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40
제 1 장 수습
장건이 풍진의 일검을 받아낸 이후, 풍진은 약속을 지켰다.
쩡!
자신의 검을 바닥에 거꾸로 꽂아 넣고는 발끝으로 검신(劍身)을 걷어차 반으로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남은 반 토막의 검을 애달픈 눈으로 보며 검집에 갈무리했다.
이어 풍진은 중독이 되어 푸르스름한 얼굴임에도 해독을 하려 하지 않고 소림의 방장 굉운을 보며 크게 외쳤다.
“오늘 나의 무례한 행동으로 소림에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강호의 큰 백세지사(百世之師)인 소림의 정기를 훼손한 대가를 무엇으로 치룰 수 있을까마는, 오늘의 일과 청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방장께서는 부디 그 점을 감안하여 주시게나.”
사과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풍진은 강호에서 그 위치가 낮지 않은, 아니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는 우내십존 중의 일인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우내십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진은 약속대로 사과를 하였으며 소림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굉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홍오에게 한을 가지게 된 것도 무인으로서의 긍지가 지나친 까닭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말을 뒤집을 리 없다. 당장에 굉운이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따를 것이 분명하다.
풍진은 비록 정중하게 사과는 했으나 사과한 후의 태도만큼은 당당했다. 비쩍 마르고 볼품은 없었지만 그의 당당함에는 소림의 뭇 나한승들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좌중이 굉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요함이 감도는 와중에 굉운이 반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강호의 대소사(大小事)는 모두가 크고 작은 은원에서 비롯되며, 오늘의 일 또한 과거의 은원에서 시작된 바, 누구도 청성의 검께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모두가 굉운의 말에 동감했다. ‘복수’는 강호를 움직이는 가장 거대한 줄기이며 풍진이 가진 최대의 명분이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피해를 입은 소림이 풍진에게 복수한다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굉운이 말을 이었다.
“다행히 청성의 검께서 손에 사정을 두신 바, 본문 제자들 중에 목숨을 잃은 자가 없으니 오히려 큰 가르침을 얻었다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이대로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나한승들의 얼굴색이 살짝 변한다. 아무리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의 영역에서 피를 본 자를 내버려두면 소림의 체면이 상한다.
하지만 굉운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그러나 멀리까지 오신 손님을 소림의 문간에도 들이지 않고 내쫓는다면 그 또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모시기 어려운 분이지 않습니까.”
풍진은 소탈하게 웃었다.
“방장의 호의를 내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듣고 보니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기약하기도 어려운 나이일세. 그럼 염치불구하고 잠시 몸을 의탁하도록 하겠네.”
나한승들은 굉운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으나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데…….”
풍진이 장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 아이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네만.”
스스스.
쓰러져 있는 장건의 몸에서는 치명적인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풍진을 중독시킨 맹독이었다. 누구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다.
별수 없이 당사등이 성큼 나서서 장건에게 다가갔고, 잠시 후 장건에게서는 더 이상 독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당사등이 장건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독공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하면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벌어질 걸세.”
이후 풍진은 나한승들의 인도를 받아 손님의 자격으로 소림에 들게 되었다.
그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 ☆ ☆
생기 넘치던 푸른 녹음이 옅어지고 그 자리를 하얀 눈설이 조금씩 메우고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 걸린 조각구름들과 그 아래 눈 덮인 산사의 풍경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그곳이 얼마 전 두 차례의 거센 풍랑을 맞았던 소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다.
대신 늘 소림을 감싸고 있던 은은한 향내 대신 약재 달이는 냄새가 가득한 것이 평상시의 소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달그락 달그락.
소림의 정문으로 끊임없이 약재 등의 구호물자를 실은 마차와 수레들이 연이어 들어서고 있었다.
청록빛의 무복을 입은 네 명의 무인들도 그 수레의 행렬에 끼어 있었다. 표정이 하나같이 비장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자못 긴장하게 만들었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사등이 그들을 보고 눈인사를 했다. 무인들은 당사등을 보고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당사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통한 표정으로 외친다.
“백부님.”
그들의 목소리에 소림을 들어오던 사람들이 놀라 쳐다보았다.
당사등이 ‘허허’ 웃으며 무인들을 일으켰다.
“일어들 나라. 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왜들 그러는 게냐.”
당사등은 당씨 세가 전통의 무복 대신 단출한 하얀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얼마나 소림에서 마음고생을 했는지 천하에서 손꼽는 고수인 당사등의 눈가에도 피로가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개인적인 일로 본가에까지 누를 끼쳐 미안할 따름이구나.”
현 가주의 동생이며 당가의 실세 중 한 명인 당유원은 이 같은 모습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백부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당유원은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눈으로 당사등을 보았다. 당사등은 당유원을 달랬다.
“괜찮다.”
당사등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물었다.
“내가 말한 약재들은 모두 챙겨왔느냐.”
“일단 급한 대로 제가 가져올 수 있는 것만 챙겨 왔습니다. 곧 배편으로 더 도착할 것입니다.”
“본가의 창고가 텅텅 비었겠구나.”
당유원도 당가의 무인들도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 일에 당가는 상당한 가산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유원은 문득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질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독공을 가르치러 갔다.”
“네? 그럼 질녀가 써 보냈던 얘기가 사실이었습니까.”
당사등은 참지 못하겠는지 쿡쿡 하고 웃었다. 전혀 그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런 아이가 곧 우리 식구가 될 테니, 그깟 창고 쯤 싹 비워지면 좀 어떠냐. 나는 이번 일이 비록 내 실수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될 것 같지 않구나.”
당유원은 아직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왜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소문내라 했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청성의 검을 받아낸 아이라니…….”
“더 자세한 얘기는 저녁에 예를 만나 물어 보거라. 지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준비는 해왔느냐.”
“물론입니다.”
소림에서 중독된 이 중에는 고위급 관리의 가족이 끼어 있었다. 무려 정사품의 관직인 지부(知府)대인의 가족이다. 다행히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당유원과 당가의 무인들은 뭇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수레를 끌고 당사등을 따라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장실로 안내하기 위해 사미승이 나와 있었다.
방장실에는 방장 굉운을 비롯해 반령포(半嶺袍)를 입은 관리 한 명이 동석을 하고 있었다. 정육품에 해당하는 관직인 정주부 통판(通判)이 지부대인의 명을 받고 나온 것이다.
당유원은 품 안에 넣은 두 장의 비단 봉투를 다시금 매만졌다. 거액의 전표가 들어 있는 봉투다.
대부분의 관리처럼 통판관인 엄승도 뇌물을 좋아한다는 걸 겨우 알아냈다.
이 봉투 두 장이 소림과 당가의 운명을 좌우할 터였다.
하지만 말실수를 하거나 관리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관리도 무림인을 두려워하나 무림인 역시 관리를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가 된다면 무력을 사용해야겠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군.’
방장실에는 방장 굉운과 통판 엄승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자못 엄숙한 분위기였으나 통판 엄승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당유원은 오늘의 일이 뜻밖에도 잘 풀릴 수 있다 판단했다.
통판 엄승은 독선을 보자마자 불안한 기색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방장 굉운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서 천오백 명을 중독시킨 독선의 능력이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목이 달아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방장 굉운과 당사등은 이야기를 끝낸 후였다.
소림으로서는 관의 개입을 원하지 않고, 당가에서도 일이 확대되는 걸 원치 않는다. 통판 엄승이 굉운을 믿고 의지한다면 그만큼 당가도 편해질 수밖에 없다.
당유원은 겨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중독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 ☆ ☆
풍진은 타고난 무인광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인정하지만 약한 자도 무시하지 않는다. 무인은 오로지 가진 바 무(武)로 말할 뿐이며 그 외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 홍오에게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후기지수 중 최강이라 불린 홍오를 강한 무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이들처럼 그를 선망했다.
그와 한 번 손을 겨루는 것이 당시의 풍진에게는 목표였다.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홍오의 무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여겼다.
하나 홍오는 풍진을 무시했다. 풍진을 무인으로 대접하지도 않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보다 못할 거라 폭언을 퍼부었다.
그것이 억울하고 서러워서 풍진은 긴 세월을 정진했다. 홍오에게 보란 듯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인정받길 원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분노보다도 애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최강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오랜 세월 한을 쌓게 했다.
그런데 홍오를 본 순간, 풍진은 당사등이 그러했던 것처럼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옛날 그토록 강하던 홍오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머리를 날려 버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홍오는 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풍진이 강해진 시간 동안 강해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반대로 풍진은 상상을 초월해 강해졌다. 벽을 보여준 홍오를 뛰어넘기 위해 그렇게 절치부심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홍오를 만났는데 홍오는 이미 복수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아까운 초라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홍오는 약하고 볼품없는, 그래서 강짜만 부리는 늙은 중일 따름이었다.
개미가 손가락을 물었다고 화가 나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개미를 죽이면 그만이지 개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지는 않는다.
지금 홍오를 보는 풍진의 시선이 그러했다. 굳이 따지자면 홍오를 개미가 아니라 발톱을 세운 맹수에 비교해야 할 테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정받는다는 건 자신보다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이미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약해진 홍오는 더 이상 풍진에게 인정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깊은 허탈감.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뭣 때문에 사문을 등지면서까지 이런 쓸모없는 중놈에게 복수를 하려 했을까.
그래서 풍진은 홍오를 마주친 순간, 풍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허허로운 웃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할 뿐이었다.
하나 풍진의 웃음을 본 홍오는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홍오는 눈을 치켜뜨고 호랑이처럼 으르렁댔다.
“이 망할 놈이, 웃어?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 이거다. 네가 감히 소림 산문 안에서 내 제자를 죽이려 했느냐고!”
“허허허…… 어허허허.”
“이 망할 말코도사 놈이 소림을 우습게봐!”
홍오는 웃기만 하는 풍진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눈가에 살기가 어렸다.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홍오가 주먹을 내질렀다.
확!
홍오의 승복이 한꺼번에 뒤로 젖혀지며 권풍(拳風)이 쏟아졌다. 풍진은 슬쩍 몸을 내밀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내맡기는 듯하다.
결과는 자명하다.
펑!
풍진은 바람에 휘말린 걸레쪼가리처럼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심지어 홍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풍진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지, 대놓고 맞을 줄은 몰랐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풍진에게 달려갔다. 풍진은 쌓아놓은 약초들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클클클.”
풍진은 자신을 부축하려는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혼자서 일어났다.
홍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네 이놈…… 정말 미친 거냐? 정통으로 맞았으면 뒈졌어.”
“카악! 퉤엣.”
풍진은 선혈을 한 움큼 가볍게 토해냈다.
그리곤 또 웃는다.
“클클클.”
목소리가 새는 것으로 보아 갈비뼈가 부러졌든가 폐에 상처가 생긴 것 같다. 결코 작은 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진은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나 웃던 풍진이 돌연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재밌냐? 가만히 서서 맞아주니 재미없지?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뭐?”
“어차피 네놈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장건이란 녀석이 내 검을 받아 버렸으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냐. 이미 그때 포기했어야 했던 일을……. 쓸데없이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이놈이 자꾸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할 일도 없으니 온 김에 절밥이나 먹고 돌아가야겠다. 아니면 이참에 머리 깎고 중이나 되어 보던지.”
“허! 이 말코가 아주 돌아 버렸구나.”
풍진과 홍오의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둘을 피해 돌아갔다.
풍진과 홍오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소림에 불어 닥친 폭풍은 그렇게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혈풍이 아닌 다른 바람이 소림에 불어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걸, 이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장건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겨우 사 일 만에 갈라진 살이 붙고 피가 멈췄다.
평범한 검이 아니라 검기가 깃든 검에 맞으면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검에 실려 있던 검수의 공력이 상처에 함께 파고들어 진기의 유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풍진 같은 절정의 검수에게 크게 베였는데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아물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풍진이 사정을 봐주었든 장건의 알 수 없는 능력이 발현되었든 말이다.
하나 장건은 상처가 나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파르르.
손이 떨렸다.
가슴에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풍진과 맞선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그때부터 장건은 이렇게 속앓이를 하고 있다.
무엇일까? 이렇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장건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평소의 장건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검.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가로지르는 하얀 검의 궤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공간이라는 제한된 영역의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날아드는 느낌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칼질을 할 수 있을까?
검을 휘두르는 외팔이 노인은 마치 신의 영역을 향해 달려가는 사나운 야생마와도 같았다.
바다를 가르고 산을 무너뜨리고.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신(死神)의 검이었다.
그런 검을 피해냈다.
희열이 느껴진다.
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기분보다도, 운기행공을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벅찬 희열을 느꼈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랬지?’
조금만 실수했어도 죽었다. 장건도 그것을 안다. 풍진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장건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할 것처럼 살벌하게 그어진 검이었다.
감탄과 두려움. 심장이 쭈그러드는 두 상반된 감정.
그래서 그렇게도 무서웠던 검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장건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가상의 풍진을 그려보았다.
가상의 풍진이 검을 든 채 뛰어오르고 허공을 수직으로 긋는다. 아무리 빨리 검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다. 그 무언가를 넘어서기 위해 풍진의 검은 바람을 탄다.
이윽고 바람의 결에 숨어든 풍진의 검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넘어서서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장건은 그 검을 본다. 바람의 결 사이로 파고드는 풍진의 검을, 정확히는 바람의 결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장건은 유원반배의 흡결로 바람의 결을 잡아당긴다. 바람의 결이 흐트러져서 숨겨졌던 풍진의 검이 드러났다. 워낙 강력한 내력을 품고 있어 바람의 결이 어긋났어도 궤도는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손으로 금강권을 펼쳤다. 금강권의 엄청난 회전력을 이용해 검을 튕겨내려는 것이다.
장건의 의도는 성공했다. 금강권의 강력한 경력이 검날을 타고 올라가 풍진의 진기 흐름을 살짝 끊어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부족해서 장건은 유원반배의 밀어내는 추결을 더했다. 그제야 겨우 검의 궤도가 틀어졌다.
갑자기 장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틀렸다.
금강권을 쓴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여파가 있었다. 최소한의 근육들을 이용했는데도 회전력 때문에 근육이 꼬였다. 장건의 몸이 일순 굳어서 둔해졌다.
겨우 검의 궤도를 틀어놨는데 피해야 하는 순간이 늦어서 결국 등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장건이 알고 있는 방법 중에 가장 강한 금강권을 쓰지 않으면 검의 궤도를 밀어낼 수 없고, 그렇다고 금강권을 쓰면 근육들이 꼬여 기껏 틀어낸 검을 완전히 피할 수가 없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아아.”
장건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장건은 내내 그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멋진, 하지만 그만큼 무서운 풍진의 검에 마음을 빼앗겼다.
한숨을 내쉰 장건이 문득 묘한 눈초리를 느꼈다.
“응.”
침상에 누워 있는 굉목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넌 문병을 온 거냐, 공상을 하러 온 거냐?”
“에헤헤.”
장건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장건이 생각해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에잉.”
굉목이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할 일 없으면 그만 나가 봐라. 가서 잠을 자든지 아니면 쉬든지.”
“아니에요. 그냥 딴생각이 잠깐 나서요.”
장건은 굉목의 병실을 청소하던 중이었다. 워낙 소림에 다친 사람이 많다보니 굉목은 잘 쓰지도 않는 쪽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건은 옆에 놓인 놋쇠 대야에 걸레를 빨다가 갑자기 장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노사님.”
“왜 그러냐.”
“세상에 절대적인 무공이라는 게 있나요?”
굉목은 장건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장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은요. 풍진 할아버지의 검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못 막았거든요. 제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완벽했어요. 그렇게 깔끔하고 멋진 검은 처음이에요.”
굉목은 깜짝 놀랐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사실 그 정도면 못 막은 게 아니라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풍진의 일검을 완벽히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우내십존 중에도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절정의 고수가 생사를 도외시하고 날리는 일검을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고서 막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장건은 그때 도망치지 않은 것이 막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란다.
물론 풍진이 나한승들을 죽이겠다 협박한 탓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굉목은 기가 막혀 죽겠는데 장건은 한술 더 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이번에야 한 번만 막으면 된다 하니 그랬지만 두 번 막으라면 못할 것 같아요.”
풍진도 그 일검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는 탈진해서 중독까지 되었다. 가만히 있는 장건의 목을 긋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같은 검을 두 번이나 쓸 수는 없었을 터다.
장건은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제가 막기만 하지 말고 먼저 공격을 하면 되잖아요. 그럼 기다렸다가 막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그, 그렇지.”
장건은 ‘아악!’ 하고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전 그런 방법을 금강권 하나밖에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장건은 이른바 ‘선공’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선공이 후공보다 두어 배는 더 위력적이다.
“다른 것도 알잖냐. 소홍권이나 대홍권도 알고.”
굉목의 말에 장건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것 말구요.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절 다시 공격을 할 수는 없는 그런 무공요. 금강권은 너무 위험해서 사용하기 싫거든요. 그렇다고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구요.”
그러고 보니 장건은 이제껏 내내 상대 공격을 막기만 하고 피하기만 했다. 사람을 때리기 싫어하는 탓도 있었으나 상대를 제압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탓도 있었던 것이다.
장건이 자주 쓰는 유원반배는 상대의 힘을 소진시켜 지치게 만드는 수법이지, 제압하는 수법은 아니다. 장건처럼 움직임이 간소한 아이에게 그런 지루한 방법은 맞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 외에는 상대를 다치지 않고 물러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계속 사용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금강권은 풍진 할아버지에게는 잘 통하지도 않고요. 풍진 할아버지의 그 완벽한 검을 넘어서려면 정말 절대적인 무공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즉 장건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이 아닌 일격필생(一擊必生)의 그런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장건이 말을 덧붙였다.
“무공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생겨난 거라면요. 전 내 몸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런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다치지 않게 한다고 해서 제가 계속 피해 다니는 것도 싫어요.”
보통 무인이 그 말을 들었다면 미쳤다고 할 테지만, 장건을 잘 아는 굉목에게는 정말로 흡족한 말이었다.
평화롭게 잘 살아가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칼을 맞는다면 어떤 마음일까?
아마도 두려워서 잠도 잘 자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간다.
대견하다.
대견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에 손이 간질거린다.
하지만 굉목은 그런 마음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너 독공 배우러 안 가느냐.”
“아차, 그러네요.”
장건이 독공을 배우는 시간은 오후였다. 오후에 당예에게 독공의 기본을 배우고 저녁에는 당사등이 잠깐 짬을 내 부족한 점을 보충한다.
장건은 처음엔 당가 사람들에게 배우기 싫다고 반대를 했었다. 당사등이 사람들을 중독시킨 나쁜 사람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당가에서도 책임을 지려하고, 자신이 독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따르기로 했다.
당사등과 굉목이 한 계약은 이미 틀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등이 일부러 당예를 붙였다는 걸 굉목은 알고 있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장건이 당가로 간다는 게 못내 걸리는 굉목이다.
“빨리 가 봐라.”
“하던 청소는 마저 하구요.”
“됐다니까.”
“그래도 청소는 마저 해야죠.”
장건은 굉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청소를 계속했다. 처음 볼 때부터 고집이 센 아이였는데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성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왠지 굉목에게는 뭉클하기까지 하다.
툭탁툭탁.
장건은 마치 청소를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정신없이 쓸고 닦고 치운다.
장건이 지나친 곳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다. 그게 당연한 일일 테지만 도가 지나쳐 탈일 뿐이다.
청소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끝낸 장건이 손을 탁탁 털었다.
“다 했으면 가라.”
“네. 그럼 쉬세요. 이따 다시 올게요.”
“오지 마라.”
“올 거예요.”
“오지 말라고 했다. 방해만 되니 오지 마라. 네놈 때문에 잠도 못 자겠으니.”
굉목은 파리한 안색으로 눈을 감았다. 굉목의 가슴에는 피로 얼룩진 붕대가 친친 감겨 있다.
조금 전 장건이 갈아 주었는데도 다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검상이 깊었다. 장건이 다 나은 것에 비하면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나 이것이 정상이다.
장건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굉목은 생각에 잠긴다.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청성의 검까지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이라…….’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굉목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으니까.
정말 죽을 만큼 싫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 봉인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도 몰랐다.
하나 곧 당가로 가야 하는 아이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일이 옳은 일일까?
더구나 방장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랬다가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일이 복잡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굉목은 쉽게 판단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아니, 생각에 잠기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곧 눈을 떴다. 뭔가 불편한 기운이 자꾸만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망할 녀석.”
굉목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가슴의 통증이 심하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은 하다. 아니,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죽을 것 같아서 움직이려는 것이다.
굉목이 힘들게 일어서려는데 의원이 들어왔다. 진맥도 할 겸 상태도 볼 겸 들른 모양이었다.
“오! 잘 마침 잘 왔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으신지요?”
“거기 앞에 보이는 것들 좀 옆으로 밀어주게. 아니, 그냥 발로 한 번 세게 차주게.”
“네.”
의원은 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잡다한 집기들을 보았다. 붕대와 깨끗한 천, 놋쇠 대야 등이 가지런히 잘 정렬되어 있었다. 딱딱 끝을 맞춰서 놓은 걸 보니 누군진 몰라도 성격이 꽤 섬세한 모양이었다.
“누가 청소를 하고 간 모양이군요? 방이 엄청 깨끗해졌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너무 깨끗해져서 새로 지은 방 같았다.
“그런데 왜 이걸 발로 차라고 하시는…….”
그 순간 의원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목 바로 아래에서 탁 막혀서 마구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으헙.”
괜히 숨이 막혀오고 온몸이 옭죄어 오는 듯했다.
굉목이 재촉했다.
“어서 차라니까.”
그 순간.
“으랴앗.”
의원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집기들을 내동댕이치고 발로 찼다. 정말 얄미운 사람을 보고서 참고 또 참다가 때리듯 그렇게 했다.
그제야 속이 좀 풀리는 듯했다.
“헉헉, 이게 대체…….”
굉목이 껄껄 웃었다. 그가 이렇게 소리 높여 웃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잘 했네. 여기 창문도 좀 열어두고 창렴(窓簾)도 대충 옆으로 밀어주게.”
굉목은 ‘대충’이란 말을 유독 강조했지만, 아마 굉목이 시키지 않아도 의원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의원은 거의 한달음에 창까지 달려가 늘어진 창렴을 양쪽으로 제꼈다.
그랬다가 그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쪽은 완전히 끝으로 밀어 버리고 다른 한쪽은 대충 반만 걸쳐서 젖혀 두었다. 마지막으로 창문도 삐딱하게 열었다.
“후아후아.”
의원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숨을 토해냈다. 왠지 모르게 답답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굉목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 만하군.”
내공이 얼마 되지 않던 예전에도 굉목의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였으니, 독정에 대환단의 기운까지 흡수한 지금은 말로 표현이 안 될 지경이다.
“망할 녀석. 공력이 깊어지더니 하는 짓이 더 괴악해졌구나. 이젠 정말로 진법이나 다름이 없어졌어.”
진법은 일종의 목적을 띤 의도적 배열인데 장건은 가장 깨끗하고 무결(無缺)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청소를 하고 사물을 정돈한다.
당연히 장건의 손이 닿으면 방 안에 놓인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다. 무공이든 학문이든 극에 달하면 같은 도를 깨우치게 된다더니 장건도 그런 모양이다.
굉목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 ☆ ☆
계율원 내 회의실.
원자배 승려들이 침중한 안색으로 모여 있었다.
긴나라전주 원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원호의 눈썹이 꿈틀댔다.
“뭐가 말인가.”
“당가를, 독선을 끌어들인 것 말입니다.”
쾅!
원호가 계도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사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탓하고 있는 것인가.”
“이 상황이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원호가 일갈하려 하는데 문수각주 원전이 원상의 편을 든다.
“솔직히 독선을 끌어들인 것은 사형의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원호가 고개를 돌려 원전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대체 이게 뭡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잃기만 했는데 당가는 얻어가기만 하는 꼴이 아닙니까.”
“당가도 가세가 기울 정도로 이번 일의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절반이 넘는 재산을 쏟아냈다 들었다.”
그러나 원호의 변명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소림은 값을 따질 수도 없는 대환단까지 모두 내놓아야 했으니까.
모두가 안다.
일반 고수도 아닌, 천하제일을 넘볼 수 있는 고수가 될 한 명의 재목이 황금 만 냥보다 귀중하다는 걸.
과거 홍오가 그리 사고를 쳤어도 강호 무림은 소림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천하오절 중의 일인인 문각이 소림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당가의 실수로 엄청난 피해가 났으나 소림은 당가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풍진이 소림의 제자들에게 해를 입혔으나, 책임을 묻지도 못한다.
강자지존.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고수의 부재(不在)라는 것은 소림에 있어 서러울 정도의 처연함을 가져왔다.
원호가 다시 소리쳤다.
“사제들도 장건이 그 짧은 사이에 청성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건 모르지 않았는가!”
이제 그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깝다.
원자배 승려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가 청성일검의 검을 막아냈다는 것은 강호가 뒤흔들릴 정도의 대 사건이다. 그러한 재목인 걸 알았다면 우내십존과 맞서서라도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내쫓으려 했다니…….”
더구나 장건이 당가로 간 연후에 고수가 되는 것과 엄청난 명성을 얻은 후에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라면 ‘소림이 보는 눈이 모자랐다’라거나 ‘아이가 독공에 더 자질이 있었다’는 정도이겠지만, 후자라면 ‘소림은 죽 쒀서 개나 주는구나’ 혹은 ‘자기 것도 제대로 못 지키는 머저리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만큼 강호 무림에서 소림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소림으로서는 최악의 선택만을 연이어 한 셈이 되어 버렸다.
“하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문각 태사조께서 제대로 된 진전만 남기셨던들 소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원자배 승려들의 얼굴은 더욱 침중해진다.
소림의 최고수이며 천하오절이었던 문각.
그는 제대로 된 후인을 남기지도 않았고, 자신의 진전을 홍오가 잇도록 하지도 않았다.
무공 이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라!
홍오가 끝끝내 문각의 진전을 잇지 못한 이유였다. 그래서 홍오도 자신만의 무공을 찾겠다며 강호를 전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문각은 절대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들었다.
그것이 지금 소림이 휘청거리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원자배 승려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원호가 눈을 치켜뜨며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뭣들 하는 겐가!”
천불전주 원당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더 남아 있은들 뭐가 달라질 것이며, 또 뭐가 더 좋아지겠습니까. 그래봐야 탁상공론을 불과할 터이거늘.”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머리를 모아야지!”
원당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사형. 이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무공 수련이라도 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자네들!”
원자배 승려들은 하나둘 회의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원호는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장건에게 자신이 손을 쓰겠다 나섰던 무공교두 원우까지도 원호를 외면했다.
“원우 사질!”
원우가 슬쩍 원호를 보며 말했다.
“사형. 우리는 소림을 지키고자 뜻을 모은 것이지, 소림을 망하게 하려고 사형에게 동조했던 것이 아닙니다.”
쿵.
원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공력을 담지는 않았지만 두터운 나무 탁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란히 놓여 있던 찻잔들이 달그락거린다.
방금까지 원자배 승려들이 모여 있던 계율원내 회의실에는 원호 혼자만이 남아 있다.
회의실은 싸늘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사제들의 시선처럼.
‘장건, 저 아이는 지독한 변비요! 약을 먹이고 수도혈을 짚어도 낫지 않는 변비가 세상에 어디 있소? 그것이 잘못됐다는 증거지요!’라고 말했을 때 한심하다는 투로 쳐다보던 굉봉의 눈빛과도 같았다.
장건을 내보냈을 때 자신을 보던 굉운의 눈빛도 딱 그러했다.
진의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독선을 끌어들인 것은 분명 그의 실수였다. 그러나 독선이 일만 잘 해결했다면 소림은, 원호는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그깟 아이 하나 데려가는 게 뭐가 어렵던가!”
화가 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원호는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래놓고도 뻔뻔하게 자신의 진전을 이은 거라고? 그래서 데려가는 거라고?”
쾅! 쾅쾅!
원호가 계도로 바닥을 두드리자 청석 바닥이 쩍쩍 패어나간다. 계도의 손잡이가 부서지고 원호의 손아귀에서 핏물이 배어 나온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물러나지 못한다. 악업을 저지른 당가의 손에 본문의 제자를 곱게 넘겨주지는 못한다.”
분노한 원호의 눈에도 핏발이 서, 마치 피가 눈동자에 들어찬 듯하다.
굉자배의 사숙들에게도, 원자배의 사제들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된 원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독선. 두고 봅시다. 당신은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