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0
제 4 장 고검(古劍)이 신검(新劍)으로
소림은 무림문파이며 사찰이다.
소림에는 정문의 거대한 일주문 우측으로 일반 향객들은 거의 들를 일이 없는 샛길이 있다.
샛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사마를 막는다는 천왕문(天王門)과 비슷하지만 좀 더 작은 금강문(金剛門)을 지나게 된다.
금강역사상이 선 네 개의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금강문의 안쪽은 커다란 법당 두 채가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무기를 지닌 무림인들이 반드시 들러야 할 해번소(解煩所)다.
뒷간을 뜻하는 해우소와 비슷한 명칭 탓에 보통은 병가(兵架)로 통칭하는 이곳은 무림인들이 무기를 맡기는 곳이다.
무인들이 손에서 무기를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나, 이를테면 무당의 해검지(解劍池)처럼 천하제일문파인 소림을 존중하기 위함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해번소에는 존중이란 말의 의미를 잊은 듯 행동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법당의 마당도 부족해서 금강문을 지나칠 정도로 늘어선 줄과 그 사이에서 풍기는 흉흉한 분위기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내원에서부터 해번소의 뒤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걷던 장건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걸음을 재촉하던 무자배 승려가 대충 대답했다.
“오래 기다렸으니 그렇지. 아침 공양 이후부터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으니까…… 저 중에 한 시진 이상 기다린 시주들이 반은 더 될걸?”
“그렇게 기다리면 저라도 짜증이 날 만하네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열심히 해야지.”
“네.”
새삼 부담감을 느낀 장건도 기운을 내기로 했다.
원익을 비롯해 소림승과 속가제자들은 장건을 보고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원익이 법당 밖에 마련된 탁자에서 명부를 뒤적이다가 말했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하다. 저기 법당 안을 보면 선반마다 번호가 적혀 있지?”
문이 활짝 열린 법당 안에는 무기가 잔뜩 걸린 선반들이 몇 열로 놓여 있었다.
“네.”
“내가 이곳에서 번호가 적힌 목패를 주면 그 번호에 맞는 무기를 찾아오면 된다. 선반 배열이 종류별로 나뉘어 있으니까 금방 익숙해질 게다. 위험한 무기도 많으니까 운반할 때 주의하고.”
“예.”
소왕무가 웃으며 장건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건아. 내가 너 안 오나 했더니 진짜 왔구나.”
“당연히 와야지.”
“그래. 친구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는 건 친구가 아니지! 그대가 와주어 본좌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네.”
소왕무의 과장된 장난에 장건도 웃었다.
소왕무가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앞에 있는 여기 법당에는 검과 도가 있고 저쪽 옆에는 그 외의 기문병기들이 있어.”
“그렇구나.”
원익이 대기하고 있는 소림의 제자들을 보고 손뼉을 딱딱 쳤다.
“자자, 다시 시작이니까 힘내자.”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다시 일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줄을 서고 있던 무인이 지친 얼굴로 원익의 앞에 와 목패와 증명서를 내민다. 무기를 맡기고 받은 목패와 무기 소지 증명서다.
원익은 목패를 옆의 승려에게 건네고 목패의 주인이 명부에 적힌 이가 맞는지 확인한다. 목패를 받은 승려는 병가의 관리장부에 번호를 기입하고 대기하는 승려들과 속가제자들에게 목패를 준다.
승려들과 속가제자들은 목패를 받아 병가에서 무기를 챙겨오고, 대신 목패를 그 자리에 걸어두는 식이다.
장건이 해야 하는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일 자체는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위험한 무기가 많으니 들고 나를 때 조심하기만 하면 되었다.
잠시 후, 순서를 기다려 장건도 목패를 받았다.
한 뼘만 한 크기의 목패에는 번호와 소림을 상징하는 용의 각인이 되어 있다.
“전(前) 을묘(乙卯) 십삼단(十三段).”
앞의 법당이 전이고 을묘는 선반의 순서, 십삼단은 선반에서 병기가 있는 위치다.
장건은 다른 이들처럼 성급히 뛰지 않고 가벼운 걸음으로 선반을 찾았다. 가볍게 걷고 있지만 급히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장건의 신법이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워낙 많은 무기가 걸려 있어 그런지 선반들에서는 심한 쇠 냄새가 났다. 그 가운데 비릿한 피 냄새까지도 느껴지는 듯했다.
“묘…… 십삼단이면…… 열하나, 열둘…… 이거구나.”
을묘 십삼단에 걸려 있는 것은 한 자루의 도였다. 옻칠을 한 향나무에 낡은 가죽을 두른 도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였다.
아마도 강호를 유랑하는 낭인이 들고 다니던 것 같았다.
장건은 무심코 도를 향해 손을 뻗다가 멈추었다.
“윽!”
장건의 얼굴이 질려 있었다.
“뭐, 뭐가 이렇게 더러워?”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어 보였다. 마치 오물통에 손을 넣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러운 것을 보면 깨끗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 장건이었지만, 이렇게 더럽다고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아까 건신동공 이후 생긴 미묘한 변화였다.
“아아…… 이런 걸 어떻게 들고 다니지?”
장건은 괜히 혼자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런 것을 그냥 건네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걸 계속 들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더러운 걸 깨끗하게 해 주면 좋아하겠지?”
그것은 장건의 생각일 뿐이었다. 무인들은 자기의 병기가 남의 손을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건은 무림이란 세계를 잘 몰랐다.
장건은 마침 큰 검을 품에 안고 옆을 지나던 대팔을 보고 물었다.
“대팔아, 여기 혹시 소도(小刀)나 끌 같은 거 있어?”
병기를 보관하는 곳이니 어쩌면 병기를 다듬거나 하는 도구가 있을까 물은 것이었다. 대팔은 그런 걸 왜 찾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턱짓으로 선반 끝 쪽을 가리켰다.
“아까 보니까 망치랑 뭐 이것저것 있던데, 왜?”
그때 밖에서 대팔을 보고 소리쳤다.
“기자(己子) 이단(二段)! 아직 멀었어?”
“아, 지금 갑니다요!”
대팔은 더 물을 새도 없이 황급히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장건은 낡은 도를 들고 선반 한쪽으로 가 도구 상자를 찾았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깨끗해지지?”
일단은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것이 보기 좋지 않으니 그것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건은 일단 가죽에 때가 타 거무죽죽한 부분을 소도로 떼어내고 도구 상자에서 사포(砂布)를 꺼내 도집을 문질렀다. 번질거리게 옻칠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고 하는 방법도 몰랐다.
사악 사악.
사포를 문지를 때마다 갈린 도집의 가루가 흩어져 내렸다. 군데군데 울퉁불퉁하던 도집의 겉면이 점점 매끈해졌다.
녹슨 금속 장식도 마음에 걸렸다. 녹을 벗겨내려고 사포로 문지르다 보니 금속 장식에 자잘한 흠이 패였다.
“윽!”
이대로 주면 남의 것을 망가뜨렸다고 욕을 먹을지도 몰랐다. 깨끗하게 정리해서 주는 것과 손상시켜 주는 건 다르다.
“에라 모르겠다.”
장건은 소도에 기를 집중했다. 오래전 검성이 맨손으로 사과를 깎아준 것이 기억났다. 장건이 크게 감명을 받은 사건이었다.
나무칼로도 사과를 깎았는데 녹슨 부분을 쇠칼로 잘라내는 일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소도에 어스름하게 기가 맺혔다. 장건은 정신을 집중해 녹슨 부분과 흠이 난 부분을 소도로 깎아냈다.
슥.
쇠와 쇠가 부딪치는 데도 거친 소리가 나지 않고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아, 된다.”
장건은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끌[銶]과 줄칼[?]까지 꺼내 들어 도집을 다듬었다. 다듬다 보니 도가 담겨 있는 것이 불편했다.
도의 주인이 자신의 도를 함부로 뽑은 장건을 봤다면 기절할 만큼 분노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장건은 병가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도를 뽑을 수 있었다.
스르렁.
도를 뽑은 순간 장건은 또 한숨을 내뱉었다.
“산 너머 산이구나.”
소유자가 나름대로 다듬은 듯했는데도 도의 날이 깨끗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보도(寶刀)나 명검(名劍)이 아니다 보니 오래 사용한 만큼 날이 닳고 낡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사람 피와 뼈가 닿으면 더 빨리 상하기 마련이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했지만 장건이 보기엔- 이도 좀 빠졌고, 도면(刀面)도 거칠거칠했다.
장건이 도구가 담긴 상자를 보니 숫돌과 검을 닦는 천도 들어 있었다.
빨리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장건은 덥썩 숫돌을 집어 들었다.
날이 있는 무기를 다룬 적이 없어서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숫돌로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장건은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로 도면을 밀었다.
카칵, 카칵.
물에 충분히 적시지 않은 맨숫돌로 갈다 보니 잘 되지 않고 힘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안 되네?”
장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검이나 도에 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임에도 숫돌에 기가 맺혔다.
사-악.
좀 전보다 숫돌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투명하리만치 얇게 벗겨져 돌돌 말린 쇳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이없게도 칼을 간 것이 아니라 아예 도면을 얇게 벗겨낸 것이다! 굳이 그럴 거면 숫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했어도 상관없을 터다!
어쨌거나 숫돌이 지나간 자리는 매끈했다.
장건은 마음이 확 맑아지는 듯했다. 더러운 것이 깨끗해질 때의 기분이란 새 무공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상쾌한 일이다.
“좋아. 이렇게 하면 빠르겠어.”
장건은 숫돌을 몇 번 움직이지 않고도 도를 새것보다도 더 말끔하게 만들 수 있었다.
장건은 번쩍거리는 도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낡고 지저분한 것을 정리하는 일은 언제 해도 즐거운 일이다.
한데 도를 들어 이리저리 훑어본 장건은 아직 뭔가 마음에 찜찜한 것이 남아 있다는 걸 느꼈다.
도가 너무 번쩍거렸다.
“우웅…….”
깨끗해진 것은 좋았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간 -혹은 깎은- 탓인지, 날이 지독할 정도로 바짝 서 버렸다.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넘치다 못해 지나쳐서 섬뜩할 정도다. 살짝 닿기만 해도 베일 듯하다.
“너무 위험할 것 같잖아.”
도라는 게 베기 위한 것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면 정도가 지나치다.
“깔끔하게 되긴 했는데…….”
장건은 도를 이리저리 들어 살피다가, 결심한 듯 숫돌을 도날에 수직으로 대고 한 번 쭉 밀었다.
사-삭.
도면이 아니라 날이 깎여나갔다.
“이러면 되겠지.”
장건은 흡족한 듯 도를 들고 웃었다. 날을 조금 깎아버렸지만 워낙 도신이 번쩍거려서 예기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건 좀 지나쳤나? 날이 너무…….”
장건이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체되자 밖에서 장건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을묘 십삼단, 아직 못 찾았냐!”
“지금 갑니다!”
장건은 도를 도집에 넣고 목패를 도가 있던 자리에 건 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의 소유자인 무인이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쥐어뜯으며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건이 도를 승려에게 보이고 무인에게 건넸다.
“여기요.”
장건이 도를 건네자 무인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무인이 관리장부를 든 승려에게 말했다.
“이건 제 게 아닌데요?”
“예? 그럴 리가요.”
무자배 승려가 장건에게 물었다.
“분명 목패에 적힌 자리에서 가져온 게 맞느냐?”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 가져왔어요. 그 자리에 목패도 두고 온걸요.”
“허어, 이런…….”
승려가 턱수염의 무인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지요. 본인 것이 아닌 게 확실합니까?”
“아닌 것 같은데…… 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줘 보십시오.”
무인은 도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손잡이의 문양이나 장식 같은 걸 보면 제 것이 맞는 것도 같은데…… 손에도 딱 맞는 걸 보니 감촉도 제가 쓰던 검이 맞는 것도 같은데.”
어지간한 삼류가 아니고서야 자기 병기를 못 알아 볼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무인이 도를 내밀어 보였다.
“이건 새거잖습니까요. 제 도는 아버지 대부터 써 오던 것이라 좀 오래된 것인데…… 보세요. 이건 장식도 번쩍거리고 칼집도 반듯하네요.”
무인은 다시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희한하네. 다시 보니 옻칠 된 자국이 오래된 것으로 보아 새것은 아닌데, 왜 이리 새것처럼 되었지?”
승려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병기는 무인에게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터라 뒤바뀌게 되면 큰 고역을 치를 수도 있다.
그때 장건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 제가 가져 오면서 좀 닦았어요.”
“응?”
“뭐라고?”
무인도 놀라고 승려도 당황했다.
남의 병기에 손을 대다니! 그것은 무림에선 거의 금기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그걸 천연덕스러운, 아니 천진난만한 얼굴로 닦아 왔다고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무인이 황당해하며 도를 흔들어 보였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남의 도에 왜 손을……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닦아야 헌 도가 이렇게 새것이 돼! 이거, 내 도를 잃어버리고 다른 걸로 바꿔친 거 아냐?”
“아녜요. 좀 낡아 보여서 일부러 깨끗하게 만들었어요. 음…… 마음에 안 드세요?”
무자배 승려가 끙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찡그렸다.
“사제, 이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다른 무인의 무기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역시나 무인의 세계는 어렵다. 장건은 풀이 꺾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해요. 너무 낡아서 조금 손을 본다는 게.”
턱수염의 무인이 도를 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뭐야! 내 도를 돌려달란 말이야! 도대체 내 도는 어디에 팔아먹고 이따위를 주는 거야!”
뒤에서 줄을 서 있던 무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림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먼.”
“그러게 말일세. 남의 무기를 함부로 다루다니, 쯧쯧.”
“소림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 문제겠군.”
해번소의 담당자인 원익에게도 난감한 일이다.
“하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턱수염의 무인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뭐야, 이게! 내 걸 원래대로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보상을 해주든지!”
무인은 소리를 지르면서 도를 뽑았다.
촤라랑-
“도대체 이따위 도를 어떻게 쓰라고 주…….”
하지만 도를 뽑아든 순간 무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헉!”
뒤에 줄을 서 있던 무인들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낮의 태양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도에서 휘황찬란한 광채가 나고 있었다.
촤아아아-.
야명주 같은 보석처럼, 도신은 새하얀 순백색의 광채를 내뿜어댔다. 눈이 시려서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아름답고 매끄러웠다.
오히려 삼류처럼 보이는 무인이 범상치 않은 도광(刀光)을 뿜어내는 도를 들고 있다는 것이 더 어색한 지경이었다.
“어…… 어어…….”
불평으로 가득하던 무인도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무인은 조심스럽게 도면을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뽀드득.
어찌나 도면이 매끄러운지 사기그릇을 문지를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기, 기름도 안 발랐는데!”
나중에 동백기름이라도 구해서 도를 닦으면 기가 막히게 멋진 광택을 낼 것 같았다.
낡아서 제대로 썰 수나 있을까 싶던 자신의 도였다. 겉모습이 많이 변하긴 했어도 자신의 것임은 확실했다. 그런데 정작 뽑아보니 이것은 단순한 검이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보도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인은 어벙벙한 얼굴로 장건을 보고 물었다.
“야, 약간 손을 보, 보았다고?”
장건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보니까 칼도 좀 지저분해 보여서…… 칼을 갈아봤어요.”
무인은 다시 입을 쩍 벌렸다. 도신을 바꿔치기한 게 아니라는 듯, 도신의 끝부분에 새겨진 문양이 그대로였다.
장건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멋모르고 무사님의 칼을 엉망으로 만들어서요.”
무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송하다니!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네?”
관리장부를 든 승려가 물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시주님의 도가 아닌 것이 확실하지요?”
무인이 화들짝 놀라며 도를 도집에 집어넣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건 제 도가 맞습니다. 제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 까지는 아니라고…….”
“아니, 저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도가 맞는데 저기 저분이 조금 손을 봤을 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제 도가 맞습니다.”
장건이 말했다.
“저분이 아니고요, 그냥 저는 장건이라고 해요.”
“헛! 장건? 소문의 그?”
이미 장건을 알아본 이도 있었지만, 무인은 전혀 장건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파는 뒤에서 흘러나왔다.
“장건?”
“장 소협이었다고?”
“허어, 역시나…… 낭중지추라더니. 병기를 다루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 정도로 날을 벼릴 수 있지?”
“부럽구만. 아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꽤 낡은 무기 같았는데.”
무인들이 바라는 최고의 사치는 바로 좋은 병기다. 좋은 병기를 위해서라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기도 한다.
다시 빼앗아 갈까봐 걱정이 된 듯, 무인은 도를 확실히 품에 갈무리했다. 이리저리 사람들의 눈치까지도 보았다. 어설프게 보물을 가지고 있다가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있어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 분.”
떨떠름하긴 하지만 본인이 좋다니 뭐 어쩔 수 있겠는가.
원익은 다음 사람을 불렀다.
차례가 된 무인이 원익의 앞으로 와 목패와 증명서를 내밀었다. 나이가 지긋한 무인이었다.
“험험, 이왕이면 제 것도 저 장 소협에게 손질을 맡겨보고 싶습니다만.”
적잖은 나이에 나선 것이 무안했는지 노무인은 헛기침까지 하고 있었다.
원익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걸려서…….”
“허허허. 몇 달 며칠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너무 심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꼭 장 소협의 손에 제 검을 맡겨보고 싶습니다.”
“허어…….”
원익이 슬쩍 눈을 돌려 뒤를 보니 줄을 서고 있는 무인들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무인이 왜 무인의 마음을 모르랴!
무인들에게 좋은 무기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다. 좋은 무기일수록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어 특별한 연이 닿아야 한다.
한데 지금은 뭔가 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희생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연이 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할 것이 뭐 있겠는가.
“우리도 좀 기다리지 뭐.”
“그러게. 생각해 보니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네그려.”
언제 불만을 표출했냐는 듯, 일부 무인들은 아예 자리에 편하게 앉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원익도 대충 가져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던 이들이 불만 없이 기다려준다니 다행스럽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괜찮겠느냐? 힘들 텐데.”
원익이 조심스레 장건에게 묻자, 장건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렇게 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 말에 노무인이 활짝 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더 잘하고 못할 것도 없네. 딱 저렇게만, 저렇게만 해주게나.”
“정말요? 딱 저렇게만?”
장건이 다소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노무인은 장건의 표정이 말하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신이 나 외쳤다.
“그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만큼만!”
☆ ☆ ☆
장건은 아예 법당 안쪽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병가에서 일하는 소림승들은 무기를 들고 기다렸다가 장건이 무기를 손질해주면 그것을 들고 주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무래도 그냥 가져다주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니 승려들의 입장에서야 귀찮기도 한 일이었다. 뭐하러 남의 무기를 손질해서 주나,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장건은 날만 벼리는 게 아니라 칼집까지 손을 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승려 하나가 장건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나? 날만 다듬어 주면 될 것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가 제일 지저분한데요. 날은 안 해도 검집은 해야 돼요.”
장건이 때가 탄 수술을 흔들어 보였다. 검집에 매여 있는 끈목에 달린 치렁치렁한 수술은 붉은 수실을 꼬아 만든 것인데, 오래되어 색도 변했고 꼬질꼬질했다.
옆의 승려가 말을 건 승려를 나무랐다.
“내버려 둬라. 괜히 말 시키면 더 오래 걸리잖아.”
“난 그냥…….”
승려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입을 다물었다.
장건은 다시 일에 열중했다.
수술을 대야의 물속에 담갔다가 힘주어 쭉 손으로 훑는다.
잿물을 쓴 것도 아니고, 두어 번 손으로 훑었을 뿐인데 표백이라도 한 듯 수술이 본래의 새빨간 색을 되찾았다. 심하게 말하면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듯하다.
“허…….”
장건의 빨래 솜씨가 나름 정평이 나있다고는 해도, 수술을 빠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사실 누가 수술을 닦을 생각이나 하겠는가? 매일 검집을 닦고 검날을 벼리는 부지런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장식에 달린 수술을 닦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을 터였다.
그런데 장건은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는 이들은 왜 장건이 남의 무기를 그렇게나 신경 써서 닦아 주는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장건은 날을 다듬어 주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더럽고 낡은 것이 보기 싫어 시작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장건은 검집의 고리 틈 사이사이에 끼인 먼지와 녹까지 소도로 깔끔하게 떼어냈다. 보는 사람이 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꼼꼼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누추한 초가집 같던 검집이 새것이 되었다.
장건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소유자인 노무인이 부지런히 검을 손질했었는지 검신은 꽤 깔끔했다. 하지만 피나 사람의 기름이 닿을 수밖에 없는 검은 아무래도 색이 변질되기 마련이다.
눈에 딱히 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검면은 약간 회백색에 노릇한 색을 띠고 있고 검끝의 코는 손상을 입어 슬쩍 부러져 있었다. 물론 장건이 보기에나 그러하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정성스레 잘 관리한 검이다.
장건은 숫돌을 들어 검면부터 싹 밀었다.
마치 검은 화선지에 흰 먹물로 일획(一劃)을 그은 것처럼, 숫돌이 지나간 부분은 새하얗게 되었다.
“허어!”
“이것 참!”
승려들의 입에서는 나오느니 황당한 웃음뿐이다.
무슨 숫돌로 그냥 쓱쓱 미는데 껍질이 벗겨지듯 퇴색된 부위가 밀려나가는 것이다. 한 꺼풀 벗은 검신이 뽀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전에 없는 광채를 선보인다.
몇 번 숫돌을 밀어 장건은 검면을 모두 하얗게 만들었다. 잘 보면 쇠 특유의 거무튀튀한 색은 맞다. 흰색이 아니다. 그런데 너무 반질거려서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무자배 승려들은 장건이 공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느꼈다. 운기하는 것이 아주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 왜 공력을 운기하는지는 몰랐다.
한 승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숫돌은 물에 충분히 적셔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래야 곱게 잘 갈리는데…….”
그러나 장건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가 없었다.
스윽- 스윽.
숫돌이 오갈 때마다 얇은 쇳조각이 대팻밥처럼 동글동글 말려서 떨어진다.
승려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제야 왜 장건이 숫돌을 물에 적셔서 사용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숫돌로 검을 가는 게 아니었어!’
‘이건 가는 게 아니라 숫제 깎아 버리는 거잖아!’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그 이전에 드는 궁금증.
어떻게 하면 숫돌로 담금질된 쇠를 깎을 수 있을까?
지켜보던 소왕무가 호기심에 남는 숫돌을 들어 옆에 뒹구는 놋쇠 대야에 대고 밀어 보았다.
끼이이이익-!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났다.
대야에는 당연히 긁힌 흔적이 남았다.
“아하하……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 죄송합니다아.”
소왕무가 사형들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승려들도 사실 물에 적시지도 않은 그냥 숫돌로 쇠를 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던 터라 소왕무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장건이 웃으면서 소왕무에게 말했다.
“당연히 그냥 하면 안 되고, 내공을 써야지. 너무 아끼면 안 돼.”
장건으로서는 최대의 조언이었다. 그러나 뭘 아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왕무는 투덜거렸다.
“숫돌을 들고 있는데 내공을 어떻게 쓰냐. 그건 너나 되는 거지.”
“아냐. 최소한으로 내공을 불어 넣어서 숫돌을 감싸듯 하면 돼.”
“아, 그건 너나 되는 거라니까?”
호기심이 동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다.
“어디 보자.”
무자배의 승려 한 명이 소왕무의 손에서 숫돌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는 공력을 운기했다.
장건의 말대로라면 장건은 검기와 같은 기운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고수들은 나뭇가지에도 검기를 불어넣고 지푸라기로 바위도 가른다 하지만, 숫돌에 검기를 넣는다는 것은 어딘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승려는 공력을 일으켜 숫돌에 내공을 불어 넣고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너무 약하게 내공을 담으려 하면 기운이 숫돌에 머물지 않고, 너무 강하게 담으면 깨질 게 분명하다. 당연히 승려가 좀 더 내공을 담자 어느 순간.
파삭!
숫돌이 깨져버렸다.
“음…….”
정말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검기를 쉽게 일으키는 고수라도 숫돌에 여기(礪氣)를 일으키는 건 못할 게 분명하다. 기는 대상의 형태에도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장건의 수법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이미 장건은 검의 손질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무시무시한 예기를 뿜는 검을 들더니 검날에 숫돌을 대고 가볍게 미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싹!
옆면이 아니라 날카로운 날에 수직으로 숫돌을 대고 가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기껏 잘 갈아놓은 날을 숫돌로 밀다니?
그러나 승려들은 이미 이상한 일을 현재에도 보고 있는 터라 그냥 그렇게 해야 되나 보다 하고 말았다.
여러 번 날을 숫돌로 밀어 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밀었다. 검은 여전히 생생한 예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예리해지면 검날이 상하기 쉬우니 살짝 날을 가다듬는 줄로만 알았다.
“다 됐어요.”
장건이 검 한 자루를 손질하는 데에는 고작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검은 새것이 되어 있었다.
“아아, 기분 좋다.”
장건은 검을 들고 뿌듯해했다. 원래도 어느 정도는 잘 손질되어 있긴 했지만, 낡은 고검(古劍)이 신검(新劍)이 되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장건이 보았을 때에나 그렇지,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신검(神劍)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무인이 자신의 검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그렁거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