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71
제 4 장 솜씨 자랑
화산의 검성 윤언강.
청성의 검 풍진.
무당의 환야 허량.
남궁가의 검왕 남궁호.
동시대에 존재하는 거인(巨人)들.
젊었을 적에는 함께 강호행을 하며 어울리기도 했던 동료들이며 또한 우내십존이란 고귀한 칭호의 울타리에 있는 이들이다.
젊은 시절에는 분명 친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젊은이들 특유의 친화력과 공감대로 매일같이 붙어 다니곤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우내십존이란 거인들조차 마냥 젊은 시절의 낭만과 순수한 우정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문파를 이끄는 대표 무인으로서의 입장이라든가, 사소한 감정다툼 등이 그들 사이에 벽을 쌓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고 점점 더 고지식한 노인이 되어 가며 골이 더욱 깊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남궁호는 까마득히 어린 소년에게 적이 낭패를 당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다른 우내십존들의 앞이니만큼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윤언강도 기분이 나빴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줄지어 소림의 승낙을 기다리는 마당에, 갑자기 끼어든 남궁호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풍진이나 허량은 워낙 기인에 가까운 이들이라 윤언강과 같은 이유로 화가 나진 않았다. 다만 쌀벌레를 골라내는 지극히 잡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도 남궁호가 억지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그러다 보니 네 사람은 남궁호를 중심으로 미묘한 감정의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에게나 미묘한 대치이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살이 떨리도록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넷이 모두 워낙 극에 달한 고수들이라 그들의 몸에서 절로 풍겨 나오는 미세한 기운조차 다른 이들에게는 크게 느껴졌다.
얼떨결에 동참하게 된 모용전이나 소림승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완전히 굳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작 쌀벌레 고르는 일에 네 사람은 쓸데없는 승부욕을 드러내고 있다.
시킬 때는 구시렁대더니 정작 일을 시작하자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집중한 것이다.
‘이왕 하게 된 거 별수 없지. 하지만 저 녀석들에게 꿀릴 순 없다.’
‘건이 녀석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그 수법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나잇살을 이렇게 처먹고 새파란 꼬마보다 일을 못하면 내 꼴이 뭐가 되겠어?’
‘이것도 어차피 무공을 사용해야 하는 것. 화산이 제일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내십존 네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읽어냈다.
승부다!
☆ ☆ ☆
우내십존은 개인적으로 무인이지만 동시에 문파의 상징, 혹은 문파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실상 그들이 직접적으로 겨룰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벌이는 승부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쌀벌레를 잡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공으로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고 겨루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개개인의 대결이면서 각 문파의 명성을 건 대결임과 동시에 구대문파와 세가연합의 대결이기도 했다.
팽팽한 실이 허공에 마구 얽혀 있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꼼짝도 못하고 숨 쉬는 소리조차 눈치를 봐가며 조용히 내쉬어야 했다. 팔다리가 뻣뻣하고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 와중에 구석에서 운기행공에 들어간 장건의 편안한 모습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다.
‘아이 참. 불편해 죽겠네. 뭐가 자꾸 이렇게 날아와.’
장건이 갑자기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옆으로 이동했다.
장건은 네 사람이 내뿜는 기의 그물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를 옮긴 장건이 공력을 끌어 올리며 준비하고 있는 네 우내십존을 향해 소리쳤다.
“벌레를 죽이면 안 돼요! 아시겠죠?”
우내십존 넷의 표정은 땡감을 씹은 듯 떫기 그지없다.
하지만 우내십존에게조차 태연히 할 말을 하는 장건을 보며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과연 저 자긍심 높은 노고수들이 쭈그리고 앉아 쌀벌레를 고를 것인가!
그들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허량이 풍진에게 말을 던졌다.
“일 안하냐?”
“남이사.”
“팔이 하나라고 봐주는 거 없다. 오히려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
풍진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나야 한 팔로도 충분하지. 그러고 보니 조수는 한 명 필요하겠구만.”
풍진은 폭이 두어 자 너비인 광목천 한 장의 앞에 가 섰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모용전을 가리켰다.
“네?”
풍진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여기 쌀 좀 가져다 부어라.”
“네? 제가요?”
모용전이 되묻자 풍진이 눈을 부라렸다.
“준비하겠습니다!”
모용전은 눈치 빠르게 쌀 한 가마니를 들어 풍진의 앞에 펼쳐진 광목천 위에 가져갔다.
“옆으로 안 흘리게 조심해서 부어라.”
“예.”
모용전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쌀알 하나라도 광목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부었다.
우수수수.
작은 동산처럼 쌀알이 수북이 쌓인다.
“그 옆에 벌레 담는 포대도 가져다 놔라.”
“네.”
모용전은 풍진의 예리한 눈빛을 피하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히 따랐다.
“흠.”
풍진은 어느새 두어 뼘 정도 되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왼손에 들고 있다. 그 순간의 풍진은 비쩍 마른 볼품없는 노인이 아니라 좌수검을 든 노고수였다.
풍진이 나뭇가지를 들고 어떻게 쌀벌레를 잡으려는지 나머지 사람들이 궁금한 눈으로 지켜본다.
허량이 물었다.
“뭐하는 짓이냐? 앉아서 벌레를 고르라니까?”
“클클. 이 나이 먹고 궁상맞게 남들처럼 쪼그리고 앉아 하리? 체면이 있지.”
“그럼 서서 하게?”
“아, 무공 배운 건 뒀다 뭐하게? 너나 쪼그리고 하든지.”
풍진은 허량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발을 굴렀다.
쿵.
풍진의 진각에 수많은 쌀알들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흙먼지는 그대로고 정확히 쌀알만이 떠올랐다.
진각에도 급수가 있다면 풍진의 진각은 최상급의 진수다.
허량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어쭈? 저놈 봐라?’
쪼그리고 앉아서 벌레를 골라내면 한껏 비웃어 주려 했더니 나름대로 머리를 잔뜩 쓴 것 같다.
장건이 사용했던 방법도 모를뿐더러 어설프게 같은 수법을 했다간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풍진도 알고 있는 것이다.
촤아아아―
쌀알들은 풍진의 키 높이만큼이나 떠오르더니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져 내린다.
그 순간.
풍진의 왼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풍진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떨어지는 쌀알들의 사이를 헤집는다.
틱틱 티티틱.
극히 미세한 타격음과 함께 낙하하는 쌀알들의 사이에서 까만 점들이 튕겨져 나간다. 검은 깨처럼 보이는 점들은 쌀 속에 숨어 있던 쌀벌레, 바로 바구미들이다.
놀랍게도 튕겨나간 바구미들은 벌레를 모으는 빈 포대 속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가고 있다.
풍진이 한 호흡 동안 수십 차례나 나뭇가지를 뻗더니 이내 손을 회수한다.
우수수.
쌀알들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풍진이 다시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같은 방법으로 다시 바구미를 골라낸다.
섬광처럼 뻗어진 나뭇가지의 끝이 쌀알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바구미만을 튕겨냈다.
티티티틱.
쿵.
한 번 발을 구르고 손을 뻗을 때마다 수십 마리의 바구미들이 빈 포대 안으로 날아간다.
모용전과 소림승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여, 역시!’
‘이럴 수가!’
‘저런 방법으로 벌레를 골라낼 줄이야!’
휙 하니 떠오른 수십만 개의 낱알들 중에서 깨알만 한 바구미를 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건만, 낱알은 건드리지도 않고 바구미만 쳐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경악스러운 건 바구미들이 다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빈 포대로 날아간 바구미들이 멀쩡하게 살아서 포대를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떨어지는 쌀알들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찌르고 휘둘러 바구미를 쳐낸다면 바구미가 그걸 맞고 살아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 저렇게 치면 사람이 맞아도 멍들고 골절상을 입을 텐데, 어떻게 조그만 벌레들이 멀쩡하지?’
신기에 달한 힘과 내공의 조절이다.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바구미를 타격하는 순간에는 완전히 힘을 빼고 속도를 줄여 툭 밀어내는 것이다.
지켜보던 우내십존 세 사람의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제법인데?”
“풍진 저 친구의 청운검(靑雲劍)이 경지에 달했구먼.”
“한 호흡에 72검이라……. 36검까지 익히고 일검으로 돌아왔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네그려.”
만일 바구미를 죽여도 상관없다 했으면 그 이상의 횟수로 나뭇가지를 뻗었을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도 풍진은 연신 발을 구르고 손을 뻗어 벌레를 골라낸다.
열 번쯤 발을 굴렀을까?
십여 차례 발을 구르던 풍진이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는 더 이상 뻗지 않는다.
쿵. 쿵.
두어 번 더 발을 구르면서 떠오른 쌀알들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없군.”
풍진이 나뭇가지로 떨어지는 쌀알들의 양 옆쪽을 툭툭 쳤다. 쌀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말 잘 듣는 개처럼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쌀알은 단 한 톨도 광목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풍진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용전을 보았다. 나뭇가지로 골라놓은 쌀을 가리키며 까딱거렸다.
“뭐하냐?”
“네, 네?”
“담어.”
모용전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소림승들을 힐끗 돌아보았지만 그들도 입만 벌리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너무 놀라서일 터다.
모용전은 별수 없이 풍진이 골라놓은 쌀을 담으려 했다.
그때 장건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담으시면 안 되죠! 빈 가마니라도 벌레가 남아 있을지 모르잖아요. 탁탁 털어서 깨끗해지면 담으세요.”
운기행공을 하면서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장건은 귀신처럼 잔소리를 했다.
모용전은 ‘그럼 네가 해!’ 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눈을 부라리고 있는 풍진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모용전은 장건이 시킨 대로 가마니를 몇 번이나 탁탁 털고 가마니에 쌀을 담기 시작했다.
풍진이 ‘엣헴!’ 하고 짐짓 헛기침을 하며 세 노인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일 안하고 뭐하냐?”
허량이 코웃음을 쳤다.
“그깟 쥐꼬리만 한 실력 좀 보였다고 으스대긴.”
“뭐?”
허량은 낄낄대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네 마리 죽었다.”
풍진이 흠칫했다.
“봤냐?”
“봤지. 누구 눈을 속이려고? 차라리 장님을 속여라.”
“망할.”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기가 막혔다.
‘벌레들이 날아가는 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 와중에 죽었는지 살았는지까지 보다니!’
풍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하라는 일은 안하고 남 일하는 거나 감독하냐?”
“죽이지 말라는데 왜 죽여? 죽여 놓고 시치미 뚝 떼면 모를 것 같냐?”
우내십존을 제외하고는 너무 빨라 못 봤다.
죽었다는 말에 정신이 든 소림승들이 반장을 하며 ‘아미타불’을 연호(連呼)했다.
허량도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한낱 미물이라 하나 가련한 생물들이 생을 마감하였으니, 원시천존께서 굽어 살피소서!”
풍진의 얼굴은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바쁘신 천존님은 왜 불러? 천존께서 너처럼 한가한 줄 아냐?”
“낄낄. 그러니까 똑바로 해야지. 왜 바쁘신 천존님을 귀찮게 하냐.”
허량도 곧 펼쳐둔 광목천 앞으로 가 섰다.
“얘야. 여기도 쌀 좀 부어라.”
느려 터졌다고 혼이 날까 봐 땀이 날 정도로 한창 쌀을 담고 있던 모용전이 울상을 지으며 허량을 보았다.
“또…… 제가요?”
“아무나 하면 되지, 네 일 내 일이 따로 있냐? 이 쌀은 누구 입에 들어가고, 저 쌀은 누구 입에 들어가라는 법이 정해져 있든?”
“그, 그렇지 않지요.”
“알았으면 부어라.”
모용전은 티 나지 않게 입을 삐죽이며 쌀가마니를 가져다 부었다.
풍진이 ‘킁!’소리가 나도록 콧방귀를 뀌며 입을 내밀었다.
“나 따라하냐?”
“내가 왜 좋은 무당의 검을 놔두고 살기등등한 청성의 검을 배우겠냐. 하여간 생각하는 거 하고는.”
허량은 고개를 양옆으로 눕히고 손을 가볍게 풀더니 곧 공력을 끌어 올렸다.
스슷.
허량이 오른손을 내밀어 노를 젓듯 허공을 휘젓자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가 인다.
이윽고 허량은 오른손을 땅으로, 왼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스으윽.
다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허량이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딱딱함이나 경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물 흐름 같은 움직임이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절로 주변의 기운이 허량에게로 모여들고 있었다.
허량의 왼팔과 오른팔이 각기 다른 원을 그리면서 위아래로 교차했다. 동작이 점점 빨라지며 두 팔은 서서히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스스스슥!
바닥에 깔린 쌀들이 소리도 없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폭포가 거꾸로 역류하듯 쌀들이 떠올라 허량의 전면에서 퍼져 있다.
허량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팔을 휘저었다. 어깨와 몸도 함께 움직인다.
어느샌가 떠오른 쌀들이 허량이 그려내는 움직임에 동화되어 물처럼 흐른다. 허량은 두 팔로 큰 원을 그렸다가 다시 작은 원을 그렸다가 하며 허공에 흐르는 쌀들을 인도한다.
쌀들이 굽이치는 계곡물처럼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이리저리 섞여갔다.
이제 허량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뒤죽박죽 뒤섞인 모양을 하고 있던 쌀알들이 점차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허량은 도자기를 빚듯이 쌀알들을 빙글빙글 굴리며 하나의 공을 만들어 냈다.
쌀 한 가마니 분량의 쌀알들이 커다란 공이 되어 허량의 가슴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허량이 왼손의 손바닥으로 공을 받치듯 아래쪽에 두었다.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쌀로 만든 커다란 공은 물레처럼 연신 회전을 계속한다.
그리고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검지만 편다. 쌀로 만든 공의 옆쪽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조그맣게 원을 그린다.
스스슷.
소용돌이를 그리는 검지의 움직임을 따라 쌀로 만든 공에서 물줄기 일부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물줄기가 아니라 새까만 쌀벌레들로 이루어진 줄기다.
쌀로 만든 공에서 벌레들만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량은 두 개의 공을 가지게 되었다. 쌀 한 가마니의 쌀알들로 만든 커다란 공과 한 줌이나 될까 한 새까만 벌레들로 만든 작은 공이다.
휘익― 휘이익.
두 개의 공은 여전히 돌고 있는 채다.
허량은 작은 벌레들로 만든 공을 벌레 담는 포대에 툭 던져 넣었다. 회전하고 있던 공이 포대 안쪽에 부딪치며 우수수 소리를 낸다.
허량은 커다란 쌀 공도 광목천 위에 내려 두었다. 쌀알들이 회전을 하고 있으니 마구 튕겨나갈 듯 불안 불안해 보였다.
허량이 공 위에 손을 얹는다. 회전 속도가 완만히 줄어들었지만 쌀들은 아직 공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허량은 쌀 공을 가볍게 손으로 누르듯 했다.
촤아악.
쌀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듯이 천 위로 쏟아졌다. 약간의 나선을 그리며 쏟아진 쌀들의 모양이 기묘하다.
태극(太極)!
음양이 하나로 합쳐지는 원의 가운데를 파도형태의 선이 가로지는 태극의 형상이다.
가히 눈을 휘둥그레 뜨도록 만드는 고절한 수법이었다.
허량은 손바닥을 탁탁 쳤다.
이 정도야 가뿐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한 마리도 안 죽었지? 죽을 수가 없어. 무당의 무공은 원래 사람을 살리는 무공이거든.”
풍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묘기를 해라, 묘기를. 도사짓 하는 것보다 묘기 보여서 약 팔아 먹고 사는 게 낫겠다.”
“이놈이?”
허량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
“네놈 눈에는 무당의 태극권이 길거리 약장수의 묘기로 보이냐?”
“어이쿠! 그게 영험한 약을 제조하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무당의 무공이었어?”
도가에서는 연단을 한다. 무당의 연단술은 도가에서도 이름나 있다.
풍진은 그것을 빗대어 조롱한 것이다.
“죽일 놈. 보자보자 하니까!”
“뭔 약을 잘못 먹어서 듣는 것과 보는 것도 구분을 못하냐. 쯧!”
허량과 풍진이 이를 갈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겉보기에는 청년인 허량과 쭈글쭈글한 노인인 풍진이라 둘의 대치는 묘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온종일 그러고 있겠구먼. 그만들 하게나.”
윤언강은 혀까지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자네들은 최고의 절기를 보여주었네. 하지만 고작 쌀벌레를 잡는데 온갖 상승무공을 사용하다니!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말일세.”
허량과 풍진이 반발했다.
“넌 또 뭐야!”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지. 모름지기 용도라는 건 그에 걸맞게 쓰라 있는 말이잖은가.”
“이놈이?”
“이건 뭔데 잘난 체야?”
윤언강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무공은 뭇 사람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높으나 아직 철이 덜 들었어.”
“허!”
“제 녀석은 얼마나 철이 들었다고?”
윤언강은 둘을 가볍게 무시하며 모용전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또 나야?’
모용전은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찍혔다는 게 못내 우울했다.
그래도 별수 있겠는가. 시키면 해야지.
모용전이 앞선 둘처럼 윤언강의 앞에 준비를 해두자, 윤언강은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쌀을 내려다본다. 두 눈에 자줏빛 안광이 어른거리는 걸 보니 그 역시 자하신공을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이윽고 윤언강이 한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툭 허공에 쳐 올렸다. 가볍게 검지를 튕기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 순간.
광목천 위에 펼쳐놓은 쌀들의 가운데가 쫙 갈라졌다.
그것까지는 별로 놀라운 게 아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쌀알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밀려난 가운데의 빈 공간에 쌀벌레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까만 바구미들은 흰 광목천 위에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 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어주던 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어리둥절한 듯했다.
윤언강이 또다시 검지를 튕겼다.
촤악!
양쪽으로 갈라져 있던 쌀 무더기가 수평으로 갈라져 네 개의 덩어리가 되었다.
쌀 무더기를 네 개로 갈라놓은 윤언강이 손장난을 하는 것처럼 검지를 살짝살짝 휘젓는다. 그때마다 네 개의 쌀 무더기가 들썩거렸다.
쌀 무더기가 들썩거릴 때마다 쌀벌레들이 가운데의 빈 공간으로 튕겨 나왔다. 무형의 힘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언뜻 그리 대단하게는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찌 보면 풍진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방식이다.
풍진과 허량이 왕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림에 와서 활검으로 사과를 깎았다더니.”
“잠도 안 자고 칼질만 했나. 언제 저딴 건 또 익혔어?”
허공을 격하고 검을 그었는데 쌀과 벌레는 베지 않았다. 윤언강이 벤 것은 그 사이의 공간이다. 공간을 베어 없애 벌레가 나올 수밖에 없게 떠밀었다.
풍진과 허량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풍진은 청성의 검을 썼고, 허량은 무당의 태극권을 썼다.
그러나 윤언강은 화산의 검공을 쓰지 않았다. 특정한 문파의 무공을 쓴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검공을 사용했다. 다만 일반적인 검공을 사용했음에도 거기에 담긴 무리(武理)는 극도의 경지였다.
“치사한 놈.”
“제 녀석은 공명검(空冥劍)을 쓰면서 누구더러 사치니 뭐니 하는 거야.”
풍진과 허량이 투덜거렸다.
공명검!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공명검은 특정한 검법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활검이나 심검처럼 검공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공명검의 경지에 처음 올랐던 이는 무림의 기나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던 광왕(光王)이었다. 광왕은 기연을 얻어 내공은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으나 제대로 된 사문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수직으로 베기, 옆으로 베기, 대각선 베기 등 여섯 방향을 베는 광자(光字) 베기뿐이었다. 광자 베기는 검을 처음 배우는 초보에게나 가르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을 그 한 가지에 몰두한 광왕은 결국 천하제일 고수의 자리에 올랐다. 누구도 그의 단순한 검로를 받아내지 못했다.
광왕의 검은 당시에만 해도 이단의 것이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상대는 멀쩡한 모습으로 죽었다. 검이나 방패로 막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죽은 시체를 조사해 보면 놀랍게도 내장만이 베어져 있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두 동강이 나 죽은 것이다.
나무 뒤에 숨든, 돌 뒤에 숨든, 광왕이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속이 동강나 죽었다. 나무나 돌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이후 광왕은 쉼 없이 정진하여 자신이 베고 싶은 것만 베고, 베고 싶지 않은 것은 베지 않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겉은 멀쩡한데 안의 근육과 힘줄만 벤다거나,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는 단전을 베기도 했다.
마치 공간을 격하여 검이 허공을 뚫고 나와 베듯, 광왕의 검은 그러했다. 하여 사람들은 그의 검을 명계(冥界)의 검이라 부르다가, 마침내는 공명검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
무림 역사상 공명검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을 지금 윤언강이 보여준 것이다.
그래도 풍진과 허량은 기죽지 않았다.
공명검이 높은 경지이긴 하나 심검으로 가기 위한 수많은 갈래 중의 한 단계일 뿐이다. 반드시 공명검을 얻어야 심검을 얻는 것은 아니다.
공명검을 얻은 윤언강이 풍진처럼 촌각에 수십 번의 정확한 검초를 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허량처럼 음양합일의 완전한 태극경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의(殺意) 섞인 검을 사용하는 풍진이 활검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 풍진은 살검으로 활검의 경지와 같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지의 구분으로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막상 검을 맞대고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는 붙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경(自然境)도 못 이루었으면서 공명검 가지고 생색내긴…….”
“누가 아니래? 하여튼 조용히 살지는 못할망정 꼭 자랑을 하고 싶다는 티를 내요, 티를.”
무림 역사에 남을 만한 공명검을 얻은 윤언강이 부럽긴 하지만 풍진과 허량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윤언강이 놓친 실수를 지적했다.
“벌레 안 담고 뭐해?”
“우리는 다 포대에 바구미를 담아놨는데 넌 뭐 골라놓고 구경만 하고 있냐?”
윤언강은 아차 싶었다.
공명검으로 쌀과 벌레를 구분해 놓기는 했는데 벌레를 포대에 담아놔야 하는 것이다.
열십자로 갈라진 쌀더미의 한 가운데에 몰려 있던 벌레들이 우왕좌왕한다. 일부는 벌써 쌀더미로 돌아가고 있었다.
허공섭물로 당겨서 넣어 버리면 간단하지만 그랬다가는 사치니 뭐니 풍진과 허량이 비아냥댈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 냅두면 벌레 다 다시 쌀 속에 들어간다?”
“설마 하니 평범한 검을 쓰는 척하다가 이제 와서 허공섭물 같은 상승무공을 쓰려는 건 아니시겠지?”
윤언강의 눈썹 끝이 흔들렸다.
그렇다고 쪼그리고 앉아 벌레와 쌀을 담을 수도 없으니 실로 난감한 상황.
윤언강은 태연한 얼굴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는 마치 ‘원래 이러려고 했다’는 듯 모용전을 쳐다보았다.
“흐음.”
인자한 노인처럼 입가에는 옅게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하나 그 눈초리가 의미하는 속내는 전혀 달랐다.
모용전은 움찔했다.
‘네가 담아라.’
윤언강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용전은 이제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어르신.”
모용전은 그냥 곧바로 쪼그리고 앉아서 빨빨대는 바구미를 집어 포대에 넣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자기가 이런 일이나 하게 되었는지 자괴감이 들 뿐이었다.
윤언강은 ‘원래 이러려고 했다’는 표정을 유지하며 풍진과 허량에게 말했다.
“고르는 것이 어렵지, 담는 거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잖은가.”
그에 대한 풍진의 해석은 간단했다.
“뻔뻔한 놈.”
한마디가 정곡을 후벼 팠다.
윤언강은 마음이 찔렸지만 외려 인상을 썼다.
“자네, 아까부터 말이 심하네.”
“군자처럼 행세하면서 공명검 자랑이나 하는 놈이 무슨?”
“호오, 그것이 자랑처럼 보였다니…… 의외로구먼. 자네, 무슨 자격지심이라도 있나?”
“자격지심은 무슨? 활검으로 애를 꼬시려던 사람이 공명검을 보여줬으니 이번엔 또 누굴 꼬시려 그러나 궁금해서 그러지.”
“허어, 사람 속을 그렇게 긁어 놓으면 기분이 좋던가?”
“당연히 좋지. 너도 방금 해봐서 잘 알잖아.”
“이 사람이?”
“이놈이?”
풍진과 윤언강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불씨만 가져다 대면 활활 타오를 듯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궁호가 나섰다.
남궁호는 모용전이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깨알 같은 바구미를 끙끙대며 다 담을 때까지 기다렸다.
모용전은 아예 남궁호가 시키기도 전에 똑같이 준비를 해 두었다.
“놔두고 비키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눈길이 남궁호에게 향했다. 풍진과 윤언강도 서로에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남궁호를 보았다.
남궁호도 다른 이들에 질세라 잊지 않고 한 마디를 했다.
“거 참, 쉬운 길을 어렵게도 돌아들 가는구만. 벌레를 잡으랬지, 누가 싸움질을 하라 했나?”
세 사람은 남궁호를 째려보았다.
남궁호는 짐짓 거만한 태도로 뒷짐을 졌다.
“허허. 이깟 일에는 손을 까딱일 필요도 없지. 공명검? 겨우 벌레 잡는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용도에 맞는 칼을 써야 한다 했으면 제대로 써야지.”
그에게는 제왕검형이 있었다.
제왕검형의 기운으로 벌레를 몰아내는 것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왕검형의 기운을 최소한으로 줄여 내보내면 민감한 벌레들은 기운을 피해 쌀 밖으로 달아날 것이다. 기운을 잘만 조절하면 아예 스스로 기어서 포대 안까지 들어가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쌀벌레 골라내기는 무공의 승부이기도 했지만, 누가 더 효율적으로 빨리 쌀벌레를 골라내는가 하는 승부이기도 했다.
남궁호가 공명검 이상의 무엇을 보여줄 수 없는 이상 후자로 승부의 초점을 옮겨가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주변의 사물을 다스리는 제왕검형을 가진 남궁호에게는 훨씬 유리하다.
남궁호의 속셈을 알아챈 윤언강과 풍진, 허량의 표정은 소태나무 껍질을 씹은 듯했다.
“졌군.”
“졌어. 언강이 때문에.”
“허어, 나는 왜 거론하는가.”
“네가 아니었으면 저놈도 저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
“큼.”
“으흠.”
곧 남궁호가 제왕검형을 발현했다.
보통 사람은 알아채기도 힘든 미약한 기운이 남궁호의 몸에서 퍼져나갔다. 예민한 사람이나 겨우 이상하다 여길 정도의 옅은 기운이었다.
곧 쌀벌레들은 집에 불이라도 난 듯 뛰쳐나올 것이다.
불이라도 난 듯 뛰쳐…… 나와야…….
…….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조용하다.
쌀 무더기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음?”
남궁호가 조금 더 제왕검형에 힘을 주었다.
“…….”
그래도 아무 변화가 없다. 반대로 힘을 더 줄여도 마찬가지였다.
쌀알을 밀치고 달아나야 할 벌레들이 잠잠하다.
남궁호는 당황했다.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보다 더 민감한 곤충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해본 적이 없지만 어렸을 적에는 제왕검형의 기운으로 벌집에서 벌들을 내쫓는다거나 구덩이에서 뱀을 불러내 잡기도 했다.
‘그런데 왜 쌀벌레들의 움직임이 없는 거지? 너무 작아서 그런가?’
개미들의 행렬을 바꿔 물웅덩이로 가게 한다거나 날벌레들을 불에 달려들게 한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도 가능했다.
그런데 고작 바구미를 움직일 수가 없다니?
의아한 것은 우내십존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제왕검형이라면 충분히 벌레들이 스스로 쌀에서 기어나가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어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남궁호는 머쓱해졌다.
한껏 거만을 떤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남궁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갈등했다.
그때 장건이 소리쳤다.
“아이 참, 그거 하지 마시라니까요?”
장건은 운기행공도 멈추고 일어선 상태였다.
장건이 다가와서 남궁호의 앞에 놓인 쌀알들을 뒤적였다. 중간중간 꼼짝도 안하고 있는 바구미들이 보였다.
“얘들은요. 이상하다 싶으면 죽은 척하고 안 움직여요. 그러니까 얘들한테는 그거 하셔 봐야 소용없어요.”
남궁호가 혹시나 하고 옅게 뿌렸던 제왕검형의 기운을 완전히 지우자, 그제야 바구미들이 빨빨거리고 움직인다.
곤충마다 습성이 다른데 바구미는 위험을 느끼면 죽은 척하는 것이 습성이었다.
“…….”
남궁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천하의 검왕이 하찮은 바구미의 습성 따위를 알 리 없지 않은가!
허량이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풍진이 뒤이어 웃었다.
“고거 쌤통이다!”
윤언강도 씩 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남궁호의 얼굴은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다. 창피하긴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분노를 일으켰다.
풍진과 허량이 불을 질렀다.
“넌 도대체 어떻게 검왕이 된 거냐?”
“검왕이면 검왕답게 좀 해봐라. 검성보다도 시원찮어.”
풍진과 허량의 말에 윤언강이 발끈했다.
“왜 거기서 날 붙들고 늘어지는 겐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널 욕한 것도 아닌데 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네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기분이 좋으면 이상한 놈이지. 클클.”
스으으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서히 살기가 일기 시작했다. 기분이 엉망이 된 남궁호도 살기에 대응해 같이 살기를 일으켰다. 풍진과 허량은 물론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윤언강의 얼굴에도 날카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해볼까?”
“오호라, 이제야 한 번 제대로 붙겠군.”
“진작 끝냈어야 하는 일이지.”
우내십존의 살기는 어지간한 무인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완전히 얼어붙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기의 그물을 이리저리 피해 사각지대에 선 장건은 어이가 없었다.
기껏 일 도와준다더니 무슨 이상한 자랑들이나 하고, 이제는 싸움까지 날판이다.
‘그렇게 일하는 게 싫은가?’
역시나 무인들이란 일보다는 싸움을 좋아하는 족속들이다.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싸우자. 지나가는 데도 싸우자. 아무 일도 아닌 걸로 또 싸우자…… 정말 지겹다.’
예전엔 아예 이해를 못했지만, 그나마 지금은 무인들에 대해 조금 이해가 간다. 내 무공과 상대의 무공을 비교하며 누가 더 나은가 확인하고 싶은 게 무인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싸울 때가 아니지 않은가.
이 순간에도 바구미들이 열심히 쌀을 먹어치우고 있을 텐데 말이다.
어지간하면 남들 싸우는 데 끼기 싫은 장건이었지만 당장은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에휴.’
장건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곤 소리쳤다.
“저기요!”
허량이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장건이 손을 휘휘 저었다.
“싸우려면 딴 데 가서 하세요. 나머진 제가 혼자 할게요. 괜히 방해하지 마시고, 가세요.”
순식간에 살기가 싹 사라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윤언강과 남궁호는 ‘허허’ 웃기까지 했다.
“저 자식이?”
돌연 더 진한 살기가 일었다.
넷의 살기가 장건을 향해 쏘아졌다.
그야말로 해일처럼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으아! 진짜들 화나셨나 보다.’
장건은 뜨악한 표정으로 재빨리 보법을 밟았다. 아직 내공을 다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평소에도 거의 힘의 소모가 없이 움직이는 장건이라 보법을 밟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피할 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의 살기가 그물처럼 쏟아지며 촘촘하게 덮여왔다.
‘에라, 모르겠다.’
장건은 좌우를 보다가 딱딱하게 굳어 서 있는 모용전의 뒤로 숨었다.
네 사람의 살기를 받은 모용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어어억!”
모용전은 가련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우내십존의 성난 살기를 정면에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왜 또 나한테 와!’
모용전은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장건이 모용전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안 그러면 싸우느라 난장판이 될 거 아냐? 바구미들이 쌀을 다 먹으면 어쩌려고.”
순간 모용전은 장건이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내십존의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생의 영광인데, 그걸 한낱 애들 싸움으로 치부하다니! 소림이 난장판이 되는 것쯤 우내십존의 대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제발 그놈의 바구미 타령 좀 하지 마! 우내십존의 대결을 보는 게 흔한 일인 줄 아냐? 나를 위해서라도 그만 둬!’
장건이 모용전의 간절한 바람을 마음으로나마 느꼈던 것일까?
장건이 소리쳤다.
“정 싸우고 싶으시면 싸우셔도 되는데요!”
모용전이 살기를 버티느라 다리를 와들와들 떨다가 기쁨의 표정을 짓는 순간, 장건이 다시 외쳤다.
“그럼 일이나 마저 다 하고 싸우시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