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56
제 7 장 화촉의 장, 분노의 장
근 며칠 간, 소림은 평화로웠다.
독 사건을 비롯해 소림의 정문에서 일어난 백리연의 사건까지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가롭기만 했다.
독정에 중독되어 앓았던 환자들도 하나둘씩 완쾌되어 소림을 떠나갔다.
당가와 소림에서 아끼지 않고 약재를 푼 탓에 평소 지병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덤으로 몸이 건강해져 나가기도 했다.
말로만 들었지 구할 엄두도 못 냈던 비싼 약재들과 대환단이 혼합된 약을 먹은 탓에 마음까지 풍족한데, 일정량의 보상을 덤으로 받기까지 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성의를 보인 것만으로도 당가와 소림은 뒤탈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은 셈이었다.
환자들이 웃으며 소림을 떠나는 것에 더해 소림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 것은 바로 젊은 남녀들이었다.
수백 명이 넘게 몰려든 젊은 남녀들은 대부분 혼기가 꽉 찬 나이대였다.
강호 역사상 이런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들이 모인 일은 전무하다시피 한 일이었다.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보통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간혹 무림대회나 개파대전이 열리긴 하나 그것은 강호의 전 무인들이 모이는 자리다.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선배들과 노고수들이 즐비해 젊은 무인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남의 집 중요한 행사이다 보니 체면을 차리느라 아무래도 연애 감정이 싹트기에는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그에 비해 현재의 소림에는 다들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들이 모여 있었다.
목적이 같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함께 동행한 사문의 웃어른들도 소림에 온 이유가 명확한 터라 오히려 만남을 장려하는 쪽이다.
현재 소림의 외원에는 한 걸음만 내디뎌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는 젊은 청춘 남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여인들이 장건이 목적이었다고는 해도 사실상 장건은 그들이 넘볼 수 있는 위치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기회가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다른 남자를 찾아도 그만이었다. 사람은 넘치게 많았고 선택의 여지도 풍족했다. 그러니 누구나 마음 편히 자유로운 연애를 즐길 수 있었다.
소림이 정말로 천하 젊은 남녀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나 소림에서 강짜를 부리던 백리연의 추종자들이 순식간에 제압되면서, 성깔 좀 있다 하는 청년들도 괜히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거나 무공을 과시하지 못했다.
그랬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꼴이 되면 자존심이고 명예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터였다. 모인 이들 중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철비각 종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그런 데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연애를 즐기는 게 나았다. 오히려 다르게 생각해 보자면 지금 소림 내에서만큼 ‘안전하게’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혼기가 찬 자식을 둔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놈아! 집 안에서 궁상떨지 말고 차라리 소림에 가서 색싯감이나 구해 와!”
“남들 다 짝 찾아온다는데 넌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니가 외모가 빠지니, 집안이 딸리니? 빨랑 짐 싸들고 소림으로 가지 못해?”
현 강호의 무가와 문파들의 내부에서 유행하는 말이었다.
소림에 가면 없는 짝도 생겨난다.
워낙 많은 선남선녀가 모인 탓이었다.
이 같은 소문이 또다시 퍼져 나가면서 뒤늦게 소림에 모여드는 이들이 늘었다.
중원 그 어디에서보다 안전하게 수많은 이성과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소림이었다.
그렇게 소림 사(寺)가 소림 다원(茶園)으로 거듭난 탓에, 소림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연일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다소 곤란해진 것은 역시나 소림의 승려들이었다.
그나마 강호행을 하고 돌아온 무자배 제자들은 어떻게든 극복을 하려 하는데, 아직 강호행을 거치지 않은 무자배는 죽을 지경이나 다름없었다.
강호행을 하지 않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중반까지의 무자배들은 아무래도 한창 혈기가 왕성한 나이였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경내에 여인들의 향기가 진동을 하니 코를 막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요, 수련 좀 할라 치면 외원에서 깔깔대는 뭇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여색을 멀리해야 할 승려들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때문에 외원에서 봐야 할 업무는 기피 대상인 한편, 최고로 인기가 좋기도 한, 모순적인 현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만큼 동요가 심하다는 반증이었다.
막 외원의 한 법당에서 설법을 주재하느라 참관했던 무자배 승려 둘은 내원으로 돌아가면서도 곤혹을 겪었다.
또래 나이의 아름다운 처녀들이 그들을 볼 때마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합장을 해온 까닭이었다.
처녀들의 해맑은 미소와 청명한 목소리, 풋풋한 향기가 심장을 살살 녹이는 듯했다.
“나무아미타불……. 하아아…….”
갓 스물이 된 무일은 마주 반장을 하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곁에 서 있던 무일의 사형 무범이 남들 몰래 무일을 꾸짖었다.
“사제, 정신 차려. 우리가 느슨해지면 사람들이 그만큼 우리를, 그리고 소림을 우습게볼 게 아니겠어?”
“사형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하아아…….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자꾸 현기증이 오는 게…….”
무범은 강호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른 무자배와 달리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무범은 큰일을 많이 겪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쪽에 속했다.
처절한 강호행을 겪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강호행에서조차 이렇게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지 무범도 무일처럼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무일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까지 머금은 채 무범을 보고 물었다.
“사형. 제가 정말 악귀에 물들어 이러는 겁니까? 아직 수행이 부족해 번뇌에 집착하는 것입니까?”
그래도 사형이라는 입장에서 무범은 사제를 돌보려 애썼다.
“부처께서 아난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삼매를 닦는 것은 번뇌에게서 벗어나고자 함이니, 음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번뇌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힘들어도 참고 또 견뎌내야지.”
“사형…… 사실은 제가…….”
“말해 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사형이 뭔들 못해 줄까?”
무일이 주저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밤에 유정(遺精)을 하였지 뭡니까.”
“뭐?”
몽정을 했다는 말에 무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사형제 몇몇도 새벽에 보니 남들 몰래 승복을 빨고 있었습니다.”
뒷이야기는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부둥켜안고 어쩌다 자신들이, 소림이 이 꼴이 되었는지 대성통곡하며 우애를 다졌었다.
차마 그것까지는 말하기 어려웠다.
무범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그때 누군가 무일과 무범의 어깨를 동시에 툭 쳤다.
무일과 무범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무진이었다.
“대사형!”
무진은 얼굴에 만연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본의 아니게 두 사제의 얘기를 듣게 되었군. 그래, 몽정쯤 했다고 해서 뭐가 문제야?”
“그게…….”
“아라한도 몽정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거늘, 건장한 남자에겐 당연한 일이지.”
무범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사형.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라한께서 어찌…… 그건 그냥 속설이 아닙니까!”
무일에게 괜한 소리를 한다고 타박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무진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제들은 아직 수행 중이잖아. 번뇌를 완전히 끊어 누정(漏精)을 하지 않는 단계는 아니라고.”
무일이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 하지만 자꾸만 여시주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리는 것이……. 이제까지 쌓아온 공이 모두 허사가 된 듯합니다.”
“아무런 마음도 없는 나무토막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부처가 될 수 없을 거야. 또, 처자가 있는 재가자들은? 처자를 둔 재가자들은 그럼 부처가 될 수 없단 말인가?”
무일과 무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진이 웃으며 말했다.
“달마께서도 말씀하시길, 음욕은 본래 형체도 없고 상주(常住)도 없는 공적(空寂)이니 끊어 없앨 필요가 없다 하셨다.”
“음욕을 끊어 없애지 않으면 어찌 번뇌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법신(法身)은 본래 굶주림도 욕심도, 괴로움과 슬픔도 없는데 육체가 있기에 사람은 배고픔을 느끼고 추위를 느끼고 병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니 스스로 속이지 않게 되었거늘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 그 가운데 걸림이 없이 자유로움을 얻게 되면 그게 바로 법을 얻는 것이다.”
무범이 물었다.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음욕에 몸을 내어 맡긴단 말씀이십니까?”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정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지. 성품이 청정한 자는 음욕 속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으니 그것은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니라.”
무진이 무일과 무범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알겠습니까, 두 사제들?”
따닥.
“아얏!”
“사, 사형!”
무진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 이거야. 홀로 일어난 음욕은 절로 스러지게 마련이니, 몸과 마음을 정갈히 지킨다면 번뇌 또한 절로 사라질 거야.”
무일과 무범은 더 이상 무진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무진은 웃으면서 자신의 갈 길을 갔지만, 무일과 무범은 한참이나 무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형……. 무진 대사형이 어딘가 달라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전에도 탈속(脫俗)한 사람 같더니만 오늘은 마치…… 머리 위에 후광이라도 있는 듯했어.”
무진이 주는 느낌은 선승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둘의 느낌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무진은 장건에게 맞고 누워 있는 동안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이 무기력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싫었다.
아무리 기운이 없다 해도 손가락을 움직일 힘이 없는 게 아닌데 꼼짝하기가 싫었다.
‘마음……. 모든 게 내 마음에 달려 있었구나. 몸은 그저 마음을 따르는 육편(肉片)이니…….’
수백 번을 읽고 되뇌었던 불경의 구절들이 뼈에 새겨진 듯했다.
늘 입 언저리만 맴돌던 구절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목숨에 집착했던 강호행, 무공에 집착했던 자신의 모습. 그런 것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무진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가부좌를 튼 것도 아니고 자리에 누워 그렇게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화가 복이 된 셈이었다.
“어딜 가도 바글바글. 사람 사는 맛이 나는 듯해서 좋구나. 하하!”
무진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림에 몰려든 이들.
인세(人世)가 천태만상(千態萬象)이듯 누군가는 행복해졌지만, 반대로 불행해진 이도 있었다.
당사등이 바로 후자였다.
당사등은 사흘 만에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간 물 한 모금, 밥 한 수저도 입에 대지 않았었다.
그런다고 당사등쯤 되는 무인이 죽을 리는 없겠지만 몰골은 확실히 초췌해져 있었다.
당사등이 방을 나서자마자 여기저기서 젊은 남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이 당사등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크흠!”
당사등은 의관을 갖춘 후, 어디인가로 걸음을 옮겼다.
사흘간 그가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결심했던 일을 드디어 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 ☆
며칠째, 장건의 부친인 장도윤은 죽을 맛이었다.
“허허. 노부로 말할 것 같으면…….”
노부고 나발이고 눈앞의 노인이 벌써 오늘만 해도 13번째로 만나는 손님이다.
특히나 장건이 문각 선사의 진전을 이었다는 소림의 발표 이후에는 장도윤을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아예 줄을 섰다.
듣도 보도 못한 무가와 무관의 장로급들도 여럿 만났다. 한창 자기소개와 장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다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양새가 다들 똑같다.
“이번에 소림에 큰 우환이 생겼으니 같은 강호인으로 어찌 손을 놓고 지켜볼 수가 있겠는가. 하여 본장의 아이와 함께 왔는데…….”
자신이 데려온 여아의 품행이 어떻다는 둥, 미색이 곱다는 둥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어떠냐고 떠보는 것이다.
“괜찮다면 당장이라도 매파를 보낼까 하는데 말일세.”
“예예. 어르신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만, 제가 경황이 없어서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게 장도윤의 입장이건만, 보통 이쯤 되면 상대는 은근히 화를 내는 척하기까지 한다.
“허어! 본장이 그리도 우습게보이는가? 아니면 내가 우습게보이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어르신.”
노인의 설교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자기네 장원의 위세가 어떻다는 둥, 그렇게 튕기다가는 세상 살기 힘들 거라는 둥,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둥.
나이가 있는 이들인지라 협박을 하다가도 어르고 달래는 수법이 보통이 아니다.
장도윤도 험한 일을 겪을 만큼 겪었으니 겨우 대처할 수 있을 뿐이다.
장도윤은 몇 번이나 사과를 하면서 고개를 연거푸 조아렸다. 그렇게 체면을 세워주지 않으면 노인의 허리춤에 찬 철주판이 언제 장도윤의 머리에 박힐지 모르는 노릇이다.
“말이 아주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로구만. 아직 여유가 있으니 잘 생각해 보시게나. 흠흠.”
노인이 자리를 털고 나가자, 장도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마신 차만 수십 잔이었다. 물배가 차서 더부룩하다 못해 쓰릴 지경이다. 밥맛이 없어 점심도 걸렀다.
“정말 쉽지 않은 노릇이구나.”
장도윤은 속이 타서 또다시 차를 따라 훌쩍 마셨다.
다행히도 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 오니 잠시 손님이 끊긴 모양이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마을로 나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는 얘기가 여러 군데서 올 터였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체면문제 때문인지 정말 거물이라 할 수 있는 검왕 남궁호나 독선이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장도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잘난 아들을 두어도 고민일세, 그려.”
장도윤은 그래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걱정도 되지만 그만큼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때 사미승이 문 밖에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또다.
장도윤이 피로한 기색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본 순간, 피로감이 싹 달아났다.
당사등을 알아본 것이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말이 씨가 된다더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인물 중의 한 명이 장도윤을 찾아왔다.
“드시지요.”
천하 거상 장도윤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장도윤은 자리를 내주고 차를 따랐다.
언제 속이 불편했냐는 듯 쓰리던 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당사등은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온 후부터 일다경이 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장도윤은 온몸이 다 따끔거렸다.
아무 말도 없이 앉아서 보고만 있을 뿐인데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가지 찾아온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장 손을 쓰지 않더라도 장도윤이 소림을 나가는 순간 피를 토하며 죽게 만들 수도 있고, 단신으로 장가장을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무인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나 일반인들에게는 신선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우내십존이요, 그 중에서도 독선은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다.
‘침착해야 된다. 침착해야 돼.’
장도윤은 자신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그보다도 장건이 더 걱정스럽다.
아들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비 된 도리라 장도윤은 다짐했다.
독선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며칠 전 당가의 여식이 자신을 소개한 적이 있었으니까.
남은 것은 장도윤의 결정이다.
독선이 선뜻 직접 찾아온 것은 괜히 장도윤의 의중이나 떠보고자 함이 아닐 것이다.
독선 자신의 체면과 가문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데도 직접 왔다는 건 확답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독선에게는 쓸데없이 말을 돌릴 수 없다.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면서 슬쩍 대답을 회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언의 압박.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태도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주판알이나 튕겼다가는 목이 달아난다.
장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을 하고 나니 떨림도 가라앉았다.
장도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도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한 마디였다.
독선이 말을 하지 않고도 수많은 의미를 내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도윤의 한 마디에도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장건이 억지로라도 혼인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장건을 해하게 했던 집안으로는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 독선의 표정을 볼 수는 없으나 주변의 공기 변화가 심상치 않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장도윤인데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묵직하고 날카롭다. 공기 중에 작은 칼날들이 무수히 떠다니며 장도윤의 피부를 쿡쿡 쑤시는 듯하다. 숨을 쉴 때마다 기관지가 따끔거린다.
떨지는 않았지만 장도윤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이 배었다.
드디어 독선 당사등의 입이 열렸다.
“노부는…….”
꿀꺽.
장도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사등의 말이 이어졌다.
“노부는 그저 건이가 탐났을 따름이었다.”
장도윤은 그 말을 장건에게 해코지하려 한 게 아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대답은 같았다.
“죄송합니다.”
당사등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사등이 입을 열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이 장도윤에게는 억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등허리에 배인 땀이 축축하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장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이란 아이에게는 소림 선대의 은원이 얽혀 있다. 아니, 현재라고 해야겠지.”
무림인들의 은원이, 그것도 우내십존 급의 은원이 얽혀 있다는 언질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이제 장도윤은 며느리를 선택할 때에 한 가지 기준을 더 추가해야 할 터다.
우내십존과 맺은 은원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가문…….
말을 잠시 멈추었던 당사등이 찻잔을 들어 장도윤에게 내밀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노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도윤은 눈앞에 보이는 찻잔과 그 안의 맑은 찻물이 그토록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장건을 위해서는 도리가 없었다. 장도윤은 찻잔을 받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당사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건도 그렇지만 아비란 자도 대단한 배포를 가졌다. 괜히 거상이 될 수 있던 게 아닌가 보다.
이런 자를 아무리 협박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당사등은 그렇게 판단했다.
당사등이 물끄러미 장도윤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장도윤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당사등을 보고 멈칫거리는 중년인들이 있었다.
당사등은 그들을 무시하고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하하하!”
갑작스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 안에 맺혀 있던 분노와 허무함이 잔뜩 깃든 허망한 웃음소리였다.
공력이 깃든 당사등의 웃음소리에 경내가 쩌렁쩌렁 울린다. 사미승들과 중년인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하하하하하!”
당사등은 한참이나 그렇게 웃다가 돌연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사미승과 중년인들이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웃음소리만으로 내상을 입힐 정도로 가공할 내공을 지닌 당사등의 위용이 새삼스럽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구만.”
장도윤을 찾아왔던 소문파의 장로급 중년인은 혀를 내두르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당가와 얽히는 것도 두렵지만 화가 나 있음이 분명한 당사등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 ☆ ☆
장도윤은 찻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경직된 채 서 있었다.
밖에서 당사등의 쩌렁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찻주전자 안의 찻물이 불로 끓이는 것처럼 들끓는 것이 보인다.
달그락 달그락.
찻주전자가 흔들리면서 한쪽 벽에 걸린 아담한 족자가 툭 떨어진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장도윤이 마신 차 안에는 독이 없는 모양이었다.
웃음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장도윤은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았다.
“후우, 후우…….”
생에 몇 번 안 되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장도윤은 기력이 없어 한참이나 의자에 늘어지듯 붙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건이 찾아왔다.
워낙 사람들의 눈이 장건에게 쏠려 있는지라 장건은 하루에 한 번 장도윤을 찾아오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해서 느즈막한 저녁이 되어서야 몰래 찾아오곤 했다.
“아빠!”
“오, 우리 아들 왔구나.”
장도윤의 목소리에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장건은 장도윤의 안색이 좋지 못한 데다 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괜찮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당사등이 경고의 말을 남기고 가긴 했으나, 어쨌든 자신의 뜻을 확고히 밝혔으니 같은 일로는 귀찮게 하지 않을 터였다. 장도윤은 굳이 장건에게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뭘 하고 지냈느냐?”
“맨날 똑같죠, 뭐. 아픈 분들을 돕고 그랬었는데 많이들 나아지셔서 소림을 나가시니까 딱히 할 일도 없어요.”
장건은 하루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장도윤에게 말하며 수다를 떨었다.
속가 제자들의 정기 수련 시간도 당분간 미뤄진 상태라 내원에 틀어 박혀 있는 장건의 하루 일과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남아 있는 환자의 치료를 돕거나 친구들의 얘기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장도윤은 지금 순간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가 그렇게나 그리던 평범한 부자의 모습이다.
당장의 고민만 없으면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장건의 얘기를 웃으면서 듣고 있던 장도윤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들아.”
“네.”
“혹시 그 사이에 네가 괜찮다 생각하는 처자는 생겼냐?”
그나마 장건이 마음에 있는 여아가 있다면 장도윤은 그 처자와 연을 맺게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차피 재산이야 장가장에도 넘칠 만큼 있고, 상대의 가문도 몇몇 세가를 제외하면 다 비슷비슷하니 말이다.
만일 선택에 따른 책임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차라리 장건이 좋아하는 아이와 맺어주는 게 나을 거라는 것이 장도윤의 생각이었다.
한데 장건은 장도윤의 물음에도 별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며칠째 장도윤이 매일 묻는데도 그냥 평범하게 말하듯 대답한다.
“글쎄요? 왜 맨날 똑같은 걸 물어보세요?”
“아, 이 녀석아. 예쁜 처자들이 저렇게 잔뜩 있는데 그 중에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친구들은 누가 이쁘다 누가 더 예쁘다 그러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넌 안 그렇다고?”
장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장도윤이 다시 물었다.
“예쁜 애를 봐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냐?”
끄덕끄덕.
그나마 장건은 제갈영이 귀엽다고 생각은 하지만 동생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허어.”
장도윤은 아무래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고도 남았을 나이다. 예쁜 여자를 보면 밤에 잠도 안 오고, 괜히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얼굴에 홍조도 띠워야 정상이다.
장건처럼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여자를 대하고 말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하긴, 그러니까 백리가의 여식을 다짜고짜 두들겨 팰 수도 있었겠다만.’
엄청난 미녀보다도 아비의 위험에 더 마음을 써준 건 고마운데, 통상적으로 그런 미녀를 상대로 그렇게나 과격하게 손을 쓰는 남자는 없지 않은가.
“네 엄마가 너무 예뻐서 다른 여자들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거냐?”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씨 부인은 젊었을 적에 절색이란 소리를 들었던 만큼 나이를 먹은 지금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건이 소림에 오기 전에는 나중에 커서 엄마에게 장가가겠다고 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장건이 성인이었다면 끔찍한 소리일 수도 있었으나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그런 말을 하곤 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 정상적이었던 장건이 알 것 다 아는 나이가 되어서는 왜 비정상처럼 보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산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장도윤은 장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장건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에이, 엄마는 엄마잖아요.”
“이놈아, 너 옛날엔 엄마랑 결혼하겠다 그랬어.”
“정말요?”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장건은 기억을 못했다. 장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가 예뻐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걸요.”
“허허. 네 말이 맞긴 하다만 그래도…….”
장건이 생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쁘면 뭐해요?”
“응?”
“여자가 예쁘다고 쌀이 나오나요, 돈이 생기나요.”
“컥!”
장도윤은 위장 안의 찻물까지 내뱉을 뻔했다.
남의 아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한바탕 웃으면서 ‘고놈 참 맹랑하구나’라고 했을 텐데, 자기 아이가 그런 말을 하니 장도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건 열여섯 사춘기 남자아이가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수천 년 역사가 지속되어 온 이래, 미인을 위해서 목숨을 건 남자가 얼마나 많으며 미인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뒤집혔던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장건의 말은 현실적이긴 하나 너무 현실적이어서 장도윤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불현듯, 장도윤은 겁이 났다.
무인들 중에는 무공에 빠져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했다.
‘혹시 우리 건이도?’
장도윤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건아.”
“네.”
“남자가 큰 뜻을 품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것은 좋은데 말이다. 과도할 정도로 빠져드는 건 좋지 않은 거다. 그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지 않으냐.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장건은 장도윤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빤히 뜨고 되물었다.
“예쁜 여자와 과유불급이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장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건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왠지 안쓰러워서다.
“네 나이 때에는 친구들과 뛰어 놀기도 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건데…….”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유별나게 자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건의 험한 사주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도윤은 다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말했다.
“건아. 네 혼인 상대를 이 아비가 결정하는 게 아무리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나는 네가 가능한 마음에 드는 처자와 혼인을 했으면 좋겠구나.”
말똥말똥.
“그런 처자 없다니까요?”
“앞으로라도 만들면 될 거 아니냐.”
“왜요?”
“…….”
“그냥 아빠가 골라주시면 되잖아요.”
“…….”
장도윤은 점점 더 장건의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소림사도 좋고 무술도 좋지만, 장건은 가업을 물려받고 대도 이어야 하는 독자다.
이대로 두면 가업이고 가정이고 다 팽개치고 소림에 틀어박혀 무공이나 배우겠다고 할 판이다.
혼인도 중요하고 가문을 보고 고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건의 무관심 병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너 우리 집안의 가훈이 뭔지 아느냐?”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 장건이었다.
“정직, 성실, 그리고…… 잘 모르겠어요.”
“하나는 화목이다, 화목. 남자는 가정이 화목해야 바깥일도 잘 풀리는 법이다. 가정을 내팽개쳐서는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대도 잘 될 수가 없는 거야.”
평생 부인을 아끼고 살아온 장도윤이니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건은 왜 자꾸 장도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날 찾아올 때마다 매일 처자들 이야기를 하거라.”
“네에? 무슨 얘기를요?”
“어떤 처자의 어떤 점이 괜찮다든지, 저 여자랑 살면 어떨 것 같다든지 뭐 그런 얘기 말이다. 모르겠으면 친구들에게라도 물어보고. 그래서 최소한 반시진은 내게 처자들에 대한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역시 그런 이야기는 친구들이 해주는 게 제일이다.
장건에게는 정말로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장도윤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장건은 오글오글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오늘따라 장건에게는 아빠가 이상하게 보였다. 장도윤이 혼인 문제로 얼마나 노심초사 하고 있는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아참, 친구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러 명 있는데요. 제일 친한 애는 소왕무랑 대팔이에요. 그건 왜요?”
“아니다.”
장도윤의 입장에서도 장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일도 아니고 장건 본인의 혼사 때문에 심지어 그 대단한 독선의 앞에서까지 용기를 냈는데, 정작 장건은 여자에 관심도 없어하는 것이다.
“자자, 알았으면 당장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고 얘기라도 좀 하고 오너라.”
“이제 곧 저녁 공양시간인데요?”
“아, 인석아! 그럼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자고 하면 되지!”
장건이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나 먹기도 모자란데…….”
“어이쿠야!”
장도윤은 뒷목을 잡았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장가를 가겠다는 녀석 치고는 참으로 불량한 태도이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 ☆ ☆
당예는 갑작스런 당사등의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당유원이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고, 당사등도 뒷짐을 지고 창 앞에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당사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짐 싸거라. 사천으로 돌아가야겠다.”
“네에?”
당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사등이 검왕 남궁호를 만난 후 갑자기 칩거에 들어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바로 돌아가자고 할 줄은 몰랐다.
당유원이 당예를 타박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느냐! 남궁가에서 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네가 그 아이의 마음을 빼앗아야 한다 했지!”
당사등이 당유원을 조용히 나무랐다.
“예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백부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본가에서 출자한 것이 얼마인데 그냥 포기한단 말입니까!”
당사등이 꾸짖었다.
“너는 그럼 남궁호가 가져온 것이 본가의 신패가 아니고 단순한 노리개라고 잡아뗄 셈이란 말이냐! 우리가 상인도 아니거늘 왜 돈에 연연해! 재물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나, 한 번 손상된 가문의 체면은 다시 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단 말이냐! 본가의 신패가 더 이상 염라패가 되지 못한다면 본가는 남들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말 터이거늘!”
당유원이 모를 리 없건만, 손해가 너무 막심했다. 당분간 당가는 재정을 긴축하여 허리를 졸라매야 할 판이다.
당유원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원망어린 눈초리로 당예를 쳐다보았다.
당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당사등은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차피 예가 건이를 포섭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판에 굳이 모험까지 할 수는 없다. 나라고 아깝지 않겠느냐마는 이쯤에서 접는 것이 최선이야.”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나왔을까?
당예가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그럴 순 없어요!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당유원이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제 다 끝났다니까! 더 이상 소림에 있어봐야 나아질 것도 없는데 무슨 창피를 더 당하겠다고!”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한다고 했잖아요!”
당예는 빽 소리를 지른 후 방문을 젖히고 뛰쳐나갔다. 당유원이 말릴 틈도 없었다.
“후우우…….”
당유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당사등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버려두어라. 그간 예도 노력한 게 있으니 아까워서 저럴 거다. 그래도 며칠 시간이 있으니 좀 지나면 기분을 추스를 여유는 있겠지.”
당사등은 공허한 눈을 들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을 마냥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포기한 것 같으나, 당사등은 곱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당사등이 장도윤을 만나고 온 직후, 당사등이 직접 쓴 서한을 담은 전서구 한 마리가 은밀히 소림을 떠났던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다! 설사 부서뜨려서라도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당사등의 입가에 공허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살기어린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