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단검 날을 타고 불꽃이 번졌다.
퍼억-!
심장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화염구가 생성과 동시에 폭발했다.
눈코입으로 불빛이 번쩍인 프레야가, 그대로 재가 되어 폭발과 함께 흩어졌다.
남은 건 붉게 달아오른 단검 날과, 땅에 박힌 단죄의 검 뿐.
푸스스….
단죄의 검에 맺힌 신성력이 모두 흩어졌다.
이안은 검 자루를 쥔 채, 물끄러미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그랬듯, 또 뭔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으로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확인창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전부 그런 주문을 걸고 다니는 건 아닌 건가…?
생각하며,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상태창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경험치가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저번의 아스콜드와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냥 상성이 좋았던 건가…. 하긴. 정말 강한 놈 하나 보단, 적당히 강한 놈 여럿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하긴 하지.’
몸을 돌린 이안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박살난 마차와 토막난 고깃덩어리로 변한 말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제 남은 길은 꼼짝없이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탄식을 삼키며, 이안은 길 가장자리에 기대 앉은 샬롯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테사이아는 아직 의식이 없어 보였다.
샬롯은 사슬 갑옷이 다 찢겨져 나가고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그런 테사이아의 입술에 자신의 피를 찍어 바르는 중이었다.
“괜찮나?”
이안의 물음에, 샬롯이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면목이 없군. 갑자기 그런 괴상한 짓거리를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마차까지 잃다니….”
“내가 마법사를 먼저 죽여서 그렇게 된 거다. 애초에 처음부터 뱀파이어만 노렸어야 했는데.”
마차의 잔재를 뒤지며,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마지막 남은 술병이 완전히 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껴 먹던 건데, 시발.
그의 말이 위로라 여긴 듯, 샬롯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세상은 넓고, 강한 것들은 정말 많군. 난 마법 무구 없이는, 별 것 아닌 전사였을지도 몰라.”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그나마 멀쩡한 짐가방 하나를 들고 돌아온 이안이, 그녀의 앞에 가방을 내려 놓으며 코웃음 쳤다.
“증명은 이미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헛소리 마라.”
“…….”
샬롯은 그럴 리 없다는 듯 미간만 꿈틀댔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안은 게임에서도 용병을 종종 고용해 데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던전 두 개를 넘기지 못했다. 별 것 아닌 마물에게 맞아 죽거나, 보스에게 피떡이 되거나, 괴상한 상태 이상에 걸려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이름 있는 조연 캐릭터들 정도였다. 그나마도 뻑하면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기 일쑤였으니, 지금 샬롯이면 충분히 제 몫을 다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가 이 정도로 맘 편하게 보스 전의 일부를 맡기는 건, 메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을 꺼내 아직 뜨거운 운철 단검의 날을 닦은 이안이, 갑옷이 통째로 찢겨나간 샬롯의 옆구리를 살폈다.
가죽이 푹 파여 분홍빛 속살이 보이고, 깨진 사슬 파편이 주위에 잔뜩 박혀있었다.
“내장까지 상하진 않았군. 참아라.”
이안은 단검 끝으로 사슬 고리를 하나씩 꼼꼼하게 파냈다. 섬세한 손길. 움찔댈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던 샬롯은, 이윽고 그가 허리에 붕대를 감겨주기 시작하자 머쓱하게 내뱉었다.
“그, 나도 할 줄 안다만….”
“그걸 몰라서 해 주는 게 아냐.”
나한텐 응급 처치 스킬이 있거든.
지금까지의 경험상, 스킬 효과는 분명히 적용되고 있었다. 상처가 곪거나 덧나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특히.
단단하게 붕대질을 끝낸 이안이, 이번에는 그녀의 팔뚝을 살폈다.
“당분간 왼팔은 조심히….”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테사를 지키고 있어라.”
내뱉은 그가 일어섰다.
샬롯이 영문도 모른 채 상체를 뻣뻣하게 세우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마차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말들의 잔해로.
철퍽, 찌걱-
살덩이와 내장들이 꿈틀대며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단죄의 검을 뽑아 찍어버리지 않은 건, 저 역겨운 짓을 벌이는 오염된 마력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꿈틀대며 모여든 내장과 살덩이가, 곧 하나로 뭉쳤다. 부풀어 오르거나 변이되지는 않았다.
그저 농구공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타원형으로 단단하게 뭉칠 뿐이었다. 내장과 살점의 형태가, 굉장히 징그럽게 빚어낸 얼굴처럼 보였다.
내장들이 달싹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아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중간에 으깨 버리셨으면, 같은 주문을 다시 반복해야 했거든요. 이건, 보기보다 어려운 주문이랍니다.”
눅진한 기포가 터지는 것 같기도, 질척한 내장을 비비는 것 같기도 한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뭐야, 시발. 진짜 머리였어?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궁금했거든. 이런 짓거릴 하는 게 누구인지. 이제 알겠군. 흡혈 여제.”
“어머. 바로 알아봐 주시고, 그렇게까지 불러주시니 영광이군요. 저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이안 호프. 출신 불명의 용병이자, 아겔 란의 구원자. 그리고 벨 론데의 학살자.”
…학살자? 나도 모르는 악명도 있었군.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여제가 덧붙였다.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됐지만요. 사실 아스콜드 경이 당한 건 방심해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분은… 자신만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는 분이었으니까.”
“이번에 보낸 녀석들이 더 얼뜨기 같던데.”
“글쎄요. 프레야와 그녀의 애인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처음 듣는군요. 어쨌든… 프레야가 죽었다는 건, 당신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겠고요.”
“그래서, 복수라도 하러 오셨나?”
“그럴리가요. 그럼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겠죠. 저는 그저….”
내장과 살점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미소짓는 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당신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을 뿐이에요.”
“…흠.”
이안은 검 자루에 한 손을 얹은 채,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머리는 그저 통신 수단 정도밖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그냥 반으로 썰어버리기만 해도 본래의 살덩이로 돌아가리라.
“난 당신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어요, 이안 호프. 오히려 그 반대죠. 과거가 베일에 싸인 마검사 용병. 멋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엮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많이 애석했답니다.”
“애석함을 담아서 심판자를 하나 더 보내셨나?”
“들으셨을 텐데요. 당신을 설득하라고 보낸 거예요. 무력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쓰라고 했죠.”
“만나자마자 냅다 마법부터 갈기던데.”
“어머. 그랬다니 대신 사과하죠. 일족의 심판자들은, 쉬운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어쨌든, 저는 지금도 당신이 싫지 않아요, 이안. 서로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이유도 없고요.”
은근히 이름으로 부르네. 하긴, 상대는 최소 수백 년은 살았을 뱀파이어였다. 어떤 의미론 그에게 존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리라. 콧방귀를 뀐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너한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있는 것 같군.”
“저 아이 때문인가요? 그 아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요, 이안. 오히려 그 반대죠. 그저 일개 실험체에 불과해요. 대가로 무엇을 약속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나도 해 줄 수 있어요.”
얼굴이 질척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약속한 보상보다 더 많은 걸 줄 수도 있고요. 당신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죠. 우리의 일원이 되지 않더라도요.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후원하는 분들도, 적지는 않으니까.”
그래, 프레야가 한 것 보단 확실히 더 좋은 제안이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제가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요, 이안. 당신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설사 정말 우리 모두를 죽인다 해도, 당신에게 좋은 일은 없을 거고요.”
“너희 뒤를 봐 주는 존재가 나를 노릴 테니까?”
이안이 툭 내뱉은 말에, 머리통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정체 모를 내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요?”
“추측한 거지. 너희가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런 뒷배 없이 제국 바로 옆의 나라에 붙어살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네 반응을 보니, 제대로 맞췄나 보군.”
자존심이 상한 듯 잠시 꿈틀댄 얼굴이 이내 내뱉었다.
“그래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눈에 띄었어요. 여기서 우리까지 건드려서 좋을 건 없을 겁니다.”
“글쎄… 그건 네가 걱정해 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내뱉은 이안이 피식댔다.
사실 그 뒷배가 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원탁 의회.
타락한 귀족과 성직자, 마법사, 그리고 마족들에게서 때때로 언급되던 이름. 하지만 놈들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어떤 새끼들이 모여 있는지 까진 그도 알지 못했다.
놈들과 마주치려면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그저 스토리를 다 진행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4챕터 에서야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었을지도.
“말씀하시는 걸 보니, 끝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단 거군요.”
이윽고 여제가 내뱉었다. 그 선홍색 머리통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말했다.
“어차피 넌 내가 원하는 걸 줄 수도 없어.”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들을 죽일 때마다 얻게 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
“…그게 어느 나라의 언어죠? 전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너희 전부의 죽음을 원한다는 거다. 테사는 거기 도움이 되지만, 너희는 아니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차라리 우리가 마족이라 죽인다는 거면 모를까. 하지만 알았어요, 이안.”
머리통이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우릴 찾아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안이 발을 들었다.
“그래. 나도 기대하겠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얼굴 한복판을 짓밟았다. 머리를 구성하던 내장과 살점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구린내와 피비린내가 번졌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방금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마족들도 나를 알고, 그 뒷배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니.
말하는 걸 봐선, 심판자를 죽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뒷세계의 명성이라도 생긴 건가….’
어쨌든,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들이밀고 구구절절 설득하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이안은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샬롯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샬롯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대체….”
“뱀파이어 여제 같아. 진혈의 주인.”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깨어나 있었냐?”
“응, 조금 전에.”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다시 샬롯의 앞에 주저앉는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감동이네.”
“……?”
가방에서 새 붕대를 꺼내던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날 팔아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난 또 뭐라고.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한 거지. 쓸데없는 착각 하지 마라.”
“하지만 내가 볼 때, 뱀파이어 전체를 적으로 돌려서 이안이 얻을 게 없는 걸.”
없긴 왜 없어. 오를 경험치가 몇이고 클리어할 퀘스트가 몇 개인데.
콧방귀를 뀐 이안이, 붕대를 들며 내뱉었다.
“헛소리 말고 땔감이나 모아 와라. 오늘은 여기서 잘 거니까.”
“그래!”
튕겨 오르듯 일어선 테사이아가, 문득 샬롯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마워. 둘 다.”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주우러 달려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