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75
제 8 장 사시 무공
팽탁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을 본 이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백리연을 추종하던 청년들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정문에서의 악몽이 떠올라 마치 자신이 당한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일부 청년들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장건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장건이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백리연도 비슷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뒤척이는 팽탁을 보니 자신도 그랬었을 거란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갈영만은 ‘역시 한 방밖에 안 되네.’ 하고 장건을 응원했지만, 남궁상과 모용전, 그리고 황보윤은 꽤나 놀랐다.
남궁상이 쓰러진 팽탁에게 가 살펴보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모용전과 황보윤을 보았다.
“맛이 갔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요? 힘을 쓸 수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분명히 제가 봤을 때는 그랬었다니까요?”
그러나 장건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할 말 안 할 말을 잘 가리지 못하는 남궁상이 장건에게 물었다.
“혹시 아프거나 힘들지 않소?”
“네? 전 아무렇지 않은데요. 저랑 비무 하시게요?”
“아, 나는…….”
뒤에서 황보윤이 남궁상을 부추겼다.
“해보세요. 어쩌면 이게 마지막 남은 기운을 짜낸 건지도 몰라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 있는 것도 고작일 거예요.”
“그,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까의 그 비틀거리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다. 짧은 시간에 기운을 되찾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팽탁이 누군가에게 한 방에 맞고 나가떨어질 정도로 실력이 없는 무인도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맞는다고 죽지도 않는데 겁쟁이처럼 웅크릴 필요가 없었다.
남궁상이 황보윤의 응원에 힘입어 앞으로 나섰다.
“한 수 부탁드리겠소.”
“예.”
남궁상은 팽탁처럼 되지 않기 위해 시작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검술을 펼쳤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장건의 기운이 남아 있다면 제대로 검술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한 대 맞고 뻗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본가의 가전 무공인 창천오검(蒼天五劍)이오!”
남궁상은 전력을 다해 초식을 펼쳤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붕(鵬)처럼 장건을 향해 검을 베어갔다.
그 찰나의 순간, 남궁상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맨손이니 이번 일초는 반드시 피하겠지. 우측에서부터 비껴서 검을 벤다면 반드시 내 왼쪽으로 움직일 거다. 신법이 빨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방(上方)을 밟으면서 양생구합(養生構合)의 초식으로 하단을 쓸어간다면 공세를 이어갈 수 있어. 그 다음에는 다시 창천오검의 두 번째 초식으로 연결하고…….’
그러나 남궁상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뭘 어떻게 했는지 몸이 쑥 잡아 당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자신의 검이 장건의 왼손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검날이 아니라 검면에 손바닥을 대고 있는데, 그쪽으로 자신의 내장이 쪽 빨려가는 듯했다.
장건은 태극경을 응용하여 검의 힘을 완전히 몸으로 흡수할 수 있는 수법을 익힌 것이다. 어지간한 고수의 검이 아니라면 모든 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어어?”
‘휘두르고 있던 검을 맨손으로 멈춰?’하고 놀라움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장건의 오른쪽 어깨가 흐릿해졌다.
어디서 뭐가 나오는지 남궁상은 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옆구리 부근에서 빵! 하고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 과하게 술을 마신 것처럼 하늘이 핑핑 돌더니 등에 딱딱한 것이 부딪쳤다.
‘당했나?’
아직 정신은 멀쩡하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왜 이렇게 졸리지? 갑자기 또 왜 이렇게 춥고…….’
누군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일어나요! 오라버니!”
한데 마치 속살을 후벼 파듯 자신의 몸을 잡은 손이 따갑게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아 황보윤이었지만, 남궁상은 아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만사가 귀찮아졌다.
“나 좀 그냥 내버려둬. 잡지 마…… 아프단 말야…….”
“오라버니!”
황보윤이 더 세게 흔들어대자 남궁상은 머리가 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버려 두라니까아? 에이씨!”
남궁상은 엎어진 채 그대로 몸을 데구르르 굴려서 황보윤에게 벗어났다.
탁.
머리가 나무 둥치에 부딪쳐서 골이 깨지는 듯 아팠다.
“아이 씨…… 부딪쳤잖아.”
그래도 두터운 뿌리에 머리를 대니 딱 베고 자기 좋은 듯했다.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나 잘 거니까…… 건들지 마쇼…… 음냐. 한 대 맞았으니 됐잖아.”
황보윤은 당황스러웠다.
남궁상이 갑자기 바보가 되었다!
뒤에서는 요란하게 ‘드르렁!’대는 코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팽탁이었다. 기껏 옆으로 들어다가 눕혀 놨더니 아예 곤히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상의 코에서도 쌔근대는 소리가 났다.
황보윤은 털썩 주저앉아서 망연자실하게 소리쳤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이게 무슨 비무야!”
모용전은 얼이 빠진 듯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왕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남궁호는 이번이 기회라고 몇 번이나 강조를 했다. 대충 장풍만 날려도 장건이 날아갈 거라면서.
물론 아직 모용전이나 남궁상은 장력을 허공에 날릴 수 있는 실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설마하니 검왕의 이목까지 속일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소은이 모용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공을 다 소진했다면서요. 진짜예요?”
“나, 나도 잘 모르겠소.”
“가서 도전해 봐요.”
“뭐, 뭐요?”
“그래야 확실히 알 거 아녜요.”
모용전은 화들짝 놀랐다.
장건이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니 용기가 생겨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멀쩡할 때의 장건은 우내십존과도 정면으로 맞설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왜요. 우릴 끌어들인 건 사실 모용 소협이었잖아요. 이제 와서 발뺌하겠다 이거예요?”
“…….”
“겁나요?”
“…….”
모용전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갈등했다. 무인이니 강자와 싸우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싸웠을 때의 얘기다.
팽탁이나 남궁상처럼 꼴불견이 되어 쓰러지면 얼마나 볼썽사납고 창피하겠는가! 팽탁은 갑자기 털이 북슬북슬한 배를 드러내고 벅벅 긁기까지 하고 있다!
‘젠장.’
모용전은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문사명 쪽을 바라보았다. 남궁지와 함께 서 있던 문사명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사명이 나서지 않는다면 장건을 제압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종유에게 고전한 문사명이 장건을 이기리란 법도 없었다.
모용전의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문사명이 모용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모용전이 기죽은 표정으로 물었다.
“미안하오. 대신 나서줄 수 있겠소?”
자존심도 다 버리고 물은 말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여럿 앞에서 꼴불견이 되느니 문사명에게만 창피한 게 낫다.
문사명은 장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한 가지.”
“한 가지…… 라니요?”
“한 가지만 알아낸다면 시도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소만.”
“그게 뭡니까?”
문사명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공격은 단조롭고 변화가 없소. 다만 상대의 힘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보이지 않는 시야의 시각지대에서 주먹을 뻗는다는 것이오.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나 그보다 더 문제는…….”
문사명이 미간을 더 찌푸렸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서 단번에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오. 팽 형의 경우에는 하복부였고 남궁 형의 경우에는 왼쪽 옆구리 부근이었소.”
“아……!”
모용전은 문사명의 말에 퍼뜩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장건은 자신의 힘으로 공격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소림의 정문에서 백여 명을 상대할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의 힘을 이용해 거꾸로 되돌리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종유와 상대할 때에는 그의 힘을 되돌리지 못하고 공격을 했다가 한순간에 지쳐서 헐떡대기도 했었다.
‘저러니까 내공을 쓰지 못해도 공격을 할 수가 있었던 거로군!’
대외적으로 장건은 문각의 백보신권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문각의 백보신권은 아니었다.
‘그래. 백보신권은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수법이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지금의 장건이 문각선사만큼의 내공을 보유할 수는 없었겠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인가? 하물며 내공이 부족한 지금이라면…….’
하나씩 장건의 무공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 듯했다.
아니, 적어도 지금 깨달은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용전은 문사명과 양소은을 번갈아보며 보란 듯 말했다.
“내가 상대해 보겠소.”
“진짜요?”
양소은이 놀란 듯 되물었다.
“나도 남자요. 책임은 지겠소. 그리고…….”
모용전이 문사명에게 고개를 짐짓 끄덕여 보였다.
“비록 내가 진다 하더라도 문 형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겠소.”
장건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다는 투였지만 사실은 모용전도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사명이 조언했다.
“어디를 공격하는지 알 수 없다면 눈을 보시오.”
“고맙소.”
모용전은 자신의 검을 들고 장건의 앞으로 걸어갔다.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비장한 모습이었다.
겁쟁이처럼 숨어 있다가 양소은에게 얕보이기 싫었다. 검이라면 모용전도 누구에게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용전은 별말 없이 검을 곧추세우고 기수식을 펼쳤다.
“이미 구면이니 별다른 인사는 하지 않겠소.”
장건이 모용전을 빤히 보았다.
제갈영을 끌어들여서 자신을 오게 한 사람이었다. 우내십존에게 당할 때는 좀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네. 그러세요.”
문파간의 복잡한 문제는 잘 모르지만, 제갈영과 소림을 곤란하게 만들려던 인물이다.
장건은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까부터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이런 건 딱 질색이야.’
화가 나면 몸이 긴장을 하게 되고 약간 흥분 상태가 된다. 장건은 숨을 가볍게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화가 난다고 무작정 화를 내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의 실전으로 깨닫고 있었다.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면서도 몸은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모용전은 장건이 낮게 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서 오해했다.
‘숨을 고르고 있군. 힘든가?’
그렇다면 좀 더 기운을 뺄 필요가 있다. 아니, 굳이 기운을 빼지 않더라도 지금의 모습이 자신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용전은 신중하게 발을 옮겼다.
천천히 장건의 왼쪽으로 돌면서 틈을 엿보았다.
그런데……
‘응?’
왼쪽으로 계속 돌고 있는데도 장건의 정면만이 보인다. 자신이 왼쪽으로 돌고 있으니 장건도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돌아야 정상인데 그러지 않았다.
발을 떼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장건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면만 보인다. 마치 둥그런 원형 기둥을 가운데 두고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나?’
모용전이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빨리 걷든 느리게 걷든 보이는 건 장건의 정면 모습이다.
옆에서 다른 사람과 비무할 때에는 몰랐는데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기이한 압박을 받는다. 말 그대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이상한 압박이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모용전은 식은땀이 다 났다.
뭔가를 하려 해도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 섣불리 해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크윽!”
모용전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가는데 문사명의 전음이 모용전의 정신을 일깨웠다.
『모용 형!』
모용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뿔사. 심계에 당할 뻔했다.’
그대로 공격을 했다가는 특이한 수법에 공격이 되돌려져 팽탁이나 남궁상의 꼴이 났을 터다.
‘하지만!’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모용전은 잠깐 멈칫 했다가 도움닫기를 해 대번에 거리를 좁혔다.
그의 손에서 검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분광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모용전은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일단 공격을 시도한 이상, 지금은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빛을 쪼개어 나눈다는 그의 별호처럼 모용전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장건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촤아악!
다른 이들에게는 장건이 검으로 만든 그물에 갇히는 듯 보였다.
허초와 실초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검에 몸 여기저기가 구멍이 날 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건 본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장건은 쏟아지는 검의 그물이 아니라 모용전을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장건은 모용전이 보이는 미세한 몸의 움직임에서 적잖은 불협(不協)을 느꼈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듯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의 움직임 전부가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모용전의 공격에는 실초가 없이 모두가 허초였던 것이다!
게다가 모용전은 장건의 사정권에 드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남궁상의 검을 맨손으로 가로막은 장건의 수법을 보았으니 힘을 뺀 허초라 하더라도 끝까지 뻗어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장건의 몸에 구멍을 낼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장건의 팔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검을 거두고 있었다.
촤라라락!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이 연신 울려 퍼질 뿐.
장건은 멀뚱히 서 있고 모용전은 혼자서 검무라도 추듯이 이리저리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윽! 허초임을 알아본 건가?’
장건이 움직이든가 피하기라도 해줘야 하는데 가만히 서 있으니 허공에 삽질을 한 병신이 되고 말았다.
“제법이오!”
괜히 한마디를 내뱉은 모용전이 다시 검광을 뿌려댔다. 오후의 햇살을 가득 머금은 백색의 검이 찬란한 검광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분광검 절초 광영신기(光影伸起)!
검광 때문에 검이 움직이는 궤적이 제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서 나타났는가 하면 갑자기 사라졌다가 오른쪽에서 검이 나타나 다리를 베어오기도 한다.
그래도 장건은 가만히 서 있었다.
검은 장건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며 눈을 현혹시키는 검의 움직임을 볼 필요도 없었다.
사람을 보면 된다. 사람을 보면 그가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있다.
모용전은 공력을 끌어 올리고는 있었으나 그 공력이 완연히 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검이 머리 위에서 뚝 떨어지고 있어도 모용전의 허리와 어깨는 이미 검을 회수하는 동작에 들어가 있다. 금세 검을 거둔다는 의미다.
피할 필요가 없다. 정말로 베려 했다면 더 힘을 주어 내리치는 동작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구별하기 힘든 극히 미미한 동작이지만 장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장건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용전은 미친 듯이 사방을 오가며 수십 번의 칼질을 해댔다.
“아이고…….”
“저런…….”
보는 이들도 왠지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모용전이 열심히 허초로 유인하고 있는데 장건이 속아주지 않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거의 분광검의 모든 초식을 허초로 사용하고 난 모용전은 기운이 쭉 빠졌다.
‘망할! 어떻게 한 번도 속지를 않냐!’
이쯤 되면 비무가 아니라 분광검법의 시연을 보여준 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가만 지켜보던 장건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하나 오히려 고민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장건도 처음이었다.
분광검은 수시로 검면을 뒤집으며 검영(劍影)을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게 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다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으니 검법이 무슨 소용일까?
아마 이십 년쯤 후라면 그런 단점까지 모두 보완한 무인이 되어 있을 테지만, 지금의 모용전은 그것을 깨닫기엔 너무 젊다.
‘빨리 좀 끝냈으면 좋겠는데…….’
장건은 이대로 모용전의 공격을 기다리는데 걸리는 시간과 자신이 나서서 빨리 끝내는 것, 어느 쪽이 더 이득이 될까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남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빨리 끝내자. 어차피 검술 구경도 다 했고.’
장건은 여러모로 자신이 선공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결정을 내렸다.
막 모용전이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뒤로 물러선 찰나였다. 어차피 장건이 꼼짝도 않으니 잠시 물러나 몸을 추스를 생각이었다.
한데 그때 딱 장건이 걸음을 옮겼다.
스―윽.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장건이 돌연 모용전의 앞에 나타났다.
“헙!”
눈 한 번 깜박일 동안에 거의 이 장 정도의 거리를 좁히고 나타난 것이다.
모용전은 반사적으로 검을 뻗으려 했다.
‘아, 아냐!’
멈칫!
모용전은 그 순간에도 장건이 일부러 자신의 공격을 유도한다고 생각했다. 단전이 비어 있어 내공을 쓸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공격을 맞아주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내가 당할 줄 알고?’
모용전은 가까스로 검이 나가는 것을 멈추었다.
과연 장건의 시선이 힐끗 검을 향하다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내 생각이 맞았다!’
모용전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장건은 열심히 독초를 주워 먹고 빈 내공을 채웠다. 딱히 내공이 부족하지 않았다.
장건은 모용전이 끝까지 공격하지 않자 별수 없이 금강권으로 모용전의 위기를 때리기로 했다.
힘을 되돌리는 것보다 금강권의 경력을 조절하는 게 장건에게는 더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건의 몸속 근육들이 비틀렸다가 질주하는 내공과 함께 풀어지며 나선형의 경력을 만들어냈다.
모용전이 눈을 부릅떴다.
동작은 보지 못했지만 장건이 공격하려 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어디냐!’
장건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을 공격해 상대를 쓰러뜨린다. 특히나 철비각 종유는 아예 장건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허공을 쳤는데도 나가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빠르게 들어오는 주먹을 보고 피한다는 건 내겐 무리다. 하지만 눈을 보면 정말 공격하려는 부위가 어딘지 알아낼 수 있어!’
명문 문파의 제자라면 당연히 안법도 가르쳤을 것이다.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한다거나 해서 공격의 기미를 감추는 것도 안법의 일부다. 어디를 공격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사소하지만 이 작은 행동이 명문과 삼류 문파의 차이를 가른다.
그러나 모용전이 노리는 건 정확한 부위가 아니었다. 단지 방향만 알아도 되는 것이다. 대충 잡아도 위아래, 좌우양옆 중 어딘지만 알아도 급한 대로 피할 수 있다.
사람인 이상, 혹은 삼사십 년쯤 강호에서 굴러먹은 무인이 아닌 이상, 미세한 눈의 움직임까지 조절하기는 어렵다. 하나 방금 전 장건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완벽하게 안법을 익히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모용전은 정신을 모아 장건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장건의 주먹이 아니라 눈동자만 뚫어져라 보았다.
흔들.
마침내 장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장건의 눈은 초점이 흐려지며 동공이 풀린 듯 넓어졌다.
‘지금이다!’
모용전은 털끝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장건의 눈동자에 완전히 집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건의 눈이 가운데로 몰렸다가 양옆으로 벌어져 쏠리는 게 아닌가!
‘헉!’
모용전은 경악하고 말았다.
‘사팔이냐!’
이래서야 자신의 몸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미 모용전의 정신은 하늘 높이 날아가 있어서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장건의 안법은 남들과 다른 데가 있다. 내공을 아끼기 위해 필요한 때만 잠깐씩 사용하는데,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사시가 되었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눈동자와는 상관없이 전체적인 시야를 한 번에 담기 때문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해도 모용전은 장건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몰랐을 터였다.
쩡!
이어 울리는 청명한 타격음.
모용전은 오른쪽 다리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에 이미 그는 허공에 떠 있었다.
공격을 보지도 못했고 시선으로 파악하는 것도 실패했다.
공중에 뜬 채로 모용전은 절망을 느꼈다. 위기가 파괴된 상태에서의 절망감이라 평소보다도 더 지독하게 감정이 북받쳤다.
‘이길 수 없다…….’
쿠당탕탕!
모용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어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현실에 울분이 치밀었다.
그것도 잠시.
곧 온몸이 나른해지며 만사가 귀찮아졌다.
‘이런 기분이었군…….’
자기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잠이나 한숨 자고 싶었다.
‘그래도 이런 데서 잠들 순 없는데…… 에이, 아무렴 어때. 졸립구나…….’
그런 모용전을 붙들고 문사명이 다그쳤다.
“모용 형!”
“으응…… 왜 그러시오. 졸려 죽겠는데.”
“무엇을 봤소?”
문사명은 심각했다.
모용전이 말을 할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을 봤냐니까!”
“졸린데…….”
“말하지 않으면 재우지 않겠소.”
“그럼 안 되는데…… 으음…….”
문사명이 모용전의 명문에 대고 내공을 불어 넣었다.
한순간 모용전이 기겁을 할 듯 놀라 눈을 뜨더니 모질게 한마디 외쳤다.
“사시 권법!”
모용전은 순식간에 까무러쳤다.
몸을 보호하는 위기가 없는 상태에서 남의 내공을 받으니 충격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문사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 사시 권법?”
더 묻고 싶었으나 모용전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알 수 없다는 뜻이군.”
모용전을 상대하면서 장건은 굳이 상대의 힘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공격의 방향을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모용전은 거의 얼이 나가 있었으니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모른다’였을 것이다.
문사명은 모용전의 상체를 안은 채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건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문사명에게 물었다.
“비무 할 거예요?”
문사명은 대답 없이 장건을 보기만 했다.
차가운 바람이 문사명의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이길 수 있을까……?’
장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내공이 바닥난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사부인 윤언강의 말도 사실과 다르다. 장건은 무려 검성의 이목을 속인 것이다.
문사명은 이를 악물었다.
‘호기로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종유와 상대하며 느꼈다.
장건의 수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그렇게 고전한 상대인 종유를 단번에 쓰러뜨린 장건이다. 백보신권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는 저 수법을 파훼할 수 없다면 자신도 마찬가지다.
장건이 생각을 거듭하는 문사명에 물었다.
“안 할 거면 저도 이제 그만 하구요.”
문사명은 씁쓸히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장건이 백리연과 제갈영의 환호를 받으며 돌아가는 뒷모습이 눈에 아프게 박힌다.
백리연을 따르던 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일부는 소림으로 가지 않고 아예 바로 산을 내려가 버리고 있었다.
문사명은 정신을 잃은 모용전을 내버려두고 남궁지의 앞에 가 섰다.
늘 무표정하던 남궁지가 조금은 놀랐다는 듯 문사명을 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
“부끄럽게도 아직은 내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소.”
남궁지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문사명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길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요. 하지만…… 장 소협의 무공은 그렇게 사정을 봐주는 무공이 아니구려.”
간혹 실력이 좀 떨어지는 무인이 목숨을 걸고 동귀어진으로 고수를 공격해 양패구상하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다면 고수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장건에게는 그런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장건이 가진 특이한 무공은 결코 동귀어진을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남궁지가 픽 하고 웃었다.
“사시 무공…….”
문사명도 처연히 웃었다.
“안법을 제대로 익힌 모양이오. 모용 형이 마지막에 검까지 거두고 집중했는데도 전혀 감을 못 잡았소.”
“제대로 익혔는지는…… 모르죠.”
미묘한 의미의 말이었다.
문사명이 마른침을 삼키며 어렵게 말했다.
“기다려 주겠소?”
“뭘요?”
“내가…… 훗날 당당하게 소저에게 돌아가는 그날을 말이오.”
“……글쎄.”
“반드시 돌아가겠소. 소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남궁지가 문사명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인형처럼 하얀 남궁지의 볼에 아주 옅은 분홍빛이 돌았다.
“그럼…… 떠나야겠군요.”
“난 곧 떠날 거요. 소저는…….”
“나도요.”
남궁지가 백리연과 제갈영의 사이에서 돌아가는 장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인연은……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차갑게 불어오는 겨울바람 사이로 아직 이른 봄의 따스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홍오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쩝쩝. 응?”
홍오는 입에 물고 있던 뭔지 모를 것의 잔존감과 더불어 느껴지는 독기에 깜짝 놀랐다.
“에퉤퉤! 이게 뭐냐!”
황급히 입안에 있던 것들을 뱉고 재빨리 운기행공을 해 몸의 독기를 수습했다.
내공이 깊으니 독에 심하게 중독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독기를 머금었던 모양이다. 안면이 다 얼얼하고 머리가 어질거렸다.
심한 독기에 노출되면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데, 정신을 잃은 동안 내공도 운용하지 못하고 독기가 깊이 침투해 버렸다. 급히 운기행공을 하긴 했으나 독기를 한 번에 다 몰아내지도 못했다.
“허어!”
홍오는 기가 찼다.
독차나 한 잔 마실까 하고 독초를 뽑으러 나온 게 아침이었다.
그런데 벌써 해가 중천을 넘어간 오후인 것이다.
그 사이의 기억은 까맣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어나니 독초를 물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 정도의 극독초를 물고 있으면서 내공도 운용하지 않고 말이다.
홍오는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 내가 치매라도 걸린 건가…….”
오성(悟性)을 극한까지 깨우는 고수들은 거의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해져도 내공은 남아 있으니 그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치매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때 홍오의 머리에 어렴풋이 어떤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르려 했다.
욱씬!
그 순간 머리에 지독한 통증이 왔다.
“크으윽. 내가 제천대성이라도 되었단 말이냐!”
홍오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흰 수염의 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냈다.
한데 스스로 한 말에 무언가가 자꾸만 연상된다.
“제천……대성?”
제천대성은 포악한 성격 탓에 삼장법사에게 금제가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뒤따라오는 이 통증은 마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설마……!”
홍오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딱히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무공에 발전이 없다.
우내십존이 주구장창 찾아오는데 그들에 관해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사부가 열반에 드는 모습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는 치매 현상까지.
통상적인 삶을 사는 무인이 겪을 일이 아니다. 일반인들보다 몇 배나 더 깊은 오성을 지닌 고수가 몇십 년쯤 지났다고 사부의 죽음까지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내게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던 게야!’
사부 생각을 하자 머리가 깨질 듯 더 아파왔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홍오에게는 확신을 주었다.
홍오는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 자신에 대해 관조하기 시작했다. 모든 내공을 활발히 돌려 전신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며 잊힌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이미 홍오는 정신줄을 놓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체내에 극독의 기운이 오래 머물고 있었다. 특히나 독초를 입에 머금고 있어 그것이 머리에 박힌 나라밀대금침술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쿨럭!”
홍오는 검게 죽은 핏덩이를 한 움큼 내뿜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빠드득!
홍오가 이를 갈았다.
흐리멍텅하던 두 눈은 일주일이나 굶은 야수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 정도에 당할 것 같으냐?”
울컥.
이번엔 선홍색의 핏덩이였다.
멀쩡한 피를 토했다는 건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만큼의 강한 금제가 걸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 이런 금제를 억지로 본인이 풀려 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크윽.”
홍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었다.
“음?”
문득 홍오는 주변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걸 알아챘다.
아침에 본 풍경이 아니다.
누군가 독초를 잔뜩 뽑아가고 빈자리를 교묘히 메워 놓았다.
“그놈이 또!”
자신의 텃밭을 어지럽히고 진법까지 펼쳐놓은 그놈이 왔다간 것이다!
홍오는 악에 받쳤다.
“이노오오옴!”
그놈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자신은 알아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어쩌면 그놈이 자신의 입에 독초를 우겨넣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까?
바보가 되어버린 자신을 조롱하는 그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오르는 듯했다.
이젠 더더욱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디 두고 보자.”
더 무리했다가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홍오는 더 세게 이를 악물었다. 눈빛은 더 매서워졌다.
자존심 하나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홍오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우습게 여겨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쿨럭.”
홍오는 세 번째로 선홍색의 피를 토하고 나자 오히려 기뻐했다. 자신이 점점 더 진실에 접근하고 있기에 금제가 반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지막지한 금제로구만.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내가 죽나, 네가 이기나!”
홍오는 극도로 정신을 집중해 하나씩 과거를 끄집어냈다.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 일이 벌어졌는지 시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어렸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다.
사부를 만나 소림에 들어오고 무공을 배우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공에 대해 좀 알게 되면서 사부와 의견 대립이 있었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강호행을 떠난 것도 기억한다. 강호행을 하며 윤언강을 제일 먼저 만났고 이후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 둘씩 지금의 우내십존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퍽!
관자놀이 부근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피가 흘러 내렸다.
“낄낄.”
홍오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웃었다.
통증은 지독했지만 그 통증이 홍오의 무시무시한 집착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로구만.”
하지만 그때의 일을 더 이상 기억하는 건 무리다. 이미 몸이 한계를 넘어서서 눈까지 먹먹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고 나면 다시 깨어났을 때 어떠한 금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홍오는 큭큭 대고 웃었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홍오의 눈이 빛났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