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시발….’
재와 뼈가 가득한 서걱대는 땅을 밟으며, 이안은 탄식을 삼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건 일종의 본능이 보내는 경고였다.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는.
그건 눈이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이기도 했다.
저 앞에, 날개 달린 거대 괴수들이 한데 뒤엉켜 날뛰고 있었으니까.
콰아아- 쿠우우-
놈들이 맞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들썩이고, 충격파가 이안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준 높은 주문이나 권능 따위가 만들어 내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저 두 용의 힘과 마력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여파일 뿐.
‘정말 가기 싫어지네….’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굳이 달리지 않는 건, 당장은 별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저 괴수들의 사투가 조금은 진정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이에 들어갔다간,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이 날 테니까.
콰아아-
그런 바람과 달리, 두 용의 격돌은 점점 더 격해졌다. 빛을 반사하면 노랗게 빛나는 아르케아스의 비늘이, 타후므리트의 발톱에 찢겨 후두둑 튀어 올랐다. 아르케아스는 그런 놈의 등을 날개로 내리찍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타후므리트가 골격이 훤히 드러난 날개로 그를 후려쳐 밀어냈다.
타락용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껍데기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탈피한 것처럼, 뼈와 근육만으로 이루어진 끔찍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뼈와 근육 사이로, 보랏빛이 섞인 푸른 마력이 핏줄처럼 일렁이고 번쩍였다.
서로를 향해 짧게 포효한 두 용이,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충격파.
고개를 숙여 견디면서,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건 두 용의 크기와 형태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얼마나 강하고 빠르기까지 한지도 와닿았다.
단순한 근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저것들이 나누는 일격 일격에 담긴 마력은, 매번 그가 가진 마력의 총량보다도 많아 보였다.
솨아아-
물론 그의 전신을 감싼 신성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넘치고 감각이 허물을 벗듯 예민하고 선명해졌다.
단죄의 검 역시 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손에 감겼다. 티르 엔이 내리는 신성력은 갈수록 짙어져서, 이젠 푸른 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손에 든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사실들이 이안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진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즉사일 것 같은데.’
그가 인간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저 살아 움직이는 천재지변들을 상대로 겁 없이 날뛰다간, 신성이 서린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리라.
그렇다고 멀리서 마법을 쏴 댈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가장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시전하는 마법 따위, 저 타락용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을 테니까.
‘결국 접근해서 나는 안 맞으면서 신성력으로 쑤셔야 된단 건데.’
말로만 쉬운 얘기였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호각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놔두면 끝내 패배하는 쪽은 아르케아스가 될 것 같았으니까.
퀘스트가 그런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여긴 타후므리트의 권역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이 권역이 놈에게 어떤 식으로든 힘을 부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백금룡이 권역부터 정화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권역의 정화하는 동안 타후므리트가 자신을 노리기를 바랐으리라.
하지만 타락용은 광기에 물든 와중에도 옳은 선택을 했다.
백금룡을 공격하는 대신, 자신의 권역을 지키는 걸 우선한 것이다.
이미 오염된 권역을 유지하려는 쪽과 정화하려는 쪽이 맞붙으면 전자가 더 유리한 건 당연한 일.
아르케아스가 먼저 타후므리트에게 달려든 건 그래서일 터였다.
‘용도 마력이 정말 무한하지는 않은 거야.’
하늘에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회수하지 않는 건, 그 순간 뒤가 없어지기 때문일 터였다.
소모전에 돌입한다면, 강대한 권역을 이미 소유한 타후므리트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테니까.
여기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작전상 후퇴겠지만, 아르케아스는 대신 놈과 맞서는 걸 선택했다.
이유야 어쨌건, 이안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물러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어쩌면 북부 전체도.
‘그래서 물러나지 않은 건가…?’
어쨌든, 아르케아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같은 의미에서, 이안도 그를 도와야 했다.
콰앙-!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를 덮쳐 땅에 내리찍은 건 그때였다. 놈의 앞발이 백금룡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날개를 펼쳐 목덜미를 보호하던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문득 저만치의 대지를 훑었다.
붉고 푸른 신성력을 두른 인간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더는 다가오지 말거라, 고귀한 자여…!
이안의 뇌리로 다급한 사념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제국 공용어였다.
-네 의지는 숭고하며 고결하나, 끝내 죽음만이 기다릴 지니…!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죽거든?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하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르케아스의 날개를 물어뜯으려던 타후므리트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제■■… ■■오다니… 고■■나….
사념과 동시에 놈의 아가리로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밑에 깔려 있던 아르케아스가 다급하게 몸을 틀어, 앞발로 타후므리트의 턱을 떠밀었다.
콰아아아-
숨결이 치솟아 올랐다. 잿빛에 가까운 냉기가 구름 바로 아래까지 치솟다가, 그대로 결정이 되어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쏟아졌다.
타타탓-!
이안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의 시선은 타후므리트의 훤히 드러난 목뼈와 그 아래로 굵고 길게 이어진 쇄골에 고정되어 있었다.
쩌엉-!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의 앞발을 쳐낸 건 숨결을 모두 토해내고 난 다음이었다.
쿠- 확-!
그때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은 이미, 놈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푸른 섬광이 타후므리트의 거대한 목덜미를 훑었다.
카가가가각-
불똥 같은 푸른 신성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성력이 실린 단죄의 검으로도 용의 뼈를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뼈에 붙은 근육 줄기들을 베어내고, 새카만 뼈에 할퀸 듯한 흔적을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캬오오오오-!
하지만 타후므리트를 분노하게 만들기엔, 그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날파리가 위험해서 거슬리는 건 아니거든.’
생각하며 눈을 빛내던 이안이, 다급하게 허공을 박찼다. 울부짖음과 동시에 타락용의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쩍 벌어진 뼈 사이로 휘몰아치는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푸화악-!
스친 것만으로도 이안은 바닥에 처박히듯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이안은, 몇 차례 튕기고서야 간신히 착지했다. 이걸 낙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죽지는 않았다.
투쟁의 축복 덕분이리라.
가슴이 뜨끔거렸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불만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오히려 팔다리가 무사한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주위로 얼음 파편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한가롭게 그것들이나 막아낼 틈은 없었다.
‘이런 시발….’
콰아아아-
헛발질을 한 타후므리트가, 이번엔 반대로 몸을 꺾으며 그를 향해 날개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뼈와 근육만 붙은 너덜너덜한 날개라는 사실은,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주위에 가득 일렁이는 마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벽 같은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저기 휩쓸리면 몸으로 다이빙하는 수준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공격 두 번 만에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혼돈력을 불어넣어 휘몰아치는 방벽을 펼쳤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서리 방패나 빙하 방벽은 의미가 없었다.
돌개바람이 에어백 역할을 해 주며, 그를 튕겨내 주길 바랄 뿐.
콰과과과-
하지만 언제나 그를 지켜 준 돌개바람은, 용의 날갯짓에 맥없이 찢겨나갔다.
밀려드는 거대한 뼈들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쩌저저정-!
피어오른 황금빛 역장이 이안의 앞을 뒤덮은 건 그때였다. 몇 장은 그대로 날개뼈에 휩쓸려 터져 나갔지만, 그 사이의 마력으로부터 이안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콰지직-!
동시에 아르케아스가 타후므리트의 목덜미를 물며 솟구쳤다.
타후므리트의 관심이 이안에게 쏠린 빈틈을 정확히 노린 것이다.
두 거체가 치솟는 사이, 역장이 바스러졌다.
하지만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
이안은 단 한 장만 남은 육각형의 역장을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그의 장갑 손등 부분에 황금빛 진언이 맺혀 일렁이고 있었다. 진언에 담긴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거기서부터 마력을 공급받는 게 분명한 한 장의 역장은, 마치 커다란 방패처럼 이안의 팔뚝 위에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떠 있었다.
“이게 진짜 기사 버프인가…?”
이건 그냥 티르 엔의 가호고?
신성이 아른거리는 단죄의 검을 내려다본 이안이, 설핏 실소했다.
황금빛 마법 방패에 성검이라니.
콰아아앙-!
그사이 아르케아스에게 목덜미를 물린 타후므리트가 땅에 떨어졌다. 아르케아스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놈의 목을 놓지 않았다.
타후므리트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발톱과 날개로 아르케아스의 몸통을 후려치고 할퀴었다. 백금색 비늘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
검을 고쳐 쥔 이안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둘에게는 작은 솟구침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성벽에서부터 내내 달리기만 하네.’
이번에는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저만치에서 수많은 푸른 안광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르케아스의 숨결에 휩쓸린 뒤론 지켜보고만 있던 망자들이, 죄다 이안을 향해 달려왔다.
타후므리트의 명령일 터였다.
아르케아스와 싸우는 동안, 날파리 같은 원수의 발을 묶어 놓으려는.
두 용의 몸부림에 휩쓸린 놈들이 마구 터져 나가고 있었지만, 망자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투쟁의 축복이 끓어 올랐다.
“아아아아아아-!”
시발. 의지와는 관계없는 함성을 토해내며, 역장 방패를 치켜든 이안이 선두의 언데드와 맞부딪혔다.
콰장창-!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방패로 몇 놈을 밀어 버린 이안이, 왼팔을 후려쳐 그 뒤의 망자 두어 마리를 동시에 산산조각 냈다.
그제야 비로소 단죄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퍼석-! 콰직-!
푸른 빛이 쉴 틈 없이 어둠을 수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호선에 휘말린 망자들이 터져 나갔다. 검을 휘두르며 만들어진 반동은 방패 강타로도 이어졌다. 어느새 시야에 망자 군단이 가득했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베고 휘두르고 후려치고 내리찍는 것의 끝없는 반복.
“그-아아아….”
전투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 전사가 초승달을 그리는 푸른 섬광에 허리가 잘려 허물어졌다.
새파란 곡선과 황금빛 섬광이 춤을 추듯 휘몰아쳤다.
이안의 뒤로 뼈 무더기로 이루어진 길이 쉬지 않고 만들어졌다.
콰장창-!
그러던 한순간,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저 옆에 작은 동산처럼 서로 뒤엉킨 용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를 뚫은 것이다. 아직도 저 너머에서 푸른 안광들이 밀려오고 있는 게 보이긴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끌고 내려온 거야.’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후웅, 아르케아스의 날개가 만들어 낸 충격파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뒤로 따라붙던 언데드들이 거기 휩쓸려 와장창 흩어졌다.
타후므리트는 목덜미를 물어뜯는 아가리를 떨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아래에 깔려 있었다.
좀 전까지와 달리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안의 개입이 전투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복수에 눈먼 용이 끝끝내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놈이 휘두른 발톱을 고개를 젖혀 피한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이, 문득 저 옆에서 달려오는 이안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두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이번에는 물러나라 말하지 않았다.
‘왜, 막상 도움이 좀 되냐?’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타후므리트의 머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생각이 통한 게 분명했다. 아르케아스는 날아드는 타후므리트의 날개를 막거나 피하는 대신, 그대로 어깻죽지를 내어주며 앞발을 뻗었다. 거대한 발톱이 돋은 발에 짓눌린 타후므리트의 머리가 땅에 내리 찍혔다.
쿠웅-!
굉음에 이어진 충격파를 역장 방패를 들어 막으며, 이안은 놈의 푸른 안광을 마주 보았다.
놈도 이안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푸른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짓눌린 와중에도 타후므리트의 아가리에 마력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집념이 엄청나시군.’
하지만 나도 한 독기 하거든.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안은 두 다리에 더 박차를 가했다.
바람 칼날이 발작하듯 그를 떠밀었다. 거대한 머리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생명체들의 공통적인 약점을 향해 팔을 힘껏 내뻗으면서,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타오르듯 뿜어져 나온 섬광이, 거대한 푸른 안광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