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카스를 맞이했다.
방으로 들어선 루카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안 경의 일행을 뵙는 건 처음이군요.”
“인사는 생략합시다. 앉으시오.”
이안이 턱짓했다. 루카스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래서, 거인 군단장과 거인 왕국의 여왕이라고요…?”
루카스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군.
피식한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미리 준비해 둔 봉인함을 들고 다가왔다.
쿵, 봉인함이 탁자 위에 놓였다.
“이게 그 증거물이자 전리품이요.”
내뱉은 이안이 봉인함을 열었다.
“허….”
억지로 구겨 넣은 잘린 머리와 머리에 씌워진 왕관을 응시하며, 루카스가 탄식을 흘렸다.
한참 만에 놀람을 추스른 그는, 이안이 지하 궁전으로 가게 된 경위부터 물었다.
“이 정도의 유물을 처분하시려면, 획득 경위에 불경하거나 불법적인 과정이 없었는지를 조사하는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믿을만한 보증인의 설명이 첨부된 확인서가 있다면, 여러 반복적인 절차를 간소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차분한 설명에, 이안이 넌지시 되물었다.
“궁금해서 듣고 싶으신 게 아니란 말씀이시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만. 전에 보니, 이안 경은 유독 반복적인 절차를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서요.”
“그런 걸 누가 좋아하겠소. 하지만 어쨌든….”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이 귀찮으리란 건 확실히 알겠군. 여차하면 중간에 날치기당할 수도 있겠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보증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들겠죠.”
“도와주시는 건 고맙소만. 이유를 모르겠군. 사실 경에게는 귀찮은 일만 추가되시는 걸 텐데.”
“유물을 최초로 보증한 사람으로 제 이름이 기록에 남으리란 이유가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경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죠.”
“솔직하시군.”
피식한 이안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약간의 각색은 필요했다.
그의 손아귀에 낙인이 찍혔던 부분은 특히. 악마와 맹약을 맺었었다는 게 알려지면, 당장 타락자 취급을 받게 될 터였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신 것도 대단한데, 거기서 오히려 단서를 찾아내신 거군요.”
“거창하게 말씀하실 것 없소. 바보가 아니라면, 정체도 모르는 고대 망령의 유혹에 넘어가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제가 알기론, 세상엔 그런 바보가 정말 많습니다. 이안 경.”
‘…결론적으론, 나도 그렇지만.’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때때로 탄식하면서,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루카스의 시선이 커다랗고 끔찍한 머리통을 훑었다. 아공간에 들어있던 군단장의 머리는 썩지도 않은 채였다.
“산맥 한복판에 유적 입구가 있다는 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사단을 파견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곳인데….”
루카스의 시선이 머리통에 얹어진 황금 왕관으로 향했다.
“중요한 건, 정말 산맥 지하에 거인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옛 북부인들이 그저 망상에 사로잡힌 겁쟁이들이 아니었다는 의미죠.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북부인이 경께 감사를 표하게 될 겁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오.”
“저 역시 북부인으로서 경께 감사를 표합니다. 이젠 경을 도울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쁘군요.”
“북부인이셨소?”
이안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섞여 있죠. 지금 중요한 건 제 혈통이 아닌 것 같군요. 흠, 일단 경께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확인서를 써야겠습니다. 또한, 이 유물의 정당한 소유권이 경에게 있음을 확실히 해야겠군요. 가치를 감정하는 건… 저와 친분이 있는 사제님을 소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유물이라면, 본국의 대교회를 통해 정리하시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겠소.”
“작성해야 할 서류가 아주 많겠군요.”
읊조린 루카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뜻밖이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캐물으실 줄 알았소.”
루카스가 속내를 들킨 듯 볼을 긁적였다.
“사실 여쭙고 싶은 건 잔뜩 있습니다. 이건 설원을 배회하는 얼빠진 망령들 말고도, 정말 자치령의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실존하고 있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 경과 일행분들은, 이미 개인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야 할 어떤 책임이나 의무도 없으신데도요.”
“…….”
“이보다 더 큰 협조와 봉사를 요구할 순 없습니다. 산맥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위험과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조사하는 건 저를 비롯한 자치령에 몸담은 이들의 몫이죠.”
게임에서의 루카스가 떠올랐다. 공와 사의 구분이 확실한, 사명감과 책임감 넘치는 젊은 사령관.
어설프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핵심적인 부분은 현실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조금 전, 자신이 하던 고민을 떠올렸다. 그리고 끝내 퀘스트로 기울던 자신의 마음을.
“…훌륭하시군.”
“조사 병단을 파견하자는 건의를 넣을 겁니다. 당장 받아 드려지리란 기대는 크지 않습니다만.”
루카스가 사담을 털어놓듯, 한결 편해진 말투로 내뱉었다.
“검은 벽이 안정되고 나면, 아마도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조사가 끝나면 이안 경의 이름도 역사에 남게 되겠죠. 잠들어 있던 거인 여왕을 참수한 영웅으로요.”
“영웅은 무슨. 나는 오히려….”
잠시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반대편의 인간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카스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동행하던 상인 무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소. 설원을 배회하던 망자들이, 산맥 쪽으로 걸어가고 있더군. 그것도 매일 밤.”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산맥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낯이 설핏 굳어졌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어쨌건 내가 죽인 건 거인 왕국을 다스리던 존재요. 왕국의 망령들이 죽어서도 섬기던 존재이기도 하지. 그런 존재가 죽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잖소?”
“…….”
“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유물을 제값을 받고 처분할 생각부터 하는 인간이오. 영웅이 아니라.”
샬롯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태연하게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말없이 생각에 잠겼던 루카스가, 이윽고 그를 마주 보았다.
“경은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일어난 변화는, 경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굳이 꼽자면 자신의 백성들과 병사들을 타락시킨, 그 고대의 여왕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죠.”
“…….”
“경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언젠가는 북부를 침공했을 겁니다. 구심점을 잃은 지금은 본능만 남은 오합지졸들일 테고요.”
이안의 눈을 빤히 바라본 그가,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게다가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지금 이렇게 미리 경고해 주고 계시잖습니까?”
“…내 의도를 너무 좋게 보시는군.”
이안이 나지막이 실소했다.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군요. 요새 주둔군의 재편을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산맥에 망령 잔당들이 집결하고 있는 거라면, 반대로 출격하는 날도 있을 테니까요.”
“독단으로 가능하시겠소? 이런 민감한 시기에.”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을 겁니다. 경이 거인 여왕을 참살한 증거가 있으니까요.”
생각을 정리하듯 손가락을 까딱인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본국의 교단으로 서신을 넣고, 저는 직접 카링기온으로 가서 상황을 알리고 처리할 겁니다. 나쁘지 않은 일이죠. 이참에 곧바로 소속을 옮기는 것도. 그만한 명분이 생겼으니까.”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본 루카스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경. 덕분에 다가올 위협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으시고?”
“당장은 없을 것 같군요. 한동안 정신없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께 필요한 서류는 내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미소 지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트라벨가에서 뵙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전 여기서 하던 일을 다 원래대로 되돌리고, 바로 카링기온으로 갈 겁니다. 제가 돌아올 때쯤엔 경께선 떠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유물을 본국에서 매각하셔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
이안의 눈빛이 묘해졌다.
루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맥에서 어떤 것들이 밀려온 들, 장벽이 뚫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루카스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눈인사를 건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샬롯이, 문이 닫히자 이윽고 내뱉었다.
“꽤 완고한 자군. 나쁘지 않아.”
이안은 대답 대신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쓴웃음이 스쳤다.
‘…이렇게 싹 다 스킵인 거군.’
게임에선 존재했던, 루카스와 관련된 자잘한 서브 퀘스트들이 전부 사라졌으리란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곧바로 카링기온으로 떠난다면, 어쩌면 꽤 오랜 시간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검은 벽이 요동치는 건, 최소한 1년은 지나야 벌어지는 일이니까.
그의 건너편에 앉은 샬롯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했는데. 확실하게 경고해 주고 싶었던 거군. 네가 산맥에 모이고 있다는 망령들을 계속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안.”
“북부인들이 걱정된 거겠지.”
테사이아가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말했다.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만약에라도, 나한테 책임의 화살이 돌아오는 게 싫었을 뿐이야.”
***
다음 날 아침.
떠날 채비를 하는 이안 일행의 마차 앞으로 루카스가 다가왔다.
“필요하신 서류들입니다. 트라벨가의 교회로 가셔서, 페르마 사제님을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가문의 인장을 사용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보증하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그가 퀭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품에 잘 갈무리한 이안이 미소 지었다.
“정말 밤을 샌거군.”
“작성할 문서들이 많아서요. 제대로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일을 끝내시면 북부를 떠나실 겁니까?”
“글쎄…. 아직은 고민 중이오.”
대답한 이안이 이내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루카스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인들이 이주해 올 거요. 그중에서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 온 자들은, 내가 아는 자들이오. 트라벨가 인근의 정착지로 보내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 거요.”
“자치령에 정착하려는 거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혹시, 전사도 많습니까?”
“수십 명 정도.”
“그렇다면 대환영이군요. 요즘은 야인 출신 북부인으로만 꾸린 부대도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활짝 미소 지으며 말한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들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 십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그들의 대전사가 됐소.”
“예…?”
루카스가 멍하니 되물었다.
이안이 대꾸 대신 턱짓했다.
샬롯이 병사에게 미리 받아 뒀던 나무 상자를 루카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
상자 내부를 확인한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거인 군단장의 머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별로 비쌀 것 같지도 않은데 쓸데없이 크기만 한 놈이오. 난 왕관만 있으면 되니까, 그건 경이 쓰시오. 쓸 데가 있지 않겠소?”
“그야 당연히… 하지만 이걸 정말 제게 주셔도 되겠습니까?”
“썩지 않게 잘 보관하시오.”
내뱉은 이안이 마차에 올랐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또 봅시다.”
“…….”
마차가 출발했다.
푸드득-
머지 않은 지붕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마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루카스가, 그 날갯짓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돌렸다.
“이봐, 병사! 요새의 창고 중에 가장 추운 곳이 어디지?”
외치는 그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이 상자에 든 머리는, 절대 썩으면 안 되는 귀중한 증거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