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막아-! 화살을 쏴!”
사색이 된 지휘관이 성벽 아래로 다가오는 거인 전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성벽은 놈들을 막기 위해 쌓았음을 증명하듯 더 높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두개골 위에 살점만 얇게 펴 바른 듯한 끔찍한 머리가, 그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놈이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으아아아-!”
병사들이 놈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날려 댔지만 역부족이었다. 거인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비켜라-!”
소리친 건 전신에 붉은 신성력을 머금은 야인 전사였다. 투창 자세를 잡은 그가, 어금니가 으스러지게 이를 악물며 창을 내던졌다.
쒸에엑- 퍼억-!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의 몸이 기우뚱 뒤로 밀려났다. 치켜든 놈의 얼굴 한쪽에 창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죽은… 건가…?”
병사 하나가 내뱉을 찰나, 거인이 자세를 다잡았다. 놈이 분노한 숨소리를 내며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광대를 꿰뚫은 창대에서 부스러진 살 가루가 떨어졌다.
“…힘이 부족했나.”
야인 전사가 혀를 찰 찰나였다.
“아니. 잘했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이안이 내뱉었다. 그가 그대로 거인을 향해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단죄의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지직-
검날이 거인의 머리를 갈랐다. 정수리부터 턱 윗부분까지 완전히 쪼개진 거인의 몸이 휘청대며 허물어졌다.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머리를 힘껏 박찼다.
붉은 궤적이 포물선을 그렸다.
촤아악-!
성벽 위에 미끄러지듯 착지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떡 벌린 기사를 바라본 그가, 곧바로 내뱉었다.
“던질만한 창, 더 없나?”
“이, 있을 겁니다. 인원수 몇 배로 챙겨 왔습니다.”
기사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야인 전사를 턱짓한 이안이 내뱉었다.
“그럼 최대한 전부 성벽 위로 올리라고 해. 이 녀석들이 거인을 저지해 줘야 하니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야인 전사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로 안 되면, 여러 개 던져라. 그러다 보면 내가 올 거야.”
“예, 대전사…!”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이안은 이미 저만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또 다른 거인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콰직-! 퍼엉-
‘또 한 놈….’
거인의 눈두덩이 깊이 찔러 넣은 검날에 진공 폭발을 시전한 이안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박차고 솟구쳤다.
투쟁의 축복과 바람 칼날에 더해 집중력과 육감까지 고도로 발휘된 그는, 지금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면 엄청난 근육통과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무기력감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살아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터억-
성벽 끝에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발레리.
이안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분의 창이 성벽 위로 올라올 거다. 거인이 다가오면 그걸 집어서 대가리가 부서질 때까지 던져. 시간만 끌어도 돼. 내가 올 테니까.”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는 멈추지 않고 성벽 앞의 상황을 훑었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성벽에 도끼를 박아 넣는 데 성공한 거인 전사는 나오지 않았다.
게임의 벨리움 항전 퀘스트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거인 전사들이었다.
놈들은 성벽을 부수려 하는 데다가, 성벽에 붙어 있기만 해도 언데드들이 놈들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성벽 위로 뛰어들기 때문이었다.
계속 방치하면 끝내 이 낡아빠진 성벽을 부수는 데에 성공했고, 그때부터는 상황이 더 피곤해졌다.
언데드들이 그 사이로 기어들어 가 요새 내부로 침투하는 데다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뒤에서도 병사들을 덮쳤으니까.
그때쯤 되면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안의 일 순위 목표는 처음부터 거인 전사였다.
그것만 제대로 수행해 내더라도, 전투의 균형을 유지하는 무게추의 역할을 해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셈이었다.
콰직-!
“돌을 계속 떨어뜨려! 이봐 보급대! 돌 계속 운반해! 우릴 다 죽일 셈이야?!”
“기어 올라온 놈들과 싸울 때는 야인 전사들 옆에 붙어! 보조만 맞춰라!”
사방이 고함과 비명, 폭음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전황은 전혀 나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야인 전사들도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콰직-!
“카르하여-!”
전신에 신성력을 머금은 그들은, 말 그대로 야만인처럼 날뛰었다.
이안이 그들을 넓게 퍼뜨린 덕분에, 언데드들이 기어오르는 상황 속에서도 전선에 구멍이 뚫리는 일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소 위기에 처한 전선이 있더라도, 그 상황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콰직-! 빠각-!
붉은 궤적을 흩뿌리며 달려온 이안이 망자들을 말 그대로 분해해 버리고는 지나쳤으니까.
“저것이 북부의 대전사….”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조차 듣지 않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뇌리에, 불과 한 시간쯤 전까지만 해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번지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
‘저 새낀 언제까지 주문만 외우려는 거지.’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준비하기에.
바닥을 구르며 혀를 찬 이안이, 관문 망루 위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화염구를 연신 날려 대던 놈은, 좀 전부터 지팡이를 치켜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력의 응집이 느껴지는 걸 보면 주문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북부의 초인이여-!”
저만치의 성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거인과, 놈을 향해 창을 내던지는 야인 전사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으니까.
‘시발, 하필 또 반대편이야….’
이를 간 이안이 성벽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내달렸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높아진 민첩과 집중력, 육감을 믿고 움직일 수밖에.
퍼석- 콰직-!
성벽 위로 올라온 언데드 몇을 박살 내며 도착한 이안은, 이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벽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을 때, 거인 전사는 이미 머리 위로 치켜든 도끼를 내리치고 있었다.
둔탁한 궤적을 그리는 도끼날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한번 해 봐?’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아래로 비스듬하게 화살처럼 몸을 날린 이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후우웅-
커다란 도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이 회전하던 그대로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카드득-
검날이 도끼를 움켜쥔 거인의 손목을 비스듬히 가르며 떨어졌다. 잘린 손목을 매단 도끼가 성벽에 움푹 틀어박혔다. 중간에 손목이 날아간 덕에 힘이 끝까지 실리지는 않은 채였다.
그사이 회전하는 이안은, 거인의 얼굴 한복판에 부딪히고 있었다.
퍼억, 끔찍한 촉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짧은 순간. 이안은 단죄의 검을 냅다 내리찍었다.
콰직, 거인의 입술 옆에 검날이 틀어박혔다. 놈의 새파란 안광이 얼굴에 매달린 이안을 좇았다.
검 자루를 쥔 채 훌쩍 몸을 돌려 놈의 입술에 발을 얹은 이안이, 잿빛 마력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퍼엉.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거인의 안면이 움푹 바스러졌다. 거인의 머리를 박찬 이안이 성벽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턱,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성벽 끝에 걸렸다.
“대전사…!”
야인 전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재빨리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회색 계곡의 볼베르.
“하아… 하아….”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이안이 숨을 헐떡였다.
‘개 힘드네, 진짜….’
입에서 벌써 단내가 나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저릿했다. 전투의 한복판이라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마 지독한 편두통이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때 나타나는 흔한 부작용.
투쟁의 축복은 분명 그의 신체 능력을 초인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줬지만, 그렇다고 정말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게 발동된다는 건, 그만큼 개 빡센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 거 아니야…?’
지금까지 본 카르하의 성격상,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에야 축복을 내려 주고서, 대전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게임의 요소가 억지스럽게라도 현실성을 갖춘다는 사실을 미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낮은 확률이라는 모호한 문구가 있는 스킬이니 더더욱.
“괜찮으십니까? 저희한테는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그때 볼베르가 그를 일으켰다.
“꼬우면 네가 대전사 하든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이안은 그가 건넨 수통을 받았다. 어쨌건 무모한 짓을 한 보람은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거인의 도끼는 성벽에 얌전히 박혀 있는 게 아니라, 성벽 윗부분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을 테니까. 아마 이 녀석은 물론이고 주위의 병사들도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을 터였다.
헐떡이며 술통을 입에 가져간 이안은 이내 눈썹을 치켜들었다.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오히려 좋은데…?’
좋은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술을 들이켜는 사이.
콰르르르르-
마법사의 주문이 마침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통을 입에 댄 채 그 광경을 돌아본 이안의 입꼬리가, 비로소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가 했더니.’
지팡이 끝에서 뚝뚝 떨어져 번져나가는 샛노란 불길은, 틀림없는 화염 해일이었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마법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이안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파도였다. 혼돈력과 정수의 증폭을 모두 거쳐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주문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주문의 위력을 최대한 증폭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콰르르르-
넘실대는 불길이 주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성벽으로 밀려들던 망자들이 해일에 휩쓸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
망루 끝에 선 마법사가 피를 토하며 휘청댄 건, 해일이 성벽 앞을 한차례 전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밖으로 떨어지려는 그를 경호병들이 간신히 붙잡아 안아 들었다.
‘그전에도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었을 텐데. 애썼군.’
수명이 몇 년은 줄었겠는데.
피식한 이안이 통제를 잃고 마구 날뛰는 불길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사가 마력 탈진을 무릅쓰고 상위 마법을 펼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남은 망자 군단 대다수가 불길에 휩쓸려 사라졌고, 지금도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다들 멈추지 마라! 저 저주받은 괴물들의 끝이 보인다!”
겔루드 장군이 소리쳤다. 살아남으리란 희망에 찬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
이안이 문득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본 건 그때였다.
흔적만 남은 손바닥의 낙인이, 문득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마력의 흔적도 없는데…?’
미간을 찌푸리던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내내 성벽 인근에만 집중한 터라 보지 못했던 저 너머의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둠과 넘실대는 먹구름.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이 요새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토록 선명하던 어둠의 장막이, 정작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드리운 것이다.
“저, 저기…!”
“맙소사, 루 솔라여….”
변화를 눈치챈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염 해일이 잦아들자, 병사들도 주위가 어느새 한밤중처럼 어두워졌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계곡의 나무들이 활활 타들어 갔지만,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병사들이 탄식한 건, 그저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런… 미친….”
계곡 저 너머에 일렁이는 수많은 푸른 안광들.
지금까지 상대한 것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망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아주 천천히.
“하하, 시발. 끝이 없잖아…?”
“우린 다… 죽을 거야….”
찾아올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채 저 계곡 너머의 망자들을 응시하는 가운데.
오직 이안만이 넘실대는 먹구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아귀의 낙인이 욱신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혼돈의 파편 역시 꿈틀대고 있었다.
무언가에 공명하는 것처럼.
“……!”
이안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숨이 턱 막히는 거대한 마력이 불현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한순간에 생겨났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설마….’
먹구름 한복판을 응시하는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지는 가운데.
-■■내… 찾았노라….
뇌리를 울리는 사념이, 전장을 침묵으로 물들였다.
그 사념의 의미를 일부나마 이해한 건 이안뿐이겠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오오오-
갈라지는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미동도 없던 그 한복판에서 푸른 빛이 푸스스, 피어올랐다.
거대한 안광이었다.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린 다음 순간.
눈을 뜬 용이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