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81
제2장 은퇴 선언 후
양소은과 백리연은 길 밖에 나와 서가촌의 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뚝딱거려서 시끄러운 건 둘째 치고, 갑자기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장건이 충무원을 그만두고 한 달 남짓 되었는데 벌써 서가촌은 거의 대부분 복구되어 있었다.
거기다 쭉 빼입은 명문 정파의 제자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확실히 일반 제자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하나같이 무골(武骨)에다가 이목구비마저도 수려했다. 눈에는 맑은 정기가 흘렀다.
“와…….”
양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고 말았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거대 문파와 무림 세가의 최고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뒤를 이어 최고의 유망주들도 모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양소은이 백리연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번 세대에서는 유독 이런 사람들이 자꾸 모이는 일이 잦았다. 그 대부분은 장건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최고수들 때문에 후기지수들이 모이고 있는 것이긴 하나, 사실상 따지고 보면 단초는 역시나 장건이 제공했다.
한 사람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인다는 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영향력이네. 이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강호에 몇이나 될까.”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광경도 다신 못 보게 되겠죠. 이만한 영향력을 가지고도 강호를 떠나야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장 소협이 문파만 세웠어도…… 아!”
백리연이 아쉬운 투로 말하자 양소은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떠나는 거겠지. 다른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잖아.”
“하아…….”
“그건 그렇고, 나도 큰일이네. 직종 변경을 해야 하나.”
양소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관을 차렸다고 해 봐야 서생들이 대상이었다. 저런 무골들을 상대로 일개 무관이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양소은이 배워야 할 정도의 수준인 이들도 수두룩했다.
“그렇다고 실실 웃으면서 차나 나르는 건 적성에 안 맞고…….”
영리한 제갈영은 서가촌 재건위원회에서 벌써 일거리를 얻어서 건축 사업에 나선 중이었다.
백리연이야 다관의 손님이 서생에서 무인으로 바뀌게 될 뿐이니 상관없지만, 이대로라면 양소은은 아예 승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양소은은 문득 하연홍을 떠올렸다.
“근데 걔는 국수나 팔면서 걱정도 안 되나? 대체 무슨 생각이야?”
☆ ☆ ☆
망할 뻔했던 서가촌이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최고수들과 각 문파의 제자들을 다 합쳐봐야 마흔이 넘지 않는 인원이었다. 단순히 숫자가 늘었을 뿐이라면 서가촌이 달라지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하나 마흔 명의 인원이 몰고 온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강호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파들, 십대문파와 오대세가에 꼽히지는 않지만 그에 준하는 문파들에게도 서가촌의 상황은 귀가 솔깃한 것이었다.
이것 봐라?
무림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건 명예, 자존심, 병기 그리고 무공이다.
하다못해 무공 비급 하나 때문에 문파의 모든 것을 걸고 피터지게 싸울 판인데, 현 강호를 주무를 수 있는 최고수들이 논검의 장을 연다고 하지 않는가!
서가촌에 간다고 꼭 뭔가를 배워온다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주위를 어슬렁거리다보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떡고물이 떨어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그래서 떡고물을 기대하는 이들이 은근슬쩍 서가촌으로 향했다. 강호 전역에서 관심을 가졌으니 의외로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서가촌으로 몰려든 또 다른 부류는 최고수들처럼 은퇴를 앞둔 나이든 무인들이다.
무공으로라면 최고수들에 비하기 어려우나, 무학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평생을 무공에 매진하고 이제 은퇴를 앞뒀는데 이만한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뭇 고수들과 논검할 수 있다는 건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다.
세 번째는 이미 전에 한 번 소림사에 눈독을 들였던 이들과 같은 부류로, 혼기를 앞둔 소저들이었다.
서가촌에 모인 각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서가촌의 후기지수들은 각 문파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있으며, 대개 다음 세대의 장문감이다. 설사 장문이 아니더라도 해당 문파의 최고수가 되어 강호 무림을 뒤흔들 인물이 될 예정인 이들이다.
그러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든 잘 엮어서 연을 만들 수 있다면 강호에서 손꼽는 거대 문파를 사돈의 배경으로 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혼기에 찬 소저들과 수행원들이 서가촌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가촌에는 줄줄이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호의 호사가들은 ‘또?’ 하면서 어이없는 표정들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호라는 건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본능적인 욕구에 충실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강호의 구성원들이 이익이 되는 방향을 좇아 움직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때는 협의(俠義)와 명분이 강호를 대표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옛날 얘기.
당금의 강호에서 실리(實利)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찾기 어려웠다. 협의나 명분을 내세울라치면 고리타분하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꼬장꼬장한 일부 역사가들은 지금의 시대가 강호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 비꼬기도 하였으나 그들도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의 강호가 어딘가 모르게 변질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마교와 사파가 멸절했기 때문이라 보는 이들도 있었다.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던 마교와 사파가 사라지면서 강호를 지탱해온 가장 큰 원동력이 무너졌다는 설이다. 그리고 소림사가 그 대용품으로 소모될 뻔 하였으나 원호의 기지로 겨우 벗어났다는 것도 돌고 도는 소문 중의 하나였다.
호사가들의 입방정이야 어쨌거나, 서가촌이 현 강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지난번 소림사로 사람들이 몰렸을 때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면, 장건 때문에 생긴 일이긴 하나 그 중심에 장건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몇몇 이들은 결국 장건이란 인물조차도 강호의 역동 앞에서는 잊힐 수밖에 없다 평하기도 하였다.
☆ ☆ ☆
장건의 은퇴 소식은 북해빙궁의 야용비의 귀에도 전해졌다.
전서를 든 야용비의 표정이 멍했다.
“정말…… 정말 괴상한 작자로군요. 전승자.”
이토록 이른 나이에 강호의 은퇴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야용비가 아니더라도 일이 이리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게 죽이려고 애를 썼는데……, 스스로 떠난다고? 이거 장난치는 건가?”
“소림사가 주관하였으니 확실할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데…….”
야용비가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냉고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전승자가 강호를 떠난다고는 하나 아직 젊습니다. 후에 어떤 식으로라도 문각 선사의 무공이 다시 전수되는 걸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어차피 전승자는 은퇴를 하든 뭘 하든 결국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우리로서는 당분간이나마 시간을 번 셈이니 나쁘지 않겠군요. 전승자의 방해만 없다면 본궁의 무사들은 거칠 게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전승자의 은퇴식까지 몇 달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만 태을문과의 싸움을 끌도록 하지요. 어차피 뇌음사와 야율본을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을 포섭할 시간도 필요하고, 또 전승자의 은퇴 얘기가 어떻게 될지 진위를 지켜볼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냉고사의 얘기를 듣던 야용비가 갑자기 웃었다.
“냉고사.”
“예.”
“본래 우리의 계획은 새외세력을 끌어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태을문을 멸문시키도록 하려는 셈이었죠. 그리하여 강호인들에게 공포심을 심고, 그 공포를 매개로 강호 무림의 연합체를 구성한다……. 그게 우리 생각이었죠?”
“그러합니다.”
“그런데 말예요. 나는 요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야용비는 방 안을 천천히 거닐며 말했다.
“일전에 전승자가 서가촌의 각대 문파 고수들에게 한마디 했다면서요? 자긴 마교를 본 적도 없는데 왜 그러느냐고. 그러면서 오히려 뇌음사의 발사라를 옹호했다고요.”
냉고사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용비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예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나는 강호인들이 당연히 마교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어려서부터 늘 그렇게 들어왔고, 그래서 막연히 그런 줄 알았죠.”
“그게 사실 아닙니까?”
냉고사의 되물음에 야용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냉고사를 쳐다보았다.
“냉고사, 우리가 놓친 게 뭔지 알아요? 시대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이미 강호에서 마교가 사라진지 수십 년이에요. 이제와 다시 마교나 사파가 나타난다고 해서 이들이 예전처럼 똘똘 뭉치진 않을 거라고요.”
“허면?”
“지금 시대에 이들을 뭉치게 만들 수 있는 건 의협심(義俠心)이 아녜요. 바로, 자기의 이익이죠. 결국엔 뇌음사와 야율본도 이득을 보려고 돌출행동을 했었죠.”
“음.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소주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위험하게 대리 세력을 내세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랬다가 전승자가 마교를 퇴치하겠다고 은퇴를 번복하는 일 따위가 생기면 안 될 테니까요. 우리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저들에게 적당한 고깃덩어리라도 던져주실 셈입니까?”
“아뇨. 내가 왜요?”
야용비가 걸음을 멈추고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그저 옆에서 부추기기만 할 생각이에요. 어차피 저자들은 원래 있던 것도 서로 빼앗아 먹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잖아요?”
야용비는 죽간을 들어 휘휘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자, 대신 이번에는 황제의 도움이 좀 필요하겠어요.”
☆ ☆ ☆
소림사에서 공식적으로 장건의 은퇴를 알린지도 한 달 반이 훌쩍 지났다.
서가촌의 거리는 바글거리는 사람들로 활기에 차 있었다.
본래 사람이 붐비면 시비도 붙고 싸움도 나고 하기 마련이건만 지금은 그런 일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강호에서 활약하는 최고 배분의 무인들이 죄다 서가촌에 와 있는 중이다. 어지간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도저히 난리를 피울 수가 없다.
과장된 말로 간덩이가 부었다고 하면, 기어코 가슴을 열어서 부은 간을 보고야 말 성질 더러운 고수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게다가 최고수들을 따라 모인 이들도 대부분 명문정파의 버젓한 후기지수였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처신을 주의하고 함부로 시빗거리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가끔 호승심에서 생겨나는 비무마저도 감정적이기 보다는 격식을 차려 행해졌다. 그래서 의외로 서가촌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화평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수들은 사실 지금의 북적임이 다소 불만스럽기도 하였다.
새롭게 지어진 다관에서 차를 마시던 벽력도가 밖을 내다보며 혀를 찼다.
“쯧쯧. 온갖 뜨내기들이 다 모였구만. 그냥 적당히 보수하라 했지 누가 이렇게 시끌벅적 번화하게 만들어 달라 했나.”
앞쪽에 앉아 있던 북무선생이 탁자 위에 시초라는 풀의 줄기를 늘어놓으면서 점을 치다가 대꾸했다.
“원래 노인네가 되면 이런 데가 살기 좋은 법이네. 몇 걸음 가면 의방도 있지, 그 옆에는 약재상도 있지, 따뜻한 밥과 침상을 제공하는 객점도 있고 근처에 다관도 많으니 발품 팔 필요도 없고.”
청성파의 운일도장이 담담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부인할 수 없는 말이군.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일세. 일전에는 아무데서나 자리를 잡으면 그곳이 바로 논검의 장이었으나, 어디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 그리 할 수 있겠는가?”
“왜 못해?”
북무선생이 시초 줄기를 손에 꿰고 있다가 슬쩍 흔들었다.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운일도장은 그 안에서 천강수의 묘를 읽었다. 공기가 흔들리며 기파(氣波)가 일어났다.
“헛험.”
운일도장이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순간 핑, 소리가 나며 벽력도가 검결지를 쥐어 허공을 쳤다. 주변 공기가 찌릿찌릿 했다. 북무선생이 날려 보낸 검파를 운일도장이 벽력도에게 흘렸고, 벽력도가 허공에서 상쇄한 것이다.
성격 급한 벽력도가 인상을 썼다.
“뭐야. 지금? 천강수에 청운검초? 둘이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북무선생이 다시 혀를 찼다.
“쯧쯧, 고작 그거 하나 하는데 무슨 청운검초에 오호단문도의 상승 초식을 쓰고 그러나. 그놈이라면 백화검 정도로 막았을 텐데.”
“응?”
벽력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니지. 놈이라면 불영보로 의자를 밀고 피했겠지.”
운일도장도 끼어들었다.
“이 도사의 생각에, 녀석이라면 움직이지 않고 금종조를 쓰지 않았을까?”
“아냐. 금종조는 의복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럼 손을 들어 올려야 하잖아. 그러니까 다른 수를 썼겠지.”
“허면 호신외공으로 그냥 튕겼을까?”
“호신외공에 이화접목을 써서 슬격으로 흘렸을 수 있지.”
“허어, 호신외공은 대맥에서 내공을 끌어야 하는데 이화접목은 대맥을 쓰면 몸이 굳어서 상반된단 말일세.”
“나 지난번에 놈이 하는 거 봤는데?”
“그럴 리가 있나.”
“진짜래도?”
한동안 옥신각신하며 온갖 초식과 신법을 말하던 세 사람은 갑자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쩝.”
“이거 말만 하다 보니 몸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허, 나도 그렇다네.”
장건과의 일 이후, 어딘가 모르게 최고수들은 소탈해졌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무학에만 열중하다보니 딱딱한 격식도 많이 잊었다.
북무선생이 두 사람을 보다가 시초 줄기를 펼쳤다.
“오늘, 길흉은 크게 없고 이(利)와 무구가 있네. 무엇을 하든 사고는 없고 평탄하며 좋은 날이 되겠군.”
그 말에 벽력도와 북무선생의 눈이 빛났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나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셋이었다. 세 사람이 일어서자 조금 떨어진 다른 탁자에 앉아 있던 후기지수들이 벌떡 일어섰다. 한참이나 무공에 관련된 얘기를 떠들었으니 다음 차례야 뻔했다.
“찻값내고 얼른 따라와라.”
“예, 옛!”
세 사람의 문파에서 파견된 문하제자들은 급히 찻값을 셈하고 최고수들을 따라 나갔다.
하지만 팽가와 청성에서 온 후지기수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의아해진 형산파의 후기지수 길상이 물었다.
“드디어 사조님들의 무학을 보게 되었는데 표정이 왜들 그러십니까?”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팽가의 팽율이 말했다.
“우리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오.”
“네?”
길상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왜 팽가와 청성의 후기지수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수들과 후기지수들은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지나 양소은의 무관 앞에 다다랐다.
양소은의 무관은 전보다 훨씬 커졌다. 담은 높아졌고 넓이도 몇 배나 확장했다. 그런데도 모자라서 아직도 확장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떼를 이룬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 무림인들이다.
먼저 와 있다던 화룡소가 북무선생들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오셨소이까?”
“아, 먼저 와 계셨구려.”
그때 청색의복을 입은 이가 다가와 화룡소와 그의 동행들을 맞이했다.
“자리가 났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화룡소가 북무선생들을 보고 포권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화룡소와 동행들이 앞쪽에 있는 여러 개의 수화문 중에서 두 번째로 사라진 후, 다른 청색의복을 입은 이가 북무선생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로 모실까요?”
벌써 여러 차례 무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북무선생이 거침없이 답했다.
“청(廳)으로 안내하게.”
“마침 한 자리 남았습니다. 이쪽으로.”
북무선생과 벽력도, 운일도장이 청색의복을 입은 이를 따라가자, 그들의 후기지수들도 약간 떨어져서 뒤를 좇았다.
다른 둘은 어색함이 없는데 형산파의 길상은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좁은 수화문을 넘어서니 하나의 정원이 있고, 정원은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담마다 여러 개의 문이 나 있었다. 그중에서 하나의 문을 지나니 양옆이 담으로 막히고 위쪽이 커다란 지붕으로 덮여 폐쇄적인 회랑과도 같은 길이었다.
그곳을 지나 끄트머리쯤에서 작은 문을 여니 마루가 있는 작은 대청이 있었고 그 앞에는 판판한 박석이 깔린 마당이 있었다. 사방은 여전히 높은 담과 지붕이 있어서 밖에서 들여다보기 어려운 구조였고, 한쪽 담에는 온갖 병기들이 종류별로 있어서 시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기까지 했다.
“자, 오시게들.”
최고수들은 훌쩍 대청의 마루 위에 올랐는데 그곳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상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운일도장이 후기지수들을 향해 손짓했다.
“한 놈은 이쪽으로 오고 나머지 둘은 저기 가서 서라.”
눈치를 보고 있던 청성파의 후기지수가 잽싸게 최고수들이 있는 대청마루의 아래에 가 서자 팽율이 아쉬워했다.
“갑시다, 길 형.”
팽율은 벽력도의 말에 따라 시렁에서 평범한 도 한 자루를 들고 박석이 깔린 마당에 섰다. 그제야 길상은 그곳이 연무장 역할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리가 잘 되는지 땅에 깔린 네모난 박석들은 깨진 데도 없이 깨끗했다.
최고수들은 차를 따르면서 마치 담소라도 하듯 편안한 분위기였다. 곧 벽력도가 팽율에게 말했다.
“너 혼원도법 할 줄 알지?”
“예.”
“후삼(後三) 중에 이 초식을 해 봐라.”
제아무리 최고수들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파의 무공을 대놓고 펼쳐 보인다는 건 조금 꺼려지는 일일 터였다. 한데도 팽율은 거침없이 혼원도법의 초식을 펼쳐 보였다.
형산파의 길상이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팽율은 시원하게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번개처럼 두 번 좌우로 베고 빙글 돌아서 크게 내려치는데, 과연 팽가의 기대주답게 깔끔한 동작이었다.
“거기서 곤보(坤步)로 북북서의 방위로 옮겨가 단경(短經) 삼붕추(三鵬追)의 수법으로 이어봐.”
“예.”
팽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데 길상의 표정은 더 이상해졌다.
단경 삼붕추는 낭아추(狼牙鎚)를 다루는 수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곤보는 남서의 방위인데 북북서로 이동하라니?
하지만 팽율은 한 마디도 토를 달지 않고 다시 혼원도법 후반 이 초식을 펼쳤다. 이후 곤보를 밟으며 엉거주춤하게 북북서로 이동했다. 보법에 어울리는 경락 운용은 물론이고 자세로만도 발이 꼬이니 당연히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세에서 칼을 대각선으로 내려치는데 절묘하게도 힘이 실려서 강한 파공성이 났다.
파앙!
어떻게 그런 기운이 실리는지 알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보기엔 좋지 않았으나 굉장히 빈틈이 없는 묘한 초식이다.
길상이 뭘 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는데, 최고수들은 그를 두고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이건 어때?”
벽력도의 말에 운일도장과 북무선생이 약간 인상을 쓰고 생각하다가 차례로 답했다.
“본문의 철양보에 귀일검법을 함께 쓰면 오 초 이내로 파해가 가능하긴 하겠지만……, 순수한 보법만으로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네.”
“양량원보로 첫 초를 피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단경 삼붕추는 삼재보를 약간 응용해서 네 걸음 이내로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벽력도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은 이걸 철양보와 비선각을 동시에 운용해서 반 걸음으로 피해버렸다니까.”
“허허. 그런가?”
“대나한선보에 비선각이라.”
운일도장이 멀뚱히 서 있던 길상을 불렀다.
“거기 너 길가라고 했느냐?”
“예? 예.”
“철양보를 해보거라.”
자파의 어른도 아니고 타파의 어른이 말을 하니 길상은 다소 당황스러워서 북무선생을 보았다. 북무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해 보거라.”
길상은 철양보를 시전했다.
역시나 형산파의 후기지수답게 제법 괜찮은 철양보를 펼치는 길상이다.
형산파의 철양보는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하체를 최대한 바닥에 밀착시켜 중심을 아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과한 공방에도 중심을 잃지 않아 안정적인 수비와 공격이 가능하다.
길상이 양 손을 앞으로 엇갈려 둔 채 철양보를 순서대로 밟는데, 막 이십여 보를 움직였을 때 운일도장이 말했다.
“지금 그 좌중태산(左中泰山)에서 우(右) 비선각으로 이어 보아라.”
우 비선각은 오른쪽 발끝에 중심을 완전히 실어서 차는 수법이었다.
길상은 얼떨떨해 하며 시키는 대로 했다.
당연히 철양보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으니 한 호흡을 쉬었다가 뛰어올라 허리를 반쯤 틀며 강하게 찼다.
부웅!
각력이 실린 비선각이었다. 뭔가 움직임은 이상했지만 대충 이어져서 펼쳐졌다.
“다시, 이번엔 발을 뻗지 말고 땅에서 한 뼘만 뛰어서 진방(震方)으로 반 걸음을 가는 게다. 알았지? 지금보다 더 빨리 해야 돼.”
“아, 알겠습니다.”
길상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철양보를 밟다가 비선각으로 빠르게 옮겼다.
철양보는 바닥에 몸을 낮추는 보법이고 비선각은 땅에서 뛰어오르는 각법이라 서로 운용이 다르다. 멀쩡히 이어질 리가 없다. 하여 길상은 대충 적당히 철양보를 밟다가 발돋움을 하고 옆으로 살짝 뛰어 가볍게 마무리를 지었다.
길상이 자기 생각에는 그래도 비슷하게 요구하는 대로 한 것 같아 운일도장을 쳐다보았다.
한데 운일도장은 매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무선생의 얼굴에도 부끄러움이 드러나 있다.
“누가 그걸 철양보랍시고 해? 에잉. 이놈아, 그래서야 혼원도법 일 초나 피할 수 있겠냐? 어디 피할 수 있는 지 해 봐라.”
북무선생은 팽율에게 손짓했다.
벽력도가 으르렁거렸다.
“대충하면 죽는다, 알겠냐?”
“예.”
팽율이 도를 들고 나와 길상을 마주했다.
길상은 얼떨결에 팽율과 비무 아닌 비무를 하게 되었다.
“아니, 저…….”
“조심하시오, 길 형.”
팽율이 도를 거꾸로 쥐고 인사를 한 후, 아까 보인 혼원도법을 펼쳤다.
두 번을 좌우로 베고 돌아서 내려치는 동작이었다.
‘뻔히 본 것이니 못 피할…….’
하나 옆에서 본 것과 앞에서 대하는 건 전혀 달랐다. 게다가 팽율의 도가 부르르 떠는 것이, 푸르스름한 도기까지 머물고 있지 않은가!
‘팽 형!’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싶어서 길상은 기겁하며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때 북무선생이 외쳤다.
“철양보!”
길상은 철양보에 최대의 내공을 운용하여 팽율의 혼원도법에 대항했다. 좌우로 치는 도를 피하고 돌아서 내려치는 동작까지, 정말 최선을 다한 후에야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었다.
북무선생이 말한 대로였다. 혼원도법도 팽가의 일절이다. 길상이 내공을 운용하지도 않고 대충 펼치는 철양보로는 혼원도법을 받기 어려웠을 터였다.
한데 길상은 혼원도법의 이 초식을 모두 피해낸 후에 ‘어?’하고 놀랐다. 자신의 철양보가 정확히 좌중태산의 자세로 있었던 것이다.
‘설마?’
순간 팽율의 모습이 훅 하고 연기처럼 꺼졌다. 길상의 머리에 아까 팽율이 보인 동작이 떠올랐다.
‘북북서의 곤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팽율이 자신의 우측 깊이 들어와 완전한 사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단경 삼붕추!’
정수리가 서늘해졌다.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사각으로 피해 사각에서 오는 공격이었다.
지금을 벗어나려면 운일도장이 말한 것처럼 비선각으로 피해야 했다. 그러면 회피와 동시에 반격이 된다. 머릿속으로 대강 움직임이 그려졌다.
팽율은 급히 내공의 운용을 우측으로 옮기며 뛰었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처럼 내공의 운용이 순식간에 될 리 없었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내공이 역류하며 기혈이 뒤엉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쨌거나 방향은 제대로 움직여서 겨우 팽율의 일 초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부우웅!
팽율의 도가 길상의 옷깃과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가르며 스쳐 지나갔다.
“끄어어어!”
누가 듣기에도 서글픈 비명소리를 내며 길상은 공중에서 다리가 꼬인 채 철퍽 하고 엎어졌다.
“…….”
“괜찮소, 길 형?”
팽율이 도세를 거두고 길상을 부축해 일으켰다.
길상은 코가 깨져서 코피를 줄줄 흘리며 야속한 눈으로 팽율을 쳐다보았다.
팽율은 못내 미안한 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길 형, 이곳에 온 친구들은 다 처음에 겪는 일이오. 그러려니 하시구려. 대충하면 내가 혼나는 판이니 어쩌겠소.”
길상은 보법을 밟다가 자빠진 게 못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북무선생에게 하소연처럼 변명을 했다.
“사백조님, 못난 꼴을 보여드려 심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사백조께서 말씀하신대로는 진기를 유통시킬 수가 없습니다. 좌중태산은…….”
북무선생이 중간에 길상의 말을 가로챘다.
“좌중태산은 왼쪽으로 천근추의 내공을 돌려 몸을 아래로 누르는 수법인데 어떻게 거기에서 오른 다리의 경락으로 순식간에 내공을 옮겨 뛰어 오르냐는 게지?”
“예? 예…….”
“알아. 그래서 시킨 게야.”
“……네?”
어리둥절해 하는 길상에게 달리 설명해주지 않고 북무선생은 다른 두 최고수와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것 봐. 안 되잖나.”
그 말을 들은 길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늘같은 사백조의 앞에서 불평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안될 줄 알면서 시키다니!
팽율이 길상의 등을 토닥였다.
“참으시오. 그렇다고 사조님들께서 바닥에 엎어질 순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까 결국 자신들의 생각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상들을 써먹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최고수들쯤 되어서 바닥을 구르고 꼴사나운 동작을 하고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뭐, 그래도 운이 좋으면 몇몇 가지 정도는 얻어갈 수 있을 거요. 진기의 운용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소. 나야 아직 십분지 일도 건지지 못했지만.”
되지도 않는 걸 시키는데 십분지 일이나마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 길상이었다.
“그전에 주화입마로 죽을 것 같소.”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하시겠소이까?”
후기지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말든 운일도장과 벽력도, 북무선생은 여전히 장건이 쓴 수법을 분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좌중태산이 아니었나? 분명히 다음이 우비선각은 맞는데. 워낙에 그놈이 하는 게 희한해서 뭐가 뭔지 확실하질 않으니, 원.”
“혹시 천근추의 방향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네.”
“우중태산에서 우비선각으로? 그럼 단경 삼붕추를 피할 수가 없는데?”
“중간에 한 가지 보법이 더 들어갔을 지도……, 반 보 정도 섞어서 사용했으면 연결이 좀 나아졌을 지도 모르네.”
“거기서 한 가지의 보법을 더 운용하면 무리가 갈 걸세. 자칫 내상을 입고 주화입마 할 수도 있어.”
그러자 문득 생각이 났는지 벽력도가 세 후기지수를 보며 물었다.
“혹시 난 주화입마 안 들 자신 있다, 하는 놈 없냐?”
세 후기지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벽력도와 최고수들의 시선을 피했다.
벽력도가 혀를 찼다.
“쯧쯧. 요즘 애들은 우리 젊을 때랑 달라서 하여간 패기가 없다니까.”
운일도장과 북무선생이 헛헛하게 웃었다.
“역시 그 녀석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 대체 그 녀석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주 소림사에서 꽁꽁 싸매고 밖에 내놓질 않는 모양이야.”
“원호 방장이 의외로 소인배로군.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우리한테 보따리 좀 풀어 주는 게 그리 아깝나, 에잉.”
세 최고수들이 조금 아련한 눈빛을 했다. 자신들에게 새로운 무공의 세계를 보여준 장건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장건이 왜 강호를 떠나려고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장건이 은퇴식을 발표한 지 근 두 달이 더 지났다.
장건은 원호가 나가질 못하게 해 매일 소림사에 갇혀 있느라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뭐라도 하면 좋을 텐데, 문제는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장건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무 자 배는 장건을 가르칠 수 없다 했고, 원 자 배들도 어차피 은퇴할 장건에게 딱히 무공을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장건은 또래 동문들과 같이 수업을 받지도 못했고, 그나마 청소를 하려 해도 빗자루만 잡으면 다들 달려와 빗자루를 뺏으며 눈을 부라리니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더러운 게 낫다니…… 그게 어디 불제자가 할 말이람? 칫, 칫.”
경내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장건의 투덜거림이었다.
“하아,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지루해서 죽을 노릇이면서도 넉 달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묘한 기분.
장건은 대웅전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고 푸르러 완연한 가을 하늘.
너무나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서 집에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면…….
장건이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며 마냥 멍하게 앉아 있는데, 문원이 예의 빗자루를 들고 나타나 말을 걸었다.
“심심하냐?”
“할아버지!”
심심하던 차라 장건이 반색했다.
“내가 안 심심하게 해 줄게. 이거 받아.”
문원이 뜬금없이 내민 것은 두터운 책자였다.
“어라? 이건…….”
천문비록이었다.
장건이 왜 이걸 주느냐는 듯 문원을 쳐다보았다.
“아, 이거 좀 있다가 누가 받으러 올 거야. 너한테 받아가라고 내가 방장 대사한테 말해놨거든.”
“누가요?”
“천문서원에서 나온 시주?”
“근데 왜 저한테 있다고 하셨어요?”
“천문서원에서는 이걸 분실했을 때 습득한 사람에게 무조건 한 가지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주기로 되어 있어.”
장건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자 문원이 혀를 찼다.
“에이, 너 그래 눈치가 없어 가지고 어떻게 상인이 된다 그러냐? 천문서원의 시주들은 말야, 수백 년 전부터 남의 무공을 관찰하고 살아온 이상한 취미를 가진 시주들이란 말야. 그러니까 혹시 네가 무공이나 계파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누구보다 더 잘 대답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마해 곽모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곽모수는 장건을 한 번 보고 비은이 필요하다고 바로 지적해 주었다. 그만큼 남의 무공을 보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 필요한 게 없는데요?”
장건이 멀뚱하게 대답하자 문원은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이 쀼루퉁해졌다.
“뭐 그리 빨리 대답하냐. 할 일도 없는데 좀 생각해봐. 기껏 지 생각해서 가져왔더니만?”
문원은 ‘옛다’하고 장건에게 천문비록을 억지로 맡겨두고는 사라졌다.
장건은 얼떨떨하게 있다가 손에 쥐어진 천문비록을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상달에게 들어 천문비록이 대강 어떤 책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남의 무공을 보는 사람들. 남의 문파와 무공의 계보를 기록하는 사람들.
호기심이 생겨서 살짝 책자를 열어 보았지만, 딱히 대단한 얘기들은 없었다.
상달의 말대로 문파와 무공의 이력, 특징 등이 적혀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재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건에겐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이었다.
문파 이름이니 무공명이니 본다고 장건이 뭘 알겠는가. 어차피 무림인도 그만두기로 한 마당에 이제 와서 강호에 대해 알아본 들 별 소용도 없다.
하여 장건은 건성으로 대충 몇 장을 넘겨보고는 금세 책자를 다시 덮었다.
“무공에 대해 궁금한 거라…….”
장건은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막상 가장 궁금한 것을 헤아려보려니 쉽지 않았다.
“평범해지는 방법이라던가?”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답이 필요한 질문이긴 했다.
“또 뭐가 있더라.”
어쨌든 생각을 하느라 심심하진 않게 시간이 지나가곤 있었다.
그러기를 한 시진 쯤.
멀리서 동자승의 안내를 받으며 약관의 젊은 유생 한 명이 장건에게로 다가왔다. 등에 나무로 만든 상자형태의 서궤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곽모수와 똑같았다.
“장 소협.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은 천문서원에서 온 한유라고 합니다.”
선해 보이는 인상의 한유가 서궤를 내려두고 장건에게 읍을 했다.
장건도 마주 합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다짜고짜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소협께서 저희 서원의 서책을 보관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아, 여기요.”
장건은 천문비록을 내주었다.
한유는 크게 안심한 표정으로 천문비록을 받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문비록을 비단에 싸 소중하게 서궤에 넣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야 뭐…….”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싶더니 한유가 물었다.
“내년 초 원소절(元宵節)을 기해서 금분세수식을 하신다구요.”
“네.”
“저희 서원에서는 사실 장 소협이 새로운 계파로서 무림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마 강호의 모든 분들이 저희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제게는 별로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어요. 결정하고 나니까 전 마음이 더 편한걸요.”
“그렇군요. 강호에 장 소협같은 분도 계셔야 하겠지요.”
한유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람되오나 아직도 원장 사백님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계셨다면 마지막 가신 모습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갔을 땐 벌써…….”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한유가 손으로 몇 번이나 사래질을 하며 말했다.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나 봅니다. 이제 강호의 약속대로 저는 천문비록을 되찾아주신 장 소협께 한 가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드릴 겁니다. 질문하실 게 있습니까?”
장건은 검성을 생각하다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한유가 재차 독촉했다.
“제게 어떤 정보를 요구하시든 간에 전 한 가지의 답을 해드릴 겁니다. 원하시는 질문이 있으십니까?”
“전…….”
장건은 원래 평범해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하려 했다. 완전히 평범해지지 못하더라도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한유가 한 얘기들을 듣다보니, 오래전부터 장건이 기억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외면한 채였던 그 질문이 떠오르고 말았다.
“우움.”
장건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명검에 대해 알고 싶어요. 검성 할아버지의 공명검을 피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거요. 혹시 그런 방법이 있나요?”
공명검!
사실 이제 와서 공명검을 상대할 일 같은 건 없을 테지만 그것 때문에 심마에까지 들었던 장건으로서는 여전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유는 뜻밖이었는지 다소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가, 곧 아까와는 다른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사실은 원장 사백님께서 출타하시기 전에 절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요.”
“네? 뭐가요?”
“원장 사백님께서는 소림사의 진산식 때문에 벌어질 일들을 염려하셨습니다. 특히…….”
한유가 약간 주저하다가 말했다.
“제자를 잃은 검성 어르신이 어떤 행동을 할 지……. 그분이 세간의 평가와 달리 욕심이 많아서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것 같다는 게 원장 사백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곽모수의 우려는 결국 본인에게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하나 아직도 검성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였다. 그의 종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이유를 모른 채 묻힐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유가 다시 물었다.
“소협께서 보신 검성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상처를 입었던가요?”
“아뇨. 그렇게 큰 상처를 입진 않았던 것 같아요.”
“역시 그렇군요.”
한유가 씁쓸하게 말했다.
“원장 사백님께서 말씀하시길, 검성 어르신의 공명검이 최종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결코 당신을 해칠 수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원장 사백님은 패하셨지요.”
한유는 장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무적(無敵). 검성 어르신이 이미 공명검의 최종 경지에 올라 공간을 초월했다면……, 대적할 방법은 없습니다. 최종 경지의 공명검은 본원에서도 수백 년간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에서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한유의 말을 들은 장건은 오래 침묵하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공명검을 상대할 답이 없다는 얘기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예?”
장건은 ‘아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금분세수를 해서 은퇴하게 된 게 다행이라구요. 적어도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팔을 자르겠다!고 나타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영문을 모르는 채 눈을 깜박거리던 한유가 그제야 이해하고 웃었다.
“하하, 그렇군요.”
한유가 서궤를 짊어지고 읍을 했다.
“그럼 소생은 이만 가봐야 할 듯합니다. 다시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장 소협의 앞날에 큰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장건도 공손하게 마주 합장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공명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단 얘기를 직접 확인하고 나니 어쩐지 은퇴를 결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유장경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어사부(御使府)의 청사에서 종암을 만났다. 종암은 막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길이었다.
유장경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황상은 어떻소?”
“좋지 않네.”
종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의 두려움이 극에 달했네.”
유장경이 혀를 찼다.
“큰일이군. 하루라도 빨리 이번 일을 끝내야겠소.”
무림인들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던 황제였다. 그런데 황궁의 지척에 무림 최고의 고수들이 죄다 몰려들어 있으니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언제 반역도로 돌변하여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황제는 매일 같이 종암과 유장경을 불러들여 독촉을 해댔다.
유장경이 다시 물었다.
“그럼 북해에서 부탁해온 일의 윤허는? 허락하셨소?”
“그 자리에서 바로 인가하여 주셨네.”
유장경의 눈빛이 번쩍였다.
“호오, 드디어! 이제 때가 왔구려.”
종암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걱정되시오?”
“걱정?”
종암은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강호에 대혼란이 올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이네.”
“틀렸소.”
유장경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종 형은 아직도 자신이 강호인인줄 아는구려! 이것은 천자(天子)의 입장에선 혼란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단계인 거외다.”
“좋을 대로.”
“종 형!”
종암은 불편한 얼굴의 유장경을 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걱정하지 말게. 일이 끝날 때까진 결코 황상의 뜻을 거스르는 일 따윈 없을 걸세.”
유장경은 종암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가만히 조소를 지었다.
“나도 종 형을 믿소. 그러니 절대 내 믿음을, 황상의 믿음을 배신하지 마시오. 이 일이 끝나면 종 형의 고향에서 같이 밥이나 한 끼 합시다.”
종암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장경의 말투에서 오늘따라 유독 비린내가 심하게 느껴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