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먹구름 자욱한 하늘 아래.
“어머니….”
“루 솔라여… 부디 찬란한 광명으로 필멸자를 굽어 살피시고….”
벨리움으로 향하는 급속 행군에 들어선 병사들의 사기는, 시작부터 바닥을 치고 있었다.
기도와 중얼대는 목소리가 연신 이안의 귓가를 스쳤다.
“생각 잘 못 한 것 같은데….”
“무조건 죽겠군… 제기랄….”
그건 이안의 뒤를 따르는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 한들 바꿀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닌 데다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선 고작 10분만 버티면 도착했던 지원군이, 현실이 된 지금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반나절. 한나절. 어쩌면 하루도 넘게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지금은 용이라는 큰 변수도 존재했다.
‘놈이 원하는 게 왕국의 재건이 아니라 복수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망자 군단의 목표는 왕관이 있는 트라벨가나 여왕의 목을 벤 이안일 터였다.
그건 벨리움 요새로 밀려오는 망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서처럼 북부 전역으로 흩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사실이라 한들,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병력이 게임보다 늘어났지만, 망자 군단도 그렇겠지. 그래도 아예 큰 틀이 바뀌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거인 전사 위주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뿐.
게임에서의 기억과 스치듯 본 공략 글의 내용, 그리고 북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행군은 새벽이 되어서야 멈췄다.
기진맥진한 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냄비 여러 개에 보존 식량을 때려 넣은 스튜를 끓였다.
기도할 기운도 남지 않은 병사들이 줄지어 스튜를 배급받았다. 용병들과 함께 줄에 선 이안은, 천막도 치지 않고 모여 앉은 겔루드 장군과 수뇌부들을 힐끗 눈에 담았다.
‘저쪽도 초상집이 따로 없군.’
밀드레드를 포함한 기사들이 그에게 연신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마법사인 게 분명한 두툼한 로브를 걸친 남자도 때때로 뭔가를 첨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표정했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오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알아서들 하겠지.’
저자들도 죽고 싶진 않을 테니까.
용병들이 피운 모닥불에 자리를 잡은 그는, 꿀꿀이 죽이나 다름없는 스튜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장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를 연신 힐끔대면서도, 용병들은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직접 엮인 적은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소문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벨가에 발을 들인 첫날 설산 두꺼비 여관의 용병들을 죄다 두들겨 팬 폭군. 야인 전사들의 존경을 받는 전사. 방위군 소속의 기사가 직접 찾아와 의뢰를 제안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용병.
티르 엔의 성전사라던가 북부의 대전사 같은 믿기 힘든 소문들은 차치하더라도, 용병들의 존중과 두려움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그… 대장.”
용병들의 시선에 떠밀려 입을 연 건, 결국 트루드였다.
단검 날을 닦고 있던 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내뱉었다.
“뭐.”
“술이라도 한잔하고 자면 안 되겠소? 다들 말은 안 해도, 불안해하고 있소. 그냥 두면 새벽에 최소 몇은 도망칠 거요.”
“…….”
이안은 비로소 몇 개의 모닥불에 나눠 앉은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눈빛들.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대로들 해라.”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튀고 싶은 놈은 튀어도 돼. 병사들에게 걸리면 목이 매달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막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몇몇 의 인상이 구겨졌다.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장,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중요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살아남을 자신이 없고 두렵다면 그렇게 해야지. 대신 끝까지 따라오고 살아남은 놈들의 보상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받게 해줄 거다. 계약대로.”
가라앉은 눈으로 용병들을 대충 돌아본 이안이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귀찮게 하지 말고.”
그가 다시 손에 든 운철 단검을 기름 먹인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무심함을 넘어 무책임한 모습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용병들의 표정은 오히려 풀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안은, 그들 모두가 죽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
“…그렇다면야, 뭐.”
서로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용병들이, 이윽고 하나둘씩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육포를 비롯한 보존 식량들이 담긴 포장지도 꺼내져 나왔고, 두런두런 이야기가 번졌다.
“이보쇼. 대충 나눠 드시오.”
몇몇은 곁을 지나가는 초병들에게 술을 건넸다.
평소라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을 테지만. 바로 며칠 뒤면 다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은 그런 경계 따윈 의미 없었다.
“…고맙소.”
술을 받아간 병사가 자신의 모닥불로 가 동료들과 나눠 마셨다.
용병들로부터 시작된 느슨한 분위기가 조금씩 주위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오른 용병 몇몇이 나지막한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우렁차기보단 애잔한 느낌이 드는 가락이었다.
북부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인 듯, 인근의 다른 용병들은 물론 북부인 병사들까지도 중얼대듯 노래를 따라 불렀다.
겔루드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굳이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든 술잔을 홀짝이며 야영지의 병사들을 눈에 담을 뿐.
“…….”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는 건 이안 뿐이었다.
죽으러 간다고 광고들을 하는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트루드의 술을 한 모금 빼앗아 마시고는 그대로 모포에 들어갔다.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 만큼이나 잔잔하게 이어지던 돌림 노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곯아떨어진 자들의 요란한 코골이가 그 빈 자리를 채웠다.
***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행군이 예고 없이 멈춘 건,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숲길 한복판.
“저건 또 뭐야…?”
“야인들 같은데. 지원군인가…?”
앞에서부터 이어진 술렁임에, 이안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열 엎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저것들이….’
행렬 앞을 막아선 일련의 무리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등에 멘 활과 허벅지의 화살집. 모피를 이어붙여 만든 옷과 망토. 저마다 기다란 장창이나 도끼를 손에 쥔, 야인 전사들.
“그러니까, 벨리움 요새에 함께 가고 싶단 말인가?”
겔루드 장군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맥에서 저주받은 망자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대전사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대답하는 건 다른 전사들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 아스켈이었다.
“대전사…?”
“장군께 허락받는 게 아니라…?”
말에 탄 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용맹한 전사들이 합류한다면 환영할 일이지. 북부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음이 감격스럽군.”
기꺼운 얼굴로 말한 겔루드가, 이내 덧붙였다.
“헌데 그대들이 말하는 대전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이지?”
“그건….”
“아마 나를 말하는 걸 거요.”
대답은 아스켈 대신, 겔루드의 뒤쪽에서 이어졌다.
“……?”
고개를 돌린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용병들의 우두머리인 이안 호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 님…!”
전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한 건 그때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들이 이안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
겔루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멈춰 선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휘하의 밀드레드를 통해 알고 있었다.
교단이 그 이름이 기록될 정도의 업적을 쌓은 유능한 용병이자,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그럼에도 곁에 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내심 정말 고귀한 자가 떠돌이 용병 일이나 할 리가 없다 여겨서였다.
물색을 밝히는 모습 역시,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하지만 이 순간, 겔루드는 그 평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 자존심 강한 북부의 야인 전사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북부인 같지도 않은데….’
이안이 그를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잠시 이들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겔루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럴 겁니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전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움찔한 몇몇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선 둘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
“…면목이 없군.”
샬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옆에 선 테사이아가 그녀의 팔뚝을 때렸다.
“없긴 뭐가 없어. 우린 말렸어, 이안. 얘들이 멋대로 난리를 치더니, 대전사를 따라야 한다고 뛰어나온 거라고.”
“…….”
그래, 그랬겠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아스켈이 결연한 눈으로 내뱉었다.
“대전사께서 망자들과 싸우시는데, 저희들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따르게 해 주세요.”
“하….”
한숨과 함께, 이안이 다른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죄다 두들겨 패서 어디 하나쯤 부러뜨리는 게 아닌 이상, 말이 통하지는 않을 것 같은 눈빛들이었다.
‘말은 대전사 어쩌고 하면서, 순 제멋대로라니까.’
왜 이렇게 못 죽어서 안달인지.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북부의 전사들. 이들과 함께 벨리움 요새로 가는 게 첫번째 목표였다.
야만 전사는 북부에서 끝까지 날로 먹었나 보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내뱉었다.
“너희가 다 나오면 마을은 누가 지키고.”
“전사들을 제법 남겨 뒀습니다. 정당한 승부를 통해 결정지었죠. 게다가 노인부터 여인까지 모두 싸울 줄 아니, 별일 없을 겁니다.”
“별일 없긴….”
이안은 아스켈을 잠시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이 놈을 비롯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분위기를 주도한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들이 합류하면 큰 힘이 되긴 할 터였다. 이미 병사와 지휘관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뒤통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기다려라.”
내뱉은 그가 몸을 돌려 겔루드에게 다가갔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저들이 합류하면 정착민들은 위험에 노출될 겁니다. 그러니 남은 주민들은 트라벨가에 들여보내고 싶습니다만.”
“관문을 닫아 버렸을지도 모르니, 통행증을 써 달란 건가?”
“예.”
뜻밖의 제안이라는 듯 겔루드가 턱을 긁적였다. 물론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는 부탁이었다.
곧바로 말에서 내린 그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보아하니 저들은 자네 말만 들을 것 같은데. 임시 백인 대장으로 임명하겠네, 이안 경. 오늘부턴 회의에도 참여하게.”
“…그러죠.”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하자, 겔루드가 한쪽 장갑을 벗었다.
중지에 인장이 새겨진 반지가 드러났다.
“통행증은 바로 만들어 주지.”
겔루드가 기사들에게로 몸을 돌리는 사이, 다시 전사들에게 돌아온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들었겠지. 정착민들은 전부 트라벨가로 보낼 거다.”
“감사합니다, 대전사님…!”
이안은 대답하는 아스켈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이끌고 가는 건 네 역할이다, 아스켈.”
“예…? 하지만-”
눈을 치켜뜨는 아스켈을 무시한 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 녀석을 도와라. 바로 움직여. 반항하면 끌고라도 가.”
“그러지.”
대답한 샬롯이, 망설임 없이 아스켈의 뒷목을 후려쳤다.
휘청 쓰러지는 녀석을 그대로 붙잡아 어깨에 들쳐 맨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트라벨가에서 기다리겠다.”
“무사히 돌아와야 돼. 이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테사이아가, 겔루드에게로 향하는 샬롯의 뒤를 따랐다.
“…….”
이안은 남은 전사들을 눈에 담았다.
발레리는 물론, 회색 계곡 출신이라던 볼베르도 끼어 있었다.
나한테 얻어터진 놈들 투성이군.
“명령 똑바로 따라라. 멋대로 굴면 어디 하나 부러질 줄 알아.”
이윽고 내뱉은 말에 전사들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농담 아닌데.
생각하며 한숨 쉰 이안이, 행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라 와라. 우린 맨 뒤니까.”
***
벨리움에 도착한 건 이른 새벽이었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곧바로 쉴 수는 없었다.
겔루드 장군은 곧바로 요새의 상태를 확인하고 수성을 준비했다.
굳게 닫힌 관문 위로 몇 겹의 빗장이 더 덮였다. 해자에는 오물 대신 땔감과 기름이 부어졌고, 성벽과 망루 위에는 투척을 위한 바위가 켜켜이 쌓였다. 준비해 온 몇 개의 노포도 적당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망자 군단을 맞이할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고서야, 이안을 비롯한 병사들은 간이 막사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물론, 휴식은 길지 않았다.
“……!”
불현듯 눈을 뜬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막사를 돌아본 그가, 이내 발치의 트루드와 발레리를 걷어찼다.
화들짝 깨어난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전부 깨워. 당장.”
“갑자기 그게 뭔….”
멍하니 되묻던 트루드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설마…?”
“그래.”
느슨하게 풀어뒀던 흉갑의 이음새를 조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놈들이 온다.”
서로를 돌아본 트루드와 발레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 올랐다.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데엥- 데엥- 데엥-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