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47
제 8 장 뜻밖의 깨달음
퀭.
당예의 눈 아래에는 며칠 사이에 짙은 멍울처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굴 곳곳에는 아직 제갈영과의 한판 승부에서 생긴 영광의 상처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퀭.
제갈영의 눈 밑도 지독히 거무죽죽하다. 뺨에 붉은 멍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다.
제갈영과 당예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후우우우.”
당예와 제갈영은 겨우 반장 남짓 사이를 떼고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폐부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며칠째, 당예와 제갈영은 외원과 내원의 경계문에서 장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둘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달아나 버린 장건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누구에게 물어도 장건의 소식을 제대로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풍진에게 물어도 ‘흘흘’하고 웃으며 기다리라 할 뿐이었다.
아마도 장건이 그때 나왔다면 분명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바로 오늘 아침, 둘은 놀라운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당예는 물론 당유원에게 들었고 제갈영은 지급(至急)으로 온 제갈가의 전서구를 통해 내용을 알았다. 제갈가에서도 사람들이 오고 있지만 워낙 급한 얘기라 먼저 전서구를 보낸 것이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당예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제갈영도 중얼거렸다.
“어쩐지 부쩍 소림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인 거야.”
요즘 소림에는 오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는 사람들만 늘었다.
하나같이 딴에는 소림을 위문한답시고 바리바리 구호품을 싸들고 온다. 일손이 필요하지 않냐며 머무르게 해달라는 이들도 늘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들어오는데 정작 나가는 이들은 없었다. 손이 부족하니 사람이 많으면 좋긴 한데, 그것도 정도껏이지 계속 들어차기만 하니 소림은 점점 번잡해지고 있었다.
“남궁가에…… 양가장에…….”
“백리가의 강호제일미까지.”
미녀라고 알려진 여인만 대충 꼽아도 그 정도였다. 그 외에 나머지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제갈영과 당예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당예가 허탈하게 웃는다.
“그래.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제갈영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리가의 강호제일미는 강력한 경쟁 상대였다.
제갈영과 당예의 표정에 힘이 들어갔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뜻은 통했다.
가장 큰 경쟁자를 어떻게 해서는 쫓아내야만 그나마 장건을 어떻게 해볼 도리라도 있지 않겠는가.
둘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갈영과 당예는 점점 더 결의에 찬 얼굴이 되어갔다.
안타깝게도 제갈영과 당예의 딱 표정을 굳히는 순간에, 장건이 내원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장건은 급히 옆으로 몸을 숨겼다.
“정말 야단났네.”
꼬르르륵.
배가 요동을 쳤다.
나흘간이나 건신동공을 해서 그런지 배도 엄청 고팠다.
나흘이나 굉목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굉목이 걱정할 터였다. 우선 굉목부터 만나러 가고 끼니도 해결해야 하는데 제갈영과 당예가 장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나오면 가만 안 두겠어, 하는 무서운 표정으로.
“아고……. 나 같아도 갑자기 사라져서 며칠이나 안 보이면 화내겠다. 독공도 마저 배워야 하고 영이에게는 무공도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장건은 끙끙댔다.
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한참은 해야 할 것이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사과도 해야 한다.
‘그럼 밥은 언제 먹지?’
벌써 점심 공양 시간이 지났으니 공양간에 가서 사정을 하던가 산으로 가서 열매라도 따먹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커다란 장애물 둘이 가로막고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건은 내원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변장을 해볼 생각도 하고 그냥 무작정 달려 나갈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전자는 시간이 걸리고 후자는 더 큰 악영향을 초래할 것 같았다.
“뭔가 방법을…….”
그때 장건의 눈에 뜨인 것은 멀찌감치 서서 조용히 비질을 하고 있는 불목하니 노인이었다. 여전히 안법을 쓰고 있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문원의 존재감은 흐릿하다.
문원이 장건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장건도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문원은 유독 흐릿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감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문원은 그런 종류의 수법을 익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건은 문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문원처럼 흐릿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잘 될까?’
장건은 조금씩 숨을 참으며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공을 몽땅 단전으로 모아서…….’
무인은 기에 예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건은 풍진 정도의 무인에게 들키지 않고 나가려면 기를 완전히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문원이 사용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온몸에 있는 기를 모조리 단전으로 몰아넣고 꽁꽁 숨기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기가 전혀 드러나지 않으니 존재감도 사라질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미 숨을 쉬지 않는다고 스스로 폐맥(閉脈)을 한 적이 있던 장건이다. 이번엔 한 군데 경락이 아니라 몸 전체의 경락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장건은 기경팔맥의 모든 경락을 운기한 후 단전에서 멈추어 다시 경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미세하게 흐르는 한 가닥의 기까지도 찾아내 모조리 단전으로 모은 후 문을 닫아걸었다.
‘어? 단전이 좀 커진 거 같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운기가 가능했다.
장건은 놀랐지만 이내 자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에 더 들떴다.
‘우와! 해냈…….’
이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순간.
털퍼덕.
장건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 ☆ ☆
문원은 가만히 잠을 자듯 누워 있는 장건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변에서 비질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장건의 기척이 사라져서 호기심에 와 보니 장건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뭐냐?”
물어도 당연히 대답이 없다.
“멀쩡한 애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을 리도 없고…….”
문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귀식대법을 연습했나? 얘야, 건아. 왜 여기서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하고 있니? 응?”
귀식대법은 심장 박동을 극한까지 줄이고 숨도 거의 쉬지 않으며 기척을 없애는 방법이다. 일종의 의식적인 가사상태로 빠지는 것이다.
주로 제자리에서 잠복을 하거나 할 때 사용하는 고급 수법으로 이런 대낮에 뻥 뚫린 공간에서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문원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다.
“얼씨구? 얘 봐라. 거의 산송장이네? 거 참, 나중에 살수라도 되려 그러나……. 이런 건 또 언제 배워가지고.”
그런데 문원이 가만히 보니 장건이 깨어나질 않는다. 혹시나 해서 손을 대보니 심장이 거의 안 뛰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뛰고 있었다!
“헉.”
피도 흐르지 않아 몸이 차갑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귀식대법이 아니라 진짜 죽었잖아?”
문원이 장건의 따귀를 몇 번이나 후려쳤다.
철썩 철썩.
“눈 좀 떠 봐라, 이놈아.”
장건의 얼굴이 휙휙 돌아가다가 다시 고개가 축 늘어진다.
“어이쿠! 이게 대체 뭔 일이랴.”
문원은 급히 장건을 일으켜 등을 쳤다.
구웅!
강한 진동과 함께 ‘쿨럭!’ 하고 기침을 내뱉으며 장건이 눈을 떴다.
“푸압.”
장건이 눈을 꿈벅거리며 문원을 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표정이다.
장건의 눈에서 맑은 정광이 흐르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녹빛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긴 했는데 지금은 정말로 맑고 빛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얘는 무슨 잠깐 안 보면 사람이 달라져 있냐? 겨우 나흘 동안 내공이 더 깊어졌네.’
문원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장건을 타박했다.
“이 녀석아. 대체 뭔 짓을 하고 있었던 게냐? 너 좀 전까지 죽어 있었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부처님하고 바둑 둘 뻔 했다.”
“부처님이 멀리 보이긴 했는데 바둑판은 안 보이던데요.”
장건이 진지하게 말하자 문원은 기가 막혔다.
“장난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을 뻔한 거잖아! 도통 이유를 모르겠구나.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했어.”
장건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아, 그게요. 할아버지처럼 흐릿해져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나 봐요.”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었었다니까!”
“아하하……. 전 그냥 배가 고파서.”
장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문원은 기가 막혔다. 나흘 동안 장건이 무아지경에서 건신동공을 하고 있던 건 이미 알았지만, 배가 고파서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는 황당한 이유에는 문원도 뒷골을 잡고 말았다.
“아이고. 이런 무식한 녀석을 보게? 니가 갑자기 날 따라한다고 그게 되냐? 또 그게 어떻게 하는 건 줄 알고 따라해?”
“기를 다 가두면 되는 줄 알고요…….”
“이런 바보.”
문원은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기(氣)가 아예 없으면 그게 사람이겠니? 시체지, 시체. 내공을 쌓지 못한 일반인들도 몸에 기가 흐르는데 일부러 기를 없앤다는 건 그냥 죽겠다는 말이지, 뭐냐?”
긁적긁적.
“귀식대법을 할 때에도 한 모금의 숨을 들이마시고 최소한으로 생기를 남겨두어야 하는 법이야. 나 참, 일부러 너처럼 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도 처음 보지만……. 아무튼 내가 못 봤으면 넌 정말 죽었을 거다.”
“그럼 기를 조금만 남기면 되나요.”
“하지 말라니까? 그런 거 함부로 막 따라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내가 한 건 귀식대법하고는 전혀 다른 거야.”
“어? 그래요?”
“…….”
문원은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니지. 괜히 또 잘못 가르쳐 주다가 큰일 날라. 에이잉. 그냥 말 안 할란다.”
“가르쳐 주세요. 저 꼭 밖으로 나가야 돼요.”
“그냥 나가면 되지. 담으로 넘어 가던가.”
“안 돼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담을 넘어 가야 돼요?”
“잘못한 게 없으면 그냥 정문으로 나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요.”
“나이도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여난(女難)이나 만나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문원이라고 장건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요즘 소림에 부쩍 사람이, 그것도 무림인들이 늘어 문원도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르쳐 주지 않을란다.”
“네? 왜요?”
“그게 뭐 그리 쉽게 배워지는 건 줄 아느냐.”
장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꼬르르르르륵!
엄청난 뱃가죽의 고동 소리에 문원이 흠칫했다.
“배, 배가 많이 고프긴 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니까요…….”
문원은 가만히 장건을 보다가 입맛을 쩝 다셨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가보다. 이게 다 업이지 뭐.”
투정을 부리던 문원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내경(內經)은 공부했니?”
“경락입문서는 보았는데요.”
“그럼 영기(營氣)와 위기(衛氣)는 알 거 아니냐.”
장건은 경락입문서에서 보았던 위기와 영기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영기가 몸 내부의 경락을 흐르는 기라면 위기는 경락 주변을 흐르는 기다.
둘은 뿌리가 같은 기운인데 영기는 오장육부에 기운을 공급하는 기이고 위기는 외부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기운이다.
“책에서 보긴 했지만……. 그게 관계가 있는 건가요.”
“관계가 있지. 영기와 위기, 그 두 경기(經氣)는 주로 음식물을 통해 섭취하는 기운이라, 다들 무시하는데 말이다. 사실 무학이라는 것은 인체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 학문이다. 거기서 파생된 무공에 어찌 그것이 관계가 없겠냐.”
“아하.”
“뭐, 보통은 무공을 배울 때 크게 사용되지 않긴 하지. 내공을 통해 영기와 위기를 얼마든지 보강할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다. 상승무공으로 가게 되면 영기와 위기, 그 중에서도 위기가 크게 중요하게 된다.”
“위기가 신체를 보호하는 힘이라서요?”
“그렇지. 무식하게 내공으로 몸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방법이 호신강기(護身쾝氣)인데, 그보다 적은 내공으로 위기를 강화시키면 도검(刀劍)이 통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위기는 인체를 보호하는 방패와도 같은 것이다.
“우와!”
무엇보다 ‘그보다 적은’이란 말에 장건의 귀가 번쩍 뜨였다.
“뭐 그뿐이 아니다. 상승무학에서 이 위기라는 건 나를 지키는 힘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나를 지키는 힘은 동시에 상대에게는 내 존재를 각인시키는 기운이기도 한 거지. 쉽게 말하면 ‘난 이만큼 세다’라고 부지불식간에 알려주는 것이라고나 할까나.”
“아.”
장건이 짧게 탄성을 냈다.
“존재감.”
“머리는 나쁘지 않구나. 그래, 그게 바로 존재감이다. 고수의 존재감이라는 건 위기가 몸 밖으로 확장되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인 거고.”
“그럼 할아버지께서도 위기를 조절해서 그렇게 잘 안 보이시는 거예요? 저도 배우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문원이 장건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게 뭐 배우면 그냥 되는 줄 아냐? 다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아까 네가 한 것처럼 무작정 모든 기를 다 차단해 버려서 께꼬닥 하고 숨이 넘어가는 거고.”
긁적긁적.
“알면 알수록 무공은 정말 심오해지네요. 깨달음이라는 게 오려면 또 선문답을 해야 되잖아요.”
막 그에 관해 얘기하려던 문원은 흠칫했다.
“아니 뭐……, 굳이 선문답처럼 어렵게 말하려는 건 아니고, 나는 이제 중도 아니고…….”
꼬르르륵!
“알았다니까? 가르쳐 주고 있잖냐, 지금.”
문원은 생각을 멈추고 투덜거렸다. 굉목도 그랬는데 문원도 장건의 뱃소리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네.”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가 대자연의 일부이니,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거야. 홍오나 굉목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 할아버지처럼 없어질 수 있어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는 거란다. 길가의 돌멩이나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나도 그것들과 다를 바 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누가 길가의 돌을 신경이나 쓰고 다니냐? 그것처럼 나도 그냥 돌멩이가 되고 고드름이 되고 그래 버리는 거야.”
장건이 생각해 보니 문원은 정말 그러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무엇’이었다. 사람이라는 인식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물아일체라는 게 그런 거야. 내가 굳이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으니 누구도 나를 ‘너’라고 생각할 수도, 또 ‘너’라는 존재로 보지도 않는 거란다. 그러면 저절로 사람들은 나를 대자연의 다른 것들과 구별할 수 없게 되지.”
물아일체의 경지는 문원의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기행공을 한다거나 하여 무아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느낄 수 있는 것이나 평소에 그런 상태로 있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어렵네요.”
“그래서 이게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냐. 그래도 우리는 불가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무공이니 이게 가능하지, 다른 문파는 아예 이런 방법을 펼치지 못해.”
문원이 줄줄 설명을 했다.
“또 물아일체도 한 번에 할 수 있는 게 아냐. 내가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으려면, 우선은 진정으로 사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구별한다는 게 또 뭐냐면 살아온 경험과 그에 따른 감정, 즉 오욕칠정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여실지견(如實知見)이고, 또 여실지견을 위해서는…….”
장건이 질릴 정도로 문원의 설명이 이어지려 했다.
꼬르륵.
흠칫.
그래도 문원은 끝까지 설명을 했다.
“해서, 소림에서는 오욕칠정을 벗기 위해 마음을 버리고 또 비우는 수행을 하느니라. 이를 기사탁연수라 하여 조금씩 진정한 공(空)을 이루어 가게 된단다. 진정한 공을 이루면 바로 아까 말한 물아일체가 되는 거야.”
기사탁연수!
불가인 소림의 무공은 결국 그 근원이 기사탁연수에 있었던 것이다.
문원이 시를 읊듯 기사탁연수를 설명해 주었다.
“마음에 혼탁한 것과 맑은 것이 끼어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니 우선은 무작정 버린다. 억지로 잊으며 버리니 버리는지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르나 스스로 버리고 있다 생각하는 것, 이것을 기(棄)라 한다. 이 기의 단계를 넘어서면 버리지 못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알게 되니, 이것이 사(捨)이니라.”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을 때 굉운은 겨우 기의 단계에 들 수 있었다.
“계속해서 버리고 또 버리다 보면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어 혼탁한 것을 골라 버리게 된다. 이것이 탁(擢)이요. 자신이 크게 아끼는 것 또한 버릴 수 있게 되면 연(捐)에 이르게 되느니라.”
버리고 또 버린다는 말에 장건은 기가 질렸다.
‘뭘 그렇게 자꾸 버려요?’ 하고 묻고 싶었으나 문원의 말을 끊을 수는 없었다.
문원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이었다.
“하나 마침내는 혼탁한 것이나 맑은 것이나, 버리는 것과 버리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것조차 번뇌라는 걸 깨닫게 되니,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되느니라. 버리려는 마음조차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떨어버리는 수(?)란다.”
만약 지금 문원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무인이 들었다면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을 지도 몰랐다. 공을 이루어 가는 것은 비단 소림 무공의 근간일 뿐 아니라 만류귀종(萬流歸宗)으로 가는 깨우침이었다.
문원이 기사탁연수를 마지막으로 전수한 것이 십 년 전이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이다.
문원은 왠지 가슴이 뜨끈해져 장건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불가의 심오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건을 위해 쉽게 풀이해 설명을 했으니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장건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그냥 있는 대로 막 버려야 돼요?”
“막 버리라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비우라는 거지.”
“노사님이 언젠가 말씀해 주신 적 있어요. 무념무상에 대해서요.”
“무념무상은 아까 말한 수의 경지란다. 그렇게 되도록 자꾸만 노력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나 장건의 표정은 문원의 기대를 벗어나 있었다. 떫은 감을 입에 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문원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
장건이 버릇처럼 머리를 긁었다.
“아니에요.”
게으름과 쓸데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다르듯, 아끼는 것과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건 다르다.
장건은 이제껏 하나라도 더 아끼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다. 그것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다. 해서 사소한 것조차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데 마음은 오죽할까?
그런데 문원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하니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다는 감정이나, 아껴야 한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장건에게는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장건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문원은 빙긋 웃었다.
무공은, 특히나 소림의 무공은 심신이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의 원자배들처럼 강함만 추구하는 것은 패도(覇道)요, 사도(邪道)다.
그런 면에서 장건에게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 기회를 만든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무공이든 법(法)이든 마찬가지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얼 만큼 아느냐에 따라 성취의 고하가 나뉘는 게지. 자기 자신을 아는 만큼 여실지견하여 상대를 가늠할 수도 있는 것이고 샛길로 빠지지도 않는 거란다.”
기사탁연수에서 수의 단계까지 오를 필요도 없었다. 기의 단계, 그 의미를 깨닫기만 해도 장건은 물아일체를 알고 자신의 위기를 대자연 속에 녹여 존재감을 없앨 수 있게 될 터였다.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장건은 머리가 복잡했다. 장건의 눈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걸 보며 문원이 혀를 찼다.
“그냥 머리 깎고 중이 되지 그러냐? 내가 잘 돌봐줄게.”
“안 돼요. 저 집에 가고 싶어요. 독자니까 대도 이어야 하고요.”
“독자라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녀석이 왜 신부감은 못 고르고 쩔쩔매.”
“부모님이 골라주셔야 장가를 가죠.”
“장가를 가고 싶기는 하고?”
장건은 머리를 긁적이며 ‘히’ 웃었다.
“사실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뭐, 그럴 줄은 알았다만.”
문원은 허리를 두드리면서 빗자루를 들었다.
“아무튼 난 간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장건에게 문원의 길고 긴 가르침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인으로서의 길도, 승려로서의 길도 제대로 걸어오지 못한 장건은 그의 말을 담기조차 힘들었다.
‘배가 고프다’에서 시작한 무공이다. 불가의 가르침 속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스스로 깨우쳐 가며 무공을 익혔다. 문원의 가르침은 좋았으나 장건이 가는 길과는 다른 것이다.
“치. 할아버지처럼 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어려운 얘기만 하고 가시네.”
장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뒤통수를 보이며 걸어가고 있던 문원이 장건의 혼잣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곧바로 전음이 날아왔다.
『떽!』
“이크! 들으셨나.”
장건은 헤실거리면서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홍오에게 들은 말과 문원이 한 말에서 어딘가의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어?”
존재감.
“위기는 자신을 보호하는 기이고 그것이 곧 존재감…….”
문각이 남긴 그림속의 마두는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거무불거유. 유에 있지 않고 무에 있다…….”
홍오가 무는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유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예 없는 것은 문각이 말한 버리고 또 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다.
거무불거유(居無不居有)!
그 다섯 글자가 갑자기 장건의 가슴에 콱 들어 박혔다.
장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부신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 태양!
그림 속의 노승은 태양을 향해 권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때리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무언가를 때리고 있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라 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때리고 있다는 뜻이다.
“위기.”
장건은 갑자기 머리가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다.
영기와 위기, 그 두 경기(經氣)는 톱니처럼 돌아가며 순환하는데 낮에는 위기가 25번, 밤에는 영기가 25번을 돈다. 즉 위기는 양기이고 영기는 음기여서 음양의 기운이 조화되는 것이다.
태양은 양기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혹시 그것이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장건은 급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영기와 위기 중에 하나만 조화가 무너져도 사람은 지극히 무기력해진다.
때리고 두들겨서 상대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 필요가 없었다. 두 기운의 조화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도 같은 효과가 날 테니까.
하지만 영기는 답이 아니었다.
경락을 흐르는 영기에 손상을 주려면 내가중수법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경락이 파괴되어 사람이 크게 다치게 된다.
“해답은 위기에 있었어.”
문원은 고수일수록 위기가 몸 밖으로 확장이 된다고 했다. 심지어 문원이 사용하는 은신술도 위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릿하게 퍼뜨려서 주변에 동화되는 수법이다.
문각이 고수를 상대로 더 강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였던 것이다. 고수일수록 위기가 더 드러나니 말이다.
“하아…….”
장건은 자신의 추론이 얼추 들어맞는다고 확신했다.
위기를 타격하여 스스로 상대가 물러서도록 만든다.
몸을 보호하는 기운인 위기가 사라지면 극도로 예민해져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싸우려고 해도 기운이 없고 의지가 나지 않는 것이다.
문각에게 백보신권은 단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어떻게 문각 선사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었을까.”
만약 문각이 지금의 장건을 보고 있었다면 웃으면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너무 강해져서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하기 싫다는 장건의 마음씨가 결국은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었다고.
장건은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 그 자리에서 크게 절을 했다.
무인이면서 승려인 문각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기까지의 고심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진 듯했다.
무림인이라고 사람을 마구 때리고, 힘이 있다고 자신의 마음대로 남을 구속하는 행동이 난무하는 지금에 문각의 마음은 장건에게 너무나도 큰 감명을 주었다.
무공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전해진다.
장건은 가슴이 따스해졌다.
“저도 큰스님의 뜻을 꼭 잊지 않겠어요.”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어떻게 위기를 타격할 수 있느냐다.
그것은 허공에 떠다니는 기를 손으로 잡으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꼬르륵. 꼬르르륵.
장건은 배를 붙들었다. 창자가 꼬여서 비틀리는 것 같다.
“아, 큰스님의 뜻도 중요하지만 일단 뭘 먹든지 해야겠다.”
결국 장건은 담을 넘었다.
☆ ☆ ☆
장건은 몰래 공양간에서 남은 찬밥을 얻어먹고 굉목에게까지 들렀다가 속가 제자의 숙소로 돌아왔다.
중간에 제갈영과 당예를 만나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장건은 자신의 짐 속에서 경락입문서를 찾아 열었다. 그 중에서 위기와 양기에 관한 부분을 찾아 읽었다.
“사람의 경맥이 상하, 좌우, 전후로 뻗어 있는 것이 28경맥인데 온몸을 돌아간 길이가 162자이므로 28수에 상응하며 누수(漏水)의 백각(百刻)으로 일주야를 나누었기 때문에 1만 3천 5백 번 숨을 쉬고 기는 50번을 돌아서 몸을 영양한다.”
하루를 백으로 쪼갠 시간, 즉 이각에 한 번 일주천을 한다는 뜻이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구절을 읊조렸다.
“위기는 성질이 거칠고 민첩해서 경맥을 가지 않는데, 낮에는 눈에서 나와 수족의 태양, 소양, 양명의 경맥 밖을 순환한다. 이어 음의 경맥인 족소음의 경맥 밖을 순환한다. 야간에는 경맥을 순환하니 이것이 영기가 된다.”
위기의 흐름 순서에 관한 내용이다. 내공이 깊은 무인일수록 위기가 몸 밖으로 드러나니 순서를 기억해 두면 위기의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
이미 장건은 위기를 볼 줄 안다.
바로 남들과 다르게 익힌 안법을 통해서였다.
자세한 위기의 흐름은 볼 수 없으나 몸 주변에 희미하게 흐르는 위기는 본다. 무공을 익힌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거나 은신을 사용하는 문원을 본 것이 바로 그 위기였다.
아직은 흐릿하지만 좀 더 수련을 하고 연습을 하면 제대로 위기를 볼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위기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방법인데…….’
문각은 그것을 백보신권을 통해 해내었다.
장건은 기를 잔뜩 뿜어내는 백보신권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를 타격하려면 역시나 내공을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장건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허공을 지르자 팡! 소리가 난다.
공력을 내보내 바로 앞에서 터뜨린 것이다. 풍진과 홍오가 감탄한 그 수법이었다. 나흘 동안의 건신동공을 마친 후로 기의 운용이 더 쉬워졌다.
“그나마 백보신권처럼 멀리 떨어진 데까지 때릴 필요가 없으면 내공도 조금만 쓸 수 있으니까 괜찮긴 한데…….”
장건은 침상 위로 엎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리 조금이라 해도 아까웠다.
데굴.
“아까워.”
데구르르.
“아까워어.”
장건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고민하며 침상 위를 굴러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