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이번 역은… 이번 역은….
익숙한 진동과 함께 안내 방송이 귀를 파고들었다.
출근길, 지하철 한복판이었다.
“…….”
그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자동문의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눈에 담았다. 문 옆의 손잡이를 쥔 손아귀에 살짝 땀이 묻어났다.
-내리신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는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평소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는 슬쩍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10여 분 이른 시점이었다.
그래. 이 정도만 일찍 나와도 지옥철은 면했었지.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가 익숙했다. 맨 윗단추를 풀어헤친 셔츠도.
열차가 느려졌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문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숨. 짧은 기침 소리.
곧 문이 열렸다. 승객들이 표정과 달리 재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도 플랫폼으로 나왔다. 같은 열차를 탔던 이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흔한 아침 풍경.
그는 그 모습을 차근히 눈에 담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띠딕-
개찰구를 통과한 그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좀 전부터 그의 코를 간질이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의 근원지가 저만치에 있었다.
“하….”
작은 웃음을 흘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만쥬였다. 호두과자도. 틀을 심드렁하게 뒤집던 사장이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드릴까요?”
“…네. 둘 다.”
나지막하게 대답한 그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받아든 카드를 재빨리 긁은 사장이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
“…….”
봉투를 받아든 그는 곧바로 만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듯하고 달았다.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입을 우물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 옆 빵집, 가판에 놓인 온갖 빵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로케나 샌드위치를 먹을 걸 그랬나.
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곁을 스쳐 가는 이들이 이 무슨 냄새인가 하는 눈빛으로 한 번씩 그를 힐끔댔다.
역에서 나올 때쯤, 그는 슬슬 목이 막히는 걸 느꼈다. 마침 저 앞에 카페가 여럿 보였다.
걸음이 곧바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페까지 들르면 기껏 일찍 나온 보람이 사라지겠지만, 지금 그런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는 유명한 프렌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평소엔 가지 않던 곳이었다. 한 블록 옆의 소형 카페 커피가 천 원 이상 더 쌌으니까.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그리고… 딸기 스무디 하나 주세요.”
사이즈는 가장 크게. 마시고 가겠다고까지 내뱉은 그는, 주문을 기다리며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오전의 호사였다.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웅성대는 카페 내부. 테이블에 놓은, 입구를 접어 둔 종이 봉투.
우우웅-
그 모든 광경을 즐기던 한순간, 벨이 울렸다. 그는 곧바로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솔직히 제일 마시고 싶은 건 콜라나 맥주지만….’
생각하면서도, 그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약간 탄 듯한 쓴맛조차 기분 좋았다. 딸기 스무디는 새콤달콤했다. 하, 짧게 한숨 쉰 그가 종이 봉투를 열었다.
그사이 조금 식어 버린, 하지만 여전히 느끼하게 달콤한 만쥬. 그리고 쌉싸름한 커피.
그는 한마디 말없이 그 맛을 음미했다.
“네가 가장 원하던 게 이런 건가?”
내뱉으며, 누군가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특징 없는 인상을 가진.
그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스무디를 마셨다.
싱긋 웃은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렇지 않나?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는군. 탐이 나는데.”
“…….”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리란 건 본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남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남자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다.
스르륵, 얼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반전됐다.
검붉은 빛이 내리쬐는 거리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비정형의 길고 낭창낭창한 검은 실루엣들이 비칠대며 거리를 오갔다.
종이봉투가 바스락댔다. 손을 보니 만쥬 대신 반 토막이 난 커다란 벌레의 몸통이 다리를 꼼지락대고 있었다.
더러운 잔에 담긴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액체.
벌레를 툭 바닥에 던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나는 죽은 건가?”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가 점점 위로 길쭉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변조된 음성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그저 네 꿈이지. 너에겐 이게 더 애석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머리는 더 이상 머리로 보이지 않았다. 파충류의 꼬리 같기도, 촉수 같기도 했다.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정신이 으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이 남자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쩍, 쩌적-
그를 중심으로 보라색 균열이 번졌다. 균열이 빠르게 세상을 집어삼키고, 이윽고 뒤섞였다.
남자도 예외 없이 그 뒤엉키는 혼란 속으로 녹아들었다.
모든 게 흐려졌다.
“언젠간… 또… 다시….”
음성이 노이즈에 뒤섞여 바스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공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
***
물감이 번지듯 의식이 되돌아왔다.
악몽의 잔재가 흐릿하게 뇌리를 스쳤다.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로케에 콜라를 먹었어야 했는데….’
짧은 감상과 함께,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회백색의 낯선 천장이 선명해졌다.
전신을 압박하는 감촉이 비로소 느껴졌다.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지어 팔다리는 부목으로 고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감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반신불수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디 하나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다행이군.’
어렴풋한 기억을 곱씹은 이안은, 방심하지 않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꼼꼼히 확인했다. 불편한 와중에도 감각이 전해졌다.
미구엘은 손목이 날아가도 손이 남은 느낌이라 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꼬물대는 것까지 느껴지진 않았을 터였다.
“하….”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안이 본능적으로 상태 창을 열었다.
남김없이 사라진 능력치 포인트.
그리고 그만큼 높아진 체력 수치.
‘…이래도 힘이 더 높네.’
이안은 덤덤하려 애썼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러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나마 위안인 건 레벨 업 직전까지 오른 경험치였다.
‘퀘스트 보상에 용의 경험치까지 다 들어온 건가.’
그의 레벨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받은 퀘스트는 전부 완수되어 있었다. 보상은 다 합쳐 스킬 포인트 두 개. 그리고 여러 개의 물음표였다. 물음표 보상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현실에서 손에 넣게 되는 전리품인 경우가 많았다.
이안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스킬 창으로 이어졌다.
보상이 들어온 건 분명했지만, 잔여 포인트는 오히려 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생명력 자연 회복 수치를 높여 주는 공용 스킬인 태초의 생명력을 최고 레벨까지 올렸으니까.
다 찍을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쓴웃음이 스쳤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군.’
지금은 살아남은 거에 감사할 시점인데.
하지만 아쉬움을 깨끗하게 밀어낼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망캐가 된 셈이었으니까.
‘…하긴. 이제 능력치만 봐도 도저히 마법사라고는 할 수가 없지.’
어쩌면 단추를 몇 개 완전히 잘 못 끼운 시점부터 예견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바구니를 든 여사제가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제야 장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누운 장식 없는 침대. 마찬가지로 장식이라고는 없는 탁상과 의자. 원형으로 뚫린 창문.
‘어디인가 했더니. 교회였나.’
생각하며, 그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몸이 뻣뻣해서 벌떡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히, 히익…?!”
방을 정리하던 여사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눈을 치켜뜬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이안은 팔을 구부렸다. 으직, 팔을 고정하던 부목이 부러졌다.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하네.
“루 솔라 맙소사…. 정말 깨어나셨군요…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시는 걸 보고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라 여기긴 했지만… 이건 정말….”
그가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 더듬대며 내뱉던 사제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가를 압박하는 붕대를 슬쩍 풀며 내뱉었다.
“페르마 사제를 불러 주시겠소?”
***
이안이 깨어났음을 알게 된 사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안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루 솔라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적의 산물 취급이냐고….’
이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 사이의 페르마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기도를 끝낸 사제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둘만 들어오고, 나머진 돌아가시오. 또 기도하러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평생 앞니 없이 살게 해 줄 테니까, 알아서들 전달하시고.”
“예…!”
맨 앞에 선 사제 둘이 달려 들어왔다. 이안이 양팔을 펼치자, 그들은 말없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이안의 시선이 물러나는 사제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선 페르마에게로 돌아갔다.
“페르마 사제님.”
“예. 말씀하십시오, 이안 경….”
페르마가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눈빛이 퀭했다.
어쨌든, 편하게 대화할 상대는 아니군. 내심 실소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루카스 경이 트라벨가에 와 있소?”
페르마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가서 불러오시오. 그와 얘기하는 게 편하겠군.”
“그… 이안 경.”
“……?”
“경께서 의식을 회복하시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누구?”
페르마가 난처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 분은 울라프 대공 전하이시고 한 분은 교단의-”
“만날 생각 없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하니, 그들을 만나 봐야 장황한 개소리나 들어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난 걸 알리지 마시오. 혹시 알려지면, 방문을 거부했다고도 알리시고.”
단호하게 덧붙인 이안이 턱짓했다.
“가서 루카스 경이나 불러오시오. 페르마 사제님.”
“…예.”
페르마가 한숨을 삼키듯 눈을 감고는 몸을 돌렸다.
이안은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그가 타후므리트를 죽였다고 알려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건 한 올 한 올 정성껏 붕대를 벗기는 사제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의 사도 수준이 아니라, 화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날 새겠군.
“내가 얼마나 잔 거요?”
이안이 불쑥 입을 열자, 사제들이 황급히 손가락을 펼쳤다.
“교회에 도착하신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걸칠 옷과 식사나 준비해 주시오. 이건 내가 할 테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안 경.”
꾸벅 허리를 숙인 사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어쨌거나 거만한 작자들이 쩔쩔매는 꼴을 보는 재미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끼익-
문이 다시 열린 건, 로브를 걸친 이안이 탁상에 놓인 빵과 수프를 거의 다 먹었을 무렵이었다.
“……?”
루카스일 줄 알았건만 또다시 페르마였다. 그의 뒤,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를 눈에 담은 이안이 심드렁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루카스 경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루카스 경께는… 연락을 넣었습니다.”
“방문도 거부하겠다 했었고.”
“그게, 제가 모신 것이 아니라…. 이분은…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페르마 신부가 식은땀을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가뜩이나 퀭해진 얼굴이 이젠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때, 뒤에 선 자가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짝 거둬 눈을 드러냈다.
그 눈동자를 본 이안의 입가에, 이내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그런 거였군…. 들어오시오.”
내뱉은 말에 신경 쇠약 직전이던 페르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걸음질 쳐 물러나는 그를 향해, 이안이 덧붙였다.
“페르마 사제?”
“예, 예에…?”
“복도 끝에서 기다리시오. 아무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루카스 경이 오면 기다리라 전해주시오.”
“예….”
“이번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앞날이 더 피곤해지실 거요.”
“…….”
고개를 숙인 페르마가 물러났다.
베일을 눌러쓴 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자 베일 아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설득할 생각이었거늘. 바로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여자 같기도, 미성의 남자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
“거절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피식한 이안이,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위대하신 백금룡께서, 거절한다고 쉽게 물러나실 리가.”
“바로 알아봐 준 건 기쁘다만….”
멈춰선 그가 베일을 걷으며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베일 아래의 황금색 눈동자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그리 말하니 조금 서운하구나. 우리는 전우가 아니더냐?”