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한 시간쯤 됐습니다.”
아스켈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안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이안은 녀석의 얼굴이 묘하게 더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덩치도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이러다 금방 다른 놈들처럼 우락부락해지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이주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정착지에 저희가 쓸 공간을 마련해 뒀더군요. 이안 님께서 다녀가셨단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정착지의 전사들이 이안에게 도전했었다. 물론 전부 두들겨 맞았지만.”
전사들과 반가움의 눈빛을 주고받던 샬롯이 덧붙였다. 발레리와 눈빛을 교환한 아스켈이 피식댔다.
“저희도 들었습니다. 뭐든, 직접 겪어 봐야 믿을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무튼….”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모두?”
“예. 설원 지대를 지나는 동안 마물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거든요. 다들 카르하께서 지켜주셨다 여겼지만, 글쎄요. 제가 볼 땐 여러분들이 저희가 갈 길을 미리 정리해 주신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다들 감사하고 있지만요.”
어깨를 으쓱인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이주를 하지 않았거나 조금만 늦었다면, 저희 모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거든요.”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대는 사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입을 열 찰나였다.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군.”
이안이 말을 자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듣던 용병들이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2층에 있는 놈들 전부 내려보내.”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스켈을 제외한 나머지 네 야인 전사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아스켈과 오붓하게 대화하고 싶은데. 아무도 2층에 못 올라오게 계단을 지켜 줄 수 있겠나?”
“예…!”
전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발레리가 맡겨만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 이제 눈빛에 잔머리 굴리는 게 안 보이네.
이안이 낮게 피식대는 사이.
우당탕-
계단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둘러업은 용병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부상자의 숫자가 수상할 정도로 많다는 걸 깨달은 듯, 전사들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샬롯과 테사의 작품들이다. 난 구경만 했어. 올라가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는 그를 향해 여급이 재빨리 덧붙였다.
“술 한 병 올려 드릴까요?”
“좋지.”
대답하며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튕긴 이안이, 소란스러운 장내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야인 친구들 식사도 챙겨주고, 여기 있는 놈들한테도 전부 술 한 잔씩 돌려.”
***
“확인 끝났어. 계단 앞은 덩치들이 지키고 있고.”
여급의 뒤를 따라 들어온 테사이아가 침대에 펄쩍 뛰어올랐다.
샬롯이 마주 앉은 이안과 아스켈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여급은 능숙하게 술병과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이안은 아스켈이 쥐려는 잔을 빼앗아, 그 안에 물을 채우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하려던 얘기나 해봐라.”
“…예.”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이안 님이 떠나시고 한 주쯤 지나서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물건들을 많이 버리고 왔거든요. 영감님은 들은 척도 안 하셨지만요.”
노인네, 어지간히 밀어붙인 모양이군.
우르드를 떠올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장벽 요새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엔, 불만을 가지던 사람들도 오히려 영감님께 감사하게 됐습니다.”
아스켈이 천장에 등잔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이안과 샬롯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북쪽 저 먼 하늘에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거든요. 눈보라가 칠 건 알았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래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죠. 밤이 밀려오는 것처럼요.”
“……?”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현상 같진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희 마을도 그 어둠에 삼켜졌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 안에 계속 있었다면 좋은 꼴을 보진 못했겠죠.”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에선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용의 마법인가.’
이름 모를 고대의 용이 깨어났으리란 건, 망령들이 산맥으로 집결 중이란 얘길 들었을 때부터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여왕과 악마가 모두 죽은 이상, 거인 왕국의 망령들을 지배할만한 건 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놈의 존재 자체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어쨌건 당장 놈과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괴물이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게임에서 그가 다른 용과 싸운 건, 3 챕터 막바지 무렵이었다.
그놈은 형벌에 가까운 봉인을 당한 터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약점도 훤히 노출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끔찍하게 강했다.
이안에게 가장 많은 게임 오버 화면을 선사한 보스 중 하나일 정도였다.
심지어 약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데미지를 입힐 수도 없었다.
물리 저항은 물론 속성 저항력도 엄청나게 높았으니까.
그러니 2 챕터에 불과한 지금 용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형평성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퀘스트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어쨌건 거인 여왕은 엄연히 게임에도 존재하던 보스였으니까.
하지만 용이 모종의 마법으로 망령 군단을 지원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전개였다.
물론 이것도 이안의 예상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거인 여왕을 죽였으니, 그 나비 효과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조건부 보스를 죽였는데 메인 퀘스트가 오히려 더 어려워질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하냐고….’
게임에서도 이랬던 거라면, 제작자는 악마 같은 새끼였을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치면서 쾌감을 느끼는.
‘하긴. 애초에 그런 요소가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이런 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이안이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는 사이, 아스켈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관문 요새에서, 이안 님을 알고 있다는 분도 만났습니다.”
“…루카스 경?”
“예. 아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곧 카링기온으로 갈 거라 했었는데.”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운이 좋았다고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 그분은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거든요. 아무튼, 이안 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경고하신 바가 현실이 된 것 같다고. 최대한 대비해 두었으니, 염려 마시라고요.”
“흠….”
이안은 침음을 삼키며 술잔을 들었다.
그가 경고한 건 정신 나간 망령 군단이지, 알 수 없는 마법과 함께 밀려오는 망령 군단이 아니었으니까.
“…느낌이 좋지 않군.”
묵묵히 듣던 샬롯이 읊조렸다.
동의하듯 그녀를 돌아본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저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쯤, 그 먹구름이 장벽에 닿았을지도 모르고요. 물론 장벽이 뚫리는 일은 없겠지만….”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아스켈은 물론 샬롯도 잠시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장벽 요새가 함락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스켈이 이윽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어쩌면. 아마도.”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
“내가 왜?”
“……?”
아스켈의 어리둥절한 시선에, 이안이 나지막히 코웃음을 쳤다.
“난 일개 용병일 뿐이야. 그런 거대한 문제는 자치령에서 해결할 일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카링기온에 주둔 중인 군단이 절반만 나오더라도, 망령 군단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정말 북부가 위험해진다면 제국에서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스켈을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원이 오더라도, 북부가 난장판이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면, 대비해야지. 너희 터전을 지킬 수 있도록.”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물론 내게 의뢰한다면 거절하진 않을 거야. 너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탁,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이 아스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쩔 테냐?”
“…….”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잠시 입을 뻐끔댄 아스켈이,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군요. 이안님 덕분에 목숨을 구해놓고, 또 당연하게 의지하려 하다니. …새로운 터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시 떠날 수는 없죠.”
읊조리듯 말한 그가, 이윽고 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희는 저희대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습니다. 만약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이안님께 의뢰하는 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겠습니다.”
냅다 받아들여서 퀘스트가 생길 줄 알았더니. 헛다리 짚었군.
생각과 달리, 이안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물론 그는 망령 군단과 싸울 생각이었다. 다만 거기에 정의감이나 사명감 같은, 어떤 거창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싸우려는 건 그저, 퀘스트와 경험치 때문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뭔가 굴러들어오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생각하며 술잔을 비운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출하군. 내려가자.”
“…예.”
아스켈과 야인 전사들은 다음 날 오전 곧바로 정착지로 돌아갔다.
다급한 얼굴의 파발이 트라벨가를 가로지른 건, 그로부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상인들이었다. 내성으로 들어간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것인지 알려지기도 전에, 그들은 채비를 꾸려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상인들은 위험을 돈 냄새만큼이나 빠르게 감지하는 자들이니까.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저들의 생각은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불바다에 휩쓸리는 건 피하고, 불이 다 타면 돌아와 그 사이에서 이문을 챙기려는 것이리라.
상인의 뒤를 이어 반응을 보인 건 용병들이었다. 그들 역시 트라벨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기 남아있다간 정체 모를 괴물들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
차라리 변방 전쟁에 합류하는 게 생존과 수익에 모두 유리하단 계산일 터였다.
그런 변화가 휘몰아치는 건, 이안 일행이 머무는 설산 두꺼비 여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오….”
정오쯤 느지막이 방을 나선 이안을 맞이한 건, 짐을 들쳐 맨 일련의 용병 무리였다.
밤중에도 우르르 눈치를 보며 도망을 나가더니. 오늘은 아예 죄다 짐을 싸서 방을 빼고 있었다.
“야, 임마. 골론, 진짜 날 두고 그냥 가는 거냐?”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고 걷지도 못하는 널 업고 그 먼 길을 갈 수는 없잖냐. 걱정 마. 방위군도, 팔다리 부러진 놈까지 동원하진 않을 테니까.”
“이 의리 없는 새끼…! 그래, 썩 꺼져라! 촌놈들 눈먼 칼에나 맞아 뒈지길 루 솔라께 기도하마!”
“축복 고맙군. 잘 살아라.”
아주 의리가 넘치고 훈훈하네.
복도 곳곳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촌극을 한 귀로 흘리며 가로지른 이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점도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낸 용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장, 정말 같이 안 갈 거요? 지금 결정 안 하면, 우린 이대로 조시프네 패거리로 붙을 거요.”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같이 가자니까? 당장 내일부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게 될 수도 있다고.”
몇몇 용병들이 말을 건네는 건, 구석 테이블에 앉은 트루드였다.
놀랍게도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콧방귀를 뀐 트루드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개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꺼져라. 너희 아니라도 기분 개 같으니까.”
“왜 그렇게 개 같은 건데?”
그의 건너편에 걸터앉으며 이안이 물었다.
바로 옆 테이블의 용병이 튕겨 오르듯 일어서 자리를 비켰다.
움찔한 건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야인 전사들이 다녀간 뒤로, 이안을 보는 그의 눈빛은 또 한 번 달라졌다. 무슨 역사에 나올 위인을 대하듯 어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북부의 대전사라는 말을 들은 것이리라.
“그게…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건지 다들 알게 됐소.”
주저하며 말한 트루드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여급이 새로 가져다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장벽이 무너졌나?”
“……?!”
놀란 눈으로 술잔을 내려놓은 트루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