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93
제6장 장건의 위진사해(威振四海)
자신의 독공에 도취되어있던 사갈마존은 혼루쌍독이 미치는 권역에 누군가 살아서 다가올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특히나 바로 아래에서 독을 받아먹을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장건이 발아래에 와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독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고 한동안 고민해야만 했었다.
“음…….”
잠시간 멍해 있던 사갈마존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쨌든 장건이 운 좋게 독무(毒霧)를 피해 다가왔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떨어뜨리는 독액을 중간에 가로챘다던가 해서 나기니분과 공반나수가 일으키는 확산 반응을 방해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혀를 할짝거리고 있었는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도는 좋았다. 칭찬해주마.”
사갈마존은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는 장건의 얼굴을 진각으로 밟았다.
쿵!
장건은 밟히지 않았다. 데구르르 구른 것도 아닌데 옆으로 피해 있었다.
“얼레?”
사갈마존이 다시 발을 들어서 밟았다.
쿵! 발바닥이 청석 바닥을 으깨며 박혔다. 하나 이번에도 장건은 누운 채로 다시 옆으로 이동한 후였다.
“…….”
사갈마존은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이놈이이이이!”
발을 힘껏 들어서 장건을 마구 밟으며 쫓아갔다.
쿵쿵쿵쿵쿵!
바닥이 마구 부서지며 돌조각이 비산했다.
장건은 누운 채로 꼼짝도 않고 있는데 잘도 이동해서 사갈마존의 발을 피하고 있었다. 그냥 위를 본 채 누워 있을 뿐인데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니 그걸 기어 다닌다고 할 수도 없고 구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누워서 미끄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갈마존의 현실적인 감각을 모호하게 만드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사갈마존은 가슴이 꽉 막혀서 답답해졌다.
“크억! 이놈이 나를 놀려? 어디 죽어봐라!”
사갈마존은 독병을 들어서 안에 있는 독액, 공반나수를 흩뿌렸다. 이러면 장건이 공반나수가 바닥에 떨어져 나기니분과 반응을 일으키는 걸 막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장건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샤샤샥. 샤샤샤샥!
누운 채로 입을 벌리고는 이리저리 이동해서 떨어지는 독액을 다 받아먹는다!
할짝할짝할짝!
장건은 독액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혀로 핥으면서 돌아다니는데,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순간적으로 둘 셋으로 나뉘어 보이기까지 했다.
신법 중에 최고봉인 이형환위를 누워서? 사람이 누워서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사갈마존은 뒷골을 잡았다.
“커헉!”
몇몇 사람들은 장건이 하는 행동을 보고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게 사람인지 인간 지네인지 의심스러웠다.
특히나 원호는 장건의 ‘앉아서 나한보’를 알고 있어서 황당함이 더 했다.
장건이 움직이는 형태나 방식을 보니 분명히 나한보였다.
“이젠 누워서 나한보냐…….”
그야말로 장건다운 짓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기뻐하고 있었다.
‘우와아! 끝내준다. 엄청나!’
원래 장건은 점혈을 당해 마비가 된 상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도를 막고 있던 냉고사의 내공이 조금씩 흡수되어 마비가 풀리고 있었다.
냉고사나 다른 이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겠지만 따로 해혈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하나 장건은 더욱 괴로웠다. 배가 고플 때 조금만 집어 먹으면 더 배가 고픈 것과 비슷했다. 가뜩이나 허했던 단전이 더욱 심한 허기로 요동을 쳤다.
그때 장건은 누워서 숨을 쉬고 있다가 갑자기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무취(無臭)였지만 분명히 장건의 코를 간질인 건 알싸한 독향(毒香)이었다.
하분동과 암자에서 살 때에 자주 가던 독초밭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의 독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농축된 독기였다! 냄새를 맡기만 해도 전율이 올 정도로!
장건은 신이 나서 독기를 빨아들였다. 주변의 독기가 한순간에 장건의 코로 빨려 들어갔다. 함께 있던 대팔이 무사했던 것도 장건이 주변 독기를 모조리 흡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장건의 몸은 더 많은 독기를 갈구했다. 이 정도로는 장건의 광대한 단전을 채우기에 택도 없었다.
들려오는 사갈마존의 대화로 유추해보면 독액을 쏟아 붓고 있는 모양.
장건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아직 몸을 다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에 누운 채로 등과 손가락, 종아리와 발뒤꿈치의 일부 근육만을 이용해 이동했다. 조금이지만 내공이 생겨서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샤샤샥!
장건은 마치 지네마냥 땅을 누워서 기었다.
그리곤 사갈마존의 앞까지 기어가 그가 떨어뜨리고 있는 독액을 받아먹었던 것이다.
☆ ☆ ☆
장건의 단전은 넘실거리는 기력으로 충만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단전이 넓어진 탓인지 얼마 전처럼 내공을 감당 못 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수백,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는 독을 먹고도 아직 단전에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마비도 한참 전에 풀렸다.
장건은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팔다리를 털면서 크게 기지개를 켜던 장건이 멀리 밖을 향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심법을 알려준 이름 모를 이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장건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생각이 아니라 지금 처한 현실이 끔찍한 건 오히려 사갈마존이다.
사갈마존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몰라 머리가 복잡했는데 장건이 아까보다 더 멀쩡해져서 인사까지 하자 분통이 터졌다.
“감사해 하지 마!”
“할아버지한테 한 거 아닌데요. 아닌가? 할아버지한테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장건이 사갈마존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갈마존은 이를 갈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놈이…… 어, 어떻게 내…… 내 독을…….”
사갈마존은 자꾸만 장건이 혀를 낼름거렸던 이유를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상황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삼황선원에 있는 이들 전체를 죽여 버릴 수 있는 만큼의 독을 살포했고, 몇몇은 중독이 된 걸 확인도 했다. 그런데 장건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신 난다며 먹고 다니고 있질 않은가!
사갈마존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으으으……!”
그리고 그건 야용비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엉망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북해빙궁의 천적인 전승자까지 부활시키고 말았다.
야용비는 신경질적으로 사갈마존을 향해 소리 질렀다.
“사갈마존!”
질책이 담긴 목소리에 사갈마존은 미친 듯 날뛰며 소매를 털었다.
“크아아아! 아니야! 내 독이 잘못되었을 리 없어! 다 죽여주마!”
사갈마존의 소매에서 온갖 종류의 침과 독병들, 그리고 심지어는 독전갈과 뱀까지 튀어나오려 했다. 독곡에서 자주 쓴다는 독벼룩이 담긴 망낭(網囊)도 보였다.
그런 것들이 모조리 쏟아지면 장건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터였다.
원호가 급히 소리쳤다.
“건아!”
장건도 원호의 뜻을 알아들었다.
사갈마존은 바로 지척이었다. 장건은 지체 없이 기의 가닥을 뽑아내어 사갈마존의 소매에서 튀어나오던 것들을 죄다 밀어 넣었다.
후두두둑.
“…….”
발출되던 것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소매 안에 다시 적재되었다. 사갈마존은 어이가 없어져서 장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한 거냐, 지금?”
훅!
바람이 불면서 사갈마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뒤로 날렸다.
장건이 몸을 엉거주춤 낮춘 채 바로 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사갈마존은 장건이 자신의 어깨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걸 보았다. 아니, 사갈마존이 보았을 땐 이미 주먹이 뻗어있는 상태였다.
섬뜩하리만치 빠른 장건의 권초를 본 사갈마존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수면 위에서 거론되는 이는 아니지만 그 역시 작금에 어디에서도 명성이 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대론 끝나지 않는다!”
사갈마존은 침까지 흘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어차피 피하기에도 불가능해 보였다. 하여 아예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양손을 길게 뽑아내어 장건을 찍어갔다.
“멍청한 놈! 너의 여린 손속이 화를 자초할 것이야!”
맹수의 발톱처럼 뾰족하고 단단하게 구부러진 손톱이 독기를 흘리며 장건의 관자놀이과 심장을 노렸다. 어깨 하나 내어주고 대신 장건의 목숨을 취할 생각이었다.
“요혈도 없는 어깨를 공격하다니. 그건 분명히 네 잘못…….”
쩌어억!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닌데 몸에 연결된 무엇인가가 깨지는 듯했다.
사갈마존에게 생소한 감각이 찾아왔다.
그건 마치 추운 겨울날 두터운 겉옷을 갑자기 벗었을 때 마주친 싸늘한 한파(寒波)와 흡사했다.
사갈마존은 자신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장건의 주먹은 어깨에서 한 치가량 떨어져 있었다.
맞지 않았다.
“어……?”
맞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사갈마존은 비틀대면서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아서 억지로 버텨야 했다.
장건이 주먹을 거두고 사갈마존에게 꾸벅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기운이 나게 해주셔서 고맙긴 한데, 좋은 의도로 그러신 건 아니었으니까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할게요.”
사갈마존은 혼미한 정신 중에도 울분이 치밀었다.
‘방금 인사했잖아!’
정신도 없는데 괜히 화를 냈더니 더 어지러워졌다.
사갈마존은 털썩 주저앉았다.
몸 안에 지니고 있던 독물(毒物)들이 놀랐는지 사갈마존을 마구 깨물었다. 평소라면 사갈마존의 위압감 때문에 꼼짝 못 하던 독물들도 본능적으로 사갈마존이 약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앗, 따가워…… 앗 따가워……. 이 망할 놈들이…….’
지니고 있는 독물들의 독에 내성이 있는데도 따갑고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죽진 않겠지만 당장은 긁기도 귀찮아져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으으음…….”
마침내 사갈마존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엉덩이를 치켜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추하게 정신을 잃었다.
사갈마존을 일격에 쓰러뜨린 장건의 수법을 본 야용비는 멍해졌다.
“설마…… 이것이…….”
문각의 백보신권!
바로 옆에서 지켜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몸에 닿지도 않고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신묘하기 그지없는 수법.
일전에 백귀살을 단 일권으로 날려버렸던 바로 그 권이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북해 무사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장건에게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어차피 그들이라고 달리 갈 데가 있을 리 없었다.
북해 무사들은 야용비의 명령을 기다렸다.
전승자는 완전히 힘을 되찾았고, 황궁 고수들과는 적대적 상태가 되었으며, 주위는 나한들로 둘러싸여 달아날 수도 없는 지경.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북해였다.
구유신장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그렇군. 이래서 전승자, 전승자하는 거였군. 자, 이젠 어떻게 하실 텐가?”
야용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승자가 살아나면 당신네들이라고 멀쩡할까? 애초에 당신들이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어.”
구유신장은 잠깐 흠칫했으나 어쩐지 무덤덤해 보이는 장건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태연한 투로 답했다.
“북해도 사갈마존을 구워삶아 우리를 죽이려 했으니 피차일반. 어차피 소림사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북해의 무사들이 아닌가. 우리야 이쯤에서 물러나면 그만이지.”
“당신네들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구유신장은 야용비가 줄줄이 말을 늘어놓을까 봐 말을 가로막았다.
“황도팔위와 동창은 들으라! 이제 사갈마존의 독도 없으니 모두 북해를 공겨…….”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드득.
백귀살이었다.
백귀살은 장건이 사갈마존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본 순간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당한 수모가 갑작스럽게 분노를 급상승시켰다.
“크아아!”
백귀살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땅을 박찼다. 그림자가 흔들리며 길게 늘어났다.
두말할 것 없이 장건이 목표였다.
“앗!”
장내의 사람들이 놀라서 외치는 순간, 야용비가 이를 악물었다.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자랑스러운 북해의 무사들이여!”
야용비가 외쳤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소림사는 사라질 터! 전승자만 없어진다면 더 이상 본궁을 위협하는 무공은 남아있지 않게 될 거예요! 우리가 이곳에서 뼈를 묻더라도 본궁의 후사를 위해서 전승자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야용비의 절절한 외침에 북해의 무사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전승자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북해빙궁이 언젠가 먼 훗날에라도 다시 한 번 중원을 도모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해빙궁은 우내십존 급의 고수를 넷이나 보유했다. 강호의 그 어떤 문파와 비교하더라도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한데 장건 한 명 때문에 그 힘을 마음껏 펼쳐볼 수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어찌 보면 지금은 문각 이후로 패배감에 젖은 채 살아야했던 북해빙궁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죽음으로 달려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죽여라! 죽여!”
북해 무사들은 눈이 뒤집혀서는 장건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오로지 장건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기를 품었다.
냉고사와 적수의도 장건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근 오십 명의 인원이 동시에 장건에게로 몰린 것이다.
“헛?”
소림 측 이들이 신음성을 삼켰다. 장건을 구하러 가기에는 거리도 멀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어서 건이를!”
원호가 소림 측 무인들과 달리기 시작했을 때 벌써 장건은 수십 명의 인원에 파묻히고 있었다.
‘늦었나!’
원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때 아주 잠깐이지만 두터운 사람의 벽들, 그 사이의 틈으로 장건의 눈이 보였다.
원호와 눈을 마주친 장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마치 ‘걱정 마세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원호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장건은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건아!”
원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장건을 불렀다.
☆ ☆ ☆
장건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의 파도를 보면서도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행동에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끓어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소림사까지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장건은 가장 앞서 날아오는 백귀살을 쳐다보았다. 백귀살이 백령무의귀천공을 극대로 끌어올려 장건을 덮쳤다. 원천진기까지 모두 끌어 쓴 그의 몸은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만큼의 속도로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회피해버리는 극쾌속의 신법!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기도 그를 맞출 수가 없을 터였다.
“죽어라! 소림사와 함께 사라져 버려라!”
백귀살이 장건을 향해 신검합일의 자세로 날아들며 한백소수를 뻗어냈다. 손바닥이 둘로 갈라지고, 다시 넷으로, 여덟 개로 갈라지더니 곧 그의 몸처럼 아예 흐릿해져 버렸다.
“소림사가 사라질 거라구요?”
장건이 읊조리듯 묻자 악에 받친 백귀살이 외쳤다.
“네놈도 함께다!”
장건은 백귀살을 노려보았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닥쳐라!”
장건은 입을 꾹 다물고 단전에서부터 내공을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장건이 끌어올린 내공이 주변의 공기를 묵직하게 만들며 저절로 기의 권역을 생성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역장(力場)이 둥글게 펼쳐졌다.
백귀살의 한백소수가 장건의 역장을 마구 찢으며 파고들었다.
퍼퍼펑! 퍼펑!
장건은 미동도 없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잉.
발밑에서 작은 회오리가 일면서 장건의 몸을 타고 올랐다.
장건의 권역을 모두 뚫고 들어온 한백소수가 거칠게 장건의 얼굴을 짓이겼다.
장건의 얼굴이 한백소수의 새하얀 손바닥에 격중되었다 싶은 순간, 훅! 하고 장건의 모습이 연기처럼 꺼졌다.
“음?”
백귀살은 장건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치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래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귀살이 급히 한백소수의 방향을 바꿔 아래쪽을 향했다.
몸을 완전히 낮추고 있던 장건이 위로 주먹을 올려치며 일어서고 있었다.
펑!
절묘한 순간에 한백소수와 장건의 주먹이 마주쳤다. 백귀살의 손바닥과 장건의 권이 부딪치며 사방에 얼음조각들이 휘날렸다.
백귀살과 장건은 서로 장과 권을 맞댄 채 공력을 쏟아부었다.
마치 내력대결을 하는 양상이다.
‘이번엔 지지 않는다!’
차라리 백귀살은 잘됐다고 여겼다. 지난번에도 자신의 공력이 약했던 건 아니다. 장건의 기이한 수법에 휘말려 패배했던 것뿐이다.
백귀살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달랐다.
백귀살의 한백소수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장건의 권에서 뿜어지는 공력이 검강 급인 한백소수를 억누르며 타오르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터엉!
백귀살의 팔이 튕겨져 버렸다. 백귀살은 급히 다른 손으로 한백소수를 펼치려 했지만 당연히 장건의 권이 먼저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백귀살은 장건의 권이 자신을 맞추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백령무의귀천공을 이용해서 거의 열 개나 되는 잔상을 만들었다. 잔상이 겹치고 또 겹쳐서 백귀살은 매우 흐릿하게 보였다.
“네놈은 절대로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백귀살이 잔상을 만들어도 위기의 덩어리는 그대로였으니…….
쩌억!
어김없이 장건의 주먹은 전혀 엉뚱한 데에서 뭔가에 적중했다. 백귀살의 신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허공이었다.
백귀살은 복부에서 시작된 충격으로 몸 전체에 균열이 생긴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백귀살의 눈이 일그러졌다.
“마, 망할…….”
지난번과 같다.
다만 이번엔 그때보다도 더 강력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몸이 휩쓸리고 있었다.
“우아악!”
백귀살은 막대한 힘에 휘말려 튕겨졌다.
팽그르르! 팽이처럼 돌면서 포물선을 그리며 나가떨어지는 백귀살을 보고 북해 무사들이 흠칫했다.
천하의 백귀살이 내력대결에서 밀리고 일권에 날려졌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나!
북해 무사들이 이를 갈았다.
“으아아아!”
“네놈의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가져가겠다!”
광기 어린 살기가 장건을 향해 쏟아졌다.
가시가 달린 천저빙룡갑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도 도외시하고 몸으로 밀어붙였다. 여차하면 깔아뭉개기라도 할 태세였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북해에서도 고르고 고른 무인들인지라 그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장건은 더 이상 손에 사정을 둘 수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저들의 사정을 봐주다가 시간이 끌리면 소림사의 사형제들만 위험에 처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해의 삼천 무사들이 소림사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장건은 한껏 내공을 끌어올렸다. 기의 가닥을 뽑아냈다. 두 가닥, 네 가닥, 여섯 가닥…… 열두 가닥!
자그마치 열두 가닥이다!
장건은 각각의 가닥을 세 개씩 합쳐 꼬았다. 꼬인 기의 가닥에 힘을 응축시켜 한껏 당겨 두었다.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것처럼 기의 가닥들은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 했다.
“죽엇!”
사방에서 칼날이 번쩍였다.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칼을 든 사람이 몸을 내던져오는 형태다. 우르르 쏟아지듯 장건을 향해 엎어져 오는데, 자칫 저들에게 깔리면 압살(壓殺)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장건은 금강부동신법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공격해오는 북해 무사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곤 당겼던 기의 가닥을 튕겨서 날려 보냈다.
기의 가닥이 만든 기권(氣拳)이 상하좌우로 날아가 북해 무사들에게 꽂혔다.
앞과 우측에서 몸을 던져오던 북해 무사 둘은 각기 목 아래 육중혈(彧中穴)과 명치 옆 늑간 사이의 보랑혈(步廊穴) 밖을 흐르는 위기를 얻어맞았다. 뒤와 좌측에서 오던 북해 무사 둘은 복부와 턱을 가격 당했다.
쩌저적! 퍼퍽!
기권이 발출되어 가격하기까지는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북해 무사들은 맞았다는 것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장건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계속해서 팽이처럼 몸을 돌리면서 기의 가닥을 당겼다가 쏘아내기를 반복했다.
내공을 극대로 활성화시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건이 회전하는 속도는 가히 빛살과도 같았다. 북해 무사들의 칼이 겨우 한 치를 나아가는 동안 장건은 세 번을 회전했고, 총 열여섯 번이나 기의 가닥을 날렸다.
‘상곡혈! 음도혈! 신봉혈!’
장건은 회색 위기의 덩어리들이 보이는 대로 모조리 때려 부쉈다.
쩌적, 쨍! 쨍!
등 쪽이라던가 옆쪽이라 보이지 않으면 그냥 본신을 때려버렸다.
투다다다다!
거의 권막(拳幕)을 둘러치듯 기의 가닥이 펼쳐졌다.
몸을 던져오던 북해 무사들은 알 수 없는 힘에 가로막혀 멈춰졌다. 뒤에서 밀고 오던 후열(後列)의 북해 무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과 부딪쳤다. 덕분에 가장 앞에 선 북해 무사들은 앞뒤로 끼이고 짓눌렸다.
“크윽!”
“끗!”
앞선 북해 무사들의 입에서 뒤늦게 신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
장건이 계속 회전하면서 둥글게 쳐진 권막은 온통 회오리로 가득 찼다. 북해 무사들은 회오리 안으로는 손가락 하나 들이밀 수가 없었다. 회오리의 막에 찰싹 들러붙어서는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도 장건은 무려 열 바퀴를 더 돌고서야 마침내 멈춰 섰다.
회오리의 막 안은 진공(眞空) 상태처럼 고요했다가 갑작스레 폭발해버렸다.
콰― 아― 아― 앙―!
“으아악!”
“크아아!”
북해 무사들은 사방팔방으로 날려졌다.
십 수 명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아래로 튕겨나간 이들은 바닥을 긁으며 쭉 밀려났다. 몇몇은 서로 얽혀서 데굴거리고 구르기까지 했다.
“아닛!”
“저럴 수가!”
소림 측 이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을 한참이나 괴롭히던 북해 무사들을 장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거 날려버린 것이다.
너무 엄청나서 소름이 다 끼쳤다.
더구나 날려진 북해 무사들은 대부분이 무력을 상실했다.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사들조차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원호와 소림의 나한들은 일전에 진산식 때 지금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도 여전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슈우우우,
장건을 감싸고 있던 회오리바람이 한줄기 흙먼지의 꼬리를 길게 끌고 맴돌다가 서서히 퍼지면서 사라져갔다.
남은 북해 무사들이 망연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아무리 초개(草芥)같이 목숨을 버리고 달려들 생각이라 해도, 그것이 뭔가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해볼 마음이 드는 법이다.
몸을 내던져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으면 무언가 해볼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뜻인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북해 무사들이 멈췄지만 장건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어서 이들을 쓰러뜨리고 소림사로 돌아가 사형제들을 구해야 했다.
장건은 빠르게 나머지 무사들을 향해 움직였다.
스르륵.
장건이 미끄러지듯 북해 무사들의 사이를 유영했다.
퍼버벅! 째쟁! 쨍!
장건이 지나갈 때마다 깨지는 소리가 난다. 그때마다 북해 무사들이 뒤로 나동그라지는데 장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일부는 칼을 휘두르며 반항도 해 보았지만 그야말로 소용이 없었다. 장건은 그들의 칼이 닿는 거리보다 훨씬 멀리에서 위기를 때려 부수었다.
쩡! 쩌정!
나가떨어지면 여지없이 몸을 움찔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다가 한순간에 축 늘어지는 북해 무사들이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북해 무사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자세히 동료를 살펴볼 틈이 없으니 그들이 잠이 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일격에 죽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마구 죽여 대는(?) 장건의 잔인함에 없던 공포감마저 생겨났다.
북해 무사들 중 처음으로 누군가 한 명이 무기를 내던졌다.
“하, 항복!”
그러자 나머지 북해 무사들 몇이 연달아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 나도 항복하겠소!”
장건은 잠깐 멈칫했다.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북해 무사들은 장건이 멈추자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항복하겠다며 무기를 놓았다. 전의를 잃은 탓에 그들의 기세와 연결된 위기의 덩어리도 덩달아 색이 연해졌다.
장건은 그들의 위기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한데 제가 좀 바빠서요.”
장건은 계속 하던 일을 계속했다.
쩌정! 쩡! 쩡!
위기가 약해진데다 반항을 안 하니 한결 수월하게 위기를 깨뜨리는 장건이다. 북해 무사들은 그 즉시 거품을 물고 눈동자가 돌아갔다. 한순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북해 무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일그러졌다.
‘그러면 고개는 왜 끄덕……!’
하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모든 북해 무사들은 바닥에 누웠다.
☆ ☆ ☆
최고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서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헐.”
“항복하겠다는데 그걸 그냥 패잡네.”
“저놈 저거 생각보다 무자비하다니까.”
“원래 겉으로 순해 보이는 놈들이 내면은 과격한 법이야.”
사실 최고수들도 이미 장건이 쓰는 권법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안다. 사람을 반병신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력화시키는 거라 장건은 북해 무사들이 딱히 항복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건이야 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어쩐지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남은 둘이 문제다.
적수의와 냉고사.
그 둘이 장건을 협공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의 폭풍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쾅 쾅!
땅이 부서지고 얼음 파편이 튀며 공기가 펑펑 터졌다.
각 문파의 제자들은 최고수들이 지켜만 보고 있자 안절부절못했다.
“사백조님, 저희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수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서라, 이놈들아. 성문실화 앙급지어(城門失火 殃及池魚)란 말이 있느니라.”
성문에 불이 났는데 불을 끄려고 연못의 물을 퍼다 쓰는 바람에 뜬금없이 물고기가 말라 죽었다고 하는 얘기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너희들은 괜히 끼어들었다가 누구한테 맞았는지도 모르고 급살당한다. 봐라, 방장 대사도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잖으냐.”
원호는 굳이 나서지 않고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적수의와 냉고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퍼붓는 무지막지한 공격은 원호나 최고수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황도팔위조차도 휩쓸릴까봐 멀찍이 물러나서 보고 있을 정도였다.
“녀석이 잘 하고 있으니까 잠깐 기다려 보거라.”
최고수들이나 원호가 내린 판단은 같았다.
당장은 장건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힘내라, 이놈아.”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최고수들과 원호는 조금의 긴장도 놓치지 않고 공력을 끌어올리며 대비하고 있었다.
☆ ☆ ☆
장건은 눈앞의 두 고수에게 집중했다.
장력이 맞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데도 한기가 느껴진다.
입에서 하얀 김이 났다. 냉고사가 빙장을 남발해서인지 주변의 기온이 심하게 떨어져 있었다. 발밑도 여기저기 얼어붙어서 아차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하나 실제로 냉고사는 공격을 마구 남발하는 게 아니라 치밀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냉고사가 장력을 쏘아 장건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놓고 적수의가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려는 계획이다.
하지만 냉고사와 적수의의 공격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장건에게 거의 통하지 않았는데, 장건이 도통 상리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금도 냉고사가 쌍장을 쏘아 장건을 물러서게 만들었고 그 틈에 적수의가 아래로 파고들어 장건의 오금을 낚아채려 했다. 우내십존 급의 고수 둘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친 완벽한 합공이다.
무릎이 작살나는 건 물론이요, 심하면 무릎 아래로 다리가 통째 뜯겨져 나갈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나다가 순식간에 직각으로 꺾어서 옆으로 비켜갔다. 덕분에 적수의는 어이없이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그만한 고수가 완전한 헛손질이라니!
그게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벌써 여러 번 반복되었다.
적수의로서는 자존심도 상하거니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적수의는 사람을 수없이 해체하며 근육과 뼈, 관절이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모두 알고 있었다. 어깨의 흔들림을 보면 하체에 가해진 힘의 양을 알 수 있고, 발목의 뒤틀림을 보면 보법의 방향과 사용할 권각법의 종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팔꿈치를 보면 권법의 궤도를 미리 꿰뚫어 볼 수도 있었다.
적수의의 이런 능력이 아주 없던 생소한 것도 아니다. 장건도 같은 원리로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 수법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제아무리 내공을 쌓아도 뼈와 근육, 관절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원리가 있는 법이었다. 어떤 동작을 하려면 바로 직전에 취해야 할 동작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호에는 상대에게 수를 읽히지 않기 위해 어깨를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발로 차는 무영각이라던가, 시선을 감추는 안법이라던가 하는 수법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건은 단순히 무영각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원리를 무시하고 말도 안 되게 움직여 버린다!
적수의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게!
게다가 눈동자는 어디서 개 같은 안법을 익혔는지 싸우는 내내 사팔을 뜨고 있어서 시선을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적수의가 자꾸만 허탕을 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열이 받친 적수의가 악을 썼다.
“이 교활한 놈들!”
물론 그건 원호부터 시작해서 소왕무나 대팔, 장건을 모조리 싸잡아 내뱉은 말이었다.
“정파를 대표한다는 소림사 놈들은 무슨 마공을 처익혔기에 하나같이 괴상한 짓거리만 골라 한단 말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상대도 안 되는 코흘리개에게 냉고사가 연속으로 낭패를 본 일이라던가 장건의 괴이한 움직임 같은 게 설명되지 않는다.
적수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가뜩이나 아까부터 원호의 임기응변에 말려서 심기가 불편하던 차다.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냉고사도 배에 부러진 칼을 박고 있는지라 조금씩 기세가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놀림거리가 되어 죽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빠드득!
적수의는 이를 갈더니 공력이 깃든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양 눈을 찍어버렸다.
푹!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며 시뻘건 피와 맑은 액체가 섞여 흘러나왔다.
“크아아아아!”
적수의가 피눈물을 뿌리며 절규하듯 포효했다.
이 섬뜩한 광경에는 장건도 놀라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장건은 멍했다. 한편으론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왜 자기의 눈을 스스로 없애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적수의가 한 행동에 냉고사는 동요하지 않았다. 냉고사는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건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장건은 냉고사의 공격도 미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앗!”
장건은 등허리가 서늘하게 얼어붙어 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보법을 펼쳤다.
아슬아슬하게 반 정도는 비껴냈지만 장력의 일부가 내부로 파고들어 경락을 손상시키며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어느 샌가 적수의도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장건은 이번에도 적수의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서가촌에서 팔각활빙보라고 불렸던 보법이다.
피 묻은 적수의의 손이 장건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장건은 벌써 적수의가 뻗은 팔의 궤도에서 벗어난 후였다.
적수의는 헛손질을 하다가 멈추더니 장건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정확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눈으로 보고 있지도 않은데 고개를 돌리는 건 아마도 오랜 습관 때문일 터였다.
“이놈! 잡았다!”
정면으로 적수의의 뻥 뚫린 눈을 본 장건은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쭈삣 돋았다. 적수의의 뾰족한 손끝이 장건의 가슴을 긁고 지나갔다. 짐승의 발톱에 긁힌 것처럼 옷이 찢어지고 살이 갈렸다.
“으윽!”
장건은 재차 보법을 밟았다. 방향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장건 특유의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적수의는 좀 전과 달랐다. 적수의는 장건이 움직여서 피한다 싶은 순간 귀신같이 공격을 멈추고는 곧바로 따라붙었다.
장건이 몸을 팽그르르 돌리면서 배를 찍어오는 적수의의 손톱을 간발의 차로 비껴내려 하였는데, 적수의의 손톱이 장건의 움직임을 그대로 쫓아와 결국은 장건의 옆구리를 뜯어냈다.
찌이익!
장건은 아연실색해서 연속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극쾌속인 백귀살의 공격까지도 피할 수 있었는데 그보다 느린 적수의의 손을 피할 수가 없다!
아니,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훨씬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적수의는 장건이 어떻게 움직이든 주저함 없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따라온다.
장건은 어깻죽지와 등짝을 각각 한 번씩 더 긁혔다. 언제 자기가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나 놀랄 정도로 허둥거리는 걸 스스로 느꼈다.
장건의 신법은 미세한 근육들이 섬세하게 합(合)을 맞추어 만들어내는 것인데 마음이 심란하다보니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아 동작도 굼떠졌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적수의만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장건은 허둥거리다가 냉고사가 날린 일장을 가슴에 허용했다.
펑!
장건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건아!”
소왕무와 대팔을 비롯한 소림 측 이들이 놀라 외쳤다.
다행히도 장건은 금세 일어섰다.
“후우, 후우.”
장건이 숨을 내뱉는데 얼어붙어서 빙결된 습기가 반짝거린다. 내뿜는 숨에 핏기가 어려서 붉은 서리가 앉은 것처럼도 보였다. 약간의 내상을 입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냉고사는 일격을 성공했음에도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장건의 막대한 내공이 일으킨 반탄력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방향이 조금만 어긋났으면 되려 자신의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당금 강호에서 어느 누가 자신의 손목을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냉고사는 얼굴을 굳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군.”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 정도의 무위라면 장차 북해에 큰 위협이 될 게 뻔하다. 결코 살려둘 수 없었다.
적수의가 냉고사의 옆에 와 섰다. 적수의는 가만히 기를 퍼뜨려서 장건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크크, 느껴진다 느껴져. 놈이 힘들어하고 있는 게 느껴져. 아까보다 숨이 거칠어지고 내공의 흐름도 불규칙해졌군. 출혈도 누적되어서 점점 더 힘들어질 게야. 피 냄새가 짙어졌어.”
장건은 피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적수의를 보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최고수들이 원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방장 대사!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손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안위는 걱정하지 말게. 우리 중에 몇은 황천을 건너겠지만 살 만큼 살았으니 여한은 없어.』
원호가 고개를 저으며 전음으로 답했다.
『선배님들은 준비가 되셨겠지만 건이는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움직이면 건이는 우리를 보호하려 할 테고 오히려 더 위험해집니다. 실력으로는 밀리지 않아요. 다만…….』
원호는 장건의 얼굴 표정을 보고 장건이 크게 심란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적수의가 스스로 눈을 파냈을 때부터다.
무인은 단단한 심지도 중요한데 장건은 너무 여리다. 하긴 그래서 무인이 되지 못하겠다고 은퇴를 하겠다던 것이니 장건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원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그리 크지도, 낮지도 않게 적수의를 불렀다.
“적수의라 하였소?”
뜬금없이 자신을 부르자 적수의가 묘한 표정으로 원호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느냐?”
원호가 사뭇 공손하게 반장을 했다.
“소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진정한 무인을 보았소이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소.”
적수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나를 두고 금칠을 하는 것이냐?”
“신체 일부를 훼손함으로써 나머지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오감극단(五感極端)의 방법!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는 없는 방법 아니겠소?”
“그, 그렇지.”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승부에 임하는 그대의 진지한 각오를 보니 무인의 귀감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그대와 같은 무인이 있어 사람들이 강호를, 무림을 동경하는 것 아니겠소?”
“그게 무슨…….”
적수의가 느닷없는 장황한 찬사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원호가 장건을 불렀다.
“건아.”
장건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원호를 보았다.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원호는 장건을 향해 괜찮다는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지만 정말 훌륭한 무인이시다. 너도 무인으로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행동하거라.”
“예의…… 요?”
“그래. 무인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상대에게 똑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이니라.”
원호가 유독 ‘최선’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장건은 탄성을 냈다.
“아…….”
그제야 혼란스럽던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듣고 보니 적수의가 자신의 눈을 찌른 이유도 이해가 된다. 눈을 없앤 대신 다른 감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공기의 흐름, 소리, 냄새, 기의 유동 등을 한층 증폭시켜 느끼면서 장건의 움직임에 훨씬 빠르게 즉각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마치 마음의 허물을 버리고 버릴수록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소림의 역근세수경과도 닮았다.
“이게…… 진짜 무인…….”
단 한 번의 승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건다.
장건은 서서히 피가 끓어올랐다.
처음 무공을 배우고 소왕무와 비무할 때가 생각났다.
소왕무는 장건이 자신을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상처를 받았었다.
장건에게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이었다.
장건의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서서히 펴졌다.
떨림도 잦아들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적수의는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
평정을 되찾은 장건이 적수의를 보며 말했다.
“사과드릴게요. 방장 사백님 말씀이 맞아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어요.”
“어…… 어?”
장건이 차분하게 공력을 끌어올리는데 기세도 확연히 달라졌다. 단단해서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는 철벽처럼 느껴진다.
적수의와 냉고사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