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8
제 3 장 바리에 얽힌 약속
윤언강이 홍오의 소문을 들은 것은 십 대 후반이었다.
당시 홍오는 이미 강호에 명성을 널리 떨치던 중이었다. 소림의 최고 기대주이며 동시에 승려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해 악명도 자자했다.
아직 강호행을 나서지 않은 윤언강도 무인인 만큼 무인으로서의 홍오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언강 역시 화산의 기대주로, 같은 기수에서는 그를 상대할 만한 이가 없었다.
이십 대가 되어 윤언강도 강호행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여실히 드러냈다.
홍오가 악명과 동시에 무위를 떨쳤다면, 윤언강은 완전한 정파의 기대주로 관심을 모았다.
그런 둘이 강호행을 하게 되며 만나게 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히던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누가 이길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사람들은 둘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정작 홍오와 윤언강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서로 간에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을까? 다르면서도 무의 극을 보고 싶어 하는 패기어린 두 청년의 마음이 맞았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둘은 의기투합하여 종종 밤낮을 잊고 무리를 논하며 지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의 행보는 완연히 갈리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섭렵하려는 홍오와 검의 길만 가는 윤언강의 행보가 같을 수 없었다.
각기의 길에서 둘은 계속해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지금의 우내십존이 된 이들의 대부분이 그때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면서, 각 문파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둘은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강호행을 하던 무림인들 중 무패의 전적을 기록한 이는 오직 둘뿐이었다.
비주류적인 무위를 보이는 홍오와 정파의 의기를 지키는 주류의 윤언강. 그 둘은 비무든 싸움이든, 심지어 목숨을 건 대결이든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둘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다만 홍오가 사람들에게 주로 욕을 먹는 반면, 윤언강은 칭송을 받았다. 똑같이 사파의 거물이나 마두를 잡아도 홍오보다 윤언강이 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둘의 사이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술잔을 나누며 무공에 대해 논하다가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고요히 수면을 비추던 때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도 둘은 작은 정자에서 술병을 두고 무공에 대해 토론하던 차였다.
“검이 왜 만병지왕이라 꼽히겠나. 검의 길을 올곧이 가다보면 그 끝에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칠백 년 전 삼십오식의 장법으로 강호를 평정했던 탈혼백장(奪魂白掌)이 당시만 해도 무명에 불과했던 광왕(光王)의 일초식 검로에 무릎을 꿇은 것이 좋은 예일세.”
윤언강의 말에 홍오가 술잔을 대번에 비우며 반론했다.
“세상에 상대적이지 않은 무공은 없어. 당시 탈혼백장이 광왕을 상대로 쓴 이십칠식은 정(丁)의 형태에 취약한 점이 있다고. 팔방조차 베지 못하고 육방을 베는 광왕이 이긴 건 그 같은 이유라 봐야지.”
“그렇지 않네!”
그날따라 취기가 오른 윤언강이 유독 자신의 의견을 강조했다.
“무림사를 통틀어 권과 장, 기문병기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이를 모두 합해도 검으로 지존이 된 이의 수에 못 미친다는 건 알고 있나?”
홍오의 숯검정 같은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멀리까지 따질 필요가 뭐 있나? 당장의 현실을 봐. 천하오절에 검, 도, 궁, 권, 장이 있으나 그중 가장 뛰어난 무공을 무엇으로 치지?”
천하오절은 은퇴를 선언한 일황이제삼왕(一皇二帝三王)의 뒤를 이어 각자의 무공으로 당대를 호령하는 절대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지는 않아도 문각의 백보신권을 수좌로 놓는 경우가 많았다.
천하오절에는 윤언강의 사백인 우하검(宇河劍)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윤언강도 발끈했다.
“자네의 사부 문각 대사께서는 가진 바 무공의 대자대비함 때문에 최고로 꼽히는 것일세. 문각 대사께서도 당금의 일대종사(一大宗師)로는 능히 손색이 없으시나, 무공으로 천하제일인을 논한다면 본문의 우하검 진여립 사백님을 단연코 첫 순위로 놓아야 하네!”
사실상 문각과 우하검 진여립이 서로 맞선 적이 없는데도 우하검이 두 번째로 꼽히는 것은 소림이 천하제일의 문파인 까닭이라 생각하는 윤언강이었다.
화산이 천하제일 문파였다면 당연히 우하검이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홍오도 취기를 누르지 못하고 반발했다.
“허어, 이 망할 화산파의 제자 좀 보게? 남의 사부에 사문까지 들먹이면서 자파가 최고라 하는 거냐, 지금?”
“사문 얘기는 자네가 먼저 꺼내지 않았는가! 말이 나온 김에 하지. 나는 본문이 소림에 뒤진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네!”
“그래서? 그래서 지금 화산이 천하제일 문파라고 우기는 거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평소 언제나 온화함을 견지하며 언쟁에서 한 걸음 물러서던 윤언강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사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윤언강이 벌떡 일어섰다.
“소림이 지금 천하제일 문파라 하더라도 언제까지 그대로일 수는 없을 거야!”
“이 자식이?”
홍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좀 오냐오냐 해주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네가 감히 본사를 우습게 여겨?”
“나는 소림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았네! 하지만 우리 화산 역시 소림에 못지않다고 말했을 뿐!”
“그게 그 말이지!”
갑자기 홍오의 표정이 돌변했다. 화를 내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걸린다.
“지금까지 네 전적이 얼마나 되지?”
“이백칠십이 번을 싸웠으나 한 번도 지지 않았네!”
“잘 됐군! 나도 삼백오십여 번을 싸웠지만 한 번도 진 적이 없지!”
홍오가 입버릇처럼 히히덕거리며 말했다.
“누가 옳은지 말로만 떠들 필요가 뭐 있겠어? 너와 내가 증명하면 될 일을.”
윤언강도 홍오의 도발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잘 됐군! 내 오늘 화산의 검이 얼마나 매서운지, 자네의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해줌세!”
윤언강은 곧바로 취기를 날려버리고 검을 들었다. 홍오 역시 정자를 내려와 공터에서 몸을 풀었다.
“그렇잖아도 슬슬 결판을 내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참이었지.”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피가 끓는 나이의 둘이었다.
둘의 충돌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되던 바였다.
그러나 승부는 의외로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온갖 무공을 섭렵한 홍오의 공세를 윤언강은 제대로 버텨낼 수 없었다. 더구나 홍오의 내공은 물론이고,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도까지 윤언강은 따라가지 못했다.
홍오는 벌써 소림의 문자배를 넘어설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아니, 굳이 비교하자면 애초에 천재인 그를 천재에 버금가는 기재인 윤언강이 이기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는지도 몰랐다.
윤언강의 매화검은 매 초식 초식마다 홍오의 대응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암향매우(暗香梅雨)는 소림의 권법인 금강권에 밀렸고, 선리저매(先異著梅)는 종남의 보법인 유운비(流雲飛)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소화설한(素花雪寒)은 아미의 금나수인 주렴삼수(珠簾三手)를 뚫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주렴삼수에 손등을 찍혀 검을 놓치는 최악의 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이거야 원, 화산의 매화검을 상대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고작 이게 다였어?”
홍오의 말에 윤언강은 분노했다.
그동안 홍오에게 진 이들이 얼마나 굴욕적으로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은 후기지수 중 홍오와 함께 최고로 손꼽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홍오에게는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도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내가 모자라긴 했으나, 결국 검파인 아미의 무공에 당한 것이니 내가 진건 아니다. 주렴삼수는 아미의 검공에서 파생된 금나수니까!”
홍오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딴 건 몰라도 모자란 건 맞는 것 같네. 졌으면 졌다 인정할 것이지, 괜히 우기긴.”
홍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디서 긴 나뭇가지를 들고 왔다. 그리고는 검을 쥐듯 나뭇가지를 들었다.
“무식하게 같은 초식을 천 번 만 번 반복하며 검만 휘두르면 너처럼 되겠지. 하지만 내가 매화검을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뭣이?”
윤언강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홍오에게 달려들었다.
“내 볼 땐, 암향매우는 어둠 속에서 풍겨오는 매화의 깊고 그윽한 향이 비처럼 뿌려지는 것이야. 천천히 향을 음미하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매화의 비에 온몸이 축축이 젖어있는 거지. 이런 유들거리는 초식으로 강맹한 금강권에 힘으로 대항하는 건 당연히 무리다.”
홍오는 나뭇가지를 들고 매화검의 초식 암향매우를 펼쳤다.
윤언강이 보인 암향매우와는 전연 달랐다. 딱딱하고 살기어린 초식이 아니라 부드럽게 펼쳐지는데, 윤언강은 마치 매화의 숲에 갇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수천수만 번을 머릿속에서 그려오던 암향매우의 완성된 초식이었다.
떨그렁.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윤언강은 망연자실했다.
이십여 년을 매일같이 수련해오던 초식이었다. 그럼에도 늘 부족하고 부족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단 한 번 펼친 홍오의 매화검은 그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다.
천하제일인 소림에 천하제일의 기재를 내려주었다. 지금도 최고인 소림에 홍오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더해지면 소림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왜 하늘은 하필이면 홍오같은 개차반에게 그런 재능을 준 것일까…….
윤언강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 홍오는 암향매우의 초식을 거두었다. 윤언강의 장포에는 벌써 수많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래도 십 년여를 알고 지냈는데 망연자실해 서 있는 윤언강이 조금은 애처로워 보였을까? 아니면 윤언강만 한 술친구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상대도 안 되는 윤언강이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은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어느 쪽이든, 홍오가 그답지 않게 말을 건넸다.
“뭐,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이리 와서 술이나 마저 하지. 달도 밝고 운치도 좋은데, 실연당한 사람처럼 거 서 있지 말자고. 이런 날 독작(獨酌)하는 건 정말 애처롭지 않겠냐.”
그러나 윤언강은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윤언강은 독기 어린 눈으로 홍오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패했지만…… 나는…… 언젠가 너를…… 그리고 소림을 넘어서고 말 거다.”
홍오가 술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들이켠 후 웃었다.
“그것 좋지! 어려울 것도 없어. 난 사부님의 뒤를 이어 소림의 최고가 될 테니, 네가 만약 나를 이긴다면 넌 이미 소림을 넘어선 거다. 까짓 것, 그땐 화산이 천하제일이라고 인정해주지!”
“정말이냐? 내가 너를 넘어서면 화산을 천하제일로 인정해줄 테냐?”
홍오는 다시 술 한 병을 훌쩍 비워버렸다.
“아무렴.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마. 사람들 앞에 가서 화산이 최고라고 소리를 지르라 해도 하고, 개처럼 짖으라 해도 그대로 하지.”
윤언강은 가슴이 뛰었다. 비록 술김에 한 말이라 해도, 홍오는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라 해도, 그에게는 목표가 생긴 셈이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다.”
“아, 알았으니 와서 술이라 마시라니까. 내 방금 일도 다 잊어줄게. 아니, 아예 내가 진 걸로 할까? 화산의 신성 윤언강, 이백칠십삼전 이백칠십삼승!”
윤언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됐으니 약속에 대한 맹세를 해.”
“맹세까지 무슨…… 귀찮게.”
“맹세라도 받아두지 않으면 네가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니까.”
홍오는 툴툴거리다가 문득 술잔으로 쓰던 바리 그릇을 윤언강에게 던졌다.
“이거나 가져가라. 천하오절 우리 사부가 쓰시던 거니, 그 정도면 충분히 증표가 되겠지?”
“문각 대사님의 바리? 사부님의 바리라면 이렇게 함부로 굴릴 물건이 아니잖으냐. 의발에 쓰는 물건인데…….”
“그러니까 그걸 주겠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바리는 문각이 의발로 전한 게 아니었다. 홍오가 문각에게 대들다가 문각이 화가 나 집어던진 걸 주워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도 술잔으로 쓰기 딱 좋다며…….
“나중에 증인도 세워야 한다. 내가 너를 이기면 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해.”
재차 다짐받는 윤언강을 보면서 홍오는 조금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윤언강에게 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기만 주는 건 왠지 아깝다.
잠깐 고민하던 홍오가 말했다.
“좋다. 대신 한 가지만이다. 그리고 너는 날 이길 때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와 내게 인사를 시켜라. 평생 이기지 못한다면 평생을 찾아와야 한다. 제자들끼리 비무도 시키고, 논검도 하면 꽤 재미날 거야.”
대형(大兄) 노릇을 하겠다는 홍오다. 마치 약소국이 대국에 매해 조공을 바치는 사절을 보내야 하듯 굴욕적인 조건이었지만 윤언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증인까지 구해 바리를 두고 다시 약속을 했다.
홍오가 귀찮다고 몇 번이나 불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윤언강의 이야기를 듣고 난 굉운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젊은 날 끓어오르는 혈기에 별다른 무게감 없이 오고간 약속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것이 소림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만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홍오가 사부의 바리를 증표로 준 것만 해도 얼마나 그때의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지 알 만했다. 사문의 존장이 쓰던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홍오에게야 그것이 술잔일지 몰라도,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소림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물론 홍오는 그 뒤에 지금처럼 일이 진행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홍오는 몰라도 윤언강은 지금껏 충실히 약속을 지켜왔다. 비록 세간에는 그것이 홍오와의 친분 때문이라 알려져 있었으나, 새로운 제자를 들일 때마다 홍오를 찾아왔다.
‘그것이 단순한 친분이 아니라 지난날의 약속 때문이었던가…….’
자존심 하나로 사는 무인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조공을 바치듯 홍오에게 찾아와 제자를 보이느라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수십 년 맺힌 한은 얼마나 클 것인가…….
굉운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는가?”
말을 마친 윤언강은 후련하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굉운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바리 그릇이…… 본사의…….”
“문각 선사께서 쓰시던 바리일세. 내 나중에 소림에 왔을 때 확인을 했네. 생전에 문각 선사께서 홍오가 바리를 훔쳐가 새로 장만하셨다며 노발대발하셨다더군. 증인도 있었으니 얼마든지 확인해보게나.”
굉운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것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네.”
윤언강이 크게 껄껄 웃었다.
“자네는 왜 꼭 그것이 지금이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겠지?”
“그렇습니다.”
“당연하지! 아무리 증인이 있고 물증이 있다 한들, 기억도 못하는 홍오에게 어떻게 이 바리를 내보일 수 있겠는가! 심지어 홍오는 마지막에 한 말을 제자들을 내세워 비무를 하자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더구만. 나도 처음 한 이십 년 동안은 홍오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네.”
굉운이 흠칫했다.
윤언강의 말을 되새겨보면 홍오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뜻이 아닌가!
윤언강이 수염을 훑듯이 매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방장 대사는 홍오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걸 모르는 겐가? 소림이 손을 쓴 줄 알았더니 다른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군.”
윤언강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뭐, 좋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네는 모르고 있겠지만, 현재 홍오는 과거의 기억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무공까지 되찾았네.”
굉운은 적이 놀랐다.
어떻게 홍오가 무공을 되찾게 되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라…… 나라밀대금침술 때문에 말인가?”
굉운이 애써 놀람을 감추며 윤언강을 쳐다보았다. 윤언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그것이었군. 정말 그것인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네. 참으로 궁금한 일이었지. 왜 문각 선사께서 갑작스레 입적하시며 홍오는 기억을 잃고…… 무공까지 답보(踏步)의 상태였을까 말일세.”
굉운은 이를 꾹 깨물었다. 입에서 계속 쓴맛만 난다.
윤언강이 말했다.
“그래서 그랬는가? 홍오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더라니. 소림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나라밀대금침술을 제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그럴 만도 했을 터.”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셨습니까? 사숙께서 말입니까?”
“내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한 이유에는 그것도 있네. 홍오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일세. 즉, 주어진 기회가 지금밖에는 없다는 뜻이지.”
굉운은 금세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주화……입마…….”
“아마도 그럴 것일세. 홍오는 자신의 잠력까지 쏟아내어 최후의 불꽃을 피우고 있네. 때문에 지금의 홍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지!”
굉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홍오가 자신의 말을 검증할 때가 오기를! 예전의 무공을 되찾기를!”
굉운의 이마에 핏기어린 식은땀이 맺혔다.
윤언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홍오는 이제껏 그 누구도 받아낼 수 없었다던 공명검을 파훼해야 하는 것이다. 주화입마의 상태에서는 평소보다 몇 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지만, 과연 그래도 공명검을 막아낼 수 있을까?
윤언강이 인자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굉운을 바라본다. 굉운이 억지로 기운을 짜내 물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군요.”
“무언가?”
“그렇다면 사숙을 만나셔야지 왜 이곳에서 저희의 앞을 막고 계시는 겁니까?”
윤언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거야 원! 나를 어떻게 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겐가. 나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닐세. 나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는 친구들이 있질 않은가 말일세.”
풍진!
굉운이 말을 하기도 전에 윤언강이 먼저 말을 잘랐다.
“홍오가 만약 남궁호에 이어 풍진의 검까지 파훼하게 된다면…… 확실히 무공을 되찾았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이 될 터. 그때에야 나와의 약속이 이행될 자격이 생기는 것일세.”
검왕 남궁호까지!
홍오가 검왕과 청성일검을 연이어 상대한다는 말에 굉운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윤언강은 당연히 홍오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풍진과 남궁호에게 양보하는 듯 보이지만, 굳이 그때의 약속을 이행하고 싶지 않다는 듯 보이지만…… 이미 윤언강은 그 둘이 홍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홍오가 우내십존의 둘을 꺾는다면 엄청난 파란이 닥칠 터였다. 그러나 그때에 윤언강이 나서서 홍오를 꺾어 버린다면?
우내십존의 둘을 이긴 홍오가 윤언강에게 패배하는 꼴이 다. 우내십존이 셋이나 덤볐다는 꼴사나운 사실도 공명검의 재림 앞에서는 묻힐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공은 윤언강이 가져가고, 윤언강은 그가 원하던 대로 현 강호의 천하제일인으로 확고히 자리하게 될 것이었다.
굉운은 그가 극적인 효과를 노린 치밀한 계산 속에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오랜 수양에도 불구하고 굉운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실로 역겹군요.”
모든 사실을 알고도 때만 기다리며 속내를 감추고 행동한 윤언강의 행동이 역겹다. 수십 년간 타인의 이목을 속여 왔던 그의 행보가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역겹다.
그러나 윤언강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자네가 뭐라고 말하든, 홍오는 비로소 그때 스스로 한 말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일세! 오랜 세월 기다려온 내게 자신의 말을 입증해야 할 것일세!”
말을 할 때와 달리, 다 털어놓고 나서는 정말로 즐거운 듯 보이는 윤언강이다.
굉운은 안타까웠다.
윤언강은 막 소림을 떠나려던 차였다.
홍오가 왜인지 몰라도 갑자기 무공을 되찾지 않았더라면…… 아니, 적어도 반나절만 늦게 무공을 발휘했더라도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터였다.
어찌하여 우연과 필연은 이런 식으로 소림에 시련을 안겨주는가!
굉운은 고뇌했다.
피를 많이 흘려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소림의 위기 앞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굉운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윤언강을 막을 수는 없으나, 윤언강을 이대로 보낼 수도 없다.
‘이건 단순히 검성이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얻기 위해서 꾸민 일이 아니다. 사숙을 쓰러뜨리고 난 후에 그 대가로 요구할 것이 더 중요한 게다.’
윤언강이 홍오를 꺾어봐야 그 혼자만이 천하제일인이 될 뿐이다. 그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화산이 소림의 위에 서는 것이다.
하지만 윤언강이 승리의 대가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한 가지의 요구가 소림을 화산에 굴복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뭐지?’
남들의 눈이 있고 체면이 있는데 상승무공의 구결을 전해달라는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봐야 소림은 한 가지 무공을 잃을 뿐이고, 그로 인해 화산이 소림을 앞선다고는 할 수 없다.
‘잠깐…….’
굉운은 반대로 생각했다. 겨우 단 한 가지로 인해 소림이 무너질 수 있는 것.
그것을 생각해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굉운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설마!’
소림의 전답이든 본사의 건물이든 마음대로 내줄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내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장경각!’
장경각에 보관된 소림의 무공 비급들!
‘만일 검성이 장경각의 출입을 요구한다면…….’
소름이 끼쳤다.
윤언강은 분명 그럴 것이다. 홍오가 타 문파의 무공을 훔쳤듯, 그 역시 같은 것을 요구할 게 확실하다.
장경각을 통째로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장경각을 며칠만 출입할 수 있도록 요구한다 하더라도, 검성이라면 충분히 소림에 전해지는 모든 무공의 요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만은!’
소림의 무공 요결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면 소림은 앞으로도 영원히 화산의 무공을 앞설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강호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소림은 걷잡을 수 없이 나락의 길에 빠져들고 말 터다. 윤언강이 그 정도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훗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지독하구나. 참으로 지독한 일이야!’
소림을 넘어서기 위해, 홍오를 넘어서기 위해 윤언강은 광왕의 공명검까지 부활시켰다.
그가 얼마나 이를 갈았으며,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는지 추측하고도 남는다.
‘공명검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설사 사숙이라 할지라도…….’
직접 공명검을 상대해 본 굉운은 참담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검성의 일초도 막기가 어려웠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심검 수준의 검을 홍오라고 해서 무슨 수로 막을 수가 있겠는가!
‘내 진작 문원 사숙조의 말씀에 따랐어야 할 것을…….’
이미 공명검을 얻은 윤언강을 상대로 수의 단계에 올랐어도 이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굉운이 수의 경지에만 올랐어도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굉운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알았다.
고요한 모습으로 굉운은 뒤로 돌았다. 수많은 소림의 제자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굉운을 보고 있었다.
“모두들, 잘 듣거라. 나는 이번 한 걸음에 내 평생을 바치려 한다.”
“방장 사형! 이미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사백님! 그건 무리입니다.”
굉운이 그들의 말을 잠재우며 다시 말했다.
“내가 만일 실패한다 하더라도 누구도 멈춰서는 안 될 것이야. 최후의 한 사람이 남더라도…… 검성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비장한 각오가 소림승들의 얼굴에 떠오른다. 굉자배도 원자배도…… 무자배의 승려들까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갔다.
결연한 표정과 죽음을 각오한 투지가 계단을 넘실거려 윤언강에게까지 닿아갔다.
윤언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희생이 될 뿐이야. 나는 홍오의 대결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보낼 수 없네.”
굉운은 소림승들을 향해 가벼운 눈인사로 마지막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당당히 윤언강을 향해 당당히 몸을 돌렸다.
“오르겠습니다.”
윤언강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소림승들의 비장함만큼이나 지독한 살기가 어렸다.
“혈향이 더 짙어지겠군…….”
그가 내뱉은 말은 겨우 그것이 다였다.
굉운은 조용히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지독한 내외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버리자. 버려야 한다…… 승부도…… 소림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에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진원진기까지 모두 쏟아내서라도!’
계인이 찍힌 굉운의 민머리에서 뿌연 김이 피어오른다. 눈의 광채가 밝아지고 전신에서 땀이 흐른다.
소림승들이 탄식과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깨문다. 목숨을 건 굉운의 눈물어린 투혼을 차마 볼 수 없음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공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얼마 되지도 않는, 하지만 사용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원천 진원진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그러나 그때.
돌연 윤언강이 살기를 거두었다.
“방장 대사, 이제 그만 놀이를 끝내야겠네.”
굉운이 막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놀라 멈추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윤언강이 큰 소리로 웃었다.
“껄껄껄! 이게 웬일인가! 정말로 홍오가 해냈네!”
“설마!”
윤언강은 굉운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반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른다.
갈(喝)-!
우르르릉.
하늘을 찢어발기는 뇌성벽력처럼, 소림의 본산은 물론이고 온 천지를 뒤집어엎을 듯 거대한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그 사자후는 금강문으로 달려오는 홍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금강문의 지붕 위에 있던 허량이 인상을 쓰며 옆으로 멀찍이 비켜나고 있었다.
금강문의 지붕 아래까지 오른 윤언강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남궁호에 이어 풍진마저도 쓰러지다니! 홍오야, 정말 대단하구나!”
그러나 굉운은 막막한 심정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붉게 물든 구름들이 처연히 흘러가고 있다.
차라리 홍오가 검왕이나 청성일검의 손에 쓰러졌다면 적어도 소림이 끝날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결국 윤언강이 의도한 대로 홍오는 강호의 절대 강자인 우내십존의 둘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홍오를 말리고 싶으나, 윤언강이 막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렇게 끝나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굉운은 눈을 감았다.
‘나무아미타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윤언강에게 달려오는 홍오의 목소리가 귓가로 아스라이 흘러갔다.
☆ ☆ ☆
풍진과 대화를 나누던 홍오가 돌연 욕설을 내뱉으며 금강문으로 달려간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원호는 깜짝 놀랐다.
홍오가 풍진까지 쓰러뜨리긴 했으나, 아직 무당의 환야와 화산의 검성이 남아있다. 홍오가 이긴다면 좋으나 둘을 이긴다는 것은, 특히나 검성까지도 상대한다는 건 무리다.
불길한 느낌이 원호의 정신을 일깨웠다.
“막아야 한다!”
그러나 원호가 막 공력을 끌어 올리며 발을 떼려는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크윽!”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실린 남궁호의 고성(高聲)이었다.
원호는 끌어올린 공력이 절로 해소되며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조종하는 듯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제왕검형!
“크으으으!”
원호가 제왕검형의 권역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으나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몸이 수천 가닥의 천잠사에 결박된 것 같았다.
‘어떻게 사숙조는 이런 압박을 견뎌냈단 말인가!’
문득 홍오가 한 말이 떠오른다.
– 제마보를 쓰면 제왕검형의 압박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홍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소림의 무공만 배우고 익힌 원호가 공동파의 제마보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리고 안다고 해도 제마보를 펼칠 수 없었다. 운신이 제약되고 기를 완전히 제압당해, 제마보고 뭐고 무공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홍오가 쉽게 남궁호를 제압했다고 해서 결코 남궁호가 쉬운 상대는 아닌 것이다.
새삼 홍오가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으나, 어쨌거나 원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다.
“마, 막아라!”
해번소에 있던 소림의 나한승들이 급히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남궁호에 의해 몸을 속박당했다. 소림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남궁호의 손짓에 의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원호는 억지로 버티고 또 버티려 했으나 버틸 수 없었다.
털썩.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무릎이 바닥으로 꿇려진다.
“검왕-!”
원호의 부르짖음도 남궁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원호는 무릎을 꿇는 와중에도 유독 장건만이 남궁호의 속박에 걸려들지 않았음을 보았다.
“건아-!”
장건이 원호를 쳐다보았다.
“원호 사백님!”
원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숙조를…… 홍오 사숙조를 막아야 한다!”
장건은 대답할 틈도 없이 쭉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원호의 판단이 옳았다. 미친 듯 날뛰는 홍오를 말려야 어떻게든 진정될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런 장건의 앞을 퉁퉁한 체구의 중년 도장이 막아섰다. 풍진의 제자인 송덕이었다.
“비키세요!”
“안 돼!”
송덕은 어쩔 수 없이 장건을 가로막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사부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 이해해 줘.”
“시간이 없다구요!”
장건은 그냥 송덕을 지나쳐 가려 했다. 앞발을 축으로 몸을 반회전시켜 송덕을 옆으로 타고 넘듯 스쳐갔다.
하지만 송덕은 장건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송덕은 청성의 보법을 밟으며 장건과 반대로 몸을 돌렸다. 결국 둘은 다시 마주보는 상태가 되었다.
송덕이 수련용의 목검을 갑자기 내지르며 소리쳤다.
“미안하다! 미안해!”
순둥이 같은 인상에 후덕한 몸집인데도 송덕의 검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광이 장건을 짓쳐들었다.
담긴 공력보다도 필사적인 송덕의 검은 무당의 청우보다도 훨씬 빨랐다. 장건은 두 개의 검광을 나한보를 밟아 슬쩍 피하고, 세 개의 검광은 용조수로 흘려버렸으나 나머지 검광을 미처 해결하지 못했다.
무리하게 지나치려다가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한 탓이 컸고, 송덕이 그만큼의 무위를 가지고 있음을 예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장건은 재차 금강부동보와 천종미리보까지 사용하며 뒤로 물러나 겨우 나머지 검광을 피해냈다.
송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대단하구나, 너. 내가 겨우 한 개 검초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보법을 밟다니…….”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장건이 안타까운 눈으로 송덕의 뒤를 바라보았다. 이미 홍오를 쫓기는 늦었다.
홍오는 벌써 윤언강과 이십여 걸음을 앞둔 상태다.
“이놈! 네가 그것 때문에 이따위 짓을 꾸몄느냐!”
거친 파도처럼 윤언강을 향해 달려가며 내지른 홍오의 일갈, 그것과 함께 윤언강이 천천히 손을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윤언강의 눈가에, 흰 머리칼과 수염의 끄트머리에 영롱한 자줏빛이 어린다. 자하신공을 극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윤언강이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구나, 친구여.”
“개소리 작작하고 내 사부의 유품이나 내놓아라!”
홍오는 양손에 엄청난 공력을 품었다. 두 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공기가 일그러져 손의 형태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때.
장건은 보았다.
윤언강의 손끝에서 길게 이어진 가는 선을.
명주실보다도 훨씬 가느다란 선 하나가 윤언강의 손끝에서부터 홍오의 가슴에 닿아 있다. 그러나 홍오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윤언강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대사님은 저걸 못 보고 계신 건가?’
풍진이 내뿜는 기의 그물과는 다르다. 기의 그물은 피할 수나 있었는데, 윤언강의 선은 언제 홍오에게 닿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이 생기는 순간 이미 홍오의 가슴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해야 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은 확실했다.
장건은 공양간에서 그 선을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위협적으로 느끼진 못했었다.
지금은 손발이 저릿할 정도로 보인다.
죽음을 부르는 선(線)!
오싹해진 장건이 홍오를 불렀다.
“대사님-, 홍오 대사님-!”
그러나 홍오는 듣지 못했다. 고함을 지르며 달릴 따름이다.
“이번엔 확실히 죽여 버릴 테다!”
홍오의 눈에서 빗발치듯 뿜어져 나오는 혈기는 거의 핏물에 가까웠다. 극도의 감정 폭발로, 홍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윤언강뿐이었다.
그리고.
윤언강의 입이 열렸다.
묵직한 저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쓰러져라.”
그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다. 내공을 싣지도 않아 몸을 울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서 읊조리는 말에 비슷했다.
온화한 표정의 노인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번소 내의 모든 무인들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고요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덕이었다. 한창 지저귀던 새소리도, 벌레울음 소리도……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무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모든 적막과 모든 고요함이 한곳에 몰린 듯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인지…….
달려들던 홍오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윤언강을 겨우 대여섯 걸음 앞에 둔 거리였다.
그 상태에서 홍오와 윤언강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윤언강이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툭.
투툭.
다 해진 옷소매가 모서리에 걸려 뜯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나둘 쏟아지던 가랑비가 굵은 소나기의 빗줄기가 되듯, 그 소리는 연이어 터져 나왔다.
투투툭! 투투투투-
정말로 비가 내렸다.
홍오의 몸에서 피의 비가 뿌려지고 있다.
삐딱하게 고개가 뉘여진 홍오의 몸에서 분수처럼 뿜어진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혈우(血雨)를 만들어 낸다. 뿌려지는 혈우가 서로 부딪치며 아스라한 피안개를 피워 올린다.
“큭큭…….”
홍오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웃었다.
“큭큭큭큭…….”
홍오는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웃었다.
장건이 울부짖었다.
“홍- 오- 대- 사- 님!”
홍오가 장건의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피범벅이 된 끔찍한 얼굴로 홍오가 장건을 보며 웃어 보였다. 두 눈은 벌써 생기를 잃고 핏물에 젖어 침잠해 있다.
“분하다…… 분해…….”
홍오는 꺼질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되뇌었다.
처절하고 처참한 표정…….
그만큼이나 분한 어조.
그리고 홍오의 작은 몸은 차차 옆으로 기울어져 갔다.
털퍼덕.
피를 많이 뿜어낸 탓인지, 홍오의 작은 몸이 땅과 맞닿는 소리는 아주 조그맣게 들려왔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새빨간 피안개가 홍오의 쓰러진 몸을 덮으며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이익!”
찢어지도록 입술을 깨문 장건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윤언강을 쏘아보았다.
윤언강은 양팔을 길게 늘어뜨린 채 고개를 약간 들었다. 눈은 가볍게 감고, 이 순간을 음미하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입이 중얼거리는 모양을, 장건은 똑똑히 보았다.
“이제 소림은 내 것이다.”
소리는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윤언강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장건은 소름이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