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76
제5장 서가촌 멸망
우르릉 꽝꽝!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하늘에서 생겨난 천둥이 아니라 서가촌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쿵쾅, 와르르르르.
폭발하고 무너지고.
강호 최고의 무인들이 있는 힘껏 뿜어내는 강력한 공격에 서가촌의 곳곳이 부서지고 있었다.
장풍이 빗나갈 때마다 민가의 담벼락이 박살 나고 권경이 폭사될 때마다 다관과 점포의 기둥이 쓰러졌다. 검기는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도기는 논밭을 파괴시켰다. 묵직한 진각은 땅을 뭉개고 작물들을 뒤집어엎었다.
서가촌이 파괴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때려 부순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장건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감상을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왜?”
머리가 다 어질거렸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은 워낙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조금만 실수해도 주변에 피해를 입히게 된다. 사람인 이상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는 장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장건 스스로도 몇 번이나 주변의 기물들을 박살 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일 때 만이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고, 그러다가도 안 되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다.
지금은?
장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다.
“하하하!”
“받아라, 이놈!”
들려오는 웃음소리.
“즐거워하고 있어……?”
최고수들은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공을 마음껏 쓰면 후련하고 통쾌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잡기 위해 뒤쫓는 이들이, 달아나는 자를 잡기 위한 노력보다도 주변을 때려 부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면 안 될 일이다. 그건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최고수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파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그들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남의 재산이며 타인의 소유물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정말로 파괴와 폭력이 무림인들의 본성인 걸까?
툭.
뿌리째 뒤집혀 흙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았던 벼 한 포기가 장건의 발치까지 날아왔다.
장건은 가만히 발치에 널브러진 벼를 내려다보았다.
장건이 수련생들과 심었던 논의 벼였다.
찢겨진 볏잎이 장건의 현 상태를 상징하는 듯했다.
“어째서…….”
장건의.
평온한 일상이.
힘들게 찾아온 평화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장건이 서가촌에 와 이루고 생겨났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무림인…….”
널브러진 벼를 주워들고 조용히 되뇌었다.
“정말 싫다.”
장건은 우울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곤륜파의 태청진인이 소리쳤다.
“놈이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때까지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다른 문파의 장로와 제자들이 한 손이나마 거들려고 앞으로 나섰다. 곤륜파 소속은 아니었으나 그래야 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마교의 고수를 처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장로와 제자들은 제법 일사불란하게 융포납강의 퇴로를 차단하고 주요 전각의 지붕을 점했다.
“어딜 달아나려고!”
형산파의 장로 흑풍객 변인은 융포납강이 지붕 위를 달리며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일갈하며 공력을 모았다.
변인은 일전에 장건에게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어서 이번을 명예 회복의 기회로 삼으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하여 융포납강의 정면을 가로막으며 대뜸 삼안 오공권을 펼쳤다.
변인이 뻗은 수많은 주먹의 그림자가 융포납강을 뒤덮었다. 융포납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장 변인에게 달려들었다.
퍼퍼퍽!
융포납강은 전면의 취약한 부분만 팔뚝으로 막아 내고 나머지는 몸으로 받았다.
어깨와 가슴, 복부에 몇 번이나 변인의 삼안 오공권이 꽂혔다. 붉은 가사가 권경에 찢겨 나가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얼굴을 찡그린 쪽은 변인이었다.
“크윽!”
압도적인 공력 차 때문인지 융포납강의 호신기에 부딪치고, 반탄력에 주먹이 얼얼했다. 거기다 기묘한 공력의 기운이 변인을 곤혹에 빠뜨렸다.
‘뭐, 뭐지. 이 찌릿거리는 느낌은?’
가격할 때마다 주먹이 저릿하더니 양팔에 경직이 왔다.
융포납강은 변인의 상태를 예측한 것처럼 거침없이 주먹질을 했다.
뇌력(雷力)의 권(拳)!
변인은 가슴으로 파고드는 융포납강의 가공할 권경에 솜털이 곤두섰다. 급히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자 겨우 팔의 경직이 풀렸다. 공력을 그러모은 변인이 가슴을 내밀며 양팔을 좌우로 쭉 펼쳤다가 손을 펼쳐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았다. 송곳처럼 손가락 끝을 뾰족하게 모은 후 다가오는 융포납강의 양쪽 관자놀이를 찍었다.
오공설연정(蜈蚣齧燃鼎)!
거대한 지네가 불타오르는 무쇠솥을 틀어무는 모양새의 초식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사용하기 위해 숨겨둔 비장의 한 수다. 살기가 가득한 수법이라 장건과의 비무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지금 같은 때라면 사정이 다르다.
변인은 가슴으로 쏟아지는 뇌력권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더 빠르다!’
뒤늦게 펼친 오공설연정이 융포납강의 뇌력권보다 빨랐다.
오공설연정의 폭발적인 속도는 심지어 변인의 어깨가 탈구될 정도인 것이다!
변인은 중상을 각오하고서라도 융포납강의 목숨을 취하려는 생각이었다.
“놈!”
철사장의 수련법으로 단련한 손끝. 공력이 집중된 변인의 중지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양손의 중지가 융포납강의 좌우측 관자놀이를 동시에 파고들었다.
푸욱! 하고 거의 반 치 정도나 중지가 박혔다.
‘됐다!’
이대로 머리통을 부숴 버리려 변인이 속으로 쾌재를 부른 찰나, 손가락이 부러졌다. 머리뼈를 뚫지 못한 것이다.
우드득!
부러진 통증에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융포납강의 뇌력을 담은 권경이 변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헉!”
와작! 늑골이 부러지며 가슴이 함몰되었다. 뇌력권을 맞은 부위가 지직하고 까맣게 탔다.
하지만 아직 융포납강의 권경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심장까지 꿰뚫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다행히도 변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융포납강이 달아나다 말고 변인을 공격하려 잠깐 멈춘 그 순간은 뒤쫓던 최고수들이 어김없이 일 초식을 날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심하게!”
융포납강의 등에 산동악가의 산산노사가 던진 주판알이 암기처럼 날아가 박혔다.
파바박!
잠깐 박히는가 싶던 주판알이 융포납강의 포효와 함께 튕겨 나갔다.
“오오오!”
그 덕에 변인은 겨우 뒤로 몸을 빼내었다. 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변인을 젊은 제자들이 달려가 받았다.
“쿨럭!”
변인은 연신 피를 토해냈지만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뇌력이 담긴 경력이 심장까지 도달하진 않았다.
융포납강이 아주 잠시간 변인을 내려다보았다. 변인은 융포납강과 눈이 마주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최고의 절기를 펼쳤지만 일초지적의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강자다.
“여기도 있다!”
한달음에 지붕에 뛰어오른 석랑자가 크게 외치면서 융포납강의 목을 긁었다.
융포납강이 허리를 젖혀 피했다.
콰자작!
지붕의 기와가 박살 나며 세 줄로 길게 패인 흔적이 남았다. 석랑자의 손에는 짐승의 발톱처럼 생겨 칼날이 세 개나 붙은 철조(鐵爪)가 들려 있었다. 한 쌍의 철조를 자유로이 다루는 이괘조법(二罫爪法)이 바로 석랑자가 자랑하는 일절이다.
석랑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연한 몸놀림으로 허리를 틀었다. 왼쪽 허벅지 뒤에서부터 세 개의 칼날이 솟구쳐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리며 융포납강의 가슴을 긁는다. 융포납강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면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비껴냈다.
콰드득!
긁힌 기와가 몇 조각으로 잘리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석랑자는 쉬지 않고 순식간에 몸을 비틀면서 세 번을 더 할퀴었다.
허공에 격자무늬의 궤적이 연신 그려졌다.
촤촤촤악!
융포납강의 가사가 날카롭게 베이면서 옷조각이 흩날렸다. 살짝이 긁힌 복부에 세 줄기의 핏빛 선이 생겨났다.
융포납강이 살기어린 눈을 빛내면서 석랑자가 허리를 트는 아주 미세한 찰나의 빈틈에 손을 뻗었다. 석랑자의 손목이 융포납강의 손에 잡히려는 순간이었다.
“갈!”
융포납강의 등 뒤로 산산노사가 붕 떠올랐다. 산산노사는 철주판으로 융포납강의 등을 후려쳤다.
까드득!
주판알이 박히고 지나가면서 살을 찢고 뼈를 긁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으음.”
융포납강이 잠시 주춤하자 석랑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서 철조를 회전시켰다. 석랑자의 손목을 붙들려던 융포납강의 팔을 철조의 칼날이 회전하면서 마구 난자했다.
이괘조법 선풍난도(旋風亂刀)!
촤라라락!
융포납강의 팔뚝에 수없이 혈선이 생겨나며 새빨간 핏방울이 허공에 뿌려졌다.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꽉 물려 돌아가는 듯한 최고수들의 합격술에 융포납강은 고역을 치렀다.
융포납강이 발을 굴렀다.
쿠― 웅!
융포납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기왓장이 파도처럼 쓸려 나갔다. 전각이 우르르 떨더니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앞쪽의 석랑자와 뒤쪽의 산산노사도 진각의 파장에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지붕과 함께 추락했다.
석랑자는 떨어지는 기왓장을 밟고 뛰어오르려 했지만 융포납강이 망치질을 하듯 석랑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철조로 주먹을 막았으나 융포납강의 어마어마한 힘이 그대로 철조와 함께 석랑자를 짓눌렀다. 석랑자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쾅!
융포납강은 오히려 그 반동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반면 산산노사는 지붕이 무너지려는 순간 주판으로 기와를 찍고 뒤로 재주를 넘어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다.
융포납강이 밟은 진각의 여파로 허공에는 부서진 기왓장들이 떠올라 있었다. 몸놀림이 가벼운 산산노사는 공중에 뜬 채 기왓장들을 밟으면서 동시에 기왓장을 발로 찼다.
투다다다.
일부는 손으로 잡아 던지고 철주판으로도 쳐서 날렸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공력을 담고 융포납강에게로 무수히 쏟아졌다. 융포납강이 허공에 뜬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퍼퍼퍽!
기왓장들이 융포납강의 몸에 맞고 산산조각 나며 뿌연 먼지가 일었다. 산산노사는 더 이상 쳐낼 기왓장이 없자 허공에서 발돋움을 해 두 번이나 회전하며 땅으로 착지했다.
우르르르.
그사이 다른 최고수들이 지붕이 반쯤 무너진 전각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석랑자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찡그린 얼굴로 걸어 나왔다. 융포납강의 주먹질을 막은 한쪽 철조는 칼날이 두 개나 깨져 있었고 팔은 부러졌는지 덜렁거렸다.
광동 진가의 청면도객이 냉랭하게 말했다.
“단목가는 이제 빠져야겠군.”
석랑자가 창백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내가 못난 게 아니라 놈이 너무 단단한 걸세.”
“흠.”
최고수들은 먼지가 가라앉는 중인 부서진 전각의 위를 쳐다보았다.
부러져 크게 꺾인 대들보 위에 융포납강이 서 있었다.
“옴 마니 반메 훔.”
융포납강이 광오하게 최고수들을 내려다보며 진언을 외웠다. 드러난 상체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실피가 거미줄처럼 흘러 붉은 가사를 더욱 빨갛게 물들였다. 얼핏 참혹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수들, 특히나 석랑자는 쓰게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별 피해를 못 입혔군.”
심지어 그가 난도질했던 팔뚝도 혈흔만 그득할 뿐 거의 베이지 않았다. 피부만 살짝 그어졌다.
산산노사가 주판으로 갈아버린 등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것이 조금의 내상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남궁가의 창천이로 중 만노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거의 금강불괴 수준인데?”
청성파의 운일도장이 코웃음을 쳤다.
“어느 쪽이든 쉽진 않겠군. 과연 혈라마다.”
혈라마의 금강불괴에 가까운 몸체에 보통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쫓는 동안 최고수들은 이미 융포납강을 어느 정도 파악해내었다.
융포납강은 검기류의 공격은 피하고 단순 공력이 담긴 공격은 몸으로 받았다. 완전한 금강불괴는 아니라는 뜻이다.
기회를 봐서 제대로 된 절초를 먹일 수만 있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가하기에 충분하리라.
최고수들은 알고 있었다.
혈라마라는 달콤한 먹잇감의 가치를.
마교의 절대 고수 혈라마!
자신의 명성은 물론이고 문파에까지 커다란 이익을 가져올 사냥감.
가뜩이나 지금처럼 마도와 사도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혈라마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 희생을 충분히 감수할 만큼의 이득을 얻고도 남을 터였다.
“흐흐흐.”
뇌음사의 최고수 발사라, 융포납강을 쳐다보는 최고수들의 눈에서 탐욕이 일렁거렸다.
발사라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같은 말을 뇌까렸다.
“미친놈들.”
☆ ☆ ☆
쾅!
콰르르릉.
싸움은 길게도 이어졌다.
하지만 제아무리 발사라라고 해도 융포납강 혼자서 수십 명의 초고수를 상대하는 일은 무리였다.
조금씩 밀리는가 싶더니 금강불괴와도 같던 융포납강의 몸에 하나둘씩 상처가 늘어갔다.
최고수들은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쳤다. 제아무리 융포납강의 내공이 황하처럼 넓고 깊더라도 최고수들과 장로들을 모두 합친 만큼의 내공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융포납강의 내공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노옴!”
쿠르르릉.
네 자가 넘는 검기와 장풍에 또 한 채의 전각이 송두리째 박살 났다.
그들이 격돌할 때마다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한 번 붙고 나면 그 자리는 마치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듯 부서진 잔해만이 남았다. 한때 화려한 인기몰이를 했던 중심가의 다관 거리와 지나온 길의 논밭들은 한순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가촌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떠나 거의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예 사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여?”
“왜 이리 시끄러운감?”
서가촌을 떠나지 않은 이들, 중심가에서 떨어진 외곽에 살고 있던 이들이 굉음과 소란을 듣고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서진 전각들과 파헤쳐진 작물들을 보고는 기겁하여 놀랐다.
“흐이익!”
“이게 뭐여!”
중심가의 태반이 박살 나서 온전한 건물이 몇 없었다. 대부분이 나이든 노인들인 마을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주 언가의 철담공이 마을 사람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게 됐군.”
다른 최고수들도 철담공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거리낌 없이 전력을 다해서 손을 썼지만, 이젠 마을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게 된 것이다.
자칫 마을 사람들이 휘말려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강호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최고수들은 융포납강이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잡거나 하지 못하도록 융포납강의 경로를 가로막고 외쳤다.
“각 문파의 제자들은 들으라! 저들을 피신시키고 접근을 차단하라!”
어차피 융포납강과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던 문파의 젊은 제자들은 어디 문파라고 할 것 없이 각 장로의 명령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자자, 나가요!”
“얼른 일어나시지 않으면 다칩니다!”
젊은 제자들이 주저앉은 이들까지 반 강제로 끌어내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틈에서 마을 촌장이 튀어나왔다.
“제발!”
간절한 외침에 모두의 눈이 촌장을 향했다. 촌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제발 이곳에서 이러지 말아 주시오! 부디 다른 곳으로 가 주시오. 다 필요 없으니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서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살게만 해 주시오!”
정말로 간곡한 외침이었다.
하나 촌장을 내려다보는 최고수들의 눈길은 싸늘했다.
공동파의 육망지 고릉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시골 촌동네의 무지렁이라도 마교의 이름은 들어 봤을 터. 설마하니 지금 사악한 마도의 종자를 놓아주자는 말을 하는 것인가? 이 마을이 마교의 주구로 몰려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촌장이 손발을 바들바들 떨면서 엎드렸다.
“마교의 앞잡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대인. 소……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요.”
“그럼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멀찌감치 떨어져나 있게. 방해되니.”
“하지만…….”
“어허!”
서가촌은 같은 서씨 집안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먼 친척들―도 대부분 촌장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각 문파의 젊은 제자들이 끌어내려 해도 주먹을 꾹 쥐고 버티며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젊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장로와 최고수들도 난감했다. 이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은 자신들의 몫이다. 하나 그렇다고 융포납강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팽가의 벽력도가 꾸물대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자꾸만 백도무문의 행사를 방해하는 자는 마교의 주구로 간주하고 색출하여 저 악독한 마도의 종자 놈과 함께 목을 칠 것이야!”
마을 사람들은 벽력도의 말에 벌벌 떨었다. 순박하게 농사나 짓고 살던 촌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융포납강이 진언을 외며 말했다.
“옴마니반메훔. 본납과 이곳 마을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애꿎은 이들을 겁박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라…….”
최고수들에게는 어림 반 푼어치도 들어 먹힐 리 없는 말이었다. 당장에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융포납강을 잡는 데에 큰 문제가 생기고 만다.
융포납강이 상당히 밀린 상태라고는 해도 무위는 결코 얕보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운 좋게 마주친 것이 아니라 길거리라던가 산에서 일대일로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그러니 지금 기회에 반드시 처치해야만 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무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주변까지 신경 써가며 잡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닌 것이다.
청성파의 운일도장이 깐깐한 어조로 반박했다.
“우리가 가증스러운 마교 놈의 말을 어찌 믿겠는가!”
남궁가의 창천이로도 말을 거들었다.
“오호라. 마교 놈이 감싸는 걸 보니 분명 이 마을과 서로 관계가 있으렷다?”
“아무렴, 관계가 없고서야 굳이 감싼다는 게 말이 되나?”
최고수들은 융포납강이 숨을 고르며 안색이 급격히 좋아지는 걸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기껏 막다른 길에 몰아넣었는데 벌써 회복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다 잡은 고기를 놓치게 생겼다.
하다못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일장을 폭사하기라도 하면 포위망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말 터였다.
다급해진 형산파의 북무선생이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놈이 시간을 끌고 있다! 강제로라도 모두 끌어내!”
산동악가의 산산노사도 덧붙였다.
“그래 봐야 가벼운 노인네들뿐이니 마혈을 짚든 수혈을 짚든 해서 얼른 끌어내라고. 병신 되면 자기들만 손해지, 쯧쯧. 마교의 무서움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 같으니.”
젊은 사람들은 생기가 강해 혈을 짚어도 몇 시진 이내에 자연히 회복이 된다. 하나 노인들은 기가 약해 회복이 느리고 혈도 자체가 좁고 얕아 자칫 아예 막혀버릴 수도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반신불수가 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산산노사의 말처럼 반병신이 되는 것이다.
젊은 제자들은 당혹스러웠으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들.”
“저희가 손을 쓰기 전에 알아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몸을 크게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인들의 위협과 협박에 몇몇 마을 사람이 울컥했다.
“여기가 우리 동네고 내 땅인데 어딜 가라는 거요!”
“이러나저러나 다 부서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지!”
몇 안 되게 남아 있던 젊은이들도 항의했다.
“우린 조상 때부터 살던 땅에서 왜 자기들이 남의 마을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해!”
“자기들이 관부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왜!”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어! 대체 마교고 뭐고 우리와 무슨 상관인데!”
항의가 거세지자 장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로들이 소리쳤다.
“끌어내!”
마을 사람들이 저항하자 젊은 제자들의 눈에도 독기가 어렸다. 존장의 명을 받은 젊은 제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내려 한순간이었다.
휙, 하고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마을 사람들과 젊은 제자들의 사이에 인영 하나가 끼어들었다.
젊은 제자들이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장건이었다.
어느샌가 장건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장건이 차가운 눈으로 젊은 제자들과 그들의 뒤쪽에 있는 문파 고수들을 보았다.
“그만하세요.”
최고수들은 한눈에 장건을 알아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신법이며 천으로 친친 감아 등에 멘 기다란 무엇―소요매화검―을 보면 누군지 딱 감이 왔다.
하기야 오라고 한 지가 좀 되었으니 언제 나타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뭘 그만두라는 말이냐, 꼬마야?”
전진파의 죽림옹이 묻자, 장건이 죽림옹 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마을 분들 말씀처럼요. 이제 그만 여길 나가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최고수들은 황당해했다.
죽림옹이 기가 막혀서 ‘허!’하고 탄성을 냈다.
“너도 아까 그 노인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네 눈에는 저자가 보이지 않느냐?”
죽림옹은 융포납강을 가리켰다.
“보여요.”
“보이는데 그런 말을 해? 저자는 뇌음사라고 하여 사람을 벼락으로 태워 죽이고 산 채로 독수리에게 먹이는 악랄한 마도의 고수다. 지금 저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저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단다.”
죽림옹은 말의 끄트머리에는 손주를 달래는 듯한 투의 어조로 말했다.
장건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야 당연히 정말…….”
무심코 답하던 죽림옹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건의 어조가 묘하게 껄끄러웠다.
‘저 사람이 그 무서운 마교도라는 게 정말이냐.’ 하고 묻는 게 아니라 ‘네가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려는 게 정말이냐.’하고 묻는 것 같았다.
괜히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장건의 심드렁한 어조와 징그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확실하게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죽림옹은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장건을 보았다. 장건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죽림옹의 눈빛을 받아 냈다.
“그게 아니면?”
죽림옹의 물음에 장건이 즉답했다.
“저야 모르죠. 그냥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에요.”
“허허허.”
죽림옹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듣던 대로 맹랑한 꼬마놈이구나?”
죽림옹이 저도 모르게 공력까지 담아 껄껄대고 웃었다. 거기엔 적잖은 살기까지 담겨 있어서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때 융포납강이 크게 말했다.
“본사(本寺)가 강호에서 마교로 불리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방금의 말은 사실과 다르니라. 뇌전(雷電)은 본교에서 가장 신성히 여기는 대상이며 죽은 자를 독수리의 먹이로 주는 것은 서역의 오래된 장례 풍습이다. 그것이 본사가 마교로 불리어야 할 이유일 수는 없느니!”
융포납강도 공력을 담아 말했기 때문에 장내의 모든 이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닥쳐라, 간교한 마교 놈!”
융포납강에게 크게 당한 단목가의 석랑자가 일갈했다.
석랑자는 이어 장건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꼬마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래서? 네 눈에 보기 좋지 않으니 우리더러 나가라? 지금 그런 얘길 한 거지?”
장건은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네.”
부러진 팔을 붙들고 석랑자가 두 눈에서 혈광을 줄기줄기 내뿜었다.
“감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명성 좀 얻었다고 해서 네놈보다 몇 배의 세월을 살아온 선배들을 능멸하는 게냐?”
흐트러졌던 석랑자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서고 전신의 옷깃이 뻣뻣하게 섰다. 깨진 철조의 끄트머리에 푸르스름한 인기(刃氣)가 맺혔다. 서늘한 바람이 석랑자의 몸을 휘몰아쳤다.
융포납강에게 일격을 당하긴 했어도 여전히 그는 단목가의 최고수이며 강호에서 일 할 이내에 드는 실력자다.
장내에 살기가 가득해지며 마을 사람들이 영문 모를 한기에 몸을 떨었다.
장건도 자신에게 뿜어지는 살기를 느꼈다. 석랑자의 몸이 거대하고 시커먼 구름으로 변해 감싸오는 듯했다. 사방이 컴컴해지며 석랑자의 두 눈만이 시뻘건 빛을 내뿜었다.
평소라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장건도 화가 끝까지 나 있었다. 두려움보다도 분노가 앞섰다.
마교에 대한 얘기는 민간에서도 퍼져 있어 강호를 잘 모르는 장건이라도 알고 있었다.
마교는 무섭고 나쁘다, 그런 말이 장건에게도 마치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처럼 아련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마교도를 보긴 처음이다.
마교도와 거대 문파의 최고수들.
둘 중에서 누가 더 나쁜가.
모자란 생각으로 진정성의 유무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장건에게는 적어도 최고수들이 더욱 나쁘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어째서?’
사실은 마교가 더 나쁠 수도 있는데 왜?
석랑자는 자신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심했다 생각했는지 조금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장건이 오래 함께 지낸 마을 사람들일 텐데 그런 마을 사람들이 핍박당하는 듯 보이자 치기어린 마음에 나섰다고 생각한 것이다.
“흥. 네놈이 무얼 알겠느냐. 본디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거늘. 큰 물줄기가 작은 바위를 우려하여 물줄기를 튼다면 상류에서는 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고 하류에서는 물이 없어 가뭄이 생겨나는 법이다.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게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어요.”
장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하자 석랑자가 한결 너그럽게 말했다.
“알았으면 더 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말고 물러나 있거라. 너와의 일은 마교도를 잡고 나서…….”
“아뇨. 알았으니까 다들 이 마을을 나가주시라고요.”
“뭐, 뭣?”
석랑자가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모든 이의 이목이 다시 한 번 집중되었다.
장건이 석랑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대답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의라면, 저는 그런 대의 따위는 따르지 않겠어요.”
장내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줄어들었다.
“아, 아니 저…….”
“저저 건방진…….”
최고수들과 장로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젊은 제자들은 존장에게 함부로 말하는 장건을 노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도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에서, 장건은 격앙된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며 말을 이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정적 속에서 장건의 말이 울렸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교와, 그런 마교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할아버지들.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죠?”
수많은 최고수들은 조금 불편해졌다. 만일 혈라마를 잡는 데에 조금의 사심도 없이 순수한 대의만을 따랐다면 지금 같은 사태로까지는 번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금의 일은 분명 사욕과 대의명분이 충돌하여 생겨난 사태였다.
장건이 그러한 점을 정확한 의미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닐지라도, 어렴풋하게나마 핵심에 근접해 있다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하나 아이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이들의 앞에서 창피를 당한 석랑자가 뜨끔함을 감추고는 분노의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지껄이는 거겠지!”
“안다니까요?”
장건은 주먹을 꾹 쥔 채 다른 최고수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뭇 최고수들의 눈에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장건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강한 자,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정의한다. 그게 강호 무림의 법칙 아닌가요?”
“허……!”
“뭐라고?”
“지금 그 입으로 뭐라고 한 게냐?”
장건은 정확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강호의 법칙대로 하겠다고요.”
“저, 저런!”
“망할 놈이!”
장건은 당황하는 최고수들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그들의 반대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다들 나가세요.”
그 순간 사위는 적막에 휩싸였다.
☆ ☆ ☆
도합 백오십 여 쌍이나 되는 시선이 동시에 장건에게 꽂혀 있었다.
그중에는 뒤늦게 달려온 소녀들의 시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마을 사람들이나 문파 제자들―에겐 장건의 모습이 불길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보였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녀들에겐 정파 무림의 최고 무력집단을 앞에 두고도 당당하게 맞서는 멋진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역시…….”
“괜히 멋있는 게 아니라니까.”
소녀들은 가슴이 설렜다. 그래도 현실 감각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장건의 행동이 멋있기는 하지만 무모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어찌 보면 최고수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 그 반의반도 살지 않은 핏덩이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본래 나이가 지긋해지며 문파에서 어르신 대접도 받고 강호에서 적당한 지위도 얻게 된다. 그쯤 되면 사회적 체면이 중요해지기 마련이다. 남들의 평판이 곧 자신의 권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평판과 권위는 남들이 보는 것과 당사자 본인이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생각 외로 둘 사이의 간극은 아주 넓다.
이를테면, 자신이 일장연설을 길게 늘어놓고 있는데 누군가 그것과 다른 의견을 낸다 치자. 그러면 자신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이 맞든 틀리든 그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다른 뜻을 말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끼어들었다는 것만으로 자기가 가진 권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함에 휩싸인다.
특히나 다른 의견을 낸 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치욕과 모멸감을 느낀다. 남들이 보기엔 전혀 별것 아닌 일인데도 당사자는 그것을 결코 작은 일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의견을, 정확히는 상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
이런 경우, 유독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고 상대를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문제가 있어서 주장도 옳지 않다는 괴팍한 형태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역설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지켜진다고 생각한다.
하여 자주 나오는 말이 ‘어린놈이 뭘 안다고!’라거나 ‘그건 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냐!’인 것이다.
하나 실제의 평판, 즉 남들이 말하는 평판이란 어떠한가?
스스로 잘못을 알고 남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이를 더욱 대인(大人)으로 보고 존경한다. 자기만이 옳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남에게도 결코 존중받을 수 없다. 아집이 강하고 독선적인 소인배(小人輩)일 뿐이다. 존경은커녕 돌아서서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지금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다.
이미 일은 다 벌어졌다. 사태가 벌어질 만큼 벌어진 후다. 따라서 최고수들은 장건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만일 장건의 말을 수긍하면 그 순간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곧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짐을 의미할 테니까.
그러니까 최고수들에게 있어 장건은 이 순간 그저 권위에 도전하는 새파란 애송이일 따름인 것이다. 아니, 최고수들로서는 장건이 반드시 건방진 애송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장건은 이들이 가진 가장 큰 권위인 무력을 대놓고 폄하했다.
하여 권위를 공격당한 이들, 최고수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진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장로들의 얼굴도 온통 붉으락푸르락했다. 젊은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최고수들은 곧 문파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마치 자신들의 문파가 조롱당한 것처럼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하여, 장건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문의 존장이 모욕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단목가의 청년 한 명이 뛰쳐나왔다.
챙!
청년은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소리 질렀다.
“오만방자하기가 그지없구나! 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지만 어디 웃어른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여!”
장건과의 거리가 불과 대여섯 걸음이었다. 단목가의 청년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공력을 끌어 올리며 화를 감추지 않았다.
장건은 단목가의 청년을 보고 물었다.
“그럼요? 잘못된 일을 하는 어른을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단목가의 청년이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어른이 하는 일이 설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선은 따른 후에 나중에 따로 찾아뵙고 조용히 여쭐 일이지, 어디 싸가지 없이 목에 핏대 세우고 어른에게 따져들어?”
장건도 화가 나 있었지만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답했다.
“그래서 강호의 법칙대로 하자고 말씀드린 거예요.”
단목가의 청년이 눈을 까뒤집고 검을 뽑았다.
“그래! 그럼 어디 그 법칙대로 나부터…….”
순간 장건이 이를 악물었다. 기의 가닥을 쭉 뽑아 날렸다.
빠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단목가의 청년은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공중에 떠올랐다.
장건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쿠당탕탕!
단목가의 청년은 뒤로 나자빠지며 순식간에 바닥을 굴렀다. 몸이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며 들썩거렸다.
장내가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다.
“됐죠?”
장건은 쓰러진 청년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청년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장건이 평소보다도 더 힘을 강하게 쓴 탓에 순식간에 혼절해 버렸다. 장건이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한지라 손을 씀에 있어서도 거침이 없었다.
최고수들은 크게 기분이 상한 와중에도 장건의 무공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뼛속까지 무림인인 것이다.
최고수들은 융포납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장건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장건이 어떻게 단목가의 청년에게 손을 썼는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은풍장이나 암경류의 공격이었다면 단목가의 청년은 뒤로 나뒹굴기보다는 피를 내뿜으며 주저앉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것은 권풍이다. 지풍이라면 맞은 부위에 동그랗게 멍이 들었을 테니까.
최고수들답게 판단도 순식간에 내렸다.
광동 진가의 청면도객이 마치 최고수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권풍이라…… 과연 듣던 대로 묘하군!”
장건이 청면도객을 보고 말했다.
“움직였는데요.”
“응?”
청면도객이 다시 장건을 보니 장건은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니, 내민 상태였다.
“……?”
청면도객이 의아해져서 옆의 철담공을 보니 철담공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깐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목가의 청년이 맞고 날아갔는데?
근데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돌아보니 장건은 주먹을 뻗은 자세로 서 있다?
최고수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요상한 경우였다. 장로들만이 이미 흑풍객 변인을 통해 장건의 ‘뭔가 미묘하게 순서가 어긋난 듯한 주먹질’을 보았을 뿐이다.
물론 장건 역시 기의 가닥으로 단목가의 청년을 날려 버린 후, 뒤늦게 무의식적으로 주먹질 흉내를 한 터였다. 허초에 습관이 안든 탓에 자꾸만 늦게 주먹질을 하게 되었다.
“장난질인가?”
최고수들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서 장건을 째려보는데, 아미파의 백무이고가 나섰다.
“아무래도 더 이상 두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백무이고가 큰 소리로 일갈했다.
“다들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마교의 종자를 앞에 두고 우리끼리 이 무슨 짓입니까!”
백무이고는 장건을 보고도 말했다.
“소협도 잠시 진정하도록 하게.”
한마디 말로 진정될 상황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잠시 주의는 환기되었다.
마교의 고수와 정파의 고수들과 서가촌의 마을 사람들, 그리고 장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면서도 괴이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