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80
제1장 은퇴의 이유
소림사를 대표하는 원주들이 모였다.
소림의 각종 대소사를 결정하고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진지한 분위기여야 했다.
하지만 원주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고, 대체로는 황당한 얼굴들이었다.
원주들은 방금 자신들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해 했는데, 그것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엉뚱한 얘기를 들은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원주들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묻고 있었다.
“금분세수요?”
“지금 금분세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강호에서 은퇴를 하겠다구요?”
원호가 귀찮아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그렇다네.”
원주들은 기가 막혀서 ‘허허허’하고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퇴하겠다는 사람이 육십 줄, 칠십 줄의 노인도 아니고 아직 십 대 후반의 새파란 소년, 장건이니 말이다.
“어른들을 놀려도 유분수지요.”
“조그만 녀석이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군요.”
“제 나이가 몇인데 은퇴를 하겠답니까?”
원호가 다시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 진담이라네.”
“예?”
“허어, 그 무슨?”
원주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을 했기 때문에 대전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몇몇은 불호를 외기도 했다.
긴나라전주 원상은 소란이 잠시 잦아든 틈을 타 원호에게 물었다.
“방장 사형은 그 말을 듣고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까?”
“내버려 두지 않으면?”
“그야 헛소리하지 말라고 꾸짖기라도 하셨어야 하는 거잖습니까.”
“처음엔 나도 자네들과 같은 생각이었지.”
원호가 길게 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럴 만하다고 인정하게 되더라 그 말일세. 자네들도 들어 보면 납득하게 될 게야.”
원호의 표정이 사뭇 씁쓸했기 때문에 원주들은 의아해졌다.
“대체 은퇴를 하겠다는 이유가 뭐였는데 그러시는지요?”
“건이가 은퇴하려는 이유는 말야…….”
원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그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라고 했네.”
그 순간.
소란스럽던 대전은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모두가 멍청해진 얼굴로 원호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원호는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장건의 말을 듣고 자기 또한 순식간에 납득했던 것처럼 원주들 역시 같은 마음이 된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원주들은 매우 허탈해 했다.
“거 참.”
“살다가 이런 얘기를 다 듣게 될 줄이야.”
일부는 허탈한 표정에서 화가 난 표정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지난번 우리가 저 때문에 얼마나 큰 부담을 안고 나한을 이끌었는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때문에 우리 소림이 몇 번이나 대가를 치렀는데!”
“허허, 자괴감이 다 드는군요.”
원호는 원주들에게 조용히 일렀다.
“진정들 하게.”
“어떻게 진정할 수 있습니까!”
원호가 설명했다.
“건이에게 살수가 붙었었다 하네. 물론 실패했으니까 건이가 아직까지 살아있어서 내게 금분세수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겠지.”
그 말에 원주들 몇몇이 울컥해서는 염주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대관절 우리 소림을 뭘로 보고.”
원주들은 노기를 참지 못했다.
살수라는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거기에 장건이 한 말이 더해져서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건 다른 말로 소림사가 장건을, 장건과 관련된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지금 소림사의 현실이다.
소림사의 이름을 대면 한발 물러서서 양보해주는 게 아니라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소림사의 제자라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소림사를 무시하고 건드리는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소림사의 제자라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런 시대는 오래전부터 지나 있었다. 원 자 배가 그런 시대를 겪고 살았으니까.
원호가 말한 것처럼, 좀 더 일찍 깨달아야 했다.
제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문파는 결국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는 걸.
그래서 내실을 다지려 봉문 아닌 봉문을 선택하게 되었고, 또 이번엔 선대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고수들을 상대로 큰 피해를 각오하면서까지 대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걸 견디다 못해 강호를 은퇴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소림사의 한심한 처지에 원주들은 침통했다.
평소에 장건을 미워하고 골칫덩어리로 생각했던 게 부끄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곤혹스럽다.
이 상황에서도 일종의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창피합니다.”
선현각주 원률이 운을 떼며 말했다.
“저는 한편으로 건이를 결국 내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일부 원주들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소심하게나마 동감의 뜻을 드러냈다.
문수각주 원전이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건이는 이미 무림에서는 최고 수준의 고수 반열에 올라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인재를 잃는 것이 본사로서는 매우 아까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했던가요.”
원전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건이를 잃는 대신에 녀석이 무림 최고 고수로서 강호에 남아 있을 때 본사가 다른 문파들과 겪어야 할 지속적인 갈등은 물론이고, 분파해서 생길 문제까지 말끔히 사라지겠지요. 일장일단. 본사로서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갑자기 원전의 눈가에 시퍼런 독기가 흘렀다.
“이유를 막론하고 본사의 제자에게 살수를 보낸 자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주들이 하나같이 동의했다.
“그러합니다! 더 이상 얕보일 수 없습니다!”
“본사의 힘을 똑똑히 보여야 합니다!”
한순간에 대전이 훅 달아올랐다.
원호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게 황궁이라도?”
아주 잠깐, 잠깐 동안 굉장한 침묵이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원주들은 조금 전과 달랐다.
원익이 벌떡 일어나서 원주들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원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가, 더 잃을 게 남았습니까? 제가 황궁으로 가겠습니다. 설사 그 명을 내린 것이 황제라 할지라도 가서 따지고 오겠습니다.”
이번엔 원률이 일어섰다.
“허, 그건 우리 선현각에서 할 일이니, 내가 가겠네.”
그러자 원주들이 뜨거운 목소리로 너도 나도 가겠다고 외쳤다.
“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드니 가장 쓸모없는 소제가 가겠습니다.”
“어허, 나이 많은 내가 가야지.”
모두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데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이었다.
본래가 소림사의 승려들은 양강의 무공을 익히기 때문에 승려이면서도 성격이 불같고 괄괄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살았으나 드디어 서서히 본성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잠시만 진정하게. 그 전에 먼저 물을 일이 있으니.”
원호가 원주들을 진정시키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들 모두 건이가 강호를 떠나는 것에 찬성하는 건가? 더 이상 본사의 제자가 아니게 되는 것을?”
노전승 원구가 계율원주 원읍에게 물었다.
“계율상으로 문제는 없습니까?”
“없네. 다소의 절차가 조금 복잡하긴 해도. 파문이라면 무공이라도 거두겠지만 은퇴라면 그럴 필요도 없네.”
원주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문제없습니다.”
“더 이상 말리기에는 저희가 면목이 없지요.”
몇 마디의 의견이 오간 후에 원호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럼 결정되었네. 반년 후로 날을 받아서 전 강호에 건이의 은퇴를 공표하고, 그때까지 본 소림은 모든 여력을 건이의 보호에 힘쓰도록 할 것일세. 그리고…….”
원호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게 어떤 방법이든 간에 본사의 제자를 핍박한 황궁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
☆ ☆ ☆
장건은 네 소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다들.”
소녀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건이 원호에게 말하기 전에 이미 소녀들에게 상의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완전히 찬성할 수는 없었더라도 그게 장건을 위한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장건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걸 옆에서 보아왔으니 차마 반대할 수가 없었다.
“무인으로서의 장 소협도 좋지만, 그게 아닌 장 소협도 나쁘진 않은 거 같아.”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내 사모 자리는, 히잉.”
“수백 명의 제자들은……, 휴.”
“대종사가 되어 연단에 설 때 어떤 옷을 입을지도 다 생각해놨는데.”
양소은도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전에 태사숙조께 사사한다고 했잖아. 그때부터 예견된 일인지도 몰라.”
문 자 배에게 사사했다면 배분이 홍 자 배와 같아진다. 실제로 정식 제자로 거둔 것은 아니니 큰 의미는 없지만 어쨌거나 홍 자 배가 은퇴하는 것이 장건의 은퇴와 맞물리는 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제일 기대가 많았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감투욕이 컸던 건지 제일 침울해 하는 건 백리연이었다.
백리연은 완전히 풀이 죽어 있어서 다른 소녀들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때 하연홍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존경받는 대사모가 될 수는 없어도 수천 명을 거느리는 거상의 안주인이라면……, 뭐 나쁘지 않겠네.”
다른 소녀들이 흠칫했다.
“안주인?”
비록 대종사는 물 건넜더라도 어쨌거나 장건이 여전히 거대 상방을 물려받을 독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인들이나 상단의 일꾼들까지 하면 수만 명이 될 지도?”
그 순간 소녀들의 탄식 가득한 눈빛이 활기로 생생해졌다.
소녀들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럼 오라버니를 뭐라고 부르지?”
“장 대인?”
“어, 장 대인!”
“그거 좋다. 장 대인이 장 소협보다 낫네!”
소녀들이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 대인!”
“하하하.”
장건은 소녀들의 눈빛이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맞춰주고 이해하려는 모습에 조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하분동은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충무원이 장건을 잡아두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노집사가 황궁의 고수였다는 것에도 놀랐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장건의 말이 가장 놀라웠다.
“금분세수를?”
“네. 방장 사백님께 말씀드렸어요. 먼저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하분동은 이상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건 말 그대로 이상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난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하분동이 굉목이란 법명으로 있을 때에 가장 하고 싶던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자신은 결국 버리지 못했다.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그저 복잡한 인연을 모른 척 회피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눈앞의 이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겠단다.
지금도 강호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낮지 않은데, 아니 앞으로 강호 무림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할 것인데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권력과 이득을 내팽개치고 떠나겠다는 것이다.
하분동은 장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다보던 예전의 꼬마가 아니었다. 여전히 마르고 왜소한 편이었지만 눈높이도 얼추 맞게 자랐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랐지?’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걸 갑자기 느꼈다.
내내 시간이 흐르고 있었는데 자기만 모른 게 아니었을까?
‘거 참…….’
하분동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더 냉정하게 말했다.
“치기 어린 생각으로 금분세수 같은 중대한 일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내게 허락을 맡거나 보고할 일도 아니고.”
하분동이 말을 하면서 휙 몸을 돌려 가려 하는데 장건이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았다.
“이 녀석이?”
하분동은 장건을 노려보았다. 하나 장건은 하분동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물어왔다.
“노사님도 제가 달아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분동은 멈칫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닌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하분동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아난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내가 했던 짓이 달아난다는 것이지, 하분동은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삼켰다.
“네?”
그때 뒷말을 잇지 못하고 약간 주저하는 하분동을 구원하기라도 하듯 속가 제자이자 부교관인 구이남이 근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금분세수를 회피 목적으로 한 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멀쩡히 강호를 은퇴한 자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강호에서 은퇴한다는 건, 지난날 자신이 얻은 모든 은원을 목숨을 걸고 청산하겠다는 뜻인 겁니다.”
구이남이 다가와 진지하게 포권했다.
“금분세수의 날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은원을 청산해야 합니다. 자신의 과오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어떻게 달아나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대형.”
구이남의 진지함에 장건은 뭉클해져서 마주 합장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앞으로도 저는! 대형이 은퇴를 한다 해도 영원히 대형의……!”
하분동이 혀를 차며 구이남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하게. 아까까지가 딱 좋았어.”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당금 무림에서 누가 감히 우리 대형에게 덤비겠습니까.”
하분동은 떠나려다가 문득 멈춰서서는 말했다.
“골칫덩어리가 강호를 은퇴한다니까 좋긴 한데, 그러면 어쨌거나 소림에서의 적(籍)도 사라지겠구나.”
“죄송해요. 사백숙님들께도 그렇고 노사님께도 그렇고.”
“내게 미안할 게 뭐 있느냐. 그때가 되면 나는 더 이상 네 사제가 아닐 터인데 속 시원하지.”
“어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러니 미리 그때가 왔다 치고, 네 사제가 아니라 연장자로서 말하는 건데.”
유독 말이 길고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하분동이었다.
하분동은 조금을 더 우물쭈물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금분세수 준비 잘하거라.”
“어,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거죠?”
“연홍이를 울릴까봐 하는 얘기다! 연홍이 할애비로 하는 말이야!”
하분동이 ‘크흠!’하고 기침을 하며 갔다.
아직도 그런 말이 부끄러워 잘 하지 못하는 하분동이다.
장건은 하분동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노사님.”
예전에도 지금도, 하분동은 장건을 가장 아껴주는 따뜻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처음 봤을 때만 빼고.
☆ ☆ ☆
노집사는 장건의 살행에 실패한 그날 이후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충무원의 폐쇄가 결정되었다.
충무원의 수련생들은 조금 허탈해했다.
“어쩐지 처음부터 수상하더라니.”
“노집사가 교두를 죽이려고 왔던 자객이었구만.”
“우린 그냥 이용당한 거야?”
“앞으로 어쩐다?”
“어쩌긴, 그냥 하던 대로 포교 짓하고 먹고 살아야지.”
“거 참. 세상이 어찌되려고.”
하지만 수련생들은 장건이 보여주었던 진지함을 잊지 않았다. 비록 무공의 고수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빛이 바라긴 했으나, 마을의 궂은일들을 맡아했던 추억도 의외로 나쁘지 않았었다.
개중에는 돈을 받고 장건의 교육을 외부에 유출시켰던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찜찜해 하거나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이고, 이제 좀 익숙해질 만했더니.”
한 수련생이 천 하나를 들고 샤샥 접었다. 다들 그 모습에 피식거리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수련생 한 명이 말했다.
“우리 꼬마 교관 말야. 얼마나 치여 살았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 듣자하니 강호 무림에서 우리 꼬마 교관 굉장히 유명하다던데.”
다른 수련생이 말을 받았다.
“난 강호에선 무공만 세면 다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봐.”
한 수련생이 울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자들이 마을에 와서 난리친 거만 봐도 뻔하잖아. 무공은 세지만 나이가 어리니까. 얼마나 어수룩해 보여. 그러니까 지들이 이리저리 휘두르려고 아주 갖은 짓을 다 했겠지.”
“나쁜 놈들. 난 그것도 모르고……, 에이.”
몇 달을 넘게 생활해온 탓인지 그들은 장건이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처음 보았을 땐 정말 마귀인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냥 순둥이였다. 마냥 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남들에게 해를 끼치고 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히 장건에게 동정이 갔다.
온갖 비리로 점철된 관이나 계략과 술수가 판치는 황궁만큼이나 강호 무림의 사정이 복잡하다는 것도 안타까웠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어쩔 수 없는 걸까?
수련생들은 절로 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장건이 단상에 서는데,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이라서 그게 더 씁쓸했다.
수련생들은 말을 멈추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따라주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어요. 어…… 지금은 좀 마을 상황이 좋지 않게 됐지만, 마을 분들도 여러분들께 많이 감사하고 있다고 하세요.”
장건은 딱히 더 할 말이 없는지 짧게 말을 마쳤다.
“감사하고, 또 죄송했습니다.”
장건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수련생 중에서 털보 남자가 툭 튀어나왔다.
“교관은 열심히 했고 우리는 따랐을 뿐이요. 미안해할 거 없습니다.”
털보 남자는 허리를 쭉 펴고는 힘차게 주먹을 손바닥에 치며 장건을 향해 포권을 했다.
척!
최연장 수련생인 노인도 앞으로 나왔다.
“재밌었수다. 교관은 좀 더 당당하게 가슴을 내미시구랴.”
노인도 장건을 향해 꼿꼿이 서서 포권을 했다.
다른 수련생들도 나와 한 마디씩을 말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소.”
수련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장건을 향해 포권을 했다.
처처척!
사십 명의 수련생들이 포권을 하고 단상의 장건을 올려다본다.
막 합장을 하던 장건은 잠깐 망설이고 있다가 이윽고 뭔가를 깨달은 듯, 합장을 풀고 포권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건 뒤에 시립해 있던 하분동과 구이남도 함께 포권했다.
수련생들이 포권한 채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충무원은 해산되었다.
☆ ☆ ☆
서가촌에 머물고 있던 최고수들은 장건의 소식에 크게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강호를 은퇴한다는 것.
무림 역사상 아마도 이번이 최초임에 분명할 터였다.
“허허, 정말 허무맹랑한 놈일세.”
“도대체 제 놈 나이가 몇인데 금분세수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운운하는 게야?”
최고수들은 오히려 은퇴해야 할 나이임에도 슬슬 미루며 안하고 있는 자신들이 머쓱해졌다.
하지만 자신들이 좀 심했나? 하고 자책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수고스럽게도 자신들이 직접 손을 섞으며 매일같이 비무 상대를 해주고 무공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는데 왜 불만인지, 남들이라면 바닥에 백 번 절을 하고 집문서를 들고 와도 그런 기회를 못 얻어서 안달인데 무엇이 불만인지.
그들의 완고한 구시대적 사고관으로서는 그것이 장건에게는 괴롭힘으로 이어진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 집안이든 문파든 어른이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게지.”
소림사의 역대 어른인 홍오와 지금의 어른인 원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쯧.”
최고수들은 혀를 찼다.
어쨌거나 장건이 금분세수를 마음먹었고 소림사에서 후견인이 되어 공식으로 선포하게 된다면 더 이상은 장건을 괴롭힐 수 없었다. 어차피 충무원이 폐쇄되면서 장건이 출퇴근할 일도 없게 되었고.
이제 장건과 매일 나누던 즐거운 시간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낙도 사라진 셈이다.
“어쩔 셈이신가들?”
“소림사로 가 봐야 눈칫밥이나 먹을 테고 문파로 돌아가 봐야 무공서라도 저술하고 죽으라 독촉할 것이고.”
“우리가 이렇게 모일 기회도 마지막일 터인데 당분간 이곳에서 논검(論劍)을 하면 어떻겠소?”
“뭐, 그럽시다.”
“그것 좋소.”
그리하여 최고수들은 장건이 더 이상 서가촌에 들르지 않게 되었음에도 서가촌에 남아 논검의 장을 열기로 했다.
☆ ☆ ☆
마침내 소림사에서는 강호에 정식으로 포고를 하였다.
강호의 동도 제현(諸賢)에게 고합니다.
천액아이우(天阨我以遇)하면 오형오도이통지(吾亨吾道以通之)이니, 천차아내하재(天且我奈何哉)라.
본디 사람이란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하늘이 정해준 길도 마다하고, 혹은 하늘이 막는다 하여도 가고자 하는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삶의 주인이 곧 자신이니 자신이 가는 곳이 곧 진리의 수행처[隨處作主入 處皆眞]가 되는 것입니다.
본사의 장 씨가(氏家) 건 자명(字名)의 제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묵자간(默自看)에 스스로가 인이 부족함을 알고 의가 부족함[仁不足 義不足]을 알았습니다.
이에 일심 귀원(一心 歸元) 요익창생(饒益蒼生)을 결심하여, 다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삶을 살게 하려 합니다. 서운함과 이로움, 본사의 제자가 강호에서 맺었던 모든 연을 세 자루의 향과 한 그릇 대야의 물에 담아 떠나보낼 것입니다. 사소한 연도 외면하지 않을 터이니, 모쪼록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상기 금분세수식은 강호의 법도에 따라 본사의 주관 하에 모일부터 삼 일 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초청장이나 포고문이 아닌 도전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하나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금분세수식이란 게 어차피 은원을 모두 정리하는 자리였다. 원한이 있으면 그날 찾아가 장건과 무력으로 담판을 내면 된다. 그날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무력 담판에 실패한다면 같은 원한에 대해 다시 따질 수 없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강호 전체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강호에 이름난 명숙들은 어지간해선 장건에게 시비를 트기 어렵다. 간혹 어중이떠중이들이 금분세수의 도리를 무시할 수도 있긴 하나 장건이 그 정도에 당할 리는 만무한 것이고…….
사실상 이로써 장건은 강호 무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은퇴식.
그 날짜는 장건이 소림사와 약조한 십 년의 기한이 끝나는 계절, 바로 지금으로부터 육 개월 후의 봄이었다.
☆ ☆ ☆
장건의 금분세수는 놀랍기도 놀랍지만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야말로 묘한 일이었다.
대외적으로 소림사가 공표한 바에 따르면, 장건은 은퇴하고 그냥 본업인 상인의 길을 간다고 했다.
하나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문파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몇몇 문파에서는 수뇌부들끼리 긴급회동에 나섰다.
“아무리 관계가 복잡하다 치더라도 그만한 인재를 내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치는 게 아니라 은퇴하는 거지요.”
“그게 그거잖소. 내가 못 먹을 떡은 남도 못 먹게 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오?”
“사실상 소림소마는 이제 누군가의 독점적인 제자가 되기엔 너무 늦었고 오히려 공동 전인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소림사로서는 크게 잃을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더욱 이상하다는 것 아니외까.”
“소림사에서는 딱히 얻을 것도 없으니 차라리 버리자는 걸 지도요. 생각해보니 이번 서가촌에서의 사건들로 인하여 소림소마가 위상을 떨치기는 하였으되, 뭇 문파들의 미움을 사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여럿 창피를 당하였지요.”
“소림사의 방장 대사로서는 타문파와의 악연을 끊기 위해 꾸민 일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셈이지요. 그러니 아예 끊어내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 각 문파의 최고수분들이 혈라마를 쫓을 때 소림소마를 보호한 것이 방장 대사였다고 들었소.”
“소림소마는 그저 빌미로 봅니다. 소림사로서는 차라리 혈라마를 놓치더라도 당사의 영역에서 타인들이 활개 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소림소마를 핑계 삼아 타문파 무인들의 행동을 가로막음으로써 자파의 위상을 찾아보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일리가 있소. 그러니까 이건 소림소마의 뜻이 아니라 방장 대사의 뜻이다?”
“그렇게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은퇴 외에는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파문을 하면 다른 문파에서 눈독을 들일 것이고, 단근절맥을 하려 해도 이미 소림소마는 여러 고수에게서 무공을 사사하였으니 소림사가 함부로 손대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하기야, 방장 대사가 진산식에 보여준 괴짜 같은 모습을 생각해보면 무림 역사상 초유의 은퇴식이 이상하지만도 않구려. 이상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오만.”
“그렇습니다.”
“허면 소림소마의 은퇴가 우리에게는 어떠한 득실이 있소?”
“손해는 없고 딱히 이득이랄 것도 없습니다. 외려 선대의 은퇴를 그때까지 미룰 수 있으니 나빠지지도 않은 셈입니다. 더불어 그 아이 때문에 골치를 썩을 일은 없다는 정도입니다.”
“그럼 금분세수식 날에는 어찌해야 하겠소? 문파관련이라면 모를까 개인적으로 소림소마가 원한을 쌓은 이는 많지 않을 거외다.”
“소림소마를 더 띄워줄 필요는 없습니다. 소림사가 주관한 만큼 성공적일수록 소림사만 돕는 셈이 되겠지요. 공식적인 참가는 피하는 게 나을 겁니다.”
“알겠소. 그리합시다.”
“때가 되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쯧쯧. 아이만 안 됐구려. 차세대 무림의 큰 별이 될 수 있었거늘.”
“이것이 모두 소림사가 부덕한 소치지요.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외다.”
긴 회동의 끝에 문파의 대부분은 이것이 방장 원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 결론을 내렸다. 원호의 괴팍함과 톡톡 튀는 사고방식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장건의 존재를 골치 아파하던 일부 문파들은 대놓고 은퇴를 반겼고, 그 외의 문파들도 대체로 장건의 은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장건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 여러 번 생겼던 만큼 어떻게 생각하면 후련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장건의 무력이 부담되었던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반갑지 않은 이도 있었다.
천룡검문의 태상이었다.
태상은 강호의 뭇 무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언제나 얼굴을 가린 방갓을 깊이 눌러쓰고 있는데, 항간에는 천룡검주 고현보다도 더 강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그 태상은 지금 손등의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터질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손에 들었던 죽간은 이미 새까만 숯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안 돼…….”
방갓 안에서 스멀스멀 혈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살아가고 있는데! 누구 허락을 받고 은퇴를 한단 말이냐! 왜 그걸 아무도 말리지를 않아! 왜!”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태상은 미친 듯 방 안을 쏘다니다가 벽에 주먹질을 했다.
꽈앙!
벽에 구멍이 뚫리면서 휑하니 바람구멍이 났다. 바깥에 나 있던 거목이며 담장도 똑같이 일직선의 구멍이 나 있었다.
“무슨 일이오, 태상!”
목소리보다 더 빠르게 고현이 나타났다.
고현의 무위는 극에 달해 있어서 거의 이형환위의 수준으로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목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이제 십 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신을 부르르 떨며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태상이 고개를 돌려서 고현을 쳐다보았다.
멍하던 표정에 차츰 미소가 깃들어 간다.
“그래. 잊을 뻔 했어. 그대가 있었지, 그대가.”
태상의 몽롱한 눈빛을 보며 고현은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어찌 보면 걱정, 혹은 염려의 표정이기도 했다.
“태상…….”
☆ ☆ ☆
충무원으로 출근하지 않게 된 첫날.
장건은 출근하는 대신 이조암을 올랐다.
이른 새벽이라 산봉우리들이 운무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쌀쌀한 가을, 하늘부터 지상까지 탁 트인 광경이다.
기지개를 펴듯 양 팔을 벌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좋니?”
장건의 어깨너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목하니 할아버지!”
장건이 반갑게 돌아보았다. 인사는 늦게 했지만 이미 아까부터 문원이 와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문원이 혀를 차며 장건의 옆으로 와 섰다.
“좋냐구.”
다시 한 번 묻는 말에 장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뭐가 좋아?”
“시달리지 않아서?”
“참 내. 웃기지도 않어. 쥐콩만한 게 무슨 금분세수람? 내 살다살다 정말 너 같은 이상한 애는 처음 본다.”
“헤헤.”
“에잉, 웃지 마. 정 들어.”
문원이 투덜거리면서 장건을 구박했다.
“집에 가면 뭐 할 건데?”
“가업을 이어서 상인이 될 거예요.”
“뭐, 그것도 딱히 나쁘진 않겠구나.”
문원은 크게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장건처럼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풍경을 감상하듯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입을 떼었다.
“미안하다.”
“네?”
“지켜주지 못해서. 이건 나뿐만 아니라 방장 대사도 그렇고, 다들 같은 생각일 거야.”
장건은 문원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문원이 아이처럼 도리질을 했다.
“아냐아냐. 이건 분명히 우리가 잘못한 일이야. 이상한 어린 애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겼어.”
“근데 굳이 이상하다고 하실 건 뭐예요?”
“그럼 니가 안 이상하니?”
문원이 핀잔을 주는 것처럼 톡 쏘아 붙이자 장건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라고 뭐 이상하고 싶어서 이상한가요?”
“뭐가 이상한데?”
외려 문원이 되묻는다.
장건이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평범하게 못하는 거요.”
문원이 장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 혹시 요즘 뭐 기분이 좀 평소랑 다르다던가, 그런 거 없니?”
“없는데요.”
“아니면 소주천을 할 때 느낌이 다르다던가…….”
“똑같은데요.”
문원이 입을 삐죽거렸다.
“거 봐. 이상하지.”
“왜요?”
“소림사라는 짐과 강호라는 커다란 짐을 함께 덜어버렸는데 아무렇지 않으니까 이상하지.”
“조금 서운하긴 해요. 사제의 연까지 다 없어지는 거라고 해서요.”
“아니, 그게 아니고.”
문원이 답답한지 자기 가슴을 툭툭 쳤다.
“니가 배운 내공심법이 있잖아? 그게 있잖아. 마음의 짐을 막 던지고 그러잖아? 그러면 가벼워질수록 뭔가 달라져야 하는 거거든?”
꿈벅꿈벅.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야. 만약에 지금 니가, 니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잖아? 그럼 막 염화미소(拈華微笑)를 지으면서 머리에 막 꽃이 피어서 만발하고 막막…….”
“엑! 머리에 꽃이 피어요?”
“…….”
문원은 입을 다물었다.
“쩝. 관두자 관둬. 이젠 니가 아니라 내가 서운하다.”
“서운해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장건이 문원의 기분을 맞춰주려 해보지만 문원의 표정은 시무룩하다.
장건은 소림에서 자신과 전대 방장 굉운을 제외하고 역근세수경을 익힌 유일한 제자이다.
역근세수경의 진의는 불가의 가르침과 닿아 있어서, 기사탁연수의 다섯 단계로 해탈의 경지를 표현한다.
마음에 낀 사념과 정신을 구속하는 속세의 굴레 등을 버리고 탈피할 때마다 사고(思考)의 영역이 넓어져 더욱 지고한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버리기 아까운 것을 버릴수록 역근세수경의 효과는 크게 나타난다.
한데 그러한 역근세수경을 배운 장건이 소림사를 버리고도 멀쩡하다는 건, 소림사가 장건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물론 강호 또한 마찬가지이고.
그러니까 문원으로서도 은근히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너한테 그걸 강요하겠니.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떠날 사람.”
문원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지…….”
“아냐아냐. 됐어.”
문원이 장건의 허리를 토닥였다.
“다 때려친다고 금분세수식 전까지 놀지 말구, 수련 게을리 하지 마. 너랑은 경우가 달라서 굳이 이런 얘기하기 좀 그런데, 금분세수를 하겠다 하고 제대로 한 사람이 드물어.”
“금분세수가 그렇게 어려워요?”
“그렇진 않아.”
“은원을 깨끗이 해결하는 자리라고 들었는데요.”
“응. 그런데 그런 시주들만 오는 건 아냐. 은원이 없더라도…….”
문원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뒷말을 흐렸다. 사람의 원초적 욕망이 가장 날것으로 드러나는 무림에서 어떤 순간에든 더러운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금분세수를 선언하고 살아난 사람이 오 할이 채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장건의 금분세수는 또 어떤 방향으로 튀어버릴지.
문원은 문득 몇몇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자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금분세수의 명분쯤 가볍게 무시하고 장건을 해코지할 수 있는 인물들.
유독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괜히 끔찍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원은 상념을 털어버리려 노력했다.
“휴. 내가 걱정이 너무 많은가 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나 하고. 너나 나나 마지막 날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겠지, 뭐.”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그러나 문원은 자꾸만 불안함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걱정이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오래 전에 잊은 무인의 감이 되살아 난 것인지.
‘이미 강호에서 이 아이를 어찌할 수 있는 이는 없을 터인즉,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마음에 걸리는고…….’
장건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문원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장건의 무림 은퇴 소식이 들려오든 말든 강호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좋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개인의 비무행은 물론이고, 문파간의 충돌 또한 여전했다. 어느 정도 세력의 구분이 확연해지고 큰 다툼은 없었지만,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체로 중소 문파에 속한 무인들의 경우였고, 이른바 거대 문파와 유명 무림세가는 좀 달랐다.
그들은 관부의 견제를 신경 쓸 수밖에 없기도 했고, 또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기도 해서 강호의 분쟁이나 세력다툼에 딱히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현재 그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서가촌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와 짐수레가 끊임없이 가고 있다.
많은 짐수레에는 대체로 각종 건축 자재가 실려 있었고, 몇몇 수레에는 건장한 인부들이 함께 앉아있기도 했다.
서가촌으로 향하는 행렬들이었다.
최고수들이 뇌음사의 발사라를 잡는다고 부순 전각들을 수리하기 위해 각 문파에서 보낸 물자들이다.
처음엔 문파에서도 크게 신경 쓰기 힘드니 적당히 금전적인 보상으로 끝내려 했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전각에 투자한 상인들이 돈을 받고 다른 마을로 이주를 하든 뭘 하든 문파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고수들이 반대했다.
당장 다른 데로 옮겨갈 생각이 없는 최고수들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 복구가 되어야 살기가 편한 것이다.
하여 문파들은 몇 개 상단에 일을 의뢰하였고, 상단에서는 아예 ‘서가촌 재건위원회’를 만들어 일을 분담하고 체계적인 복구 작업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왕 일이 그렇게 되니 문파들은 최고수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문파들은 제각각 수발을 들 제자들을 딸려 보내기로 했다. 하나 수발이라고 해서 그냥 평범한 제자를 보낸 게 아니었다. 그럴 거라면 이전에 이미 보냈던 이들에게 수발을 들라 했을 것이다.
사실상 이전에 보낸 제자들은 문파에서 딱히 중요치 않은, 한 일 년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런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최고수들의 마지막 무학을 받아와야 할 임무가 있는 제자들이었다. 그러니 명색은 수발이지만 장래가 유망한 촉망받는 기재들을 신중하게 선별하여 보냈다. 밖에도 안 내보내고 아끼고 아꼈던 기대주를 내보낸 문파도 있었다.
자파의 무학에 대한 이해가 최고로 높은 최고수들이 모두 모여 논검하는 자리다.
뭔가 하나는 당연히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제자들은 서로 가려고 난리까지 났다.
가서 뭐라도 주워 오든 듣고 오든 혹은 최고수들이 남긴 심득을 얻어 오든, 뭐든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기회였다. 여기서 하나만 얻어도 장래에 문파를 이끌 고수가 될 것은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