 말씀이시군요.”
“말[言]과 글[語]은 사람이 가진 모든 걸 표현할 수 없으이. 사람의 사고(思考)는 온 우주를 넘나들도록 무한한데 말과 글은 유한해. 한정된 말과 글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순간, 무한했던 영역은 말과 글이라는 작은 틀 안에 갇히게 되고 말아.”
문원의 말을 듣던 굉운이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사숙조의 우려는 기우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말로써 생각하고, 글로써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에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도자기를 빚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춥니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나 언어로는 불가능한 것들을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조차도 우리가 걸어가는 광활한 평야에선 일부의 길에 불과해.”
“대신 불분명한 길을 명확하게 밝혀 길을 잃지 않게 해 주지요.”
“반면에 길을 걷는 수행자가 정해진 길 밖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지.”
“진리를 탐구하는 수행자라면 그가 가는 곳이 어떤 길이든 이미 진리의 길일 테지요.”
“끙!”
“언어로든 그림으로든 지칭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세상 만물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다른 존재와 구별됩니다. 허공을 떠도는 작은 날벌레에게 하루살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귀찮은 날벌레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루살이를 일컬어 단순히 날벌레라고 불렀다면, 하루살이는 결코 다른 날벌레와 구별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문원이 지지 않겠다는 듯 반론을 제기했다.
“구별은 곧 한계를 의미하네. 지칭하고 구분 짓는 순간부터 너와 내가 다름을 인식하기 시작해. 우리가 물아일체를 통해 대자연과 합일하는 길을, 나아가 우주합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할 뿐일세.”
굉운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그 말씀이 옳지요. 번뇌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려면 반드시 그리할 수밖에 없지요.”
“응?”
“하지만 건이는 우리와 함께 살아갈 아이가 아닙니다. 속세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지요. 건이는 사회에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이후에 살아가면서 깨달음을 추구해도 늦지 않습니다. 현실과 진리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본사의 방식 아니겠습니까.”
“끄응…….”
문원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소림사는 대승(大乘)을 추구하고 중도(中道)에 따르기 때문에 진리의 탐구가 사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 굉운의 말도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문원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자 굉운이 물었다.
“속세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은 보편적인 말과 글을 통해 보편적으로 사유하고 보편적으로 공감하기에 어울릴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건이가 강호에서도, 세간에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하는 말이 홍오랑 하나도 다를 게 없구만, 뭐! 땡중이나마 스님 짓을 오래 해 먹었다고 나 같은 불목하니는 말 상대가 안 된다는 거야, 뭐야?”
문원이 투덜거리자 굉운은 잠시 홍오를 회상했다.
“어쩌면…… 사숙께서는 진정한 중도를 알고 추구하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너무 사숙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가…….”
그러자 문원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홍오는 도를 넘었지! 보편적 사유를 해야 한다며? 홍오가 한 행동 어디가 보편적일 수 있어? 다들 질려 버렸잖아. 그건 중도가 아냐.”
문원이 말하고 보니 장건의 행동도 그러하다. 남들이 특이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니 그게 가끔은 민폐가 되기도 하고 분란이 되기도 한다.
“어…… 음. 건이도 뭐…… 음.”
“사람들은 특정 지어지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을 싫어합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 미신을 만들고, 잡귀를 숭배하게 만들지요. 지금은 아무도 건이의 무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경외시하고 있지만, 건이가 자신의 무학을 보편적인 사유를 통해 가다듬고 사람들에게 말해 준다면…… 비록 스스로의 무공은 퇴보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면서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장건을 위해서 어느 쪽이 나은가, 문원은 잠깐 동안 생각했다.
“뭐, 전 방장의 말이 맞아. 기이한 무공, 이름도 없는 무공을 마구 쓰다 보면 어디 가서 사마외도의 무공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
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무력이다. 하지만 무력의 이면에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무력을 움직이는 동력으로서 작용했을 때, 통념을 따르지 못한 이방인이 배척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오황의 경우에도 자신의 무공에 풍연경이란 하나의 이름이나마 붙인 건 최소한의 통념을 따른 것이다. 절대자로서 자유로운 오황조차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고 완전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순 없었다.
그런 면에서 장건이 스스로의 무공을 체계화하는 건 주류에 편입하는 첫 시험이자 관문일지도 몰랐다.
“그래…… 알았어. 그냥 갈 때가 돼서 그런지 노파심에 찾아와 본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문원은 시무룩해져서 발길을 돌리려다가, 다시 휙 하니 굉운을 째려보고는 말했다.
“근데 지금 우리가 내린 결정은, 어쩌면 누구도 가 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던 아이의 미래를 빼앗은 건지도 몰라. 그건 알아 둬. 전부 우리의 책임이란 거.”
“명심하겠습니다.”
굉운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무아미타불.”
불호 소리에 문원이 합장을 했다. 굉운이 마주 반장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문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네 소녀들은 그야말로 아차 싶었다.
부푼 꿈에 들떠 있다가 잠시 잊고 있던 걸 깨달았다.
맞다! 장 소협의 무공은 원래 저랬더랬지!
공명에 눈이 멀어서 뻔히 알고 있던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기의 가닥인지 나발인지를 한다고 장건이 아예 동작을 안 하기 시작한 지 좀 되었다. 그나마 기수식을 한답시고 움찔거리는 건 좀 나아진 거였다.
실제로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도 거의 암경 수준으로 권풍을 뽑아냈는데, 그걸 달리 부를 말이 없어 능공섭물로 불렀던 것이다. 평상시에 하는 능공섭물과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침묵의 분위기가 휭 하니 장내를 휩쓸었다.
양소은이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금강권이라고…… 근데 나도 전에 금강권을 견식한 적이 있거든. 이걸 금강권이라고 할 순 없지 않아?”
약간 멍한 상태인 건 마찬가지인 백리연이 말했다.
“그래서 장 소협이 분파를 허락받아…… 우리가…… 여기 있는 거죠.”
“아, 참. 그랬지.”
금강권에서 시작했지만 금강권이 아니라 다른 무공이 되어 버려서 소림사에서조차 두 손을 놓았다. 덕분에 소녀들이 그 이름 정하겠다고 여기 있는 것이다…….
네 소녀는 새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장건이 금강권을 하든 무슨 권장법을 하든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장건은 그 상태로 여러 가지 무공을 하진 않았다. 원래부터 투로도 초식도 없이 여러 무공의 장점만을 합쳐 효율적인 방식만 사용하고 있는 장건이었다. 나머지는 그 방식의 응용이고 연장선이다.
장건이 빤히 소녀들을 쳐다보면서 ‘빨리 이름을 내놓아라’라는 독촉의 눈빛을 보냈다.
“어때요?”
양소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무공명은 동작뿐 아니라 의미가 깃든 것들도 많아. 동작이 없으니 동작으로 무공명을 지을 순 없을 거 같고…… 지금 보여 준 금강권을 하면서 생각하는 점이라든가 의미 같은 게 있어?”
“홍오 대사님이 보여 주신 금강권을 생각하면서 했어요. 가능한 많이 움직이지 않고 그 특징을 따라하려고요.”
“음…….”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 특징이 뭔데?”
“일기가성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 진각을 밟는 것, 주먹을 세게 치는 방법 등이에요.”
네 소녀들의 얼굴은 저절로 찡그려졌다. 장건에 대해서는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하연홍이 소리쳤다.
“어떻게 하면 그걸 따라했는데 하나도 드러나지가 않어!”
하연홍은 소리쳐 놓고 혼자 깜짝 놀랐다.
“어머? 미안해.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나머지 소녀들은 속이 다 시원했다. 속으로는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던 얘기였다.
사실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됐다.
일기가성은 금강권뿐 아니라 소림사의 무술 전체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소리를 지르는 기합법이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일기가성을 고쳤대도 그렇지, 기합을 어떻게 고치면 찍소리도 안 내고 할 수 있는 거냐고!’
한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장건이 하연홍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속으로 해요.”
“응?”
네 소녀들의 귀가 쫑긋했다. 전에도 들었던 말인데 와 닿는 느낌이 달랐다.
“그러니까…… 최소의 움직임이 촌이니까 촌식으로 따지면 방금 한 금강권은 이백칠십구 촌식이네요.”
장건이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소녀들은 혼란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