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48
제 9 장 한걸음 더 가까이
소림의 수뇌부는 난리가 났다.
어떻게 보면 즐거운 비명인데 다르게 생각하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허허허허.”
대부분의 원주들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웃었다.
누군가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이대로라면 환자보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숙소는 벌써 거의 다 들어찼소.”
원자배의 승려 한 명이 물었다.
“본문은 예전부터 상당한 인원을 모두 수용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숙소가 다 찼다니요.”
“중독된 환자들을 증상에 따라 일일이 격리시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찾아오는 향객들의 반이 여시주일세. 아무렴 여시주와 남시주들을 같이 묵게 할 셈인가.”
소림의 시설은 결코 작지 않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도감승 굉정이 한숨을 쉬었다.
숙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방문객이 늘고 있는데 그 수가 더 불어나고 있었다. 벌써 그 수가 천 명이 넘어섰다.
공양간의 공양주 굉료가 말했다.
“끼니도 문젤세. 공양간에서 갑자기 천 명분의 식사를 더 준비하는 것도 무리고, 식재료도 문젤세.”
굉정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찾아오는 시주님들께서 조금씩 희사를 하고 있어 재정적으로는 부족하지 않은데, 그 대부분이 약초와 재화라네. 이런 겨울에 어디서 갑자기 그 많은 시주님들이 먹을 쌀을 마련해 오겠는가. 그렇다고 본사를 찾은 시주님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것이야말로 정말 큰일이었다.
숙소야 정 모자라면 산문 밖의 마을에라도 머물게 할 수 있었지만 식사는 어찌할 것인가.
“곳간이 순식간에 비어가고 있네. 시주님들이 늘어나는 추세로 보아 이대로라면 일주일내로 비축해 둔 양식이 모두 떨어질 것일세.”
굉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현전주 굉읍이 한탄했다.
“허, 이것 참. 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아니, 도대체 왜 소림에 여시주들이 그렇게 몰려오시는 거랍니까?”
문수각주 원전이 대답했다.
“이번에 장건이란 아이가 청성의 검을 상대하고 나서 크게 유명세를 타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그 아이가 속가 제자라는 거지요. 혼인을 통해 자파로 영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 아이라면 당가에 보내는 것으로 합의가 되지 않았던가?”
“제갈가의 여아가 또 오면서 복잡해졌지요. 장건이 그 아이를 건드렸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쯧. 제법 쓸 만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구려. 그래서 당가로 가는 일이 흐지부지되었다는 거요? 당가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데.”
이쯤 되니 굉운이 입을 열었다.
“혼인은 건이의 자율에 맡기기로 했네. 건이의 부모님이 오시면 결정이 되겠지.”
굉운과 당가 사이에 모종의 얘기가 오갔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얘기였다. 오히려 당가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에 고소해하는 승려도 있었다.
“중요한 건 당분간 소림에 계속해서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고, 우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 중에는 홀대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네.”
굉운이 굉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전주 굉충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들고 읽었다.
“지금 찾아오는 대부분의 시주분들은 강호인들인데 방장 사형의 말씀처럼 명문가나 각 문파의 명숙들도 곧 도착할 예정이오. 속내는 어떨지 모르나 소림의 어려운 사정을 돕기 위해 오시는 것이니, 따로 준비를 마쳐야 하오.”
굉충이 지금껏 모은 정보로 곧 도착할 예정인 무가나 문파들의 이름을 쭉 부르고, 주요 인물들의 명호까지도 불렀다.
하나하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수뇌부들의 얼굴색이 나빠졌다. 특히나 소림의 살림을 도맡은 굉정은 주름살이 순식간에 늘어나는 듯했다.
무림의 문파 간에는 알게 모르게 알력이 존재하니 숙소를 배정하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남궁가나 양가장의 숙소를 가까이에 둔다면 아무리 소림의 사내라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무림인이란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니, 그 또한 개별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했다.
“……섬서의 무영문에서 백혈검 강구 대협과 현 3대 제자들 일부, 종남파의 4대 검수……, 그리고…….”
잘 듣다 보면 하나같이 각 문파의 명숙 한 명과 제자 한둘 정도로 구성원이 이루어져 있다. 그 제자들의 나이도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중반까지가 가장 많다.
듣다 못한 천불전주 원당이 불만을 터뜨렸다.
“이건 뭐 소림이 길가의 다원(茶園)도 아니고…….”
굉충이 원당을 째려보았다.
“아직 안 끝났네.”
원당이 입을 다물자 굉충이 말을 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백리가의 백리연 소저가 되겠소. 처음 스물 정도가 백리가에서 출발했다 들었는데 어제까지 불어난 수가 백오십 명이었소.”
승려들이 땀을 삐질거리며 흘려댔다.
“과연 강호제일미의 명성 그대로군요.”
굉운이 말했다.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 하나 젊은 혈기가 모인다면 어떤 사건사고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드네. 이제까지 모두 고생했으나 지금부터는 한층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네.”
승려들이 모두 반장하며 굉운의 말에 답했다.
이번 일의 장본인격인 원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굉운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원호가 한 일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원호는 찔끔하여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라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소이까. 나는 그저 남궁가에만 알렸을 뿐인데 어쩌다가…….’
남궁가에서 시작했고 양가장이 불을 지폈다. 거기에 욕심이 생긴 백리가가 나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원호가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끄응…….’
원호는 죄지은 사람이기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면 난 소림을 두 번이나 죽이는 꼴이 되고 말아.’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수많은 강호의 명숙들이 찾아오는데 대접이 소홀하다면 소림은 크게 명망을 잃을 것이다.
장건이란 아이와 관련이 되면 왜 그리도 일이 커지고 꼬이는 걸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원호는 지금 이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다 장건이 때문이다.’
그러나 원호에게는 참으로 불행하게도 장건이 이제껏 벌인 일들은, 앞으로 장건이 벌일 일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무진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에 또 눈이 왔는지 밖이 온통 새하얗다. 밤을 꼬박 샜더니 눈이 부시다.
아침 수련도 공양도 걸렀다.
무자배의 대사형이라는 막중한 책임감과 문각의 진전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이렇게 고민해 봐야 당장에는 익힐 수도 없을 것을.”
장건은 어떨까?
장건은 여러모로 놀라운 아이였다. 무공의 기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 실력향상은 엄청나게 빨랐다.
단순히 동공에 몰입한 줄 알았더니 나흘이나 그 자리에서 있었다고 한다.
“녀석, 뭔가 깨달음을 얻은 건가.”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자존심도 좀 상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에잇, 부끄러울 게 뭐가 있냐. 속가라고 해도 사형제 지간인데.”
무진은 막 문을 나서려다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그냥 가르쳐 달라는 것보다는 비무를 하자는 게 더 낫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무색한가보다.
“흐음.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더 많은 날이겠는걸. 게다가 대사형으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될 것 같고.”
무진은 피식 웃었다.
“오늘 이 무진이 생애 최대의 난적을 만나겠구나.”
강호행에서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무위가 원자배에 거의 근접해 있다던 무진조차 장건은 힘겨운 상대였다.
☆ ☆ ☆
장건은 숙소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 언제부턴가 생각을 정리할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게 편했다.
무진은 그런 장건을 본 순간 흠칫 놀랐다.
장건의 주변에서 기의 파동이 일렁인다. 단순한 공상에 잠긴 것이 아니다.
무진은 잠시 기다렸다.
곧 장건의 전신에 땀이 송글거리고 맺히더니 얼굴과 목에, 드러난 팔에 핏줄들이 불룩거렸다.
‘심상 수련?’
가상으로 상대를 만들고 대결을 하거나 수련을 하는 방법이었다.
무진은 ‘허!’ 하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심상 수련은 사숙님들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것인데.’
가까이서 느껴보면 기의 파동이 고르지 못하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눈썹이 꿈틀거리고 표정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누군가와 가상의 대련을 하는 모양이다.
‘괜히 왔나?’
그래도 이왕 온 것, 무진은 장건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건의 전신은 흠뻑 젖었다. 땀이 아니라 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온몸이 젖었다.
“푸하.”
장건은 콜록대며 기침을 하더니 목을 매만졌다.
“휴우. 휴우. 또 목을 베였어.”
무진은 상대가 궁금했지만 누구인지 묻지 않기로 했다. 들어봐야 그리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장건의 상대는 풍진이었다. 풍진과 노승의 대결에서 노승을 빼고 장건이 그 자리에 섰지만, 새로 배운 무공을 제대로 쓰기도 전에 목을 베인 것이다.
장건이 앞에 무진이 있는 걸 알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어? 대사형이 웬일이세요?”
“잘 되고 있나 해서 와봤다.”
장건은 겸연쩍게 대답했다.
“잘 안 되네요. 아무래도 생각만으로는 한계가 있나 봐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하셨으니 누구에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무진이 기꺼워하며 말했다.
“그것 참 잘 됐구나. 그렇잖아도 나도 그래서 널 찾아왔는데.”
“그래요.”
장건은 좋아하다 말고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전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 걸요. 위험하면 어떡하죠?”
“무인은 칼끝에 목숨을 두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걸 겁낸다면 살아남기 힘들지. 자자, 일단 나가자.”
“어? 저 땀도 닦아야 하고…….”
무진은 거의 무작정 장건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자기보다 어린 사제의 깨달음을 훔치려는 자신의 못된 마음이 부끄러웠는지도 몰랐다.
“아.”
장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이 와요.”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앙상한 나무에도 작은 풀밭에도 온통 눈꽃이 피어 있었다.
“아침에 잠깐 그치더니 또 오는구나. 춥진 않으냐.”
“별로 춥진 않아요.”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데도 춥지 않다는 건 그만큼 공력이 심후해졌다는 뜻이다. 공력이 심후한 만큼 주화입마의 여파는 더 크기 때문에 무진은 조금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장건은 하얀 눈밭에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남겼다.
바스락.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장건의 발자국이 생겨났다. 장건은 차가운 눈을 뭉쳐 동글동글하게 만들기도 하고 입에 넣어 맛을 보기도 했다.
수련을 할 수 있는 작은 연무장은 바로 속가 제자의 숙소 뒤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약간은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눈에 뜨일 염려도 없어서 좋은 곳이다.
“눈이 오는데 괜찮을까요? 연무장부터 치워야 할 텐데요.”
“괜찮아. 누가 다 쓸어 놨더라.”
“누가요?”
“내가.”
연무장은 깨끗했다. 다른 곳에는 한 뼘이 넘도록 눈이 쌓여 있는데 연무장에만 눈이 하나도 쌓여 있지 않았다. 정말로 무진이 미리 치워놓은 모양이었다.
“건 사제.”
사제라는 말에 장건이 눈을 크게 뜨고 무진을 보았다.
“너도 소림의 정식 제자이고 난 네 사형이니 불러봤다만……. 어색하냐.”
“아뇨.”
장건은 왠지 신이 나서 가슴이 들떴다. 그동안 배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커다란 울타리가 있어서 그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왠지 동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런데 무진의 말 한마디에 장건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정말 소림의 제자였구나.’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장건은 심호흡을 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진은 그런 장건을 가만히 보며 솔직히 말했다.
“사실은 말이다. 난 아직 문각 태사조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너는 알까 해서 비무를 하자고 한 거야.”
“그러셨군요. 저도 확실히 안다고는 할 수 없는데…….”
한동안 장건은 백보신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긴 했는데 실전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괜찮다.”
장건은 딱히 불만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어차피 장건도 새로 생각해낸 방법을 연습할 상대가 필요한데 다른 사람들하고 할 수가 없으니 곤란하던 차였다.
세상 모든 사물에 다 기가 있다고는 하나 영기와 위기를 시험하려면 사람하고 대련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너도 곧 소림을 나가게 될 게 아니냐. 강호에는 생각도 못한 비열한 수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저 무공만 믿고 있던 이 사형도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단다.”
장건은 무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독선만 해도 선물이라며 치명적인 독을 주고 갔다.
“너는 무공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지. 해서 난 네게 실전적인 수법들로 너를 상대하고, 넌 네가 깨달은 무공으로 나를 상대하는 거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지. 어떠냐?”
소림으로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이때에 무진의 판단은 꽤나 정확한 것이었다.
장건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제가 대사형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얻는 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지.”
“그럼,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곧 무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장건은 기의 흐름만으로 무진이 공력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내가 봐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네가 막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말 위험한 방법들을 쓸 테니까.”
“예.”
무진의 승복이 펄럭인다. 고요히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무진의 주변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며 천천히 퍼져 나간다.
무진이 팔을 크게 휘저으며 마보에서 독립보로, 독립보에서 다시 한 발을 살짝 내딛어 허보를 취한다.
장건은 집중했다.
위기를 보고 느끼기 위해서다.
어슴푸레하게 무진의 몸에서 기운이 풍겨 나온다. 내공을 활발히 주천시키면 위기 역시 강해진다. 위기를 알게 된 이후 장건은 지나가는 무승들을 열심히 살펴보았으나 평소의 위기는 아주 미약해서 감지하기가 힘들었다.
장건은 눈을 크게 뜨고 무진을 지켜보았다.
공력을 끌어올려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대부분인데 그 중에 미약하게 다른 기운이 섞여 있다. 그동안은 위기를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던 기운이다.
장건의 섬세한 감각이 위기를 감지했다.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공을 한층 더 끌어올려 안법을 극대로 강화했다.
무언가 희끄무레한 연기, 혹은 실 같은 것이 무진의 몸을 맴돌고 있었다.
무진이 멀뚱하니 가만히 서 있는 장건을 보고 말했다.
“어서 준비를 하라니까 뭘 하고 있는…….”
무진은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이런!’
그냥 멍청하게 서 있는 것 같은 장건의 자세는 보통의 자세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자세도 아니고 심하게 힘이 들어가 경직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어딘가를 공격하려 하면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지?’
혹시나 눈앞에 있는 이가 열다섯 어린아이가 아니라 최소한 마흔은 넘은 무인이라면 무진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나 도저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자세가…….’
가능한가?
사실상 보통의 고수들은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온몸을 두르듯 방어태세를 취한다고 해서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심력도 크게 소모될 뿐더러 움직이는 순간 빈틈이 생겨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수식은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형상이거나 자신의 몸을 가다듬는 자세, 혹은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상대를 유인하는 자세를 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백 개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보다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한 개의 공격에만 대비하는 것이 훨씬 유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무슨 의도지? 나더러 먼저 공격해 보라는 의미인가?’
무진이 고소를 머금었다.
청성의 검까지 받아낸 장건을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으나 무인으로서의 도전정신이 슬슬 끓어오른다.
“그럼 내가 먼저 손을 쓰마.”
무진이 힘껏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튀어 나왔다. 순식간에 서너 걸음을 격하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어찌나 동작이 강맹한지 무진의 등 뒤로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스쳐 지나갔다.
장건은 정신을 팔고 있다가 무진의 기가 크게 출렁이는 걸 깨달았다.
“으앗!”
장건은 발끝을 살짝 돌리며 몸을 옆으로 했다.
무진은 주먹을 회수하며 장법으로 바꾸었다. 강호행을 하며 초식의 응용능력이나 공력이 한층 깊어진 무진이다.
첫 수로 장건을 제압하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무진의 손바닥이 몇 개로 불어나며 장건을 덮치려는 그 순간,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장건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의 주특기인 용조수다.
‘언제!’
손이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다. 싸늘한 감각이 무진의 등줄기를 흘렀다. 자신의 장법이 미처 펼쳐지기도 전이었다.
장건의 손이 부채가 펴지듯 무진의 양팔을 감싸 봉쇄했다. 무진은 흡결에 의해 장건에게 중심이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무경 사제가 당했다는 수법이다. 용조수와 유원반배!’
무진은 급히 빠져나가려 했으나 팔이 장건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유원반배는 흡결로 상대를 끌어들인 후 밀어내는 추결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무진이 마찬가지로 금나수법을 사용하며 유원반배의 힘을 흩으려 했으나 장건이 교묘하게 무진의 팔을 붙들어 맨다. 무진은 장건에게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금나수법이 절정에 이르렀구나! 이 정도의 금나수법을 쓰는 이는 강호에서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유원반배도 용조수도 무진이 잘 아는 수법이다.
무진은 몸이 최대로 장건에게 쏠리는 순간 힘을 풀어 버렸다. 공력도 분산시켰다.
팡!
장건이 무진을 유원반배의 추결로 밀어냈다. 그러나 크게 공력을 싣지 않고 있던 무진은 겨우 한 걸음 정도 밀려났을 뿐이었다.
“어?”
장건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다.
독정의 기운과 대환단의 기운을 흡수한 장건은 내공이 벌써 일 갑자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만하면 무진이 크게 밀려나야 정상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유원반배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반탄처럼 되돌리는 방법. 무진이 순간적으로 힘을 풀었기에 그만큼 밀려난 힘도 적었다.
무진이 반격에 나서며 소리쳤다.
“중요한 것은 초식 자체가 아니라, 초식이 담고 있는 뜻이다.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초식이 담고 있는 뜻…….”
장건이 뭔가를 생각해내려 하는데 무진은 틈을 주지 않았다. 기다려 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공의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무진이 무영각의 슬차(膝車)로 장건의 무릎을 밀었다. 장건의 중심이 틀어져 몸이 기우뚱한 틈에 어깨로 가슴을 밀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리가 흔들거렸음에도 장건은 중심을 잃지 않았다. 장건만이 할 수 있는 세세한 근육들을 이용해서 중심을 잡고 버틴 것이다.
강호에서 생사의 위기를 몇 번이나 겪은 경험이 무진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무진은 탄성을 지를 겨를도 없이 주먹을 뻗었으나 그것은 허초였다. 허초이며 실초였다. 장건이 ‘이크’ 하고 상체를 뒤로 뺀 사이 무진이 곧바로 뛰어올랐다.
장건의 허벅지를 밟고 머리 위로 뛰어올라 어깨를 밟았다. 예상치 못한 처음 보는 동작에 장건은 당황해 피하지 못했다.
“으윽!”
장건은 어깨를 커다란 돌로 누른 것 같았다.
무진이 천근추의 수법으로 힘껏 내리누르자 장건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털썩!
“앗!”
앉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특히나 피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무진은 살짝 도약하여 몸을 거꾸로 돌아 위에서 아래로 권을 날렸다.
쿠―웅!
무진의 주먹이 바닥을 강타하며 그 충격으로 바닥에 쌓였던 눈이 풀쩍 위로 튀어올랐다. 마치 눈으로 만든 지붕처럼 튀어 올랐던 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닥에는 무진의 주먹자국이 깊이 남았다. 강력한 권경에 원을 그리며 땅이 패어지고 금이 갔다.
장건이 맞았으면 필히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장건을 상대로는 무진도 적당히 할 수 없었다.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도 싶었고 더불어 실전의 감각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장건은 거기에 없었다. 어떻게 몸을 피했는지 앉은 자세 그대로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응?”
무진은 툭 튀어올라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떻게 피한 거지?”
장건만이 할 수 있는 ‘앉아서 나한보’였다.
장건은 입을 딱 벌리고 어버버 거렸다.
“무, 무진 사형. 절 죽이시려는 거예요?”
무진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에이, 설마 내가 널 죽이겠냐.”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방금 어떻게 피했냐면서요!”
장건이 외치는 순간을 무진이 노렸다.
무진은 아직 일어서지 않은 장건에게 달려가 그대로 걷어찼다.
소왕무나 아이들하고 대련을 할 때에도 이런 상황을 접해 보지 못한 장건은 기겁해서 몸을 뒤로 제꼈다.
부―웅!
장건의 코끝을 무진의 발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진이 몸을 회전시키며 한 번 더 발뒤축으로 장건을 찼다.
장건은 발끝에 힘을 주어 튕겼다. 거짓말처럼 몸을 일으키며 무진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것도 무진의 사각인 우측 뒤편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별수 없이 무진은 앞으로 뛰어나가 몸을 돌림으로써 장건의 간격에서 달아나야 했다.
“이것 참.”
무진은 당황스러웠다.
무공의 대결이라는 게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피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서로 공방을 겨루다 보면 몸을 맞대어 부딪치기도 하고, 같이 얻어맞기도 하고 그러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건 뭐 공격을 계속하기도 힘들게 중간중간 뚝뚝 끊어지질 않나, 이상한 수법으로 반격을 하질 않나.
그가 이제껏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보통은 뒤로 달아나는 것보다 공격하는 쪽이 빠른 게 당연하다. 그래서 막거나 피하기만 하다보면 궁지에 몰리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그렇지도 않다. 피하다 보면 어느 샌가 유리한 위치로 가 있으니 무진도 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무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지금으로써는 그가 원하는 데까지 끌고 가기에 뭔가 부족하다.
“계속 피하기만 할 거냐?”
“실전에서는 정말 이렇게 해요?”
“이것보다도 더 심하지. 어? 사숙님!”
무진이 다른 데를 보며 놀란 눈을 하자, 절로 장건도 무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무진이 발로 땅을 찼다.
팍!
눈과 흙이 섞인 더미가 장건의 눈에 튀었다.
“앗! 비겁해요.”
하류 잡배들이나 사용할 비겁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무진은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했잖으냐!”
무진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장건은 시야가 가려져 난감했다. 흙모래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났다.
무진에게서 줄기줄기 느껴지는 기세는 오싹할 지경이었다. 기세를 비껴내는 순간 무진의 무지막지한 권경이 장건의 어깨를 스쳐갔다.
푸앙―
권풍 때문에 고막이 찢겨지는 듯 아프다.
“악!”
맞았으면 정말로 팔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지도 몰랐다. 풍진의 검에 비할 바는 아니나 치명상을 입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사형! 자, 잠깐만요!”
장건은 흙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겨우 떴다.
무진이 잠시 기다려 주고 있었다.
장건은 식은땀이 났다.
‘생각한 방법을 몸이 안 따라줘. 큰일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실전은 확실히 달랐다.
잘 보이지 않는 위기를 잡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진은 온갖 방법을 사용하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더구나 위기 역시 계속해서 몸을 순환하니, 정확한 순간을 포착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히 피하는 데만 집중한다면 무진이 무슨 방법을 쓰든 장건은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정말 실낱같은 흐름을 잡고 공격을 해야 하니 절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풍진을 상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건이 다치는 것을 각오하고 비껴내는 것만 생각했으니 그나마 죽지는 않은 것이지, 그 사이를 뚫고 공격을 하려 했다면 반드시 죽고 말았을 터였다.
‘우선은 위기의 흐름을 찾아내야 해. 한 번만 흐름을 찾으면 다음 경로를 찾아낼 수 있어. 그 다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를 놓치면 안 돼.’
장건이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씻어냈다.
“이제 됐지?”
갑자기 무진이 달려온다. 장건은 눈에 내공을 집중하며 무진의 위기를 확인하는 한편, 무진의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무진이 달려오다 말고 휙 하고 몸을 돌렸다.
‘발차기? 주먹? 아니면 공중으로 뛰어오를까?’
장건은 짧은 순간에 무진의 근육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무진의 공력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무진이 몸을 한 바퀴 돌린 것은 허실이었다.
휙 하고 뭔가가 날아왔다.
엄지 손가락만한 돌멩이였다. 지척에서 쏘아진 것이라 어지간한 사람은 피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핑―
그나마 감각을 완전히 곤두세워 예측한 것이 다행이었다.
“으헉!”
장건은 전신의 근육을 모두 사용해 허리를 틀었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돌멩이가 장건의 바로 눈두덩 위를 지나갔다.
워낙 미미한 움직임이었기에 무진은 다음 공격을 할 기회를 놓쳤다. 다른 무인들이었다면 피하는 동작이 컸거나 돌멩이에 맞아 큰 빈틈이 생겼을 것이다.
“와! 이런 것도 피하는구나.”
무진은 장건과 자신과의 격차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걸 알았다. 장건이 안법을 수련하던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장건이 눈을 크게 떴다.
‘찾았다!’
무진의 몸을 돌던 기운 중에 유독 희미하게 잿빛을 띠고 있는 기운의 줄기가 마치 긴 꼬리를 가진 유성처럼 팔꿈치에서 승복의 어깨선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잿빛 기운은 무진의 몸 외부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인체 안쪽의 경맥에서 따지자면 대장경(大藏經)의 경맥을 흐르는 셈이다.
‘저게 위기!’
대장경을 다 돈 위기는 위경(胃經)를 돈다.
‘대장경의 순환을 마치기 전에 틈을 만들어내 위경에서 위기의 흐름을 끊는다!’
장건이 계산을 끝내고 먼저 달려들었다.
장건의 주먹이 처음으로 뻗어졌다.
“소홍권!”
무진이 눈을 찌푸렸다. 소홍권인데 궤도가 특이하다. 잠깐 시야에서 벗어났다가 갑자기 주먹이 날아온다.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순간 몸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막으려 했다면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무진은 가까스로 장건의 주먹을 피해냈다.
무진은 피하면서 일부러 가슴에 빈틈을 보였다.
장건에게는 불행하게도 바로 위경이 바로 그곳이다.
함정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장건은 여지없이 그곳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잡았다!”
무진은 완벽히 장건의 공격을 간파했다.
“아무리 네 권이 빠르고 특이하더라도 완전히 읽힌 상황에서는…….”
하지만 어이없게도 장건의 주먹은 무진의 가슴에 닿았다.
팡!
무진이 주춤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한데 소리는 컸는데 살짝 몸이 떨린 것뿐,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봐준 건가?’
그러나 장건의 표정을 보니 봐준 것이 아니다.
“어어?”
장건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다. 위기가 이미 가슴의 위경을 지나간 후였다.
무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보법을 밟으며 움직이기 때문에 조금만 위치가 흔들려도 정확한 타격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무진이 아니다. 장건이 뭘 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
곧바로 공격이 이어진다. 원래부터 노리고 있던 한수다.
바람처럼 빠르고 매섭기가 달을 깎아 내릴 정도라 하는 심의권의 추풍간월!
장건은 찰나에 무진의 섬전과도 같은 추풍간월에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뻑!
무진의 권에 실려 있던 권경이 폭발하는 소리를 냈고 장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완벽히 걸렸다.
“으악!”
무진이 쇄도했다.
퍼퍽!
무진은 장건의 가슴과 배에 다시 이권을 퍼부었다. 장건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대팔에게 맞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권경의 파괴력이 장건의 몸 내부를 뒤흔들었다. 소림의 후기지수란 말은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무진은 이번 일격으로 여실히 보여 주었다.
“우엑!”
내장이 진탕되며 순식간에 내상을 입었다.
“켁!”
장건의 기침에 피와 독기가 섞여 나왔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피가 눈을 녹이면서 녹빛이 은은히 배었다.
터벅터벅.
장건의 앞에 무진이 와 섰다. 장건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위를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무진이 실망한 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냐? 청성의 검을 받은 녀석이 왜 이 정도에 맞고 쓰러져?”
하지만 장건은 기죽지 않았다. 장건의 입가에 어느덧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제 알았어요.”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타격하는 것이 힘들다면, 빈틈을 만들어내면 된다.
장건은 지금 그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지 않았느냐. 내상을 그렇게 입었는데.”
“그래서 알았어요. 방금. 다시 해요.”
장건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방금까지 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오기가 서린 눈빛이다.
“좋은 눈빛이다.”
무진은 갑자기 공격을 감행했다.
이것도 분명 비겁한 짓이었다. 하나 장건은 이미 무진의 공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공격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장건은 무진보다도 뒤늦게 대응을 했다.
하지만 무진보다 빨랐다.
타타탓.
무진의 손과 장건의 손이 얽혔다. 여전히 감탄할 만한 최고의 용조수다.
그러더니 무진의 몸이 장건에게 쓱 빨려가는 듯하다.
“같은 수법은 안 통한다, 이 녀석아.”
그런데 방금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엇!”
장건은 무진의 양손을 용조수로 낚아채서 유원반배로 끌어들인 후, 한 손으로 무진의 양팔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흡결은 그대로였는데 추결의 방향을 밑으로 바꾼 것이다.
‘아차!’
무진은 마치 양손을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반쯤 굽힌 자세가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손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찰나에 거의 미동도 없이 쑥 하고 장건이 주먹을 뻗었다. 마치 장건의 가슴에서 주먹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래서 그렇게 빨랐구나.’
팔다리를 크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세세한 근육들을 모두 움직여 충분한 파괴력을 끌어낼 수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소한의 궤도를 타며 무진에게 장건의 주먹이 날아든다.
그런데도 빠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무진의 등줄기가 쭈삣거리고 소름이 돋았다.
‘위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 대체 무슨 권법의 종류인지 파악할 틈도 없었다.
무진은 피하려고 애는 썼으나 여전히 장건의 손이 흡결과 추결을 적절히 사용하며 놓아주지 않는다.
퍽.
가벼운 격타음이 났다.
머리가 가장 때리기 쉬운 부위였을 텐데, 장건은 겨우 오른쪽 어깻죽지 바로 옆을 쳤을 뿐이다.
‘자꾸 뭘 하려고 하는 거야?’
무진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돌연 어깨가 찌잉 하고 울린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친 듯한 기운이 피부를 파고든다. 살갗이 찢겨 나가는 듯하다.
투앙!
무진의 팔이 튕겨지며 벌려졌다. 몸속에서 야수 한 마리가 마구 날뛰는 듯하다.
“이, 이게 뭐야!”
내부 경락이 마구 뒤흔들린다. 그것은 마치 몸 안에서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이었다.
“우왁!”
무진은 갑자기 회오리에 말린 듯 튕겨지며 날려졌다. 순식간에 머리에서 무언가 끈이 끊어지는 듯했다.
장건의 발밑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나선형의 경기를 따라 눈발이 거꾸로 하늘로 치솟았다.
☆ ☆ ☆
꿈벅꿈벅.
무진은 얼굴로 쏟아지는 차가운 눈송이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깜박거렸다.
불쑥.
장건의 얼굴이 디밀어졌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괜찮으세요? 힘이 조금 과했나봐요.”
“나 안 죽었니?”
“제가 대사형을 왜 죽여요.”
“죽는 줄 알았거든.”
“잠깐 기절하셨던 것뿐인걸요. 절 죽이려고 하셨던 건 대사형이셨잖아요.”
장건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하…….”
무진은 힘없이 웃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냥 귀찮아서 왠지 이대로 누워 자고 싶은 생각만 든다.
“이상하구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더구나 거의 무게도 없는 눈송이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몸이 얼 것처럼 시리다.
왠지 눈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상하구나. 내 그렇게 강호에서 숱한 격전을 치렀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장건이 헷 하고 웃었다.
“괜찮아요. 조금 지나면 나아지실 거예요. 대사형이 기절해 계실 때 봤는데 다치신 데는 없어요.”
가만히 누워 있던 무진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문각 태사조의 비전이니?”
장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장건의 마지막 일권.
“그게 백보신권이었던 거구나. 백보신권의 느낌은 있었지만 좀 달랐는데…….”
“백보신권은 너무 어려워서 할 수가 없더라구요. 내공의 소모도 심하고요. 그래서 유원반배에 금강권을 이용했어요.”
그림 속 노승, 문각의 백보신권은 자신의 내공을 쏟아내 멀리 있는 상대를 격하는 초식의 동작이었다. 그러니 내공이 아깝다 생각하는 장건이 따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려고 해도 몸이 먼저 거부를 한 것이다.
무진은 ‘푸헐’ 하고 노인처럼 웃었다.
“그럼 내가 내 힘에 이렇게 쓰러진 거란 말이냐?”
장건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의 힘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거기에 금강권의 권경을 조금 더했어요. 잘 될지 확신은 없었는데 이렇게 됐네요.”
장건으로서는 최소의 내공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알아낸 것인데, 그걸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진은 놀랍기만 하다.
“허어…….”
무진은 문각이 생전에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런 상황이 되었다.
강호행을 할 때에는 팔다리가 마비되어 싸우기 힘든 상태가 되었어도 끝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죽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도 싸울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 두렵고 나른하다.
문각의 백보신권이 아니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다.
장건이 약간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형 덕분에 알아낸 거니까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무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이건 문각 태사조의 무공이 아니라 너만이 가진 너의 무공이다.”
“하지만…….”
“문각 태사조와 네가 가진 뜻이 같다고 같은 무공인 것은 아니다. 보다시피 전혀 다른 무공이지 않으냐. 그러니 네가 가르쳐 준다 해도 난 너처럼 할 수가 없어. 나도 나만의 방법을 찾아낼 수밖에 없는 거지.”
장건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다. 나도 덕분에 배운 게 있으니까.”
몸에 기운은 없지만 장건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흐뭇하기만 하다.
“아고고. 그나저나 나 좀 일으켜 다오. 추워서 얼어 죽을 지경이다.”
“예.”
장건이 무진을 재빨리 부축했다.
무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공이 깊어지면서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지금은 마치 살을 에는 듯 느껴지고 있었다.
장건의 수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진은 거기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보았다.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