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3
제 7 장 일촉즉발
우내십존 중 넷이 뿜어내는 기세에 무인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들을 향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관심이 홍오에게 집중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절로 굳어진다.
원호는 크게 당황하며 경계했다.
홍오에게 가진 우내십존의 원한은 작지 않다. 하지만 문각의 부탁에 의해 홍오를 내버려두기로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괜히 장건이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한데 왜 굳이 이제 와서?’
홍오를 향한 엄청난 살기의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실 원호가 느낀 것은 살기가 아니었다.
바위를 녹이는 용암보다도 더 뜨거운 투지였다. 그들에게 젊은 날의 홍오는 우상이면서 벽이었다.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목표이기도 했다.
그런 목표가 사문끼리의 협약에 의해 제지되어 버렸고, 심지어 홍오는 과거의 그와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체되어 있었다. 골골대는 골방의 늙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홍오는 달랐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예전의 기백을 되찾았다. 어지간해서는 미동도 않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클클클.”
풍진은 한 팔로 자신의 홀쭉한 뺨을 쓰다듬었다.
“저놈 눈빛 봐라. 소름이 쫙 끼치네.”
남궁호도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예전으로 돌아온 듯 보이는군. 무위도 크게 달라졌어.”
불타오르는 투쟁심을 감추지 못하겠는지 남궁호의 호흡도 적잖이 흔들리고 있었다.
풍진의 곁에서 허량이 한마디를 더했다.
“내 장담하는데, 저거 지금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대놓고 피를 볼 리가 없잖아!”
윤언강은 양쪽으로 갈라지는 무인들의 사이로 홍오를 향해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원호가 손을 들었다.
원우, 원전을 비롯한 각대 원주들과 나한승들이 윤언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주십시오!”
윤언강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잠시만 비켜주지 않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원호가 잔뜩 긴장한 안색으로 말했다.
“비록 과거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나, 이미 정리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지.”
“허면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저 한 가지만 물어보려 할 뿐이네.”
“죄송합니다만,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비키지 않겠다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윤언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나 윤언강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허락을 구해야 하는가!”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이다.
원호는 등골이 다 오싹했다.
파스스.
윤언강과 원호의 사이에서 먼지구름이 기이한 버섯 모양으로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흩어진다.
원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윤언강의 투지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곁에 선 각대 원주들 역시 마찬가지로 투지를 억누르려 애쓰는 모습이다.
원호가 절규하듯 외쳤다.
“검성께서는 본사와 화산의 약속을 저버릴 작정이시오이까!”
“그저 보겠다는 것일세. 오래된 벗이 갑자기 신수가 훤해졌는데, 어찌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웃고 있지만 윤언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파가 계속해서 원호를 흔들고 있다.
가슴이 떨린다.
‘이러면서도 대화만 하겠다고?
이미 혼란이라면 겪을 만큼 겪었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몰린 가운데 우내십존까지 엮인 일이다. 상황이 어디까지 번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경우 우내십존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소림의 전력을 쏟아 부어도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참아야 하는가!’
으드득.
이가 갈린다.
얼마나 소림을 우습게 보고 있으면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대대적으로 항의를 하고, 우내십존까지 함부로 행동하는 것인가.
심지어 검성은 대놓고 원호를 위협하고 있다.
이미 타인의 분탕질에 의해 몇 번이나 위기를 겪은 소림이었다.
지금 물러선다면 소림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우내십존 넷의 위협에 소림이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소림은 더 이상 천하제일이 아니게 된다.
‘소림의 존망이…… 내 손에 달려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설 수는 없다. 더 이상의 혼란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무언가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원호는 예전엔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존심을 굽히고 인내하며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소림은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원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겐 활불과 같은 온화함도, 뭇 사람들이 존경할 만큼의 인품도 없다. 소림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 원호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원호는 손에 든 계도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쥐었다.
모질게 마음을 먹은 원호가 일갈했다.
“거문불납(拒門不納)!”
청하지 않은 손님을 문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한마디로 원호는 우내십존의 위협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결정한 셈이다.
“지금 시각부터 해번소를 폐쇄하겠소!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 의한 강제조치임을 양해해주시오!”
그것이 원호의 최종 결정이었다.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사람을 다치게 해놓고 강제 폐쇄를 하겠다고?”
“적어도 해명이든 사과든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우내십존의 살벌한 기세도 견디기 어려운데 원호의 결정마저도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번소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강압적인 분위기와 살기가 계속해서 치솟았다. 소림이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매풍검 삼다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소림이 강호에서 큰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것은 그 공명정대함에 있었소! 하나 지금의 소림은 무뢰배들이 판치는 난전(亂廛)이나 다름없으니 그 위엄이 땅에 떨어진 터! 누가 대사의 말을 따르겠소이까!”
일부 무인들이 동조했다.
“맞소!”
“남의 무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항의하는 사람을 두들겨 팼으니, 이건 행패요!”
“오만함도 이만한 오만함은 없을 거요!”
우내십존을 등에 업은 그들은 더욱 더 자신감을 얻고 언성을 높여갔다.
홍오가 대노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입 닥쳐라! 너희들이 감히 본사를 우습게 보느냐!”
원당과 원림이 홍오를 겨우 붙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상황만 더 악화될 뿐입니다.”
홍오의 눈에 붉은 기가 맺혔다.
“너희들은 배알도 없느냐! 저놈들이 우리 소림을…… 이토록 우습게 보고 있는데…… 그런데도 참을 수 있다고? 그게 소림의 제자로써 할 말이냐!”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은 홍오의 탓이 가장 크지 않은가!
그러나 홍오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저 소림이 업신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에만 지독히도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것이 뭇 무인들을 더욱 성나게 했다.
“우리가 언제 소림을 무시했다는 거요!”
“우리를 무시한 건 소림이 먼저요!”
여기저기서 항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원호가 사자후(獅子吼)로 무인들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일 각의 시간을 드리겠소! 불만이 있는 분께는 차후에 응당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드릴 것이나, 지금은 빈승의 말을 따라주셔야 할 것이오!”
크어어엉-!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 원호의 음성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드드득, 드드득.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바닥이 흔들린다. 뭇 무인들을 위축시키는 강력한 음공이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등줄기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이 정도만 해도 원호는 많이 양보한 셈이다. 당장의 혼란이 지나면 후에 피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조한 것이다.
그러나 검왕 남궁호가 끼어들었다.
“소림은…… 강호의 동도들이 왜 이토록 흥분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일세.”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남궁호의 목소리는 따스한 훈풍(薰風)처럼 해번소를 감싸 안았다. 묵직하게 맴돌던 원호의 사자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호가 분노의 눈길로 남궁호를 쳐다보았으나 남궁호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홍오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는데 내 이런 기회를 놓칠 듯싶으냐?’
잠시 때를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너무 빨리 왔다. 남궁호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힐끗 곁눈질로 윤언강을 보니, 그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 번 뜀박질에 소림과 홍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기회가 온 것임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것은 화산에 보내는 우리 지아의 혼수품일세. 더불어 못난 상이 놈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지.’
남궁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드럽게 외쳤다.
“억울한 일이 있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넘어가서야 강호의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 자, 나 남궁호가 보장하겠네. 강호의 동도들은 허심탄회하게 사정을 털어놓아 보시게.”
그 한마디가 불씨를 지폈다.
소림의 제자들은 섬뜩해졌다.
지금 이곳은 소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호는 자신이 주인이라도 된 양 행세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절로 사그라질 불꽃을 일부러 타오르게 만든다.
당장이야 해번소를 폐쇄해서 기분이 상한다 하더라도 돈을 돌려주고 보상과 함께 사과를 하면 사라질 혼란이었다. 그런데 그런 원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소림을 노리고 있다!’
홍오를 빌미로 소림을 억누를 생각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남궁호의 행동은 그것 외에는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내십존 넷이 동시에 나타날 리는 없는 것이다.
무인들이 외쳤다.
“역시 검왕께서는 공명정대하십니다!”
“검왕께서 저희의 억울함을 알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원호는 이가 부서져라 갈았다.
‘검왕!’
독선이나 검왕이나, 심지어는 검성조차도 마찬가지다. 호시탐탐 송곳니를 드러낼 기회만 노리고 있더니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원호가 웅성거리는 무인들을 무시하고 공력을 끌어 올렸다.
“본사의 제자들은 듣거라-!”
구우우웅!
다시 한 번 심후한 내력이 해번소를 뒤흔들고, 기왓장이 달그락거리며 떨렸다.
“지금부터 해번소에 계신 모든 시주 분들을 금강문 밖으로 모시어라.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본사의 적으로 간주하여 목숨을 걸고 거지(拒止)하도록 하라!”
무자배 승려들과 나한승들이 곧 일렬로 원호의 뒤로 늘어섰다. 목숨을 걸라는 말에 모두가 긴장으로 경직된 얼굴이다.
이제는 날이 없어진 무기를 원래대로 갈아주고 돈을 돌려주는 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금강문의 기와지붕 위에서 풍진이 작은 미소를 띠었다.
“제법?”
원호의 공력이 생각보다 높다. 그 뒤로 선 소림승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저들 30여 명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를 상대할 기세다.
허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부족하군.”
그 말의 의미를 풍진도 알아들었다.
“그래.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이만큼 흥분시킬 수 있는 놈은 딱 하나 뿐이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는 확인해봐야지.”
“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땡중 놈이지만, 그래도 소림의 정심한 내공심법을 익혀놓고 혈기(血氣)라는 건 말이 안 되지.”
홍오의 괴팍함과 엉뚱함을 잘 알고 있는 풍진과 허량이다. 남궁호와 윤언강과 달리, 둘은 정치적인 속셈보다 홍오에 대한 원한이 더 크다.
무슨 수로 홍오가 다 죽어가다가 딴 사람처럼 강해졌는지, 왜 정종심법을 익혀놓고도 눈에 혈기가 보이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홍오로 인해 일 갑자가 넘는 세월을 인내하며 살아왔다. 그들 개개인에게 있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소림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설사 소림이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알아낼 것이다.
한 차례 원호의 경고가 있었지만 우내십존과 마찬가지로 다른 무인들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우내십존이 그들의 뒤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내십존은 소림의 편을 들지 않을 분위기였다.
소림승들이 전부 원호의 뒤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는 가운데, 속가제자 중에 소왕무와 대팔, 그리고 장건만이 아직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
대팔의 속삭이는 물음에 소왕무가 이를 질끈 물었다.
“원호 사백님 말 못 들었어? 목숨을 걸고 막으라시잖아.”
“이런 젠장. 우리가 무슨 수로? 검성이나 검왕이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우린 다 죽을 텐데?”
“넌 소림의 제자가 아니냐? 소림의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소림의 위기를 보고 물러서면 안 되는 거야. 목숨을 버려서라도!”
장건은 둘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냐, 임마.”
“나 때문이 맞아. 내가 괜한 짓을 했기 때문이야.”
소왕무가 말했다.
“먼저 원한 것도 저들이고, 자기 무기 상태가 어떤지 몰라 본 것도 저들이야. 넌 해달래서 한 건데, 네게 무슨 잘못이 있어?”
“무림인들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내가 보기 싫었어도 그냥 줬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장건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빌고 끝내면 안 될까?”
“그런다고 이 지경이 된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랬다가는 넌 물론이고 소림까지도 얕보이게 된다고.”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소림이 얕보여?”
“자존심 때문이지.”
소왕무가 결연한 얼굴로 설명했다.
“일단 무력시위가 시작되면 누가 먼저 잘못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난 이해 못하겠어.”
“쉽게 생각해봐. 예를 들어…… 대팔아.”
“응?”
“넌 만약에 우내십존 중에 검성이나 검왕이 너한테 뭔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따질 수 있겠어?”
대팔이 눈을 부라렸다.
“미쳤냐? 누구 뒈지는 거 보고 싶어서?”
소왕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건에게 말했다.
“봐. 이런 거야. 검성이나 검왕은 워낙 절대적인 고수이기 때문에 함부로 따질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저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무작정 우리의 잘못으로 몰고 있어. 우내십존이 그랬다면 절대 못 그랬을 거야. 열 받아도 속으로만 삭였을걸?”
소왕무가 맺힌 것을 토로하듯 말을 이었다.
“우릴 우습게 보고 있지 않다면 당연히 정중하게 나왔어야 해. 그래서 홍오 태사백조께서 그렇게 열이 받으신 거지.”
장건은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괜히 사람들이 명성을 쌓으려고 하는 게 아냐. 명성은 곧 강호에서의 위치와 직결되는 거거든. 하물며 우린 천하제일 소림의 제자가 아니냐!”
적이 흥분한 소왕무에게 장건이 물었다.
“그럼 넌 홍오 대사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너 지금 장난하냐?”
“응?”
“홍오 태사백조님은 너 때문에 나서신 거기도 해. 그런데 네가 홍오 태사백조님을 이해 못하겠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되냐?”
“나…… 때문에?”
“그래. 어떻게 보면 네가 먹을 욕을 홍오 태사백조님께서 대신 듣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소왕무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원익이 한 손으로 장부를 들고 소왕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말이 맞다. 소림의 제자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가 알아야 해. 무자배 아이들은 강호에서 수없이 험난한 일을 겪었다. 소림이…… 좀 더 힘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강호에서는 얕보이는 순간 먹잇감이 된다.”
원익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원호 사형이…… 정말로 큰 결심을 했구나. 이제야 정말 대사형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어.”
검성과 검왕, 두 거인과 동시에 대치하고 있는 원호의 등을 보며 원익은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나 장건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이 되질 않았다.
오늘의 홍오는 어딘가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비뚤어지고 괴팍한 정도가 심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지만 ‘비정상’적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들 홍오의 편을 든다. 매일 반감만 표하던 원호마저도 홍오를 감싼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장건은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복잡하다.
분명 처음에는 장건의 잘못으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소왕무와 대팔은 ‘우리는 소림의 제자다! 죽어도 좋아!’라는 말을 외치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 한다. 둘의 모습을 보는 장건은 더 심정이 복잡하다.
‘나만 다르게 생각하는 건가? 내가 원익 대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강호의 험난함을 몰라서 그런가?’
원익이 장건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따스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 거다. 사실 원호 사형도 네가 그런 일들을 겪을 때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 하셨어. 말을 하지 않으셨을 뿐이지.”
장건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장건 스스로도 험한 일은 겪을 만큼 겪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장건은 그것이 소림이 우습게 보여서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랬어도 풍진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 강호에는 좋은 사람이란 없는 법이야. 친한 사람은 있어도 절대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문뿐이지.”
원익이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아무리 우내십존이라 하더라도 남의 문파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렇게 자존심이 짓밟히느니 죽음으로 대항하는 것이 옳아. 사형도 이제 그것을 깨달은 것 같다. 내 오늘 실로 수십 년 만에 공력을 쓰게 되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무공에 정진할 것을.”
무공에는 뜻이 없는 원익조차 전의를 불태운다.
죽음이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원익의 모습에 장건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해번소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이다. 강호의 무인들, 원호, 우내십존 중에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니 언제 싸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고민하는 장건에게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건아. 내 말을 잘 듣거라.』
‘할아버지?’
불목하니 노인 문원의 전음이다.
『지금은 혼란스러울 것이나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게다.』
장건은 아직 전음을 보낼 줄 몰라 답답했다. 더구나 문원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장건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임으로써 모르겠다는 표현을 해 보였다.
『싸움을 멈추고 싶으냐?』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잘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지.』
장건은 강호의 사정에 어둡기도 하지만 우내십존이나 무인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만일 싸움이 시작된다면 장건 역시 소림의 제자로서 마구잡이로 싸워야 한다고만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어요.’
장건이 입모양을 벙긋거리는데 문원은 기가 막히게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네가 주의할 것은 저 네 명의 나쁜 노인네들뿐이다. 다른 이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문원은 우내십존보다 더 나이가 많은데 ‘나쁜 늙은이’라고 하니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코 장건은 웃을 수 없었다. 아마도 문원에게는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일 터였다.
『검성과 검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우리 소림을 노리고 있는 터라 일에 가장 크게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과거의 약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홍오에게는 손을 쓸 수가 없어. 아마도 싸움이 난다면 본사의 승려들을 상대할 게야.』
장건은 조심스럽게 서로 반대편에 있는 윤언강과 남궁호를 살펴보았다.
『무당은 타 문파의 일에 개입하길 꺼리는 편이나, 환야가 홍오에게 악감정이 있으니 싸움에서 배제할 수 없다. 아마도 은근슬쩍 끼어들 확률이 높지.』
장건은 문원의 말을 되새기며 허량을 살폈다. 허량은 지금의 상황을 즐기듯 편안히 웃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청성파의 풍진이야. 그는 이미 청성을 나오기로 하여 거리낄 것이 없다.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홍오에게 칼을 들 게다.』
그렇다면…….
장건은 기와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은 풍진을 쳐다보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맹렬한 기세를 풍기고 있다. 우내십존 넷 중에서 가장 투지를 보이는 이도 바로 그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겠어요.’
부친인 장도윤과의 약속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장건 혼자 몸을 내뺄 수도 없는 것이니 말이다.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홍오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 것 같아. 나는 그것을 알아보러 가야겠다. 곧 방장이 올 테지만, 그때까지는 부디 조심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문원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홍오 대사님께……?’
어딘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원마저도 그것을 알 정도인지는 몰랐다.
장건은 고개를 돌려 홍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홍오의 눈에서 줄기줄기 핏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홍오 대사님!’
홍오의 시선은 풍진에게 닿아 있다. 풍진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홍오에게만 살기를 쏘아 자극하고 있었다. 홍오가 그것을 참지 못하고 혈기가 끓어오른 것이다.
홍오는 한순간 폭발하듯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홍오를 제지하고 있던 원자배 승려들이 튕겨져 나갔다.
“너 이놈!”
홍오의 손가락이 풍진을 향했다.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로 풍진을 노려보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덤비고 싶으면 덤벼라! 예전처럼 얻어터지고 싶으면 그렇다고 하든지! 당-장- 내려오너라!”
“큭큭큭. 그거 좋지.”
풍진의 눈매도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드디어…… 네놈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겠구나! 이 몸께선 네가 예전으로 돌아오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단 말이다!”
풍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뛰었다. 사람 키의 두 배도 넘는 금강문의 지붕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폴짝 땅으로 내려선다.
물길이 갈라지듯, 금강문의 앞에서부터 무인들이 옆으로 쭉 비켜섰다.
“클클클. 이제야 홍오 네놈을…….”
홍오 역시 그 앞쪽으로 풍진을 맞이하듯 걸어갔다.
“같잖은 놈. 흐흐흐흐.”
원호가 홍오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원호는 굳건하게 막고 서서 비키지 않는다. 홍오의 눈에서 혈기가 흘러나옴에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비키지 않으면 죽는다.”
음산한 홍오의 목소리에 원호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손을 쓰는 것은 저들이 먼저여야 합니다.”
“뭐?”
“소림을 위해서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도발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결연한 원호의 어조에 홍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림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소림을 위해서라는 한마디가 거칠 것 없이 분개하던 홍오를 잠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홍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소림뿐이다. 소림을 위해 굉목도 버렸다. 소림을 위해서라는 말이 홍오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좋다. 조금만 참아주마.”
홍오는 여전히 뻘건 혈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용케도 참아냈다.
“겁먹은 거냐?”
“퉤!”
풍진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도발했지만 홍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풍진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지켜보던 무인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누군가 먼저 손을 쓰기 전에는 결코 타오르지 않을 불이었다.
이대로라면 지지부진하다가 마무리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억울함은 어찌 풀 것인가!
하다못해 자신들의 병기를 못 쓰게 만든 장건에게 따지지도 못하게 한 홍오가 우내십존의 손에 쓰러지는 모습 정도는 보아야 속이 풀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때.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으아아아아-!”
엄청난 고함소리가 해번소를 진동시켰다.
우내십존을 비롯해 모든 무인이 경악할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꽈르릉-
온 산을 찢어발길 듯한 우렛소리가 나며 하늘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내린다.
“내 천룡검을! 본문의 신검을 이렇게 만든 놈은 당장 나와라! 죽여 버릴 테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가뜩이나 팽팽하게 긴장이 감돌던 때다.
“장-건! 장-거-언!”
갑작스레 괴한이 장건의 이름을 부르자 소림승들은 한껏 긴장했다. 목표가 장건인 듯하다.
장건이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죽이겠다는 듯이 하늘에서 무지막지한 공력을 폭발시키며 떨어져 내리는데, 이를 그대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긴나라전의 원상이 곤으로 그를 마주해갔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던 상대는 왼손으로 검을 거꾸로 잡아 등 쪽으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으로는 장을 뻗었다.
“으아아아! 천룡강림(天龍降臨)!”
원상이 사력을 다해 곤을 뻗어 나한청강곤(羅漢靑剛棍)으로 맞섰다.
꽈-아-앙!
그것이 폭발의 시초가 되었다.
☆ ☆ ☆
원래 고현은 전날 소림에 도착했다.
소림에 몰려든 수많은 남녀노소들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리저리 얘기를 들어보며 다닌 결과, 고현은 소림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의 비무가 세가의 젊은이들 때문에 엉망이 되어 더 이상은 비무를 할 수도 없게 되었고, 무인들이 모이면 으레 열리는 무림대회도 개최되지 않았다.
‘나도 이참에 짝이나 찾아야 할까…….’
젊은 시절부터 이십 년을 동굴에 처박혀 살아온 고현이다. 꽃향기를 풍기며 지나치는 젊은 처녀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부모의 원수를 갚지도, 문파를 일으키지도 못한 채 여자의 뒤를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 나이를 속이고 젊은 여자를 만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겉모습은 젊은 총각인 자신이 이제껏 혼인하지 않았을 중년의 처녀(?)를 만나기도 애매하다.
더구나 무당의 환야가 반로환동하여 백이 넘는 나이에 젊은 여인네들과 놀아나려 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고현은 괜히 자신이 민망해지고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뭇 여인들이 잘생긴 그를 보고 다가와도 고현은 어쩔 수 없이 거절하고야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약간 소심한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하필 술도 마실 수 없는 사찰인지라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도 밤이 길기만 했다.
이래저래 고현은 소림에서 할 일이 없었다.
‘휴우. 정말 내 인생이 꼬이긴 꼬였구나.’
기껏 소림에 와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다니…… 고현은 자신의 운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고현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술이 그리워 참기가 어려웠다.
‘그냥 소림을 나가야겠다. 뭐 주워 먹자고 거지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것도 정말 신물이 나는구나.’
소림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에는 해번소의 병가에 맡긴 천룡검에 대한 걱정도 한몫했다.
이십 년을 한시도 떼놓지 않던 문파의 보물이었다. 아무리 소림에 들어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천룡검문을 상징하는 유일한 보물을, 그것도 문주나 다름없는 신분인 자신이 타인의 손에 천룡검을 맡겼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 간단한 행낭을 꾸려 떠나던 고현은 평생에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나고 말았다.
가히 심장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만 것이다. 손끝 하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고현의 심장은 터질듯 요동을 쳤다.
‘사,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거의 이십이 넘는 나이차가 나는 듯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백리연을 본 순간, 고현은 이십 대 초반이던 당시로 되돌아가버렸다.
고현은 해번소에서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로 간만의 두근거림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말이라도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한 고현은 해번소에서 옆 사람에게 자리를 맡아 달라 부탁한 후 다시 내원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동안 찾아다닌 끝에 그녀를 만나긴 했으나, 미녀는 죄송하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못된 학사가 ‘이젠 별 듣도 보도 못한 시답잖은 놈들이 다 꼬이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지가 장건보다 낫다는 거야, 뭐야.’라고 나불거릴 때에야 그녀가 장건과 연분이 난 백리연임을 알았다.
고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어야 했다.
역시나 명성이 문제였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명성을 날렸더라면 백리연은 자신의 여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강호 최대 화두인 장건의 명성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이제 갓 강호초출인 그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우울한 마음으로 해번소에 돌아와 천룡검을 찾았을 때에도 고현은 백리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고검처럼 보이던 천룡검의 검집이 새것처럼 되었는데도 ‘소림에서 손질을 해주다니, 고마운 노릇이군.’ 하고 넘길 정도로 백리연에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림을 거의 벗어났을 때, 고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천룡검이 왠지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은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감각이었다.
이십 년을 손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았던 자, 혹은 감각이 극대화된 일류 고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고현은 자신의 소중한 천룡검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잘 손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다 보니 천룡검을 찾을 때 소림의 승려가 뭔가 희한한 말을 물었던 것 같다.
– 똑같이 해드릴까요?
백리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듯하다.
‘그게 이런 뜻이었던가?’
당시에 무슨 말인지 따졌어야 했다. 천룡검은 다른 이들은 결코 손대서는 안 될 문파의 보물이 아니었던가!
‘이런 바보 같은…… 내가 왜 무심코 넘겨버렸지?’
고현은 검을 뽑아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어억!”
천룡검문의 시조 때부터 사용했음에도 세월의 흔적만 남고 여전히 날카로운 절세의 보검이었다. 그런데 그 보검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새것처럼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검신에까지 손을 대다니!”
검집이 아니라 검신까지 손을 댔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당함 반, 분노 반의 감정으로 서둘러 해번소로 돌아오던 고현은 갑자기 해번소로 몰리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모를 알게 되었다.
장건이 모든 병기의 날을 갈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고현은 그 자리에서 천룡검의 날을 확인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천룡검의 날이…… 없었다.
천룡검이 손상당했다는 것은 시조의 유골이 훼손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천룡검문의 정통성과 의미가 훼손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것을 미처 몰랐다는 자책과 함께, 그동안 쌓여온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무시당하고 업신여겨지고.
되는 일도 없고.
그 와중에 좋아하던 여인마저도 빼앗은 놈, 그놈이 문파의 보물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고현은 눈이 돌아갔다.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우내십존이 있든 소림의 나한들이 있든, 무림 공적으로 몰리든, 더 이상 고현은 그런 주변의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전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린 고현은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하늘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장건의 이름을 부르며 해번소로 난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