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99
제 4 장 심마에서 벗어나다
장건은 혼자서 구석지고 조용한 속가제자들의 숙소 뒤편을 찾아갔다.
장건은 곰곰이 생각했다.
‘대사형의 말이 맞아. 당장 할 수도 없는 일에 자꾸만 매달려 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 보자.’
공명검은 생각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굉목의 일 역시 이미 지나간 일,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자아, 그럼.’
억지로 잡념을 떨쳐 버린 장건은 소요매화검을 들었다.
매화가지가 승천하는 용처럼 검집을 휘돌며 장식되어 있는 멋진 검.
검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검을 뽑아본다.
스릉.
검신이 몸을 드러내며 휘황찬란한 백색의 검광이 뿜어 나온다.
아무리 검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범상찮은 검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 검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검성의 그 말을 듣고 장건이 소요매화검의 날을 갈아 버리지 않을까 기겁했었다. 하지만 장건은 검을 말끔하게 ‘손질’하다가 날이 너무 예리해져서 갈았다. 그 후에는 모두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으니 그리한 것뿐이다.
지금의 소요매화검은 그렇게 손질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장건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아무런 하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손질할 정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칫 잘못 손을 대면 지금의 색이 변질될까 봐 그게 더 두려울 정도였다.
장건은 다시 한 번 소요매화검을 만든 장인의 솜씨에 감탄하며 검신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한번 베어 볼까?’
갑자기 충동이 일었다.
장건은 ‘벨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쩡한 것을 함부로 벨 수는 없었다.
잠깐 주변을 찾아다닌 후에 장건은 정말로 쓸모없어 보이는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찾아냈다.
나뭇가지를 위로 던지고…… 소요매화검을 아무렇게나 들어 나뭇가지를 벤다.
툭.
가볍게 둘로 잘린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검은 보검이다. 뭔가를 베었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장건은 잘린 나뭇가지를 들어 다시 던졌다. 그리고 검으로 재차 베어 본다.
싹! 툭.
이번에도 나뭇가지는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흐음…….”
장건은 검을 내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안 되네. 검을 휘두르는데 잘라지지 않는다는 건 무리야. 하물며 이 검이라면 정말 바위라도 자를 수 있겠는걸.”
물론 검성 윤언강이 검으로 나뭇가지를 베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 적은 없다. 그러나 장건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검성이라면 이 나뭇가지를 베지 않았을 거라는 걸.
검성이라면 이 예리한 소요매화검을 들어도 마찬가지로 원하는 때에 베고, 베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날카로운 검으로 베어도 베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의지라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장건은 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햇빛에 검을 비추어 보았다. 반짝반짝하는 게 보기 좋아 자꾸만 보게 된다.
부웅, 부웅.
장건은 별생각 없이 이리저리 검을 휘둘러 보았다. 검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보니 휘두른다고 해도 애들 장난처럼 격식도 없는 마구잡이다.
“나뭇가지 말고 바위 같은 걸로 해 볼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장건은 실소가 나왔다. 나뭇가지든 바위든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건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라?”
장건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희한한 것을 보듯 소요매화검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어어?”
장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왜…….”
그때.
“건아! 건아아!”
소왕무가 멀리서부터 장건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장건은 무슨 일인가 하며 소왕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유 있게 달려온 소왕무가 다짜고짜 웃었다.
“우하하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작업에서 빠져도 된대.”
“그래?”
소왕무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래가 아냐. 그게 얼마나 지겨운데! 차라리 땡볕에서 수련하는 게 낫지. 죙일 앉아서…… 끔찍하다, 끔찍해. 으으.”
과장되게 몸을 흔들던 소왕무가 시큰둥한 장건의 얼굴을 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근데 넌 뭐하고 있었냐? 검까지 뽑아들고.”
“좀 이상한 게 있어서.”
소왕무는 ‘네가 하는 건 다 이상해.’라는 말을 막 내뱉으려다가 참았다. 작업에서 빠지는 대신 장건에게 온 이유가 있었다.
소왕무는 무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대사형, 건이에게 가 보라니요?
– 건이가 심마에 든 건 알지?
– 예.
– 내가 여쭤보니 당장은 사백님마저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혹시 잘못되지 않도록 네가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이상타 싶으면 바로 내게 와서 알리거라.
그게 작업에서 빠진 이유였다.
그리고 장건을 지켜보기는 하되 섣불리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들었다. 심마에 들었으니 반은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라, 한마디 말로도 잘못될 수 있다.
‘조심조심, 말조심.’
소왕무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이 검…….”
장건이 소요매화검을 내밀었다. 덕분에 날카로운 칼끝이 소왕무를 향했다.
“야야, 무섭잖아. 그런 걸 함부로 휘두르면 어떡해.”
“이것 좀 한번 들어봐.”
“엥?”
소왕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갑자기 그걸 집으래?”
“집으라는 게 아니라 들어보라는 거야.”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걸 들어보라는 거냐고.”
“있잖아, 조금 이상해서 그래.”
소왕무가 코를 벌름거렸다.
“야! 이상한 걸 왜 나한테 들어보래?”
“그냥…….”
장건은 무언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손목을 뒤집으며 검을 살짝살짝 움직여 보더니 말했다.
“처음엔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거워. 확실히 무거워졌어. 원래 검이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하고 그래?”
“보통 검은 안 그런데 그건 화산의 보물이잖냐. 우리가 모르는 신기한 효과가 있을 지도…… 에에? 아닌데? 뭐하러 그런 쓸데없는 검을 만들어? 무게가 들쑥날쑥하면 쓰기 어렵기만 할 텐데?”
“아무래도 그렇지?”
장건은 소왕무와 조금 떨어져서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건은 선 채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이런 자세도 취해보고, 저런 자세도 취해보며 여러 방법으로 검을 휘둘러 본다.
완전히 거기에 빠졌는지 소왕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장건이 취하는 동작이라는 게 그 어떤 검법의 형(形)도 아니었고 특이한 자세도 아니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동작이다.
“후아암.”
벌써 한 시진이 넘게 구경만 하고 있던 소왕무는 어쩔 수 없이 길게 하품을 했다. 검초를 수련하는 것도 아니어서 재미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땃땃한 햇살에 절로 눈이 감겨온다.
‘심마는 정말 무섭구나.’
소왕무로서는 장건이 미쳐서 저런 행동을 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인 장건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약한 느낌이지만, 검은 분명 무게의 경중(輕重)이 변하고 있었다.
그것이 왜 그러는지, 원래 검이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장건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던 장건의 몸은 은근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후우, 후우.”
거의 반쯤 눈이 감긴 채로 소왕무가 물었다.
“다 했냐?”
“아니.”
“후아아아암. 아직도 왜 무게가 변하는지 모르겠어?”
“응.”
“정 모르겠으면 무게를 달아보든가.”
소왕무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장건은 뛸 듯이 좋아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고마워.”
“어? 정말 달아보게?”
“창고에 가면 아마 천평칭(天平秤)이 있을 거야.”
장건은 기뻐하며 창고로 달려갔고, 소왕무는 하품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작업을 안 하니까 좋긴 한데, 종일 가만히 있는 것도 고역이네 이거.”
소왕무도 곧 장건의 뒤를 따랐다.
☆ ☆ ☆
“검의 무게를 달아 달라고?”
창고 앞의 화주승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장건이 내민 소요매화검을 들었다. 검집을 빼고 들었기 때문에 예리한 날이 번뜩이고 있어 왠지 모르게 찜찜하기도 하다.
하지만 장건의 표정이 워낙 진지한 것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화주승이 검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놓아보더니 말했다.
“한 여섯 근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확실히 보검이라 그런가? 이 정도면 가벼운 편인걸.”
장건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저울에 달아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무게를 아세요?”
“원래 이 일도 오래 하다 보면 감이 오는 법이란다.”
“죄송한데 좀 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나요?”
“어디 보자.”
화주승은 귀찮아하지도 않고 저울에 검을 올려 두고는 추를 매달았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좀 더 작은 추들을 매달아 맞춘다. 곧 기우뚱하던 저울대가 천천히 평형을 이루어간다.
장건은 진지하게 저울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주승이 저울이 딱 수평을 이루자 입을 열었다.
“정확히 다섯 근하고 열 냥이다.”
“감사합니다. 조금 있다가 한 번만 더 재주세요.”
장건은 저울대 위의 검을 들어서 옆으로 가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주승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왕무를 보고 물었다.
“쟤 왜 저러냐?”
“저도 모르겠어요. 검이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가 그런대요.”
화주승은 놀란 표정도 없이 혀를 찼다.
“쯧쯧.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안색을 보니 내상도 좀 있는 듯한데.”
“하루 종일 저러고 있었어요.”
“쯧쯧쯧.”
장건이 심마에 들었다는 것은 소림에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마 후, 장건이 다시 와서 무게를 달아 달라 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다섯 근하고 열 냥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게 당연한 결과이니라. 세상에 어떤 칼이 무게가 왔다 갔다 한단 말이냐.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칼이라면 또 모를까, 무게는 변하질 않는 게다.”
“하지만……”
장건의 찡그린 얼굴을 본 화주승은 안쓰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하구나.’라는 딱 그 표정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장건은 검을 휘두르고 무게를 달았으나, 결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 ☆
소왕무는 아주 죽을 것 같았다.
‘와…… 정말 지친다, 지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누군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차라리 작업이나 계속하게 해달라고 할걸.’
벌써 일주일째.
장건은 공양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손에서 검을 놓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제대로 된 검법 수련이라면 구경하는 맛이라도 있겠다.’
여전히 장건의 동작은 검법 흉내에도 못 미친다. 아니, 아예 검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몸을 배배 틀어가며 억지로 들고 있다고 하면 정확하다.
그나마 며칠 동안은 계속 동작을 바꾸어 가며 검을 휘둘러보더니, 요즘은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검을 들고 있기만 했다.
자세히 보면 정말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너무 느리다.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가 되는 데에 이각 이상이 걸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모습이 신기해 보일 수도 있다. 여섯 근이나 나가는 쇳덩이를 온종일 들고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소림의 제자들은 입문 2년차부터 그보다 무거운 물지게를 양쪽에 지고 외다리로 반 시진씩 서는 수련을 한다.
벌써 6년차를 넘긴 소왕무는 어른 머리만 한 크기의 철구(鐵球) 두 개를 들고 한 시진에 약간 못 미치게 버틸 수 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외가 공부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래저래 지겨울 수밖에.
“이건 뭐, 동상도 아니고. 후아암.”
하품이 멈춰지질 않는다.
“후아아아. 정말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나?”
대사형인 무진에게 얘기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진이 와서 장건의 손목을 짚어본 적도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장건의 내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지켜보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소왕무는 계속해서 장건의 곁에 있게 되었다.
‘으으! 답답해!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어야 혼자 뭘 하든 하지.’
마냥 지켜만 보던 소왕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관여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들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야, 건아. 칼 좀 잠깐 줘봐.”
장건이 동작을 거두고 약간의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소왕무는 거의 억지로 장건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갔다.
“내 도저히 답답해서 못살겠다. 나도 잘은 못하지만 봐봐. 검법이라면 이렇게 해야지.”
소왕무는 검을 거꾸로 뒤에 등 뒤에 대는 자세로 섰다. 검수가 아닌데도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다.
소림에서 아예 검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병장기에 대한 감각과 실전에서의 대처법을 익히기 위해 여러 가지 무기들의 기초적인 초식 정도는 가르친다.
“소진배검(蘇秦背劍)! 금침암도(金針暗渡)!”
소왕무가 펼치는 검식은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이다.
다른 건 알지도 못하거니와, 소림 제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삼재검법을 보여주는 건 – 이건 기본중의 기본이니까 –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나 소림 속가제자 중 최고라는 말은 괜한 것이 아니다. 검공이 주가 아니면서도 삼류 어중이떠중이들이 펼치는 검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동작은 절도가 있고 강할 때와 유(柔)할 때가 명확하다. 발걸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단단하다.
전체적으로 무(无)자 형태로 움직이는데 마치 가상의 상대와 움직이며 대련을 하는 듯했다. 본래 삼재검법이 강호에 널리 퍼진 이유도 그러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삼재검법을 펼치면 그대로 공방의 연습이 되도록 만들어져 수련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일각에 걸쳐 전반의 26식을 끝낸 소왕무는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주위를 둘러보며 장건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그리곤 장건을 보며 물었다.
“차라리 이거라도 배울래?”
소왕무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호의(?)를 베푸는 셈이다. 물론 자신도 심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약간의 덤이었다.
그런데 장건은 그런 소왕무의 호의를 무시하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배울래.”
단칼에 거절당한 소왕무는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널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그런다. 야…… 검이 가지고 놀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팍팍 찌르고 베라고 있는 건데 너처럼 하면 뭘 벨 수 있겠냐?”
장건은 전혀 생뚱하게 대답했다.
“베지 않으려고 하는 건데?”
“뭐?”
오히려 장건이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둘러도 나뭇가지 같은 건 그냥 잘라지겠지?”
“그렇겠지.”
“그럼 반대로, 생각을 하고 휘두르면 잘라지지 않는 것도 가능할까?”
소왕무의 눈이 퀭해졌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언제는 검이 가벼워졌다 무거워졌다 한다더니, 이제는 또 다른 소리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좀 전에 그 칼을 들어보니 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더라. 너무 예리해서 툭 건들기만 해도 손가락이 나갈 것 같더만.”
“다른 칼을 들면 안 그럴까?”
“임마, 날이 어지간히 상하지 않은 이상에야 칼은 다 똑같지! 자르라고 만든 칼이 안 잘리면 어쩌라고! 그럼 칼은 왜 만드냐?”
답답해서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소왕무였다.
그 순간.
장건이 갑자기 발을 툭 찼다.
그러더니 앞으로 검을 쭉 미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정쩡하게 선 상태에서 검만 내민 형태다.
“네가 그런 의도였다면, 아까 네가 한 열두 번째 동작은 이렇게 했어야 해.”
“열두 번째 동작?”
소왕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백사토신(白蛇吐信)이다. 하지만 백사토신은 앞발을 크게 내딛어 굽히면서 뒷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는 동작이다. 장건이 엉거주춤 서서 검을 내민 것은 전혀 백사토신이라고 볼 수 없었다.
소왕무가 황당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게 어디 백사토신이야!”
“초식 이름은 몰라. 나는 그냥 제대로 찌르려 했다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거야.”
제대로 검법을 아는 사람이 말했다면 모를까, 장건이 하는 말이었다.
소왕무는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하면 사형들한테 제대로 안 한다고 주구장창 얻어맞을걸? 너야말로 그렇게 해서 뭘 찌를 수가 있겠냐?”
“이렇게 해야 잘 찌를 수 있어.”
“호오, 그러셔?”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한겨울이 지나도록 미처 썩지 않은 갈색 낙엽 몇 장이 바람에 휘말려 날아다녔다.
“그럼 저 낙엽이라도 찔러보든가.”
장건은 소왕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드는 낙엽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스윽.
아무런 소리도 없이 검 끝에 낙엽이 닿았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도 낙엽은 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검 끝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건이 검을 회수하자 그제야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어?”
소왕무는 입을 떡 벌렸다.
한달음에 장건에게 달려가 떨어진 낙엽을 주웠다.
낙엽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다!
정말 딱 찌르기만 했다!
“헉!”
소왕무가 놀라서 신음을 내뱉자 낙엽이 바스러져 조각나 흩어진다.
“말도 안 돼!”
소왕무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흔히 검으로 찌르기, 자(刺)의 연습을 할 때 최고로 치는 것이 낙엽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가벼운 낙엽은 검으로 힘껏 찌르려 하면 휘날려서 빗나가기 마련이다. 더구나 손만 대도 바스러질 정도로 바싹 마른 낙엽에 살짝 구멍만 낸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껏 찔러도 낙엽이 잘리거나 부서지는 게 보통이다.
검을 십 년은 잡아야 겨우 낙엽을 꿸 수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그런데 장건은 매우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아무렇지 않게 낙엽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냈다.
소왕무가 만지자 금방 부서질 만큼 약한 낙엽에!
그것도 날이 무시무시하게 예리한 보검으로!
정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과 섬세한 힘의 조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수준이면 검기로 점혈도 할 수 있을 지경이다.
“어버버버…….”
소왕무는 말까지 얼버무렸다.
반면에 장건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역시 안 되겠어.”
소왕무는 뭐가 안 되겠다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당장 강호에 나가서 이름을 떨칠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이름이야 이미 떨친 지 오래지만.
하지만 왜 이런 실력으로 그렇게 요상한 자세를 취하며 종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 대체 언제 이런 실력을 쌓았을까?
소왕무는 입을 벌린 채 장건을 쳐다보았다.
장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 ☆ ☆
사실 장건의 첫 번째 고민은 이미 며칠 전에 해결되었다.
검이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가 하는 이유.
검의 무게를 달아보면서 확실히 알았다.
화주승의 말이 맞다.
검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장건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을까?
해답은 ‘기’에 있었다.
나뭇조각을 베었을 때에는 검이 가볍게 느껴졌지만, 그냥 휘두를 때에는 무겁다고 느꼈다.
나뭇조각을 ‘베고자’ 했을 때에는 단전에서 자연스레 기가 풀려 나오면서 적절하게 운용되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기가 운용되지 않았다.
당연히 검이 가볍거나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단전을 다쳤을 때 내공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니 몸이 무거웠던 것처럼, 그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만약 장건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장건의 몸에서는 기가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에만 그나마 반응하여 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때문에 장건이 그 미묘한 차이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장건이 확실히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에만 내공이 움직인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 장건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의지.’
검성 윤언강이 말했던 의지와 같은 의미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근접한 의미인지도 몰랐다.
윤언강의 검무에서 검은 검이 아니었다. 그가 베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때에 검은 비로소 검이 되었다. 소왕무가 말했던, 베기 위해 만든…… 찌르기 위해 만든 본연의 검이 되었다.
장건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머나먼 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공을 일으키는 것만도 벅찼다.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의지를 가졌을 때에 내공이 일어난다는 걸 안 후였다.
무엇을 베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도 무심결에 내공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희한한 일이었다. 또, 장건에게는 기껏 알아낸 사실 – 의지가 있어야만 기가 움직인다는 사실 – 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러지?’
검법을 모르는 장건으로서는 무작정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두 번째의 고민이었다.
그때에 장건은 또 다른 사실, 해답을 알아냈다. 아니, 기실 이미 알고 있었으나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특정한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기가 흐른다.
이제까지 장건은 주로 ‘선(線)’에 의지했다.
이를테면,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으려 하면 머릿속에 어떻게 그 젓가락을 집어야 가장 최소한의 동선으로 집을 수 있을지 그려진다.
그 선을 따라 움직이면 가장 효율적으로, 최소한의 힘으로 최적화된 움직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장건은 수년간 굉목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굉목처럼 움직일 수 있을지 생각하고 흉내 냈다.
단순히 흉내에 그치지 않고 매사에 그런 절약적인 움직임을 적용하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것이다. 장건이 보는 가상의 선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내공은 그 움직임에 약간의 힘을 보태줄 뿐이다. 내공이 주(主)가 아니다. 마음이 있고 몸이 가는 중에 내공이 따라 흐르는 것이다.
검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려는 동작에도 가장 효율적으로 베는 동작이 존재했다. 그것을 무시하면 내공이 따르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내공이 그 움직임에 맞춰 흘러가게 된다.
공명검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해보겠다는 건, 길도 모르는 주제에 앞서 달려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장건은 많이 부끄러웠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단순히 의지라고만 생각했으니…….’
그때부터 장건은 가장 기가 잘 흐를 수 있는 동작을 연구했다.
쉽지는 않았다.
누구는 검으로 베고 찌르는 게 전부라 뭐가 대단하냐고 할 지 몰라도, 하다못해 그냥 ‘벤다’라고 하는 동작만 해도 수백, 수천 가지가 넘었다.
검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얼마나 깊이 벨 것인지, 어떤 위치에서 벨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벨 것인지만 따져도 셀 수가 없다.
각각의 동작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 따져야 하는 장건으로서는 정말 굉장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장건은 섣불리 포기하지 않았다.
한 가지 동작과 상황을 가정해 놓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맞추어보았다.
내공과 인체는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똑같은 동작인데도 고개를 약간 눕히느냐, 팔꿈치를 어디로 향하느냐, 엉덩이를 얼마만큼 빼느냐, 어떤 발가락에 힘을 주느냐에 따라서 검에 들어가는 힘이 달라진다. 그것은 곧 내공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흘러 가느냐와도 관계가 있다.
그것들을 장건은 모조리 적용해보고 있었다! 심지어 전신의 근육을 다 사용해 가며!
소왕무가 ‘장건이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지루하게 생각했던 게 그 즈음이었다.
정작 장건은 매우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심하며 자신의 몸을 관조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근육까지 모두 움직여 본다. 움직일 때마다 관찰하고 들여다보아 최선을 찾는다.
처음에야 어려웠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장건은 점점 검에 익숙해졌다. 처음 무공을 배웠던 때처럼, 기본이 몸에 익으니 그 비슷한 동작들은 저절로 나오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전하지는 않아도 많은 동작들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이나 맨손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주 다르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무겁고 긴 것을 손에 들고 있으니 무게 중심이 달라진다는 걸 가장 다른 점으로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검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음에도 장건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장건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은 검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었다. 그건 결국 사람을 효과적으로 상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한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검성 윤언강처럼 검을 검이 아니게 만들 수 없다면 더 이상 공명검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없는 이상…… 아무래도 검이 필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람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방법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것을 공명검에 이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역시나 아직은 무리다.
“왕무야!”
장건이 갑자기 큰 소리로 소왕무를 불렀다.
아직 낙엽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소왕무가 깜짝 놀라 장건을 쳐다보았다.
“놀랐잖아! 왜!”
“검성 할아버지처럼 공명검을 하려면 얼마나 수련을 해야 할까?”
“그걸 몰라서 묻냐? 검성도 말년이나 되어서 깨달았다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한 백 년도 모자라지.”
“그렇지? 어휴…… 백 년이나…… 난 정말 바보 같다니까? 백 년 동안 무공 익힐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을까.”
하다못해 공명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검을 익혀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보면,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진작 들었어야 옳다.
“으이구, 으이구. 이 바보.”
찌푸린 날씨처럼 어두웠던 장건의 표정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두껍고 무거운 덩어리가 쑥 빠진 듯 개운하다.
소왕무는 얼빠진 얼굴로 장건을 보았다.
‘백 년? 검이라고 잡아본 적도 없는 놈이 일주일 만에 낙엽을 뚫어놓고? 너라면 백 년이 아니라 십 년도 안 걸리겠다!’
그런 소왕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건은 마침내 소요매화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착.
어디서 찾아왔는지 흰 천으로 검집째 돌돌 감고서는 등 뒤에 사선으로 매어 묵었다.
여전히 낙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소왕무가 물었다.
“뭐하냐?”
“당분간은 보지 않으려고.”
“그런다고 안 보이겠냐?”
“어차피 가지고는 다녀야 하니까 이게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렇게 싸놓으면 신경은 안 쓰일 것 같아서. 들고 다니다가 검이 빠져서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소왕무는 ‘허허’하고 노인처럼 웃었다.
“세상에 어떤 멍청한 놈이 검을 빠뜨린다는 거야?”
장건도 히죽 웃었다.
“나같이 멍청한 놈이겠지, 뭐.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소왕무가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밥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공양시간이 된 것 같긴 한데…… 너 어째 불안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응. 기분 좋아.”
“왜?”
“몰라. 그냥 막 후련하고 그러네? 백 년 동안 바보짓 할 뻔했다가 안 하게 돼서 그런가?”
장건은 신이 난 듯 먼저 공양간으로 달려갔다.
걸음이 완전히 딱딱해서 돌덩이가 날아가는 듯하다. 분명히 아침나절까지의 장건과 사뭇 다르다. 안색도 확실히 정상이다.
“드디어 원래대로 돌아왔구만.”
저 불편한 걸음걸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하지만 소왕무는 아직도 조금은 떨떠름하다. 하루아침에 검의 고수가 된 거야 원래 장건이 그런 녀석이었다 치더라도, 어쩐지 허망한 기분이다.
“정말 심마에서 벗어난 건가? 왠지 좀 심심한데……. 아, 뭔가 더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해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