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70
제 3 장 장건이란 이름의 늪
장건은 도저히 제왕검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위기의 흐름이 보이지 않아 피할 수도 없고 내공도 쓸 수 없다. 내공을 쓸 수 없으니 몸이 느리게 보인다 해도 피하지 못한다.
제왕검형의 범위에서 벗어나든 위기를 깨뜨리든 어쨌든 간에 내공은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못하니 암담한 것이다.
윤언강이 제왕검형 안에서도 남궁호와 검을 겨루었다지만 장건은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다가 결국 방법을 떠올려 냈다.
바로 환야 허량이 썼던 그 수법이었다.
그 수법으로 위기의 파편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할 수 있을지, 성공할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장건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곧 그 생각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태극경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으나 정작 내공이 돌지 않아 남궁호의 위기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내공을 안 쓰면 맨손으로 위기를 못 잡잖아. 이런 바보!’
위기는 사람의 몸에 흐르는 기다. 당연히 맨손으로는 만질 수도 없고 잡아서 던질 수도 없다.
‘단전에 있는 내공을 손까지 옮겨야 하는데…….’
내공을 끌어올릴 때마다 길이 툭툭 끊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잠깐만이라도 파편을 피할 수 있다면…….’
하지만 안법도 쓸 수 없어 파편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무수한 파편들이 마구 날아다닌다 하더라도 보이기만 하면 어떻게든 피해 볼 수는 있다.
아니, 당장에 다리를 움직일 수만 있어도 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본다…… 본다…… 하지만 안법을 못 쓰니, 아!’
장건은 내공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그것이라면?’
장건은 불목하니 노인의 은신술을 생각한 것이다.
내공을 모두 흩뜨려서 상대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고 존재감을 없애는 방법.
제왕검형의 위기는 존재감을 나타내는 기세이니 스스로 존재감을 감춘다면 압박을 적게 받을지도 몰랐다.
장건은 뻑뻑하게 느껴지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단전을 나오지 못하는 내공을 밖으로 흩어버렸다.
물아일체.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듯, 사물이 자신이 된 듯.
장건의 모습이 순식간에 옅어졌다.
스스로의 기를 몸 밖으로 뿌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 된 것처럼, 장건은 자연 속에 녹아들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위기의 파편들이 장건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는데도 별다른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건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움직인다!’
지금 장건은 존재감이 없는 무(無)와도 같았다. 숨이 없는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 간에 기세 싸움이 되지 않듯, 장건에게는 기세도 존재감도 없으니 상대의 기세에 몸이 짓눌릴 일이 없었다.
장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대기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는 것처럼 장건은 서서히 제왕검형의 권역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남궁호는 무언가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음?”
장건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분명 몇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도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남궁호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그는 제왕검형의 권역 내에 있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풍진이 자신만의 거리를 가지듯 남궁호도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제왕검형 내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왕검형의 권역 내에서 조금씩 장건의 기척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알아채기도 어려울 정도로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이럴 수가!’
남궁호는 기감으로 장건의 기운을 최대한 느끼면서 눈을 몇 번이나 떴다 감았다. 보일 듯 보일 듯하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장건의 신형이 흐릿하게 뒤로 물러나고 있다.
‘스스로 제왕검형의 권역에 갇혔다가 벗어나다니!’
남궁호와 비슷한 수준의 기세를 가진 자만이 제왕검형을 벗어날 수 있다. 당금 무림에서는 우내십존 정도나 되어야 제왕검형의 속박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저 아이가 설마 그만큼의 무위에 도달해 있단 말인가?’
남궁호는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장건이 우내십존에 근접해 있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껏 보아온 바로도 장건은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장건의 특이한 수법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허어!”
남궁호는 그만 장건을 따라가 다시금 제왕검형 안에 가둘 생각도 못한 채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그 뒤에 멀찌감치 서 있던 모용전 역시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몇 차례나 비비고 봐도 장건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야, 저게!’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모용전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남궁호가 장건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몰랐다.
이미 그가 경험했던, 혹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 있었다.
장건은 제왕검형의 권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됐다!”
장건은 풀어놓은 내공들을 다시 단전으로 끌어 모았다. 단전이 꿈틀대며 전신에 내공이 돈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지만 아직 남궁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장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위기를 타격하는 수법에는 상당한 기운이 소모된다. 그래서 백리연의 추종자들과 싸울 때에도 그들의 힘을 역이용해 위기를 깨뜨렸다.
단순히 본신의 힘만으로 저 무수한 파편들을 일일이 깨뜨린다면 장건의 내공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안법을 사용하자 수백 마리의 날파리처럼 맴도는 파편의 덩어리들이 보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지만 파편들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돈다.
그 궤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장건은 곧 파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손에 기를 집중했다.
위기의 파편을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잡을 작정인 것이다!
타원을 그리며 날아든 파편 하나를 향해 장건이 손을 내밀었다. 궤도의 흐름을 모두 머리에 담아둔 탓에 궤도를 앞질러 손을 내밀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궤도를 읽힌 파편이 자동으로 장건의 손바닥에 부딪쳐 왔다. 작은 파편 하나에도 무시무시한 속도와 기운이 담겨 있기에 부딪치는 순간 꽝 소리가 나며 장건의 팔이 튕겨났다.
“윽!”
파편이 깨져나가며 충격이 왔다.
그러나 장건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두 번째로 파편이 손 안에 들어왔을 때, 장건은 유원반배를 사용했다.
정확히는 유원반배의 무리(武理)에 무당 태극경의 무리가 섞인 방법이었다.
파편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손목부터 팔뚝, 어깨의 근육들로 원을 그린다. 마치 허량의 몸이 출렁대듯 장건의 상체가 출렁거렸다.
하지만 파편이 너무 빨라 제대로 충격을 흡수하기 어려웠다. 파편은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가고 장건은 거의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괜찮아. 이 정도면 할만 해.”
장건은 이를 꾹 깨물고 재차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좀 더 빠르게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근육을 이용했다.
파편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손바닥의 근육을 비틀어 반원을 그린다. 그리고 손목, 팔뚝의 근육을 비틀어 계속 반원의 형태로 움직임을 유지했다.
반원을 그리는 근육의 움직임에 파편이 가진 속도와 그에 의한 충격은 고스란히 장건의 몸 안으로 이동된다.
그렇게 충격이 흡수되자 파편은 가속력을 잃고 장건의 손안에서 완전히 멈춘다.
장건은 허량을 상대했을 때처럼 충격을 반대쪽 팔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등의 근육에서 다리의 근육으로 힘을 이동시켰다가 다시 오른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그 충격과 힘을 이용해 손가락을 튕겨냈다.
손에 쥔 파편이 본래 돌아왔던 속도 그대로 다시 쏘아졌다.
물론 거기에 장건의 내공이 살짝 담겼다.
예전에 독선 당사등이 사용했던 암기술이다.
쏘아진 위기의 파편은 다른 파편과 충돌했다.
쩡!
폭발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기그릇이 깨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장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해냈어!”
당사등이 지금의 상황을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지도 몰랐다.
이것은 마치 상대가 던진 암기를 받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과 비슷했다. 빛살만큼이나 빠르게 날아오는 암기를 잡아채는 것만도 가히 최고의 수법이라 할 만한데 그것을 순식간에 다시 쏘아내기까지 하다니!
더구나 그 암기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에도 잡히지 않는 기(氣)인 것이다.
장건은 이제 양손을 다 사용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뻗었다. 남궁호에게서 튕겨 나온 위기의 파편들을 잡는 순간, 왼쪽 근육과 오른쪽 근육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뒤틀었다.
장건의 양 손바닥에서부터 팔, 어깨를 타고 올라온 힘이 등에서 가볍게 조우(遭遇)했다. 반대로 뒤틀려 있던 근육들이 자연스레 원래대로 돌아가며 회전을 한다. 그 회전을 타고 양쪽에서 올라온 힘이 서로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장건은 그 두 힘이 서로 반대 손바닥까지 움직였을 즈음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에 위기를 파괴할 수 있는 약간의 내공만 더해주면 된다. 별달리 힘이 들지도 않았다.
장건의 손바닥에서 쏘아진 남궁호의 위기 파편들이 궤도를 빠르게 움직이는 다른 파편들과 부딪치며 공멸(共滅)했다.
쩌쩌쩡!
순식간에 네 개의 파편 조각들이 사라졌다. 눈 한 번 깜빡하는 것보다도 빠른 시간이었다.
장건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양손을 내민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 ☆ ☆
“밀리냐?”
“밀리는데?”
우내십존 중의 세 사람. 검성과 환야,그리고 청성일검까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어, 내 생전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저게 무슨 수법인 거냐?”
장건이 사용하는 수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들이 이미 본 것만 해도 벌써 몇 가지나 된다.
최소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미세한 보법과 신법.
가히 강호 최고의 살수(殺手)가 사용할 만한 은신법.
적어도 태극권 십성까지는 성취를 얻어야 가능한 무당의 태극경.
당가에서도 혀를 내두를 암기술.
하나같이 모두가 고절한 수법이다.
그런데 그 수법들이 모두 드러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기에 뭔가가 섞여 있다.
보법은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여 있고, 태극경에는 유원반배의 묘리가 보인다. 유원반배에 태극경의 묘리가 보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얼마 전 소림의 정문에서는 문각의 백보신권을 유원반배와 금강권으로 발현했다.
일부 사람들은 장건이 문각의 백보신권을 익혔다고 하자 이제는 백보신권이 아니라 일보신권이 아니냐고 빗대어 말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놀랄 일이다.
단순히 여러 무공을 배워 하나씩 사용하는 게 아니라 각 무공에 담긴 무리를 조합해서 자신만의 수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고수가 아니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각종 무공의 무리를 이것저것 섞어 사용하고 있다.
당가의 암기술도 그렇다. 세 사람도 장건이 뭘 던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양손으로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지경이었다.
“저게…… 가능한 거냐?”
허량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풍진도 혼잣말처럼 답했다.
“내공 운용법이 다 다른 무공들을 티도 안 나게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홍오로군.”
“역시 홍오야.”
하지만 다른 문파의 무공을 보는 즉시 배웠다는 홍오도 상승의 무공은 훔치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
각 문파에는 문파마다 고유의 내공 운용법이 있기 때문이다.
초급 단계의 무공이라면 어떤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어도 흉내는 낼 수 있다. 어떤 문파든 기초적인 무공은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고급 단계로 갈수록 문파 고유의 특징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문파 고유의 상승 절기는 그 문파만의 내공 운용법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 내공 운용법을 모르면 당연히 상승 절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장건은 마치 그 문파의 제자라도 되는 듯 잘도 사용한다. 그것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이리저리 변형시켜서 말이다.
그것은 마치 홍오가 추구했던 무공의 방향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장건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홍오가 보여주었던 무량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보법을 섞어 사용하는 것 역시 무량세의 동작을 혼자서 개선하다가 탄생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무량세를 정 반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윤언강도 놀란 나머지 혼잣말을 했다.
“하나가 아닐세…….”
“응?”
“심지어 각기 다른 무공을 두어 가지 이상 동시에 사용하고 있네. 그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풍진이 허량에게 물었다.
“무당의 양의심법이라면 두 가지 다른 내공심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엄밀히 따지자면 두 군데 이상의 경락에 동시에 내공을 돌릴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양의심법을 사용하면서 저 녀석처럼 이 무공 저 무공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바꿔 쓰는 건 굉장히 어려워.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장건이 타 문파의 상승 절기를 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순식간에 그만한 수법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내공 운용술이었다.
무인들이 같은 초식을 수천 번씩 연습하는 건 머리보다도 몸이 초식을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기에 따른 내공의 운용 또한 마찬가지다.
내공 운용이 어느 정도 숙련된 무인도 소주천을 한 번 행하는 데 일다경은 족히 걸린다. 의식적으로 내공을 움직이려면 그만한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신체의 동작이든 내공의 행공이든, 생사가 오가는 급박한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려면 아예 몸에 배도록 반복 수련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러야 좀 더 원활히 내공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 최고봉의 경지가 바로 심검(心劍)인 것이다.
“하긴…… 두 경락에 돌고 있는 내공을 찰나에 단전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시 다른 경락으로 돌리는 게 쉽지는 않지. 그게 가능하면 누가 운공을 하다가 내상을 입겠어.”
경락에 도는 내공은 물줄기와 같다.
초식이 시전되고 있는 도중에 무리하게 다른 초식으로 바꾸려 하면 이미 경락을 돌고 있던 내공이 갈 길을 잃어 날뛰게 된다. 그래서 경락을 다치고 내상을 입는다.
그렇게 내상을 입지 않으려면 초식을 완전히 끝내 내공의 일주천을 마치던가, 다시 단전으로 내공을 갈무리한 후 새로이 주천을 시켜야 한다.
장건처럼 내키는 대로 태극경과 유원반배를 사용하다가 당가의 암기술을 사용하고 발로는 여러 문파의 보법을 밟는 등, 이리저리 내공을 움직이는 건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내공 운용 능력을 지닌 것이다. 그것도 섬세하기 이를 데 없이.
순간 윤언강이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심생종기(心生從氣)!”
마음이 가면 절로 기가 따른다는 내공 운용법의 기초. 하지만 동시에 내공을 수련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풍진과 허량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오가 과거 장건을 보고 느꼈듯 세 사람 역시 그것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저건 애가 아니라 순전히 괴물이다.”
다른 사람들도 우내십존을 보면 괴물이라고 할 텐데 그 우내십존이 장건을 괴물로 보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쩡쩡 하는 파열음과 함께 장건은 남궁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잔뜩 치민 풍진이 몸을 일으켰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봐야겠다.”
허량과 윤언강도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우내십존이란 거대한 명성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둘의 대결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 ☆ ☆
남궁호는 섬뜩했다.
오래된 흉가에서 헛것을 본 것처럼 몸이 으스스했다.
“허어!”
쩌쩡! 쩌쩌쩡!
허공에서는 연신 파열음이 들려온다. 보이지는 않지만 기의 충돌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다름 아닌 장건 때문이다.
장건은 양팔을 약간 벌린 듯한 자세로 손바닥을 내민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손바닥을 접었다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곤 했다.
그때마다 수십 개의 도자기를 망치로 깨는 것처럼 파열음이 난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파열음이 날 때마다 남궁호는 자신이 위축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제왕검형의 권역이 축소되고 있다.
‘이 내가…… 밀리고 있어?’
남궁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힘으로 제왕검형을 밀어내다니!’
남궁호가 내공을 한층 끌어 올렸다.
겨우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상대로 검왕이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남궁호는 벼랑에 몰린 기분이었지만 조금 여유를 두면서 오성 이상의 내공을 사용했다. 그 정도면 일류 이상의 무인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 내공이다.
장포가 팽팽히 부풀고 단정히 빗어 묶은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으며 나풀거린다.
드드드득.
억지로 나무껍질을 뜯어내는 것처럼 수 장의 범위에 걸쳐 땅이 들썩인다.
제왕검형의 무게감이 한층 더해졌다.
모용전이나 소림승들에겐 보기만 해도 질려 숨을 멈출 정도다.
남궁호가 마음속에 세운 검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을 치켜들었다.
장건은 선명함이 더해질수록 시꺼먼 묵빛을 발하는 위기의 덩어리를 보면서 기겁했다.
‘으아아! 이 할아버지가 진짜 끝까지 가자는 거네?’
남궁호와 겹친 검 모양의 위기가 가공할 정도의 파편을 뿌리고 있었다. 튕겨 나온 파편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그에 실린 힘도 비례해 강해졌다.
‘이러다가 날 새겠다!’
장건은 딴 생각을 할 틈도 없어졌다.
날아드는 파편을 잡아 쳐내는 것도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속도가 빨라졌으니 그만큼 장건도 더 빨리 대처를 해야만 했다.
내공을 쓰지 않고서는 근육의 속도로 파편의 충격을 따라잡기도 어려웠다. 내공을 써서 근육의 반응 속도를 증강시키고 암기술을 사용할 때에도 더 빠르게 내공을 돌려야 했다.
우우우웅!
내공이 미칠 듯이 경락을 돌면서 단전이 울음을 터뜨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근육이 꼬였다가 풀리는 게 반복되면서 장건의 피부가 들썩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팔과 목의 시퍼런 핏줄들이 도드라지게 불거졌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공이 경락을 돌면서 가속되자, 장건은 꼭 수레바퀴가 몸속에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장건의 몸이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씩 흔들렸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도는 내공과 근육의 움직임 때문에 지독한 떨림이 생겨났다.
더 이상 장건은 앞으로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제자리에서 파편을 튕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남궁호가 어지간한 무인이었다면 이미 위기가 상당히 상해 제풀에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초인의 경지에 있는 무인이었다. 그가 가진 위기는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건이 수백 조각 이상의 파편을 깨뜨렸고 분명히 그만큼의 위기가 상했을 텐데도 남궁호는 여전히 건재했다. 안광은 여전히 생생하고 두 다리는 거목처럼 당당히 땅을 딛고 서 있다.
하지만 내공이 경락을 빠르게 도는 만큼 장건의 단전은 급속도로 내공이 소모되고 있었다.
틱.
팽이처럼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근육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팔뚝의 피부가 살짝 갈라졌다. 작은 실핏줄이 터져 바늘로 찌른 것처럼 가는 핏줄기가 찍 새어 나왔다.
내공이 많이 소모되어 그만큼 신체를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다.
‘으윽!’
고통도 그만큼 심해졌다.
머리가 점점 아득해져 간다. 시야가 흐려지고 동공이 급격히 커진다.
춘약을 먹어서 온몸이 비틀릴 때와는 또 다른 괴로움이다.
내공이 거의 고갈되면서 장건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에까지 몰렸다.
‘내가…… 방법을 잘못 골랐나?’
위기의 파편들을 치우는 방법에 잘못된 것은 없었다.
다만 내공이 문제였다.
막대한 내공이 뒷받침 되었다면 분명 더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바구미 잡아야 되는데…….”
장건이 중얼거렸다.
☆ ☆ ☆
‘이놈 어떠냐. 이젠 못 버티겠지?’
남궁호는 그때서야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이만한 내공을 끌어올리게 한 것도 대단하다 칭찬할 일이었다.
장건이 그의 위기를 꽤 상하게 만든 탓에 남궁호도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제왕검형의 특성상 그의 내공도 꽤 소모돼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해본 게 얼마만인가.’
실로 오랜만에 남궁호는 자신이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장건이 조금 더 버텨서 계속 즐겼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때.
“바구미 잡아야 되는데…….”
남궁호는 장건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음?’
불현듯 남궁호는 장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공이 소진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제왕검형은 본래 내공으로 대항하는 수법이 아니다. 제왕검형 안에 하루를 갇혀 있어도 내공을 잃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장건이 무리하게 대항하는 바람에 스스로 내공을 다 소진시키고 만 것이다.
‘그럼 포기할 것이지!’
그런데도 장건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왕검형에 대항하고 있다.
‘망할 놈 같으니…….’
단전에 조금이나마 내공이 남아 있는 것과 남아 있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단전이 텅 빌 정도로 무리하게 되면 단전이 손상을 입는다. 며칠이면 회복될 것을 수십 일이 걸려야 회복될 수도 있다.
‘아직도 안 그만둬?’
그냥 포기하고 대항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나는 것인데, 장건은 마지막까지 버틸 모양이었다.
남궁호는 갑자기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당사등이 떠올랐다.
애 하나 건져보겠다고 독 풀다 실수해서 대사고를 일으키고는 창피만 당하지 않았던가?
화산과 무당 등이 장건과의 비무를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그것도 소림에서 순서를 결정하느라 고심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지금의 일이 알려진다면 남궁호도 당사등이나 별다를 바가 없는 놈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터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허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구나.’
적당히 하고 관뒀어야 했다. 원래는 잠깐만 시험해보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려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저 녀석이 괜히 자극하는 바람에…….’
애써 장건의 핑계를 대보지만 소용이 없음을 안다.
장건의 수법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오히려 남궁호 자신이다. 장건의 기이한 수법에 제왕검형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오기가 생긴 것이다.
내공 수위가 비슷했다면…… 아니, 장건의 내공이 조금만 더 받쳐줬다면 쓰러지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장건은 아무런 피해가 없지만 자신은 계속해서 충격을 받으며 지쳐가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아, 글쎄 검왕이 말야. 다른 문파들이 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찬물을 뿌렸다지 뭔가? 그게 검왕이란 사람이 할 짓이야?’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이건 누가 봐도 일하느라 바쁜 애를 붙들고 자기가 괴롭히는 상황이지 않은가!
남궁호는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욕먹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으으음.”
남궁호는 침음성을 내뱉으며 제왕검형을 거두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위기의 덩어리들이 어미에게 돌아가듯 순식간에 그의 몸으로 돌아간다.
휘이익.
묵직한 공기가 대번에 사라지면서 경쾌한 바람이 불었다.
장건은 더 이상 파편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이제 끝났구나,”
다른 사람들은 느낌으로나 대결이 끝났다는 걸 알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남궁호는 거의 제자리에 선 채였고 장건 혼자 허공에 손짓을 했을 뿐이다.
벼락 치는 소리 같은 것이 나지 않았다면 둘이 눈싸움이라도 했나 보다 했을 것이다.
곧 남궁호가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냐?”
장건이 주섬주섬 몸을 틀었다.
“괜찮을 리 있겠어요? 아구구, 삭신이 막 쑤셔 죽겠잖아요.”
남궁호도 미안해졌다.
“흠, 흠.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좀 과했던 듯하구나.”
장건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볼멘소리로 답했다.
“빨리 일 끝내고 이따 비무도 보러 가야 되는데. 내공을 다 써버려서 이제 바구미도 못 잡겠잖아요.”
무엇보다 쌀을 먹어치우는 바구미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원통했다.
내공을 다 쓴 것보다도 그게 더 분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남궁호는 장건이 우는 모습에 당황했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입이 댓 자나 나온 장건이 원망의 눈길로 남궁호를 흘겼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흩어진 쌀들을 주워 담는다.
머쓱해진 남궁호가 물었다.
“험…… 비무를 보러 간다고? 무슨 비무 말이냐?”
그때.
“검왕은 약속을 지켜라! 지가 진 거나 마찬가진데 괜히 말 돌리지 마라!”
“우우우! 검왕이 애를 울린다.”
야유 소리와 함께 남궁호의 폐부를 비수로 푹 찌르는 말들이 들려왔다.
남궁호가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도 않은 작은 우물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풍진과 허량의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윤언강은 체면 때문에 둘처럼 숨기는 뭣했는지 가만히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헛기침을 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네만…… 자네가 심하긴 했어. 건이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자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을 거네.”
꼭 문사명이 장건과 먼저 비무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장건이 내공을 소모한 까닭에 비무가 며칠은 늦어질 것 같았다. 당연히 남궁호가 곱게 보일 리 없다.
풍진과 허량이 다시 야유를 보냈다.
“우우, 검왕이 약속도 안 지키냐. 건이가 저렇게 되었으니 일을 누가 하겠어? 약속대로 책임을 져야지.”
“우우우. 검왕은 덤으로 추궁과혈에 운기행공까지 도와라!”
남궁호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장건이 뾰족한 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책임지세요. 책임지도록 만들라고 하셨는데 제가 일을 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책임지셔야 마땅하죠. 이러는 사이에도 쌀 수천 톨이 바구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구요!”
모용전. 그는 장건의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기가 다 오금이 저려오는 듯했다.
그놈의 바구미 타령!
바구미 때문에 검왕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정말 미쳤다. 미쳤어!’
남궁호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으나 차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우내십존이라는 거대한 명성을 가진 그의 약속은 천금보다 무거운 것이어야 했다. 특히나 사이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다른 우내십존 셋이 지켜보는 마당에 소인배가 될 수도 없었다.
“아, 알았으니 그만 하거라.”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스스로도 지나쳤다는 걸 인정했으니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결국 남궁호는 눈물을 머금고 바구미 잡는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전 강호인들의 절대적 우상인 검왕이, 남궁가 최고의 어른인 그가 겨우 바구미나 잡는 일에 차출되고 만 것이다.
허량과 풍진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궁호를 보며 빈정댔다.
“낄낄. 내 그럴 줄 알았다. 건이에게 함부로 덤비면 좋은 꼴 못 본다니까.”
“천하의 검왕이 대단하신 바구미들을 상대하는 진풍경을 오늘 내가 소림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심심해서 찾아왔더니 좋은 구경을 하는구먼.”
윤언강까지 동조했다.
그러나 혼자서만 곱게 당할 남궁호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물러나려던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놈들이 있다. 그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남궁호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윤언강까지 포함한 셋을 노려보았다.
“자네들 요즘 소림에서 놀고먹고 한다던데,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윤언강과 풍진, 허량이 움찔했다.
‘아니, 저놈이 갑자기 왜…….’
‘우리까지 물고 늘어지려고?’
그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셋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었다.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렇군. 생각해 보니 깜박 잊은 게 있네.”
“허어. 아까 사명이가 날 찾는다 했었지?”
남궁호가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밥값도 안하고 남의 밥이나 축내면서 놀고먹는 못된 짓은 어디 족보도 없는 문파에서나 가르치는 버릇이라지? 참 좋은 문파야.”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문이다.
그런데 이대로 떠나버리면 ‘밥값도 안하고 남의 밥이나 축내면서 놀고먹는 못된 짓을 가르치는 족보도 없는 문파’소리를 듣게 생겼다.
떫디떫은 감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것처럼 윤언강과 풍진, 허량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궁상맞게 쪼그리고 앉아서 바구미를 잡아야 하니 진퇴양난이다. 심각한 체면의 손상이 우려되는 것이다.
남궁호가 전전긍긍하는 세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건이는 이걸 세 시진이면 끝낼 수 있다 하던데…….”
말끝을 흐리는 투가 ‘너희는 그렇게 못하겠지?’라고 비아냥대는 듯했다.
장건의 수법도 알아채지 못했으면서 ‘쌀벌레 잡는 일이라고 무시하냐?’고 도발하는 듯한 눈초리로 세 사람을 훑어보기까지 한다.
물론 남궁호도 장건의 수법은 모른다.
일단은 다 진흙탕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뿐이다.
“…….”
“…….”
세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 꼬투리를 잡힐까 봐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남궁호의 말을 들은 장건이 눈을 반짝 빛내더니 손뼉을 쳤다.
짝!
“아! 잘됐네요. 여럿이 하면 더 금방 끝낼 수 있잖아요. 어차피 다 할아버지들께서 드실 밥인걸요.”
남궁호의 말 속에 숨은 의미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 그대로 받아들인 천진한 장건의 말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장건의 머리에는 아귀 같은 쌀벌레 생각밖에 없었다.
덜컥!
미묘하게 흐르던 정적의 수평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도망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세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는데 장건이 남궁호처럼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굉목 노사님께서 저 처음 만났을 때 그러셨어요. 사지가 멀쩡한데 먹고 자고 게으름을 피우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식충이라고요.”
장건은 내공이 바닥났다는 것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세 노인을 보았다. 우내십존이든 뭐든 장건에게는 무공 센 노인들일 뿐이다.
세 노인은 흠칫했고,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뜨악했다.
‘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무리 그래도 우내십존에게 그런 말을!’
당장에 칼부림이 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내십존이라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불같이 화를 내기도 민망하고…… 그랬다가는 식충이에 족보도 없는 사문을 두게 생겼는데.
“음냐…… 내가 그딴 소릴 듣느니 하고 말지. 그까짓 것 하면 되지!”
풍진은 오히려 오기로 하겠다고 나섰다. 아무리 청성을 버리겠다 큰소리를 땅땅 쳤어도 자신을 키워준 사문을 욕보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식충이라는 무자비한 단어를 달고 다니기도 싫었다.
“끄으응. 이놈이 한다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만.”
허량은 장건에게 벌써 두 번째로 당하는 것이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다 당한 것이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둘이 포기했다는 게 뻔히 눈에 보이자 윤언강도 혼자만 내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윤언강이 허허로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을 구렁텅이로 미는 자, 자신도 밀릴 것이라 했던가…….”
남궁호가 얄밉게도 이죽거렸다.
“그러게 애초에 밀지 말았어야지.”
상황이 뒤죽박죽 얽히며 희한하게 돌아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모용전은 피부가 따끔따끔 한 것이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어딘가에서 날아온 눈 먼 칼에 목이 달아날 듯했다.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우내십존 넷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님에도 은연중에 미적지근한 살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겠다.’
좀 더 있으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아 모용전은 안되겠다 싶었다.
모용전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간신히 반걸음을 떼었을 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곤두섰다.
허량이 아무렇지 않은 듯한―하지만 모용전이 보기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냐?”
“예? 에…… 그러니까…….”
모용전이 더듬거리다가 풍진과 눈이 마주쳤다. 풍진은 모용전을 똑바로 쳐다보며―심지어 이까지 갈며― 얘기했다.
“요즘 애새끼들 싸가지가 없어서…… 하나 내 손에 걸리면 아주 개 패듯이 패서 죽여 버리든지 해야지, 가만 냅두면 기어올라 가지고…… 아, 근데 넌 그런 놈 아니지?”
“하, 하하……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확인하듯 풍진이 재차 묻는다.
“정말 싸가지 없는 놈 아니지?”
“하하…… 저 싸가지 있습니다. 예, 있고 말고요.”
본래 비굴한 성격이 아닌 모용전이지만 화가 난 우내십존의 앞에서 차마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궁호가 따뜻한 목소리로―모용전이 듣기엔 살기가 저릿하게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 바쁜 일이라도 있느냐?”
모용전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없습니다. 마침 아주 한가합니다.”
윤언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느낌의 눈빛으로 모용전을 보고 있었다.
모용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랄 정도로 윤언강의 눈빛을 이해했다.
지금 일어났던 일을 어디 가서 말하면 죽·는·다!
연인 사이에 벼락처럼 감정이 통하듯, 생생한 감정 전달이었다.
꿀꺽.
모용전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건이 집중하라는 듯 손뼉을 딱딱 쳤다.
“자자, 그럼 빨리 일하죠. 늦으면 늦을수록 바구미들이 아까운 쌀을 더 먹어치울 거예요.”
바구미!
모용전은 이제 바구미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처음엔 장건이 전생에 바구미와 악연이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아마 장건이 아니라 자신이 전생에 바구미와 지독한 악연을 쌓은 모양이다.
그리고 현생(現生)에서도 바구미와의 악연은 결코 끊지 못할 것 같았다. 보이기만 하면 족족 잡아 죽여도 시원찮을 듯했다.
모용전은 눈으로 시퍼런 불길을 쏟아내며 쌀 위에서 발발거리는 쌀벌레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바구미를 죽일 생각이에요? 아무리 미물이라도 함부로 살생하시면 안 되죠. 절대로 죽이지 말고 잡으세요.”
우박처럼 쏟아지는 장건의 말에 모용전은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바구미 때문에 이 무슨 꼴인지, 정말 자신이 한심했다.
풍진조차 장건과 어울리면 좋은 꼴을 못 본다 말했던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내십존과 한 청년은 바구미와의 사투……에 몸을 내맡기게 되었다.
막상 그들이 쪼그리고 앉아 바구미를 잡기 시작했지만 소림승들은 눈치를 보느라 제 할 일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이는 단 한 사람, 장건뿐이다.
‘역시 사람은 당하고 살면 안 돼.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챙길 것도 챙겨야지. 흥. 그러니까 왜 멀쩡한 사람을 괴롭히냐고요.’
장건은 보란 듯 한쪽 구석으로 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리 미덥지는 못하지만 빈 단전을 채우는 동안 열심히 일을 할 다섯 일꾼들이 있으니 마음은 편안했다.
☆ ☆ ☆
나한승들과 함께 공양간으로 달려가던 원호는 공양간 앞에서 굉료의 말을 듣고는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내십존 넷이 쌀벌레를 잡도록 만들 수 있지?’
우내십존이란 거인(巨人)들이 쪼그리고 앉아 벌레를 잡는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고 눈만 깜박거리는 원호에게 굉료가 말했다.
“어지간하면 근처에 안 가는 게 좋을 걸세. 분위기가 장난 아니게 흉흉해. 아차 하다가 된서리를 맞을지 몰라.”
“분위기가 흉흉하다니요?”
“나도 몰라. 열심히 일을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뭔가…… 하여튼 나도 근처까지 갔다가 소름이 쭉 돋아서 그냥 돌아왔다네. 하나도 아니고 우내십존 넷이 눈을 부라리니까 이거 민망하게도 이 나이 먹어서 오줌을 찔끔 쌀 뻔했지 뭔가.”
“아니, 고작 쌀벌레를 골라내는 일에 기운이 흉흉할 것까지 있단 말입니까?”
“나야 모르지. 나중에 건이에게 물어 보자고.”
굉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공이 꽤 높은 수준에 올라 있는 굉료가 몸서리를 칠 정도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도 힘들었다.
원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인명 피해가 있다거나 사고가 난 건 아닌 듯하니 다행이지만, 꼭 다행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왜 건이만 끼면 꼭…….’
그러면서도 그 재미난 구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운 원호였다.
엄청난 명망과 그만큼의 성깔을 가진 노인 넷이 쪼그리고 앉아 깨작깨작 쌀벌레를 고르고 있다니!
그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는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