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87
제8장 개회제삼천의 날
원호는 팔 리나 되는 허공잔도를 날듯이 뛰어 소림사 경내에 도착했다. 과연 일주문 아래에 몇 명의 관병들이 소림사를 찾아온 무림인들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계속 실랑이가 벌어지는 터라 나한승들이 중간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원호는 계단을 내려가 곧바로 관병들을 다그쳤다.
“내가 여기 주지요. 대체 무슨 일이외까?”
아무리 명령을 받은 관병들이라도 소림사의 방장인 원호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약간 주눅 든 말투로 대답했다.
“본관들은 명을 받은 대로 이행할 뿐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호가 다시 물었다.
“책임자가 누구요.”
관병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연화사로 가 보십시오.”
원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는 무림인들을 향해 사죄했다. 그 와중에 서가촌에서 온 각대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초조한 얼굴로 몇 번이나 사조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얘기가 끝나자 원호는 곧 경공을 펼쳐 연화사로 달려갔다.
산문 밖까지 나가 산을 반 바퀴 돌아야 하기 때문에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원호가 연화사에 도착했을 땐 벌써 신시(申時)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연화사 쪽에서 삼황채로 오르는 길에는 여전히 소림사로 가지 못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허공잔도를 지나려면 어느 정도의 경공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다린 듯했다.
“방장 대사님!”
원호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달려온 이들은 양소은이었다.
“방장 대사님! 저 관병들이 길을 막고 안 비켜줘요!”
“나도 알고 있단다.”
네 소저들이 모두 오고 장건의 부친인 장도윤까지 원호에게 와 인사했다.
“나무아미타불. 장 대인도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이윽고 다른 이들도 원호에게 몰려와 어찌 된 사태인지 물었다.
원호가 사람들을 향해 반장하며 말했다.
“지금 제가 가서 알아볼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호가 왔으니 그나마 사태에 진전이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원호는 앞을 막고 있는 관병들을 향해 갔다.
“책임자를 만나고 싶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던 듯, 관병 한 명이 원호를 안내했다.
머잖아 연화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앞쪽에 말과 마차들이 있었고,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다수의 관병들과 그보다 좀 더 고위의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원호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연화사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명의 노인이 병사들의 사이로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둥그런 관모를 썼고 이무기를 금빛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풍성한 망룡포(蟒龍袍)를 입고 있었다.
백발에 하얀 눈썹이었으나 묘하게도 수염 한 올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의 노인이다.
하나 눈빛만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원호를 보는 눈은 분명 웃고 있었으나 섬뜩할 정도로 눈초리가 매서웠다.
“천하제일대소림사의 주지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심히 죄송하옵니다. 하나 소관 또한 언제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사오니 이것도 인연이 아니오리까?”
가늘고 뾰족한 억양은 마치 여성 같고 말투도 흔히 사용하는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양손을 서로 반대쪽 소매에 깊이 넣고 읍을 하며 허리를 숙이는데 절이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깊다.
원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반장으로 답했다.
“나무아미타불. 공사가 다망하신 정 독주(督主)께서 이곳까지는 어찌 왕림하셨습니까?”
그 말에 읍을 하던 중인 노인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웃음을 띠었다.
당대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실세 중의 실세, 흠차총독동창관교판사태감(欽差總督東廠官校辦事太監).
바로 동창의 우두머리 정안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가 소림사의 지척에까지 왕림한 것이다!
정안은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재차 읍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귀사에 많은 실례를 하였사옵니다. 하나 이가 모두 귀인의 안전을 위함이니 양해해 주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누가가 보면 정안이 굽실거리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것은 단지 오랜 세월 몸에 익은 동작일 뿐이다.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오만한 눈빛을 보면 속생각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원호는 정안의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동창의 일을 제가 일일이 들을 순 없는 일이겠지요. 하나 폐사(弊寺)에도 내일까지 중요한 행사가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을 마냥 내칠 수도 없으니 독주께서도 폐사의 입장을 보아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안이 빙긋 웃었다.
“춘절에 황족이 도관과 사찰에서 제례를 올리는 건 원호 대사님도 익히 아시는 일이 아니옵니까?”
“춘절이 지난 지 이미 오래고 모레면 원소절입니다.”
“황궁의 사정이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지요. 저희는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옵니다.”
원호가 슬쩍 눈썹을 찡그리자 정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어제부터 연화사에서 경리 공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중이고, 제례가 끝날 때까지 공주님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 제가 받은 명이옵니다.”
원호의 눈빛이 변했다.
“정 독주.”
말투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안은 수십 년 황궁에서 살아남은 노환관답게 속으로 흠칫했을 텐데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다.
“말씀하옵소서.”
원호는 웃음기 하나 없이 정안을 노려보았다. 불가 기공이 은연중에 흘러나와 눈동자 안에서 금빛이 흐른다. 원호가 나지막하지만 살기 어린 투로 말했다.
“인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소이다.”
동창의 수장인 정안도 일반적으로 상상 못할 고수다. 쉽게 위축하지 않고 웃는다.
“흘흘.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성격이 범 같으시옵니다.”
“범이 아니라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오. 본사를 핍박한 것도 모자라 제자를 살해하려 하고 이제는 강호 무림 전체의 행사까지 방해하는 중이잖소? 장담컨대 생각보다 많은 걸 잃게 되실 거외다.”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냐는 말도 아니고, 직접 던지는 명쾌한 협박이었다.
그 말에는 정안도 조금 놀란 듯했다.
“소관은 나이가 들어 강호의 행사에 많이 무지하옵니다. 하나…… 생강도 늙은 생강이 맵고 늙은 여우에게는 힘보다 꾀가 있는 법입지요.”
“통행금지를 풀어주시겠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한데 흉악한 사내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연화사 앞을 아무 제지 없이 오간다면, 경비를 맡은 소관의 체면은 물론이고 공주님도 많이 불안해하실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본론을 말씀하시오.”
“연화사에서 삼황선원으로 오르는 길은 계속해서 폐쇄할 것이옵니다. 대신 내일 소림사에서 가는 길은 열어드리지요.”
위험한 허공잔도로 팔 리나 되는 길을 갈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경공을 할 줄 알아야 하니 실제로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원호는 그나마 감사해야 했다. 어쨌거나 천룡검주는 들어올 수 있을 게 아닌가.
“고맙소.”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정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삼황선원의 입장을 소관의 부하들이 통제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원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삼황선원에서 연화사까지 내려오는 길도 있지 않사옵니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흉흉한 세상이옵니다. 입장할 강호인들의 병장기를 소관이 잠시 맡아두겠다는 말씀이옵니다.”
“금분세수식에는 십대 문파와 오대 세가의 선배님들도 계시오. 그분들에게 병기는 큰 의미가 없소.”
“우리 두 사람 모두 그런 조치가 아무 필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얘기옵니다. 하나 제가 모시는 고귀한 분이 보시기엔 또 다른 법입지요.”
“명분 말이오?”
“그렇지요. 명분이 중요한 거지요.”
“으음…….”
원호가 고민하자 정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심려 마시옵소서. 천룡검주라 했던가요? 그이의 병장기는 그대로 들려 보내도록 하겠사오니 금분세수식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하등의 불편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원호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동창이 직접 나선 행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한 거래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 ☆ ☆
그날 밤.
연화사의 깊숙한 내원의 정자에 몇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동창의 독주인 태감 정안과 면사인,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 세 사람이다.
정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면사인을 보고 말했다.
“자신은 있으시겠지요? 일을 이리 크게 벌려놓고 이번마저도 실패한다면 황상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면사인이 코웃음을 쳤다.
“이쪽은 걱정 말고 그쪽이나 신경 쓰세요. 내일 확실히 정오 직후에 삼황선원을 중심으로 신속히 천라지망을 펼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정안이 허리를 굽혔다.
“물론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 경리 공주님까지 모셔가며 이 난리를 피운 것 아니겠사옵니까. 혹시 모를 변수를 없애기 위해 모든 상황을 저희의 통제 하에 두었지요. 첫날 둘째 날의 길을 모두 봉쇄하였으니 내일 모든 일정이 치러지는 것이옵지요.”
“바로 어제, 검성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어요. 만에 하나 검성을 놓친다면 큰 화가 될 거예요.”
“내일 정오, 종 어사와 유 부장께서 일천 금위군과 이천 궁수, 일만의 도부수를 이끌고 천라지망을 펼치면 검성은 물론 개미 새끼 한 마리 삼황선원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히 천라지망이 펼쳐질 때까지 검성을 비롯한 삼황선원의 무림인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지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면사인이 끄덕이더니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흐흐. 자신 있느냐고?”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정원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이가 걸어 나왔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노인이 정원의 한 가운데에 있는 연못으로 걸어갔다. 먹이를 주려는 줄 알았는지 연못의 잉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인은 품에서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종이로 접은 봉지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봉지를 펼치자 칙칙한 색의 분말가루가 나타났다. 노인이 새끼손가락의 뭉툭하고 긴 손톱으로 분말가루를 쿡 찍어서 연못 위에 뿌렸다.
“나기니분(拏枳儞粉).”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적은 양이라 옆에서 보는데도 무엇을 뿌리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풍덩풍덩!
각양각색의 잉어들이 먹이를 서로 먹겠다고 마구 수면위로 입을 뻐끔대며 튀어 올랐다. 잠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이 가만히 잉어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자 정안이 말했다.
“남방 독곡(南方 毒谷)의 사갈마존(蛇蝎魔尊). 사천 당문 독선과 쌍벽을 이루는 귀하의 독술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상대는 최고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옵니다.”
“흐흐흐.”
돌연 사갈마존이 손을 휘둘렀다.
퍼드득!
수면 위로 튀어 올랐던 잉어 한 마리가 사갈마존의 손에 쥐어지며 펄떡댔다.
사갈마존은 다른 손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리곤 한 손으로 뚜껑을 열어 한 방울의 액을 연못에 떨어뜨렸다.
“공반나수(栱畔拏水).”
통, 무색 투명한 액이 연못에 떨어지고 나서도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는 듯싶었다.
한데 갑자기 숨 한 번 들이쉬기도 전에 갑작스레 잉어들이 배를 뒤집기 시작했다. 연못을 가득 채웠던 수십 마리의 잉어들이 호흡을 잃고 수면에 둥둥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연못이 부글거리는 거품으로 가득해졌다.
사갈마존은 사악하리만치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남방에서만 서식하는 일천 독충과 삼천 독초에서 취한 독으로 본인의 최대 역작이지. 나기니분과 공반나수, 하나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나 이 혼루쌍독이 합쳐진다면 그 어떤 독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설사 독선이 복귀한대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야.”
가공할 살상력에 면사인이 낮은 소리로 감탄했다.
“과연 사갈마존!”
사갈마존이 클클대며 웃었다.
“이미 나기니분은 며칠 전 삼황선원 내에 살포를 마쳤다. 흐흐흐. 그러니까 이 한 병의 공반나수만 있으면 삼황선원에 있는 수백 명의 인간들은 한 줌 고혼(孤魂)이 되고 말겠지.”
정원이 마치 여인처럼 호호 하고 웃었다.
“든든하군요. 사갈마존의 독과 금의위의 천라지망이 합쳐진다면 지옥의 야차라도 그 둘을 모두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 모든 일이 주화입마로 정신이 나간 검성이 벌인 짓으로 알게 되겠지요.”
면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엣가시인 전승자와 검성, 우리의 말을 거역한 천룡검주! 그리고 수백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죽는다면, 강호 무림은 우리의 뜻대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 거예요!”
퍼드드득!
사갈마존의 손에 들려 살아남은 유일한 잉어가 몸을 흔들어댔다.
사갈마존은 길다란 혀로 잉어의 비늘을 핥았다.
“오늘 야참은 잉어찜이 매우 좋을 것 같군.”
잉어찜은 대개 만찬의 마지막에 나오는 요리다.
사갈마존은 이번 일을 만찬으로 비유하여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 ☆ ☆
원호는 깊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으음…….”
내일 금분세수식의 마지막 날을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과연 동창이 삼황선원으로 오르는 길을 봉쇄한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무엇보다도 정안의 음습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만일 동창에서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다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아마도…….
원호의 미간이 주름살을 깊게 만들며 찡그려졌다.
“장건?”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부는 계속해서 장건을 노리고 있었다.
비록 무림맹의 맹주 자리가 걸린 비무가 예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무림을 좋아하지 않는 관부에서 사정을 봐줄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최고의 고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관부나 동창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벌인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호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으으음.”
원호는 고뇌하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새벽녘에 동이 터올 때 즈음에야 마침내 결심했다.
“그래. 뒷일이야 어찌되었든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건이를 무사히 내보내는 게 우선이다. 그게 과거 내가 건이에게 저지른 과오를 사죄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고.”
원호는 나한승을 불러 급히 무언가를 이른 후 초조하게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 ☆ ☆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금분세수식의 둘째 날도 무난히 지나가고 셋째 날이 찾아왔다.
강호가 주목하고 있는 날이라 보기 무색할 만큼의 고요함이었다.
하나 그것이 태풍전의 고요함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대체로 금분세수식의 마지막 날이 중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번만큼 중요한 날은 아마도 없었을 터다.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무림맹주의 탄생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물론 그중 대부분은 연화사로 갔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시 소림사로 돌아가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소림사로 간다고 해서 허공잔도를 경공으로 통과할 자신도 없었던 것이다.
허공잔도를 넘어서 찾아온 참관객들도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는데, 미리 소림사의 승려에게 얘기를 듣긴 하였으나 자신의 병기를 내려두어야 한 탓이다.
삼황선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인 구름다리에서 환관 둘이 무인들의 무기를 수거했다.
그래도 삼황선원까지 도착해 금분세수식의 개회제삼천에 참석한 이는 모두 백여 명이나 되었다.
장건은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힐끗힐끗 보았다.
소왕무와 대팔은 속가 제자들의 대표로 참가했는데, 그중 대팔이 장건을 보고 히죽 웃었다.
“누굴 찾어?”
하지만 벌써 누굴 찾는지 안다는 투다.
장건은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어, 그냥.”
“저기 소저들이 온다!”
대팔이 문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장건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누가 오는데?”
“……안 보고도 알아?”
“응. 발걸음 소리나 기운이나, 하나도 안 느껴지는걸.”
“재미없는 놈.”
소왕무가 대팔을 보고 혀를 찼다.
“건이가 속겠냐. 지금 최고로 민감할 땐데. 쯧쯧, 띨띨하긴.”
대팔이 소왕무에게 눈을 부라렸다.
“너나 잘해. 무서워서 오줌 질질 싸기 일보 직전인 주제에.”
아닌 게 아니라 워낙 높은 절벽을 가로질러 온 탓에 소왕무는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임마,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아냐. 완벽한 게 있어.”
“어?”
“넌 완벽하게 부족한 놈이야. 흐흐.”
“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미친놈아.”
소왕무와 대팔이 투닥대는 걸 보고 장건이 웃었다. 소왕무와 대팔도 투닥대기를 멈추고 장건을 보았다.
“오늘 잘 해라.”
“집에 가더라도 우리는 계속 친구인 거다, 알지?”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소왕무가 말했다.
“그리고 소저들은 오늘 못 올라올 거야. 아까 미리 연락 받았어.”
장건이 조금 섭섭해하는 표정을 짓자 소왕무가 달랬다.
“무공을 못하는 소저가 한 명 있으니까, 그래서 다들 같이 아래에서 기다리겠대. 네 아버님도 오고 싶어 하셨지만 워낙 오는 길이 위험하니까, 소저들이 말동무를 해드리겠다고.”
“아아…… 고마워.”
부친이 왔다는 얘기는 원호에게 들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신경 써주는 소저들이 고마운 장건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양소은과 백리연, 제갈영 셋은 장건의 금분세수식에 참가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경공을 할 수 없는 하연홍이 그냥 남아 있겠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남았다. 장도윤과 있으면서 혼자 점수를 딸까 봐 나머지 셋도 불안해진 것이었다.
어쨌든 장건은 섭섭함을 잊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우린 가서 손님들 시중을 들어야 하니까, 이따 보자.”
“다치면 안 된다!”
소왕무와 대팔은 일을 하러 가고 장건은 다시 혼자 남았다.
이제 올 사람들은 거의 다 온 듯, 문으로 들어서는 이가 뜸해졌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모이자 경내가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졌다. 이리저리 인사를 하거나 향후 강호의 미래에 대해 논하거나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경내가 조용해졌다.
수화문을 통해 한 명의 영준한 청년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저길 봐!”
“천룡검주다.”
“저자가 그 유명한 남부의 수문장인가?”
바로 장건을 상대하기 위해 찾아온 천룡검문의 고현이었다.
고현은 수수하고 단정한 청의를 입었는데 허리에는 예의 낡아 보이지만 새 것처럼 번쩍거리는 묘한…… 고검을 찼다.
그의 뒤에는 무당의 청우와 육검문의 삼상비 석흠이 대표로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병기를 맡겨서 빈손이다. 희한하게도 늘 같이 붙어 다닌다던 태상은 보이지 않았다.
고현은 당당한 태도로 걸어 들어왔다.
고현이 주변에는 눈길 하나도 주지 않고 식을 준비 중인 장건의 앞으로 다가간다.
그러곤 장건과 마주섰다.
사람들이 숨죽여 둘을 지켜보았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담담한 눈으로 보는 데 그것이 더 보는 이들을 긴장케 했다.
마침내 고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첫마디는 인사가 아니었다.
“한 달 걸렸소.”
지켜보던 사람들이 의문을 떠올렸다.
“날을 갈아 원래대로 만드는데 걸린 시간이오.”
장건은 고현을 빤히 보았다.
예전에도 강한 고현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달랐다. 훨씬 여유롭고 온몸에는 기이한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언뜻 무방비로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한데, 실제로는 빈틈이 전혀 없는 그런 자세였다. 여차하면 바로 출수할 수도 있는 모양새다.
‘어?’
장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분명히……!
그때 고현이 말했다.
“대대로 내려온 본문의 보검을 훼손한 죄, 오늘은 반드시 빚을 받아갈 것이오.”
원호가 끼어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아직 식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자리로 돌아가 주시게나.”
고현은 원호를 힐끗 곁눈질로 보더니 참관객들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장건은 고현을 잠시 더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원호가 장건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긴장하지 말고.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집에 돌아가야지?”
“예, 사백님.”
장건은 심호흡을 했다. 아까까지는 떨리지 않았는데 막상 고현을 보고나니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고현의 무위에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그가 보인 익숙한 기세가 장건을 찜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댕― 댕―.
징소리가 울리고, 사시가 되었다.
의식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장건은 지난 이틀과 마찬가지로 향을 태우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믿을 수 없이 조용한 가운데 치러진 의식이었다.
장건은 차분히 의식을 마치고 돌아섰다.
모두가 바로 직후의 일을 기대하며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원읍이 군웅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강호의 율법에 따라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과거의 일로 은원을 따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본사의 제자 장건 또한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강호의 일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이를 천지신명 앞에 고하며, 과거의 은원을 청산코자 하는 분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고현에게로 향했다.
이것은 약속된 대결이다.
금분세수식을 빙자한 차세대 천하제일을 가르는 대결.
때문에 장건은 굳이 원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장건에게 금분세수식은 은원을 해소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고현에게야 장건이 원수라 할지라도 장건에게 고현의 존재는 그저 장건을 괴롭혔던 다른 무인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장건에게 고현은 장건을 괴롭혔던 무인들 전체를 상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림맹주. 강호 무림을 대표하는 자.
장건은 이 기묘한 통과의례를 반드시 무사하게 지나고 싶었다.
그래야 멀쩡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장건은 고개를 들어 청명하게 맑은 겨울 하늘을 보고, 다시 고개를 내려 고현을 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고현과 눈빛이 마주쳤다.
이윽고 고현이 장건을 보며 막 앞으로 나오려 하는데, 갑자기 그 둘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지신명께 맹세코! 장 소협과 나! 둘 중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멀쩡히 걸어 나갈 수 없을 것이오!”
쩌렁거리는 고함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고현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수려한 외모였으나 어쩐지 단정치 못한 복장으로 조그마한 소녀와 문으로 들어서는 약관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영웅건으로 질끈 동여매더니 장건을 향해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장 소협! 나 문사명이 화산의 명예를 걸고 본문의 검을 찾으러 왔소이다!”
화산파의 문사명이?
참관객들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술렁거렸다.
웅성웅성.
참관객들 중에는 문사명이 실종되었다가 오늘에야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 이도 있었고, 또 문사명이 검왕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감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현과의 대결이 기 예정된 마당에 불시 난입한 상황이니……
다들 주관측의 입장인 소림사가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읍이 나섰다.
“문 소협.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순서가…….”
문사명은 원읍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대사께서 은원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 앞으로 나서라고 하여 나섰는데, 왜?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게…… 고 대협과의 비무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소.”
“알지도 못하는 내정 따위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대사께선 방금 천지신명 앞에서 고한 말을 스스로 뒤집을 셈입니까?”
“그, 그건…….”
“아무렴 됐고. 대사는 몰라도 난 내가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한 건 지켜야겠소. 비켜나시오.”
원읍은 난감했다. 천지신명을 걸고 한 말이라 함부로 취소할 수도 없었다.
고현이 조금만 더 빨리 대답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고현이라고 일이 이리 될 줄은 몰랐을 터였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소.”
문사명이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었다.
원읍도 보통 무인은 아닌데 문사명의 살기를 받는 순간 몸이 오싹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검성의 제자가 이, 이 정도였나?’
소림사의 원 자 배 무승이 약관의 문사명에게 기세에서 밀리고 있다!
원호는 원읍이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대경하여 소리쳤다.
“무슨 짓인가! 어서 살기를 거두게!”
참관객 중에서도 평소 엄하기로 이름난 대광문(大光門)의 쌍검수사(雙劍秀士) 권문이 문사명을 손가락질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린 후배가 여기 많은 선배들 앞에서 너무 거드름을 피우는구나!”
문사명이 발끈해서 쌍검수사 권문을 쳐다보았다.
“명백히 따지자면 이곳에서 나의 배분을 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오!”
권문이 생각을 해 보고 흠칫했다.
문사명은 검성의 제자. 검성 세대의 무인들이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문사명의 배분은 매우 높았다.
하나 권문은 물러서지 않았다.
“배분에 관한 나의 말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겠다. 하나 고 대협이 이미 일전에 장 형제와의 대결을 강호에 선포한 바 있고 이번 대결이 무림맹의 설립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바, 이제 와 그대가 난입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는가!”
문사명이 검지와 중지를 붙여 검결지를 쥔 채로 권문을 가리켰다.
“화산의 검을 되찾는 데 있어 강호의 그 어떤 대소사(大小事)도 먼저일 수 없음을, 마지막으로 주지시켜 드리리다.”
“오만하게 굴지 마라! 무림맹 설립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문운(門運)을 걸고 있는데……!”
그 순간.
찌익!
얇은 옷감을 찢는 듯한 소음이 울리며 문사명의 검결지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는 검기가 발출되었다.
거의 석자 이상 발출된 검기가 권문의 목젖을 노리고 있었다.
참관객들은 크게 놀랐다. 검에서 검기를 발출하는 것과 맨손에서 발출하는 것은 수준이 다르다.
“맨손으로 검기를!”
과연 검성이 화산의 배분을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제자로 받아들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쌍검수사 권문은 닿지도 않았는데 목젖이 따끔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말 한 마디만 더 해도 목이 꿰뚫릴 것 같았다.
“으음……!”
권문은 신음 소리를 뱉으며 문사명을 노려보았다.
문사명은 아랑곳 않고 원호와 참관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경고하오. 소림사든 그 누구든 상관 않겠소. 정 내 앞을 막고 싶으면 목숨을 거시오.”
원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문사명의 무위는 인정할 만하나, 맨손으로 검기를 부린다고 겁먹을 원호가 아니다. 오히려 문사명의 치기 어린 행동이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문 소협, 그간 무공이 일취월장하였구려. 하나 지금은 공력을 거두시오. 본사의 행사에서 계속 난동을 부린다면 부득이 손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곤을 든 나한승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십수 명이 담에서부터 마당을 둘러싸듯 하고 있다.
문사명은 뜻한 대로 되지 않자 서서히 감정이 격해졌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문사명의 눈에 장건이 들어왔다. 장건은 ‘문 소협이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문사명은 마치 장건이 자신을 우습게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장건은 문사명을 가만히 보다가 등 뒤에 맨 검을 풀었다.
매화나무가 승천하는 용처럼 검집을 휘감아 돌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화산의 삼대 보검 중 하나인 소요매화검이다.
장건은 그 검을 문사명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지켜보던 참관객들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곧 일부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건의 입장에서야 달라니까 준 것이지만, 사실 검을 받으러 왔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다. 검을 맡겼을 때에는 실력으로 이기고 다시 받아가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장건이 검을 그냥 내밀었으니 그건 둘 중 하나다. 자기가 문사명을 이길 수 없음을 시인하고 되돌려주는 것이거나 혹은 문사명이 아무리 해 봐야 자기를 이길 수 없으니 불쌍하다고 그냥 가져가라는 것.
물론 장건의 담담한 표정은 후자라 생각하게 만든다.
“큭큭.”
“끌끌끌.”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사명은 조롱을 받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조금씩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순식간에 문사명의 의복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찌익!
바닥을 평평하게 하여 덮은 청석판에 금이 간다.
문사명이 돌발 행동을 할 거라 감지한 원호가 외쳤다.
“제압하라!”
나한승들이 달려들었다.
문사명의 눈이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진각을 밟으며 포효했다.
꽝!
“나를 얕보지 마라!”
무수한 돌들이 비산했다.
다가서던 나한승들은 곤을 휘둘러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쳐냈다.
타닥, 탁.
그러곤 다시 문사명을 압박하려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엇!”
문사명이 양손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단전 앞으로 모았다. 둥그런 공을 손으로 감싸 쥔 모양새다. 강렬한 공력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의 주변에 떠오른 돌멩이들이 퍽퍽 쪼개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날카로운 칼로 가르는 것 같다.
“조심해!”
나한승들이 재빠르게 방비하며 뒤로 물러났다.
문사명의 단전 바로 앞에서부터 날카로운 검기가 둥글게 모아졌다가 그의 손짓에 따라 튕겨 나가고 있었다. 돌멩이가 순식간에 잘려나갈 정도니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순식간에 문사명의 반경 이 장 여가 둥그런 모양으로 수없이 난도질 되었다. 그 반경 끝에는 권문이 있었다.
“아앗!”
권문이 급히 검을 뽑으며 호신기를 펼쳤고 원호가 쾌속한 신법을 써서 날아왔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고현이 움직였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고현이 권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현이 검집째 뻗어 가볍게 일검을 그었다.
따당!
권문에게 날아들던 문사명의 반원검기가 고현의 검파(劍波)에 가닥가닥 부러졌다. 부러진 검기가 공기 중에서 빠르게 사그라졌다.
“젊은 친구가 성격이 급하군.”
고현은 문사명의 눈자위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걸 보았다.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져 붉어지는 건 그럴 수 있으나 눈자위에 붉은 기운이 돈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다.
“태상?”
고현의 눈이 일그러졌다.
태상과 같은 상태를 보이는 것이 우연이 아닌 듯 보였다!
고현이 검을 내렸다.
“문 소협, 우리 잠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
쾅!
문사명이 다시 진각을 밟았다. 폭발적으로 신법을 펼치자 문사명의 몸이 길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서 흐르는 붉은 기운이 실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문 소협!”
고현이 아차 하는 사이에 문사명은 장건에게 쇄도했다.
쨍!
귀청을 울리는 예리한 쇳소리가 들리더니 문사명이 오른손으로 아래를 찍어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장건은 급한 김에 소요매화검을 위로 들어 막았다. 문사명이 누르고 있는 검집의 중간에서 끽끽대며 불꽃이 튀었다. 문사명의 장심에서 튀어나온 검기 때문이다.
“건아!”
소림사의 승려들과 소왕무, 대팔이 놀라서 외쳤다.
사실 그들만큼이나 장건도 속으로 꽤나 놀란 터였다.
‘왜 이렇게 빠르지?’
문사명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어지간하면 장건은 막기보다는 피하는 걸 선호하는데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순간보다 빠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 전 약하게 검기를 뿌렸던 건 눈속임이었던 듯 지금의 검기는 훨씬 강력했다.
게다가 문사명의 공격 형태가 일반적인 검법과 상이(相異)하다. 아마도 검을 쥐지 않고 검기를 뽑아내어 쓰기 때문에 방향이나 궤도를 추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았다.
“죽인다…….”
문사명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건을 노려보며 말을 내뱉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할 만큼 지독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장건은 울컥했다.
“나는 죽을 만큼 잘못한 게 없는데, 어째서죠? 어째서 그렇게 다들 나를 죽이려 드는 거죠?”
그게 싫어서 강호 무림을 떠나겠다고 하는 건데도…….
장건은 서럽기까지 했다.
문사명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죽어야…… 사부님이 나를 돌아봐 줄 거야…….”
문사명은 더듬거리다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죽어!”
장건이 대꾸도 하기 전에 문사명이 은영각(隱影脚)으로 장건의 낭심을 올려 찼다. 장건이 몸을 회전하며 옆으로 피하자 문사명이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퍼퍼퍽!
장건의 뒤를 검기가 좇으며 거푸 바닥을 찍었다. 돌 부스러기가 마구 휘날리는 가운데 문사명이 왼손으로 검결지를 쥐어 허공을 훑었다.
다섯 개의 검기가 서로 엇갈려 쏟아졌다.
장건은 불영신보와 천종미리보를 동시에 운용하여 촘촘하게 찔러오는 검기를 피했다.
쫘악!
바닥에 수많은 검흔이 생겨났다.
“그만두라고 했잖아요!”
문사명은 장건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장건은 기의 가닥을 뽑아 들었다. 주먹을 퍼붓듯 기의 가닥들이 뭉쳐서 문사명을 타격했다.
문사명은 보이지 않지만 기의 파동을 느끼고 흠칫 놀라 쌍장을 뻗었다. 전면에 검기의 창살이 튀어나와 그물망처럼 장건의 기의 가닥을 뒤덮었다.
퍼퍼펑!
문사명의 전면에서 폭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장건은 문사명이 이리 쉽게 기의 가닥을 막아 낼 줄 몰랐으나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장건이 찰나의 순간 거리를 벌린 후 원읍에게 물었다.
“지금 시작해도 되는 거예요?”
원읍은 바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아직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상황이어서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어, 음…….”
문사명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재차 장건을 공격해갔다.
예리한 은빛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장건을 반으로 쪼개려 든다. 싸움은 둘째 치고 치명적인 살초만 전개하는 문사명의 태도가 장건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씨, 진짜!”
장건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내공은 배로 늘었고 신체는 활력으로 가득하다. 누구와 싸워도 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식순이라던가 절차에 어긋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장건은 날아오는 문사명의 검기에 맞서 공력을 일으켰다. 발밑에서부터 소용돌이가 일면서 장건의 옷이 팽팽하게 부풀기 시작한다.
그때 문사명이 퍽 소리와 함께 갑자기 옆으로 튕겨졌다.
쿠당탕탕!
문사명은 바닥에 두 번이나 튕기면서 나가떨어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크윽!”
문사명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옆구리를 잡고 고현을 노려보았다.
고현은 우장을 쭉 뻗은 채였다가 천천히 팔을 회수했다.
“장 소협을 쓰러뜨리는 건 나요.”
고현이 문사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문 소협은 거기서 지켜보면서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소.”
아닌 게 아니라 문사명은 한 대를 크게 얻어맞고 확실히 진정이 된 상태였다. 눈가에 어렸던 붉은 기운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가라앉는가 싶던 붉은 기운이 다시 살아났다.
문사명이 살기를 내뻗으며 고현에게 윽박질렀다.
“나를 막는다면 귀하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오!”
“음.”
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문사명의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금분세수식은 완전히 난리통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주관하는 입장에서 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안절부절이었다.
하지만 최고수들은 신이 났다.
“지금 검기 다루는 것 봤냐?”
“기가 막히는군.”
“살기가 너무 짙어서 그렇지, 허공에서 검기가 막 쏟아지는 거 같은데 저런 건 나도 처음 보네.”
운일도장이 말했다.
“화산파의 검공일세.”
“응?”
“저게 화산파의 검공이라고?”
최고수들과 일부 참관객들이 운일도장을 쳐다보았다. 운일도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매화검법은 오묘한 검초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검기와 강기의 무공이기도 하네. 매화의 꽃송이를 그려내기 위해서 검기와 강기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지.”
“호오, 일리가 있는 말이네. 그래서 저렇듯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렇다네.”
최고수들은 눈을 빛냈다.
“아쉽다, 아쉬워.”
사람이 셋이니 결국은 어떻게 대진이 만들어지든 한 명은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좋은 구경을 전부 할 수는 없다는 게 아쉬운 것이다.
사실 그 생각은 고현도 마찬가지였다.
방해꾼인 문사명을 먼저 쓰러뜨리고 나서 장건과 싸우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은 탓이었다.
문사명에게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문사명도 결코 만만한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숨겨 놓은 재주를 다 펼친 것 같지 않다.
하물며 그 뒤에 싸워야 할 상대가 장건이다. 최고의 몸 상태로 싸워도 이기기 쉽지 않은 마당에 한 번 힘을 빼고 싸운다는 건 지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다.
하여 고현은 최대한 문사명을 설득하려 해 보았다.
“문 소협. 그대와 나,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소. 우리가 다툰다면 그다음에 누구도 장 소협을 상대할 수 없음을.”
문사명은 어째서인지 장건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질 않고 있었다.
“나는 상관없소! 내 앞을 가로막는 자, 몇 번이든 벨뿐이오! 장 소협을 죽일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거외다!”
그 순간 소왕무가 자리를 박찼다.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너무하네! 자기 스승만 믿고 남의 행사에서 난동 피워도 되는 거야?”
문사명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죽여 버릴 테다! 함부로 나의 사부님을 언급하지 말라!”
문사명이 번개처럼 팔을 휘둘렀다.
바닥이 긁혀나가면서 쏜살같이 검기가 쏘아져나갔다. 거리가 대여섯 장은 족히 떨어져 있었는데 순식간에 반이나 좁혀졌다.
“앗!”
소왕무가 소림사의 속가 중에서는 꽤 대단한 실력이라지만 아직 검기도 제대로 뽑아낼 줄 모른다. 시대에서 손꼽히는 무재인 문사명의 검기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소왕무가 몸을 피하려 했는데 문사명의 검기가 세 개로 갈라졌다. 몸을 움직이면 공중에서 동강날 판이다.
“젠장!”
소왕무는 팔 하나 잃을 각오를 하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문사명의 검기는 허공에서 폭발했다.
퍼펑 퍼퍼펑!
연거푸 다섯 번이나 무엇인가에 부딪쳐 폭발하며 세 갈래의 검기가 이리저리 튕겨 나다 소멸했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몇 개의 장력이 검기가 소멸된 자리에 꽂혔다.
퍼퍽!
바닥의 청석이 박살 나며 비산했다.
장력을 쏘아낸 최고수 반오와 북무선생, 원호와 원읍이 어리둥절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얼레?”
“음?”
문사명의 검기를 소멸시킨 건 그들이 쏘아낸 장력이 아니었다.
이전에 벌써 검기를 소멸시킨 기운이 있었다.
문사명이 고개를 홱 돌려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건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문사명이 장건보다 소왕무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그보다 더 빠르게 기의 가닥을 쏘아내 막아 낸 것이다.
장건이 조용히 말했다.
“그쯤 안 하시면 더 이상 못 참아요.”
문사명의 눈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문사명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참으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원호가 그 모습을 보더니 장건에게 말했다.
“문 소협이 살의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여긴 내게 맡기거라.”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제가 상대할 게요.”
“금분세수식을 원활히 진행하는 게 내 소임이잖으냐.”
“하지만 지금 쫓아낸다고 해서 문 소협이 저에 대한 원한을 풀진 않을 것 같아요. 금분세수식이 끝나더라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다닐 텐데요. 그럴 거면 이 자리에서 풀겠어요.”
그 말도 틀리진 않은지라 원호는 잠시 고민했다. 하나 문사명의 살기가 너무 짙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고현이 끼어들어 말했다.
“미안하지만 장 소협이 나보다 먼저 문 소협을 상대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겠소. 나 역시 장 소협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말이오.”
장건은 호기가 치밀었다.
“그럼…….”
좀처럼 양보를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고현과 광기에 사로잡혀 말이 통하지 않는 문사명.
장건이 그 둘을 차례로 보며 말했다.
“둘 다 덤비세요.”
고현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뭐요?”
문사명도 뜻밖의 일이라 주춤했다.
원호가 장건을 나무랐다.
“인석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최고수들과 참관객들도 장건의 패기에 혀를 내둘렀다.
장건은 말 대신 온힘을 다해 단전에서부터 내공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
양쪽 발밑에서부터 일어난 회오리가 장건의 다리를 타고 허리를 돌아 어깨를 감고 머리 위로 올랐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옷이 팽팽하게 부푼 채 심하게 바람에 나부낀다.
바닥이 떨리고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른다.
장건은 거기에서 한 번 더 단전을 쥐어짰다.
“으아아아아!”
퍼퍼퍽!
돌 부스러기들이 떠오르다가 장건이 내뿜는 기파에 부딪쳐 순식간에 모래로 부서진다.
콰드드드득.
장건이 딛고 있던 자리에서부터 둥근 동심원을 그리며 바닥이 두부처럼 뭉개진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최고수들이나 참관객, 소림사의 승려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장건의 존재감을.
둘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장건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최고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 괴물 같은 놈.”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다. 그것이면 족했다.
“후우, 후우.”
장건은 스스로의 힘에 숨이 가빠져 심호흡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력이 충만했다.
고현과 문사명은 자기들도 모르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뜻은 통했다.
저 가공할 힘에 맞설 방법은 하나뿐이다.
원치 않았지만 자연스레 둘의 마음이 합해졌다.
고현과 문사명,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장건을 보았다.
장건이 둘을 향해 손짓했다.
“시작하죠.”
고현은 광채 찬연한 천룡검을 뽑아 들었고 문사명도 양손에서 넉 자도 넘는 검기를 뽑아냈다.
“이야아아앗―!”
낭랑한 기합소리와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장건이 내뿜는 거대한 기의 권역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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