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99
제4장 역사의 뒤안길
“으으…….”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된 침상도 없이 거적을 깐 바닥에 눕혀져 있는 승려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어디 성한 데가 없이 피에 물든 천을 감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을 돌보는 승려들도 어딘가 한 군데는 부상을 입고 있었다. 누워 있는 이들보다 상처가 조금 덜할 뿐이었다.
장건도 누워있는 소왕무와 대팔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소왕무는 냉고사에게 일장을 맞아 팔뚝이 부러지고 내상을 있었으며, 장건을 안고 도망 다녔던 대팔도 의외로 자잘한 상처를 많이 입었다.
장건이 깨끗한 천에 물을 적셔 대팔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아야야! 살살 좀.”
대팔이 엄살을 부리자 소왕무가 혀를 찼다.
“쯧쯧. 누가 보면 니가 제일 아픈 줄 알겠다.”
소왕무는 안색이 창백하지만 양팔에 부목을 댄 게 다고, 대팔도 눈에 띄는 큰 상처는 등허리 쪽의 검상이 다였다. 반면에 이들을 돌보는 장건은 전신에 잔뜩 광목천을 감고 있어서 제일 환자 같아 보였다.
대팔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이. 난 이것도 아파서 움직이질 못하겠는데 건이는 왜 이리 생생하냐?”
장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아파.”
“안 아파 보이거든?”
“운기조식을 하고 나니까 많이 나아졌어.”
“그게…… 가능하냐? 하루 이틀 운기조식을 해서 그 상처들을 낫게 만드는 게?”
“응.”
지난 번 싸움에 내공이 다 소진되었다면 회복 속도도 그만큼 늦어져 한동안 고생했을 텐데, 지금도 장건의 내공은 여전히 충만한 상태였다. 지금도 쉬지 않고 몸이 회복되는 중이었다.
혼루쌍독이나 자하의 내공이 실린 공명검 등의 막대한 공력을 계속해서 받아들인 결과다.
소왕무와 대팔은 정광이 흘러넘치고 생생한 장건의 눈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도 좀 가르쳐주라. 빨리 낫게.”
장건이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지금 경락을 다쳐서 운기행공이 잘 안 되지?”
소왕무와 대팔은 장건이 비법이라도 알려주는 줄 알고 눈이 반짝 빛났다.
“어!”
“그게 화후가 굳어서 그런 걸 거야. 하단전과 상단전을 공명시켜서 화후를 녹이면 진기가 원활하게 돌아. 그럼 운공이 잘돼서 금방 낫고…….”
“…….”
대팔이 귀를 후볐다.
“내가 뭐 잘못 들었나. 상단전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은 거 같은데…….”
소왕무가 부목을 댄 팔로 대팔의 어깨를 툭툭 쳤다.
“대팔아,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살아야 돼.”
하기야 검성 윤언강도 장건이 그렇게까지는 못할 줄 알고 자파의 비기를 알려주었다가 망했다.
대팔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 고수가 우리랑 낫는 게 똑같으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당연하지.”
대팔이 다시 물었다.
“근데 이해할 수가 없는 게, 공명검에 맞은 다른 고수들은 검기열상 때문에 다 요양하고 있잖아. 넌 수십 군데도 넘게 구멍이 났는데 왜 멀쩡한 거야?”
“그 구멍으로 다 흘려보낸 거야.”
소왕무와 대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동시에 되물었다.
“공명검을?”
장건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공명검 중에서 분해되지 않은 부분이라든가……, 검기열상을 일으키는 열화검기(熱火劍氣)? 뭐 그런 거?”
“…….”
“공명검을…… 분해…… 해서?”
“응.”
“밖으로…… 내보내?”
“응. 처음에 그걸 못해서 베인 건 아직 안 아물었어.”
장건은 북해빙궁의 음한기공과 화산파 자하신공의 내공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빙정석이 없이도 검기열상을 스스로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니 아직 안 아물었을 뿐이지, 낫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공명검에 맞은 다른 최고수들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 대팔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야, 소왕무야. 니 말이 맞다. 우리가 고수가 되는 거보다 그냥 건이랑 친구하면서 사는 게 백배 천배는 더 낫겠다.”
“그걸 이제 알았냐?”
소왕무가 대팔에게 핀잔을 주고는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다.
“내가 다 나으면 그때 그 약속 꼭 지킬 테니까, 나중에 집에 가거들랑 보자. 알았지?”
“그때 약속?”
“아 그거 왜 있잖아. 좋은 데 같이 가자고 한 거.”
소왕무가 크크 하고 음흉하게 웃자, 대팔도 같이 웃었다.
“으흐흐.”
그때 임시 병상으로 쓰는 전각의 밖에서 승려 한 명이 장건을 불렀다.
“건아, 나와 봐라.”
“예!”
장건은 소왕무와 대팔에게 인사했다.
“그럼 다시 올게.”
“어, 이따 보자.”
“방금 한 말은 우리끼리 비밀이다. 알았지!”
장건은 고개를 끄떡해 보이면서 늘상 그랬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전각을 나갔다.
그런데 소왕무와 대팔은 장건이 전각을 나가는 순간까지 뒷모습이 아니라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보았다.
너무 빨라서 잔상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뒤로 걸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장건이 이전보다도 더 대단해졌다(?)는 점이었다.
소왕무와 대팔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진짜 집에 가면 우리 부모님 얼굴 좀 보고 싶다.”
“난들 안 그러겠냐.”
천하제일 고수를 친구로 뒀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뭐라고 말을 할까?
소왕무와 대팔은 아파 죽겠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외원 밖에선 네 소저가 장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건을 바라보는 눈빛에 대견함과 흡족함, 따스한 애정까지 모두 깃들어 있었다.
천하제일인을 바라보는, 아니 천하제일인이 되기까지 곁에서 지켜본 소저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다.
“아, 왔어요?”
다소 멍하게 장건을 보고 있던 양소은이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자, 선물.”
장건은 벌써 냄새로 보따리 안에 든 내용물의 정체를 알았다.
“와! 고마워요.”
양소은과 백리연, 제갈영이 장건을 바라보는 눈망울은 여전히 촉촉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하연홍만 조금 애매한 얼굴 표정이었다.
“그거…… 정말 먹는 거야?”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으로?”
“천천히 씹어 먹으면 맛있어.”
하연홍은 어쩔 수 없이 이상한 눈으로 장건을 위아래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미산에서도 약초 심부름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약초에 대해선 어지간히 아는 편이었다. 보따리 안의 약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삼지구엽초를 그렇게…….”
“왜?”
장건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제갈영이 장건의 팔을 붙들면서 재잘거렸다.
“저 첩실 언니는 우리 오라버니가 그걸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몇 번을 설명해줘도 안 믿더라니까?”
“사실 지금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먹으면 좋을 거야.”
하연홍은 못내 찜찜한 투로 중얼거렸다.
“좋긴 좋겠지…….”
양소은이 킥 하고 웃었다.
“너무 밝히는 거 아냐, 너?”
양소은의 말에 하연홍의 얼굴이 빨개졌다.
“누, 누가요? 그게 아니라 삼지구엽초를 먹고 낫는다고 하니까 좋다고 한 거죠!”
백리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장 대협이 사갈마존의 혼루쌍독도 해소시켰는데 당연히 독초든 약초든 도움이 되겠지요.”
양소은과 제갈영이 흠칫했다. 어딘가 닭살이 돋는 말투였다.
“말투가 뭔가 우아한데?”
“너무 가식적이잖아!”
백리연이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들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가식이라니요. 이게 본래의 제 모습이랍니다. 천하제일인 장 대협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려면 그쪽도 노력들을 하셔야겠어요.”
“뭐냐, 너.”
“안 어울리게.”
양소은과 제갈영에 하연홍까지 백리연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백리연은 꿋꿋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그야말로 경국지색인 미인의 자태 그대로라 감탄하겠지만, 장건은 이 이후에 벌어질 사태가 더 두려웠다.
몇 번이나 거듭된 학습의 결과로 장건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하하, 근데 왜 갑자기 대협이라고 해요. 대협은 나도 좀 어색한데요.”
다행히도 네 소저의 관심은 금세 장건에게 돌아왔다.
제갈영이 먼저 말했다.
“오면서 우리끼리 합의했어. 소협 대협, 서로 헷갈리게 부르긴 좀 그러니까 임시로 대협이라 부르기로!”
“임시로?”
“당연히 임시지. 그리고 그 다음엔…… 앙! 영이도 몰라!”
제갈영이 부끄러워하며 장건에게 더 달라붙으려 하자 백리연이 제갈영을 끌어당기며 떼어놓았다.
“당연히 대협이죠. 어느 누가 천하제일인에게 소협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장건이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런가요. 전 잘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하연홍이 물었다.
“오늘도 안에서 다른 사람 돕고 있었던 거야?”
“응. 일손이 많이 부족하니까.”
천하제일인이 되었대도 이런 일들을 하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장건은 여전히 장건이었고, 천하제일인이라는 수사가 붙었대도 장건이었다.
하연홍은 그런 장건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절로 홍조가 들어서 얼굴이 뜨거워지자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너도, 아니 장 대협도 좀 쉬어야 하지 않아?”
하연홍의 어색한 말투에 장건이 더 어색했다.
“난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평소처럼 불러.”
“어어, 그, 그럴게.”
하연홍에게는 다행히도 양소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방에서 정신없이 오가는 이들을 보며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다. 짜잔하고 천하제일인이 되고 나면 그냥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소저들도 동의했다.
“나도.”
“저도 환호하고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장건은 살짝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유의 몸이 되면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장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서 마음처럼 곧바로 소림사를 떠나긴 어려웠다.
사건이 생겼으면 그 뒤에 수습하는 것도 누군가의 일이었다.
장건은 금세 회복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워낙 부상당한 이들이 많아 뒷수습이며 정리며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장건이라도 남아서 한 손을 보태야 했다. 물론 장건의 성격상 가라고 해도 갈 수가 없었겠지만…….
하물며 일손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거듭된 악재를 거치면서 소림사의 곳간은 이미 거덜이 난 상황이었다. 약재도 부족했으며 재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장건의 부친인 장도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사람을 비롯해 귀한 약재들을 빠른 시간 내에 충분히 확보하긴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림사를 괴롭힌 건…….
생각지도 못한 북해의 삼천 병력이었다.
☆ ☆ ☆
금분세수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강호 무림에 천하제일인과 삼황선원의 가치에 대한 소문이 한창 퍼지고 있을 무렵.
정신없이 뒷수습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원호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백의전주 원강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예. 자기들이 가져온 식량은 다 떨어졌다고…….”
원호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밥을 내놓으라고?”
“예…….”
원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한테 칼질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밥을 내놓으래? 그놈들을 불러온 게 황궁인데 황궁에선 뭘 하고 우리한테 그래!”
북해빙궁의 삼천 무사들에 대한 얘기다. 그들은 멀리 후퇴하지 않고 우선 인근 산중에 숨어들어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호도 그들이 은근히 신경 쓰이던 참인데 뜻밖에도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양식을 내놓으라고…….
원강이 민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관부에 사람을 보내봤는데 묵묵부답입니다. 아마도 북해와 더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 걸 경계하려는지…….”
“이이이……!”
아무리 적이라지만 차마 승려의 입에서 다 굶어죽게 내버려두라는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원호는 이마에 핏대만 세웠다.
“못 주겠다면? 그럼 자기들이 어쩔 거라던가!”
원강이 답했다.
“양식을 내놓든지 자신들의 주군을 풀어주든지 알아서 하랍니다. 아니면 주변을 약탈하면서 돌아다니겠다고…….”
원호는 입을 쩍 벌렸다.
“안 주면 약탈을 하겠다고?”
절로 치가 떨렸다.
그들이 약탈을 하게 되면 결국은 관부에서도 나설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그동안 양민들이 입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가 북해의 요구를 무시하면 죄 없는 양민들이 다치고 죽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거지같은 놈들이…… 이상한 걸로 협박을…….”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협박이었지만 소림사로서는 무시할 수가 없으니 의외로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 소림사로서는 이도 저도 못 하고 한순간에 거지 삼천 명을 끌어안게 되고 만 셈이다.
원호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허어! 살다보니…… 별 미친놈들이 다 있네.”
원강은 ‘방장 사형이 그런 말씀을 하는 건 좀……’, 하는 눈빛으로 원호를 힐끗 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상황은 이해가 된다.
이미 장건의 무위가 하늘을 찌르니 무력으로는 안 되겠고, 그렇다고 주군을 두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소림사를 압박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 붙을 데가 없어서 하필 우리한테 빌붙어!”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켜보는 원강으로서도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다.
원강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로서는 삼천이나 되는 머리를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습니다. 북해 문제부터 조속히 처리해야 합니다.”
“나도 아네. 하지만…….”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강호 무림 전체가 걸려 있어 소림사 독단적으로 북해빙궁의 포로들을 놓아주고 말고 하기 어렵다.
심지어 화산파에서는 소림사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직접 북해빙궁의 포로들을 심문하겠다고까지 한 마당이다. 다른 문파들 역시 사람을 보내겠다고 연락해 왔다.
하나 그렇다고 북해의 삼천 무사들을 먹여 살리며 언제까지고 그들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원호는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건이가…… 삼천 명을…….”
원강은 원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눈이 퀭해졌다.
“방장 사형.”
“아, 미안하네.”
장건이 삼천 명을 혼수상태로 재워버리면 한 삼 일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원호는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강이 말했다.
“그래도 말입니다. 만약 검성의 말이 사실이었다 쳐도 우내십존이 정말로 살육을 벌일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원호가 씁쓸하게 말했다.
“우내십존은 도덕군자가 아니지. 사파를 멸절시키고 지금의 세상을 만든 게 그들일세. 마지막 순간까지 건이를 죽이려 들었던 검성처럼, 환야도 떠나는 순간까지 장건을 죽이려 했네. 기한이 되면 그들은 약속대로 북해빙궁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 걸세.”
“휴……, 어쨌든 저들도 저들의 주군이 풀려나야 북해의 본궁에 있는 처자식들이 살겠군요.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잠시 생각하던 원강이 의견을 말했다.
“허면, 더더욱 다른 문파들이 모두 오기를 기다리면 늦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강호 정세를 보면 거대문파와 중소문파가 연일 대립 중입니다. 설사 각 문파의 대표들이 모두 모인다 해도 또 그중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대립각이 설 게 분명하지요.”
“시간이 계속해서 지연되면, 검성이 말한 한 달 내로 저들을 돌려보낼 수 없게 되겠지.”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강호 전역에서 각 문파의 대표들이 모여 결론을 내는 데만도 한 달은 족히 걸리리라.
결국 원호의 손에 만 명이나 되는 이들의 목숨이 달린 셈이었다. 설사 그 대부분이 방금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적인 이들의 목숨이더라도…….
원호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한 시진 후에 북해의 두 부녀(父女)를 계율원으로 모시고 오게.”
“부녀……가 맞겠지요?”
원호가 원강을 빤히 보다가 인상을 썼다.
“뭐든 간에 됐으니까 그 두 사람을 한 시진 후에 계율원으로 모시게.”
원호는 불장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원강의 물음에 원호는 절뚝거리고 문을 나서면서 소리쳤다.
“축객(逐客), 독촉하러!”
☆ ☆ ☆
“허, 좋오타!”
“거 시워언하구먼.”
“느긋하니 참 편해.”
“무릉도원이 따로 있누. 멀리 가 찾을 것도 없네. 여기가 무릉도원이지.”
전 방장 굉운이 머물고 있는 작은 침소에 십수 명의 노인들이 누워서 뒹굴 대고 있었다.
각대문파의 최고수들이다. 하나같이 병색이 완연하고 몸에 친친 감은 광목천에는 핏자국이 뚜렷하다.
그래도 표정만은 더없이 밝았다. 오죽하면 방이 좁다 보니 서로 뒹굴다가 부딪치기가 일쑤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들이다.
방 가운데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불이 지펴진 게 아니라 하얗게 서리가 앉았다. 야용비가 가지고 있던 빙정석을 모두 모아 넣어둔 것이었다.
하여 방 안은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말야, 굉운 대사?”
최고수들 중에 벽력도가 굉운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하시지요.”
“누워만 있다 보니 심심해서 그러는데…… 차 한 잔 마실 수 있었으면 딱 좋겠구만.”
운일도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일세. 이왕이면 곡차 뭐 그런 거.”
굉운이 허허 웃었다.
“검기열상에 곡차가 별로 안 좋습니다.”
육망지 고릉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그거 한 잔 못 마시게 하나.”
그때 문이 열리면서 원호가 들어섰다.
최고수들이 원호를 보고 반색했다.
“오, 방장 대사 오셨는가?”
원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시긴요? 밖에서 다 들었는데, 말 잘하셨습니다. 살면 얼마나 사신다고 여기들 옹기종기 모여서 남의 절간 양식을 축내고 계십니까? 당장이라도 짐 싸서 나가시지요?”
무영문의 반오가 껄껄 웃었다.
“방장 대사가 곡차 한 잔 내어주면 마시고 가야지. 죽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곡차 한 잔 못하고 가는 건 무섭네.”
철담공도 웃었다.
“삼도천을 건너려도 팔다리에 기운이 있어야 하지. 안 그런가? 일주일 째 절밥만 먹고 있으니 기운이 안나.”
원호가 억지웃음을 짓는다.
“허허, 그래서 곡차 드리면 그땐 다리가 풀렸다고 주저앉으시게요?”
죽림옹이 짐짓 놀란 척했다.
“허어! 방장 대사가 대오를 이루셨나. 안 보고도 앞일을 훤히 아네 그려.”
최고수들이 죄다 껄껄대며 웃었다.
“이분들이!”
원호가 머리에 핏대를 세우자 굉운이 넌지시 불렀다.
“온 김에 자네도 잠시 운기조식이나 하다 가게.”
“끄응!”
원호는 한쪽 구석으로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앉자마자 피비린내가 훅 끼친다.
다들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한 부상들을 입은 상태다. 빙정석의 효능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 방장 대사는 좀 어떤가?”
장안대호의 물음에 원호가 투덜대듯 답했다.
“그냥 그렇습니다.”
원호는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매만졌다. 또 피가 점점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원호의 상처가 다른 최고수들에 비하면 제일 경미한 편이라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아물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깊이 베인데다 회복이 늦기 때문에 아마 이대로 아물어도 평생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지 몰랐다.
“뭐, 말은 그래도 젊음이 좋긴 하구먼. 우린 이 방을 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방장 대사는 지팡이 하나 짚고 잘도 다니네, 그려.”
장안대호의 말에 다른 최고수들이 맞장구를 쳤다.
“건이를 봐. 하루 만에 벌떡 일어났다잖아.”
“허, 그 녀석은 기운도 좋아. 나도 한 십 년만 젊었으면 바로 박차고 일어나는 건데.”
“아서. 십 년 젊었으면 공명검에 맞기 전에 윤가 놈 면상에 주먹질부터 먼저 할 생각을 해야지.”
“그것도 그렇군!”
최고수들이 또다시 껄껄 웃었다.
그러다가 원호를 자꾸 놀린 게 미안했는지 화룡소 반오가 넌지시 말했다.
“이보게, 방장 대사. 어차피 소림사에 몸을 의지해 겨우 연명하는 처지에 무슨 도움이 될까 모르겠지마는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을 해보시게.”
원호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조만간 북해빙궁의 포로들을 석방할 생각입니다.”
“응?”
최고수들과 굉운이 의외의 화두에 원호를 주목했다. 최고수들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유가 있겠군. 말해보게나.”
원호가 북해빙궁의 삼천 무사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양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고, 더불어 북해빙궁의 죄 없는 처자와 아이들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원호의 얘기를 듣고 난 굉운과 최고수들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소림사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군.”
굉운이 조용히 말했다.
“여러 은원이 얽혀있으니 쉬운 일이 아닐 것일세.”
“그렇겠지요.”
은원이라는 건 곧 소림사에 가해질 외압이기도 하다.
최고수들은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석랑자가 입을 열었다.
“결국 윤가 놈의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게 되는 겐가?”
운일도장이 말했다.
“윤가 놈의 생각대로 되는 건 내키지 않으나 어차피 그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세. 다만 소림사가 그 때문에 곤혹을 치를까 염려되네.”
칼과 계략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기백 년을 구른 노강호들이었다. 소림사가 다음에 겪을 일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른 문파들은 그들의 새로운 적, 북해빙궁의 출현을 내심 크게 반길 터였다. 하나 소림사가 눈뜨고 적을 놓아준 데 대해 책임을 전가시키려 들게 뻔했다.
소림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것이 다른 문파들에게 꼬투리를 제공하는 빌미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벽력도가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북해가 아니라 다른 문파들의 압박에 대해 묻는 것이다. 원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감당 못 하지요. 당장에 선배님들께 약 한 첩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아시지 않습니까.”
최고수들도 소림사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공명검의 검기열상에 조금이라도 효과를 보려면 소환단에 버금가는 영약이 필요했다. 물론 소림사는 그만한 영약을 조달할 여력이 없다. 독선의 중독 사건 때 이미 약재창고를 탈탈 털어서 남은 게 없다는 건 최고수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빈곤한 상황에서 여러 문파들이 합심해서 소림사를 찍어대기 시작하면 소림사는 여지없이 휘청댈 수밖에 없다.
“우리 걱정은 마시게. 하나 건이는 달라. 소림사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천하제일인이라도 강호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울 걸세. 소림사는 건이를 위해서라도 강호 무림을 이끌 필요가 있네.”
육망지 고릉의 말에 원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건이는 집으로 보낼 겁니다.”
최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맞다. 그랬지.’하는 표정들이다.
“하지만 그건 금분세수식 전에 한 말이지. 기껏 천하제일인을 배출해놓고……, 아깝지 않겠는가?”
원호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답했다.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일 겁니다만, 아까워도 지켜주기로 약속을 하였으니 지켜야지요.”
장안대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신만고 끝에 천하제일인이 나왔건만 방장 대사가 할 일은 더 많아지고 고달파졌군!”
원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건이는 강호가 아니더라도 앞으로든 옆으로든 계속 나아갈 겁니다. 저는 뒤에서 건이가 쓰러지지만 않도록 받쳐주면 되겠지요. 그게 제가 할 일인 것 같습니다.”
굉운이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최고수들도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맞네. 그게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지. 자네의 얘기를 우리나 윤가 놈이나 진작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죽림옹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장 대사의 의지가 그러하니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어느 쪽으로서도 불편하겠군. 조만간 돌아가겠네. 그게 소림사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원호가 말했다.
“이미 각 문하 제자들이 좋은 약을 들고 출발했다 했으니 머잖아 도착할 겁니다.”
산산노사가 웃었다.
“이거 명백한 축객령이군, 그래.”
벽력도가 원호에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어차피 소림사의 신세를 져야 할 테니, 혹시 필요하다면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방장 대사 마음대로 알아서 하시게.”
운일도장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래. 우리 애들이 오면 찜 쪄 먹든 뭐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편한 대로 하게나.”
다른 최고수들도 동의했다.
“사실 이번 일은 소림사 덕에 황궁과 검성의 음모가 파헤쳐진 것이지.”
“응당 뒤처리에 대해선 강호 무림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고.”
“사문의 존장은 생사가 오락가락하는데, 고얀 놈들이 기 싸움한답시고 예까지 와서 난장을 부리진 않겠지.”
최고수들의 말에 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원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최고수들은 어쩐지 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뭔가를 허락한 기분이 드는데…….”
벽력도의 말에 원호가 실소했다.
“밥값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알겠네. 뭐, 이젠 방장 대사가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
태청진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윤가 놈의 종적은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사방에서 제가 감추었다고 내놓으라고 성화입니다.”
“그 정도야 우리가 증언해줄 수 있지.”
“증언을 들으려면 여기로 와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우리야 여길 나서는 순간 바로 시체니까.”
최고수들은 다시 껄껄 웃었다. 그런데 벌써 목소리가 쉬어 있다.
원호는 최고수들의 허옇게 뜬 얼굴을 보고 처연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있었다면 굉운부터 치료했을 것이다.
장건의 부친인 장도윤이 힘을 쓰고 있대도 제대로 된 영약을 구하는 건 어렵다. 각 문파에서 귀한 영약을 가지고 출발한 이들이 어서 도착해야 조금 나아질 터다.
하나 그들이 도착하면 소림사로서는 번거로운 일이 시작될 테니…….
원호는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표정을 애써 감추곤 불편한 다리를 끌며 일어섰다.
“이만들 쉬십시오.”
☆ ☆ ☆
북해빙궁의 궁주인 야일첨과 야용비는 초췌한 모습으로 계율원 대청까지 끌려왔다. 대청의 좌우로 나한들이 곤을 들고 늘어서서 둘을 지키고 섰다.
원호와 다른 원주들이 앞쪽에 둥글게 모여 야일첨과 야용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불려왔음에도 야용비의 표정은 그리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미리 알고 있었소?”
원호의 물음에 야용비는 담담히 대답했다.
“혹시 몰라 일러두긴 하였으나, 실제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군요.”
“양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목숨을 부지하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이오?”
야용비의 눈매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아니. 소림사와 전승자, 둘 중 하나도 없애지 못하고 물러나게 될 줄 몰랐다는 거지요.”
원주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입이 험하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원호가 손을 들어서 원주들을 제지했다. 그리곤 야일첨과 야용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야일첨이 얼굴에 힘을 주고 물었다.
“우릴 어쩔 셈이냐.”
원호가 되물었다.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야용비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당연히 놓아주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본궁의 무사들이 이 주변을 모조리 휩쓸고 다닐 테니까. 부처를 모시는 이들이 수천 명이 죽고 마을들이 통째로 불에 타버리도록 방관하진 않겠지요? 그 책임은 오로지 소림사에 있어요.”
“저런 악독한!”
“뉘우치는 기색조차 하나 없구나!”
원주들이 분개하자 원호가 재차 말렸다. 그러더니 잠시 야일첨과 야용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시오.”
야일첨과 야용비가 약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원주들이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합의된 내용인 듯했다.
“흥.”
야일첨과 야용비가 주변을 경계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야용비가 야일첨을 부축하며 일어서는데 원호가 다시 말했다.
“단, 한 사람뿐이오.”
“뭣이?”
야일첨은 원호를 쳐다보았으나 원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소림사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야일첨이 야용비를 뒤에 두고 나섰다.
“본인이 남겠다.”
야용비가 야일첨을 말렸다.
“아니에요, 파파. 궁에는 나보단 파파가 필요해요.”
“난 어차피 글렀다. 지금은 북해까지 가는 길도 견디기 어려울 게야.”
야용비가 원호와 원주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번 사건은 모두 내가 꾸민 것이니 파파가 아니라 나를 잡아두도록 하세요!”
하지만 야일첨이 고개를 저었다.
“용비야, 넌…… 소림사에 남아 있기 어려운 몸이다.”
“파파도 마찬가지에요! 각대문파에서 조사단이 도착하면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실 거예요.”
단순히 이번 사건의 주범이기 때문이라든가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때문만이 아니다. 강호 무림으로서는 오랜 세월 감추어져있던 북해에 대한 온갖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떤 지독한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야일첨은 각오를 단단히 한 얼굴이었다.
“난 괜찮다.”
듣고 있던 원호가 말했다.
“그 말이 맞소. 본사가 둘 중에 어느 쪽이든 한 사람을 다른 문파들에 넘겨준다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오.”
야용비가 원호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러니까 나를 잡아가세요! 파파는 당신들의 고문을 견디지 못할 거예요!”
원호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본사는,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부처를 모시는 사찰이오. 많은 사람들이 해코지를 당할 걸 알기에 그대들을 놓아주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해코지를 당하라고 그대들을 내어줄 수도 없소.”
야일첨과 야용비는 원호의 말에 담긴 고뇌를 느꼈다. 특히나 소림사의 상황에 밝은 야용비는 원호의 고민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를 저들에게 내어주면 세상 사람들은 소림사가 주인 행세도 못하는 바보라고 우습게 여기겠죠. 그렇다고 소림사가 우릴 내어주지 않고 전면에 나서기에도 버거울 거예요. 지금 혼돈의 격랑(激浪)에 휩쓸리게 되면 내실이 부족한 소림사는 아예 전복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원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잘 알고 있구려.”
봉문이나 다름없는 강호활동의 금지를 선언한 것도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온갖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 중인 강호 무림의 중심에 선다는 건 지금의 소림사로서는 어려운 얘기고, 그게 현실이다.
야용비가 물었다.
“그래서 우릴 어쩌겠다는 거죠?”
원호가 야용비와 야일첨을 차례로 보며 입을 열었다.
“본사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떤 중죄인이든 관계없이 죄를 고하며 참회하면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소.”
야용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원호가 무슨 얘기를 하려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참회동!”
야용비가 일그러진 얼굴로 되물었다.
“중이 되란 얘긴가요?”
“선택은 그대들이 하시오.”
참회동에서 평생 면벽하며 산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 역시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나 원호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때 갑자기 야용비가 말했다.
“내가 하겠어요.”
야용비가 나서자 원호와 원주들이 모두 놀랐다.
“안됐지만 본사는 여아를 받아들일 수…….”
야일첨도 놀라서 야용비를 꾸짖듯 소리를 높였다.
“용비야!”
야용비가 질끈 이를 물었다.
“나는……, 나는…….”
야일첨은 정좌를 한 채 눈을 감았다.
사악, 사악.
야일첨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시진이나 거듭된 회의가 끝나고 결국 야일첨의 삭발식이 거행되는 중이다.
야일첨은 이대로 머리를 깎은 후, 숭산 봉우리의 깊고 한적한 동굴에서 평생을 참회하며 살게 될 터였다.
물론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며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승려가 되길 원할지도 모르나, 당장은 결코 그럴 리가 없었다.
원호는 잠시 삭발식을 지켜보다가 절룩거리며 계율원 대청을 나와 섰다.
그의 옆으로 원강이 나와 섰다.
멀리 나한 둘과 그 가운데에서 변장을 하고 가는 야용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양성구유(兩性具有)…….”
원강이 중얼거렸다.
“오래 전 서장 밀교가 날뛸 때 우리가 양성인을 참회동에 수계(收繫)한 적이 딱 한 번 있더군요.”
“서장 밀교에서는 양성인을 고귀한 존재로 생각하고 따르는 경향이 있지.”
“양성인이 참회동에 든다 해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았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방장 사형께선 그의 부친이 남아야 한다 하셨습니까? 어찌 보면 저 소궁주가 그의 부친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맞네. 훨씬 더 위험하지. 그래서 내보내자 했네.”
“예?”
원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십 년 후에 본사가 대문을 활짝 열었을 때, 강호에 본사가 설 자리가 있어야 할 테니까.”
원강이 흠칫했다.
원호는 야용비가 강호 무림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가 너무 빨리 질서와 안정을 찾게 되면, 소림사가 내실을 탄탄히 다진 후에 끼어들 여지도 남아 있지 않게 될 터였다.
“방장 사형…….”
“아무 말 말게. 지금의 내 모습이 검성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
원호는 고개를 돌리곤 불장에 기대어 야용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원강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강의 귓가에 야용비가 마지막에 남긴 섬뜩한 한마디가 맴돈다.
각오하세요. 본궁은 당신들 강호 무림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야용비는 독기를 품었다. 원호가 원한 게 그것이라면 시작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결정이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칫 이 일로 소림사는 돌이킬 수 없는 역풍(逆風)을 맞게 될 수도 있었다.
만인에게 존경받는 천하제일인이자 화산파의 존장인 검성 윤언강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선택을 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금분세수식에 북해빙궁이 공격해왔을 때보다,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더 소림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원호는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소림사 역시 북해빙궁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역사의 뒤안길이라…….”
원호는 다시 한 번 야용비의 말을 되뇌었다.
삼황선원에서의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 원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 ☆
화산파는 이번 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강호의 모든 문파가 화산파를 배척하고 질타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냥 숨죽여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문의 존장이 그릇된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순 없었다.
화산파의 수뇌부는 밤을 새워 대책을 토의했다.
수많은 논의 끝에 장문인이 결론을 내렸다.
“북해마궁의 포로들을 문초해도 본파가 책임을 벗어날 길은 없을 걸세.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는 확실히 해야 하네.”
수뇌부들이 모두 장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째는 다른 문파가 찾아내기 전에 윤 사백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슨 방법을 쓰든 삼황채 절벽에 새겨진 사백의 마지막 심득을 확보하는 일일세. 그것만은 결코 다른 문파에 빼앗겨서는 아니 되네.”
장로 한 명이 우려했다.
“윤 사백을 찾는 일이야 전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삼황채 절벽의 심득을 본파가 홀로 확보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윤언강의 최후 일초식의 심득이 한 장의 비급이 아니라 절벽에 아로새겨진 흔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문파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로가 말을 계속했다.
“특히나 소림사는 윤 사백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 생각하고 있을 터, 그들의 도움을 얻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겁니다. 설사 다른 문파를 모두 설득한다 해도 소림사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해집니다.”
회의에 참가한 이들이 모두 수긍했다. 어쨌거나 소림사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장문인이 말했다.
“나 또한 설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네. 그러니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라고 말한 걸세.”
“그게 어떤…….”
“실력행사도 마다않겠네. 날이 밝는 즉시 화산오검(華山五劍) 전원과 청룡단(靑龍團)의 매화검수 스무 명을 보낼 것일세!”
장문인의 말에 수뇌부들이 바짝 긴장했다.
화산파의 무력을 상징하는 화산오검 전부와 매화검수 중 최고의 실력자들로 이루어진 청룡단을 내보내겠다는 건 한판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어지간한 문파 하나는 반나절도 안 되어 궤멸시키고 남을 전력이었다.
이런 상황에 다시 싸움을 일으킨다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화산파는 그만큼 절박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길이 없었다.
뭇 수뇌부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제 그들은 여차하면 강호 전체와 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한 건 화산파뿐만이 아니었다.
강호 전체가 주목하는 이번 일에서 얼마만큼 큰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향후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달라질 거라는 걸 모든 문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강호 무림의 미래를 거대 문파들의 잔치로만 내버려둘 수 없는 중소문파들로서도 소림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강호의 내로라하는 무인들 모두가 소림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또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