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61
제 3 장 굉목의 과거
춘약은 일정 시간 내에 남자가 여자와 교합(交合)하지 않으면 죽게 만드는 것으로 강호에서 사용되는 저급한 술수였다.
수법 자체는 저열하지만 무공의 고하에 관계없이 걸려든다는 장점이 있어 종종 사용되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장건이 바로 그 춘약에 당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네에?”
춘약이라는 말을 들은 대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문원이 물었다.
“뭐 짚이는 거라도 있느냐? 있으면 빨리 말해보거라. 이대로 두면 건이의 생명이 위독하다.”
“그게요. 저는 정말 그게 춘약인지 몰랐어요. 그냥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약이라고 해서…….”
대팔이 횡설수설하자 소왕무가 대신 말했다.
“당가의 여자애가 장건에게 먹이라고 환단을 줬어요. 당가의 비전으로 만든 약인데 원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거라고 해서…… 젠장! 우리가 속았어. 그러게 그런 애 말 듣지 말자고 했잖아!”
문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어떡해야 하죠?”
독정도 이겨낸 건이가 당할 정도의 춘약이라면 보통 춘약이 아니다.
교합을 시키지 않고 이대로 둔다면 장건은 필시 혈맥이 터져 죽고 말 것이다.
아무리 지금 소림에 많은 여인들이 찾아왔다지만, 다른 곳도 아닌 절에서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합방을 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건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괴…… 괴로워…….”
문원은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너희들은 건이를 데리고 숙소로 가 있거라.”
“그동안 건이에게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문원이 곧 장건의 혼혈을 짚었다.
장건은 괴로워하면서 잠이 들었다.
“약기가 돌지 않도록 재워두고 있으면 좀 나을 거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할아버지는 어쩌실 건데요?”
“난 도와줄 사람을 찾으러 다녀오마.”
“예.”
문원이 바람처럼 사라지자, 소왕무와 대팔은 잠이 든 장건을 업고 빈 숙소로 향했다.
둘의 발걸음도 문원처럼 나는 듯 빨랐다. 장건이 죽기라도 한다면 평생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 ☆ ☆
당예는 침소로 돌아오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건이가 거기에 있었지? 약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그 바보들이 건이에게 약을 주지 않았을까?’
소왕무와 대팔, 두 바보에게는 장건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약이라고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가의 비전으로 만든 춘약은 강호의 뒷골목에서 쓰는 저속한 춘약과 달리 특정한 향을 가진 상대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
당예는 소매에 지닌 사향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밤 장건은 아무도 모르게 향을 좇아 자신에게로 찾아와야 했다.
일부러 내키지도 않는데 남궁지의 초청을 받아들여 내원에까지 들어간 것도 여기저기 향을 흘리기 위한 이유였다.
그런데 목욕을 하던 법당 근처에 장건이 있었다면 그때 이미 장건은 반응했어야 했던 것이다.
장건이 허량과 치열한 격전을 겨루면서 엄청난 공력을 주고 받은 탓에 약효가 뒤늦게 퍼졌다는 걸 당예가 알 리 없었다. 거대한 공력이 잠시 동안 약효를 짓눌렀던 것이다.
‘약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본 건 건이가 아니었을까? 내가 잘못 본 걸까?’
그러나 다른 소녀들도 모두 장건을 보았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뭔가 잘못됐어.’
당예는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사향 주머니를 매만졌다.
장건이 이 향에 반응한다면 짐승처럼 자신에게 달려들 터였다.
당예라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막다른 곳에 몰려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당예는 아직 처녀의 몸이었다.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당연히 겁이 났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간 독공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만나다보니 정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며칠 전 강호제일미인 백리연을 망설임도 없이 때렸을 때에는, 마치 장건이 자신만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다른 여자에겐 관심도 없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었다.
당예는 별들이 잔뜩 뿌려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아니면 당장 내일이라도 소림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신 장건을 볼 수 없게 된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다.
‘어쩌면 이게 건이를 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당예는 장건에게 먹인 춘약과 자신이 가진 사향 주머니, 이젠 그것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예가 복잡한 심정으로 침소로 돌아오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당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당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큰할아버님.”
당사등이 가만히 당예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평소하고 다른 향내가 나는구나. 그 약을 쓴 게냐?”
당사등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벼락 같은 호통이 떨어지리라 생각하면서 당예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답했다.
“예…….”
하나 돌아온 대답은 달랐다.
“잘했다.”
당사등이 다가와 당예를 가볍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각오가 필요했을 터인데 훌륭한 결심을 해주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큰할아버님…….”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쓸 것 없다. 이것이 본가의 방식이고 본가가 살아남는 길이다. 본가의 일원으로서 네 결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당예는 당사등의 품을 벗어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느냐. 걱정되느냐?”
“예.”
“흠…… 걱정할 것 없다. 필요하다면 내 건이를 납치라도 해서 네 앞에 데려다 놓으마. 물론 이 주위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못할 것이다.”
당사등은 자랑스러운 듯 당예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당예는 기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잘못되지 않았다. 사향 주머니에서 본래와 다른 깊은 향이 나질 않으냐. 그것은 약을 먹은 자가 네 근처에서 향에 반응했다는 뜻이다.”
“아뇨. 근처에 있었던 건 맞는데요. 반응하진 않았어요.”
당사등이 껄껄 웃었다.
“완전한 반응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머잖아 건이는 담장을 넘고 문을 부수며 널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넌 신랑을 맞을 준비만 하면 될 게야. 비록 지금은 성대하지 못하나 본가로 돌아가면 내 아주 화려하게 혼인을 올려주도록 하마.”
당예는 안도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단순히 시간이 걸린다 보기엔 장건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정말 그럴까요? 약이 잘못된 건 아닐까요?”
당예가 마음을 놓지 못하자 당사등은 짐짓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야, 네가 쓴 약은 말이다. 본가에서 전래되는 비전으로 만든 것이긴 하나, 내가 더욱 개량을 시킨 것이다. 결코 약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네?”
당사등의 말투에 당예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당사등은 마치 예전에 약이 잘못된 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개량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당사등이 당예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네 생각이 맞다. 예전 방식으로 만들었던 약은 그 전에는 잘못된 적이 없었으나, 딱 한 번 실패했었다.”
“정말요?”
당사등이 그때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에 홍오가 부탁을 해서 약을 건넨 적이 있었다.”
“호, 홍오 대사님이요?”
“너도 알 게다. 아미파의 연화사태라고.”
아미파의 연화사태는 당사등과 같은 대에 활동한 이로 약간의 괴벽이 있긴 했으나 고매한 여승으로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설마하니 홍오와 연화사태가…….
당예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고 대답했다.
“예. 알아요.”
“홍오가 그 연화사태와 불법에 대해 논쟁이 붙었었는데, 흠…… 주제가 불심과 육욕(肉慾)에 관한 것이었다. 홍오는 예나 지금이나 괴상한 놈인지라 불심보다 육욕이 앞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정상이라 했고, 연화 사태는 육욕 또한 불심 속에 있는 것이라 육욕이 앞설 수 없다 했다. 결국 둘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지.”
당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홍오나 연화사태가 아무리 덕이 높은 고승이라 해도 그런 얘기로 실험까지 했다니, 차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해서 둘은 중과 비구니를 같은 방에 넣었다. 불심이 앞서느냐 육욕이 앞서느냐 지켜보기로 한 거지.”
“그럼 약은…….”
“홍오 놈이 내기에 이기기 위해 비겁하게도 내게 약을 청해 연화사태 몰래 쓴 게다.”
“아……!”
“너도 짐작했겠지만, 실패했다. 중은 혈맥이 파열되어 피투성이가 된 채 비구니와 함께 나왔고,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당사등이 말을 이었다.
“물론 내기는 홍오가 졌지만, 본가의 자존심도 먹칠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여 난 이후에 심혈을 기울여 그 약을 더욱 개량하였다. 지금 본가에서 제조되는 약은 모두가 그 개량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그럼…….”
“결코 약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문득 당예는 궁금해졌다.
당가 비전의 춘약도 듣지 않을 정도로 부동심(不動心)을 가진 중이 누구였을까? 아니, 이 경우에는 불심이라고 해야 할까?
온몸의 혈맥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내면서까지 춘약을 버텨냈던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적어도 보통 인물은 아님에 분명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하지만 당예가 차마 묻지 못하고 당사등을 쳐다보니 당사등이 껄껄대며 웃었다.
“네 눈빛을 보니 본가의 비전을 파훼한 이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당예가 부끄러워하며 끄덕였다. 아무래도 여자아이이니 묻기에는 곤란한 얘기다.
당사등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왜 있지 않으냐. 그 꼬장꼬장하게 생겨서는 바늘 하나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홍오의 제자…….”
☆ ☆ ☆
문원은 어람봉을 오르고 있었다.
문원의 생각이 맞는다면, 장건을 도와줄 사람…… 그것도 소림에서 거의 유일한 해결책을 가진 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마치 문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 암자 앞에 나와 있었다.
멈칫.
장건의 부친이 온 이후, 담백암으로 다시 올라와 있던 굉목이 문원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굉목은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마당을 거닐던 중이었는데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를 기억하겠나?”
굉목은 너무 놀라서 불호까지 외웠다.
“아미타불. 설마…… 문원 사숙조?”
머리는 길게 자랐고 굉목의 기억보다 더 늙어 버렸지만, 굉목의 기억은 아직 문원을 잊지 않았다.
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오래전에 입적하신 줄 알았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러하네. 지금은 그냥 불목하니 노릇을 하고 있지.”
“은노가 되셨군요.”
소림의 보이지 않는 수호자.
있다고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전설처럼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정말 은노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굉목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문원 사숙조가 은노가 되었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문원은 사형이자 천하오절인 문각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을 뿐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소림에 대한 마음마저 일편단심이어서 소림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은노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굉목은 곧 눈을 떴다.
모습을 숨기고 사는 은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기이함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굉목이 묻기도 전에 문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것에 놀랐을 거라 생각하네. 하나 자네가 아니면 도울 수 없는 일이 있어 왔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자네라니요. 어울리지 않습니다.”
“난 일개 불목하니이니 이만한 말투도 과분하네.”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하고픈 얘기가 자네에겐 극히 떠올리기 싫은 일이겠으나…….”
굉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건에게 정을 느낀 이후로 풀어졌던 표정이 원래의 굉목다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사부와 관련된 일입니까?”
문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굉목은 얘기를 듣지도 않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문원이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데리고 있는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일세.”
그 한마디에 굉목의 딱딱한 얼굴에 엄청난 분노의 감정이 떠오른다.
“건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굉목의 쩌렁거리는 목소리가 산중의 밤을 뒤흔들었다.
“만일 사부 때문에 건이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내 결코 사부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원은 절규하듯 외치는 굉목을 가만히 지켜보며 말했다.
“홍오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했지, 지금 홍오가 관련되어 있다고는 하지 않았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문원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사람들은 홍오에 대한 굉목의 감정이 그저 분노와 미움뿐이라고만 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왜 굉목이 사부인 홍오를 그토록 싫어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문원조차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굉목이 홍오를 그토록 미워하게 된 원인…… 그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는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래전…….”
문원이 입을 열었다.
굉목은 눈에서 퍼런 광망을 내뿜으며 문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전 홍오가 자네에게 먹였던 춘약이 당가의 것이 확실했는가?”
쿵.
굉목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시퍼런 광망이 얼어붙었다.
세상이 멈춘 듯, 시간이 멈춘 듯.
굉목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심지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정지해 버렸다.
여유가 있었다면 문원은 굉목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주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원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굉목은 겨우 입만 열어 더듬거렸다.
“거, 건이가…… 그 야, 약. 당가의 춘약을 먹었습니까?”
어떻게, 라고는 묻지 않았다.
문원이 대답했다.
“그러하네.”
털썩.
썩은 나무가 넘어가듯 굉목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염없이 바닥을 바라보는 것이 얼빠진 사람 같다.
“건이가…… 건이가 왜 그 약을…….”
“미리 말하지만 홍오는 관계가 없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자네의 얘길세.”
굉목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니 정말로 정신이 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문원…… 사숙조께서도 그 일을…… 알고 계셨군요.”
“본산에서도 몇몇 정도는 알고 있네.”
굉목의 고개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래서…… 제게…… 물어볼 것이…… 무엇인지요.”
“자네는 당시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하였네. 맞는가?”
굉목이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네가 어떻게 당가의 춘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려주게. 건이를 살려내려면 자네가 그 춘약에서 벗어났던 방법을 알아야 하네.”
굉목은 혼령이 빠져나간 듯 공허한 눈으로 문원을 응시했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인데도 그 안쪽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가득 꿈틀거리고 있었다.
“말해주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아나 아이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일세.”
“사숙조…….”
“비밀은 지켜주겠네. 다른 것도 묻지 않겠네. 자네가 춘약을 벗어날 수 있었던 방법만 말해주게.”
굉목은 허망한 눈으로 문원을 바라보다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하지만 지극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뭐, 뭣이?”
문원은 굉목의 텅 빈 눈동자에 오염된 듯 몸이 경직되었다.
“자네가 파계(破戒)를……!”
굉목이 절규했다. 아니, 오열했다.
“벗어나지 못했단 말입니다. 예…… 색계(色界)에 빠져 파계를 범했단 말입니다. 파계, 파계했단 말입니다!”
“이럴 수가…… 그러면 그때 아무 일도 없었다 한 것은 거짓말이었는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굉목의 비어 버린 눈동자 안쪽에서 꿈틀거리던 것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굉목이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던 짐의 무게만큼이나…… 그토록 홍오를 미워한 만큼이나 억눌러 참아야 했던 고통의 눈물이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사부님?”
굉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홍오를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홍오가 굉목을 데려간 곳은 어딘가의 동굴이었다. 칙칙한 묵색의 바위 절벽 틈에 생겨난 자연 동굴은 수십 년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듯, 은밀하고 적막한 곳이었다.
“내 말 안 했냐. 여기서 네 녀석의 불심을 좀 시험하겠노라고.”
굉목은 사부에 대한 존경심을 억지로 되새기려 노력하며 말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홍오가 남의 불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인물은 아닌 것이다.
“사부님과 단 둘이 말입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저 혼자서 여길…… 왜.”
홍오는 제자가 묻고 따지는 게 귀찮았는지 냅다 그의 등짝을 밀었다.
“일단 들어가기나 해라.”
“사부님!”
굉목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구―웅!
홍오가 커다란 돌을 옆으로 밀어 입구를 막아 버렸다.
“사부님!”
당황한 굉목이 바위를 치며 홍오를 불렀다.
불심을 시험하는 것까진, 뭐 좀 어불성설 같다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언제까지인지, 물과 음식은 어찌 되는지, 구체적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이러는 것은 좀 너무하는 일이었다.
“사부님! 바위 좀 치워주십시오!”
퍽, 퍽퍽!
굉목이 바위를 치고 움직여보려 애를 썼지만 거대한 바위는 꼼짝도 않았다.
“사부님!”
굉목이 절박하게 그를 부르자 갑자기 바위가 슬쩍 옆으로 밀렸다.
“그래. 내가 깜박했구나.”
굉목은 속으로 한숨을 쓸어내렸다.
“사부님! 대체 이러시는 법이 어디…… 읍!”
다시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 홍오는 굉목이 뭐라뭐라 한바탕 쏟아내기 전에 손가락을 퉁겼다.
홍오가 튕겨낸 그것이 굉목의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꿀꺽 삼킨 굉목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컥컥. 이, 이게 뭡니까?”
“가둬놓고 보니 이걸 깜박했지 뭐냐. 그럼 하루만 잘 버텨라.”
쿵.
“사부님!”
야속하게도 입구는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후우.”
몇 번 더 홍오를 부르다 포기한 굉목은 동굴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자지러지게 놀랐다.
“이 무슨!”
동굴 안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젊은 여승이 그곳에 있었다.
한쪽에 놓인 작게 일렁이는 등유불이 여승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굉목은 그 얼굴에 두려움과 걱정이 한 움큼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미타불! 스님께서 어쩌다 이런 곳에 계신 것입니까?”
굉목이 합장을 하며 물었다. 여승은 벽 쪽으로 바싹 몸을 기대며 작게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스승님께서 이곳에 있으라 하셨습니까?”
“예. 이곳에서 제 안에 있을 불심을 꺼내어 찾아보라 하셨습니다.”
여승은 주춤주춤 굉목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굉목이었던 것이다.
굉목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 둘 다 같은 처지로군요. 스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법명을…… 연화로 쓰십니다.”
아미파의 연화사태는 홍오 못지않은 기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하나 성격보다도 고강한 무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혹시 아미파의 분이십니까?”
여승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군요. 저는 소림의 굉목이라고 합니다.”
“예에.”
신분을 밝혔음에도 여승은 경계를 쉬이 풀지 않았다. 작은 숨결에는 떨림이 있었고, 굉목을 회피하는 눈길에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비명이 숨어 있었다.
굉목은 구차하게도 이런 말까지 해야 했다.
“불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만,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불제자에게 어찌 불심 이외의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스님께는 추호도 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여승은 굉목이 자신을 속내를 들여다보자 얼굴을 붉혔다.
“예, 예에.”
여승과 단 둘이 이곳에 밀어넣은 홍오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는 분명 불심을 시험한다고 했으니 젊은 굉목이 어찌 나오는지 지켜볼 요량일 것이다.
굉목은 스승에게 새삼 분노를 느꼈다.
장난으로라고 할 일이 있고 못할 일이 있는데 도가 지나쳤다. 아무리 장난기가 심한 홍오라고 해도 이번 일은 젊은 굉목에게 너무 심한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스승님이 틀렸습니다. 저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굉목은 여승과 멀찍이 떨어져서 가부좌를 틀었다. 홍오가 먹인 것이 의심스러웠으나 이곳에서 하루만 있으면 된다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따로 물이나 식량 같은 것이 없었으니 더 오래 가둬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운기조식이나 하자.’
굉목은 시간을 때우는 방법으로 운기조식을 택했다. 그가 따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를 불편해하는 여승도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으리라.
“……”
그러나 운기조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굉목은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윽?”
어딘가가 이상했다.
운기조식을 하고자 기를 끌어올렸으되 기는 간데없이 몸만 덥혀졌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여승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굉목은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땀을 닦았다. 동굴 안은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땀을 흘린다는 것은 그의 몸이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내가 왜 이러지?’
굉목은 다시 한 번 운기조식을 시도했다.
그러자 몸이 한순간에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뭔가 잘못됐구나, 싶은 순간 머릿속에서 핑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이지?’
굉목이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승이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여승이 다가오자 굉목이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전까진 맡지 못했던 새로운 냄새가 동굴 안에서 느껴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따듯하며 달콤한 향기. 그것은 다름 아닌 여인의 살내음이었다.
깜짝 놀란 굉목이 여승을 밀쳐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덕분에 손끝에 여승의 감촉이 남은 것이다.
“으윽!”
몸 안에서 폭죽이 펑 하고 터진 듯했다.
굉목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픈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팽창하고 있었다. 특히나 단전 아래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것은 굉목에게 끔찍한 충격이었다.
벗어나면 벗어나려 할수록 여승의 살내음은 점점 더 진해져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으아악!”
쿵!
굉목은 참지 못하고 머리를 동굴 벽에 박았다. 살갗이 찢어지며 피가 한 줄기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왜 이러시는지요?”
여승이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굉목은 숨을 헐떡였다.
홍오가 먹인 그것.
아무래도 보통의 환단이 아닌 모양이었다.
“춘약…….”
굉목의 중얼거림에 여승은 기겁을 한 채 뒤로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앞섶을 단단히 움켜쥐는 그녀는 흡사 맹수 앞의 사슴처럼 느껴졌다.
굉목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제게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아하아…… 절대 아무 짓도…… 흐윽!”
홍오가 깜박 잊었다며 입 안에 던져 넣은 그것은 굉목의 짐작대로 춘약이 맞았다.
단지 그 춘약이 일반 춘약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무려 당가의 비전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으로 굉목의 정순한 내공과 부동심으로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굉목이 동굴의 입구 쪽으로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지금 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이 완전히 제 자신을 잃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으으…….”
굉목은 장을 날리기 위해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장력은 발출되지 않았다. 공력을 조금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절망한 굉목은 맨 주먹으로 입구를 틀어막은 바위를 내리쳤다.
퍽퍽!
그나마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일 제 힘대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다면 손가락뼈가 다 부서졌을 것이다.
굉목은 피투성이 주먹을 휘두르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으으윽!”
굉목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양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어금니가 깨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절대, 절대 사부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겠다! 내가 죽더라도!’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언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크으윽!”
고통을 참지 못한 굉목은 몇 번을 혼절했다 다시 깨어났다.
비몽사몽간에 동굴 벽을 긁어 댔는지 손톱이 온통 깨지고 피가 흘렀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색계를 범할 수는 없다. 사부의 의도대로 놀아날 순 없다. 그것이 굉목의 마지막 의지였다.
“크악!”
굉목은 자지러지듯 몸을 비틀었다. 몸 안에 뱀 떼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부풀대로 부푼 혈관이 꿈틀대며 피부 위로 불거져 나왔다. 피부가 찢겨 시뻘건 피가 맺히고 근육이 찢어 발겨지는 듯 통증이 치솟았다.
굉목은 더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으아아아아!”
굉목은 온 힘을 다해 동굴 벽에 머리를 박아 댔다.
“내 차라리 죽고 말리라!”
쿵! 쿵!
찢긴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눈으로 흘러들었다.
“스님!”
꿈결처럼 여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목은 그 와중에도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저,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시………으윽!”
피투성이가 된 채 몸부림치는 굉목을 보며 여승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저리 가시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자해를 하시나요?”
굉목은 하마터면 화가 날 뻔했다.
“다, 당신이 곁으로 오면 더 고통스러우니 제발 멀리 떨어지시오!”
“스님…… 그러다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대체 이 바보 같은 여승은 왜 굉목이 이러는지도 모르는 것일까?
“커억!”
굉목은 피까지 토했다. 피부가 갈라지고 터져 전신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죽겠소. 이깟 춘약에 굴복하려 그대를 범하느니, 색계를 어겨 파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겠소!”
굉목은 연이어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짓이겼다. 그러나 질긴 목숨은 쉽사리 끊이지 않았다.
굉목은 너무 세게 부딪쳐 뒤로 튕겨나갔다. 그러나 이내 다시 일어나 머리를 박아 댔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아 살을 쥐어뜯고 입술을 깨물었다.
굉목이 머리를 부딪치고 몸을 뜯는 것을 지켜보며 여승은 자그맣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 스님. 그리도 고통이 심하시다면…….”
“그만! 그만!”
굉목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뺨을 흘러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흐른다.
그래서였을까. 조금은 머리가 개운해졌다.
“그만하시오. 내가 지금 죽지 않는다면 그대는 필히 돌이킬 수 없는 변을 당하고 말 것이오.”
“하지만 사내가 춘약을 먹고 약기운을 풀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 들었습니다.”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고 굉목이 다가오려는 여승을 제지했다.
“그러니까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 지금 죽겠다는 것이오.”
여승이 언성을 높였다. 무서워하고 두려움에 떨던 모습에서 벗어나 애절하게 외쳤다.
“어찌 귀한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 하십니까!”
다시금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이 찾아온다.
굉목은 머리카락도 없는 민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는 짐승이 아니오! 그대와 나는 불제자…… 색을 멀리해야 할 불제자이지 않소!”
“불법과 불심이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진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생전 처음 보는 나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것이오?”
“저, 저는 두렵습니다. 두렵지만…… 스님을 이대로 방관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씩 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굉목이 돌연 사납게 여승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굉목은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여승을 노려보았다.
“오호라! 이제 보니 사실은 그대가 즐기고 싶은 거였나? 그게 그렇게 소원인가? 비구니 주제에 그래도 여자라고! 남은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그걸 빌미로 남자와 하룻밤 즐겨보겠다는 거야, 뭐야!”
이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굉목의 입에서는 듣기에도 거북한 험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스, 스님 전…… 악!”
굉목의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여승이 비명을 질렀다.
그 외침이 흔들리는 굉목의 이성을 잠시 붙들었다.
“아…….”
굉목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내, 내가 무슨…… 으아아아!”
핏 핏.
이제 고통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굉목의 팔뚝과 등에서 불거진 핏줄이 터지며 가는 핏줄기가 새었다.
잠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목은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서도 여승의 살내음이 한층 더 진해진 것을 느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승이 그의 피투성이 손을 가만히 잡아 이끌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굉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드러운 것이 자신의 손에 닿아 있었다.
굉목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 했다. 아니, 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굉목은 그야말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
“사셔야 합니다.”
“노, 놓으시오!”
여승이 굉목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굉목은 저항도 하지 못했다. 혈관이 터져 피가 흐르는 머리가 여승의 포근한 가슴에 파묻혔다.
“제, 제발…….”
굉목은 애원했다. 손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도저히 여승에게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러면 정말로 나는, 나도 어쩔 수가…….”
굉목이 온 힘을 짜내어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여승은 굉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굉목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처녀의 몸이 아닙니다. 스승님을 만나기 이전, 불문에 귀의하기 전에는 기방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거쳐간 몸입니다. 스님 한 분 더 거쳐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순간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던 굉목의 처절한 발버둥은 멈추었다.
‘그래! 내가 왜 죽어야 해? 어차피 그렇고 그런 여자인데 내가 왜 이런 여자를 위해 죽어야 해!’
팔다리를 끊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다 그러하듯 그저 육체 관계 한 번을 맺는 것뿐이잖은가. 이미 이 여자는 처녀도 아니고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은 창부였지 않은가.
그런 것을 생명과 좀 맞바꾼들 뭐 어떻단 말인가!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곧 굉목의 눈이 사나운 야수처럼 돌변했다.
“으아아아악!”
굉목은 쉬어터진 목으로 비명을 토해냈다. 다음 순간 그는 여승의 알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
힘겹게 참았다가 내뱉는 여승의 신음소리가 굉목의 본능을 더욱 불태웠다.
“자, 잠깐만…….”
“괜찮다고 한 건 내가 아니고 너잖아!”
굉목은 난폭하게 여승을 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더 이상 불제자가 아니라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한 남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여자 경험이 없던 굉목은 한참이나 버둥거리다가 겨우 여승을 품을 수 있었다. 뜨거운 쾌락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한차례 고비를 넘겼음에도 굉목은 쉬지 않고 여승을 범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하고 몇 번이나 거듭 여승을 안았다.
마치 그간 승려로서 살아온 삶을 모두 내던지듯, 그렇게 굉목은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힘까지 모두 짜내어 여승을 안았다.
…….
“으음…….”
굉목이 정신을 차린 것은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아마도 하루 정도는 충분히 지났으리라.
나른했던 몸에 차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머릿속도 맑아졌지만 어느 한 구석은 아직도 안개가 낀 듯 몽롱했다.
고통은 사라졌다.
굉목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앗!”
굉목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위아래로 몸을 살피는 순간 걸레 같은 옷가지 사이로 수많은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간의 일이 꿈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이, 이런!”
굉목이 황급히 눈을 돌리자 동굴 저 구석진 곳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여승이 보였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처음 본 때 그대로 정갈하게 승복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평온한 음성으로 물었다.
“깨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신지요?”
“괘, 괜찮소.”
굉목은 무안한 안색을 애써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지난 밤 정신은 혼미했으나 기억은 또렷했다.
결국 그는 여인을 범했고 파계했다.
굉목은 힘껏 주먹으로 땅을 쳤다.
퍽!
피부가 짓이겨져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사부가 내게, 내게 왜 이런 짓을!”
퍽퍽!
몇 번이나 주먹을 내리쳤지만 아픈 것은 자신의 손뿐이었다.
‘아아! 이제 난 끝났구나.’
굉목은 망연자실했다.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들어온 소림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림사에서 뭔가를 이뤄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생겼다.
그냥 쫓겨나면 다행이겠으나, 단근절맥은 물론이고 거세형까지 당할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참회동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왜…… 왜 이런 꼴이 되어야 해.”
너무도 억울했다.
굉목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여승 쪽을 보았다. 여승은 미동도 없이 처음 자세 그대로 고아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조금.
여승에게는 아주 조금 미안했다.
굉목은 별로 내키지도 않았지만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일은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으니 이해해주기 바라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딱하고 무례한 언사였으나 굉목은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에도 바빠 여승을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뚝.
굉목이 흠칫했다.
여승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뭐, 뭐요. 왜 우는 거요? 그대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소. 내 그대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여승이 눈물을 닦으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누가 보기에도 억지웃음이라는 것이 뻔히 보였다.
당황한 굉목이 인상을 쓰며 여승을 다그쳤다.
“아니? 이것 보시오. 어차피 그대는 남자를 상대하던 기녀가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순진한 여염집 처녀라도 되는 양 그러면 내 꼴이 뭐가 되겠소?”
여승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여승은 승복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또 웃었다.
“예. 전 괜찮습니다. 전 아무렇지 않아요. 스님께서 이렇게 멀쩡하신 것만으로도 전…… 저는…….”
여승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목을 안심시키고 다독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굉목은 뭔지 모를 찜찜함을 느꼈다.
문득.
굉목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지난 밤 일 중 한 부분이 너무나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극명하게 떠올랐다.
아무리 여자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여승을 품기까지 너무 힘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상대는 기녀였다. 남자를 잘 아는 기녀가 굉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굉목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의혹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여승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여승의 얼굴에 희미한 등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미미하게 어깨가 떨린다.
‘남자 한 명 더 받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보시오. 당신 설마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오?”
여승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 젖은 슬픈 눈으로 굉목을 빤히 바라보는 그 모습에 굉목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거짓말……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굉목은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것 같았다.
굉목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왜 내게 거짓말을 했소. 왜!”
여승이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님. 이미 지난 일입니다. 더 이상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굉목은 미칠 지경이었다.
거짓말이었다.
여승은 기녀도 아니었고 창부도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여승은 분명 처녀의 몸이었다.
굉목이 절규했다.
“왜 스스로 기녀라고 거짓말을 한 거요!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까지 날 살리려고 한 거요!”
“제 부질없는 몸뚱이가 어찌 스님의 목숨보다 더 중요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죄책감을 갖지 마십시오. 스님께서 사신 것만으로 전 족합니다.”
“아아…… 아아아!”
그러나 심한 죄책감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굉목의 심장을 후벼팠다.
자신을 살리려 스스로를 기녀라 말하고 희생한 여인을, 자신은 우습게 여겼다.
결국 자신을 살린 여인이었다.
설사 그녀가 과거에 기녀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살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무엇이 그리도 잘나서 그녀처럼 소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았는가.
“아아! 아아아아!”
굉목은 순간 한없이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겨졌다.
육욕의 포로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을 살려준 이를 이렇게 대해서는 아니 되었다. 스스로 불제자라 하면서도 직업이 천하다 하여 하염없이 오만하고 거만한 생각을 품었다.
“내 살아서 무엇하리!”
굉목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려쳐 죽을 작정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승을, 세상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여승이 굉목의 팔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스님!”
굉목은 소름 끼치는 죄책감에 팔다리를 덜덜 떨었다. 몸까지 떨려왔다.
“스님.”
여승이 다시 그를 불렀다. 굉목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느새 그는 울고 있었다.
굉목의 팔에 매달린 그녀의 얼굴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떨리고 눈동자는 흔들린다.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몸, 언젠가 한 줌 재가 될 몸에 왜 그리 미련을 가지십니까. 스님이 제 몸을 범하셨다 하더라도…… 그래서 제 몸에 상처가 남았다 하더라도, 제 불심과 법신(法身)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여승이 울먹이면서 말한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제 몸을 통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전 그것이면 충분한데 스님께서는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괴로울 터다. 생전 처음 본 남자에게 겁간을 당하였으니 괴롭고도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웃고 있었다.
울고 있지만 웃는다. 우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고, 웃는 것은 굉목을 위해서였다.
눈물 짓고 있는 여승의 미소에서 굉목은 부처를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의 번뇌를 누그러뜨리는 부처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굉목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털퍼덕.
굉목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고개를 조아리고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을 짐승처럼 범한 자신이 미웠다. 이렇게 부처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를 범하도록 만든 홍오가 미웠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그녀가 고마웠다. 스스로도 힘들 터인데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주는 그녀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굉목은 오열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너무나 미안해요.”
바닥에 엎드려 여승을 향해 몇 번이고 사과하며 아이처럼 울었다.
그의 손을 여승이 따스한 손으로 잡아주었다.
둘은 서로 손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사부들의 못된 장난이 두 사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로부터 하루 반나절을 더 두 사람은 동굴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후로 육체적 접촉은 없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두 사람은 마치 부부처럼, 혹은 절실한 연인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며 시간을 보냈다.
홍오가 동굴의 입구를 다시 열 때까지, 여승이 그를 뒤로한 채 자그마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사라질 때까지…… 굉목은 그녀가 보여준 미소를 평생 동안 가슴 속에 파서 새기리라 다짐했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아…….”
굉목이 이야기를 마치자 문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굉목은 문원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승복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팔뚝에 혈관을 따라 어깨까지 길게 찢어진 흉터가 나 있다. 오래되어 희미하지만 분명한 흉터다.
굉목은 앞섶을 열어 가슴을 드러냈다.
목에서부터 가슴, 옆구리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진 자국이 있다. 옆구리 쪽은 바늘로 수십 번을 찌른 듯한 흉터가 있어 징그럽기까지 하다.
“보이십니까? 이것이 그때 생긴 상처입니다. 핏줄이 터지고 근육이 찢긴 상처지요.”
참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결국 굉목은 춘약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이다.
굉목이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문원의 눈에 어스름히 물기가 어렸다.
“고통스러웠겠구나…… 힘들었겠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고통을 참느라.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 수많은 세월,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왔으니.
남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살아온 수십 년의 생활…… 누구에게 말할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이 혼자서만 감당해야 했던 길고 긴 날들.
문원은 눈물을 흘렸다.
굉목에게 보이지 않으려 돌아선 채 뒷짐을 지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간 은노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자신의 삶과 굉목의 삶은 많이도 닮았다.
그 서러움과 외로움은 충분히 굉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무겁다.
혼자만이 짊어진 마음의 짐이란 너무도 무겁다.
그것을 알기에 문원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는…… 그래서 그렇게 홍오를 미워했구나. 미워할 수밖에 없었구나.”
그리고 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문원은 기억하지 못했다. 말이 입가에서만 맴돌 뿐이다.
굉목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굉목이 조용히 말했다.
“당가의 춘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건이를…… 당가에 데려다주십시오…….”
굉목의 말대로다.
춘약에 당한 장건을 소림에서 해결할 방법은 이제 없다.
“알겠네.”
문원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운려…….”
뒷짐을 지고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굉목의 입에서 작은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처연한 산중의 밤은…… 세상에 잊혀진 한 사람과 세상을 잊으려는 한 사람을 두고 조용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