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6
제 5 장 홍오를 만나다
장건은 평소보다도 더 멀리까지 산행을 갔다.
길을 가다가 열매가 보이면 따먹고, 심심하면 볕이 드는 곳에 앉아 기를 먹기도 했다.
“역시 어디서 기를 먹던 간에 새벽보다는 못하구나.”
장건은 입맛을 쩝 다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기분 좋은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노사님은 왜 그러시지?”
가뜩이나 말이 없던 사람인데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더 줄었고, 혼자서 머리를 싸매며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다가 문득 장건을 째려보는데 그 눈빛이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늘 하던 건신동공도 하지 않았으므로 아예 장건은 산으로 도망치듯 나와 버린 것이다.
“차라리 속 시원히 말을 해주시지. 말을 안 하시니 내가 귀신도 아닌데 노사님의 속마음을 알 수가 있어야지.”
장건 때문에 굉목이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 받는지 모르기에 하는 소리였다. 정작 장건은 비급이고 뭐고 본 적도 없으니 굉목처럼 걱정하지도 않았다.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슬슬 눈이 감겨왔다.
“아, 이러다가 잠들겠다.”
장건은 졸음을 쫓으려고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하도 굉목에게 구박을 받다보니 아예 낮잠을 자면 안 된다는 사고가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장건이 일어나보니 앞에 웬 노인이 한 명 서 있는 게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눈썹은 마치 수염처럼 길게 자라 홀쭉한 뺨까지 내려와 있었고, 눈가에 처진 주름살 때문에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언제?’
인기척을 조금도 못 느꼈기에 장건은 조금 놀랐다.
노인을 가만히 보니 삭발을 하고 계인을 찍었는데 누런색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소림사에 계신 스님이신가보다.’
장건은 일단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노승은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장건을 보았다.
노승의 법명은 홍오.
소림사의 방장인 굉운보다 한 단계나 더 윗배분의 어른이다. 그런 홍오가 장건을 만나게 된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홍오는 장건을 몇 번이나 보았었다. 언제인가부터 정체도 모르는 아이가 품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승복을 입고 산을 돌아다니는 게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 온 놈이길래 종잡을 수 없이 쏘다니는고?’
처음에는 그 정도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아이의 움직임이 보통 날랜 게 아니다. 움직임 자체는 제대로 무공을 배운 듯한데, 미묘하게도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었다.
아이를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정식으로 입적한 제자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렇다고 속가제자라고 보기에도 이상한 것이 속가제자들은 소림 본산에서 수련을 하지, 함부로 산을 쏘다니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아이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만큼은 홍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과일을 따먹는데 손놀림은 용조수의 수법이요, 걸음걸이는 영락없는 불영신보가 아닌가!
둘 다 소림의 정식 제자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무공이니 홍오는 아이의 정체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원체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홍오였다. 그래서 결국은 아이에게 직접 물으려 나타난 것이다.
한데 가까이서 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가만히 서 있는 아이의 자세에서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무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묘하게도 기세를 내뿜지는 않고 안으로 싹 갈무리한 듯 겉모습이 고요하기만 하다.
‘희한한 녀석일세! 도대체 무공을 어떻게 배웠을꼬?’
홍오쯤 되면 어느 정도는 한 눈에 그 사람의 경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 아이는 어딘가 기이한 구석이 있어 정확히 단언할 수가 없었다.
‘소림에 파묻혀 살았더니 보는 눈도 녹이 슬었나. 흐음.’
소림에서 손꼽는 고수인 홍오의 안목으로도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아이.
홍오는 아이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장건의 입장에서는 고매해 보이는 노승이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홍오가 가만히 장건을 보더니 다짜고짜 묻는다.
“대체 넌 뉘 밑에서 배우는 아이냐?”
홍오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편이 아니었으나, 매일 카랑카랑한 굉목의 목소리만 듣던 터라 장건은 오히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전 굉목 노사님과 함께 살고 있는 장건이라고 합니다.”
“으잉? 굉목과 살고 있다고?”
홍오는 정말로 놀랐다. 아이의 입에서 굉목이란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굉목 노사님을 아세요?”
홍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잘 알지. 잘 알고말고. 사실은 너도 몇 번이나 보았다. 굉목과 살고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지만.”
“예? 제가 여기에 7년이나 있었는데 대사님을 뵌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넌 못 봤겠지만 나는 보고 있었지. 며칠 전에도 이 앞 너머에서 산열매를 따먹고 있지 않았느냐?”
장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홍오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굉목 녀석의 성격이 보통 깐깐한 게 아닌데 어떻게 7년이나 함께 있었을꼬?”
원래 그 말을 물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굉목과 7년이나 살았다니 궁금증이 도졌다.
“우와, 스님께서도 아시는군요. 굉목 노사님이 얼마나 깐깐하신지 처음엔 엄청 구박받았다니까요. 요즘에도 계속 구박받지만요.”
그 말에 인상이 좋지 않던 홍오가 얼굴을 풀고 크게 웃는다.
“껄껄. 맞아 맞아. 굉목이 그런 놈이지.”
장건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그렇게 웃긴 얘긴가?’
홍오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고생이 많았겠어.”
“고생은요, 뭐. 그런데 대사님은 누구세요?”
“나? 내 법명은 홍오라고 한단다. 그런데 넌 굉목의 제자더냐?”
장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그냥 같이 살기만 하고 제자는 아닌데요?”
“같이 살기만 하고 제자는 아니다라? 흠…….”
홍오는 장건을 위아래로 보더니 물었다.
“정말로 굉목 녀석의 제자가 아니라고?”
“예.”
“그럼 속가제자인고?”
“아니요. 속가제자도 아니에요.”
홍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한 일이로세. 방금 전까지 넌 불영신보의 보법을 밟지 않았느냐?”
장건이 생각해 보니 굉목도 장건이 걷는 모습을 보며 불영신보라고 했었다.
“굉목 노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는데……. 전 불영신보가 뭔지 몰라요.”
“어허. 그럼 조금 전에 열매를 따먹던 수법은 무엇이고?”
장건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냥 따먹은 건데요. 제가 잘못한 거면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열매라도 따먹어야 했거든요.”
“일수(一手)에 나뭇가지를 상하지 않고 서너 개의 열매를 땄는데 그것이 그냥 한 것이라?”
끄덕끄덕.
홍오는 ‘허!’ 하고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소림의 용조수라는 수법이다. 그리고 불영신보와 용조수는 굉목이 자랑하는 쌍절(雙絶)이지. 뭐, 그 녀석은 무공에 관심이 없다고 몇 개 배우지도 않았으니 쌍절이라고 해봐야 그게 거의 전부지만.”
“헤에? 그런가요? 하지만 전 굉목 노사님께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걸요.”
“손을 내어봐라.”
“네?”
장건이 미적거리자 홍오가 번개처럼 장건의 손목을 잡아챘다. 홍오가 정순한 내기를 장건의 몸 안으로 밀어 넣자 반발력이 느껴진다.
“기분이 이상해요.”
장건이 손을 뗐다.
예전에 굉목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오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건의 나이에 비해 내공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홍오는 차분히 장건을 관찰했다.
똘망거리는 장건의 눈망울을 보니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흐음. 제자는 아닌데 무공을 익혔다…….”
무공을 훔쳐 배웠든 굉목이 가르쳤든,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홍오를 보며 장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홍오 대사님?”
“응? 왜?”
“그게요. 저……, 굉목 노사님께서도 절 보고 이상하다고 하셨거든요.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요. 정말 제가 뭔가 잘못한 건가요?”
“큰일이라면 큰일이고, 아니라면 또 아니지.”
사실은 큰일이다.
“그럼 전 어떡해야 하나요? 이제 3년만 더 있으면 되는데.”
살짝 안절부절못하는 장건의 모습에 홍오는 안쓰러움보다도 궁금증이 더 치밀었다.
“3년이라니? 3년 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느냐? 무슨 사연이라도 있다면 말해 보거라. 혹여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요, 전 팔자가 좋지 않아서 10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거든요.”
장건은 팔자가 사나워 8살 때 집을 나와서 이제껏 굉목과 함께 살게 된 일들을 얘기했다. 사실 더 얘기하려고 해도 할 게 없었다. 굉목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얘기뿐이다.
7년간 매일이 거의 똑같은 일상이었다. 아무리 끄집어내려 애를 써 봐도 얘깃거리라고는 계절마다 바뀌는 채소 정도였다.
“굉목을 따라했다고? 7년 동안? 허어, 굉목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겠어.”
“굉목 노사님은 제가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어요.”
“굉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허허허!”
홍오는 껄껄대고 크게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따라하기만 했는데 이만한 성취를 얻었어? 이거 제대로 난 놈이구나!’
홍오는 은근히 장건이 탐이 났다.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타고난 무골로 보이지도 않는데 혼자서 이만한 성취를 얻다니.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당장 간단한 무공 몇 수만 가르쳐 강호에 내놓아도 신성(新星) 소리를 들을 만한 아이다.
‘백에 하나가 아니라 만에 하나 날 만한 녀석이로구나.’
홍오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했다.
“그런 팔자 때문이라면 역시 굉목에게 맡긴 게 탁월한 선택이었네. 방장의 혜안이 아주 뛰어났구먼.”
“예?”
“굉목 이놈이 어찌나 근검해야 한다고 청승을 떠는지 주변 사람들이 다 혀를 내둘렀지. 어린 너야 고생이 많았겠지만, 그런 연유가 있었다면 굉목만 한 녀석이 없지, 암. 아주 고약한 놈이긴 하지만.”
그 말은 장건에게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장건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러면 이제까지 버틴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허허허.”
“어쨌든 전 어쩌면 좋나요. 겨우 3년 남았는데……. 후우.”
“굉목 같은 고약스런 놈과 7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것보다 큰일이 어디 있겠누. 이제 와서 큰일이 생긴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걱정하지 말거라.”
장건이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홍오는 일단 장건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도와주마.”
장건은 울상을 지은 채 홍오를 보았다. 굉목에게 이놈저놈 하는 걸 보니 보통 스님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걸요.”
“걱정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거라. 근심은 마음을 병들게 하고 시름은 몸을 아프게 하는 법, 부처께서 네가 그간 쌓은 공덕을 내치지 않을 거다.”
“전 공덕을 쌓은 적이 없는걸요.”
“굉목 그놈과 함께 산 것만으로도 절로 무량한 공덕이 쌓였을걸?”
장건은 홍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진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껄껄.”
홍오는 웃으면서도 속으로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자,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얼른 가봐야겠다. 그럼 또 보자꾸나. 아미타불.”
“살펴 가세요. 아미타불.”
장건도 홍오를 따라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숙였다.
“아참. 굉목에게는 나를 만났다고 말거라.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둘만의 비밀이다.”
“예? 하지만 전 노사님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걸요.”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고 날 만난 걸 말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잖느냐. 나중에 굉목 녀석을 놀래켜 주려고 그런 거란다.”
장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사님 말씀대로 할게요.”
“허허허.”
장건이 고개를 드니 어느 샌가 홍오는 휘적휘적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데 그 걷는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천천히 걸음을 내딛을 뿐인데 마치 달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모습이 작아져갔다.
“와아.”
장건은 방금까지 우울했던 것도 잊고 홍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홍오의 모습을 보았다면 ‘대단하다!’ 혹은 ‘엄청난 경공술이다!’ 하고 탄성을 외쳤겠지만, 장건은 달랐다.
“저렇게 걸으면 먼 데도 진짜 빨리 갈 수 있겠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장건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아쉽다. 좀 더 자세히 볼걸.”
장건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런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홍오처럼 걸을 수 있을지, 거기서 더 힘을 덜 들이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홍오조차 이런 일은 예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 ☆ ☆
“방장 사질!”
홍오는 거의 문을 박차다시피 방장실로 뛰어들었다.
굉운과 함께 있던 도감 굉정은 깜짝 놀라 내공을 급히 끌어올렸으나 굉운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허허’ 웃으며 홍오를 맞았다.
굉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홍오 사숙,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홍오는 얼마나 빨리 본산까지 내려왔는지 수염이 다 헝클어져 있었다.
“험험.”
홍오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반장했다.
“내가 경망스럽게 굴었구먼. 하도 마음이 앞서다 보니 경황이 없어 그랬네.”
굉운이 반장하며 물었다.
“나무아미타불. 사숙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그것도 이리 급하게요.”
홍오는 애써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굉목이 제자를 들였다는 거 알고 있었나?”
굉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자를 들인 게 아니라 사정이 있는 아이를 잠시 맡고 있습니다.”
“아아, 그래? 무공을 하던데?”
굉정이 놀라 되물었다.
“무공을 해요?”
하지만 굉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소림에 7년이나 있었으니 무공 한 자락 할 줄 모르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지요.”
홍오가 코웃음을 쳤다.
“방장 사질이 굉목 놈과 짜고 제자를 받고서 아닌 척하는 건 아니고?”
“제가 어찌 사숙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 용조수와 불영신보를 할 줄 알던데?”
“예?”
단순히 무공이 아니라 용조수와 불영신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둘은 외부로 누출되어서는 안 되는 소림의 절기다.
“안됐구먼. 제자도 아닌데 소림의 절기를 훔쳐 배웠으니 단근절맥에 처해야 할 텐데……. 아이만 불쌍하게 되었어. 쯧쯧.”
굉정이 굉운에게 놀란 어조 그대로 말했다.
“방장 사형.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자도 아니고 잠시 맡은 아이에게 소림의 절기를 가르치다니요.”
“굉목 사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러자 홍오가 언성을 높였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정이 있지 않나 싶을 뿐입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네. 긴 말 할 것 없이 당장 굉목을 데려다 꿇어앉히고 물어보게. 정말인지 아닌지.”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굉운이 홍오를 보며 물었다.
“사숙께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게로군요.”
“방장 사질은 눈치도 빠르군. 굉목 놈이 잘못했다고 죄 없는 아이까지 단근절맥하는 건 너무 심한 처사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으니, 그런 아이를 내친다면 소림으로써도 좋은 일이 아니지.”
“말씀해 보시지요.”
“내 근래에 작은 심득 하나를 얻었는데…….”
홍오는 갑자기 당당하게 말했다.
“녹옥불장(綠玉佛杖)이 필요하네.”
굉정이 당황하여 끼어들었다.
“홍오 사숙. 도대체 무슨 일에 쓰시려고 녹옥불장이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녹옥불장은 함부로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녹옥불장은 소림 장문인의 신물이며, 소림의 보물이다. 아이가 무공을 훔쳐 배웠다는 얘기에서 난데없이 녹옥불장이 필요하다 말하니 굉정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홍오의 말뜻을 알아들은 굉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합니다.”
홍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림의 미래가 달린 일이 될지도 모르네. 내 조그만 심득 따위, 별로 필요하지 않다 이건가?”
“사숙께서는 진실로 제가 고인께서 남기신 유언을 뒤엎길 바라십니까?”
홍오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렇다면 여전히 제 생각은 같습니다. 불가합니다.”
“끄응.”
홍오가 인상을 쓰자 굉운이 말했다.
“하지만, 하루 두 시진까지는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 정도면 사조의 유명을 어겼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하루 두 시진으로는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없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장의 위엄을 거스른 셈입니다. 그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위계와 존엄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표정은 담담히 웃고 있으나 뜻은 확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굉정은 왜 홍오가 녹옥불장이 필요하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당대의 장문인은 녹옥불장의 권위로 필요하다 판단되면, 어떠한 원칙과 철칙이라도 예외로 할 수 있다.
홍오는 녹옥불장의 장문령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금제(禁制)를 풀어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오의 금제, 그것은 더 이상 제자를 들일 수 없다는 홍오의 사부 문각의 유언이다.
홍오의 성격 탓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었다.
소림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어렸을 때부터 워낙에 장난기가 많고 남을 골탕 먹이는 걸 좋아했다. 대오각성한 선인들이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홍오는 본성이 그러했다.
홍오 역시 그의 스승 문각에게 무던히도 꾸지람을 들었는데 나이가 들어도 버릇이 고쳐지질 않았다.
강호에 나가서는 남들이 상상도 못할 분탕질을 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은 홍오를 괴승(怪僧)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피해를 입은 문파들은 분하였으나 천하제일 소림의 제자에게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결국 홍오의 사부인 문각이 열반에 들기 직전, 홍오가 소림의 산문 밖을 벗어나지 못하며 동시에 제자를 받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고서야 홍오의 기행이 그쳤으니, 소림으로써는 큰 수치를 껴안게 된 셈이었다.
해서 홍오에게 남은 것은 젊었을 적 들인 제자, 굉목 달랑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굉목조차도 무림과 연을 끊겠다며 산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그에겐 결국 자신의 무학을 전수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홍오가 약간의 노기를 섞어 말했다.
“결단코 녹옥불장을 내주지 않겠다는 겐가?”
홍오는 잠시 말없이 굉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굉운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홍오의 시선을 받았다.
아무리 홍오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소림이나 마찬가지인 방장의 뜻을 어길 수는 없다.
“알았네.”
“하루 두 시진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에잉! 늙은이를 이모저모로 고생시키다니. 정말 못된 방장이구만.”
“그래서 다들 덕을 쌓는 일이 어렵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덕을 쌓는 것보다 사질에게서 녹옥불장을 꺼내게 만드는 일이 더 어렵네!”
홍오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투덜거리면서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굉목 놈에게나 잘 말해 주시게. 내 나중에 다시 오지.”
“방법은 제가 찾아보도록 하지요. 아참.”
굉운이 나가려 일어선 홍오에게 말했다.
“검성 어르신이 오랜만에 사숙을 뵙겠다고 오신다더군요. 곧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검성 녀석이? 에잉, 귀찮게.”
홍오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도 없이 방장실을 나갔다.
굉정은 얼떨떨할 뿐이다.
굉정이 연유를 몰라 굉운에게 물었다.
“방장 사형. 아무리 사숙이라 하셔도 이건…….”
굉정이 답답해하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 굉운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조금 더 지켜보세나. 정말로 필요하다면 나도 녹옥불장을 아낌없이 내어 놓을 테니 말일세.”
“후우. 방장 사형의 깊은 뜻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저는 그냥 하던 일에나 충실하겠습니다.”
약간은 불만어린 굉정의 말투에도 굉운은 조용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
홍오를 만난 이후에도 장건에게 별다른 일은 없었다.
대신 장건의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다듬어진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머릿속으로 홍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따라해 본다. 그러다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싶으면 동작을 바꿔 보면서 걸음을 완성해 갔다.
장건이 단전에 품은 실타래는 허술한 동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미가 없는 동작을 할 때엔 가차 없이 장건에게 불쾌감을 선사했다.
계속해서 홍오의 걸음에 대해 장고(長考)를 거듭하다 보니 그만큼 얻는 게 있었다.
눈에 띌 만큼 부쩍부쩍 신법이 표홀해졌다.
굉목이 워낙 말이 없었고 장건도 굳이 홍오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므로, 굉목은 장건의 신법이 왜 점점 더 좋아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장건은 매일이 신나는 하루였지만, 굉목은 주름살이 깊어만 갔다. 검소한 생활과 꾸준한 수행 덕에 실제 나이보다 20살은 더 젊어보였던 굉목의 얼굴이 제 나이를 되찾아갈 정도였다.
마침내 굉목은 결단을 내렸다.
결정적으로 굉목이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은 새벽의 운기 때 보인 장건의 모습 때문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새벽인데도 장건은 조금도 추워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준 얇은 승복(僧服) 그대로였다.
“헤헤.”
장건은 애기바위에 올라앉으며 웃었다.
“뭐가 좋아서 웃는 게냐?”
“노사는 좋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왜 좋으냐고 묻지 않느냐.”
장건은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굉목을 본다.
8살 때부터 보아온 장건의 버릇이다. 저런 표정을 하면 꼭 이상한 반문, 혹은 굉목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을 한다.
“새벽에는 기를 많이 먹을 수 있잖아요. 희한하게 하루 종일 기를 먹어도 새벽에 먹는 양에는 못 미치더라구요. 반의 반도 안 되는 거 같아요.”
굉목은 장건이 허투루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장건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 산중의 기가 더 풍부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루 종일 기를 먹는다고?”
요즘 들어 장건이 종종 산을 쏘다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열매를 따먹거나 놀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기를 먹으러 다니는 거였나?’
굉목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장건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가부좌를 하면 더 많은 기를 먹을 수 있긴 하지만, 꼭 그렇게 안 해도 기를 먹을 수 있더라구요. 이불을 갤 때도, 나물을 캘 때도…….”
굉목의 이마에 만년빙하에 금이 가듯 깊은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그냥 평소에도 늘 이 호흡을 한단 말이냐?”
“노사님은 안 그러세요?”
굉목은 하마터면 ‘평상시에 단전호흡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허어!”
장건은 굉목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 그냥 굳이 공기 중에 있는 기를 새벽에만 먹을 필요가 있나 해서, 하다 보니 그렇게 되길래……. 공기는 낮에도 있고 밤에도 있으니까 먹는 거야 아무 때나 상관없잖아요.”
굉목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자연의 기를 받아들이는 축기법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서서 하는 입공(立功), 앉아서 하는 좌공(座功), 누워서 하는 와공(臥功), 그리고 건신동공처럼 움직이며 하는 동공(動功).
그러나 어떤 자세로 하던 축기는 온 신경을 모아 집중해야 한다. 숨으로 받아들이는 기의 양이 워낙 적기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면 축기에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기가 풍부하고 조용한 새벽에 주로 단전호흡을 한다.
당연히 장건이 말한 것처럼 일상생활을 하며 축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굉목이 알기로는 그러하다.
‘이 녀석 내공이 기이할 만큼 많이 쌓였다 했는데, 정말로 그게 가능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 과정에 사마외도의 길에 빠질 수도 있는 노릇.
굉목이 소리를 높였다.
“이놈아! 기라는 건 아주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느니라. 마구잡이로 처먹는다고 무공이 높아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장건은 눈만 꿈벅거렸다.
“전 무공 안 배웠는데요?”
굉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말해 주마. 축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한다고 해서 크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하면 알아듣겠느냐?”
“에이, 그건 저도 안다니까요. 낮에 먹는 기는 정말 얼마 안 되더라구요. 뭐, 그래도 어차피 그냥 숨쉴 때 같이 먹는 건데요. 딱히 힘 드는 것도 아니고.”
히죽 웃기까지 한다.
굉목은 가슴을 쳤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무공에 대해 전반적인 기초라도 알려줄 걸 그랬다.
이 상태로 내버려두면 애 하나 잡는 건 시간문제다. 제 마음대로 내공을 쌓고 어설프게 운용을 했다가 동네 친구처럼 주화입마를 만나게 되리라.
내공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여파도 커지기 마련이니, 굉목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허어, 어쩌다 이놈이 이렇게 되었을꼬.’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건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이미 축기에 들어갔으니 건드리거나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평안하던 말년에 이 무슨 고초란 말이냐.’
굉목은 가만히 장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실에 다시 한 번 신음을 삼켜야 했다.
‘이, 이건 또……!’
장건의 들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었다. 숨을 쉬지 않는 듯했다.
반각……. 일각…….
거의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장건은 숨을 내뱉었다.
60년을 해온 굉목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이다.
단순히 시간문제가 아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장건은 한 번도 숨을 끊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조식법을 거의 자력으로 터득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놀란 것이다.
조식법은 인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는 방법을 말하고, 토납법은 토고납신(吐古納新)이라 하여 나쁜 기운을 내뱉고 좋은 기운을 담는 것을 말한다. 즉, 토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하기 위해 조식법을 사용한다.
조식법은 세장심균(細長深均)의 네 가지를 기본으로 한다. 호흡을 가늘고 길게, 또한 깊이 마시며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요체다.
한데 장건은 그 네 가지를 모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보고 따라한다고 배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장건의 경우엔 내공이 쌓인 것으로 보아 토납법을 익히고 있는데다가 조식법까지 하고 있으니, 단전호흡을 완벽히 익힌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순간 굉목은 자신이 가르쳐 놓고 잊어버렸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노망이라도 들었었나?’
만약 굉목이 장건에게 어떻게 단전호흡을 하는 방법을 알았느냐고 물었다면 장건은 필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하니 기를 더 많이 먹을 수 있던데요?”
조금이라도 더 많이, 효과적으로 기를 먹을 생각을 하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숨을 길고 가늘게 하는 것이, 끊는 것보다 쉬지 않고 깊게 하는 것이 낫다는 걸 연구 끝에 알아낸 것이다.
별로 할 일도 없는 산중에서 장건이 할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 생각하고 연구하다 보면 시간도 빨리 가고, 성과도 눈에 보이니 신이 나서 더 파고들었다.
‘안 되겠다.’
이제 장건은 자신이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굉목은 결단을 내렸다.
‘당장 방장 사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겠구나.’
그러나 굉목은 그보다 먼저 방장의 호출을 받고 말았다.
장건과 함께 내려오라는 호출이었다. 간혹 본산에 내려가면 아이와 함께 오지 그랬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말한 적은 있지만, 직접적인 호출을 한 적은 없었기에 굉목은 가슴이 뜨끔했다.
‘혹시……, 장건 이 녀석의 일을 안 겐가?’
무슨 이유인지 몰랐기에 굉목은 전전긍긍하며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 ☆ ☆
홍오는 자신의 암자에서 손님 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홍오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하지만 키가 작고 왜소한 홍오와 달리 체격이 좋은 노인과 젊은 청년 한 명이다.
홍오가 찻잔을 두고 곱게 우린 맑은 차를 따랐다.
청년이 감사하다는 눈짓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향이 좋군요.”
홍오는 주름살을 웃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홍오의 웃는 얼굴을 본 노인이 혀를 찼다.
“쯧쯧. 손을 떼거라. 넌 아직 먹을 때가 안 되었다.”
“예?”
청년이 의문이 담긴 눈길로 노인을 보았으나, 노인의 말을 따르며 순순히 찻잔을 놓았다.
홍오가 탄식처럼 말했다.
“어허, 소림의 존장이 주는 차를 마다하다니. 아무렴 내가 못 먹을 걸 주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괴승이 주는 차는 함부로 마시면 안 되지. 자네 취미가 독초로 차 끓여 마시기였지 않나. 어디 보자.”
노인이 찻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맛을 음미하는 듯 입 안에서 찻물을 굴렸다.
“어떤가? 내 이 입금화(立金花) 차 맛이.”
“기가 막히는군. 소림에서도 이런 독초가 나나?”
그제야 청년은 자신이 마시려던 차가 독초로 만든 것이라는 걸 알고 놀란 가슴을 다스렸다. 설사 독을 마셨다 해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소림의 고승이 독차(毒茶)를 내놓았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이 근방에서 날 리가 있나. 내 은밀히 텃밭에서 키우고 있는 게지. 이것 말고도 좋은 찻잎이 많으니 내 하나씩 맛보여 줌세.”
“찻잎이 아니라 독초라고 해야겠지. 쯧. 이거 은근히 독성이 강하군.”
“이 입금화란 녀석은 아주 묘한 녀석이라네. 뿌리는 약재로 쓰는데 잎은 독성이 강해서 잘못 먹으면 큰일이 나지.”
“그런 걸 남의 귀한 제자에게 먹이려 했는가?”
“이런 것도 먹어보고 해야 나중에 강호에 나가서 엉터리 독에 안 당하지.”
노인이 잔잔하게 웃었다.
“하긴, 자네와 강호행을 하던 때엔 다른 건 몰라도 독의 공부만큼은 많이 늘었지. 당가(唐家)의 그 친구가 밑천이 떨어졌다고 아주 치를 떨었잖나.”
“그 엉터리 당가 놈의 독공보다야 내 독공이 한 수 위지.”
“젊었을 때야 우리 중에서 자네를 앞지를 수 있는 이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당가의 그 친구도 독선(毒仙)이 되었다네.”
가만히 듣고 있던 청년이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독선이라면 현 무림 최강으로 꼽는 우내십존(宇內十尊) 중의 한 명이다. 그 사천당문의 독선이 젊었을 적엔 홍오보다 독공에서 한 수 아래였다니!
노인이 제자인 청년을 보며 말했다.
“놀랐느냐? 그리 놀랄 것 없다. 나도 홍오에게 매화검으로 패한 적이 있으니.”
청년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졌던 자신의 사부가 패한 적이 있다?
그것도 소림의 승려에게, 소림의 무공이 아닌 화산의 절기 매화검으로?
“이 친구는 천재였지. 화산의 제자보다 더 매화검을 잘 펼쳤고, 무당의 제자보다 부드럽게 태극권을 소화해냈지. 심지어는 쾌검으로 알려진 청성일검보다 더 빠른 쾌검을 구사했으니까.”
그리 화를 낼 얘기도 아닌데 홍오가 벌컥 화를 냈다.
“이놈아! 왜 옛날 얘기를 자꾸 꺼내고 그래!”
“껄껄. 갈 날이 되니 자꾸 옛날 생각이 떠오르지 뭔가?”
홍오가 코웃음을 쳤다.
“아예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시지? 화산오검이 핏덩이일 때도 데려와 남의 속을 긁더니, 이젠 옛날 얘기까지 꺼내서 번뇌를 일으키는구만. 내가 해탈을 못하면 자네가 책임질 게야? 아미타불.”
“이 정도야 자네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약과 아닌가.”
노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었고, 홍오의 얼굴은 덜 익은 감을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졌다.
“사내가 소심하긴, 이것도 다 내 업보인 게지. 에잉.”
노인이 은근히 말을 던졌다.
“그럼 졌다고 승복을 하던가. 이승에서의 내기를 저승까지 가지고 갈 셈인가?”
“지긴 뭘 져! 이제 보니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구만!”
“쯧, 사람하고는.”
노인이 웃음을 천천히 지우면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방장에게 부탁을 해보게. 소림을 위해서라도, 중원 무림을 위해서라도 자네의 무학(武學)이 이대로 대가 끊긴다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무학이 사부의 유명(遺命)을 이기는 거 봤나? 남의 사문 일에 신경 쓰지 말게.”
“헐. 그럼 내기에 졌다고 인정을 하던지.”
“아, 내기에 져야 인정을 하지!”
“자넨 나처럼 제자를 들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나. 그럼 내기가 끝난 것이지. 이제 그만 포기하게. 우린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네. 설마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건 아니겠지?”
홍오와 노인은 젊었을 때 무공에 관한 생각이 서로 달라, 자주 부딪치곤 했었다. 그러다가 둘은 한 가지의 내기를 하게 되었다. 어느 쪽이 맞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서로 제자를 키워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홍오는 사부의 유언에 의해 더 이상 제자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나마 한 명 있는 제자 굉목은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며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내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왔음에도 홍오는 아직까지 내기에 지지 않았다며 승복하지 않고 있었다.
“에잉!”
홍오는 인상을 찡그리며 노인의 제자를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질이 뛰어나 보이는 청년이다. 두 눈 부릅뜨고 전 중원을 돌아다녀도 이만한 무골을 가진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내 굉목 녀석만 외골수처럼 굴지 않았어도…….’
하지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장건이라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몇 년만 기다려 봐.”
“몇 년?”
노인이 눈이 이채를 발했다.
“쓸 만한 아이라도 찾았는가? 소림에서 자네의 진전을 잇게 해준다던가?”
“아 글쎄, 몇 년만 기다려 보라니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홍오의 입가에는 웃음이 담겨 있다.
“허허. 도대체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구먼. 내 죽기 전에는 볼 수 있겠지?”
“내기에 지고 싶으면 일찍 죽던지.”
“자네와의 내기에 이기고 싶어서라도 우화등선은 당분간 못할 듯싶으이.”
“흘흘. 5년 안에는 승부가 날 테니 죽고 싶어도 죽지 말게나.”
홍오가 계속 흘흘 하고 웃음소리를 내자, 노인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젊었을 때부터 홍오가 저런 웃음을 지을 때마다 얼마나 곤란한 일을 당했던가.
‘흠…….’
노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오는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
“오늘은 본산에 내려갈 것이다.”
“예?”
아침 공양이 끝나기 무섭게 굉목이 한 말에, 장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장과 장로들을 만나 뵈어야 할지 모르니 최대한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굴어야 한다.”
실로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이 조그만 암자에서 지낸 지가 무려 7년이다.
홍오를 보기 전까지 그동안 본 사람이라고는 석 달에 한 번 생필품을 가져오는 스님 한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아주 잠깐 마주쳐 합장을 하고 마는 정도였다.
굉목이 워낙 깐깐하고 검소하게 사는 바람에 생필품이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았다. 반찬을 따로 하지 않으니 소금 약간 외에는 양념도 필요 없고, 기름이 아깝다고 밤에 등잔불을 잘 켜지도 않으니 기름도 필요가 없었다. 잡곡 한 가마니가 생필품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건이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옷 한 벌로 20년을 입는다 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채비하거라.”
채비라고 해봐야 별다른 게 있을 리 없었다.
굉목은 책 몇 권을 바랑에 넣어 장건에게 맡겼다. 내려가는 김에 다른 경서를 가져올 셈인 듯했다.
한데 바랑을 짊어지는 장건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표정이 왜 그러느냐? 외출하는 게 싫은 게냐?”
“꼭 그런 건 아닌데요…….”
“말끝을 흐리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거라.”
“산을 내려가면 배가 고플 텐데…….”
굉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끙’ 소리를 냈다. 간혹 본산에 내려갈 때 장건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배가 고파서 움직이기 싫다고 도리질을 쳤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함께 가야 한다.
“공양간에 가서 월병이라도 좀 얻어주마. 얼마 전에 중추절이 지났으니 얼마간 남아 있을 게다.”
“월병!”
장건의 눈이 반짝거렸다.
팥과 계란 노른자로 속을 채운 월병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어서 가요.”
장건은 언제 그랬냐는 얼굴로 희희낙락했다.
굉목이 앞서 가고 장건이 약간 뒤쪽에서 따라 걸었다.
장건은 감회가 새로웠다.
‘7년 전에는 올라오는데 반나절이나 걸렸지.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아, 그때는 참 어렸었는데.’
지금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산길을 내려갈 수 있다. 아마 오르막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거다.
휙 휙.
몸을 살짝살짝 움직여서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장건은 그저 흐름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홍오를 만나 그의 움직임을 본 후에 장건의 발은 더 빨라졌다. 아직 홍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반 경공술이나 다름없는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야. 다음에 홍오 대사님을 보면 한 번 더 보여 달라고 해야지. 이번에야말로 자세히 볼 테야.’
장건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이제 3년 남았다. 3년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동안 왜 집으로 도망갈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부모가 10년은 버티라고 수백 번을 말해 왔기에 그것이 각인되어 아예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스스로도 감탄할 일이다.
한편, 따라오는 장건을 힐끔 뒤돌아본 굉목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장건은 쉽지 않은 산길을 앞마당 거닐듯 편하게 내려오고 있다. 게다가 어딘가 묘한 발놀림.
‘응?’
불영신보가 아니라 다른 익숙한 느낌이 든다.
굉목은 그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한참을 끙끙대다가 기억해냈다.
‘대나한선보(大羅漢禪步)!’
굉목은 기가 찼다. 장건이 어떻게 경공법인 대나한선보를 익히고 있단 말인가.
‘불영신보에……, 내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대나한선보까지……. 설상가상이라더니.’
장건이 홍오를 만난 것을 모르는 굉목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에잉, 나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이 녀석을 나한테 맡긴 방장 사형의 탓이지. 암, 그렇고말고. 절대로 나나 이 녀석의 잘못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