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69
제6장 이번엔 서가촌이다!
장건의 일상은 무료할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사실 지난번 비무 이후 또 다른 비무 신청이 있을까 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고 있던 차였는데, 아무도 비무를 하자는 사람이 없어 아쉽기도 했다.
심지어는 충무원에 올 때부터 내내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감시자들―도 장건이 말 좀 걸라치면 슬금슬금 피해서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역시 소은 누님의 도관에서 비무를 할 때 신중하지 못한 탓이었겠지?”
장건은 나름대로 그렇게 분석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무공 내력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비무, 혹은 비무를 가장한 시비가 없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장건으로서는 오랜만에 마음 편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장건은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며, 네 소녀들과 매일 무학에 대한 공부도 하며 비교적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나날이 지속되고 한창의 여름이 시작되던 때.
하나둘, 서가촌에 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장건과의 비무를 하기 위해 오는 각대 문파와 세가의 장로들이었다.
사실 그것까지는 별다른 사고랄 게 아니었다.
약간의 오해로 찾아왔다 해도 어차피 비무를 하고 각서를 받아 가는 건 똑같다. 남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 민망할 뿐이지, 그냥 오는 대로 일을 마친 후 돌아가면 되었으니까.
걸린 사안은 작지 않았지만 겉으로야 결국 그 정도로 끝날 일이었다.
온 이들이 대체로 문파에서 가장 웃어른인 장로, 원로급이라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뻣뻣하기 이를 데 없으며,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 ☆ ☆
느지막한 오후.
새로 닦인 서가촌의 대로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마차나 짐수레를 비롯해 행상들까지 다녔고, 유명 명소로 인해 주변에서의 인구까지 유입되고 있었다.
오가는 이들 중에 육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 서가촌의 초입에서 걸음을 멈춘 채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촌 동네라더니 번화하기가 성도 못지않군.”
서가촌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여서 건물들도 잔뜩 들어서 있었다.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복작거리는 마을이었다. 불과 몇 달 전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노인을 수행하기 위해 마중 나온 문하 제자가 말했다.
“소림소마가 온 이후,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소림소마가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하기야, 그렇게 난 놈이니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겠지.”
“오시는 동안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없었다. 다만 강호의 정세가 워낙 불안하여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오느라 늦었느니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중이라 해도 아직 중소 문파들의 비무행이 한창인 데다, 무기소지 허가서가 거대 문파에 의해 조절되지 못하고 남발되니 길거리에도 시퍼런 병기를 들고 다니는 자들이 많았다. 이곳저곳에서 개인끼리, 집단끼리 싸움이 나니 아차 하면 휘말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물론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기 싫어 은밀히 이동한 것도 한 이유였다.
“민초들이 매일매일을 불안해하며 살고 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관부에서 이 사태를 방치하려는지 알 수가 없구나. 쯧.”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노인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투로 물었다.
“소림소마는 어디에 있느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충무원이란 곳에 있습니다. 저녁에 퇴근을 하면서 이 길을 지날 것입니다. 숙소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쉬시고…….”
“됐다. 별로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니니 근처에서 운기조식이나 하며 기다리다가 소림소마를 보고 바로 돌아가겠다.”
“아, 네…….”
“어쩌다가 우리 남궁가가…… 쯧쯧.”
노인이 짜증스러운 투로 말을 내뱉으며 돌아서는데, 마침 다른 문파에서 온 일행과 마주쳤다.
흠칫.
하필 공동파에서 온 나이 든 장로와 젊은 제자였다.
공동파와 남궁가는 최근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져 있었기에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였다. 밑의 제자들 간에는 만나면 칼질부터 한다는 얘기까지 들려오는 중이었다.
짧은 순간 서로 간에 탐색과 경계의 눈빛이 오갔다.
선뜻 먼저 인사를 하는 이가 없었다.
서로 누가 먼저 인사를 할까 눈치만 본다. 왠지 먼저 허리를 굽히는 쪽이 지고 들어가는 인상인 것이다.
그렇게 쳐다만 보며 어쩌다 보니 결국 인사할 시기가 애매하게 지나고 말았다. 이제 와 인사하면 더 이상해질 터라 분위기는 한층 싸늘해졌다.
서로 노려보기만을 일각여, 좀 더 성질이 급해 참을 수가 없었던 공동파의 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흠. 남궁가의 무인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그 말을 듣자 남궁가의 노고수는 울컥해서 눈가가 붉어졌다.
사실 별다른 말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말로 ‘어이쿠!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정도로 자주 쓰는 말일 뿐이었다.
하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받아들이는 쪽은 달랐다. 가뜩이나 공동파에서 가전 무공이 파헤쳐진 자신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해 짜증이 나는 상태다.
거기다, 원래 남궁가의 노고수는 서가촌에 별로 오고 싶지 않아 했다. 남궁가의 무인이 왜 누군가에게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느냐고 반대하던 측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생각은 달랐다.
앙숙이던 양가장의 여식이 장건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 차후에 장건이 양가장의 편을 들 게 거의 확실했다. 검왕은 은퇴해도 신창은 아직 한참을 활동할 나이다. 거기에 장건까지 가세하면 남궁가로서는 감당하기가 막막해진다.
게다가 하필 공동파의 제마보를 극복해 낸 것으로 보이는 검왕의 제왕진검은 문사명에게 이어진 상태. 문사명을 식객으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어쨌든 그는 화산파의 제자다. 제왕진검이 남궁가의 적통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유의미한 불안감으로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남궁가의 무공 약점이 강호에 노출된 채라는 걸 의미했다.
그러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무인의 자존심과 가문의 이익 사이에서 남궁가는 실리를 선택하였다.
가문이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장로급의 인물이 한 번의 개인적인 비무―혹은 패배―만 감수하면 장건이라는 거대 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재수 없게도 가장 반대하던 노고수가 차출되어 오게 된 것뿐이다…….
그러니 남궁가의 노고수 입장에서는 ‘이런 곳’에 오게 된 것을 스스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한데 거기에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공동파 장로의 인사말이 불을 지핀 것이다.
고까운 목소리로 남궁가의 노고수가 되받아쳤다.
“그 말인즉슨 남궁가가 이런 곳이나 들락거릴 정도로 하찮아 보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소이까?”
공동파의 장로도 확 짜증이 치밀었다. 그냥 인사한 것뿐인데 괜히 시비를 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좋은 말을 안 좋게 곡해하여 받아들이는 못된 버릇이 있으시구랴. 뭐 찔리는 거라도 있소?”
“허허허. 이곳에 온 이유야 피차일반일 것인데 그대는 안면에 철판을 깔았는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으시구려?”
남궁가의 노고수야 이기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억지로 가문의 이해 관계에 의해 온 것이니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게 당연했다. 그러나 공동파의 장로는 천문비록 때문에 왔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뜨끔했다.
“강자와 싸우는 건 무인으로서의 기쁨인데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오? 적당히 하다 말고 부수적인 이득이나 취하려는 소인배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니오?”
공동파의 장로는 천문비록을 부수적 이득으로 표현했는데, 남궁가의 노고수는 각서 얘기로 들었다.
남궁가의 노고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껄껄 웃었다.
“강자와 싸우는 건 물론 즐거운 일이외다. 하나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사마귀는 마차 바퀴에 짓밟혀 죽기밖에 더하겠소이까.”
공동파의 장로도 화가 치밀었지만 역시 같이 껄껄 웃었다.
“누가 사마귀인지는 보면 알잖겠소? 그럼 내 기꺼이 순서를 양보할 터이니, 어디 한번 마음껏 해 보시구려.”
천문비록을 노리고 오긴 했어도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지, 소림사의 의도나 장건의 실력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처음부터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 공동파의 장로는 내친김에 남궁가 노고수의 등을 떠밀었다.
남궁가의 노고수가 순간 주춤했다.
본래 남궁가의 노고수는 오늘 당장에라도 끝내고 떠나려 했다. 생사를 건 비무도 아니고 장건과 적당히 몇 번 손을 섞다가 물러설 생각이었다. 그러면 서로 체면 상할 일도 없고 창피도 당하지 않을 터였다.
한데 공동파의 장로가 지켜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중간히 끝내거나 엉망으로 패했다간 옆에서 뭣 때문에 왔냐고 빈정대며 놀릴 것이다. 가문의 이해 때문에 비무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겐 못내 아프게 작용했다.
‘너구리 같은 늙은이. 나를 먼저 내세우겠다?’
남궁가의 노고수는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외려 남들이 보기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하게 말했다.
“내 마음 같아서야 먼저 그러고 싶으나 그러면 귀하의 기쁨을 빼앗는 꼴이 될 테니 선뜻 귀하의 청을 받아들이기 어렵구려.”
“아니오, 아니오. 내 기꺼이 양보한다지 않소.”
“아아, 괜찮소. 본인은 귀하처럼 빡빡하게 무인의 긍지를 찾으며 사는 사람은 아니외다. 이미 살 만큼 살았는데 무슨 공명을 탐하여 아등바등 살겠소? 이곳에 좋은 명소가 많다하니 천천히 유람이나 하다가 적당한 때에 비무를 청할 생각이었소이다. 그러니…….”
공동파의 장로도 질 수 없었다. 남궁가 노고수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허!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이었소이다. 한 며칠 느긋하게 둘러보며 여유를 즐길까 하니, 때가 되어 비무를 하시거든 꼭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참석하리다.”
공동파의 장로는 남궁가 노고수가 딴 말을 하지 못하게 아예 포권까지 하며 인사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남궁가 노고수도 포권하며 재빨리 말했다.
“본인은 느긋한 성격이라 며칠이 아니라 몇 주야가 될지도 모르오만, 기다리기 지루하거든 얼마든지 먼저 시작하시구려. 본인 역시 만사를 제쳐 놓고 꼭 참석하겠소이다. 혹여,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는데 몰래 비무를 성사시켜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거나 하는 졸렬한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요?”
졸렬!
공동파 장로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허허, 그쪽이야말로 야반도주하듯 몰래 비무하고 졸렬하게 달아나지나 마시오. 물론 검의 명가인 남궁가에서 하류 잡배들이나 할 만한 짓을 할 리는 없을 테고, 굳이 웃음거리가 되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말이오.”
“허, 내가 할 말이오.”
“이쪽도 마찬가지요.”
“그럼, 피차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소이다.”
“그런 것 같소. 허면 유람 잘하시구려.”
두 노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휙 돌렸다.
쌩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둘 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뒤늦게 ‘아차’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도 어느새 뒷전.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접어든 셈이었다.
☆ ☆ ☆
공동파의 장로와 남궁가의 노고수는 정말로 유람을 다니거나 하진 않았다. 시야에서 아주 벗어나진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를 두고 매일 서로의 행동을 확인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뻣뻣한 노인네들은 누구도 먼저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공동파의 장로는 분을 못 이겨 하루에도 몇 번을 부들부들 떨었다.
“흥! 저들이 지레 겁먹어서 본파를 핍박했으면서 왜 괜히 애먼 내게 신경질을 부린단 말이냐? 아니, 꼭 문파간의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저놈보다 몇 살은 더 많을 텐데 어린놈이 어른을 봤으면 먼저 인사를 해야지,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뭐, 살 만큼 살았어? 에잉! 어린놈이 싹수없게.”
남궁가의 노고수도 성질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잖은 제마보 하나 믿고 우리 남궁가를 무시해? 어디 우리 가문에 무공이 제왕검형밖에 없다더냐? 물론 꼭 그런 게 아니래도, 자기들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고 있는데 사람을 봤으면 ‘좀 괜찮으시냐, 본문의 불찰로 심려가 크시겠다.’하고 나와야지, 지들 잘못 없다고 뻗대기만 하면 다야? 어떻게든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에이이! 강호의 도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작자들 같으니.”
본래 사이가 안 좋으면 작은 것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인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사소한 일로도 크게 마음이 상하고 고집이 세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두 노인은 남들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시시때때로 티격태격 말다툼도 하면서, 시간이 허무하게 흘렀다.
☆ ☆ ☆
한편으로 길을 오다가 만나 별다른 거부감 없이 동행한 이들도 있었다.
진주 언가에서 온 중년의 외당주와 점창파의 젊은 제자, 그리고 무영문과 곤륜파의 두 장로들이었다.
굳이 사이가 돈독하달 것도 없지만 다툴 일도 없었기에 그들은 제법 화기애애하게 서가촌을 찾아왔다. 같은 처지라는 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작용해서 오는 도중에 비무의 순번까지 미리 정해 놓았을 정도였다.
비무라고 해도 꼭 이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적당히 자파의 무공을 쓰는지 확인하는 형식적인 비무 정도로 여겼기에 부담감도 크지 않았다. 어차피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넷은 가벼운 마음으로 비무를 끝내고 서가촌의 명물과 명소들을 함께 둘러보기로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첫 순번으로 뽑힌 언가의 중년인과 다른 셋은 장건이 퇴근길에 반드시 지나간다는 관도에서 대기했다.
오후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자, 정확하게 장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에서 점 하나가 기이한 모양으로 쭉 다가오고 있었다.
“왔다!”
장건을 처음 본 이들은 장건이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소문대로군요. 저게 팔각활빙보라지요?”
“어떻게 저런 신법이…….”
실제로 보니 소문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장건이 타 문파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고 들었기에 마냥 넋 놓고 구경할 순 없었다.
“준비합시다.”
“예.”
무인들은 살짝 긴장된 얼굴로 장건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건은 최근 서가촌에 무인들이 더 늘어난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은 굳이 안법을 쓰지 않아도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 안다. 안법을 쓰면 위기 덩어리의 색과 농도를 봐서 무위도 짐작 가능했는데, 슬쩍 지나치며 보니 이번에 몰려든 이들은 대체로 실력이 낮지 않은 편이었다.
개개의 차는 있지만 소림사의 원 자 배 원주들과 비슷하거나 약간 모자란 수준이니, 꽤 대단한 사람들이 몰려온 셈이다.
백리연의 말로는 명문 문파와 세가의 장로들인 것 같다고 했다.
장건은 왜 그들이 찾아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각서를 쓸 수 있어서 잘됐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사실 먼저 비무를 하자고 말을 꺼내 보고 싶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새로 온 이들 역시 전에 있던 무인들처럼 슬슬 주변을 맴돌기만 하며 눈치를 보는 터라 먼저 다가가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일주일.
마침내 장건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혹시나 해서 각서를 잔뜩 챙겨 두길 잘했다.’
장건은 흐뭇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언가의 중년인과 그 일행이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장건을 기다리는데, 그들이 있는 자리에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범상치 않은 느낌을 지닌 초로의 노인과 그를 수행하는 젊은이 한 명이었다.
언가의 중년인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보곤 놀란 눈을 했다.
“아니?”
노인도 중년인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딱히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서가촌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관도에서만 기다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필 아는 이를 만나고 말았다.
언가의 중년인이 노인에게 가 포권하며 물었다.
“혹시…… 어르신은 광동 진가에서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네. 자네는 분명 언가의…….”
“예. 일전에 질녀를 데리고 소림사에 찾아왔을 때 한 번 뵈었지요.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험험. 그랬었지.”
보통 이런 경우엔 어디를 가느냐, 뭐하러 왔느냐는 정도의 가벼운 인사를 해야 하건만 지금은 어쩐지 그런 말을 하기가 애매한 때였다.
“저, 어르신께서도…….”
“자네도?”
“예.”
결국은 모두 장건과 비무를 하기 위해 모인 셈이었다.
“음, 그렇군. 그러면 한 가지 부탁을 좀 해도 되겠는가?”
“편히 말씀하십시오.”
“내 자네보다 뒤늦게 왔으니 내가 기다려야 하는 게 지당하네만, 사정이 있어 오래 머물 수가 없다네. 그러니 비무를 먼저 하도록 양보해 줄 수 있겠는지…….”
“아.”
언가의 중년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 혼자라면 몇 번이든 양보해 드릴 수 있으나 이미 다른 분들과 순번을 정해 놓은 상황이라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으음, 그래도…….”
광동 진가에서 온 원로가 별수 없이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양해를 구해 보려 한 차였다.
난데없이 그 자리에 공동파의 장로가 나타났다. 이제나 저제나 남궁가의 노고수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나타난 것을 진작부터 보고 있던 공동파의 장로였다.
“허허, 연장자가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부탁을 하는데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 내 허락할 터이니 진가의 형장께서는 개의치 말고 먼저 비무를 시작하셔도 좋을 것이요.”
언가의 중년인과 일행 셋은 다소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 마음대로 허락한단 말인가?
사실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상황을 봐서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해 먼저 하시라 양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가 저런 말을 하면 양보하려 했던 마음도 싹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죄송하오나, 저희가 먼저 왔습니다만.”
“나는 이미 일주일도 더 전에 와 있었으니, 온 순서대로라면 내가 가장 우선인 게 맞지 않겠나?”
일주일 전에 왔다고?
그럼 왜 아직까지 비무를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난리란 말인가?
언가의 중년인과 일행들은 황당한 눈으로 공동파의 노고수를 쳐다보았다.
점창파의 이제자 남호가 나섰다.
“만약 선배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선배님께서 시작하셔야지, 그것을 빌미로 다른 이에게 양보를 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남궁가의 노고수까지 나타났다. 남궁가의 노고수는 다짜고짜 점창파 남호의 편을 들었다.
“뉘 제자인지 총명하기 그지없구나! 저 아이의 말이 백번 옳다. 자신의 차례를 지키지 않아서 지나 버렸으면 그걸로 끝이지, 계속해서 자기가 먼저 왔다고 우기며 양보를 한다면 뒤에 온 저 네 사람은 영원히 비무를 할 수 없게 될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동파의 장로는 남궁가 노고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점창파 남호를 꾸짖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의 누구처럼 버르장머리 없이 끼어드는고! 자네 사문에선 그따위로 예의를 가르치는가!”
공동파의 장로는 굳이 ‘어디의 누구’를 힘주어 말했다.
“예?”
남호가 당황하며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그와는 또 별개로 남궁가의 노고수가 언가의 외당주 중년인을 보며 말했다.
“내 아까부터 지켜보던바, 자네의 차례가 맞네. 사람이 경우가 있어야지, 그냥 나이만 먹으면 더 추해지기 마련이거늘. 쯧쯧.”
갑자기 나타나서는 서로 딴 말만 해 대니 언가와 그 일행으로서는 어리둥절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광동 진가의 원로는 남궁가의 노고수가 양보를 부탁하는 자신을 욕하는 것처럼 들렸다.
“듣자하니 말씀이 심하시오. 내 사정이 있어 부탁하였을 뿐이지, 억지를 부린 건 아니지 않소!”
남궁가의 노고수는 진가의 원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오해였다고 말하려 했으나, 공동파의 장로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맞소. 대체 누가 경우가 없는가 모르겠소. 초면인 사람을 두고 막말을 하는 이야말로 경우가 없는 것 아니겠소?”
“뭣이? 지금 내게 한 말이오?”
“찔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그 사람일 것이외다.”
“호오, 살다보니 별 희한한 적반하장을 다 보겠구려?”
두 노인 간의 말다툼이 ‘평소처럼’ 시작되었으나, 다른 이들은 난데없는 시비에 휘말린 셈이 되었다.
“어르신들, 잠시 고정하시고…….”
“버릇없이, 어디 어른들 얘기하는데!”
보다 못한 곤륜파의 장로가 나섰다.
“이보시오. 너무 심하지 않소?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쪽에서는 그쪽대로 하시는 게…….”
“그쪽이라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내가 어디서 그쪽이란 막말을 들을 연배는 아니외다!”
“어허! 말꼬투리를 잡지 마시오. 자꾸만 이리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곤란하외다…….”
“사람을 무뢰한 취급한 게 누구인데 누가 말꼬리를 잡는다는 거요!”
옥신각신 난리가 났다.
장건은 한참 전부터 와 지켜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비무의 순번으로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냥 아무나 먼저 하시면 안 될까?’
대수롭지 않은 일로 핏대까지 세우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장건은 즐거웠던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갔다.
말리고 싶어도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휴우.’
한참을 기다렸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서로 칼자루를 쥐며 금방이라도 무기를 뽑아 들 듯 험악해지기만 했다.
자기와 비무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의 싸움에 열중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장건은 답답해졌다.
‘웅…….’
장건은 거의 이각여를 관도 옆에서 지켜보며 기다리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그날 최악의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순번에 대한 논쟁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강호의 인연은 서로 얽혀 있는 법.
후에 새로 온 이들이 서로 편을 들거나 갈라지고, 또 온 이유마저 제각각이다 보니 논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서 결국 비무행은 고착 상태가 되고 말았다.
☆ ☆ ☆
얼마 후, 전진파의 원로 호관평도 문파의 명을 받고 서가촌으로 온 수많은 이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전진파는 본래 콧대가 높기로 유명하였으나 최근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데다 소림사에 해코지한 이가 과거 전진파의 제자였던 종암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심적인 부담이 컸다.
그래서 천문비록보다는 ‘상호 불가침’을 염두에 두고 왔다.
호관평은 서가촌의 초입에서 가볍게 한숨을 토한 뒤, 마중 나온 제자를 보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유명한 다관이 있다지?”
“예. 차 맛이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만 가 보시면 왜 서가촌의 명물인지 아실 겁니다.”
“가 보자. 이왕 왔으니 잠시 둘러보며 쉬는 것도 괜찮겠지.”
서가촌의 명물 다관가(茶館街).
한때 달랑 백리연의 다관만이 있던 이곳에 십자형의 대로를 끼고 수많은 다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다관은 오가는 상인이며 관광을 온 사람들로 바글거렸는데, 서생들이 곳곳에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여유롭게 시를 짓는 모습들이 특이해 보였다.
“죄송스럽지만 원조 다관 ‘가인(佳人)’은 너무 사람이 많아서 예약도 몇 달이나 밀린 관계로,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인?”
“예, 다관의 이름입니다.”
“다관의 이름치고 굉장히 희한하구나.”
하지만 예약이 몇 달을 밀렸다는 건 더 희한한 얘기였다.
“이곳에는 가인이란 이름의 다관이 다섯 군데는 있고요. 그 외에도 월하가인, 절세가인등의 이름을 가진 다관도 굉장히 많습니다.”
“거참.”
호관평이 의아한 얼굴로 수염을 매만졌다.
“어디든 가 보자.”
“예.”
제자가 호관평을 이끈 곳은 대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원조 가인’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다관이었다. 특히 원조(元祖)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었다.
“이곳입니다.”
호관평이 빤히 현판을 보며 물었다.
“아까 원조 가게는 사람이 많아 못 간다고 하질 않았느냐?”
“아, 여기 원조는 그냥 가게 이름입니다. 정말 원조는 아니고요. 서가촌을 처음 찾은 멋모르는 사람들은 여기가 정말 원조인 줄 알지요. 여기 말고도 원조나 본가란 말이 붙은 데도 꽤 됩니다.”
호관평이 찜찜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나 다름없구나. 한데도 여길 굳이 올 필요가 있더냐?”
“제가 모든 다관을 다 가 봤는데 이곳이 그나마 예약 가능한 곳 중에 가장 차 맛도 좋고 의외로 괜찮은 집입니다.”
호관평은 못내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자의 뒤를 따랐다. 사거리의 다관들처럼 바글거리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제법 차 있었다.
호관평과 제자가 다관으로 다가가자 점소이가 뛰쳐나왔다.
“어서오십시오!”
그 순간 호관평은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공력을 일으켰다.
“이런!”
손바닥을 쭉 펴서 번쩍 들고 나서 보니 평범한 점소이었다. 공력을 써서 눈가에 시퍼런 기운이 흐르자 점소이가 흠칫 했다.
“왜 그러십니까요, 손님?”
“으음…….”
호관평은 신음을 흘리면서 멋쩍게 손을 내렸다.
‘내가 뭘 본 거지?’
점소이의 행동이 이상했다. 살기도 없이 휙 하니 다가왔는데, 뭔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한데 이리저리 뜯어봐도 점소이는 딱히 내공을 가지고 있다거나 무공을 배운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호관평은 분명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감각이 이리 반응할 리 없었다. 어쩌면 너무 방심했다가 깜짝 놀라서 더 그랬던 듯도 싶었다.
호관평이 당황스러워 하는데, 제자가 얼른 나섰다.
“아닐세. 자리를 안내해 주게.”
점소이에게 푼돈을 쥐여 주자 점소이가 굽실 인사를 하곤 앞서갔다.
그때에야 호관평은 자신이 느낀 거부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스윽스윽.
앞서 걸어가는 점소이의 걸음이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돈 받을 때와 인사할 때 멀쩡했던 걸 보면 어디 팔다리가 불편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팔다리에 부목이라도 댄 듯 뻣뻣하게 옆으로 걷다가 갈지자(之)로 걷다가 한다.
한데 또 웃긴 게 말도 안 되는 동작인데 의외로 보법에서의 현묘함이 보이기도 한다.
“이게 무슨…….”
일개 점소이가 전진파의 원로를 당황스럽게 했다는 사실마저 당황스러운 일이다.
제자가 당황한 호관평에게 귀엣말처럼 조그만 소리로 말해 주었다.
“전에도 보고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유행하는 걸음걸이입니다.”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저딴 게 유행이라니?
호관평이 당혹함을 애써 감추며 다관에 들어서는데, 한 편에서 갑작스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다관 안에 있는 사람이 다 듣고도 남을 큰 소리였다.
“껄껄껄! 저 점소이는 하마터면 자기가 보극대삼락으로 맞아 죽을 뻔했다는 걸 아는가 모르겠구나.”
멈칫.
호관평이 걸음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웃음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다관 한쪽에 노인 한 명과 청년 한 명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평범한 노인은 아니었다. 노인의 풍모가 여간 헌헌하지 않았다.
노인이 호관평을 쳐다도 보지 않고 찻잔을 든 채 한마디를 더 했다.
“과거의 영화가 사그라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호관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명백한 시비의 말투가 아닌가! 점소이에 놀라 공력을 일으킨 것을 놀림 삼은 것도 무례한 일인데 전진파가 쇠락한 것을 두고 농지거리를 하다니!
호관평은 은은한 노기를 드러내었다.
“본인은 어디에서 원한을 사고 돌아다닌 사람은 아닌데, 귀하는 어디의 누구시기에 본인과 본파에 악감정을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이오?”
“원한을 안 사? 흥. 그야 본인만의 생각이겠지.”
노인은 코웃음만 치고 대답을 하지 않아 호관평을 더 분노케 했다. 그건 강호의 예의에도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이었다.
전진파의 제자가 급히 속삭였다.
“형산파입니다.”
“형산파?”
호관평이 노인을 쏘아보며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말했다.
“나는 형산파와 척을 진 적이 없고 귀하 또한 처음 보는데 어찌하여 그토록 무례하신가?”
웅웅거리며 소리가 울렸다.
다관 안에 있던 손님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하나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형산파의 장로 변인은 그제야 일어서서 호관평을 마주 보았다.
“나는 형산파의 변 모라는 보잘것없는 범부올시다. 하나, 이왕 만난 김에 한마디 해야겠소. 그러는 전진파는 본파와 무슨 원한이 있어서 본파를 핍박하였소이까?”
호관평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실제로 전진파가 형산파를 핍박한 사실이 있어 대답을 주저하는 게 아니었다.
전진파의 과거 제자였던 종암 때문이다. 종암이 어사가 되어 이번 무림의 거대 문파 탄압 활동에 선봉으로 나섰다는 사실은 강호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실상 강호 무림 전체에 걸쳐서 거대 문파에 대한 핍박은 광범위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서 중소 문파들의 난립에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자중하는 중인 것이다.
형산파도 마찬가지였다. 형산파의 제자로 알려지면 괜히 관부에서 트집을 잡아 구금하는 등 본산 제자들의 강호 활동이 심하게 압박을 받았다. 본산 제자는 물론이고 속가 제자들은 사업마저도 제약을 받았다.
그러니 형산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변인만 해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상당한 고역을 겪었다. 남들 다 통과하는 성문에서 혼자만 계속 거부당한다거나, 검문을 당하면 반나절은 족히 잡혀 있다거나 해서 나중엔 아예 산길로만 왔다.
겨우겨우 서가촌으로 왔더니, 하라는 비무는 안 하고 이쪽저쪽 편만 나뉘어 계속 대립하는 통에 하릴없이 시간만 보냈다.
그래서 짜증이 끝까지 치밀어 있는 중에 때마침 전진파의 사람을 만났으니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어차피 전진파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문파였다.
호관평이 화를 꾹 참으면서 포권했다.
“형산파의 변 장로셨구려. 우선 최근 벌어진 일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하나, 본파는 관부나 황궁과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본파의 제자가 아니었소. 그러니 그 사실을 두고 따지신다면 본파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외다.”
변인이 천천히 일어나 호관평의 앞으로 갔다.
“전진파가 억울한 것이 진심이라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게 옳은 일일 것이오. 현 무림에서 전진파만이 관부의 핍박을 받지 않고 있다는 건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오.”
뒷짐을 진 꼴이 어서 무릎을 꿇으라 재촉하는 듯했다. 호관평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를 본파에서 쫓아내도록 만든 건 당신네들 아니오? 한데 이제 와서 오래전 쫓아낸 제자의 일로 본파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요!”
변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한 소리 하고 말기엔 그간 쌓인 화가 너무 컸다. 당시에 형산파가 종암에게 한 표를 행사했기에 그 때문에 형산파만 유독 더 핍박당한다고 생각했다.
“공정한 표로 결정한 일을 우리들 잘못으로 떠넘기는 거요? 허!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때의 악감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게 사실이었군.”
다른 자리에 있던 타문파의 장로가 형산파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니까 당금 강호에서 전진파가 어딜 가도 강호의 동도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 아니겠소? 우리 또한 형산파와 의견이 같소이다.”
주변에 있던 또 다른 문파에서도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벼룩도 낯짝이 있어야지. 강호에 분탕질을 쳐 놓고 도대체 무슨 낯으로 뻔뻔하게 강호를 활보하는가.”
순식간에 전진파의 호관평은 무림 공적처럼 삼 대 일로 몰리고 말았다.
전진파도 십대 문파와 오대 세가에 대한 악감정이 없지 않았다. 그들의 밀약으로 말미암아 전진파는 부흥의 기회를 잃었다.
따지고 보면 전진파도 큰 피해자다.
호관평이 자존심이 상해 비틀어진 미소로 응답했다.
“허허, 그러셨구려. 그럼 뭐 별수 있겠소? 강호의 일이니 강호의 법칙대로 합시다. 섭섭하다면 칼로 풀어야지, 말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구려.”
호관평은 공력을 끌어 올리며 칼을 앞으로 하고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댔다.
호관평이 막 검을 뽑아 새하얀 검신이 막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 변인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변인은 한 손으로 호관평의 검집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자루의 끝을 잡았다.
찰칵!
검이 뽑혀 나오다 말고 다시 들어갔다.
한 자루의 칼을 둘이 동시에 양손으로 잡고 있는 묘한 꼴이 되었다. 손의 위치만 반대였다.
변인이 웃으며 말했다.
“장담하는데, 함부로 칼 뽑았다간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외다.”
호관평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례한 자 같으니!”
변인의 힘은 굉장했다. 호관평이 검을 뽑으려 해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검을 타고 변인의 내공이 흘러들었다. 호관평도 마주 내공을 끌어 올려 맞섰다.
호관평은 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어깨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무영각(無影脚)의 수법으로 변인의 무릎을 걷어찼다. 변인이 천근추의 묘리로 굳건하게 다리를 땅에 붙였다. 잘못 찼다가는 호관평의 발목이 비틀리거나 튕겨져서 무기를 놓게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무기를 뺏기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는 일.
호관평은 교묘하게 다리를 틀어서 변인의 뒷오금을 걸었다. 중심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는데, 변인이 순간 검을 통해 내공을 왕창 밀어 넣었다. 호관평이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오는 변인의 내공에 깜짝 놀라며 급히 자세를 수습했다.
변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관평의 앞발 발등을 밟았다. 호관평이 앞발을 뒤로 빼자 다시 다른 발로 호관평의 발등을 찍었다. 호관평은 어쩔 수 없이 재차 발을 뺐다.
타타탓!
변인이 계속해서 발등을 노리고 호관평은 피했다. 잠깐 사이에 호관평은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몸을 움직이면서 내력의 대결까지 하고 있었는데, 내공싸움에서도 밀린 탓에 기혈이 부글부글 끓었다. 손바닥으로 흘러드는 변인의 내공이 팔뚝까지 타고 올라와 저릿거렸다.
“크윽.”
호관평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짧은 대결이었으나 실력 차이는 여실했다. 처음에 무기를 잡혔을 때부터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공의 깊이부터 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뒤져 있었다.
이제 변인은 한 손을 떼고 한 손만으로 검을 누르고 있었다. 호관평은 점점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투투툭.
호관평의 손끝에서부터 핏줄들이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면서 터졌다. 실핏줄이 팔을 타고 흘렀다.
거의 호관평이 무릎을 꿇을 지경이 되어서야 변인이 슬쩍 손을 놔주었다.
“이 정도로 우리 모두를 상대하겠다니, 심히 가소롭구려. 기개는 좋았으나, 알량한 재주만 믿고 함부로 칼을 뽑으면 목이 붙어 있기 어려울 거요.”
호관평은 이를 갈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검조차 뽑지 못했다.
그의 패배가 전진파의 쇠락을 몸소 말해 주고 있었다.
호관평이 부르르 떨리는 팔을 다른 소매로 감추면서 뒤로 물러났다.
“사정을 봐주어…… 감사하오…….”
“흥.”
거의 화풀이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변인은 여전히 성질이 풀리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호관평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 지금은 부족함을 인정하고 물러나나 조만간 다시 찾아뵐 것이오. 귀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본인은 변인이라 하고, 강호의 동도들은 흑풍객이라 불러 주더이다. 나를 만나려거든 언제든 형산으로 찾아오시오.”
“삼안 오공권(三眼蜈蚣拳)의 흑풍객!”
호관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흑풍객은 형산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형산파의 고수였다. 그의 성명절기인 삼안 오공권은 형산파의 최고 권공 중 하나로, 형산파를 처음 개파할 당시 세 개의 눈을 가진 영물 지네가 나타난 데서 이름 지어졌다.
개파조사로부터 전해진 유서 깊은 무공인만큼 자체의 위력도 출중하였으나 흑풍객 변인의 실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젊을 때 불같은 성정으로 잦은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지만 덕분에 강호에 떨친 명성이 적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는 뒤로 밀려나 있었으나 거친 성격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비가 붙었다는 말에 인근 다관에서 자리하고 있던 타 문파의 장로들마저도 구경을 와 있었다.
변인은 이를 기회라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순번을 정하느니 뭐니 하며 괜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소. 몸도 풀었겠다…… 내친김에 오늘에야말로 이 변 모가 먼저 장가 아이와 비무를 벌이려 하는데, 반대하실 분 있소이까?”
방금 실력을 본 터라 반대할 이가 없었다. 마침 그 자리에 공동파와 남궁가의 노고수가 없었던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고, 다들 순번 싸움에 지쳐 있기도 했다. 차라리 누군가 나서서 뭐가 됐든 길을 열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형산파의 흑풍객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자격이 있지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흑풍객의 명성과 실력이라면 양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변인이 뭇 장로들을 돌아보며 포권으로 답했다.
“감사하오. 오늘 내가 건방진 장가 아이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놓는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공일 것이요.”
오랜 시간 진척이 없던 상황에 드디어 변화가 생겨났다.
☆ ☆ ☆
장건이 돌아오는 길을 변인이 떡하니 가로막고 섰다.
금세 소문이 퍼져서 많은 문파의 장로들이 참관하기 위해 와 있었다. 문파의 젊은 제자들이며 단순한 구경꾼들까지 모두 와서, 관도에 모인 이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서로 티격거리던 공동파와 남궁가의 장로가 항의했으나, 이미 많은 장로들이 뜻을 모았기에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라야 했다. 순서를 빼앗긴 것에 아쉬워한 장로들도 있었으나 전진파의 호관평이 변인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한 사실을 알고선 입을 다물었다. 전진파의 원로를 가볍게 짓누른 흑풍객의 실력은 다른 문파 장로들과 비교해 보아도 확실히 뛰어난 것이었다.
“온다!”
드디어 장건이 나타났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비무였다.
장건은 사람들이 떼로 몰린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한 명의 노인이 혼자서 나와 있고 그 뒤에 수많은 이들이 서 있는 걸 보면 비무를 하기 위해서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건이 합장하자 변인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받았다.
“나는 형산파의 변인이라 한다. 네가 원하던 대로 승부를 청하러 왔다만, 따로 시간이 필요하겠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란 말에 장건은 자기가 언제 사람들에게 비무를 원한다고 말하고 다녔는지 기억해 보았다. 물론 기억에 없었다.
“전 괜찮아요.”
그러자 변인이 정식으로 포권을 해 보였다.
“바로 시작하자. 나는 본문의 삼안 오공권을 익혔고, 강호에서는 흑풍객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다.”
변인이 짧은 소개를 마친 후, 장건도 재차 합장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장건입니다. 부족하지만 백보신권을 하고 있어요.”
미리 준비해 둔 덕인지 술술 말이 나왔다.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소문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장건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달랐다. 백보신권이 어디 시장바닥에 나도는 삼류 무공이 아니니 말이다.
변인도 인정했다.
“젊은 나이에 백보신권이라니, 대단한 성취로구나. 하나 원죄(原罪)를 짓고도 숙일 줄 모르고 오만함이 극에 달하였으니, 소림사는 필경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게다.”
“원죄요?”
장건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지만, 변인은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벌써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도 비무 전에 약속은 받아 놓아야 했다.
“아실지도 모르지만 비무를 하면 나중에 각서를 써 주셔야 해요.”
장건의 말에 변인의 입가가 씰룩였다. 장건은 비무를 하는 조건으로 각서를 써 달라 한 것이지만, 변인은 장건이 이기면 각서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데 각서를 나중에 써 달라고 한 건, 장건이 자기가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어린놈이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실력도 그만큼 되는지 보자.”
급하게 가게 문을 닫고 헐레벌떡 달려온 네 소녀들이 장건을 응원했다.
“오라버니, 힘내!”
“장 소협! 하던 대로만 해요!”
장건이 소녀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드디어 준비해 뒀던 첫(?) 비무를 하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건도 곧 공력을 끌어 올렸다.
각 문파의 장로들과 제자들이 숨을 죽이고 둘의 비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