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72
제 5 장 기회는 이 때?
모용전은 갖은 허드렛일을 하느라 온 몸이 쑤셨다.
두어 시진 동안 거의 쌀 수십 가마니를 쉴 새 없이 짊어지고 뛰었다.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윽…….”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오고 허리로 손이 갔다.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고 허리를 펴지 못했다.
결국 우내십존은 작업을 끝까지 마쳤다.
그럼에도 화를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네 노인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죽어라 벌레를 잡았을 뿐이었다.
네 초고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벌레를 잡아대니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죽어라 보조를 해야 했다. 외가 공부를 익힌 소림승들조차 작업이 끝나자마자 뻗어 버렸으니, 얼마나 고된 작업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름난 세가인 모용가에서 제대로 무공을 배우고 자란지라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는 건 본래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도 내공을 사용했을 때나 어렵지 않다.
우내십존이 연신 공력을 끌어 올리고 살기까지 간간이 뻗어내는 바람에 모용전은 제대로 내공을 쓸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배가 지나가면 옆에 있던 작은 돛단배가 출렁이다 전복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다보니 본신의 힘만으로 쌀가마니를 날라야 했다.
내공을 어느 정도 쌓은 뒤부터는 딱히 본신의 힘만으로 노동을 한 적이 없는지라, 지금 모용전은 근육이 발발 떨려 죽을 지경이었다.
순수한 힘만으로 수십 근이나 되는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뛰었으니 힘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정말이지 오기와 근성으로 해냈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 ‘내가 해내고야 말았어!’라고 외쳤다가 갑자기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무술하는 근육과 노동하는 근육은 따로 있다더니, 크으으.”
그렇게 벌레를 잡아대던 노인들은 작업이 끝나자마자 그냥 돌아가 버렸다.
“제길.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모용전은 심하게 부림을 당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길도 없고, 아무 이득 없는 노동이었다.
“사람들이 다 속은 거야. 그렇게 순진하게 생겨가지고는…… 크윽, 완전히 미친놈이었어. 어떻게 우내십존에게까지 막말을 할 수가 있지?”
왠지 불안했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게 아닐까?”
장건을 끌어들인 것이 자못 자멸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팽탁은 기세등등하게 장건을 이길 수 있다 자신하고 있었지만, 모용전은 그가 이길 가능성이 적다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장건을 겪고 나서는 아예 일말의 기대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갈가의 아이를 건드리는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좋은 결과가 기대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급했어. 그렇게 미친놈이라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모용전은 자신의 완벽한 계책이 생각보다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흔들렸다.
무엇보다 장건의 신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비록 검왕 남궁호가 검을 들지 않았고, 그가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지만 중반까지는 거의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검왕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장건에게 나와 팽탁, 그리고 남궁상까지 덤벼들어도 안 되는 건 분명하지. 그냥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그 일로 검성과 환야, 청성일검까지 분노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다리의 힘이 풀리는 듯했다.
우내십존을 직접 목전에서 겪은 탓이다. 역시 소문으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다. 그들이 분노했을 때, 세가 연합은 그들의 분노를 받아낼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우내십존이 그렇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또 검왕이 같은 편에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 우내십존의 사이는 참으로 미묘했다. 언뜻 허물없이 편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 간의 묘한 알력은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도화선과도 같았다. 마치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 잔뜩 몸을 웅크린 승냥이 같았다.
“역시나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된 것일까?”
지금의 정파는 유래 없이 번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강호의 노인들은 젊었을 때 수시로 마교가 쳐들어 와서 수천 명이 죽었다느니 정사대전 때 피가 강을 이루었다느니 하고 얘기하는데, 정작 모용전은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강호일통을 하겠다며 난(亂)을 일으키는 세력도 없었고, 혈겁을 일으키는 자도 없었다.
마교는 너무도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어서 젊은 무인들은 그런 단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사파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게 벌써 십수 년이 더 되었다. 일부만이 생존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는 하지만 눈에 띄게 큰 방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나타나는 악인들은 어떤 시대에나 존재하는 악인이지, 딱히 어떤 방파에 속한 이들이 아니었다.
모용전이 아는 건 한 세대 앞의 최강자였던 천하오절에 의해 마교가 패퇴하였고, 뒤이어 나타난 우내십존이 관과 협력하여 사파를 척결했기 때문에 지금의 평화가 찾아왔다는 정도다.
그러다 보니 기껏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배우고 고수가 되어도 할 일이 없다. 정파의 고수들이 악인보다 더 많은 마당에, 악인을 처단하여 명성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팽씨세가에서 철비각 종유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명성을 올릴 기회를, 심지어 팽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대융삼마를 팽가의 무인이 아니라 종유가 해치웠기 때문이다.
현 강호에서 정파 무림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주적(主敵)의 부재!
힘은 가졌는데 적(敵)이 부재하기에 쓸 일이 없다.
더구나 관의 간섭이 심해 함부로 무력을 동원하기도 어렵다. 도대체가 쓸 일이 없는 무공을 뭐하러 배우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어쩌면 우내십존 이후에 딱히 뛰어난 후계자들이 나오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일인지도 몰랐다. 본래가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고들 하지 않는가.
지금처럼 평화로운 와중에 젊은 영웅이 나타난다고 해서 딱히 부각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 문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고 타 문파를 견제하는 일뿐이었다. 소림이 여타의 거대 문파들에 의해 그 세가 축소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다못해 지금 이 순간에도 각 문파의 영역 경계선에서는 지독한 계략과 술수가 난무하고 있을 터였다.
심지어 우내십존조차도 당금 무림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수백 수천 명의 적을 상대로 가공할 무위를 펼쳐야 할 우내십존이 쌀벌레나 잡으며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
“장건…….”
이러한 와중에 장건이란 존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청성일검의 검을 막아내고 수백 명의 무인을 홀로 쓰러뜨린 아이.
아마 이대로 무난하게 흘러간다면 우내십존의 사후에는 장건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시대가 도래할지도 몰랐다.
모용전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 장건을 끌어들여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자칫 대란(大亂)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다.
모용전은 돌아가는 걸음을 멈추고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막막하군.”
하늘에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이 몽실몽실 모습을 흩트린다. 그러더니 어느새 구름은 으스스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풍진의 얼굴이 되었다.
요즘 싸가지 없는 애들 많던데, 걸리면 죽는다.
흠칫!
모용전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얼굴을 아예 안 봤다면 모를까. 이미 본 마당에 이번 일이 터지게 되면 풍진을 다시 대면할 자신이 없다. 풍진이 아주 산 채로 잡아먹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 새끼, 싸가지 있다고 하더니 내게 거짓말을 했어? 감히 청성을 바보로 만들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넌 오늘 뒈지는 줄 알아라.
그러면 정말 모용전은 뒈질 것이 분명하다.
‘내가 너무 우내십존의 존재를 무시했어. 단순히 뒷방 노인네들이 아니야. 일을 도모하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용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걷는 듯 기는 듯, 모용전은 정말로 힘들게 세가의 자제들이 있는 정자까지 걸어갔다. 보통 걸음으로 이 다경 정도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거의 반 시진도 넘어서야 도착했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아직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긴 했지만, 그곳에는 달랑 두 명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모용 형!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거요?”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남궁상과 황보윤이었다. 둘은 모용전의 속도 모르고 연인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정자 위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찾긴 개뿔이…….’
모용전의 표정은 통증과 불안감으로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제야 모용전이 땀에 절어 피곤한 안색인 것을 확인한 남궁상이 물었다.
“어디 아픈 거요? 혹시 장 소협에게 간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소?”
황보윤도 놀라 물었다.
“정말이네? 얼굴이 왜 그래요. 옷은 또 왜 그렇게 흙투성이구요?”
피곤해진 모용전이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바구미 때문이오.”
“바구니?”
“비구니요?”
모용전이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장 소협은 시간에 맞추어 나오기로 했소.”
그러나 아무래도 계획을 취소해야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남궁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아, 다행이오. 그럼 예정대로 비무가 되겠구려. 그게 잘못됐으면 아마 난 할아버님께 맞아 죽었을 거요. 역시 모용 형이 실패할 리 없지.”
“응?”
남궁상의 조부는 바로 아까 만났던 검왕 남궁호다.
모용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남궁상은 가슴을 탁 치며 호탕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모용 형이 늦는 것 같아 내 좀 전에 할아버님을 만나 뵙고 얘기를 드렸소이다.”
모용전이 기겁했다.
‘그만둬야 하는데!’
남궁상은 모용전의 표정을 오해했다.
“아아, 걱정 마시오. 할아버님께서 아주 좋아하셨소이다. 걱정 말고 일을 도모해보라 격려까지 해주셨단 말이지요.”
남궁상은 자랑스러운 듯 웃었고 황보윤은 그런 남궁상이 멋지다는 듯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모용전은 질려 버렸다.
‘이런 멍청한 놈! 좋다고 웃을 때가 아니건만!’
오늘 일로 검왕은 크게 체면이 상했다. 장건과 다른 우내십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일 만하다.
그러나 당장의 뒷감당은 검왕보다 자신들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가 제일 처음으로 죽게 생겼다.
모용전이 떨리는 목소리로 성을 내며 말했다.
“가서…… 없던 일로 하겠다 말씀드리시오.”
“응?”
“왜요? 장 소협도 나오기로 했다면서요. 팽 대협과 소은 언니도 벌써 가 있는걸요?”
“그러니까…….”
모용전은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가 이번 일을 꾸몄구나.”
모용전은 소름이 쭉 돋았다.
‘검왕!’
남궁상이 의외라는 듯 정자를 찾아 온 남궁호를 보았다.
“어라? 할아버님께서 왜 또…….”
황보윤도 급히 팔을 떼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검왕을 뵙습니다.”
검왕 남궁호가 긴 장삼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내 상이에게 얘기를 듣긴 했으나, 아무래도 저 녀석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나올 리는 없을 것 같아서 와 보았다.”
남궁상은 남궁호의 눈치를 살폈다. 살짝 황보윤에게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세가의 이름을 빛내야 하니 열심히 하라 했는데 연애나 한다고 혼날까 봐서였다.
눈치를 살피던 남궁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용 형이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됐다.”
남궁호가 모용전과 남궁상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 일은 세가연합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너희들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다.”
“물론이죠. 할아버님.”
남궁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생겨났다.
체면이 좀 상하긴 했지만 움직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런 기회가 생겼다.
“상아.”
“예, 할아버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건이란 아이를 비무에 끌어 들여라.”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이겨라.”
“그야 물론…… 네?”
남궁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장건과 싸워 이기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제가 어떻게 장 소협을 이겨요!’
생각은 했지만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깐 그런 말을 안 하셨으면서…….”
남궁호가 말했다.
“최선을 다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이왕 벌인 일이라면 제대로 벌여라. 반드시 이겨라. 이길 수 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남궁호의 눈이 매서워진다. 남궁상은 얼어붙어서 감히 뭐라고 대꾸도 못했다.
“각오를 해야 할 게다.”
남궁상은 마른 침을 삼키며 ‘네’ 하고 대답했다. 좀 전에 황보윤에게 대답할 때하고는 천지차이인 모습이었다.
“너라면 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이 할애비에게 보이거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러 일부러 오신…….”
남궁호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남궁상이 아니라 모용전을 보며 대답했다.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모용전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슬며시 눈을 들어 남궁호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남궁호의 말에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했으나, 모용전은 눈빛을 빛냈다.
‘검왕이 손자의 실력을 모를 사람이 아닌데 남궁상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아까 간을 보듯 장건을 시험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단순히 내공을 사용해 장건이 지쳤나 싶었는데, 그 이상이 있는 듯하다.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장건의 몸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모용전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남궁호는 장건의 내공이 거의 소진된 것을 알았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오후까지 어느 정도 회복을 한다 해도 평소 기량의 십분지 일도 내기 힘들 터다.
현재의 소림에 워낙 대단한 고수들이 즐비해 남궁상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지만, 남궁상도 평범한 실력은 아니다. 전통 강호인 남궁가의 젊은 층에서도 손꼽는 기재다.
내공이 거의 소진된 장건이 상대라면 남궁상이 밀릴 싸움은 아니다.
어찌 보면 다소 비겁하단 말을 들을 수도 있겠으나, 만일 계획대로 잘된다면 비무를 청하는 건 장건이지 세가의 자식들이 아니다. 자기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서 덤빈 사람이 잘못인 것이다.
남궁호는 모용전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미소가 짙어졌다.
‘어차피 천기는 본가와 소림을 잇고 있지 않다. 최근 들어 더욱 확실해졌어. 그렇다면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차라리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이득을 챙겨두는 것이 좋다.’
평가는 강자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안 좋은 소문은 겨우 몇 년을 가지만 가문의 위세는 수십 년을 간다.
남궁호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모용전도 승리를 확신하는 남궁호를 보며 두려움을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검왕까지 승낙한 일.
물러설 곳도 없다.
그가 말했듯 이왕 벌인 일이라면 제대로 벌여야 했다.
곧 남궁호가 장건의 몸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무가 연기될지도 모른다니요?”
문사명은 스승이 한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윤언강이 대답했다.
“검왕 남궁호, 그 친구가 끼어들었다. 건이의 내공 소모가 심해서 아마 며칠간은 제대로 된 실력을 펼치지 못할 게다.”
“아니! 검왕께서 왜 나섰단 말입니까?”
“딴에는 호기심이 동한 듯했는데, 지나쳤던 게지. 답지 않게 성급했어.”
윤언강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했다. 언제나 인자하던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문사명은 그 순간 번개처럼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윤언강이 문사명의 표정을 보았다.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예.”
문사명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체면과 실리. 무인에게 어느 쪽이 더 중한 것입니까?”
“글쎄다.”
윤언강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지 않겠느냐? 네 스스로가 무인으로서의 자긍심보다도 더 중한 것이 있다 생각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옳을 것이다.”
문사명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문사명을 보던 윤언강이 넌지시 말을 했다.
“본래 너와 건이의 비무는 수십 년 전부터 홍오와 약속이 된 것이었다. 홍오와 나는 무공에 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길로 무의 극에 도달할 수 있다 생각했고, 홍오는 여러 갈래의 길을 모두 섭렵해야 비로소 극을 볼 수 있다 했다.”
문사명은 묵묵히 윤언강의 말을 경청했다.
“한데 오늘 보니 정작 홍오가 이루지 못한 것을 건이가 이루려는 듯 보이더구나. 그래서 내가 남궁호 그 친구를 막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문사명은 스승인 윤언강이 자신을 통해 그 대답을 얻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과 장건의 승부가 아주 오래전 두 무인이 가졌던 의문의 대답이 되는 것이다.
문사명은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스승님…… 어쩌면 제가 스승님을 실망시켜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언강이 그런 문사명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문사명이 입술을 깨물고 어렵사리 얼굴을 들었다.
“제자, 오늘 장 소협과 겨루게 될 것 같습니다.”
문사명의 표정에서 수치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적인 투지가 함께 느껴졌다.
문사명은 장건이 내공을 잃어 제대로 무공을 펼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승부를 낼 셈인 것이다.
윤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라면 마땅히 그리하거라. 네게는 너의 길이 있으니 강요하지 않으마.”
“……죄송합니다.”
“하나, 확실히 알아 두거라.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긍지 높은 무인으로서 옳다고도 정당하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문사명이 다시금 부끄러움을 떠올렸다.
그런데 돌연 윤언강이 문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명아.”
“예, 스승님.”
이상하게 어깨에 올린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문사명이 의아한 눈으로 윤언강을 보았다. 윤언강이 짐짓 이를 갈며 말했다.
“이겨라.”
“네?”
“옳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게 낫지 않겠느냐?”
문사명은 놀라서 윤언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절대 이런 말을 하던 사부가 아니었다.
윤언강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나 문사명을 아끼던 윤언강인데, 지금 순간에는 ‘지면 죽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사명은 흠칫 놀라 고개를 떨구었다.
“싸우게 된다면 지지 마라. 알겠느냐?”
“예, 예. 스승님…….”
문사명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어쨌거나 남궁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이번 한 번뿐이다. 내 평생에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마지막 한 번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문사명은 전력을 다할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하는 일이니 절대로 느슨하게 하지 않을 셈이다.
필생의 각오와 함께 투지가 끓어올랐다.
‘하나,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문사명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 ☆ ☆
우내십존이 악을 쓰며 일을 끝낸 탓에 생각보다 벌레 잡는 일이 빨리 끝났다.
“하면 잘하면서 왜 안 하려고 하시는지를 모르겠네.”
장건은 기지개를 쭉 폈다. 덕분에 편하게 구경만 해서 그런지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장건도 내공을 다 써버렸으니 적잖은 대가를 치른 셈이다.
“기껏 아침 잘 먹고 이게 뭐람? 배가 허해서 죽겠잖아. 아, 배고파.”
꼬르륵. 꼬르르륵.
배가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요동을 쳤다.
“좀 참아. 그런다고 어디 하늘에서 밥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니?”
장건은 아랫배를 툭툭 치며 달랬다.
대환단과 독정의 영향으로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단전이었다. 때문에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공기 중에 있는 적은 기를 먹어 그만한 양을 채우긴 생각보다 요원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흐느적거리는 장건의 걸음은 평소하고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장건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외원을 서성대는데, 멀리서 제갈영이 달려왔다.
“오라버니!”
“영아?”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구!”
제갈영이 쪼르륵 달려와 장건의 팔을 붙들었다.
장건의 몸이 휘청거렸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했다.
“어어?”
제갈영도 놀랐다.
“왜 그래?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맞아. 딱 그런 기분이야.”
장건이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참, 이따가 비무한다며?”
“어? 그걸 어떻게 알아?”
“모…… 모…… 뭐였더라. 그런 사람이 와서 나한테 비무의 참관인이 되어달라고 했어.”
“정말?”
“응. 그래서 이따 가려고 했지. 뭐라도 좀 먹고 나서.”
“그랬구나.”
제갈영이 입에 손가락을 올리고 볼을 부풀렸다.
“난 시간이 좀 남길래 오라버니한테 무공 좀 봐달라고 그럴라 했는데.”
“나한테?”
“예전에 무공 봐주기로 한 거 잊었어? 잠깐만 좀 봐 줘. 상대가 만만치 않거든.”
“움…… 하지만…….”
장건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배고파.”
무공을 봐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꼬르르르륵!
장건의 뱃속에서 천둥번개가 쳤다.
제갈영은 깜짝 놀랐다.
“배 정말 많이 고파?”
“응. 죽을 것 같아.”
“세상에…… 난 배에서 그렇게 큰 소리 나는 거 처음 들었어.”
“괜찮아. 도와줄게.”
꼬르륵!
제갈영이 난처한 얼굴로 장건을 보았다.
“별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저녁 공양까지만 참으면…….”
장건은 말을 하다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공양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후우우.”
“안 되겠다. 오라버니는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 난 내가 알아서 해야지 뭐.”
“상대가 만만치 않다면서?”
“웅…… 그렇긴 해.”
“그런데 왜 비무를 하자고 했어. 안 될 거 같으면 하지 말지.”
“걔가 우리 집안을 막 욕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참어?”
제갈영이 씩씩했다.
“누군지 몰라도 심보가 못됐나보다. 왜 남의 집안을 욕하지?”
“나도 몰라. 나한테 무슨 앙심이 있는지.”
꼬르르륵.
제갈영이 울상을 지었다.
“히잉. 아무래도 안 되겠다. 빨리 뭐라도 먹으러 가.”
“뭐 있어야 먹지.”
“어휴! 진짜 처음 볼 때나 지금이나 거지같다니까.”
“나 거지 아냐.”
“만날 배고파 하니까 거지지!”
“아니라니…….”
꼬르륵!
장건이 입을 다물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을 하니 배가 더 고파지는 것 같았다.
장건은 이제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얀 쌀…… 파란 채소…… 빨간 열매…….”
제갈영은 장건이 불쌍해서 안쓰러웠다.
“어휴. 어떻게 먹을 걸 생각해도 다 시시한 것들뿐이람. 진짜 왕 불쌍해. 그냥 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제갈영은 버티려는 장건의 등을 떠밀었다.
“나 살자고 낭군님을 죽일 순 없잖아. 내가 찾아주고 싶지만 나도 오랜만에 무공 연습해야 돼. 이따가 잊지 말고 오기나 해.”
“으, 응.”
“먹을 거 얻을 데는 있고?”
장건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 있긴 있어.”
“그래, 그럼 빨리 가. 길에서 굶어 죽지 말구.”
“알았어. 이따 봐.”
장건은 비척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장건의 뒤를 바라보며 제갈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꼭 병든 강아지 같다. 배고프다고 사람이 어떻게 저 정도까지 된담?”
그러나 장건을 보는 건 제갈영뿐만이 아니었다.
장건이 어떤 상태인지 몰래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남궁상과 황보윤이었다.
“정말인데?”
“그러네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 보니 내공을 다 쓴 정도가 아니라 내상을 입은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검왕 어르신께서 그 정도도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누이도 지금 보고 있잖소. 저건 꼭 다 죽어가는 노인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소.”
“움…… 저도 그렇긴 해요.”
“어쨌든 우리로선 잘된 노릇이구려.”
“걷지도 못할 정도면 뻔하겠죠.”
남궁상과 황보윤은 눈까지 빛냈다.
“이길 수 있겠소.”
“이길 거예요! 그래서 남궁 오라버니의 명성이 전 강호에 자자하게 퍼질 거예요.”
황보윤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남궁상도 한결 자신감에 불타는 얼굴을 했다.
“힘냅시다!”
“힘내요, 우리!”
☆ ☆ ☆
문사명은 종유를 찾아갔다.
종유는 외원의 한 전각 처마의 그늘에서 백리연을 비롯한 다른 청년들과 함께 있었다.
“소림에선 아직입니까?”
“그런 것 같소.”
“나 원 참. 그까짓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당연히 우리 종 대협의 차례가 먼저잖습니까.”
“그러게 말이지. 소림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안 그렇습니까, 소저?”
백리연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청년들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것 같군요.”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학사 이병은 종유와 백리연 몰래 한 청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가 이병에게 가까이 가 귓속말을 했다.
“며칠 안으로 연락이 올 것이오.”
“잘 됐군. 어차피 종 대협은 글렀소.”
종유는 계단 가에 앉아 으득거리며 손가락을 꺾고 있었다. 우내십존까지 끼어들어 마음이 초조한 모양이었다.
“음?”
날카로운 살기!
종유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한 청년이 그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청년들도 문사명의 존재를 눈치챘다. 문사명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어서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문사명은 백리연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종유의 바로 앞까지 와 섰다.
종유는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삐딱하게 올려 문사명을 노려보았다.
저릿한 살기가 두 사람의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백리연과 청년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어람봉에서 두 사람 간에 있었던 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종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을 것도 아니고, 사과나 인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닌 듯하니…… 필시 한판 붙어 보자는 것 같은데.”
문사명이 사나운 기세를 감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 사이에 해결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청년 중의 누군가가 빈정대듯 말했다.
“나 참. 그러다가 안 되면 또 사부를 불러올 거면서, 무슨 잘난 척은…….”
문사명이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찔끔 놀라면서도 물러나지 않고 입방정을 떨었다.
“아, 내 말이 틀렸소? 사부를 믿고 이러는 거면 알아서 기어줄 테니 으스대지나 말란 말요. 속이 다 메스꺼워 죽을 지경이니까.”
“개인적으로 온 것이오. 사부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소.”
“말은 잘하지. 말은…….”
문사명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렸다.
종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키가 거의 비슷해서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 그것도 좋겠지. 그렇잖아도 언제든 한 번은 붙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인데.”
종유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난 자네 말고 더 큰 대어를 노리고 있다네. 자네와 겨루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하려면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군.”
문사명은 슬쩍 입 꼬리를 들었다.
“내 장담컨대 지금이 아니면 장 소협하고는 다시 겨룰 기회도 없을 것이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나를 이기면 오늘내로 장 소협과 겨룰 기회가 생길 거라는 뜻이오.”
한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소림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문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한쪽 입끝을 올려 서늘한 미소를 담기만 했다.
종유의 눈이 찡그려졌다.
문사명이 허튼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검성의 애제자인 문사명을 상대하고 나서 다시 장건과 맞붙을 여력이 될까?
“흐음.”
종유가 잠시 고민하자 청년들이 아우성을 쳤다.
“종 대협! 없애 버려요!”
“허튼소리를 하는 놈을 가만 내버려 둘 겁니까?”
“저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면 추후 화산에 가서 따지면 되잖습니까!”
문사명이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소. 난 그저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오. 나중에라도 억울해하지나 마시오.”
청년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종유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를 이기고 나서 장건과 상대할 셈인가?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건가?’
어떻게 보면 문사명은 자신을 얕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유가 장건의 일초를 받아내지 못한 것을 아는 문사명이다. 종유와 직접 겨루어 봄으로써 장건과의 실력 차이를 간접적으로 가늠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사부 윤언강의 말에 따르면 장건은 내공을 거의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서는 종유와 먼저 싸우는 것이 옳다.
마침내 결심을 한 종유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약속을 지키게.”
“약속은 하겠지만, 종 대협이 장 소협과 상대할 일은 없을 것이오.”
“말이 많군. 어디서 할 텐가?”
“산문 밖 공터에서 이 각 뒤.”
“그러지.”
문사명은 대답을 들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청년들이 종유를 둘러싸고 마구 외쳐댔다.
“저런 건방진 놈을 가만 둬서는 안 됩니다!”
“검성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백리연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림에서 발표가 나지도 않았는데 장 소협과 싸울 수 있다고 장담하다니. 종 대협과 싸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그때 종유가 백리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저. 괜찮겠습니까?”
“네?”
“장담할 수는 없으나, 운이 좋다면 오늘 장건과 겨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일 제가 검성의 제자와 장건을 연이어 이긴다면…….”
백리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담담히 종유를 보았다. 종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힘 있게 말했다.
“이제 그만 소림을 떠나시는 겁니다.”
백리연의 마음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본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일이다. 장건이 그만한 인재가 되지 못한다면 당연히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백리연이 대답을 망설이자 청년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가고 일부가 한숨을 내쉬기까지 한다.
백리연은 살짝 고개를 털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나와 몇 년이나 함께 있어준 사람들이야. 이제와 갑자기 배신을 할 순 없어. 게다가…… 법당에서 있었던 일을 말 할 수도 없고…….’
어차피 장건과도 약속을 했다.
모든 승부에서 이기면 사과를 받아주기로.
만일 장건이 종유에게 진다면…….
‘어쩌지?’
백리연은 갈등했다.
“소저?”
“대답을 해 주시지요.”
청년들이 대답을 종용했다.
백리연이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제야 청년들이 환호했다.
“좋았어! 이제 소림을 떠날 수 있겠구나!”
“종 대협! 힘내십시오!”
“저희가 응원하겠습니다!”
종유가 백리연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이 종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대답은 했지만 백리연은 아직도 갈등하고 있었다. 더구나 아무래도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편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백리연은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