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91
제4장 북해의 무력
“크으……!”
북해 무사들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혼백이 날아간 듯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흑, 흑.”
“끅끅.”
골이 흔들리는 건 둘째 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문원의 사자후에 심장이 멈춰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작은 동물이 커다란 사자의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숨을 죽이는 것과 비슷했다.
저 작은 체구의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북해의 무사들은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문원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돌아가. 나는 스님이 아니라서 살계도 두려워하지 않어.”
하나 그들 역시 척박한 북해에서 살아온 거친 무인들이라 쉽게 문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북해의 무사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가슴을 쳤다.
퍽 퍽!
뼈가 부서져라 쳐댔더니 멈췄던 심장이 겨우 뛰었다. 북해의 무사들은 숨을 몰아쉬며 문원을 경계했다. 싸우자니 부담스럽고 물러나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뒤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오면 내 손에 죽는다.”
광혈풍의 목소리였다.
그가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건 북해의 무사들도 잘 알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이야아앗!”
광혈풍과 삼천 명의 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홉 명의 북해 무사들은 문원에게 달려들었다. 문원은 그들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을 보고 죽기를 각오했다는 걸 알았다.
문원은 공력을 끌어올리며 단단한 궁보의 자세로 한 손은 날을 세워서 앞으로 하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쥐어 뒤로 뺐다.
북해 무사 아홉 명이 삼중으로 문원을 둘러싸고 합격을 시도했다. 번갈아가며 공격해 서로의 빈틈을 메우려는 생각이었는데, 문원은 채 둘러싸이기도 전에 거침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북해의 무사들이 칼을 내질렀다. 문원이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발밑으로 여섯 개의 칼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문원은 천근추의 수법으로 칼날을 밟고 내려섰다. 북해의 무사들이 묵직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칼을 놓쳤다.
카장창! 문원에게 밟힌 칼이 바닥에 뉘어지며 깨지고 부서졌다. 그 순간 문원이 번개처럼 바로 앞에 있는 무사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턱을 차고, 허공에서 제비를 돌아 다음 무사의 어깨를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무사가 양팔을 치켜들어 팔뚝으로 막았으나 우지끈 소리와 함께 팔목이 분질러졌다.
내려서면서는 몸을 낮추어 바닥을 쓸듯 발을 휘저었는데, 거기에 걸린 무사의 발목이 여지없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아악!”
칼을 든 무사가 사선으로 칼을 긋자 폴짝 뛰어 피해낸 후 바닥에 머리를 대고 양손을 짚으며, 발을 위로 올려찼다. 문원의 키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문원의 발은 무사의 사타구니에 걸렸다.
쩍!
“끄아아아아!”
듣기에도 처량한 비명과 함께 무사가 나동그라졌다. 문원은 나동그라지는 무사의 등을 밟고 튀어나가 또 다른 무사를 향해 무릎을 세우고 날아갔다. 표적이 된 무사가 급히 권을 뻗었으나 문원은 무사의 주먹을 무릎으로 밀어버렸다.
우드득! 주먹이 부서지고 손가락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리며 팔꿈치가 반대로 꺾였다. 문원은 그대로 나아가 반대쪽 무릎을 무사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코가 주저앉으며 코피가 한 번에 왕창 쏟아졌다.
피하기에는 너무 재빠르고, 막는 건 소용이 없었다.
문원이 다른 한 무사의 대퇴골을 으스러뜨리며 차버렸을 때 이미 그의 주변에는 한 명의 무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걸음에 한 번의 발길질, 소림의 팔보연환각(八步連環脚)!
단숨에 여덟 명의 무사를 행동불능으로 만들어 버린 문원이다.
“으아아!”
마지막 남은 무사가 칼을 곧추세우고 동귀어진의 일격을 감행했다. 문원은 번개처럼 몸을 틀어 손바닥으로 칼의 옆면을 밀어내며 진각을 밟고, 반대쪽 주먹으로 무사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소림장권(少林長拳).
뻐엉!
북 터지는 소리가 나고 무사는 선채로 일장을 넘게 밀려났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휘리리리.
무사가 들었던 칼이 허공에 떴다가 뱅글거리고 돌며 떨어졌다.
문원은 떨어지는 칼을 잡았다. 그리곤 광혈풍과 삼천의 무사들이 보란 듯 칼을 잡아 부러뜨렸다.
우지끈!
어지간한 공력이 없고서야 휘휘 휘어지기도 하는 철검을 맨손으로 부러뜨리긴 어렵다.
문원이 말 대신 행동으로 경고를 보낸 것이다.
광혈풍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북해의 무사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문원에게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큭큭대고 웃었다.
“중도 아니면서 중놈들의 무공을 중놈보다 더 정확하게 펼치는 노인네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문원은 광혈풍을 째려보았다.
“다른 사람 목숨가지고 장난하는 나쁜 시주에게 해 줄 말이 뭐 있겠니?”
“흐흐, 그런 말을 하는 노인네치고 손속이 지독한데?”
“너가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소림의 무공은 이래.”
“외공을 익혔으니 뼈를 부러뜨리고 살점을 터뜨리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러니까, 요즘 추세 같지 않은 소림사의 무공을 통달한 노인네가 우리 앞길을 달랑 혼자서 막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거지.”
“더 이상 못 간다는 뜻이야.”
잠시 생각하고 있던 광혈풍이 도끼를 빼들었다.
스르릉.
광혈풍의 눈에서 으스스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이제야 알겠다. 소림사의 전대 고수로군. 어쩐지 중놈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싶었지.”
생긴 것치고 눈치가 빨랐지만 문원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냐. 그냥 나 혼자 알아서 밥값 하는 중이야.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거든.”
광혈풍은 손에서 도끼를 빙글빙글 돌렸다.
“젯밥을 혼자 챙겨먹겠다는 장한 생각은 칭찬해주지. 내 그 점을 높이 사서 특히 고통스럽게 패 죽여주마.”
문원이 짜증을 냈다.
“말로 해서 듣지 않는 시주는 꼭 눈앞에서 부처님을 만나야 정신을 차리더라?”
광혈풍이 고함을 질렀다.
“노인장이야말로 눈앞에서 부처를 보고도 알지 못하는구나! 노인장이 있든 없든 소림사가 잿더미가 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광혈풍이 도끼를 쳐들었다.
“전군 공격! 노인장은 신경 쓰지 말고 소림사를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북해의 삼천 무사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일주문을 가로막고 있는 점 하나에 불과한 문원은 금방이라도 파도에 쓸려버릴 것 같았다.
문원의 늘어진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광혈풍이 생긴 건 무식해보여도 보통 영악한 게 아니었다. 한 명씩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면 초조해지는 건 상대일 텐데, 반대로 이러면 심리적으로 밀리는 건 오히려 문원이다.
문원은 허리춤에 손을 댔다가 당겼다.
피리릭, 피리리릭!
가볍게 팔을 흔드는 문원의 손짓에 바람이 날카롭게 베어지는 소리가 났다. 낭창거리는 연검이 이리저리 굽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곧 문원의 수천 배나 되는 사람의 그림자가 문원을 뒤덮었다.
그 가운데로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광혈풍이 문원을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 ☆ ☆
삼황선원의 금분세수식장에서도 싸움이 한창이었다.
소림사의 행사에 참관을 온 이들과 북해의 무사들 간에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데 싸움의 양상은 치열하다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금천문의 나기검 화우도 한 명의 북해 무사를 상대하다가 예기치 않은 사태를 만나 난감해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는 방금 북해의 무사 한 명의 가슴에 정확히 팔성 공력을 담은 일장을 내질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쓴 내가중수법이었으니 상대는 내장이 녹아서 즉사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북해 무사는 조금 컥컥거렸을 뿐, 금세 회복해서 다시 칼질을 해댔던 것이다.
오히려 장을 친 화우의 손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렸다. 게다가 손바닥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한기가 치밀어 뼈까지 시렸다.
“이, 이게 대체……!”
화우뿐만이 아니었다. 무기가 없는 대부분의 참관 무인들이 맨손으로 북해의 무사들을 공격했다가 되려 피해를 입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일부는 미처 대응을 못하고 칼을 맞기도 했다.
그것은 무기를 들지 않은 최고수들도 마찬가지여서 대체로 소림사 측의 공격이 통하지 않고 있는 양상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수상함을 느낀 혈랑자가 조법으로 북해 무사 한 명의 옷을 찢어내 보았다. 북해 무사는 몸통에 푸른빛이 도는 가죽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혈랑자는 손가락 끝에서 뭉글뭉글 샘솟는 핏방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소리쳤다.
“천저빙룡갑(天底氷龍甲)!”
최고수들과 일부 참관객들이 천저빙룡갑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북해의 얼어붙은 수만리 빙하.
그 가장 심연에서 산다는 빙룡의 가죽으로 만든 갑주였다. 일반적인 장력은 거뜬히 막아내고 가시가 박혀있는 데다 가죽이 질겨 도검도 잘 통하지 않았다.
참관객들은 무기를 강제로 맡기고 온 탓에 쓸 수 있는 게 권장법뿐이었다. 그런데 북해 무사들이 몸에 저런 걸 착용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공격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북해의 무사들이 그리 호락호락한 실력도 아니었다. 강호에서 족히 일류로는 봐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골라서 데려온 터라 단순한 실력으로 비교해도 참관객들의 무공이 부족한 편이었다.
때문에 연거푸 밀리는 쪽은 참관객들이었다.
금분세수식장은 온통 비명과 함성으로 아우성이 되었다.
운일도장이 난감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천저빙룡갑을 뚫고 상처를 입히려면 최소 검기 정도는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가뜩이나 그리 넓지 않은 행사장이라 수백 명이 얽혀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데 일부러 북해의 무사들이 난전을 유도하고 있어서 최고수들은 옆 사람이 다칠까 검기도 못 내고 있었다.
참다못한 운일도장이 외쳤다.
“감당이 어려운 동도들은 일단 뒤로 물러나시오!”
하지만 그의 앞에 소리도 없이 흰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어딜 물러나?”
백귀살이 운일도장을 노리고 다가왔다.
기세만으로 고수라는 걸 알아챈 운일도장은 별 수 없이 나뭇가지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싸우다 말고 기겁해서 옆으로 비켜났다.
“오너라!”
운일도장은 백귀살을 상대로 처음부터 맹공을 펼쳤다. 검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백귀살의 팔방을 차단하며 짓쳐들었다.
운일도장이 펼치는 청운적하검법은 가히 신묘하기 그지없었으나 백귀살의 신법도 그에 못지않았다.
백령무의귀천공으로 신체 능력을 극대화시킨 백귀살은 청운적하검법의 빈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여차하면 다른 이들을 방패로 삼아 숨어버리기까지 했기 때문에 운일도장은 검을 마음껏 쓰기가 고역스러웠다.
어느 순간 틈이 보인다 싶자 백귀살이 쾌속하게 손을 뻗었다.
운일도장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며 검기가 어린 나뭇가지로 백귀살의 손목을 휘감았다. 절묘한 한 수였으나 백귀살은 나뭇가지를 대뜸 잡아버렸다.
백귀살이 힘을 주자 와작 소리를 내며 검기와 나뭇가지가 같이 박살났다.
백귀살의 손은 하얗게 서리가 앉아 뼈가 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한백소수!”
한백소수는 검강 급의 소수공(素手功)이라 검기가 통하지 않는다.
운일도장은 백귀살의 공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건에게 크게 당하긴 했어도 본래는 우내십존과 동수를 이룰 정도의 고수인 백귀살이다.
“으음.”
운일도장이 낭패하여 침음성을 흘리며 물러나자 백귀살이 연신 쌍장을 퍼부어댔다.
“조심하게!”
반오가 화룡소로 탄지를 쏘아냈다.
백귀살이 귀찮다는 투로 손바닥을 펼쳐 탄지를 튕겨냈다. 백귀살의 무위가 둘로 감당하기 힘듦을 안 황보성이 옆에서 가세했다.
“여기에도 있다!”
세 명이 백귀살을 협공하면서 그나마 잠시 동수가 이루어졌다.
하나 그 사이에도 참관객들은 계속해서 북해의 무사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냉고사와 적수의가 격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사람들의 가장 뒤쪽에 앉아 있는 장건을 향해 있었다.
장건은 어떤 자세에서도 운기조식을 취할 수 있었으나, 가장 빠른 회복을 위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채였다.
냉고사가 인상을 쓰고 말을 내뱉었다.
“회복하도록 그대로 둘 것 같으냐?”
장건의 막강한 무위는 아까 문사명과 고현을 통해 이미 드러났었다. 비록 현재까지는 북해빙궁이 매우 유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다중의 안배도 갖추어 놓았지만, 장건이 내공을 회복한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적수의도 문각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리며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반드시 잡아낸다.”
하나 살기등등하여 다가서는 둘을 원호가 막아섰다.
“멈추시오.”
냉고사가 귀찮은 파리를 쫓듯 원호를 향해 유빙장을 내질렀다.
“꺼져라.”
소림사의 방장이 안중에도 없다는 안하무인의 태도였다. 원호로서는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지만 당장에 냉고사의 장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원호는 쌍장으로 유빙장을 정면에서 받았다.
펑!
장력이 워낙 강해 원호는 마주친 그대로 바닥에 끌리며 뒤로 밀렸다. 얼음조각들이 비산하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원호는 승복의 소맷자락을 다섯 번이나 휘둘러 겨우 장력을 해소시켰다.
한 눈에도 내력의 차이가 극명했지만 원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 정도로 물러설 듯싶으냐!”
일장으로 원호를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냉고사가 의외라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적수의가 냉고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원호를 지나치려 했다.
원호가 적수의의 앞마저도 막아섰다.
“그냥은 못 간다!”
원호는 장건이 운기조식을 끝낼 때까지 지켜야만 했다. 그대로 지나보내면 장건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냉고사 한 명도 쉽지 않은 마당에 적수의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적수의의 눈꼬리가 푸르스름한 인광으로 빛났다.
“무리하는군.”
적수의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움켜쥐고 원호의 얼굴을 할퀴었다.
원호는 옆으로 허리를 틀며 고개를 뉘여 적수의의 손가락을 피하려 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피해내는가 싶었는데, 돌연 적수의의 팔이 길게 늘어나더니 원호의 뺨을 긁었다.
찌익!
원호의 뺨이 찢기며 네 줄기의 혈흔이 남았다.
“으음.”
원호는 신음을 흘리며 연속으로 세 번의 발길질을 했다. 적수의가 슬쩍 뒤로 반걸음을 물러나자 거리가 확연히 멀어져서 원호의 공격은 헛발질이 되었을 뿐이었다.
반면에 적수의가 선 채로 손을 펼치자 그의 공격은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한 원호의 어깨를 찍었다. 원호가 뒤로 물러나자 적수의의 팔이 그보다 빠르게 늘어났다.
적수의의 팔은 원호의 어깨를 넘어서서 뒤쪽 어깻죽지의 비파골(琵琶骨)에 박혔다.
적수의는 앞에 있는데 그의 손가락은 마주선 원호의 등짝에 박혀 있는 것이다!
“이런 괴이한 사공을!”
원호가 고통을 참고 권풍을 날렸다. 거리를 벌리려는 셈이었는데 적수의는 교묘한 보법으로 근거리에서의 권풍을 모두 피해냈다. 여전히 손가락은 원호의 비파골에 박혀 있는 중이다.
적수의가 비파골을 찍은 손가락에 내공을 흘려 넣자 원호는 힘이 빠져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윽.”
원호는 그제서야 적수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적수의의 팔은 관절이 빠져서 길게 늘어져 있는 채였다. 그러니까 원호가 도무지 거리를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하기 이를 데 없지.”
적수의가 온 몸의 뼈를 두둑거리면서 다가왔다. 빠졌던 팔의 관절도 스스로 맞춰지며 거리가 좁혀진다. 원호는 비파골을 꿰여 한쪽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원호는 암담한 심정으로 장건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소왕무와 대팔이 결사적인 표정으로 장건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이 아무리 애를 써봐야 이들을 막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대로 죽지 않는다!’
우둑 뚜두둑.
적수의가 원호의 등 뒤로 돌아오며 관절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온다.
원호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의 흙을 집어 뒤쪽으로 던졌다. 삼류 잡배도 아니고 소림사의 방장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적수의도 조금 당황했다.
“허! 소림사의 방장이란 작자가 죽기 싫어 추잡하게 발버둥을 치는구나.”
적수의 역시 우내십존에 준하는 고수.
적수의는 입으로 힘껏 내공이 담긴 바람을 불어 흙을 날려버리고는 원호의 정수리에 손가락을 뻗었다.
“에잉, 더러운 짓 말고 그냥 죽어라.”
한 손은 비파골에 박아 넣은 채 다른 손가락으로 머리를 찍었다. 두개골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내 죽이려는 악랄한 수법이다.
원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숙였다가 오히려 허리를 펴서 뒤로 박치기를 했다. 사람의 뼈에 아무렇지 않게 구멍을 내는 적수의의 손가락이 원호의 머리통과 부딪쳤다.
카칵!
어이없게도 불꽃이 튀며 금속성이 울렸다.
“아닛?”
적수의는 손가락이 부러질 듯 저릿저릿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잠시 몸을 움츠린 동안 원호는 어깻죽지에 박힌 손을 빼고 몸을 피했다.
적수의가 당황스러워 원호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계인 위로 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고 살갗도 찢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깊은 상처는 없었다.
원호의 등, 비파골을 뚫고 휑하니 난 다섯 개의 구멍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그걸 봐도 뼈가 무쇠로 된 것이 아님에는 분명한데 기이한 노릇이었다.
적수의는 탄성을 냈다. 오래 전에 들었던 얘기가 기억났다.
“아아, 그거였군. 철두공(鐵頭功).”
외가공부가 극에 이르면 머리로 물구나무를 서서 잠을 자고, 이마로 바위를 부순다는 철두공이다.
예전에는 입문 제자 때부터 수련하는 과정이었으나 근래에는 소림사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는 무공이었다. 내가장력에 취약한 단점이 있어 고수가 되면 거의 쓸 일이 없는데다, 절정의 내공을 지닌 우내십존이 군림하는 시대를 겪으며 내가고수를 선호하는 면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나 원호는 성정이 본래 불같아 차분히 내가공부를 쌓지 못하고 외공에 치중했는데 철두공도 그중 하나였다.
“쯧, 철두공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더니만.”
적수의로서는 생각도 못한 방법에 불의의 반격을 당한 셈이었다.
원호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었다.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겨우 한 번의 위기는 넘겼으나 아직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냉고사가 바로 지척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을 쳐들고 있었다.
원호는 아직 호흡도 채 고르지 못해 막아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권을 뻗었다. 냉고사가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이 쳤다.
퍼엉.
원호의 권은 튕겨나가고 몸은 바닥에 눌렸다.
“으윽!”
원호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으며 짓뭉개지려는 찰나 냉고사가 장력을 거두었다.
쏴아!
원호의 머리 위로 새하얀 강기의 물결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 때문에 냉고사가 공격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냉고사는 두 번의 장력을 퍼부어 강기를 무력화시키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흠.”
냉고사가 깊은 눈으로 뒷짐을 지고 전면을 응시했다.
조금은 무기력한 느낌으로 고현이 검을 들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원호가 몸을 추스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소. 몸은 괜찮소?”
고현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군요. 문 소협에게 당한 상처 말고 내상은 별로 입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은 고현이었다. 고현은 심지어 하품까지 했다. 그 모양으로 잠깐이나마 운기조식을 해서 기운을 차린 것도 용했다.
냉고사가 갑자기 끼어든 고현을 보고 짧게 물었다.
“결국은 배신하는 건가?”
“배신?”
그 말에 놀란 건 원호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이었다.
“설마 고 문주! 저들과 손을 잡았단 말이오?”
“어떻게 그럴 수가!”
원호가 고현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지금 냉고사의 저 말이 무슨 뜻이냐는 눈빛이다.
고현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원호가 아닌 냉고사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맹주가 아니라 악역까지도 자처할 자신이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꿈꾸던 세상에 이런 끔찍한 학살극은 없었소. 그건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오.”
“배신을 정당화하려는가?”
“뭐라 말해도 좋소! 더 이상 당신들과는 함께 하지 못하겠소. 북해든 육검문이든, 그게 어느 쪽이든.”
고현이 장건 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소중한 그 누구를 위해서라도 장 소협이 당신들의 손에 해코지를 당하도록 두고 볼 수가 없겠소이다.”
고현이 고개를 돌려 원호를 보았다.
“안심하십시오. 내 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장 소협을 지키는 일을 도울 것입니다.”
원호가 물었다.
“고 문주. 때가 좋지 않음은 아나 한 가지만 묻겠소이다.”
“하문하시지요.”
“고 문주에게 소중하다는 그 분이 혹시 본사의…….”
고현은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을 천룡검으로 베었다. 싹 소리가 나며 피가 배어나왔다. 정신이 좀 들었는지 눈에 생기가 돌았다.
“미안합니다. 더 대화를 나누기엔…… 지금은 너무 졸립니다. 오늘 일이 끝난 후에나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고현은 최선을 다해 졸음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로 장건에게 당한 이들이 어떠했는지 원호는 잘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현을 다그칠 수 없었다.
“음…… 기다리고 있겠소.”
의문은 뒤로 미뤄둔 채, 원호는 적수의와 맞상대에 나섰다.
고현은 길게 숨을 내뱉은 후에 냉고사와 싸울 준비를 하며 잠깐 생각을 했다.
‘어디에 있는 거요, 태상……. 보고 있긴 한 거요?’
최근 태상의 몸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수시로 피를 토하며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고현은 태상이 근처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태상, 내게 새 삶을 준 당신을 위해서라도 난 장 소협을 끝까지 지킬 것이외다. 고맙소.’
고현은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열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잠깐 휴식을 취하긴 했으나 소모된 내공을 모두 채울 순 없어 기세는 대단하지 않았다.
고현의 상태를 눈치 챈 냉고사가 비릿한 살소(殺笑)를 지었다.
“어차피 일이 끝나면 모두 죽여 없앨 생각이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너 또한 죽여주마.”
☆ ☆ ☆
상황은 북해빙궁에 매우 유리했다.
하지만 싸움을 지켜보는 야용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은 초조해 보이기도 하였다.
곁에 있던 사갈마존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흐흐, 걱정스러운가?”
“조금은 그렇군요.”
“빨리 내 차례가 왔으면 좋겠군.”
“사갈마존을 모신 건 저지만, 저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흐흐흐.”
사갈마존이 다시 웃었다.
“뇌음사와 야율본이 왜 북해의 뒤통수를 치려했는가 소문이 돌더라고. 저 소림소마란 꼬마가 북해의 약점을 쥐고 있다면서?”
야용비가 코웃음을 쳤다.
“사갈마존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갔을 줄은 몰랐군요.”
“소문의 진위야 삼 할도 믿을 바가 못 되지. 하나 북해의 최고 고수인 저 둘이 꼬마를 잡으러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나.”
사갈마존의 말대로 냉고사와 적수의에게 내려진 명은 오로지 장건 하나였다.
반드시 장건을 잡아 무공의 비밀을 풀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뇌음사와 야율본처럼 약속을 어기고 뒤통수를 치려했던 일은 언제고 다시 발생할지 모른다.
장건이 금분세수를 하든 뭘 하든, 살아있는 이상 북해는 매번 다른 세력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다 실은 장건뿐만 아니라 소림사도 문제였다. 문각의 무공이 굉장히 까다로워 전수가 어렵다고는 하나, 그래도 또 언제 장건 같은 무인이 탄생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여 소림사도 마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때문에 야용비는 오늘 두 가지의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장건을 사로잡아 비밀을 캐거나 혹은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의 근원지인 소림사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마침 황제는 장건 때문에 무림 고수들이 한 곳에 모여들자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 황위를 찬탈하는 도적 떼로 변할지 모른다며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종암과 유장경을 불러다 수시로 독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야용비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일거에 몰아서 죽일 수 있다고 황제를 설득하자, 황제는 길게 고민도 않고 즉시 승인했다. 소림사의 멸문은 덤이었다.
야용비로서는 눈엣가시 같던 문각의 전승자와 소림사를 동시에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삼황선원에서 벌이고 있는 이 복잡한 일들은 어찌 보면 전부 장건 하나 때문에 꾸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일은 중요했다. 북해빙궁의 미래를 가리고 있는 암막(暗幕)을 거두어낼 수 있느냐 마느냐의 기로다.
그런데 그런 북해빙궁의 의도를 황궁의 세력들이 모를 리 없었다.
특히나 동창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았다. 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이번 일에 나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야용비는 행사장을 둘러싼 낮은 담을 슬쩍 쳐다보았다. 담 위에는 동창과 황도팔위의 오십 명 고수들이 싸움을 시작한 이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방관자, 혹은 경계병처럼 행세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노리는 바는 명확하다.
장건이다. 기회를 보다가 때가 되면 움직여서 장건을 포획하려는 생각일 게 분명했다.
장건의 신병을 확보해 무공 비밀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북해빙궁이라는 거대 세력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무림삼분지계에 의해 북해가 가질 무림의 절반에 해당하는 통제권을 자연히 취득하게 될 것이고.
그러니 야용비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갈마존이 말했다.
“내가 아는 걸 저들이 모른다고 생각할 수 없겠지. 안 그런가?”
“맞아요.”
야용비가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서 사갈마존이 필요한 거예요.”
야용비는 손바닥에 손톱만 한 환단을 올렸다.
“동창에 넘겨준 나기니분의 해약이죠.”
사갈마존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한눈에 그것이 제대로 된 해약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았다.
“큭큭. 노부가 준 환단이 아니로군.”
야용비가 가짜 환단을 만들어 건넨 것이다!
그것은 곧 사갈마존이 공반나수를 살포했을 때 동창의 고수들 또한 혼루쌍독에 중독될 거란 뜻이었다.
하지만 사갈마존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야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지. 오늘 일이 마무리 되면 삼 년 내에 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구해주기로 한 약속만 지켜라. 노부의 천년시독(千年屍毒)을 위해서는 반드시 신선한 재료가 필요하다. 흐흐흐.”
“물론이지요. 하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가 무림을, 나아가 관부까지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을 위해 오늘 전승자와 소림사는 필히 처리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이죠.”
“걱정 마라. 내가 나설 때만 귀띔해주도록. 약속컨대 그 순간 전승자를 비롯해 저 무대 위의 인간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사갈마존은 살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설사 그것이 멀쩡한 놈이든 사내구실을 못하는 놈들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오랜 시간 동안 독을 연구하며 산 나머지 시커멓게 변한 손톱과 누렇게 변색된 손끝은 그의 자신감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야용비는 사갈마존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세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싸움으로 시선을 옮겼다.
☆ ☆ ☆
장건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하나 쉽사리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눈앞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들려오는데 몰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황이 소림사 쪽에 매우 불리하다는 것도 장건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단전이 워낙에 넓어져서 단순한 단전호흡으로는 내공을 채울 수가 없었다. 사람 키보다 큰 항아리에 물 한 바가지 붓는 정도나 마찬가지였다.
‘큰일 났네. 어쩌지?’
장건이 제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단전을 채우는 동안 다른 이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적당히는 안 돼.’
북해 측의 세 고수를 모두 상대하려면 거의 완전한 상태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건은 최대한 집중하려 애를 썼다.
꼬르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끼니때가 되었는지 배까지 고파왔다.
☆ ☆ ☆
최고수들이 분전하고 있었으나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북해의 무사들에게 밀려서 점점 몰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벌써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들이 오륙십 명이 되었다. 그에 비해 북해 무사들의 부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나 될까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누가 이쪽을 잠시 맡아주시게!”
운일도장, 황보성와 함께 백귀살을 상대하고 있던 반오가 몸을 빼냈다.
“제가 선배님들을 보필하겠습니다!”
무당파의 청우가 상황을 보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청우는 머리띠를 풀어 내공을 주입했다. 묵색의 머리띠가 빳빳해지며 검기를 머금었다.
“받아라!”
청우가 칠성검법(七星劍法)으로 빠르게 백귀살을 몰아쳤다. 백귀살이 한백소수로 칠성검법을 상대하고 그 사이 반오는 옥소(玉簫)를 들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반오가 단상 위로 올라서서 옥소를 입에 댔다.
며칠씩 머물고 있던 최고수들도 오늘만큼은 대부분의 무기를 압류 당했기 때문에 반오의 화룡소만 겨우 남아 있었다.
반오가 화룡소를 물었다.
삐리리리.
단아한 옥소의 음이 혼잡한 장내에 울리기 시작했다. 음공의 고수인 반오가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반오가 음률에 내공을 실어 퍼뜨리며 교묘하게 북해의 무사들이 대거 몰린 쪽으로 소리를 집중했다.
북해의 무사들이 거칠 것 없이 소림사 측 무인들을 몰아치다가 놀라서 주춤거렸다.
“으……!”
“으음…….”
단전의 내공이 들끓으면서 날뛰는 탓에 북해 무사들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북해의 무사들 내공도 보통이 아니었으나 반오의 음공에 공격을 당하면서 제대로 팔다리를 놀리긴 어려웠다. 북해 무사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소림사 측 무인들이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음공이 피아(彼我)를 가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섣불리 반격에 나설 계제(階梯)는 아니었다.
반오의 연주가 계속되면서 북해 무사들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일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를 할 정도였고 일부는 눈코입귀의 칠공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반수가 넘는 북해 무사들이 대번에 무력화되었다. 반오의 연주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완전히 복구불능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내 손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으냐!”
백귀살이 치욕스럽다는 투로 말을 내뱉더니 백령무의귀천공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백귀살의 목표가 반오라는 걸 알아챈 운일도장이 반쪽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극대로 검기를 뽑아내었다. 두 자가 넘는 검기가 나뭇가지에서 솟구쳤다.
“이자를 막아야 하네!”
황보성이 황보가의 태산장(泰山掌)을 날리고 청우가 소청검법을 펼쳐 백귀살의 운신할 수 있는 행로를 차단했다.
이어 운일도장이 나뭇가지를 든 채 몸을 날렸다.
신검합일(神劍合一)!
짧은 거리에서 빛살처럼 운일도장이 날아가 검기와 하나가 된 채 백귀살의 몸을 관통할 듯 쏘아졌다.
“흥!”
백귀살이 청우를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한백소수의 강함을 익히 안 청우가 백귀살의 일장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면서 검세가 어지러워졌다. 백귀살을 위협하던 소청검법의 검초가 느슨해지고 공간이 열렸다.
순간 백귀살이 최대의 신법을 펼치면서 몸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흐릿한 잔상이 생겨났다. 세 개의 잔상이 세 고수를 거의 동시에 상대했다.
퍼펑!
황보성은 백귀살이 쌍장으로 맞서자 내력에서 밀려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고, 청우는 백귀살의 선풍각을 막다가 팔이 부러졌다.
와지끈!
신검합일로 날아들던 운일도장은 백귀살이 위에서 아래로 한백소수로 내려치자 검기가 와해되었다. 검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형체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 위로 백귀살이 청우를 잡아 던지듯 내리꽂았다. 운일도장은 날아들던 그대로 청우를 안고 바닥에 처박혔다.
쿠웅!
“크윽.”
내공을 실어 던진 것이라 청우는 거의 수백 근 무게의 돌덩이와 같았다. 운일도장은 등이 부서지는 충격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이럴 수가!”
반오가 있어 겨우 유지하던 평행선은 빈틈이 보이기 무섭게 무너졌다.
순식간에 세 명의 고수를 쓰러뜨린 백귀살은 한 모금의 진기를 머금고는 곧바로 반오를 향해 달려갔다.
의협심 높은 참관객 둘이 백귀살을 가로막았다. 무산노인(巫山老人)과 파라수(把羅手) 악읍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못 간다!”
“죽어라, 이놈!”
무산노인이 지팡이의 손잡이를 돌리자 안에서 긴 송곳이 튀어나와 백귀살의 눈을 찔러갔고, 파라수가 몸을 낮추어 기이하게 구부린 손가락으로 백귀살의 발목을 낚아챘다.
백귀살이 코웃음을 치며 뛰어오르더니 양손을 튕겼다.
허공에 하얀 서리의 파편들이 지나가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찌이익.
얼어붙은 공기의 두 줄기 궤적이 무산노인과 파라수 악읍을 향해 이어졌다. 날아가던 송곳마저 얼어붙어 도중에 멈추었다.
무산노인이 대경하여 지팡이를 놓고 마구 장풍을 날렸으나 백귀살의 빙장은 아랑곳 않고 날아들었다. 무산노인과 파라수 악읍은 각기 어깨와 가슴을 얻어맞았다. 둘이 휘청거리며 물러나다가 주저앉았다. 어깨와 가슴의 옷이 얼어붙어 깨지고 드러난 살은 동상에 걸린 듯 푸르스름했다.
반오는 더 이상 음공을 지속하지 못하고 다시 백귀살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육망지와 북무선생이 반오의 위기를 보고 달려와 거들었다.
백귀살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백소수로 세 최고수의 공격을 상대했다.
그제야 백귀살의 발을 잠시나마 다시 묶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할 터였다.
☆ ☆ ☆
냉고사가 꽃가루를 뿌리듯 냉기를 뿜어냈다. 수많은 장력의 줄기가 절묘한 방위에서 고현을 덮쳤다.
고현은 무당파 보법인 제운종의 묘리로 사문(死門)을 생문(生門)으로 바꾸어 장력을 벗어났다. 냉고사가 고현을 가로막고 북해의 금나수로 팔뚝을 찍어오자 모용가 유성검법의 묘리로 검결지를 쥐고 냉고사를 공격했다. 전면 혈도 십 개 사혈을 동시에 공격하는 유성검법의 쾌속함을 지법(指法)으로 응용했다.
두터운 나무에도 손가락을 박아 넣을 수 있는 단목가의 천심지(穿心指)였다. 냉고사가 손바닥으로 고현이 곧추 세운 검지와 중지를 막았는데, 놀랍게도 공력이 깃든 냉고사의 손바닥에 고현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냉고사가 흠칫하며 빠르게 손바닥을 떼고는 반대쪽 손으로 고현의 머리를 후려쳤다. 고현이 신법을 이용해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냉고사의 손바닥에 박아 넣었던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해진 냉기가 몸을 굳게 만들었다.
펑!
고현은 아슬아슬하게 관자놀이를 비꼈으나 옆머리를 얻어맞고는 나뒹굴었다.
“헉헉…….”
누운 김에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눈이 가물거리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도 흐릿해졌다.
타 무공 초식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몸에 익은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이나 버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제 한계였다.
내공은 거의 바닥났고 온몸은 눈이라도 맞은 마냥 서리가 잔뜩 앉았다. 눈썹도 얼었고 입김도 하얗게 새어나온다. 이상하게 뼛속까지 한기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데 사실 냉고사도 고현을 상대하면서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 말고는 한빙장을 제대로 맞춘 적이 없는데도 아까부터 고현이 유독 심하게 추위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현의 입술이 파래진 지 벌써 한참 전이다.
‘묘하군.’
아무리 생각해봐도 북해의 빙공을 사용하니 주위 온도가 낮아져서 추위를 느끼는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보통 사람들이라도 오들오들 떨기나 하지 이빨까지 딱딱 치면서 떨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냉고사는 비몽사몽으로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고현을 일장으로 쳐 죽이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아무래도 장건에게 얻어맞은 게 영향이 있는 듯싶었다. 살려 놓는다면 장건의 무공을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음.”
냉고사는 고현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전황을 살폈다.
많은 소림 측 인사들이 쓰러져 있고, 북해의 무사들은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최고수들이 간헐적으로 대항하고 있으나 저지선은 끊임없이 밀리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냉고사의 목적은 장건이었다.
산 채로, 여의치 않을 땐 반드시 죽여 없앤다.
장건의 앞은 또래의 소년 둘이 막고 있었지만, 냉고사에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만신창이가 되어서 적수의를 막고 있는 원호가 조금 거슬릴 뿐이다.
원호는 아까부터 기가 막힌 대응으로 적수의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적수의가 원호의 팔을 금나수로 붙들었더니 자기 팔을 스스로 탈골시키면서까지 적수의의 미간을 철두공으로 박아버린다던가 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덕분에 적수의는 이마가 깨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확연한 무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수의가 쉽게 원호를 제압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익!”
적수의는 치가 다 떨린다는 듯 이를 갈았다.
이제껏 적수의가 본 소림사의 덕이 높은 고승들은 차분하고 고고한 수법만을 썼는데, 원호는 진흙탕의 길거리 싸움꾼처럼 무공을 쓰고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 승부를 뒤집긴 어려웠다.
원호는 이리저리 긁히고 뜯겨서 너덜너덜해졌다. 팔이 부러진 데다 승복도 죄다 찢겨져서 낭패한 몰골이었다.
냉고사는 원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못하는 걸 알고 대번에 옆으로 다가갔다.
“여기까지다.”
냉고사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일장을 들어 쳤다.
원호의 정수리를 움켜쥐듯 내려치는 구부린 손가락 사이로 새하얀 냉기가 흘렀다. 적수의만 신경 쓰던 원호가 깜짝 놀라 피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반응이 늦었다.
원호도 이제 끝인가 싶을 때.
“방장 사백니이이임―!”
장건이 온 힘을 다해서 달려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원호의 위기를 보고 마냥 편하게 운기조식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냉고사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떡이나 다름이 없었다.
냉고사는 조소를 지으며 장력을 한층 강하게 내뿜었다. 장건이 아니라 원호를 향해서였다.
장력의 목표가 장건이었다면 장건도 어떻게든 피하거나 할 수 있었겠지만 원호가 대상이니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에 한계가 있었다.
별 수 없이 장건은 원호의 앞을 가로막고 냉고사의 장력을 유원반배와 태극경으로 흘려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냉고사 뿐 아니라 적수의도 있었다.
냉고사와 적수의는 둘 다 우내십존에 버금가는 무인.
적수의는 원호를 밀어버리고 장건의 등 뒤에서 명문을 움켜쥐었다. 장건이 금강부동신법으로 몸을 돌리며 적수의의 조법을 피하려 들자 옆구리가 죽 찢겼다. 그리고 그때 냉고사가 장건의 마혈을 찍었다.
“아!”
장건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