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6
제 1 장 승리…… 혹은 패배
근 일 년간 소림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독선의 방문으로 시작된 일련의 일들은 모두가 장건을 주축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시작은 홍오였으되 목표는 장건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전과 사뭇 양상이 달랐다.
시작은 장건이었으나 목표는 홍오였다.
뭇 무인들이 장건으로 인해 터뜨린 불만에 우내십존이 기꺼이 끼어든 것 또한 홍오라는 동일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건은 우내십존 중 일인인 환야 허량의 명에 따르는 무당의 두 도장과 맞서고 있었다.
청우와 청인은 장건을 마주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이런 자세가 다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로 상대하기 까다롭군요.’
장건의 편안한 듯한…… 아니, 극히 불편해 보이는 딱딱한 자세가 한없이 거슬린다.
어떤 공격을 하든 다 피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어떤 공격을 하든 다 맞을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런데 정작 빈틈을 찾고자 하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 말해두건대, 처음부터 제대로 된 합격술을 펼치지 못하면 두 번째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청우와 청인은 사조인 환야 허량의 말을 되새겼다.
‘과연. 괜한 말씀이 아니었군.’
‘어떻게 할까요?’
‘음…… 우선 일양식(一樣式)으로 압박해 보자.’
청우는 검을 사용하고 청인은 권장을 사용한다. 일양식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합격술이니, 검과 권의 거리를 잘 계산해야 호흡을 맞출 수 있다.
청우와 청인은 발끝만 미미하게 움직이며 장건과의 간격을 조절해 나갔다.
합격술이라는 것은 대충 여럿이 한꺼번에 공격한다고 해서 합격술이라 하지 않는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빈틈을 보완해 준다거나, 혹은 한 몸처럼 동시에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합격술이다.
이번 경우에는 후자다.
장건은 청우와 청인이 걸음을 옮길수록 불편한 감각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어? 왠지 위험할 것 같은데?’
다소 평범해 보이는 청강검을 든 청우가 외려 가까이 다가오고, 청인은 슬쩍 뒤로 물러나는 형태다. 상식적으로 권이 더 가까워야 하는데도 장건은 더 불안해진다.
불편한 감각이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장건은 그 느낌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청우가 장건의 네 걸음 앞, 청인이 그 보다 두 걸음 반을 더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불편한 감각은 사라지고 어긋난 조각을 끼워 맞춘 듯, 말끔한 느낌이 장건을 사로잡는다.
그 순간, 청우가 장건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찔러왔다. 야마분종에서 궁보로 내딛으며 가볍게 밀듯이 검으로 어깨를 누른다.
동시에 청우의 움직임에 가려졌던 청인이 사선에서 달려들며 일장을 뻗고 있다. 양손을 이마 근처에 두었다가 한 손은 당기고 다른 손을 슬쩍 밀어내듯 하는 무당면장의 섬통비(閃通臂)다.
섬통비의 온유한 장력이 장건의 반대편 어깨로 날아든다.
장건은 안법으로 둘의 움직임을 한 번에 담고 있었다. 이미 공격을 예측했으니 놀랄 일은 없는데도 다른 의미로 놀랐다.
‘어어?’
둘이 초식을 전개한 시간은 다른데, 공격이 도달하는 시간이 거의 같다. 이러면 검을 상대하는 순간 장력을 얻어맞고, 장력을 유원반배로 받아 몸에서 돌리는 순간 검에 찔릴 것이 분명하다.
무당의 검이 살검이 아닌 만큼 청우는 검기를 갈무리해 예기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검기가 없어 보일 뿐, 공력은 상당히 담겨 있다. 자상(刺傷) 같은 외부 상처는 없어도 내상을 입기엔 충분히 강력하다.
섬통비 역시 마찬가지다. 섬통비의 장력은 그 끝이 흔들리며 날아들어서 정확히 받아내기도 애매할 지경이다.
‘뒤로 피해 버릴까?’
그러나 피하는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장건이 본 청운과 청인의 움직임은 아직 진행 중이다. 장건이 피한다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여력으로 장건을 추격해 올 것이다.
좀 전에 상대했던 과도한 움직임의 고현과는 확실히 다르다. 쓸데없이 과한 초식이 아니면서도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적당한, 가장 적절히 운용하는 초식이다.
장건도 어쩔 수 없었다.
‘둘 다 받아내자!’
양손으로 유원반배를 사용하는 것은 지난번에도 해 보았다. 다만 양손이 서로 다른 움직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어려울 뿐이다.
장건이 양손을 어깨 즈음에서 내밀었다.
청우와 청인은 다소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으나,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장건은 왼 손등으로 청우의 검면을 밀듯이 가져다 댔다가 용조수의 수법으로 손바닥을 뒤집었다. 검극이 휘말리며 손바닥이 검면에 붙는다.
오른손으로는 청인의 장력을 받아내며 안쪽으로 당겼다. 손목과 드러난 팔뚝의 피부가 불끈거린다. 근육이 빛살처럼 꼬이며 반응한다.
받아들인 힘이 장건의 양 손목을 타고 순식간에 등과 가슴의 근육을 통해 반대로 이동한다.
청우와 청인은 대련 경험이 많은 중견의 고수다. 검과 장력이 장건에게 닿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소림의 유원반배? 아니…… 이건 본파의 태극경이잖은가!’
‘원시천존!’
청우와 청인은 기겁했다.
허량의 조언이 없었다면 흡성대법으로 오인할 뻔했다.
공세에 담긴 힘이 자연스레 장건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청우와 청인은 ‘움직이지 않는’ 태극경을 본 적이 없었다.
태극경을 극한까지 이루면 태산 같은 힘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힘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움직임이 필요하다.
태극은 원을 상징하고, 원은 가장 완전무결한 동작이다. 태극경은 이 원의 움직임을 통해 힘을 상쇄하고 움직여 조화를 이룬다. 흔히 태극권이 흐느적거린다고 하는 표현은 거기에서 연유되었다.
그런데 장건은 그냥 가만히 선 채 손을 내민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는 듯한 경(經)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자세히 보면 몸의 여기저기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지만, 그것이 자의(自意)로 근육을 움직여 원을 그리고 있는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도 자신의 팔뚝 근육을 임의로 이리 뒤틀었다 저리 뒤틀었다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며, 보통은 굳이 그렇게 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벌써 기운이 되돌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청우는 청인의 장력이, 청인은 청우의 검력(劍力)이 서로를 향해 반대로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있으면 당하겠군!’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청우는 반 모금의 호흡을 머금고 검에 공력을 더 주입했다. 장건의 손바닥에 붙은 검신은 그대로인데 검극이 부르르 떨리며 요동을 친다.
청우의 의도를 알아챈 청인이 장력의 기운을 조절했다. 우(右) 섬통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좌(左) 섬통비로 방향을 전환한다.
“어?”
장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처 힘을 되돌리기도 전에 다른 형태의 기운이 침범했다. 아니, 침범하고 있다기보다는 미묘한 균형을 일부러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힘을 아무런 방해 없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보내는 방법은 극도로 섬세한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섬세한 과정 중에 균형이 깨어지고 있으니 장건도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이럴 때 움직이지 못하던데?’
그러나 청우와 청인은 장건과 내력에 의한 대치하는 도중에 다시 공세를 바꾸고 있다.
한 명만 상대하고 있다면 다른 손으로 기운을 배출하고 다시 기운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벌써 양손을 다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는 방에서 사람이 나가지도 않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선 격이다.
아까처럼 일부러 내공을 흩어서 공력을 풀어버릴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손이 베이고 장력이 몸을 격통해 내상을 입을 터였다.
‘발로 보낼까?’
장건은 처음 들어온 공력을 양 발로 내보내고 새로운 공력을 다시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손바닥에 장심(掌心)이 있듯 발바닥에도 장심이 있다. 발바닥을 통해 공력을 내보내면 바닥이 부서지긴 하겠지만 장건은 내상을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장건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깝잖아!’
남의 공력이긴 하지만 일단 들어온 걸 그냥 내버린다는 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장건은 강호 역사상 초유의 시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들어온 청우의 검력은 좌하반신으로, 청인의 장력은 우하반신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받은 청우의 검력을 오른손에서 가슴 전면으로, 청인의 장력을 왼손에서 등을 통해 하복부로 내려 보냈다.
장건의 몸에 네 개의 기운이 서로 다르게 돌고 있는 것이다!
하나, 두 개의 힘을 하체에 나누어 돌리면서 그 시간을 이용해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온 경락과 근육이 모두 쓰여져 장건의 몸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장건은 숨이 막혀서 호흡을 할 수도 없었다.
‘끄으으응!’
아쉽게도 다시 양손으로 공력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 할 것 같다.
하지만 사지에서 동시에 허리의 대맥으로 힘을 보내어 합치는 데에는 성공했다. 성향이 다른 기운이지만 근간(根幹)이 같아 억지로 어울리게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인 기운을 한순간에 우권(右拳)으로 뿜어냈다. 참았던 숨을 한 번에 쏟아내듯 벼락처럼 주먹이 뻗어졌다.
두 개의 검력과 두 개의 장력이 청우의 좌측 허벅지 위로 뚝 떨어진다. 넓적다리에서 한 뼘쯤 옆으로 떨어진 부근이다.
당연히 헛친 것이 아니다. 청우의 위기가 그곳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청우와 청인의 눈이 빛났다.
‘빗나갔다!’
‘역시 완벽한 태극경은 무리였군! 자세가 흐트러졌…….’
순간, 청우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위험하다!’
무인으로서의 판단만큼이나 날이 선 본능이 청우를 자극했다. 청우는 급히 보법을 밟으며 피하려 했으나, 네 개의 힘이 집약된 장건의 주먹이 더 빨랐다.
찌이이익-
긴 천이 찢어지는 듯, 사기 그릇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청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분명히 장건의 주먹이 몸에 닿은 것도 아니고, 권경이 닿은 것도 아닌데 눈앞이 새하얘진다.
“사형!”
신중한 성격의 청인은 장건의 일거수일투족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빗나간 공격임이 분명해 보이는 주먹질에도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그의 선택은 정확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우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움직인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청인은 장건이 주먹을 뻗은 바로 직후, 청우를 밀어내며 장건의 주먹을 거의 대신 받을 수 있었다.
태극권 백학량시(白鶴亮翅)!
앞선 왼발에 중심을 싣지 않고 발끝만 내딛은 허보의 상태에서 한 팔을 아래로, 한 팔을 위로 하며 손바닥은 서로 마주보게 한 자세다.
청인은 아래에서부터 퍼 올리듯 장건의 주먹을 받으면서 포구형(抱球型)을 취했다. 양손으로 공을 감싸 안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장건의 주먹에 실린 공세를 흩어내려 한다.
한 손으로도 가볍게 태극경을 시도하는 허량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무당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의 태극경이다. 다만 급하게 끼어든 터라 다시 되돌리지는 못하고 스스로 힘을 해소해야만 했다.
지지지직.
양팔로 연신 원을 그리며 힘을 해소하고 있음에도 청인은 선 채로 계속해서 밀려났다.
‘힘이 너무 강대해 해소되지 않는다!’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는 것과 달리, 청인의 이마에는 삽시간에 땀이 흐른다. 백학량시로 장건의 공격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감당하기가 어렵다.
급격히 팔이 뻐근해진다. 장건이나 허량과 달리 동적인 움직임으로 태극경을 해야 하는 청인은 팔이 마비되면 태극경을 할 수 없다.
청인은 급격히 자세를 바꾸었다.
해소가 어렵다면 다소 피해를 감수하면서라도 비껴서 흘려낼 작정이다.
기식(起式) 고탐마(高探馬)!
왼손이 앞으로 나와 있는 순간에 상체를 좌측으로 반회전하며 우장에 힘을 싣는다. 앞에서부터 들어오는 힘의 방향을 왼쪽으로 틀기 위함이다.
태극경을 행하는 도중에 백학량시에서 고탐마로 변환하는 동작은 무당의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고절한 몸놀림이었다.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원래가 하나의 식(式)이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어이없게도 장건의 권력은 나선형으로 돌고 있어서, 튕겨내려 해도 안으로 자꾸만 감겨 들어오는 것이다.
지직!
대여섯 걸음을 밀려나는 동안 발밑에는 길게 끌린 흔적이 남았다. 이미 뻐근해진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쾅!
결국 공기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며, 청인의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한 줄기 핏물이 청인의 입에서부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피가 거무스름한 것이 중독까지 된 모양이다.
장건의 내공은 자신의 본 내공과 대환단, 독정의 세 가지가 바탕이 된 것이라, 극한으로 공력을 사용하면 독정의 독기가 풀려나오곤 했다.
“사제!”
청우는 장건이 독까지 썼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검을 곧추세웠다.
훌쩍 뛰어올라 반원을 그리며 검을 치켜 벤다.
무당 검공의 정수가 담긴 일검 일초식이었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나 그 안에 담긴 온유함이 해일도 누를 수 있어 보인다.
극도로 분노한 와중인데도 일검에 모든 힘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현이 한 수에 생사결단을 내려는 듯 달려들던 것과는 달랐다.
장건은 청우의 공격이 참으로 까다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비무를 할 때, 장건은 상대의 근육 움직임이나 미세한 기의 운용을 통해 얼마만큼 공격이 지속될지 안다. 이를테면 공격을 하다 말 것인지, 멈추고 다른 초식을 쓸 것인지, 아예 공격을 끝까지 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모용전의 허초는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우나 청인의 경우에는 항시 여력을 남겨둔다. 한 수 한 수가 전심전력에 가까운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그 공격이 막혀도 또다시 전력으로 다른 수를 펼칠 수 있도록 일 푼의 힘을 남겨두는, 그런 희한한 몸놀림이다. 달리 말하면 남겨둔 일 푼의 힘으로 끊임없이 전력에 가까운 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첫 합격시에도 공격이 막히자마자 곧바로 다른 공격으로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건은 잘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무당 무공의 특징이다. 그 특징을 장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해한 셈이다.
장건은 용조수로 청우의 검세를 봉쇄했다.
검면을 두드리고 손가락으로 칼등을 누르며, 검극을 잡아 당기기도 하면서 검에 실린 힘을 완전히 흩어 버렸다. 보통 무인들의 경우였다면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물러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청우의 공세는 여전하다. 다 죽어가던 검세가 순식간에 되살아나 장건을 향한다.
사악-
장건의 코앞을 청우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완전히 빗나간 검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다시 반원을 그리며 장건의 허리를 노린다.
“이크!”
장건은 급히 나한보를 밟아 검과 같은 방향으로 물러섰다.
일초 일초가 ‘거의’ 혼신의 힘을 다 하는 듯한 위력이었다. 한 번 실패한 후 큰 빈틈을 보이는 다른 무공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장건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아, 그렇구나.’
청우의 검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장건은 원을 그리는 것이 힘을 부드럽게 받는 데에만 쓰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원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공격을 실패해도 계속해서 공세가 이어진다. 공격시 남겨두는 일 푼의 힘은 그 원을 유지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역시 무공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단 말야.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배울 게 많네.’
무공은 가급적 멀리 하고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무공을 안 배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장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청우의 검이 그리는 원은 계속해서 작아졌다. 보법이 밟는 원형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크!’
장건은 다시 위기를 감지하고 화들짝 놀랐다.
청우의 검은 풍진의 일검처럼 위력적이고 빠르진 않다. 물론 일반 무인들의 검보다는 훨씬 더 위력적이고 빠르지만, 딱히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에 너무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일격의 필살검은 아니지만 청우의 검은 끊임없이 몰아치며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어느새 장건은 확실한 수세에 몰렸다.
점차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서 장건의 사방은 청우의 검으로 가득해진다.
검이 점차 어지럽고 복잡해지며 장건을 죄어오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강하게 수직으로 검을 내려치고, 곧바로 올려 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을 내려치는 동안에 가속이 붙고, 마지막에 검을 멈출 때 여력(餘力)이 남아 몸을 경직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우의 검은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만큼 초식에서 초식으로 이어지는 사이가 빈틈이 없고 유유히 흐른다. 혼자서 검무(劍舞)라도 추는 듯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검세가 이어진다.
장건과 청우의 대결을 지켜보던 무인들의 입에서 절로 탄사가 터져 나왔다.
“허어! 저 유려한 움직임이라니.”
“역시 무당이야.”
청인을 일 초식에 날려 보낸 장건도 꼼짝 하지 못하고 계속 밀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계속 지켜볼수록 무인들에게는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러게. 저렇게 공격을 하는 데 왜…….”
정말 이상했다.
청우가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는 있는데 장건은 딱히 곤경에 처한 것 같지 않다. 청우가 베고 긋는 검들이 모조리 장건을 통과하는 듯 보인다.
검영(劍影)만 잔뜩 어지럽게 흩날릴 뿐, 장건은 옷깃조차 검에 스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검을 다 피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무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청우 도장이 농락당하고 있어!”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었다.
꽁지가 빠져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몸에 닿을락 말락한 거리를 두고 장건은 청우의 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청우 역시 공격을 계속하고는 있었으나 조금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째서!’
청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왜 이렇게 공격을 하는데도 장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까? 내공에서도 자신이 훨씬 더 우위일 텐데.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건은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청우의 검을 거의 손가락 한마디, 일촌(一寸)가량의 차이로 피한다. 그에 비해 청우는 한 팔을 거의 다 휘두르거나 길게 찌르거나 하는 둥의 동작을 취한다.
청우의 내공이 더 깊어 장건보다 빠르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동작의 크기가 차이가 난다.
일촌을 움직이는 장건과 일척(一尺)을 움직이는 청우가 같을 리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장건은 청우의 동작 끝에 보이는 원의 움직임을 보면서 다음 공격을 예측할 수도 있었다.
극쾌(極快)와 극중(極重)가 아닌 변화와 유(柔)를 위주로 하는 무당의 무공은 장건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건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큰일인데…….’
공세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청우의 검초에서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동작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있는데 반격을 하기가 어려웠다.
괜히 고수가 아니라는 듯, 청우는 분노하면서도 장건의 용조수를 경계하고 있다. 장건이 손이라도 뻗을라치면 재빨리 검극을 움직여 장건의 요혈을 노린다.
한 번 뻗은 검을 마음대로 회수하고 다른 초식으로 연계할 수 있는 무당의 검이니 가능한 방식이기도 하다.
“한 번 당한 수법에는 다시 당하지 않는다!”
이를 악문 청우의 검은 계속해서 장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장건이 힐끗 보니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는 청인의 얼굴이 조금씩 좋아진다.
자꾸 시간이 흐르면 청인이 다시 가세를 하게 될 테고, 그러면 더 불리해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안 되겠다.’
장건도 이를 꾹 깨물었다.
이 상태에서 상대의 힘을 이용해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머리를 짜고 또 짜내어도 지금 상황에서 적절히 쓸 만한 무공도 생각나지 않는다. 장건이 아는 무공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 그것이 장건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장건이 양손을 늘어뜨리자 청우의 검이 기다렸다는 듯 장건의 가슴으로 날아온다. 그 순간에 장건이 검면에 왼손을 댔다.
이미 용조수를 주의하고 있던 청우는 장건의 손이 닿기도 전에 검을 옆으로 뉘였다. 장건이 오른손으로 위에서 찍듯 검을 내리눌렀다.
청우의 검이 작은 원을 그리며 교묘히 검극을 장건의 손바닥으로 돌린다. 장건은 오른손을 회수하며 왼손으로 다시 검면을 노렸다. 청우가 왼손으로 손가락을 퉁겨 빠르고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장건이 나한보를 밟으며 극히 미미하게 떨리듯 피해 지풍을 귀 옆으로 흘려낸다. 그 틈에 청우가 검으로 장건의 어깨를 찍으려는 듯 뻗다가, 순간 몸을 반쯤 회전시키며 장건의 복부로 뒷발을 내지른다.
장건이 청우의 다리를 양손으로 붙들려 하자, 청우가 자세를 낮추어 회전하며 후소퇴(後掃腿)의 형식으로 다리를 쓸어낸다.
장건도 실전 경험은 적은 편이 아니지만 이런 공방전을 펼친 적은 드물었다. 특히 하단을 노리는 공격에 대해서는 딱히 대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장건은 당연히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하단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그것이 청우의 눈에 들어온다.
청우가 멈추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검으로 장건의 발등을 베자, 장건은 또다시 물러선다. 연이어 몸을 돌리며 뻗은 후소퇴에 장건은 또 물러날 뿐이다.
‘하단에 대한 대처 방법을 모르는군!’
장건의 대응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청우였다. 지풍이나 권경으로 얼마든지 위쪽에서 공격이 가능한데도 장건은 물러나기만 한다.
청우는 팽이처럼 계속해서 몸을 돌리며 검과 발로 계속 장건의 다리를 노렸다. 헐보(歇步)에서 간간히 뻗는 지풍은 장건이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윽!”
장건은 청우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몸을 낮추어 계속 하단을 공격하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한 번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주구장창 아래만 노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장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번의 공격을 피해내며 방법을 모색했다.
‘아…… 이건 끝까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로 아까웠지만, 승부를 질질 끌고 싶지는 않았다.
장건이 피하면서 손바닥으로 독정의 기운을 흘려냈다. 예전에 당예에게 독기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
거푸 장건의 하체를 짓쳐들던 청우가 숨을 들이키다가 깜짝 놀랐다.
“흡!”
공기 중에 독기가 살포되어 있었다.
하단을 공격하면 공중으로 뛰거나 같이 각법으로 상대하는 것만 알았지, 피하면서 독을 뿌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보통 이 정도로 독을 다룰 줄 알면 장력에 독기를 실어 쏘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순식간에 청우의 기혈에 독기가 침투했다. 그렇다고 싸우던 중에 운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청우는 더 이상 장건에게 쇄도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몸을 일으키며 검을 뒤로 세우고 왼손으로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면서 재빨리 운기를 해 독기를 몰아내려 했다.
흡입한 양은 적지만 강력한 독선의 독정이다. 공력을 한창 운용하던 중이라 벌써 증상이 나타났다.
‘이, 이런! 하필 눈이……!’
눈꺼풀 안쪽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간지러웠다.
그 짧은 틈은 장건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다. 장건이 바로 한 발을 내디뎌 청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청우는 눈에 눈물이 고여 형상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청우가 운기를 중단하고는 급히 몸을 틀며 검을 찔러냈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뻗은 것이라 검세가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장건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뻗어냈다. 유원반배로 섣불리 받으려고 했다가는 자신이 다치거나 청우에게 피할 시간을 주게 될 것 같았다.
검이 목줄기를 꿰뚫을 듯 다가오지만 지금만큼의 빈틈을 또다시 찾기는 어려울 터다.
‘그냥 금강권이다!’
아무것도 없던 가슴에서 주먹이 툭 튀어나온다.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는 완벽한 직선의 일권이다. 그리고 장건의 몸이 비스듬히 옆으로 반을 돈다.
푸아앙!
발밑에서부터 피어오른 나선형의 바람이 장건의 몸을 타고 주먹으로 뛰쳐나갔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설사 보인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절정의 일권이었다. 청우는 벌써 그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더 이상 뻗어지지도 않았다.
쩡!
한 줄기 유성이 몸을 관통하는 듯 묵직한 충격이 오더니, 청우는 온몸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핑그르르 돌며 허공을 날았다.
장건도 주먹을 뻗은 상태에서 뒤로 한 걸음 정도를 밀려나갔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온통 나선형의 물결로 가득하다.
쿠당탕탕!
완전히 나가떨어진 청우는 바닥에서 몇 번을 더 옆으로 굴렀다. 모처럼 장건의 이마에서도 땀이 흘렀다.
“후우…… 후우…….”
상대의 공격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기에 본신의 내공만으로 청우의 위기를 격파해야 했다. 가진 내공이 장건의 이상인지라 꽤 많은 힘이 들었다. 벌써 단전이 휑하니 반쯤은 빈 듯했다.
하지만 어쩐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함이 느껴져 온다.
바로 촌각의 차이를 두고 공격을 성공시킨 데 대한 성취감이었다.
“내가 더…… 빨랐어.”
장건은 약간은 얼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유원반배가 두 번은 통하지 않는 번거로운 상대였다. 때에 따라서는 피하기만 하는 것보다 틈을 찾아 일격을 노리는 방법이 훨씬 더 이득임을 깨달았다.
“휴우우.”
장건은 심호흡을 하며 말로 할 수 없는 이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손이 다 떨릴 정도의 기분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에 가까웠다.
곧 청우와 장건의 공방을 지켜보며 운기를 하던 청인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청인은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청우의 맥을 잡았다.
심각한 부상은 없어 보였다. 약간의 독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내상은 없다. 왠지 원기를 좀 상한 것 같지만, 며칠 푹 쉬고 나면 멀쩡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청인은 소매로 청우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십 합을 겨루긴 했지만, 결국은 일권에…….’
다시 장건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십, 수백 쌍의 눈이 향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벌써부터 귀가 다 간질간질 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건의 그 일권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처음부터 쓰지 않았던 걸까?’
동작이 큰 권초도 아니었고, 미리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장건은 그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다가 주먹을 내지른 것뿐이었다.
흔히 말하는 파괴력이 큰 비장의 절초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권초이면서도 빈틈이나 허점이 전혀 없다.
상대를 일격으로 날려 보낼 정도의 위력을 가졌는데도 어떻게 그만한 공력을 한 걸음 만에 끌어 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절초를 쓸 때 기수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만큼의 공력을 모으기 위해 내공을 운용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장건의 일권에는 그러한 준비 동작이 전혀 없으니 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인이 단언하건대, 그 정도의 일권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몇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상대를 해하지 않으니 일격필살……은 아니겠지만.’
상대를 해치지 않는 무공 자체는 대자대비하나 무공만 그러할 뿐, 결과는 결코 대자대비하지 않다. 이런 못난 꼴을 보였으니 적어도 수년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터였다.
잠이 들었는지 눈을 게슴츠레 감은 채 입을 벌리고 입맛까지 다시는 청우의 모습 어디에서도 근엄한 무당 도사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청인은 곧 장건의 앞으로 가 정중히 포권을 했다.
“장 소협의 마지막 일권은 참으로 멋졌네. 빈도는 그 권을 받을 수 없을 테니 이쯤에서 물러날까 하네.”
이미 그의 모습에서 싸울 기세가 없음을 안 장건이 마주 합장했다.
“감사합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는가?”
“말씀하세요.”
“마지막의 그 권초는…….”
“……네?”
청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권법의 명칭을 물으려던 청인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형태는 금강권을 닮았으나,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권이 결국 궁극의 무리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극에 달한 고수가 휘두르는 일검을 아무런 초식명도 없이 그저 ‘심검’이라 하듯 말이다.
무인들은 무당의 고수인 청우가 패배한 사실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청우가 다소 몰아붙이는 듯하긴 했으나 결국은 지고 말았다. 중간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청우가 장건의 단 일권을 막지 못해 패배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 났군.”
“장 소협의 실력이 무당을 넘어서다니.”
무당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두 고수가 줄줄이 패했다. 일대 일도 아니고 이 대 일에서였다.
“도대체 저 권법이 뭐지?”
대부분의 무인들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했다. 타격음이 들린 후 주먹을 내밀고 있는 장건만 보았을 뿐이다.
“어쨌거나 정말 엄청나군.”
“당분간 저 아이…… 아니, 장 소협을 상대할 사람이 강호에 없겠어.”
뭇 무인들은 자신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잊고 장건의 무위에 감탄했다. 강한 자에 대한 동경은 그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저 어디가 문각 선사의 백보신권이야?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지켜보던 허량은 가슴팍을 두드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어이구! 망했네, 망했어. 오 년 안에 소림에서 권절(拳絶)이 나오겠구나. 저 바보 같은 놈이 그냥 물러서는 바람에 더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어.”
그러나 허량은 정말로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남들 들으라는 듯 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가 원하던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쓰러져 있는 사손들은 아랑곳 않고, 허량의 시선은 벌써 홍오와 풍진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홍오…….”
허량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조그만 소리로 읊조렸다.
“네놈이 이겨야 한다. 그래야 소림의 밑천이 완전히 거덜이 날 테고, 나도 저 녀석이 왜 저런 무공을 쓰는지 알 수 있게 될 거 아니냐.”
허량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걸렸다.
“반드시 이겨라. 아니…… 홍오, 네가 이번 승부에는 이기게 되겠지만.”
놀랍게도……
허량은 다른 사람도 아닌 홍오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